=====28: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 `다하여 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읖세 데'(* )는 일반적인 시간 지시사로서 `이제...후에'(after)라는 말이다. 이를 근로 본문을 좀더 정확히 묘사하면 `이제 안식일이(완전히) 지난 후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막 16:1, 2; 눅 24:1; 요 20:1). 그렇다면 저녁 해질 때(오후 6시경)를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본 상황이 깊은 밤을 거의 다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의 문턱에 이미 들어선 때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이유에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의 이 날을 기념했고 점점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다(요 20장 주제 강해 `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를 참조). 이제 길고 무거웠던 율법의 시대는 마감되고 부활의 주를 중심으로한 새 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에.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은 오늘날의 일요일, 즉 주일을 뜻한다. 즉 이날은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주일로 대체되어 지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 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라할 수 있으니 바로 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을 성수(聖守)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요 20:19,'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 참조).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안식일을 한 주간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개념에 따른 표현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답습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안식일 대신 `주일' 곧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포스코'(* )의 원의미는 `날이 새다', `날이 밝아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적 어법으로 사용 되었을 때 그 의미는, 하루 24시간이 시작되는 해질 때를 뜻한다. 눅 23:54에서도 금요일 저녁을 표시하기 위하여 `에피포스코'가 동일한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유대적 어법과는 거리가 멀다. 즉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 16:2에 보면 `아나테일란토스 투 헬리우'(* ) 즉 `해 돋는 때에'로되어 있어 저녁이 아닌 아침 시각임을 분명히 보여 주
들을 기록함에 있어 다음과 갈은 차이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따라 많은 논의가 분분하다.
=====28:2
큰 지진이 나며 - 2-4절은 마태만의 특수한 기록들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빈 무덤'의 발견만을 언급하지만 본문에서는 여인들이`큰 지진'과 친사가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한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주는것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27:51; 출 19:18; 시 68:8; 행 16:26; 히 12:26). 따라서 여기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부활의 이면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역사하셨음을 의미한다(엡 2:5,6). 27:51에서의 지진이 하나님의 구원의 보증이신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이자 더 나아가 그한계를 드러내고만 율법 구세대(舊世代)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본문에서의 지진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 질서의 구원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진과 돌의 굴림은 예수의 부활의 시점을 알려 주거나 부활한 예수를 무덤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이적들이라기보다 오히려 여인들과 다른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알게 하며 더 이상 죽음 아래 머물러 있을 수없는 예수의 부활의 혼적을 친히 목도하게 하기위함이었다(McNeil). 실로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떨치시고 생명이 충만한 상태로 부활하시어(벧전3:18) 변화된 몸을 입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의 유무(有無)에 상관없이 무덤벽을 조용히 통과해 나가셨던 것이다요 20:19).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 여기 언급된`천사'(1:20-23;18:10)에 대해서는 마가(`하얀 옷을 입은 한 청년')보다 마태와 누가가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사적 존재들은 자주 구약 성경에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으로, 그같은 표현상의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닐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언급한 `청년'은 `천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Lane, Jos, Antiq.V,277).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서는 그 천사가 `하나'인 데 비해 누가와 요한에서는 `둘'로 묘사되었데 이 차이 역시 본 사건이 초가연적 기사라는점에서 각각의 경험과 그 기술하고자 하는 도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봄이 적당 하리라고 생각된다.
그 위에 앉았는데 - 여기`앉았는데'(* , 에카데토)란, 미완료 시상으로서 마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게속 앉아있는 모습을 묘사한(실로 그 천사는 예수 부활의 산 증인으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증, 보존하는 일을 수행했던 일종의 영광스런 도구였던 것이다.
=====28: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 천사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번개 같은 행상'이라는 묘사는 천사의 몸에서 매우 밝고 환한 광채가 나있었다는 것과 `눈 같이 희 옷'에서는 그 존재의 순결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예수의 변형되신 모습(17:2; 막 9:3)을 연상케 하며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묘사한 것과 흡사하다(단 7:9; 10:6; 계 1:13,14).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초자연적인 천사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거룩성과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천사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마다 다양하게 되있는 마가복음에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16:5)으로,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사람'(24:4)으로, 요한복음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24:4)로 되어 있어 천상적(天上的)존재의 신비를 다양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28:4
수직하던 자들이...무서워하여 떨며 - 무덤을 지키도록 배치된 자들(27:64-66)이 지진과 더불어 일어난 천사의 임재 앞에 너무큰 충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들이 예수의 처형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직,간접적의로 듣고 보고 하여 무덤에 묻힌 자의 실체(實體)가 큰 의미를 둘 만큼 대단치 않은 존재라고 방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고, 또 그들어리석은 보호벽(무덤)을 뚫고 예수는 부활셨던 것이다. 진정 그들의 두려움은 죄인이 성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공포였다(창 3:10). 한편 본문의 `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세이스데산'(* )은 `혼들다'는 뜻의 `세이오'(* )의 제 1과거수동형으로 `흔들리게 되었다'는 뜻을 가지는데 27:51 에서 땅의 진동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앞에 선 죄인들의 실존적 모습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사 6:4,5). 이와 더불어 본문에는 수직하던 자들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보고하는데, 아마 그들은 상상을 초월한 눈 앞의 이적들에 압도당하여 잠시 혼절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갈은 잠시간의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 곧장 성내로 달려가 그들의 목격담을 전하게 된다(11절). 진정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훼방꾼이 아니라 너무도 확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고 만것이다. 참고로 계 1:17에는 사도 요한이 부활의 주님을 볼 때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28:5
너희는 무서워 말라 - 천사는 먼저 여인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여기서는 `너희는'(* , 휘메이스)이라는 대명사가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색이 되어있는 무덤지기들은 배제된 채 여인들 에게만 무서워 말라는 말이 주어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두려움에 방치되어 버려질 사람이 있고 두려워 말라고 하는 선택적 위안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못 박히신 예수를...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 천사는 여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천사의 말에서 강조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에수'이다. 즉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강조는 분명한 죽음이 분명한 부활의 전제(前提)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있다 함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결코 외릅게 고립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감찰하시며 함께 하고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에 대한 여인들의 신실함이 인정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8:6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 하나님의 천사는 계시의 중개자로서의 임미를 띠고 있다. 복음서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뜻을 전달시켜주기위해 천사가 꿈에 나타났었는데(1:20 ff). 이와 평행을 이루어 복음서의 마지막에 계시의 중개자로서 또다시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리며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그의 말씀하시던 대로'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으로 12:40; 16:21; 17:23; 20:18, 19절에서 예언한 `부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여기 계시지않고'라는 말은 그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로하는 말이므로 예수가 죽어서 무덤 안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제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바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그가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은 예수의 자력(自力)적인 행위를 강조한 말로서 예수의 신적 전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는 몇몇 성구들(16:21; 17:23; 롬 6:4; 8:11)에는 부활이 성부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의 결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공동 협력에 의한 신적인 승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대목으로 `빈무덤'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의 `빈 무덤'을 인정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28:11-15). 사실 예수가 죽어서 누이었던 자리에 있지 않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즉 예수가 부활했거나 아니면 적대자들의 말처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를 횹쳐갔다고 하는 적대자들시 주장은 모순을 드러내는 바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게 된다(13절 주석참조). 그렇다면 유일한 하나의 가능성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분은 확실히 자신의 예언대로 부활하셨고 죽었던 그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이다(빌 3:21).
=====28:7
빨리 가서 -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그 무덤 앞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천사들은 그 여인들에게 예수 부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황급히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었다. 이는 분명 권유가 아니라 촉급한 명령이었다.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 본문과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7에서는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을 분리시켜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가 마가보다는 베드로를 우호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금의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던 부활의 예언을 망각하고 있거나 불신하고 있었던 제자들에 대한책망의 말씀일 수 있기 때문인데 마가는 베드로를 따로 분리시켜 그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베드로의 대표적 불선을 상기시키고있는 것이다(26:69-74). 실로 베드로는 세번에 걸쳐서 예수를 부인하기까지 했었던 것이다(14:66-72). 그에 반해 마태는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지 않고 제자들 속에 포함시켜 말함으로써 제자들 모두의 공동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것이다. 혹 이 말씀이 책망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실망 가운데서 고독해하고 있을 제자들에게 보내는 기쁨의 소식이라고 해도 베드로에 대한 특별성이 언급되지 않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주의 부활'이라고 하는 기쁨의 소식은 각각의 제자들 모두에게 동일(同一)한 기쁨이 됨을 말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 천사가 여인들에게 거듭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제자들이 이 말씀을 전해들었다면 그들은 아마 26:32의 말씀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를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 따른 성취에 앞서 유대 지경에서 여인들과 엠마오의 두 제자및 소그룹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당신의 공식적인 현현은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갈릴리에서 두 번 나타나시게 된다(16-20장; 요 21장). 이제 갈릴리는 더 이상 어둠과 소외의 현장이 될 수 없었고 복음과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행 10:37).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딩신의 제자들을 대부분 부르셨던 갈릴리를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런(행 1:11) 처소로 만드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가시나니'(* , 프로아게이)는 현재 진행적인 의미가아니라 생생한 미래를 나타내는 말로써 예수께서는 약속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는 뜻이다(1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특별히 본문의 `일렀느니라'(* , 에이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적 선언시에 흔히 사용하던 문구이다. 따라서 천사의 이 말은 계시의 중개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종결 문구인동시에 예수의 부활이 확증적임을 선포하고 있다.
=====28:8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들은 여인들의 혼합된 심리 상태를 묘사해 주고 있다.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8 에서 여인들의 상태를 `놀람', `두려움'의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본문에서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대비(對比)시킴으로써 한편은 천사의 임재를 위시한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예수의 부활 소식에 접하여 `큰 기쁨'을 느끼고 있음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건을 체험할때 생겨나는 심리 상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바 초자연적 사건 앞에 인간은 두려워할수밖에 없으나, 그 사건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자각할 때 한없는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통일되면서 인간은 진정한 신앙적 희열을 느끼게 된다.
제자들에게 알게하려고 달음질할새 - 이 부분도 막 16:8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천사가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말(7절)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본문에서는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들은 후 `큰 기쁨'에 차서 천사의 고지(告知) 사항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달려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와 마태의 교훈적 강조점이 다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마가는 예수의 측근들에게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로마의 혹독한 탄압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날 위기에 처해있는 마가의 공동체에게 제자들처럼 나약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동시에 신앙을 지키지못한 성도들에게는 제자들도 실패했었기 때문에 평범한 신앙인들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일이므로 한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반면 마태 공동체의 경우는 마가에 비해 덜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어두운면보다는 예수의 부활의 기쁨을 기념하고 함께나누고자 하는 뜻에서 기쁨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다.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 예수의 부활 증거로 '빈무덤'에 이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현현(顯現)하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현현을 최초로 목격하는 행운을 부여받은 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여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며 단지 재산 목록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던(출 20:17)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께서 부활 후 처음으로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이자 부활의 증인으로 인정 하셨음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서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여인을 택하심으로 최초의 범죄자 하와의 후손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변하여 큰 소망과 위로가 되게 하셨다(Chrysostom). 한편 예수의 인사말 `평안하뇨' 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인 헬라어 `카이레태'(* )의 번역으로 `기뻐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인사말은 일찍이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때 제자들이 근심하게 될 것이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고 하셨던 예언을 생각나게 해주며 예수 부활 소식을 들었던 여인들이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인 상태에 있었듯이(8절) 예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 에게 있어서도 근심과 기쁨의 감정을 교차케 해주는 역설적 사건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이 말씀은 이제는 두려워 말고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자들이...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이와 같은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인 존경과 경외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다. 즉 이 여인들의 이 갈은 행위는 결단코 공포나 어떤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취한 피동적인 경배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 서 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방금 전해들은 그 여인들이 변화된 예수의 영광스런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신적인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심히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경배였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잡고자 했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요20:17,17)이 여인들의 행위(온전한 경배로서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짐)를 기쁘게 용납해 주셨던 것 같다. 이로써 그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체를 눈으로 보고 또 손으로 만지는 가장확실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될수있었다.
=====28:10
예수께서 가라사대 - 본문은 표면상으로 5-7절의 천사의 말을 다시 예수께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수께서 천사의 말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다음의 사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천사가 여인들에게`무서워 말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지진이 일어나며 무덤문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 앞에서 무서워하는 여인들을 안심(安心)시키는 것임이 자명하다(5절). 그것에 비해 지금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은 여인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안심을 했고 이제는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여인들이 예수를 보았때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마냥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반가움과 기쁨이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인들에게 전해진 `무서워 말라'는 말은 무덤에서의 사건과 갑작스러운 예수와의 대면에 의한 여인들의 공포를 일소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그녀들의 주를 잃은 절망이라고 볼 수있다. 그리고 주를 잃은 절망과 두려움은 아직도 예수의 부활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무리들 그리고 더 넓게는 마태의 공동체에게 더 심했을 것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무서워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직접적 대상인 여인들을 넘어 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위로(慰勞)의 말씀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하였다(7절).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말하라고 한다. 어떤 학자들(Lange, Wycliffe)은`내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11제자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형제들'에대한 본서의 용례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태는 5:22-24; 18:15; 23:8 등에서 `형제들'이라는 말을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친교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했었다. 그리고12:49, 50 에서는 `내 형제'라는 표현을 11사도를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네 형제들'은 11제자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으며,예수의 부활 소식은 11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으로 확대되어 전해져야 했던 것이다(Stonhouse, Witness of Matthew, pp. 176-177). 한편
13:17;15:21-28; 24:14).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 즉 이방선교를 준비하는 것이다(18-20절).
=====28:11
여자들이 갈제 - 본 구절은 4절 내용과 연결된다. 즉 여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주의 부활을 전하러 가는 동안, 잠시 혼절했던무덤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지금껏 되어진 일을 고하기 위해 성내로 내리달렸다.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 여인들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과 대비되어 무덤지키던 자들에 의해 대제사장들에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중요한일을 빌라도에게 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파슷군들이 로마의 병사라기 보다는 성전 소속의 사병들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Carson). 그러나 27:65에 언급하였듯이 이들 파숫군들은 예수의 무덤을 지키도록 유대인들에게 인계된 빌라도 휘하의 로마 군병들이었음에 분명하다. 실로 그들은 산헤드린의 명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곧장 산헤드린에게로 가서 자신들이 지금껏 경험한 사실을 대체적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보고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보고는 부활을 눈으로 직접목격했다는 내용이기 보다 지진, 천사, 빈무덤등 능히 부활이라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Bonnard). 한편 대제사장들은 파슷군들로부터 무덤에 있었던 신비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을 것이고,그들은 직감적으로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지각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이기도 했으므로(12:38; 26:67, 68),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 했어야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전혀 반대의 양상을 나타낸다.
=====28:12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 파숫군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여 예수의 부활을 은폐(隱蔽)하고 거짓 유인비어를 퍼뜨릴 계략을 펴고 있다. 뿐만아니라 일찍이 예수를 죽이려고 유다를 은 삼십에 매수했던(26:14, 15) 저들은 이제 또 부활한 예수를 다시 매장시키려고 `많은 돈'으로 파숫군들을 매수하고 있다. 여기서 그 돈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총독을 매수하기 위해서는 그가 만족할만한 더 많은 뇌물이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Wettstein)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은 진리에 있지 않았고 오직 편법(expedience)과 백성들의 여론에 있었던 것이다.
=====28:13
그의 `제자들이...도적질하여 갔다하라 -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가 부활한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소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러나 저들의 조작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음이 곧 드러난다. 즉 잠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무덤지키는 파숫군들이 엄격한 규율을 어기고 잠잤다고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설령 잠이들었다 하더라도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믿기는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겁많고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 공포에 떨던 제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의 무덤을 열어 젖힐 용기를 가졌겠는가? 또한, 가정해서 유대 당국자들이 제자들의 범죄 사실을 입증해 주는 어떤 증거를 갖고 있었다면 왜 기소하지 못했단 말인가? 한편 고대 세계에서 무덤에 해를 입히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고. 때로는 사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편이었다. 가이사(Caesar)의 나사렛 비문(Nazareth Inscription)은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물론 이 비문과 예수의 사망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무덤 보호 규율은 상당히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B.M.Metzer). 여하튼 저들이 퍼뜨린 소문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잔꾀에 지나지 않음이 곧 드러난다.
=====28:14
총독에게 들리면 - 이는 군인 의무규정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Meyer).
우리가 권하여 - 문자적으로`우리가 설득하여'가 된다. 즉 유대 지도자들은 이 일이 어렵게 되면 무덤 파수 임무를 맡았던 군병들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에 충실했노라고 말로써 설득할 뿐 아니라 빌라도의 마음을 뇌물로 설득(매수)하려 했던 것이다.
근심되지않게 하리라 - 실로 파숫군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사실을 빌라도가 안다고해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초에 무덤을 지키는 일은 빌라도가 지시한 일도 아니거니와(27:64,65), 대제사장들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돈으로 빌라도를 매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방법은 그 당시에 유효하고도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28:15
오늘낱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 본문에서 `오늘날 까지'라 함은 마태가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인 A.D.50-70년경을 뜻한다. 그런데 A.D. 150년경에 초대 교부 저스틴(Justine Martyr)이 쓴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cum Tryph., 108)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유포되기 시작한 거짓말이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기독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니 이 거짓말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소위 `도적설'이라는 부활 이설(異說)로 남아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 한편 A.D.165년 경에 기록된 베드로 복음서 11:46-49에 의하면 군인들과 장로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대인 -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표현법을 마태가 사용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구분이 될 정도로 갈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본문에서 마태는 기독교인과 대별되는 말로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28:16
열 한 제자 - 27:5에서 보도된대로 열 둘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죽었으므로 열한 제자만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갈릴리.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나타내 보이셨는데 마지막선고 명령이 주어지는 곳으로 갈릴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본서 뿐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방의 상징이자(4:15), 예수의 주된 관심사인 소외(疏外)된 사람들 즉,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유대교의 거짓된 종교인들로부터 기만당하는 민중들의 도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쨌든마태는 갈릴리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명령(7,10절; 26:32)에 집중하기 위해 예수의 유대현현 등과 같은 다른 기사들을 모두 생략하고있는 것이다.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 이 산은 예수께서 이미 명하셨던 곳이라고 하는데구체적으로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과연 그 산이 어떤 곳인지(혹 다볼 산 또는 팔복산이라고도 하나 확실치 않다) 복음서에서 찾아내기는 어렵다. 예수께서는 분명 부활 이후몇번의 현현 중에 이미 제자들과 당신이 익히알고 있는 산을 지명하셨음에 틀림없다. 실로산은 하늘과 지상이 만나는 곳으로 하늘의 대명령을 땅에 선포하신 지상 명령에 (the Great Commission)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예수의 가르침이 베풀어지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장소가 바로 산이었기 때문이다(5:1; 8:1; 17:1,9; 24:3; 26:30). 구약에서도 산은 매우 중요한 곳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고(출3:2이하)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다(출 32:15). 여하튼 예수의 지상 명령(18-20절)과 갈릴리의 한 특정 지역이 관련된것은 예수의 비참한 배경과 이방 선교라는 본서의 대주제와 함께 연결된다(10절). 한편 많은 권위있는 주석가들은 본문의 이 장면을 고전 15:6에 바울이 기술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사건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 이유로 이곳 소집에 대하여는 3회에 걸친 예고가 주어졌으며(7, 10절; 26:32) 그것은 지상 대명령을 (18-20절) 전달하신 회집이었고 갈릴리는 로마 정부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간섭을 쉽사리 피할 수 있는 곳으로서 500여명의 군중이 일거(一擧)에 모이기에 적합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28:17
예수를 뵈옵고 - 물론 11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목격한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모인 500여명의 형제 가운데 많은 수가 예수의 부활체를 처음,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상태로 목도하였을 것이다.
경배하나 -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 )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9절; 2:8; 4:9). 또한 이 단어는 `절하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9:18; 14:33; 15:25)공동번역 에서는 본문을 `절하다'로 번역하고있다. 본문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패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승리하신 분으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은 다른 곳(눅 24:10,11; 요 20:24-29)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보고도' 의심한 본절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난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첫째 난제는 그 의심하는 자가 11제자 중에서인지 아니면 500명 형제중에서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여기서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프로스쮜네오'가 단순히`무릎을 꿇다',`...에게 경의를 표하다'는 약한 의미로 사되지 않고 `경배(敬拜)하다'는 뜻 으로 사용되었다면 `11제자들'과 `오히려 의심하는 자'는 다른 두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배(예배)하는 자가 예수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리가 없고, 또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을리 없겠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의 확실한 목격자였던 마태는 그가 그때 그곳에 없었던본서의 독자들이 의심을 제기할지도 모를 위와같은 사항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실들에만 기억을 돼살려 생생히 묘사했던 것으로 보인다(8절). 한편 이러한 문제점을, `오히려...있더'(* ,호이데)의 읽기를`...자는 없더라'(* , 우데)는 읽기로 고침으로써 해결하려는시도가 있으나 이는 큰 무리가 있는 읽기이다(Beza 사본, Bornemann). 두번째 난제는 의심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제쳐 놓고라도, 도대체 왜 의심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 `에디스타산'(* ,<더러는> 의심하였다)은 신약에서 이곳과 14:31에서만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불신앙이 아닌 망설임을 뜻한다(`비록 더러는 주저하였으나',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I.P. Ellis). 어쨌든 주저한 자들이 11제자 외의 다른 사람들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왜 의심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여기에 대해 혹자는 (Hendriksen, Grosheide, Filson, Walvoord) 부활을 의심한 것이아니라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제시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예수가 부활후의 현현에서 항상 즉시로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생시(生時)와 변화상태와의 너무 큰 차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과연 그가 예수인가?'하고 의심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파르쿠르스트(L.G.Parkhurst,Matthew 28:16-20 Reconsiderd, p. 179)는 의심한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나 혹은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예
장에서처럼, 모든 의심이 제거되었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하튼 마태의 기사가 간결하기 때문에 마태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11제자가 아니라 그밖의 다른 제자들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불신앙과 공포에서 신앙과 기쁨에로의 변화는 주저하는 중에 서서히 나타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적어도 이미 두번이나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베드로는 적어도 3번, 도마는 1번) 11제자는 이 새로운 현현에 마주쳐 즉시 경배할수 있었겠으나 다른 제자들은 머뭇머뭇 주저(躊躇)했다. 실로 그들은 거듭된 예수 자신의부활에 대한 예언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는 절망에 휩싸였고, 당분간 완전한 신앙에로 복귀하기까지 의심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태는 다음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오순절의 성령 충만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태의 간결한 기사는 이 사실을 이미 전제한다. 왜냐하면 어떤 복음서 기자도그 구속사의 획기적인 사건을 간과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의 주제적관심들을 오직 주님의 선교 지상 명령에 집중시키고자 그 사건을 생략한 것이다.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의혹을 떨쳐버릴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아마 본문 이하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 많은 말씀으로 그들의 실추(失墜)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먼저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세, 모든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시아'(* )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것이다.
=====28:19
너희는 가서 - 여기 `가서'(* , 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형 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 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2:8,13; 9:13; 11:4; 17:27;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258-67).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것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6)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한다. 이는 이제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Hare, Walker).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Trilling, Hubbard,John p.Maier). 사실 마태가 '족속'(* , 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된다. 한편 `제자를 삼아(* , 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 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주고 -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 17)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 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 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 고후 13:13; 요일 3:23,24)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Trinty)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이름'(* , 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것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 에서 `...으로'(* ,에이스)에 관해 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 , 엄격히는 `안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한편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 )는 `잠근다'(왕하 5:14; 시 68:23), `씽는다'(막7:4; 눅 11:38; 딛 3:5)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침례' 또는 `세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실 중요한 것은 `침례'냐 `세례'냐하는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邁進)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 ,디다케)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쳐'(*****************, 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딤후2:2).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eyewitnesses')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earwitnesses)을 낳게 된다(O'Brien pp.264ff.).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되었다.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볼지어다(* ,이두) -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23).`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臨在)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까지'(* ,헤오스 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24:3). 그리고`항상'(* , 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게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parousia)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喜樂)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3:1-26:5).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전장이 한 밤중에 캄캄한 어둠이라고 한다면, 본장은 그 어둠을 깨치고 비취는 찬란한 광명에 비견될 수 있다. 본서의 시작은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의(2:2) 탄생에서 비롯되었거니와, 이제 본서는 만왕의 왕으로 부활하신 예수의 궁극적 승리와 영광으로 마감되고 있는 것이다. 에수의 죽음은 제자들을 심한 좌절과 허탈 가운데 빠지게 하였음에 분명하다(26:56). 비록 주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은 물론 부활에 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이 당시로서는 부활에 관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에선 부활하신 예수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서도 의심하는 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위대한 일군들로서, 그리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초극적 용기를
지닌 용사들로서 성도들 앞에 우뚝 설 수 있었다. 본장의 세부적 단락 강해에 들어가기전에, 먼저 사복음서 간에 평행되는 내용을 비교해 보고 또한 부활의 의의를 요약해 보기로 하자.
(1) 사복음서와의 비교.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부활 기사를 위해 가기 한 장씩 할애
하고 있으며, 요한 복음에는 무려 두 장에 걸쳐 부활 기사기 수록되었다(요 20, 21장)
. 그 중 요한 복음 21장은, 에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
를 단독적으로 기재하고 있다. 본서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 차례 나타난 것으로 되
어 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들 및 바울 서신을 통해 종합해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약
열 차례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순서대로 열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ㄱ)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막 16:9-11;요 20:11-18). (ㄴ)
다른 여인들, 곧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살로메 그리고 요안나에게 나타나심(마 28:8
-10). (ㄷ) 베드로에게 나타나심(고전 15:5). (ㄹ)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
심(막 16:12,13;눅 24:13-32). (ㅁ)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에게 나타나심(요 20:26-28
). (ㅅ) 갈릴리 해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심(요 21:1-14). (ㅇ) 갈릴리의 한 산
에서 열 한 제자를 포함한 500여 사람들에게 나타나심(마 28:16-20;고전 15:6). (ㅈ)
야고보에게 나타나심(고전 15:7).(ㅊ)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눅 24:44
-49;행 1:3-8). 이 가운데에서는 마태는,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사실(9절)과
갈릴리에서 나타나신 사실을(16-20절) 기록하였다. 이는 본서의 일관된 주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즉 메시야께서는 멸시와 천대를 감수하시며 친히 낮고 겸비한 자리에 처하
사 당신의 빛을 먼저 천대받는 백성들에게 비취신다고 하는 것이 그 주제이다(시 22:6
-8,13;69:8,20,21;사 11:1;49:7;53:2,3,8;단 9:26;마 8:20;11:16-19;15:7,8). 또한 '
이방의 갈릴리'(4:15)는 주님의 지상 명령 속에 함축된 이방 선교라는 차원 높은 주제
도와도 잘 조화된다(1;1;2:1-12;4:15,16;8:5-13;10:18;12:21;13:37;15:21-28;24:14).
(2) 부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부활 예고 및 부활 사건
자체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부활의 신학적 의의를 함축적으로 다루고 있지
는 않다. 이 부활 주제는 바울 서신에서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졌다(롬 4:24,25;6:4;8:
34;10:9; 고전 15장;고후 5:1-10,15; 빌 3:10,11;골 2:12,13;3:1-4;살전 4:14). 특히
부활장이라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특유의 치밀한 논리로써 부활 교리
를 소상히 전개해나가고 있다.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초대 교회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
심이자 기독교 신학의 골자라 할 수 있는 부활 사건의 의의에 관해서는 문단 강해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사복음서에 수록된 바 부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일고하
는 것에 그치기로 하자. 부활을 반박하며 에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사두개인들은
계대 결혼과 관련된 미묘한 질문을 예수께 던진 바 있다(22:23 이하). 이때 예수는 부
활 후 천국에서의 삶의 양태가 현실의 삶과 다른 차원임을 밝히 하면서, '하나님은 죽
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부활의 근거를 확인하셨다. 또한 예
수는 마지막 날에 택하신 자들을 일으키사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끌 것이라 말씀하셨으
며(24:31;요 6:39,40,44,54),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셨다(요 11:25,26).
1. 그리스도의 부활(28:1-10)
예수께서는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그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27:35,50;막 15:33). 그리고 그날 저녁에 아리마대의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장
사 지내었다. 당시 근동 지역에서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사망 당일이나 사망 후 24시
간 이내에 속히 매장하였는데(요 11:17,39), 이는 위생 문제에도 기인하였겠지만 시체
에 접촉되면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민 9:10-14)에 기인한 바 크다. 즉
시체를 바새도록 두는 것은 거룩하고 정결해야 할 약속의 땅을 더럽히는 행위로 간주
되었던 것이다(신 21:23). 특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바로 유월절이 시작되
기 직전이었기 때문에(막 15:42;눅 23:54;요 19:31) 더욱 급히 장사를 서둘러야 했다.
이렇게 장사되신 후 다음날 곧 토요일은 유월절이자 안식일이었다. 본문의 부활 기사
는 안식 후 첫날 곧 오늘날의 주일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부활한 시간을 대
략 오전 6시경으로 보면(1절), 주님이 운명하시고부터 부활하시기 까지는 50시간도 채
못된다. 그러나 일수로는 금요앨에서 주일까지 사흘이 되는 셈이다.
(1) 기록상의 차이점. 본문의 여인들은 두려움 가운데 초자연적 현상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목져ㄱ담은 정확한 사건 보고의 형태를 띠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이 이 사건을 놓고서 다양한 기록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은 당연하
다 하겠다. 예컨대, 본문의 '천사'가 마가복음 16:5에서는 '청년'으로 묘사되었고 누
가복음 24:4에서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한편, 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온 이유를 본문은 단순히 '무덤을 보려고'라고 기록하였으나(1절), 마가복
음은 향품을 예수께 바르기 위해서였다고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막 16:1).
(2) 상반되는 두 반응. 천사가 나타나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장면에는 두가지 상반
되는 반응이 나타나 있다. 먼저 무덤을 파수하던 자들은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물러
나가로 큰 지진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기절하다시피하였다(2-4절).
이와 대조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도 처음에는 두려워하였으나, 예수는
부활 소식을 듣고는 큰 기쁨에 사로잡혔다(8절).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마지막 날 주
님의 재림시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세상의 혼탁하고 사악한 조류에 휩싸이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가르침을 좇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인내로써 매진한 자들은 주님
이 다시 오시는 날에 한량없는 위로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진리
를 거역하고 육신적이고 세상적 욕정을 좇은 자들에게는 재림의 날이 큰 공포와 절망
의 날이 될 것이다.
* 부활의 의의.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몇마디로 쉽게 요약하기 힘들듯이, 부활의
사건 또한 너무도 크고 넓은 의미를 지니 것이기 때문에 쉽게 요약될 성질의 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극히 개괄적인 사항만 언급하기로 하자.
예수의 부활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생명의 속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지극히 풍요로우며 또한 영원하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 또한 본질상 하나님의 생명과
동일하기 때문에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 2:24). 따라서 예수께서는 성도
들의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의 권세 잡은 마귀를 물리치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
셨다(고전 15:20). 그리하여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 생명 안에 접붙임 받은 자들은 그
와 동일하게 영원한 새생명을 선물로 받게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
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
이 허락되었다(롬 6:4). 그러므로 부활의 새 생명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허락되었던
생명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생명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하는 새 창조(new creation)의 시작을 알
리는 신호에 다름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삼라만상이 새롭게 창조될
그날을 만물은 탄식하며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롬 8:19-23).
또한 부활에의 소망은 성도들로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때에 따라
서는 온갖 희생마저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게끔 만드는 위대한 능력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거니와, 만일 부활이 없다고 하면 실로 그는 엄청난 거짓말장이일 뿐만 아니라 세
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였을 것이라 고백하기도 했다(고전 15:17-19).
2. 부활 은폐 노력(28:11-15)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뵈온 후에 그 벅찬 감격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여인들과는(8-10절) 정반대로, 어떻게해서든 그 사실을 은폐
하기 위해 분주히 얘쓰는 자들이 있었다. 대제사장들은 파수꾼들로부터 실제로 일어났
던 일의 자초지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것을 날조하여
헛소문을 두루 퍼뜨렸다. 예수의 말씀과 같이, 실로 그들은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자들이었다(눅16:31).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꾸민 거짓말은 그 자체 내에 명백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바, 우리는 이러
한 모순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긴박하게 그리고 억지로 날조하였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모순이란 첫째로, 그 파수꾼들이 자고 있었다면 설령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갔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란 점이다. 둘째로, 무덤을 봉인한 무거운
돌을 옮기고 시체를 가져갈 동안 졸고 있는 군인들 중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믿기 힘들다. 그리고 세째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낭패와 공포 가운데 두문
불출하였던 제자들의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의 시신을 몰래 가져가려고 시도했다는 사
실은 믿기 힘들다.더욱이 그들 중에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목격하고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을 정도로 당시 그들의 믿음은 연약한 상태였다. 또한, 만일 그들이 예수의 시
신을 몰래 훔쳐내었다면 스스로 조작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훗날 목숨마저
불사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의 부활을 은폐하기 위해 허
위 날조를 꾀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예수 부활의 엄연한 역사성을 보다 확고
히 증거하는 일에 일조하였을 뿐이라 하겠다.
* 예수의 부활을 불신하는 여러 견해들. 예수의 부활을 불신하기 위해 마련된 여러
견해들을 열거하여 그 허위성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시체 도적설. 이에 관해서는 바로 앞 문단 강해에서 고찰하였다.
(2) 기절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다만 일시적으로 졸도해
있다가 무덤으로 옮겨진 이후에 깨어나 달아나셨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다
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거부되어야 한다. (ㄱ) 예수의 죽음은 빌라도의 명에 의해 공
식적으로 확인되었다(막 15:44,45). (ㄴ) 십자가 처형 당시 한 군병은 예수께서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다리를 꺾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쏟게 했다(요 19:
33,34). (ㄷ) 설령 기절하신 상태였다고 가정할지라도, 그토록 치명적 상처를 받으신
분이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를 밀어 제치고 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며 더욱이 파수꾼
들의 엄중한 경계를 뚫고 나갈 수도 없없을 것이다.
(3) 본문의 여인들이 어두워서 다른 무덤을 찾아갔다는 견해. 그러나 이 견해는 성
경 본문의 내용과 상충된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해가 돋아 있었고
(막 16:2), 이 여인들은 예수의 무덤을 미리 눈여겨 보아두었다(막 15:47). 그리고 여
인들 뿐만 아니라 요한과 베드로도 빈 무덤을 보았다(요 20:5-8).
(4) 유대 지도자들 내지는 로마의 당국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따로 보관하였다는 견
해. 이 견해가 사실이라면,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널리 공표하고 다닐 때(행 2:24
등) 그들이 예수의 시신을 증거로 제시하여 제자들을 사기꾼으로 낙인찍어 버릴 수 있
었을 것이다.
(5)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서들 간에 모순된다는 견해. 예컨대 그들은, 무
덤에 나타난 천사에 관하여 마태와 마가는 '주의 천사',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고
각각 표현한 반면에 누가는 '두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는 점을 모순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여인들은 무덤 안에서 일어난 초자연적 사실과 직
면하여 큰 놀라움에 사로잡혔으며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구술하기란 몹시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실제로 '두' 천사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여인들은 그 중 한
천사의 이미지에 압도당하여 '한' 청년이라고 이야기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인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결여한 자는 종교적, 정치적 기득
권을 수호하기에 연연했던 당시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돈에 눈이 먼 로마 군병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예수께서 바로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심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의 부활이 오히려 너무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3. 지상 대명령(28:16-20)
본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의 한 산에 나타나사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강렬한 여운을
느낀다. 왜냐하면 본문은 본서 전체를 마감짓눗掃隙?성격을 지님과 아울러 제자들
의 증거 사역과 더불어 개시될 교회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장엄한 서언(序言)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지상 대명(至上大命)의 내용을
분석해봄으로써 마태복음의 강해를 마치기로 하자.
(1) 예수의 권세. 예수는 제자들에게 대사명을 위임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의 권세
를 상기시킴으로써(18절),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의 근거를 확실히 밝히셨다. 인
류의 구속을 위해 지극히 낮고 천한 모습으로 탄생하고 또한 일평생 섬김의 도를 실천
하다 마침내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하셨던(27:27-44) 바로 그 예수께서 이제
유대인의 왕(2:2)이요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제자들 앞에 서신 것이다(빌 2:6-11). 예
수 안에는 모든 것이 충만하게 거한다(골 1:19). 그리고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시다(요 14:6).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만물이 다 내 것이라'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잇는 것이다(고전 3:21).
(2) 예수의 명령.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사명은 첫째로, '가서 만 백성에
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내용이다. 이는 복음의 우주적 성격을 시사하는 말씀으로서,
당시 유대교의 편협한 국수주의(國粹主義)의 영향하에 있었던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있
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까지는 많은 난관들을 극복해야 했던 것이다.
예컨대, 사도 베드로는 '보자기 환상'이라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접하고 나서야 비
로소 이방 선교에 적극적 열성을 보이게 되었다(행 10장). 둘째로, 세례를 베풀라는
내용이다. 물론 형식상의 세례 자체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항인 것은 아니라
는 점은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도적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눅 23:43). 성도 공동
체 앞에서 자기의 신앙을 공표함으로써 스스로 결단과 근신에 나아가도록 한다는 점에
서 매우 중요한 예식이라 하겠다. 특히 이 셸슨례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삼위일체(三位
一體)에 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이는 전혀 의외의 내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
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성부 하나님에 관해 말씀하셨고(요 14:10-13) 공생애의 막
바지에 이르러서는 보혜사 성령에 관해 분명히 언급하신 바 있기 때문이다(요
14:16,17). 세째로, 이 명령은 훈육(訓育)에 관한 내용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 증
거와 아울러 그 증거를 받아들인 자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시키는 사명을 부여받
은 것이다.
(3) 예수의 약속.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무리와 항상 함께 하시
리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이다(20절 후반절). 성도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축복의 약
속이 있을 수 없으며, 이보다 더 큰 위로의 약속이 있을 수 없다. 이 위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늘 주와 동행하는 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이다(시 23:4).
* 예수의 지상 명령에서 얻은 교훈.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그의 제
자들에게 주신(행 1:8,9) 말씀을 가리켜 흔히 지상 대명(至上大命, the Great
Commission)이라 한다. 이는 곧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함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
들(엡 4:4)에게 주시는 명령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
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할 성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주신 명령은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가라, 제자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 이 4대 명령을 통해 그 각각의 교훈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2) '가라'(Go) : 이것은 성도가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
세를 취하라는 명령이다. 성도들이 처한 가정, 학교, 직장, 교회당, 선교지 등은 모두
천국 대사의 부임지가 된다. 가정, 학교, 직장, 교회, 선교지로 '가라!' 결코 머뭇거
리거나 소극적. 도피적인 생활을 하지말라.
(2) '제자를 삼으라'(Make disciples) : 예수의 지상 명령 중 가장 궁극적인 내용
으로서 복음을 전하여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라는 명령이다. 피전도자에게 대하여 전
도자는 영적 부모요 스승이 된다(고전 4:15). 전도의 대상은 '모든 족속' - 모든 인
종, 모든 민족, 모든 계층의 사람들 - 이다. 각자 처한 생활의 일터에서 말과 행동과
인격과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
(3) '세례를 주라'(Baptize) : 외형적인 면에서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라는 뜻이
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주께서 피로 세우신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소속되어 학습, 세례,
임직(任職)을 받아야 한다(참조, 행 20:27). 이 외형적인 교회 제도를 무시하는 무교
회주의(無敎會主義)는 성경적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신앙적 의식과 사업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3위 1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목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지켜져야 할 하나님 중심주의를 말한다.
(4) '가르치라'(Teach) : (3)의 명령이 외형적인 신앙 목표를 말한다면 이 명령은
내면적인 신앙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즉 복음을 듣고 교회의 일원이 된 초신자는 구
원받은 데서 그치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엡 4:13-15) 신앙
인격이 성숙해야만 한다. 이 신앙 인격의 성숙은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 즉 그의
말씀을 배우고 '지킴으로써', 즉 주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진다(계 1:3).
이러한 지상 명령의 4대 강령은 성도들의 생활에 있어서 실제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된다. 이러한 원리가 보다 강력하게 실천될 때 그만큼 이 시대 교
회들의 숙원리라 할 수 있는 '세계 복음화'는 앞당겨 이루어질 것이다(참조, 행 1:8).
그런데 이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먼저 자신이 영적
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최선의 영적 무기는 하나님을 경외하
며(요 9:31) 기도로써 그분과 대화, 교제하는 것(막 9:29),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항상 그분의 선하신 뜻을 분변(分辨)하는 것(시 119:9,97-100)이다. 그
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시는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실로
예수의 제자된 우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敎區)'라고 외쳤던 존 웨슬레(John Wesley)
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대상으로 삼는 활발한 선교 활동을 통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막 4:20)을 맺게 해야 할 것이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 `다하여 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읖세 데'(* )는 일반적인 시간 지시사로서 `이제...후에'(after)라는 말이다. 이를 근로 본문을 좀더 정확히 묘사하면 `이제 안식일이(완전히) 지난 후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막 16:1, 2; 눅 24:1; 요 20:1). 그렇다면 저녁 해질 때(오후 6시경)를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본 상황이 깊은 밤을 거의 다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의 문턱에 이미 들어선 때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이유에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의 이 날을 기념했고 점점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다(요 20장 주제 강해 `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를 참조). 이제 길고 무거웠던 율법의 시대는 마감되고 부활의 주를 중심으로한 새 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에.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은 오늘날의 일요일, 즉 주일을 뜻한다. 즉 이날은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주일로 대체되어 지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 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라할 수 있으니 바로 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을 성수(聖守)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요 20:19,'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 참조).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안식일을 한 주간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개념에 따른 표현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답습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안식일 대신 `주일' 곧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포스코'(* )의 원의미는 `날이 새다', `날이 밝아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적 어법으로 사용 되었을 때 그 의미는, 하루 24시간이 시작되는 해질 때를 뜻한다. 눅 23:54에서도 금요일 저녁을 표시하기 위하여 `에피포스코'가 동일한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유대적 어법과는 거리가 멀다. 즉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 16:2에 보면 `아나테일란토스 투 헬리우'(* ) 즉 `해 돋는 때에'로되어 있어 저녁이 아닌 아침 시각임을 분명히 보여 주
들을 기록함에 있어 다음과 갈은 차이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따라 많은 논의가 분분하다.
=====28:2
큰 지진이 나며 - 2-4절은 마태만의 특수한 기록들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빈 무덤'의 발견만을 언급하지만 본문에서는 여인들이`큰 지진'과 친사가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한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주는것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27:51; 출 19:18; 시 68:8; 행 16:26; 히 12:26). 따라서 여기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부활의 이면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역사하셨음을 의미한다(엡 2:5,6). 27:51에서의 지진이 하나님의 구원의 보증이신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이자 더 나아가 그한계를 드러내고만 율법 구세대(舊世代)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본문에서의 지진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 질서의 구원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진과 돌의 굴림은 예수의 부활의 시점을 알려 주거나 부활한 예수를 무덤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이적들이라기보다 오히려 여인들과 다른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알게 하며 더 이상 죽음 아래 머물러 있을 수없는 예수의 부활의 혼적을 친히 목도하게 하기위함이었다(McNeil). 실로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떨치시고 생명이 충만한 상태로 부활하시어(벧전3:18) 변화된 몸을 입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의 유무(有無)에 상관없이 무덤벽을 조용히 통과해 나가셨던 것이다요 20:19).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 여기 언급된`천사'(1:20-23;18:10)에 대해서는 마가(`하얀 옷을 입은 한 청년')보다 마태와 누가가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사적 존재들은 자주 구약 성경에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으로, 그같은 표현상의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닐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언급한 `청년'은 `천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Lane, Jos, Antiq.V,277).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서는 그 천사가 `하나'인 데 비해 누가와 요한에서는 `둘'로 묘사되었데 이 차이 역시 본 사건이 초가연적 기사라는점에서 각각의 경험과 그 기술하고자 하는 도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봄이 적당 하리라고 생각된다.
그 위에 앉았는데 - 여기`앉았는데'(* , 에카데토)란, 미완료 시상으로서 마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게속 앉아있는 모습을 묘사한(실로 그 천사는 예수 부활의 산 증인으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증, 보존하는 일을 수행했던 일종의 영광스런 도구였던 것이다.
=====28: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 천사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번개 같은 행상'이라는 묘사는 천사의 몸에서 매우 밝고 환한 광채가 나있었다는 것과 `눈 같이 희 옷'에서는 그 존재의 순결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예수의 변형되신 모습(17:2; 막 9:3)을 연상케 하며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묘사한 것과 흡사하다(단 7:9; 10:6; 계 1:13,14).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초자연적인 천사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거룩성과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천사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마다 다양하게 되있는 마가복음에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16:5)으로,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사람'(24:4)으로, 요한복음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24:4)로 되어 있어 천상적(天上的)존재의 신비를 다양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28:4
수직하던 자들이...무서워하여 떨며 - 무덤을 지키도록 배치된 자들(27:64-66)이 지진과 더불어 일어난 천사의 임재 앞에 너무큰 충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들이 예수의 처형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직,간접적의로 듣고 보고 하여 무덤에 묻힌 자의 실체(實體)가 큰 의미를 둘 만큼 대단치 않은 존재라고 방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고, 또 그들어리석은 보호벽(무덤)을 뚫고 예수는 부활셨던 것이다. 진정 그들의 두려움은 죄인이 성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공포였다(창 3:10). 한편 본문의 `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세이스데산'(* )은 `혼들다'는 뜻의 `세이오'(* )의 제 1과거수동형으로 `흔들리게 되었다'는 뜻을 가지는데 27:51 에서 땅의 진동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앞에 선 죄인들의 실존적 모습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사 6:4,5). 이와 더불어 본문에는 수직하던 자들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보고하는데, 아마 그들은 상상을 초월한 눈 앞의 이적들에 압도당하여 잠시 혼절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갈은 잠시간의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 곧장 성내로 달려가 그들의 목격담을 전하게 된다(11절). 진정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훼방꾼이 아니라 너무도 확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고 만것이다. 참고로 계 1:17에는 사도 요한이 부활의 주님을 볼 때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28:5
너희는 무서워 말라 - 천사는 먼저 여인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여기서는 `너희는'(* , 휘메이스)이라는 대명사가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색이 되어있는 무덤지기들은 배제된 채 여인들 에게만 무서워 말라는 말이 주어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두려움에 방치되어 버려질 사람이 있고 두려워 말라고 하는 선택적 위안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못 박히신 예수를...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 천사는 여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천사의 말에서 강조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에수'이다. 즉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강조는 분명한 죽음이 분명한 부활의 전제(前提)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있다 함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결코 외릅게 고립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감찰하시며 함께 하고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에 대한 여인들의 신실함이 인정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8:6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 하나님의 천사는 계시의 중개자로서의 임미를 띠고 있다. 복음서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뜻을 전달시켜주기위해 천사가 꿈에 나타났었는데(1:20 ff). 이와 평행을 이루어 복음서의 마지막에 계시의 중개자로서 또다시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리며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그의 말씀하시던 대로'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으로 12:40; 16:21; 17:23; 20:18, 19절에서 예언한 `부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여기 계시지않고'라는 말은 그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로하는 말이므로 예수가 죽어서 무덤 안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제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바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그가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은 예수의 자력(自力)적인 행위를 강조한 말로서 예수의 신적 전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는 몇몇 성구들(16:21; 17:23; 롬 6:4; 8:11)에는 부활이 성부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의 결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공동 협력에 의한 신적인 승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대목으로 `빈무덤'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의 `빈 무덤'을 인정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28:11-15). 사실 예수가 죽어서 누이었던 자리에 있지 않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즉 예수가 부활했거나 아니면 적대자들의 말처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를 횹쳐갔다고 하는 적대자들시 주장은 모순을 드러내는 바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게 된다(13절 주석참조). 그렇다면 유일한 하나의 가능성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분은 확실히 자신의 예언대로 부활하셨고 죽었던 그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이다(빌 3:21).
=====28:7
빨리 가서 -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그 무덤 앞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천사들은 그 여인들에게 예수 부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황급히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었다. 이는 분명 권유가 아니라 촉급한 명령이었다.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 본문과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7에서는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을 분리시켜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가 마가보다는 베드로를 우호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금의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던 부활의 예언을 망각하고 있거나 불신하고 있었던 제자들에 대한책망의 말씀일 수 있기 때문인데 마가는 베드로를 따로 분리시켜 그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베드로의 대표적 불선을 상기시키고있는 것이다(26:69-74). 실로 베드로는 세번에 걸쳐서 예수를 부인하기까지 했었던 것이다(14:66-72). 그에 반해 마태는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지 않고 제자들 속에 포함시켜 말함으로써 제자들 모두의 공동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것이다. 혹 이 말씀이 책망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실망 가운데서 고독해하고 있을 제자들에게 보내는 기쁨의 소식이라고 해도 베드로에 대한 특별성이 언급되지 않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주의 부활'이라고 하는 기쁨의 소식은 각각의 제자들 모두에게 동일(同一)한 기쁨이 됨을 말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 천사가 여인들에게 거듭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제자들이 이 말씀을 전해들었다면 그들은 아마 26:32의 말씀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를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 따른 성취에 앞서 유대 지경에서 여인들과 엠마오의 두 제자및 소그룹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당신의 공식적인 현현은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갈릴리에서 두 번 나타나시게 된다(16-20장; 요 21장). 이제 갈릴리는 더 이상 어둠과 소외의 현장이 될 수 없었고 복음과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행 10:37).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딩신의 제자들을 대부분 부르셨던 갈릴리를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런(행 1:11) 처소로 만드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가시나니'(* , 프로아게이)는 현재 진행적인 의미가아니라 생생한 미래를 나타내는 말로써 예수께서는 약속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는 뜻이다(1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특별히 본문의 `일렀느니라'(* , 에이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적 선언시에 흔히 사용하던 문구이다. 따라서 천사의 이 말은 계시의 중개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종결 문구인동시에 예수의 부활이 확증적임을 선포하고 있다.
=====28:8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들은 여인들의 혼합된 심리 상태를 묘사해 주고 있다.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8 에서 여인들의 상태를 `놀람', `두려움'의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본문에서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대비(對比)시킴으로써 한편은 천사의 임재를 위시한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예수의 부활 소식에 접하여 `큰 기쁨'을 느끼고 있음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건을 체험할때 생겨나는 심리 상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바 초자연적 사건 앞에 인간은 두려워할수밖에 없으나, 그 사건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자각할 때 한없는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통일되면서 인간은 진정한 신앙적 희열을 느끼게 된다.
제자들에게 알게하려고 달음질할새 - 이 부분도 막 16:8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천사가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말(7절)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본문에서는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들은 후 `큰 기쁨'에 차서 천사의 고지(告知) 사항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달려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와 마태의 교훈적 강조점이 다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마가는 예수의 측근들에게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로마의 혹독한 탄압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날 위기에 처해있는 마가의 공동체에게 제자들처럼 나약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동시에 신앙을 지키지못한 성도들에게는 제자들도 실패했었기 때문에 평범한 신앙인들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일이므로 한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반면 마태 공동체의 경우는 마가에 비해 덜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어두운면보다는 예수의 부활의 기쁨을 기념하고 함께나누고자 하는 뜻에서 기쁨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다.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 예수의 부활 증거로 '빈무덤'에 이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현현(顯現)하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현현을 최초로 목격하는 행운을 부여받은 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여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며 단지 재산 목록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던(출 20:17)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께서 부활 후 처음으로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이자 부활의 증인으로 인정 하셨음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서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여인을 택하심으로 최초의 범죄자 하와의 후손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변하여 큰 소망과 위로가 되게 하셨다(Chrysostom). 한편 예수의 인사말 `평안하뇨' 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인 헬라어 `카이레태'(* )의 번역으로 `기뻐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인사말은 일찍이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때 제자들이 근심하게 될 것이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고 하셨던 예언을 생각나게 해주며 예수 부활 소식을 들었던 여인들이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인 상태에 있었듯이(8절) 예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 에게 있어서도 근심과 기쁨의 감정을 교차케 해주는 역설적 사건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이 말씀은 이제는 두려워 말고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자들이...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이와 같은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인 존경과 경외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다. 즉 이 여인들의 이 갈은 행위는 결단코 공포나 어떤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취한 피동적인 경배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 서 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방금 전해들은 그 여인들이 변화된 예수의 영광스런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신적인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심히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경배였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잡고자 했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요20:17,17)이 여인들의 행위(온전한 경배로서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짐)를 기쁘게 용납해 주셨던 것 같다. 이로써 그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체를 눈으로 보고 또 손으로 만지는 가장확실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될수있었다.
=====28:10
예수께서 가라사대 - 본문은 표면상으로 5-7절의 천사의 말을 다시 예수께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수께서 천사의 말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다음의 사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천사가 여인들에게`무서워 말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지진이 일어나며 무덤문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 앞에서 무서워하는 여인들을 안심(安心)시키는 것임이 자명하다(5절). 그것에 비해 지금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은 여인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안심을 했고 이제는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여인들이 예수를 보았때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마냥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반가움과 기쁨이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인들에게 전해진 `무서워 말라'는 말은 무덤에서의 사건과 갑작스러운 예수와의 대면에 의한 여인들의 공포를 일소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그녀들의 주를 잃은 절망이라고 볼 수있다. 그리고 주를 잃은 절망과 두려움은 아직도 예수의 부활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무리들 그리고 더 넓게는 마태의 공동체에게 더 심했을 것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무서워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직접적 대상인 여인들을 넘어 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위로(慰勞)의 말씀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하였다(7절).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말하라고 한다. 어떤 학자들(Lange, Wycliffe)은`내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11제자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형제들'에대한 본서의 용례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태는 5:22-24; 18:15; 23:8 등에서 `형제들'이라는 말을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친교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했었다. 그리고12:49, 50 에서는 `내 형제'라는 표현을 11사도를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네 형제들'은 11제자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으며,예수의 부활 소식은 11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으로 확대되어 전해져야 했던 것이다(Stonhouse, Witness of Matthew, pp. 176-177). 한편
13:17;15:21-28; 24:14).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 즉 이방선교를 준비하는 것이다(18-20절).
=====28:11
여자들이 갈제 - 본 구절은 4절 내용과 연결된다. 즉 여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주의 부활을 전하러 가는 동안, 잠시 혼절했던무덤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지금껏 되어진 일을 고하기 위해 성내로 내리달렸다.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 여인들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과 대비되어 무덤지키던 자들에 의해 대제사장들에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중요한일을 빌라도에게 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파슷군들이 로마의 병사라기 보다는 성전 소속의 사병들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Carson). 그러나 27:65에 언급하였듯이 이들 파숫군들은 예수의 무덤을 지키도록 유대인들에게 인계된 빌라도 휘하의 로마 군병들이었음에 분명하다. 실로 그들은 산헤드린의 명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곧장 산헤드린에게로 가서 자신들이 지금껏 경험한 사실을 대체적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보고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보고는 부활을 눈으로 직접목격했다는 내용이기 보다 지진, 천사, 빈무덤등 능히 부활이라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Bonnard). 한편 대제사장들은 파슷군들로부터 무덤에 있었던 신비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을 것이고,그들은 직감적으로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지각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이기도 했으므로(12:38; 26:67, 68),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 했어야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전혀 반대의 양상을 나타낸다.
=====28:12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 파숫군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여 예수의 부활을 은폐(隱蔽)하고 거짓 유인비어를 퍼뜨릴 계략을 펴고 있다. 뿐만아니라 일찍이 예수를 죽이려고 유다를 은 삼십에 매수했던(26:14, 15) 저들은 이제 또 부활한 예수를 다시 매장시키려고 `많은 돈'으로 파숫군들을 매수하고 있다. 여기서 그 돈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총독을 매수하기 위해서는 그가 만족할만한 더 많은 뇌물이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Wettstein)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은 진리에 있지 않았고 오직 편법(expedience)과 백성들의 여론에 있었던 것이다.
=====28:13
그의 `제자들이...도적질하여 갔다하라 -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가 부활한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소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러나 저들의 조작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음이 곧 드러난다. 즉 잠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무덤지키는 파숫군들이 엄격한 규율을 어기고 잠잤다고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설령 잠이들었다 하더라도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믿기는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겁많고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 공포에 떨던 제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의 무덤을 열어 젖힐 용기를 가졌겠는가? 또한, 가정해서 유대 당국자들이 제자들의 범죄 사실을 입증해 주는 어떤 증거를 갖고 있었다면 왜 기소하지 못했단 말인가? 한편 고대 세계에서 무덤에 해를 입히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고. 때로는 사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편이었다. 가이사(Caesar)의 나사렛 비문(Nazareth Inscription)은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물론 이 비문과 예수의 사망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무덤 보호 규율은 상당히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B.M.Metzer). 여하튼 저들이 퍼뜨린 소문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잔꾀에 지나지 않음이 곧 드러난다.
=====28:14
총독에게 들리면 - 이는 군인 의무규정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Meyer).
우리가 권하여 - 문자적으로`우리가 설득하여'가 된다. 즉 유대 지도자들은 이 일이 어렵게 되면 무덤 파수 임무를 맡았던 군병들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에 충실했노라고 말로써 설득할 뿐 아니라 빌라도의 마음을 뇌물로 설득(매수)하려 했던 것이다.
근심되지않게 하리라 - 실로 파숫군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사실을 빌라도가 안다고해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초에 무덤을 지키는 일은 빌라도가 지시한 일도 아니거니와(27:64,65), 대제사장들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돈으로 빌라도를 매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방법은 그 당시에 유효하고도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28:15
오늘낱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 본문에서 `오늘날 까지'라 함은 마태가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인 A.D.50-70년경을 뜻한다. 그런데 A.D. 150년경에 초대 교부 저스틴(Justine Martyr)이 쓴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cum Tryph., 108)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유포되기 시작한 거짓말이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기독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니 이 거짓말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소위 `도적설'이라는 부활 이설(異說)로 남아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 한편 A.D.165년 경에 기록된 베드로 복음서 11:46-49에 의하면 군인들과 장로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대인 -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표현법을 마태가 사용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구분이 될 정도로 갈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본문에서 마태는 기독교인과 대별되는 말로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28:16
열 한 제자 - 27:5에서 보도된대로 열 둘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죽었으므로 열한 제자만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갈릴리.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나타내 보이셨는데 마지막선고 명령이 주어지는 곳으로 갈릴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본서 뿐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방의 상징이자(4:15), 예수의 주된 관심사인 소외(疏外)된 사람들 즉,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유대교의 거짓된 종교인들로부터 기만당하는 민중들의 도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쨌든마태는 갈릴리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명령(7,10절; 26:32)에 집중하기 위해 예수의 유대현현 등과 같은 다른 기사들을 모두 생략하고있는 것이다.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 이 산은 예수께서 이미 명하셨던 곳이라고 하는데구체적으로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과연 그 산이 어떤 곳인지(혹 다볼 산 또는 팔복산이라고도 하나 확실치 않다) 복음서에서 찾아내기는 어렵다. 예수께서는 분명 부활 이후몇번의 현현 중에 이미 제자들과 당신이 익히알고 있는 산을 지명하셨음에 틀림없다. 실로산은 하늘과 지상이 만나는 곳으로 하늘의 대명령을 땅에 선포하신 지상 명령에 (the Great Commission)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예수의 가르침이 베풀어지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장소가 바로 산이었기 때문이다(5:1; 8:1; 17:1,9; 24:3; 26:30). 구약에서도 산은 매우 중요한 곳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고(출3:2이하)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다(출 32:15). 여하튼 예수의 지상 명령(18-20절)과 갈릴리의 한 특정 지역이 관련된것은 예수의 비참한 배경과 이방 선교라는 본서의 대주제와 함께 연결된다(10절). 한편 많은 권위있는 주석가들은 본문의 이 장면을 고전 15:6에 바울이 기술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사건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 이유로 이곳 소집에 대하여는 3회에 걸친 예고가 주어졌으며(7, 10절; 26:32) 그것은 지상 대명령을 (18-20절) 전달하신 회집이었고 갈릴리는 로마 정부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간섭을 쉽사리 피할 수 있는 곳으로서 500여명의 군중이 일거(一擧)에 모이기에 적합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28:17
예수를 뵈옵고 - 물론 11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목격한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모인 500여명의 형제 가운데 많은 수가 예수의 부활체를 처음,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상태로 목도하였을 것이다.
경배하나 -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 )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9절; 2:8; 4:9). 또한 이 단어는 `절하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9:18; 14:33; 15:25)공동번역 에서는 본문을 `절하다'로 번역하고있다. 본문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패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승리하신 분으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은 다른 곳(눅 24:10,11; 요 20:24-29)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보고도' 의심한 본절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난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첫째 난제는 그 의심하는 자가 11제자 중에서인지 아니면 500명 형제중에서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여기서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프로스쮜네오'가 단순히`무릎을 꿇다',`...에게 경의를 표하다'는 약한 의미로 사되지 않고 `경배(敬拜)하다'는 뜻 으로 사용되었다면 `11제자들'과 `오히려 의심하는 자'는 다른 두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배(예배)하는 자가 예수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리가 없고, 또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을리 없겠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의 확실한 목격자였던 마태는 그가 그때 그곳에 없었던본서의 독자들이 의심을 제기할지도 모를 위와같은 사항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실들에만 기억을 돼살려 생생히 묘사했던 것으로 보인다(8절). 한편 이러한 문제점을, `오히려...있더'(* ,호이데)의 읽기를`...자는 없더라'(* , 우데)는 읽기로 고침으로써 해결하려는시도가 있으나 이는 큰 무리가 있는 읽기이다(Beza 사본, Bornemann). 두번째 난제는 의심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제쳐 놓고라도, 도대체 왜 의심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 `에디스타산'(* ,<더러는> 의심하였다)은 신약에서 이곳과 14:31에서만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불신앙이 아닌 망설임을 뜻한다(`비록 더러는 주저하였으나',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I.P. Ellis). 어쨌든 주저한 자들이 11제자 외의 다른 사람들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왜 의심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여기에 대해 혹자는 (Hendriksen, Grosheide, Filson, Walvoord) 부활을 의심한 것이아니라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제시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예수가 부활후의 현현에서 항상 즉시로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생시(生時)와 변화상태와의 너무 큰 차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과연 그가 예수인가?'하고 의심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파르쿠르스트(L.G.Parkhurst,Matthew 28:16-20 Reconsiderd, p. 179)는 의심한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나 혹은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예
장에서처럼, 모든 의심이 제거되었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하튼 마태의 기사가 간결하기 때문에 마태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11제자가 아니라 그밖의 다른 제자들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불신앙과 공포에서 신앙과 기쁨에로의 변화는 주저하는 중에 서서히 나타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적어도 이미 두번이나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베드로는 적어도 3번, 도마는 1번) 11제자는 이 새로운 현현에 마주쳐 즉시 경배할수 있었겠으나 다른 제자들은 머뭇머뭇 주저(躊躇)했다. 실로 그들은 거듭된 예수 자신의부활에 대한 예언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는 절망에 휩싸였고, 당분간 완전한 신앙에로 복귀하기까지 의심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태는 다음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오순절의 성령 충만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태의 간결한 기사는 이 사실을 이미 전제한다. 왜냐하면 어떤 복음서 기자도그 구속사의 획기적인 사건을 간과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의 주제적관심들을 오직 주님의 선교 지상 명령에 집중시키고자 그 사건을 생략한 것이다.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의혹을 떨쳐버릴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아마 본문 이하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 많은 말씀으로 그들의 실추(失墜)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먼저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세, 모든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시아'(* )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것이다.
=====28:19
너희는 가서 - 여기 `가서'(* , 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형 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 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2:8,13; 9:13; 11:4; 17:27;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258-67).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것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6)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한다. 이는 이제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Hare, Walker).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Trilling, Hubbard,John p.Maier). 사실 마태가 '족속'(* , 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된다. 한편 `제자를 삼아(* , 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 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주고 -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 17)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 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 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 고후 13:13; 요일 3:23,24)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Trinty)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이름'(* , 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것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 에서 `...으로'(* ,에이스)에 관해 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 , 엄격히는 `안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한편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 )는 `잠근다'(왕하 5:14; 시 68:23), `씽는다'(막7:4; 눅 11:38; 딛 3:5)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침례' 또는 `세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실 중요한 것은 `침례'냐 `세례'냐하는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邁進)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 ,디다케)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쳐'(*****************, 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딤후2:2).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eyewitnesses')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earwitnesses)을 낳게 된다(O'Brien pp.264ff.).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되었다.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볼지어다(* ,이두) -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23).`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臨在)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까지'(* ,헤오스 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24:3). 그리고`항상'(* , 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게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parousia)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喜樂)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3:1-26:5).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전장이 한 밤중에 캄캄한 어둠이라고 한다면, 본장은 그 어둠을 깨치고 비취는 찬란한 광명에 비견될 수 있다. 본서의 시작은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의(2:2) 탄생에서 비롯되었거니와, 이제 본서는 만왕의 왕으로 부활하신 예수의 궁극적 승리와 영광으로 마감되고 있는 것이다. 에수의 죽음은 제자들을 심한 좌절과 허탈 가운데 빠지게 하였음에 분명하다(26:56). 비록 주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은 물론 부활에 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이 당시로서는 부활에 관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에선 부활하신 예수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서도 의심하는 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위대한 일군들로서, 그리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초극적 용기를
지닌 용사들로서 성도들 앞에 우뚝 설 수 있었다. 본장의 세부적 단락 강해에 들어가기전에, 먼저 사복음서 간에 평행되는 내용을 비교해 보고 또한 부활의 의의를 요약해 보기로 하자.
(1) 사복음서와의 비교.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부활 기사를 위해 가기 한 장씩 할애
하고 있으며, 요한 복음에는 무려 두 장에 걸쳐 부활 기사기 수록되었다(요 20, 21장)
. 그 중 요한 복음 21장은, 에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
를 단독적으로 기재하고 있다. 본서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 차례 나타난 것으로 되
어 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들 및 바울 서신을 통해 종합해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약
열 차례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순서대로 열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ㄱ)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막 16:9-11;요 20:11-18). (ㄴ)
다른 여인들, 곧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살로메 그리고 요안나에게 나타나심(마 28:8
-10). (ㄷ) 베드로에게 나타나심(고전 15:5). (ㄹ)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
심(막 16:12,13;눅 24:13-32). (ㅁ)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에게 나타나심(요 20:26-28
). (ㅅ) 갈릴리 해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심(요 21:1-14). (ㅇ) 갈릴리의 한 산
에서 열 한 제자를 포함한 500여 사람들에게 나타나심(마 28:16-20;고전 15:6). (ㅈ)
야고보에게 나타나심(고전 15:7).(ㅊ)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눅 24:44
-49;행 1:3-8). 이 가운데에서는 마태는,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사실(9절)과
갈릴리에서 나타나신 사실을(16-20절) 기록하였다. 이는 본서의 일관된 주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즉 메시야께서는 멸시와 천대를 감수하시며 친히 낮고 겸비한 자리에 처하
사 당신의 빛을 먼저 천대받는 백성들에게 비취신다고 하는 것이 그 주제이다(시 22:6
-8,13;69:8,20,21;사 11:1;49:7;53:2,3,8;단 9:26;마 8:20;11:16-19;15:7,8). 또한 '
이방의 갈릴리'(4:15)는 주님의 지상 명령 속에 함축된 이방 선교라는 차원 높은 주제
도와도 잘 조화된다(1;1;2:1-12;4:15,16;8:5-13;10:18;12:21;13:37;15:21-28;24:14).
(2) 부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부활 예고 및 부활 사건
자체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부활의 신학적 의의를 함축적으로 다루고 있지
는 않다. 이 부활 주제는 바울 서신에서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졌다(롬 4:24,25;6:4;8:
34;10:9; 고전 15장;고후 5:1-10,15; 빌 3:10,11;골 2:12,13;3:1-4;살전 4:14). 특히
부활장이라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특유의 치밀한 논리로써 부활 교리
를 소상히 전개해나가고 있다.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초대 교회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
심이자 기독교 신학의 골자라 할 수 있는 부활 사건의 의의에 관해서는 문단 강해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사복음서에 수록된 바 부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일고하
는 것에 그치기로 하자. 부활을 반박하며 에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사두개인들은
계대 결혼과 관련된 미묘한 질문을 예수께 던진 바 있다(22:23 이하). 이때 예수는 부
활 후 천국에서의 삶의 양태가 현실의 삶과 다른 차원임을 밝히 하면서, '하나님은 죽
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부활의 근거를 확인하셨다. 또한 예
수는 마지막 날에 택하신 자들을 일으키사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끌 것이라 말씀하셨으
며(24:31;요 6:39,40,44,54),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셨다(요 11:25,26).
1. 그리스도의 부활(28:1-10)
예수께서는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그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27:35,50;막 15:33). 그리고 그날 저녁에 아리마대의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장
사 지내었다. 당시 근동 지역에서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사망 당일이나 사망 후 24시
간 이내에 속히 매장하였는데(요 11:17,39), 이는 위생 문제에도 기인하였겠지만 시체
에 접촉되면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민 9:10-14)에 기인한 바 크다. 즉
시체를 바새도록 두는 것은 거룩하고 정결해야 할 약속의 땅을 더럽히는 행위로 간주
되었던 것이다(신 21:23). 특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바로 유월절이 시작되
기 직전이었기 때문에(막 15:42;눅 23:54;요 19:31) 더욱 급히 장사를 서둘러야 했다.
이렇게 장사되신 후 다음날 곧 토요일은 유월절이자 안식일이었다. 본문의 부활 기사
는 안식 후 첫날 곧 오늘날의 주일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부활한 시간을 대
략 오전 6시경으로 보면(1절), 주님이 운명하시고부터 부활하시기 까지는 50시간도 채
못된다. 그러나 일수로는 금요앨에서 주일까지 사흘이 되는 셈이다.
(1) 기록상의 차이점. 본문의 여인들은 두려움 가운데 초자연적 현상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목져ㄱ담은 정확한 사건 보고의 형태를 띠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이 이 사건을 놓고서 다양한 기록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은 당연하
다 하겠다. 예컨대, 본문의 '천사'가 마가복음 16:5에서는 '청년'으로 묘사되었고 누
가복음 24:4에서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한편, 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온 이유를 본문은 단순히 '무덤을 보려고'라고 기록하였으나(1절), 마가복
음은 향품을 예수께 바르기 위해서였다고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막 16:1).
(2) 상반되는 두 반응. 천사가 나타나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장면에는 두가지 상반
되는 반응이 나타나 있다. 먼저 무덤을 파수하던 자들은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물러
나가로 큰 지진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기절하다시피하였다(2-4절).
이와 대조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도 처음에는 두려워하였으나, 예수는
부활 소식을 듣고는 큰 기쁨에 사로잡혔다(8절).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마지막 날 주
님의 재림시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세상의 혼탁하고 사악한 조류에 휩싸이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가르침을 좇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인내로써 매진한 자들은 주님
이 다시 오시는 날에 한량없는 위로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진리
를 거역하고 육신적이고 세상적 욕정을 좇은 자들에게는 재림의 날이 큰 공포와 절망
의 날이 될 것이다.
* 부활의 의의.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몇마디로 쉽게 요약하기 힘들듯이, 부활의
사건 또한 너무도 크고 넓은 의미를 지니 것이기 때문에 쉽게 요약될 성질의 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극히 개괄적인 사항만 언급하기로 하자.
예수의 부활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생명의 속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지극히 풍요로우며 또한 영원하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 또한 본질상 하나님의 생명과
동일하기 때문에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 2:24). 따라서 예수께서는 성도
들의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의 권세 잡은 마귀를 물리치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
셨다(고전 15:20). 그리하여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 생명 안에 접붙임 받은 자들은 그
와 동일하게 영원한 새생명을 선물로 받게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
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
이 허락되었다(롬 6:4). 그러므로 부활의 새 생명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허락되었던
생명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생명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하는 새 창조(new creation)의 시작을 알
리는 신호에 다름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삼라만상이 새롭게 창조될
그날을 만물은 탄식하며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롬 8:19-23).
또한 부활에의 소망은 성도들로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때에 따라
서는 온갖 희생마저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게끔 만드는 위대한 능력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거니와, 만일 부활이 없다고 하면 실로 그는 엄청난 거짓말장이일 뿐만 아니라 세
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였을 것이라 고백하기도 했다(고전 15:17-19).
2. 부활 은폐 노력(28:11-15)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뵈온 후에 그 벅찬 감격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여인들과는(8-10절) 정반대로, 어떻게해서든 그 사실을 은폐
하기 위해 분주히 얘쓰는 자들이 있었다. 대제사장들은 파수꾼들로부터 실제로 일어났
던 일의 자초지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것을 날조하여
헛소문을 두루 퍼뜨렸다. 예수의 말씀과 같이, 실로 그들은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자들이었다(눅16:31).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꾸민 거짓말은 그 자체 내에 명백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바, 우리는 이러
한 모순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긴박하게 그리고 억지로 날조하였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모순이란 첫째로, 그 파수꾼들이 자고 있었다면 설령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갔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란 점이다. 둘째로, 무덤을 봉인한 무거운
돌을 옮기고 시체를 가져갈 동안 졸고 있는 군인들 중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믿기 힘들다. 그리고 세째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낭패와 공포 가운데 두문
불출하였던 제자들의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의 시신을 몰래 가져가려고 시도했다는 사
실은 믿기 힘들다.더욱이 그들 중에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목격하고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을 정도로 당시 그들의 믿음은 연약한 상태였다. 또한, 만일 그들이 예수의 시
신을 몰래 훔쳐내었다면 스스로 조작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훗날 목숨마저
불사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의 부활을 은폐하기 위해 허
위 날조를 꾀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예수 부활의 엄연한 역사성을 보다 확고
히 증거하는 일에 일조하였을 뿐이라 하겠다.
* 예수의 부활을 불신하는 여러 견해들. 예수의 부활을 불신하기 위해 마련된 여러
견해들을 열거하여 그 허위성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시체 도적설. 이에 관해서는 바로 앞 문단 강해에서 고찰하였다.
(2) 기절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다만 일시적으로 졸도해
있다가 무덤으로 옮겨진 이후에 깨어나 달아나셨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다
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거부되어야 한다. (ㄱ) 예수의 죽음은 빌라도의 명에 의해 공
식적으로 확인되었다(막 15:44,45). (ㄴ) 십자가 처형 당시 한 군병은 예수께서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다리를 꺾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쏟게 했다(요 19:
33,34). (ㄷ) 설령 기절하신 상태였다고 가정할지라도, 그토록 치명적 상처를 받으신
분이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를 밀어 제치고 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며 더욱이 파수꾼
들의 엄중한 경계를 뚫고 나갈 수도 없없을 것이다.
(3) 본문의 여인들이 어두워서 다른 무덤을 찾아갔다는 견해. 그러나 이 견해는 성
경 본문의 내용과 상충된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해가 돋아 있었고
(막 16:2), 이 여인들은 예수의 무덤을 미리 눈여겨 보아두었다(막 15:47). 그리고 여
인들 뿐만 아니라 요한과 베드로도 빈 무덤을 보았다(요 20:5-8).
(4) 유대 지도자들 내지는 로마의 당국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따로 보관하였다는 견
해. 이 견해가 사실이라면,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널리 공표하고 다닐 때(행 2:24
등) 그들이 예수의 시신을 증거로 제시하여 제자들을 사기꾼으로 낙인찍어 버릴 수 있
었을 것이다.
(5)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서들 간에 모순된다는 견해. 예컨대 그들은, 무
덤에 나타난 천사에 관하여 마태와 마가는 '주의 천사',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고
각각 표현한 반면에 누가는 '두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는 점을 모순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여인들은 무덤 안에서 일어난 초자연적 사실과 직
면하여 큰 놀라움에 사로잡혔으며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구술하기란 몹시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실제로 '두' 천사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여인들은 그 중 한
천사의 이미지에 압도당하여 '한' 청년이라고 이야기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인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결여한 자는 종교적, 정치적 기득
권을 수호하기에 연연했던 당시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돈에 눈이 먼 로마 군병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예수께서 바로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심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의 부활이 오히려 너무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3. 지상 대명령(28:16-20)
본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의 한 산에 나타나사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강렬한 여운을
느낀다. 왜냐하면 본문은 본서 전체를 마감짓눗掃隙?성격을 지님과 아울러 제자들
의 증거 사역과 더불어 개시될 교회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장엄한 서언(序言)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지상 대명(至上大命)의 내용을
분석해봄으로써 마태복음의 강해를 마치기로 하자.
(1) 예수의 권세. 예수는 제자들에게 대사명을 위임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의 권세
를 상기시킴으로써(18절),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의 근거를 확실히 밝히셨다. 인
류의 구속을 위해 지극히 낮고 천한 모습으로 탄생하고 또한 일평생 섬김의 도를 실천
하다 마침내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하셨던(27:27-44) 바로 그 예수께서 이제
유대인의 왕(2:2)이요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제자들 앞에 서신 것이다(빌 2:6-11). 예
수 안에는 모든 것이 충만하게 거한다(골 1:19). 그리고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시다(요 14:6).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만물이 다 내 것이라'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잇는 것이다(고전 3:21).
(2) 예수의 명령.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사명은 첫째로, '가서 만 백성에
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내용이다. 이는 복음의 우주적 성격을 시사하는 말씀으로서,
당시 유대교의 편협한 국수주의(國粹主義)의 영향하에 있었던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있
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까지는 많은 난관들을 극복해야 했던 것이다.
예컨대, 사도 베드로는 '보자기 환상'이라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접하고 나서야 비
로소 이방 선교에 적극적 열성을 보이게 되었다(행 10장). 둘째로, 세례를 베풀라는
내용이다. 물론 형식상의 세례 자체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항인 것은 아니라
는 점은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도적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눅 23:43). 성도 공동
체 앞에서 자기의 신앙을 공표함으로써 스스로 결단과 근신에 나아가도록 한다는 점에
서 매우 중요한 예식이라 하겠다. 특히 이 셸슨례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삼위일체(三位
一體)에 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이는 전혀 의외의 내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
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성부 하나님에 관해 말씀하셨고(요 14:10-13) 공생애의 막
바지에 이르러서는 보혜사 성령에 관해 분명히 언급하신 바 있기 때문이다(요
14:16,17). 세째로, 이 명령은 훈육(訓育)에 관한 내용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 증
거와 아울러 그 증거를 받아들인 자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시키는 사명을 부여받
은 것이다.
(3) 예수의 약속.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무리와 항상 함께 하시
리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이다(20절 후반절). 성도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축복의 약
속이 있을 수 없으며, 이보다 더 큰 위로의 약속이 있을 수 없다. 이 위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늘 주와 동행하는 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이다(시 23:4).
* 예수의 지상 명령에서 얻은 교훈.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그의 제
자들에게 주신(행 1:8,9) 말씀을 가리켜 흔히 지상 대명(至上大命, the Great
Commission)이라 한다. 이는 곧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함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
들(엡 4:4)에게 주시는 명령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
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할 성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주신 명령은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가라, 제자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 이 4대 명령을 통해 그 각각의 교훈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2) '가라'(Go) : 이것은 성도가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
세를 취하라는 명령이다. 성도들이 처한 가정, 학교, 직장, 교회당, 선교지 등은 모두
천국 대사의 부임지가 된다. 가정, 학교, 직장, 교회, 선교지로 '가라!' 결코 머뭇거
리거나 소극적. 도피적인 생활을 하지말라.
(2) '제자를 삼으라'(Make disciples) : 예수의 지상 명령 중 가장 궁극적인 내용
으로서 복음을 전하여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라는 명령이다. 피전도자에게 대하여 전
도자는 영적 부모요 스승이 된다(고전 4:15). 전도의 대상은 '모든 족속' - 모든 인
종, 모든 민족, 모든 계층의 사람들 - 이다. 각자 처한 생활의 일터에서 말과 행동과
인격과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
(3) '세례를 주라'(Baptize) : 외형적인 면에서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라는 뜻이
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주께서 피로 세우신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소속되어 학습, 세례,
임직(任職)을 받아야 한다(참조, 행 20:27). 이 외형적인 교회 제도를 무시하는 무교
회주의(無敎會主義)는 성경적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신앙적 의식과 사업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3위 1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목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지켜져야 할 하나님 중심주의를 말한다.
(4) '가르치라'(Teach) : (3)의 명령이 외형적인 신앙 목표를 말한다면 이 명령은
내면적인 신앙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즉 복음을 듣고 교회의 일원이 된 초신자는 구
원받은 데서 그치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엡 4:13-15) 신앙
인격이 성숙해야만 한다. 이 신앙 인격의 성숙은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 즉 그의
말씀을 배우고 '지킴으로써', 즉 주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진다(계 1:3).
이러한 지상 명령의 4대 강령은 성도들의 생활에 있어서 실제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된다. 이러한 원리가 보다 강력하게 실천될 때 그만큼 이 시대 교
회들의 숙원리라 할 수 있는 '세계 복음화'는 앞당겨 이루어질 것이다(참조, 행 1:8).
그런데 이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먼저 자신이 영적
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최선의 영적 무기는 하나님을 경외하
며(요 9:31) 기도로써 그분과 대화, 교제하는 것(막 9:29),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항상 그분의 선하신 뜻을 분변(分辨)하는 것(시 119:9,97-100)이다. 그
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시는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실로
예수의 제자된 우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敎區)'라고 외쳤던 존 웨슬레(John Wesley)
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대상으로 삼는 활발한 선교 활동을 통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막 4:20)을 맺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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