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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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그 때에(* , 토테) - 마태복음에서 자주(약 90회) 사용되는 단어이다.(2:7 ; 24:9). 특히 본서에서는 이 용어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을 나타내기 보다는 대략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의 '그때에'라는 것은 인자가 오는 때, 즉 종말적 심판의 때를 말한다. 그 종말적 심판의 때에 대한 묘사는 이미 24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24:29, 31, 36, 50, 51). 천국은 마치...같다 하리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친국의 극히 제한된 일면을 제시하고 계신다. 여기서 '천국'에 대해서는 3:2 ; 4:17 ; 13:11등의 주석을 참조하라.
등(* , 람파다스) - 접시 모양의 그릇 한쪽 끝에 등근 심지를 담가 호롱불처럼 불을 밝히는 기름등인지 아니면 계속 불을 밝히기 위해서 기름을 가끔 묻혀 사용하는 햇불인지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없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기름을 넣어 사용하는 등잔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유대인들은 이 등을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그것을 치켜들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의 행로를 밝게 했다고 한다. 이때 이러한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받았다.한편 여기서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성도가 주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어떤 것이다.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도의 외형적인 신앙 생활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쳐녀 -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가지 절차(節次)가 있었다. 즉 일반적으로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간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종교 의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그들을 배웅한다. 한편 잔치는 며칠동안 계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물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신랑의 집이 매우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모든 예식이 치러지기도 헹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의 잔치 참여를 거부한 자가 신랑이 아니라 신부의 아버지여야 함에도 본문에는 신랑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공식적인 잔치를 통해 비로소 두 사람의 결혼은 성립되었다. 여기서 '처녀'(* , 파르데노스)란 신부가 아닌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bridesmaid)를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에로 인도(引導)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처녀'의 숫자가 '열 명'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1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10이라는 수치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출 20:3-17 ; 시 33:2), 특히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중에서 '10'이란 숫자를 자주 언급하셨다.(28절 ; 눅 15:8 ; 19:13-17).이와 더불어 '10'명은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定足)인원이었다. 그리고 유대의 풍속에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Talmud).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열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Lenski). 특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역사적 교회를 예시(豫示)하는 주의 순결한 처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과 신랑 예수의 인격적 유대 관계는 항상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Lange).

=====25:2
그 중에 다섯은 - 여기서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5명씩 양분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련하다'로 번역된 원어 '모라이'(* )는 '우둔한', '얼빠진' 등의 의미로서, 특별히 두 부류의 대별되는 처녀들의 모습 중 이 말이 앞서 언급된 것은(3, 8절) 어리리석은 처녀들의 행태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와 함께 '슬기 있다'로 번역된 '프로니모이(* )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수 있으며, 또한 매사에 신실한 것을 가리킨다(24:25). 실로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처녀, 함께 초대된 들러리 모두 등을 가짐) 하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신랑이 올 때 그들의 감추어진 내면과 그 사실성 여부가 극명히 노출되고 말 것이다(7, 8절).

=====25:3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불을 밝힐 때 사용할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한다. 그런데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인지 전혀 기름을 등에 넣지 않았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Robertson, Hendriksen). 한편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 근원적 요소로서 만약 등을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1절) '기름'은 그 신앙 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졔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등이라고 할 수 있다(사 61:1 ; 슥 4장 ; 히 1:9). 특히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령의 역할 중 중생케 하시며 내주(內住)하셔서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충만한 역사(役事)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체험조차 얻지 못한 외형적 신자(church-man)로 볼 수 있다. 실로 형식적인 교회출석, 봉사, 선교 등의 외면적인 신앙 생활이 아니라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되고 믿음과 사랑의 역동적인 힘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 생활이야말로 기다리는 바른 성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한편 4절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다는 표현과 8절의 '등불이 꺼져가니'라는 표현에서 기름이 여분의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등불의 기름을 담는 용기가 작았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tary).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처음부터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양의 기름을 등잔에만 준비해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신앙 생활 역시 중단없이 꾸준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25:4
슬기 있는 자들은...기름을 담아 - '슬기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2절) 그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가 늦게 올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실로 일회적인 은혜 체험이나 행함이 결여된 믿음, 그리고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준비성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자만이 기쁨으로 그분을 맞을 수 있다.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 이 구절은 24:48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예언과 같은 내용이다. 이 표현은 심판의 주이신 예수께서 다시 온다고 한 때가 늦어짐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고대한 바처럼 그렇게 신속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비록 종말이 지연(遲延)된다고 하여 나태한 신앙 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졸며 잘새(* ,에뉘스탁산 가이 에카듀톤). '졸며'라는단어(에뉘스탁산)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인, 또는 단지 앉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깐 조는 상태를 나타낸다. '잘새'(에카듀돈)는 서술적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인 행동 곧 잠에 완전히 취해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이 표현은 종말 지연으로 나타난 교회의 어려움에 직면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졸며 자는' 것이 모두('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책망(責望)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졸며 자는 것이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구분시켜 적용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재림의 주께 책망 받은 것은 단 한 가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일에 의해서 초래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와 더불어 종말이 지연됨으로써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역설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즉 예수 재림이 졸며 자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때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어려울수록 신앙 생활을 견고히 해야 함을 역설하고있다.

=====25:6
밤중에(* ... , 메세스뉴토스) - 유대인들의 혼례식은 초저녁 경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훨씬 넘겨 열 처녀가 잠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깊은 한 밤중(at midnight)이라고 보아야한다. 이처럼 주께서 재림하는 때,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1)24:42-44 ; 살전 5:2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음과, (2) 예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3)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한 밤중에 오신다고 믿는 믿음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한 밤중에 구출된 경험 때문이었다(출 12:29).
소리가 나되(* ,크라우게 게고넨) - 본문의 시제는 현재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드라마와 같은 생생하고도 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Moule). 즉 이것은 그 소리침의 돌연성(突然性)과 마치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의 긴장감을 암시한다. 이를 번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가 될 것이다. 이 소리의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일단의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소리의 내용은 신랑이 오니 마중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주목할 것은 5절에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 밤중에 잠이 든 장면과 급작스런 소리의 외침 그리고 뒤이어지는 기름이 떨어져 다급히 기름구하러 달려가는 소란스러움이다. 이것과 서로 대비되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가 얼마나 돌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를 긴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보라 신랑이로 다 맞으러 나오라 - 돌발적인 외침의 내용이다. 실로 그렇게 고대하던 재림(parousia)이 이 외침과 더불어 실현된 것이다. 이로써 인내와 대망의 기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심판과 상벌(賞罰)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 자신있게 대처할수 있는 자만이 '신랑올을 맞으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25:7
다 일어나 - 외형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를 맞이하려는 것은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자나 모두 같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도 역시 심판의 사건까지는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없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확정된 사실이다(13:24-30).
등을 준비할 새 - 여기서 '준비할 새'(* , 에코스메산)란 '정렬시키다'는 뜻으로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는 동시에 예비한 기름(4절)을 등잔에 채워넣는 일련의 작업을 완비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준비 작업이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으나 준비한 기름이 없던 미련한 처녀에게는 당혹스런 것이었다.마침내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25:8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 심판의 때에 미련한 자로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그 준비한 등불이 꺼져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꺼져가니'(* , 스벤뉜타이)는 중간태 현재직설법으로서 동작의 지속성(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준비한 등불의 마른 심지가 공급되는 기름이 전혀 없어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꺼져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의 상태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枯渴), 은혜의 결여(缺如), 새 힘을 주시는 성령과의 단교(斷交) 등을 암시하는 동시애 그들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기름을 좀 나눠 달라 - 앞 구절에서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과 제발 기름을 좀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심정이 극적으로 연결되고있다.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있다.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은혜와 신앙의 기름을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심판의 평가는 자기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어다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름의 결핍(缺乏)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처럼 자기 영혼과 생명 문제가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릭석은 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25:9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 기름을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따라서 이같은 거부 의사는 결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종말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평가 대상이 될 뿐이다. 정녕 슬기로운 자들은 여분의 기름을 예비하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꾸어주면 꾸어준 사람도 꾸어 쓴 사람도 모두 다 부족하여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부족할까하노니'(* , 메포테우 메 아르케세)란 말 속에 이중의 부정어('메포테', '우 데')가 첨가됨으로써 그 뜻은 절대적인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함께 쓰기에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혜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즉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심판과 구원이 있는 것이다(겔 18:2-4 ; 요 14:16).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 여기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란 상징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의 역꾼들을 암시한다(Lenski). 그들의 메시지에는 구원의 유일한 해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눅16:29).
너희 쓸것을 사라 - 이는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사 55:1 ; 계 3:18).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마치 값진 보화를 획득키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甘受)하듯 어떤 값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13:44-46). 물론 그 값은 인간의 자의적 노력에서라기 보다 하나님편에서 제공하신 것으로서 믿음과 성령의 감화로 인한 기도와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신실한 마음 등일 것이다.

=====25:10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 '사러 간 동안에'(* , 아페르코메논 데 아우톤)는 현재 분사구문으로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즉 저희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극명(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 이 구절에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 천국이 예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인내하며 기름을 준비하는 등의 예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신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이다.
닫힌지라(* , 에클레이스데) - 이 단어는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이다. 따라서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1)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2) 이제부터의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틴의 관습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눅 13:25).

=====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 - 여기서 '그후'(* , 휘스테론)는 종말적 심판이 완결(완결)된 때를 가리킨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때인 것이다. 따라서 '남은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갔다가 돌아온 미련한 다섯 처녀로 보아야 한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여주여'(* ,쿠리에 퀴리에)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구절은 7:21, 22절 절에서도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닫혀진 문 앞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애잔한 신앙 고백적인 간구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25:12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 여기서 바로 앞의 문장 '주여 주여...열어 소서'라는 애절한 간청과 대비시켜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의 '알지 못하노라'에서 '알다'는 뜻인 원어 '오이다'(* )는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 깨달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알지못하노라'란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없다는 엄정(嚴正)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이다. 실로 심판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믿음으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신다(창 18:19 ; 요 10:14). 여하튼 이와 같은 형식의 냉정한 대답이 7:21-23 ; 눅 13:25에도 나오고 있다.

=====25:13
깨어 있으라 - 이 구절은 본 비유의 주제를 강조하는 말로서(24:36, 42, 44, 50) 예수의 비유 뒤에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다(막 13:34). 여기서 '예비하고 있으라'는 어구는 24:44의 내용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미련한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고 있다는 5절의 내용은 본구절과 모순되므로 예레미야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후대의 삽입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3절이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영적으로 '깨어있으라'(Keep watch)는 말은 육신적으로 '자지 말고 눈을 뜨고 있으라'(Keep awake)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후자는 졸음을 쫓아내고 전혀 잠자지 말라는 뜻이므로 본 구절의 의미에 부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유들이 뜻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이 강화(강화)에 말씀하시는 주요한 권고를 반복한 것이다.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 이와 같은 문장은24:36, 42, 44, 50에 똑같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어투는 마태복음 기록가가 종말의 때를 나타내는 일관된 방법이자 항상 '깨어 있어야'할 이유를 말한 것이다(5, 6절 주석). 결국 13절은 열처녀 비유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 요약하고 있으며,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항상 긴장되고 항상 예비되어야만 될 삶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다.

=====25:14
또(* ,가르) - 이 등위 접속사는 새롭게 시작되는 달란트 비유가 바로 설명한 열처녀 비유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즉 종말적 심판에 관한 열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내용이 같은 것이라는 점을 예측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때 - 이 구절은 막 13:34의 문장과 같은 형식이다. 막 13:34은 마가복음서의 종말론에 대한 결론부로서 그것이 본 달란트 비유의 도입부가 되고있다. 또 막 13:35는 마 25:13, 즉 열처녀 비유를 통해 암시한 종말 교훈의 결론이 되는'깨어 있으라'는 구절이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막 13:34,35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사람'은 같은 평행비유인 눅19:12-27을 보면 왕위를 받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는 귀인(귀인)임을 알 수 있다. 이는아마도 헤롯이 분봉왕(분봉왕) 책봉을 받기 위해 오래도록 로마에 있었던 사실이나, 아니면 당시 상업을 하던 부호들이 먼 무역 여행을 위해 오랜 기간 집을 떠났던 사실에 근거한 비유일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같은 일상적 사실을 암시한 것이기 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이 땅에 성육신(Incarmation)하셨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할 일을 맡기시고 승천하셨다가 다시 이 땅에 심판의 주로 오실것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타국에 갈제'(* , 아포데몬)란 문자적으로 자기가 살던 곳에서 '막떠나려 할 제' 또는 '해외로 가려 할 시점에'라는 뜻을 갖고 있다. 눅 19:12은 이와 유사하게 '먼 나라로 갈 때에'로 번역되어 있다.
그 종들을 불러 - 여기 '종들'(* , 둘로이)은 그 주인의 전적인 소유였으나, 여기서는 하나의 인격적 친근감을 주는 그야말로 주인과 동등한 위치로서의 신분을 암시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그 '종들'은 여전히 주인의 권위아래 놓여 있다. 한편 이 '종들'은 상징적으로 주의 승천 이래로 당신의 교회를 책임질 복음사역자들 및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 고대 사회에서 종들은 그들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권한과 책임이 있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종들에게 자기의 동업자처럼 각각 소유를 나누어 준다. 한편 여기서 '소유'(* , 휘파르콘타)란 '재산', '소유물'이라는 뜻이며 본문에서는 주로 '돈'을 가리킨다. 이 '돈'은 그들 각자에게 적당하게 '맡겨'질 것이지만 여전히 그것에의 원소유권은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즉 비록 '종들'의 노력과 지혜로 많은 이윤(이윤)을 남긴다 하더라도 그것의 범적 소유권은 여전히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필연적으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카타 텐 이디안 뒤나민) - 이 말은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인은 종들에게, 소유를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하였음을 말해 주는데 이것은 불공평에 의한 공평의 원리를 실현하시는 그분의 지혜를 반영한다(민 7:4-9). 이러한 재능에 따른 배분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인은 맡김을 받은 청지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소유 곧 물질적 소유 뿐 아니라 성격, 지식, 교육, 의지, 환경 등은 근본적으로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최선을 다해 잘 관리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2) 사람마다 능력과 재능에 따라 소유가 맡져졌다는 것은 저마다 고유의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말이고, 또한 그것은 각각 소중하고 존귀한 것임을 말한다. 각 사람마다의 개성과 창조적 능력은 다양하지만 그것은 각각 독특하게 소중한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재능에 따라 적합한 소유가 맡겨졌다는 믿음은 각각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그 일을 맡긴 주인에 대한 충성의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 '달란트'(* )라는 말은 구약시대에는 무게의 단위로 쓰였었는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무게와 화폐의 단위로 동시에 쓰여졌다. 본문의경우에는 화폐의 단위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무게 단위가 화폐 단위로 발전된 것은 금이나 은을 저울로 달아서 상품 값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달란트를 화폐 단위로 취급했을때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엄청난 가치가 된다(1 데나리온은 노동자 1일 품삯에 해당). 이것은 눅 19:11-1에 언급된 '므나'(1므나= 약100 데나리온)와는 큰 차이가 있다. 한편 본문의 비유를 통해 '달란트'는 보통 상징적 의미로 '재능'을 뜻하게 되었다. 실로 각자의 독특한 재능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인 것이다.
떠났더니 - 주인은 자신의 권위와 지혜로써 분배를 마친 후 더 이상의 염려나 망설임 없이 자기 길을 떠났다. 이것은 주인의 그 종들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 행동인 동시에 그 종들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는 행동이다.

=====25:18
땅을 파고...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 돈을 땅에 파묻어 두는 것은 그 당시의 돈을 보관하는 방법이었다. 즉 13:44에서 천국 비유를 말할 때 '밭에 감추어진 보배'라고 묘사하는 바와 같이 땅 속 보관은 당시 안전하게 재산을 보관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앞서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위험을 안고 장사를 한 두 종에 대비시켜 모험을 두려워하는 안전 제일 주의의 소심한 종을 묘사하고 있다. 실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적극적인 범죄나 사취(詐取)가 아니었다. 그는 1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의 도를 정확히 간파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고의(故意)로 그 재능을 묵혀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그는 주인을 위한 적극적 충성과 봉사를 등한히 한 것이다. 실로 진취적인 봉사 의식의 결여는 곧 소극적인 범죄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또한 그의 불충한 죄의 동기(動機)를 언급하자면 적어도 그는 상대적 빈곤 의식 때문에 주인이 맡긴 '1달란트'의 가치를 무시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25:19
오랜 후(* , 메타 데 포륀 크로논) - 여기서도 종말적 심판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표현은 5절과 24:48의 '더디 오다'(* ,크로니조)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쓰여졌다. 물론 이같은 '오랜 후'라는 시간적 감각은 순전히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실로 천년이 하루같으신(벧후 3:8, 9) 그 분께는 영원한 경륜(經綸)의 한 부분일 뿐이다.
주인이 들어와 - 이 말은 '너희 주가 임하다'(24:42), '인자가 오다'(24:44), '주인이 오다'(24:46)라는 표현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는 것이다.
저희와 회계할새(* ,쉬나이레이 로곤) - 18:23에서와 같이 종말적 심판을 상업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Deissmann). 이 상업적 용어는 종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장사로 비유하였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실로 심판과 재림의 주께서는 종말의 심판 때에 지상에 거하는 모든 종들의 사역 결과를 놓고 회계(會計)하실 것이다(고후 5:10 ; 계 20:11-15).
주여 내게...주셨는데 -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가 활용하여 두배의 소득을 올린 그 소유의 출처가 주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여준 주인을 항상 의식하며 성실히 일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소유의 어느 하나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밝힌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보소서 내가...남겼나이다 -이는'내가(* ,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단지 주인의 맡긴 바 임무를 성실히 감당한 종이 자신의 성실성을 인정해 줄 주인에게 그 이윤을 펼쳐 놓으면서 외친 기쁨의 탄성(歎聲)일 뿐이다(고전 15:58).

=====25:20
주여 내게...주셨는데 -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가 활용하여 두배의 소득을 올린 그 소유의 출저가 주인인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여준 주인을 항상 의식하며 성실히 일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소유의 어느 하나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밝힌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보소서 내가...남겼나이다 - 이는 '내가'(* ,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단지 주인의 맡긴 바 임무를 성실히 감당한 종이 자신의 성실성을 인정해 줄 주인에게 그 이윤을 펼쳐 놓으면서 외친 기쁨의 탄성(歎聲)일 뿐이다.
(고전 15:58)

=====25:21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더 이상의 칭찬을 기대할수 없을 정도로 극진한 주인의 칭송(稱頌)이다. 특별히 '잘 하였도다'는 뜻의 헬라어 부사 '유'(* )는 종의 지난 노력에 대한 주인의 다함없는 만족과 인정의 표시였다. 그리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26절의 '악하고 게으른 종'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그 종의 온 인격이 무흠(무흠)하거나 완전하다는 뜻이기 보다 그 주인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특히 '착하다'(* ,아가도스)는 기능적 측면에서의 올바름을, '충성되다'(* , 피스티스)는 윤리적 측면에서의 신실성을 강조한 칭찬들이다. 정녕 선(선)과 충성은 주인의 시험을 감당할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었다(Wycliffe).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 이 구절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리움을 받은 이후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말은 역시 주인의 관심,즉 회계(會計)의 내용이 투자에 대한 이윤이 얼마나 되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충성하는 자세임을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주인이 맡긴 5달란트는 상당히 많은 액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주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미미(微微)한 것이었다. 여하튼 종말적 심판의 때에 성도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일을 했고,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에 있지않고, 순간순간 매사에 얼마나 성실했는지에 있어야 한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 이 구절은 작은 일에 충성한 종에게 돌아가는 보상 내용이다. 물론 이 보상은 주인의 회계 이후에 주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현세적이기 보다는 내세적인 것이 분명하며, 또 그 보상이 돈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일을 맡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이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가 더욱 신뢰감으로 깊어졌다는 것이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參豫)할지어다(* ,텐 카란투 퀴리우). 여기서 주인의 '즐거움'(* ,카라)은 (1)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10절) 주인이 와서 벌이는 천국 잔치로 볼 수 있다(계 19:9). 따라서 이 견해를 따르자면 우선 그 종이 천국 또는 영생에 들어가는 것과 그 주인의 초대를 받을 만큼의 영화로운 신분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천국은 잔치와 같은 축제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2) 또 '즐거움'은 주의 영광스런 현현(顯現)이제공하는 넘치는 기쁨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충성된 자로 인정된 사람은 주의 영광에 참예하여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시 16:11 ; 21:6).

=====25:22,23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참예할지어다 - 셈어의 특징인 반복 기법을 사용하여 20, 21절의 내용과 거의 흡사한 칭찬과 약속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동일 내용의 보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심판주의 회계 기준은 은사와 능력의 크기에 있지 않고 그 맡은 바에 대한 성실성과 충성도에 있다는 점이다. 한편 주인은 두 종에게 모두 '많은 것'을 맡길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두 종이 똑같은 양의 '많은 것'을 맡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로 천국은 획일적인 평등주의(equalitarian)의 실현장(실현장)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능력과 충성이 모두 인정되는 곳이다.

=====25:24
한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 주인이 주관하는 회계의 현장에는 충성된 자이든 불충분한 자이든 모두가 나아와 주인의 판결에 응해야 한다(고후 5:10). 한편 여기 '한달란트 받았던 자'(* ,호토 엔 탄란톤 에이레포스)의 시재가 완료능동태 분사로서 아직 그에게 '한 달란트'만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 여기 '굳은'(* , 스크레로스)라는 말은 '박정하고 포악하며 거칠다'는 뜻으로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무서운 분'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같은 평행 비유 눅 19:21에서 나오는 '엄한 사람'(* , 아우스테로스)이라는 단어보다 더 강경한 뜻으로 쓰인다(요 6:60 ; 행 26:14 ; 약 3:4 ; 유 1:15). 여하튼 종은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세워 결국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遺棄)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주인의 인격을 매도하는 더 큰 죄를 주인 앞에서 범하였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 주인을 매우 질이 나쁜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는 광적이면서 투자하는 데는 아주 인색하며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불로 소득을 얻는 파렴치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아마도 이 비난 속에는 자신이 다른 두 종들보다 훨씬 적은 양을 받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은근한 화를 분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Derrett).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 호덴 우디에스코르피사스) - 이는 추수한 곡식을 마당에 늘어 놓고 말린 후 키질을 하여 겨를 헤쳐서곡식을 모으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즉 좋은 주인을, 키질하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알곡(재산)을 모으려고 하는 불로 소득자로 비난한것이다. 이와같이 좋은 주인을, '굳은 사람', '심지도 않고 거두는 사람', '헤치지 않고 모으는 사람' 등으로 비난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 비난이 한 달란트를 받아 아무일도 하지 않고 주인 앞에 나온 게으른 종 자신에 대한 묘사이다. 즉 이 본문은 자기 변명을 통하여 자기모습을 묘사하는 우화적(寓話的)인 문학적 표현 방법이다. 그러므로 종의 주인에 대한 비난은 모두 종 자신의 게으르고 완악한 심성의 고백적 표현으로 보면 된다(26절 ; 눅 19:22).
내가 알았으므로(* , 에그논 세) - 이는 제 2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경험을 통해 익히 알아오고 있었다는 뜻이다. 실로 그는 자신의 왜곡된 판단을 근거로 주인의 품격을 극도로 모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25:25
두려워하여 - 이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즉 너무 엄격한 주인이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여 본전도 돌려 주지 못할 때 엄격한 주인에게 당할 벌이 무서웠던 것이다. 실로 이 종은 소심하고 진취적이지 못한 용기없는 사람인 동시에 자기 생명과 안녕에 대해 강한 집착을 지녔던 자이다.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 종은 자기 나름대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돈을 보관한 것이다(18절). 평행 본문인 눅 19:20에서는 수건에 싸두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두 표현 모두 맡겨진 돈을 아무일에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여기서 게으른 종이 무엇을 하여 모험을 감행할 의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 이는 표면적으로는 자기가 주인의 원금(元金)에 아무런 손해도 끼치지 않고 잘 보존해왔다는 뜻이지만, 실상은 '내 할 바를 다했으니 당신은 내게 아무런 꾸중도 할 수 없습니다'는 뜻의 무례하고도 원망 섞인 불평이었다. 즉 주인이 자기에게 맡겨준 것을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무 일도 하지않은 것을 당연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보관을 위해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실히 활용하여 그에 따른 이윤을 남기라고 맡겼음을 알지 못했다. 소유를 맡겼을 때는 그 소유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께달아 자기의 것이나 다름없이 성실하게 애정을 갖고 그 달란트를 맡아야 했었다.

=====25:26
악하고 게으른 종아(* ,포네레 둘레 카이오크네레) - 여기서 '악하고'(* , 포노스)는 '성가시게 굴음', '무가치한', '악독한'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게으른'(* , 오크네오)은 '지체하다', '둔하다', '머뭇거리다'의 뜻을 가졌다. 따라서 전체적인 의미는 주인의 의도에는 전혀 무신경하고 자기 안일에만 심취하여 결국 주인에게 해(해)가 된 무익하고 무가치한 종에 대한 묘사이다. 이는 21, 23 절에 이미 제시된 바 '착하고 충성된 종'과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나는...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이 구절은 앞서 종이 주인에게 변명한 내용에 대해 반문하는 것이다(24절). 이 반문의 의도는 주인인 자기 자신이 절대로 종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악질적인 구두쇠나 부도덕한 사람이 아님을 밝히는데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게으른 종에게 그렇게 반문함으로써 도리어 그 내용이 종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즉 이 문장을 끊지 않고 게속 연장시켜 본다면, '그렇게 악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라는 말이 나을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평행 구절인 눅 19:22은 이와 같은 의미를 분명하게 해준다.즉 누가복음에는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라는 문장이 삽입되어 종의 변명이 곧 자기자신에 대한 심판 선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 에데이 세 운) - 이 구절은 앞서 게으른 종이 한 변명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종의 변명대로 주인이 매정할 뿐만 아니라 원금을 손해볼까 해서 그것을 이용하기가 힘들었다면 적어도 안전하고도 손쉬운 방법으로 이윤을 불릴 수 있는 일이 또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취리(取利)하는 자들(* , 토이스 트라페지타이스) - 돈을 맡아 보관하면서 이자를 주거나 수수료를 받고 돈을 교환해 주는 환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의 은행이나 돈놀이하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돈놀이가 금지되었고(신 23:19 ; 시 15:5). 다만 이방인과의 거래에만 인정되었다(신 23:20). 그렇지만 이같은 율법적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느 5:10-12). 한편 신약 시대에 이르러 유대 랍비들은 '변리(邊利)로 돈을 빌려주는 것'(lending at interest)과 '고리 대금업'(usury)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변리로 돈을 빌려주는 무리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변리(* ,쉰 토코) - 이 뜻은 원래 '이자'로서 여기서는 높은 이윤 곧 고리 대금(usury)을 가리킨다. 한편 이 단어는 '낳다', '생기게 하다', '자손' 등의 뜻을 지닌 '듸크토(* )에서 유래된 말로 본전(本錢)에 이자가 증식하는 대금업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는 부당한 이익이나 억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통상적 관례에 의한 이자로 보아야 한다. 한편 초기 로마 제국 시대에는 합법적 이자율이 8%였으나 차츰 12, 24, 48%의 고이자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Vincent, W. W. Bukland).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변리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찬성하시거나 폐기하셨다는 이론을 전개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이자놀이에 대한 도덕성 여부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않으셨다. 다만 당신의 선한 의지를 설명하실 목적으로 융통성 있게 세상에 있는 제현상들을 활용하여 설명하셨을 뿐이다(눅 16:1-9 ; 181-8).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해 단지 '악하고 게으른종'이라고 꾸짖은 정도의 심판이 아니라 그에 따른 물리적 징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구절은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어진 보상(21절)에 극한 대비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더 큰 것을 맡기면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더욱 깊은 신뢰감으로 형성되는 착한 종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악한 종의 경우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는 악화되고 그 모습은 더욱 처참하게 된 것이다. 실로 자기에게 맡겨진 은사와 재능과 은혜를 성실하게 활용하지 않으면 그 주어진 것은 그대로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어 버린다(계 12:5).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타인을 부요케함으로써 고통의 강도(강도)를 배나 더하게 된다.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 하나님의 계획과 거룩한 사역은 인간의 불성실에 의해 훼손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비록 게으른 자에 의해 조금 지연되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정하신 때, 정한 목적에 따라 당신의 일을 맡을 만한 자를 통해 끝내 성취하시고야 마신다. 한편 열 달란트를 맡은 자는 주어진 역할을 온전히 수행했던 자로서, 결국 주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를 활용하면 할수록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있다.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 이러한 격언 구절은 막 4:25에서도 사용되고13:12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된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달란트 비유와는 전허 다른 내용에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독립적으로 전해져 사용되는 격언구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유를 마무리짓는 결론적인 말을 대중이 익힌 사용하고 있는 격언구로 맺으신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일에 성실하게 충성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종말적 심판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명료(明瞭)하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정녕 영적 세계에서도 물질적 세계에서처럼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분명 나타날 것이다(삼상 21:3, 4

=====25:30
이 무익한 종(* ,톤 아크레이온) - 이 말은 '유익하다(* , 크레이아스)라는 단어에 부정 접두어 '아'를 붙여 '유용하지 않은', '쓸모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실로 능동적으로는 선한 일에 매진(매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는 주인이 맡긴 일에 소홀히 하는 종은 그 주인에게 아무 쓸모없는 자인 것이다(눅 17:10). 이처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외에도 소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께 페역한 죄가 된다.
바깥 어두운 데로(* ,토 스 코토스) - 이 구절은 앞의 21절과 23절에서 착한 종에게 했던 '주인의 즐거옴에 참예할지어다'라는 말과 반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바깥 어두운 데'는 주인과 영영한 관계 단절(斷絶)을 암시하는 동시에 어둠의 세력인 사단이 거할 최종적 심판 장소로 익혀 알려진 표현이다(8:12 ; 계 20:10-15).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와 같은 구절은 종말에 관한 비유를 제시한 24:51외에 8:12 ; 13:42, 50 ; 22:13 등에도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서 끔찍하고도 영원한 징벌을 나타내는 상투적 문구임을 알 수 있다.

=====25:31
인자(* ,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 이 말을 직역하면 사람(안드로푸)의 아들(휘오스)이 된다.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명백히 자신을'인자'와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문맥상(24:3) 종말의 때에 심판주로 구속주로 임하시기로 약속된(단 7장 ; 율 3:1-12 ; 슥 14:5)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셨다(8:20 ; 눈 5:24. '인자 개념' 참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 심판의 주께서 최후의 순간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다(16:27 ; 24:30 ; 살전 4:16 ; 살후 1:7, 8).여시서 특별히 '영광으로'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신적(신적) 광휘가 충만한 예수가 오시는 모습을 바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붙여진 형용구이다(Broadus).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사실은 예수 재림의 장면이 전우주적인 성격을 지닌 장엄한 것임을 암시한다(24:31 ; 살후 1:7, 8 ; 계 14:14-20). 한편 본문의 말씀은 주께서 수난당하시기 전 단지 3일전에(26:5, 17)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예언적 메시지가 지니는 신적 탁월성과 차고 넘치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심판자로서 뿐 아니라 왕으로서(34절)오실 것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19:28 ). 특히 그의 '보좌'는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사될 것을 가리킨다(28:18; 고전 15:25 ; 히 12:12).

=====25:32
모든 민족을(* , 판타 타 에드네) - 똑같은 구절이 24:14과 28:19에도 나온다. 여기 '모든 민족'은 유대 민족을 포함하여 이방 세계의 모든 민족까지 가리키는것으로서(행 17:26) 보편적 심판의 의미를 주고있다. 따라서 종말적 심판이 보편적 심판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맡이다. 실로 천국 복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기 때문에(2:1-12 ; 3:15, 16; 8:11) 모든 민족은 왕 앞에 서야 한다.
모으고(* ,쉬나크데세타이) - 수동태로서 번역하면 '모여지고'가 된다. 이는 모든 인류를 주 앞으로 모으는 추수꾼 천사의 사역이 역력히 암시된 표현이다(24:31).
목자가 양과염소를 분볕하는 것같이 - 종말적 심판의 때에, 열처녀 비유나 달란트 비유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그례지 못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을 비유의 서두(序頭)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양과 염소는 낮에 풀을 뜯을 때는 무리에 구분없이 섞여 지낸다. 그러나 특히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기후인 팔레스틴에서는 잠을 잘 때에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하였다. 왜냐하면 양들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소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도록 하였다. 또 낮에도 서로 구분되기는 하는데 왜냐하면 팔래스틴 염소들은 대부분 검은 계통인데 반해 양들은 흰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성격이 판이(判異)하게 다른 짐승인지라 저회들끼리 무리를 이룬다. 여기서는 목자가 직접 무리를 구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앞에서 '모든 민족'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보아 양과 염소를 심판의 대상이 되는 모든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

=====25:33
양은 그 오른편에,염소는 왼편에 - 양의 무리는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양분함로써 심판의 명료성(明瞭性)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제 3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정녕 최후 심판의 순간에는 옳거나 틀린 것만 있을 뿐이다.또 여기서는 오른편에는 양을 세우고 복받은 자로 칭찬하고 왼편에 선 염소를 저주받은 자로 경멸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오른편'을 의로운 자리로 표현하고 '왼편'을 저주받은 자리, 곧 불의한 자리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묘사는 구약시대 떠부터 '오른편'을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해 온 사실에서 비롯된다(출 15:6 ; 왕상 2:19 ; 욥 30:12 ;시 45:4). 그리고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힘의 상실로서 이해되어 왔다(삿 3:15 ; 삼하 20:9:10 ; 전 10:2). 따라서 심판의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이 되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영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의 이같은 구분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1) 염소보다 더 가치있고 값비싼 짐승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 양이 흰색인 반면 대부분 검은색으로된 염소를 대비시켜 선과 악, 생명과 멸망을 상정적으로 대비하고자 했을 것이다.(3) 하나님을 목자로 보고 그의 벡성들을 양떼로 보는 당시의 유목민적 사고를 빌어왔기 때문인 것이다(18:10-14 ; 겔 34:11, 12 ; 막 6:34 ; 눅 15:3-4 ; 요 10:1-21 ; 히 13:20). (3) 염소는 풀밭을 못쓰게 만들고 나무를 상하게 하여 초목을 죽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염소를 왼편에 세워 불의한 점숭으로 구분했을 것이다.

=====25:34
임금 - 여기서 심판의 주체가 임금으로 바뀐다. 즉 31절에서 심판의 주체가 '인자'(인자)였는데 여기서는 '임금'으로 달리 표현함으로써 인자를 임금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로서 뿐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묘사하는데, 그러한 비유는 2:2 ; 21:5 ; 27:11, 29, 37, 42에서도 나타난다. 여하튼 이같은 칭호는 보좌에 앉으신 인자의 통치권(통치권)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진다. 즉 모든 민족의 통치권과 심판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보이는것이다(롬14:9 ; 계 19:16).
내 아버지께 -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아버지와 연관시키고 있다(10:32, 33 ; 11:25-27 ; 15:13 ; 16:17, 27:18:10 ;20:23 ; 26:29,5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행자(대행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의 궁극적 시여자(시여자)는 아들을 통해 전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복 받을 자들이여 - 오른편에 선별된 사람들을 향한 호칭이다. 여기서 특별히 '복 받을자들'(* , 호이 율로게메노이)은 완료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이는 한번 시여된 축복이 과거에서부터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결국 현세와 내세를 초월한 축복의 영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말은 41절의 '저주를 받은자들아'와 대비되는 문구로서 단순히 축복의 말씀 이상의 실제적인 복의 전달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나와라 - 이 단어 역시 41절의 '나를 떠나라'와 대조되는 말로서 '나아온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친밀)한 만남을 의미한다. 같은 형식의 비유인 열처녀 비유에서'잔치에 들어가고'라는 구절과 달란트 비유에서'주인의 즐거옴에 참예'라는 구절##, 91, 좡절)에서도 표헌한 바와 광이 구원은 주넘콰의 만남이꼬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있다(요밟}#. 돼#6부터(#68 /#8슁0.0#짙 ##80#, ,#쪼 카#홰레스 코스무).'세상올 창조한 이래로'라는 뜻이다. 그런데혹자(4완0는 1로부터'라는 뜻인 '아포'를'1 '?전부터'(환8, 프로)라는 뜻으로 ,?해함으로써 성경의 전채적인 사상콰 일치시키고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밴성돝올 창세하셨다는 것이다(요 17 } 8 ) 엡 1} 4) 벧전 1#퉈. 결국 이 말씀은 하나넘의 영원하고 무오한예지써$)를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현 집념과 성실성을 대변해 준다. 예비된 나리틈상속하찌. 이 궈절욘 앞에서 '복받을 자'라는말에서 나온 '복'의 내용욜 보여 주고 있다.'예비된 나라'는 하늘나라를 말한다. 따라서하늘나라는 이미 하나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계쥐되었던 것임올 알 수 있다. 여기서'예희]된'(#(04크6#뇰훠켠>, 헤토,?마스페넨)은 완료 분사 형태틀 취함으로 해서 그 동작이 이미 오래 전부터 성취된 상태에 있었음보여 준다. 즉 하늘나라는 우키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키의 입국을 준비하며 기다키고 있었던것0)다(11). 한편 '상속혀라'(/##6#0크4$#6, 클레로1께츠)테)는 말의 욍어는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지체치 말고 즉시 네분깃올 얻으라'는 뚱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받으라'고 명령하지 않고 나라를 '상속하라'고 명령한 것은, 그 피명령자에게 당연히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상속이라는 말은 본래 자기와 상관없는 어떤 것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자기에게 주어져있는 권리(권리)로서 하늘나라를 물려받는 것을 뜻한다. 실로 아무도 창세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이 상속물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즉 영원한 자기 소유인것이다. 구원 받은 성도는 창세 때부터 준비된 하늘나라를 영원한 소유로서 상속받게 된다. 여 하튼 '예비된 나라'라는 구절은 41절의 '예비된 불'과 대칭적으로 앞에 나온다. 이것은 다른 비유들과 같이 대칭 구조속에서 반복 어투를 사용하는 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25:35,36
이 두절은 복받은 자들이 하늘나라 상속권을 소유한 까닭을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이 환영을 받고 유업을 상속하도록 초대받은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왕의 형제들을 섬겼기 때문이다(사 58:7). 그런데 이 섬김의 내면을 살펴보면 그 섬김이 곧 그들 의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약 2:20-26). 즉 이는 순결한 믿음, 참된 신앙만이 표출할 수 있는 선행인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선행을 상기시키는 왕의 대답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의인들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37-39절). 정녕 의인들은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요청과 기대에 따라 능동적으로 그 일을 수행했던 것이다(엠 2:10). 여기서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선행 중 35절에 제시된 세 종류는 율법적 의무 조항에 근거한 선행이며(창 19:1,2 ; 출 23:9 ; 신 10:18 ; 14). 36절에 제시된 세 종류의 선행은 율법의 의무 조항 이상의 자원적이고 헌신적인 섬김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 식. 주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고 많은 질병과 억울한 누명과 과중한 채무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웠다. 사실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옥에 갇힌 자 방문'은 복음시대 기간 중에 복음과 그리스도로 인해 공적인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은연중에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고난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고난받고 굶주리며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행(善行)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6절).

=====25:37-39
의인들(* , 호이디카이오이) - 여기서 '복받은 자들'이 '의인들'이라는 호칭으로 바뀐다. 즉 마치 '인자'가 '임금'으로 호칭이 바뀌어 그 인격에 대해 더욱더 구체성을 띠게 하듯이,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푼 자들을 가리켜 의인으로 선언함로써 그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여기서 '의인들'이라 함은 그 생활에 있어서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므로써 결국 이 땅에서의 온갖 자기만족의 유혹과 고초를 이겨내고 끝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 앞에 선 자를 가리킨다. 물론 이 '칭의'는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적이고 절대적 선언에 근거한 것일 뿐 사람들의 인격이 절대 순결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편 의인들의 대답은 앞서 임금이 조목조목 나열한 항목을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하면서 언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반문함으로써 지금껏 행해왔던 선행이 결코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되며 또한 커다란 상금을 바라고 선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의 최상의 겸손을 나타내보였다. 이러한 자기 선행을 부인하는 모습은 외식하고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던 그 당시 위선적 종교인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여호와 경외의 가장 기본이 되는 형제 사랑을 도외시한 채 외식하며 겉치레적인 신앙 생활에 몰두하던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 학자들을 여러 기회들을 통해 격렬하게 비판하셨다(23:1-36 ; 12:38-40 ; 눅 11:37-52 ; 20:45-47). 결국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과 마음가짐을 제시해 주며 당시의 비실천적인 이론적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6:1-4에 나오는 바와 같이 남을 구제할 때에는 오론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은밀하게 하라는 교훈을 묵묵히 암시하고 있다.

=====25:40
내 형제(* ,아텔폰무) - 여기서 형제(* , 아멜포스)는 일차적으로 임금의 형제 곧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12:47-50)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형제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32절). 따라서 여기서의 형제는 광의적인 뜻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동참하는 고난받는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35, 36절).
지극히 작은 자 하나 - 이와 비슷한 문구가 10:42 ; 18:6, 10, 14에서 '소자 중의 하나'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18:5에는 '어린아이 하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매우 축소 지향적인 묘사이다. 즉 '작은 자'를 '지극히'라는 단어로 더 축소하여 강조하며 '하나'라는 최소 단위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다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극한 대비를 이뤄 '가장 작은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가장 큰 자'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라는 단어는 막연한 대상을 나타내는 부정사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具體的)인 어떤 한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천임을 암시한다. 실로 성도의 바른 신앙은 묵묵히 행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그 진수가 있다.
내게 한 것이니라(* , 에모이 에포이에사테) - 35, 36 절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서 의인이 반문한 것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내놓고있다. 여기서 특별히 '내게'라는 뜻의 '에모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과 배려를 의미하는 여격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외받고 궁핍하며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과 강한 연대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깨서는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성육신(Incarnation)하심으로써 이미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同參)하셨다(빌2:6-8). 또한 그는 당신의 전생애를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의 연약한 한계 아래 머무시면서 그 속에서 아픔과 고뇌를 맛보시었다(8:17 ; 사 53:4 ; 63:9). 정녕 그분은 고난당하는 자의 표상이자, 그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는 그들의 친구였다(히 4:15). 따라서 그분은 자신있게 고난받는 자와 '하나'라 선언하실 수 있었으며 고난받는 자의 위안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고난받는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22:34-40 ; 히 13:2).

=====25:41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 이 구절은 34절의 '복받은 자들이여 나아와'와 대칭되는 문구이다. 한편 7:23에는 본문과 비슷하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저주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분과 영영히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그런데 '저주를 받은 자들'이란 문구는 34절의 '복받은 자들'이란 말에서 볼 수 있는 관사(* , 호이)가 생략됨으로 하나의 독립적 문구라기보다 종속적 분사로 보아 '저주를 받아 나에게서 떠나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Wycliffe). 이는 결국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심판 의지를 강조한 표현이 된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 이 구절은 34절의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와 대칭적으로 대비되는 문구이다. 즉 의로운 자들을 위해 그 나라를 창세 전부터 준비하였지만 마귀와 사자들을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된 것이 서로 다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영영한 불'이 염소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라 원래는 마귀와 그 신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계 20:10). 실로 영영한 불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교만하고 타락한 삶을 살므로 얻어지는 것이다. 한편 '마귀'(* ,디아볼로스)는 '중상자', '비방자'(Slanderer)를 의미한다. 새 번역에서도 '악마'(the devil)로 번역한다(4:1 ; 눅 4:2 요 13:2 ; 옙 4:27 ; 히 2:14 ; 딤후 2:26 등). 그런데 여기서의 '마커'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주동자(主動者) 곧 어둠에 속한 세력의 주관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사자'(* , 앙겔로스)라는 말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messenger),'사절'(envoy), 또는 '천사'(angel), '보냄을 받은 사람'(one who is sent)을 뜻한다.여기서는 '메신저'(messenger)로 보는 것이 옳으며 새번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그의 사자'(* , 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로 번역해야 옳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마귀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된다.
영영한 불(* , 토퓌르 토 아이오니온) - 이 말은 영영히 꺼지지 않고 지속적인 고통을 제공하는 심판의 불(fire)라는 뜻이다. 이 말은 46절의 '영원한 형벌'과 같은 표현이다. 실로 이곳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된 장소라는 점에서 그 고통의 도는 최고치에 이를 것이다. 한편 '불'이라는 묘사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지옥에 대한 개념이다(3:12 ; 5:22 ; 18:8 ; 유 1:7 ; 계 20:10-15).

=====25:42,43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의 정죄받은 이유를 35,36절의 문장 형식을 빌어 고발하고 있다. 특히 '아니하였고'(* , 우)라는 부정어구를 5번에 걸쳐 후렴구로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심판 기준의 적극적 의미를 강조 하고 있다. 즉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남에게 비록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실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다(19:19). 한편 예수께서 이같은 강경한 메시지를 전하신 것은 적어도 말세, 종말의 때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황폐(荒廢)해 질 것을(딤후 3;3)익히 아셨기 때문일것이다.

=====25:44
이 구절 역시 37-39절의 경우처럼 판결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있다. 저주의 판결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다만 놀랄 뿐 이다. 실로 그들은 양들이 자신의 선행을 잊어버리듯, 자신들의 악행(이웃에 대한 무정과 무관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Bengel). 한편 그들이 놀란 이유는 (1) 자기들의 기억으로는 주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를 돌보아 드리겠느냐는 사실 때문이다.(2) 심판의 임금으로 오신 주께서 굶주리고 나그네되어 목말라하며 감옥에 갇힌 고난받는 자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3) 그리고 무엇보다 양들이 마지막 날에 보답받기 위해 예수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닌 것처럼, 염소들은 마지막 날 보웅(retribution)받는 것을 멸시해서 형제들에게 냉담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필시 예수의 형제들에게 온정과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다.

=====25:45
이 구절은 40절과 대칭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40절과 구별되게 '내 형제 중에'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이웃에 무관심했던 염소에게 있어서 형제 우애를 들먹일 만큼의 여유가 없음을 묵시적으로 꾸짖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찮게 보이는 소외된 자, 고난받는 자에게 대해 무신경한 자는 그들의 형제와 친구이신 예수를 무시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자인 것이다.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는 구절이다. 여기서 저주받은 자들의 벌과 의인들이 받은 보상을 영원한 생명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먼저 영벌(* , 콜라신 아이오니온)은 영원한 징벌(punishment)을 뜻한다. 여기서 '콜라시스'는 원래 '잘라내다'의 뜻의 '콜라조'(* )에서 유래한 말로서 죄인의 교화와 훈육을 위한 목적으로 내려진 징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근거로 해서 혹자는 본문의 '영벌'이 궁극적으로는 염소들을 구원키 위해 내려진 교정적 차원에서의 벌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약 어느 곳에서도 지옥에 처한 자의 회개나 교회가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최후 심판이라는 관점에서의 '벌'을 이야기할 때 이 '콜라시스'보다는 공의에 입각한 엄격한 보복이라는 뜻의 '티모리아(* )가 더 적합할지 모를다. 그러나 이 '콜라시스'는 본문에서 목적적 차원에서의 해석보다는 집행적 차원에서의 해석을 통해 '지독한 고통'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히 10:29). 특별히 '콜라시스'가 영원성을 강조한 '아이오니온'과 결합됨으로 형벌의 영원성, 곧 최후 심판으로서의 형벌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18:8 ; 살후 1:9 ; 유 1:13). 이와 더불어 의인에게 약속된 영생(* , 조엔 아이오니온)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물론 이 생명은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을 뜻하기 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향유하게 되는 지복(至福)에 달한 생명으로서(trench),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이 현세에서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부활한 생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살전 4:14-17). 한편 '형벌'과 '생명'을 각각 수식하는 형용사 '아이오니온'은 시작 또는 종결이 없거나 아니면 양자 모두가 없는 시간 개념으로서, 묵시 문학이나 종말론과 연관된 구분들에서는 항상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된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재림한 이후에 의인들은 하나님앞에서 영원히 살 것이고,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영원한 구별은 바로 이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끊임없는 긴장(緊張)과 그 나라와 주의 재림에 대한 성실한 준비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앞장에서는 종말의 징조에 관한 예언을 통해 주의 재림의 확실성과 돌발성이 강조되었고, 이어 그 재림을 예비하는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세가지 비유로써 설명되었다. 감람산 강화의 연속인 본장의 세 비유는 앞장의 세 비유들을 보충하고 그 내용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 간에 유사한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예컨대, 본장의 세 비유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 자세(1-13절) - 재림을 준비하는 자의 구체적 삶의 열매(14-30절) - 재림으로 말미암은 심판(31-46절) 등의 순서로, 다시 말해서 시간적 전개 방법인 점층법적 순서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24:32-51의 내용 또한 다소 구분이 모호한 점도 있지만 대략적으로 본장 내용의 이러한 순서와 구도로 되어 있었다.
본장의 비유들은 마태복음서에만 나오지만 이와 유사한 비유들이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된다. 즉, 누가복음 12:35-40의 비유에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1-13절) 대신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나오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나 교훈은 동일하다. 그리고 14-30절의 달란트 비유는 누가복음 19:11-27의 열 므나 비유와 아주 흡사한 내용으로 전개되어 나가며, 다만 세부적인 사항에 있어 차이점을 보인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눅 19:11-27 강해의 도표를 참조하라. 본장의 내용을 개괄함에 있어 우리는, 세 비유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몇가지 특징들에 초점을 모두어 보기로 한다.
(1) 내용상의 강조점. 세 비유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주의 재림 때에 칭찬과 축복을 받을 무리 및 저주와 멸망을 당할 무리로 뚜렷이 양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세번째 비유에서 특히 두드러지거니와, 세 비유들 모두는 칭찬이나 축복보다는 저주와 멸망을 경고하는 데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하겠다. 즉 이 비유들은, 주의 재림의 약속을 멸시하고 세상적 타락 풍조에 휘말려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도외시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부각시킴으로써, 말세지말(末世之末)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부여된 귀중한 사명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세상의 끝이 가까울수록 공의는 더욱 짓밟히고 사랑은 점점 식어만 갈 것이다(24:12). 따라서 성도는 다수(多數)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어두움이 더해 갈수록 진리의 등불을 발하는 거룩한 사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다(출 23:2).
(2) 경고의 대상. 본장에서 징계 대상으로 주목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악행을 일삼은 자들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이루어가지 않은 자들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는 일을 태만히 하였던 결과 혼인 잔채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으며(8, 10절),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어두고 아무 일도 행치 않았기 때문에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다(24, 30절). 그리고 염소의 무리로 분리된 자들이 영영한 불에 던지움을 받게된 것도 형제들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41-43절).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소극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는 무사안일주의(無事安逸主義) 내지는 부작위(不作爲)의 죄가 얼마나 엄중하게 다스려지는 가를 밝히 보여준다.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것은 토하여 내침을 당할 뿐이다(계 3:16).

1. 열 처녀 비유(25:1-13)
이는 '항상 깨어 있어 인자의 재림을 예비하라'는 전장(前章)의 명령(24:42, 44)을 이어받아 다시금 역설한 비유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앞에 나오는 두 비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첫번째 비유가 예기치 않은 때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그리고 두번째 비유가 깨어 있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기뻐 여기시는 행동을 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면(24:42-51) 이 세번째 비유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가 더딤에도 불구하고 구분이 오시는 것에 대하여 마땅히 예비하고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의 재림은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유보(留保)되고 있다는 점(벧후 3:9)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때가 되면 신랑 되신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니, 우리는 그 날을 사모하는 가운데 지헤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등불을 밝히며 예비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이스라엘의 당시 결혼 풍습에 관해 일고해 봄으로써 본문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혼인은 삼 단계의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첫째로 정혼(定婚)의 단계가 있다. 이는 신랑의 아버지와 신부의 아버지 사이의 공식적인 합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둘째로는 약혼(約婚)의 단계로서 이 때 약혼 당사자들은 신부 측 집에 모여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로간에 서약을 하였으며 신랑은 신부에게 약혼 예물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약혼 이후 약 1년이 경과한 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이 마지막 단계 때에 신랑은 신부 집으로 찾아가서 신부를 데리고 피로연이 베풀어질 자신의 집으로 가두행렬을 하며 돌아 왔다.
본문의 열 처녀들이 맞이하려고 기다렸던 것도 바로 이 행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이렇듯 당시 유대인들 중 누구에게나 익히 알려진 풍습에서 착안하여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에 관한 심오한 교훈을 비유로써 베푸셨던 것이다.

* 가시적 교회의 불완전성. 본문에 등장하는 열 처녀들은 성도들의 공동체, 곧 보이는 지상의 교회를 상징한다. 그들은 모두 등을 들고 있었으되 그 중에는 기름을 채우지 않은 등을 가진 자도 있었다.
흔히 이처럼 등은 가졌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을 가리켜 미련한 자, 중생치 못한자, 신앙과 생활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자 등으로 이해한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러한 자들 역시 주의 몸된 교회 안에서 한 성원을 이루어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오늘날 교회에는 등록을 하고 주일마다 꼬박 꼬박 출석은 하면서도 구체적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의 증인 다운 신앙의 자태를 드러내지 못하는 '기를을 준비치 못한 자들'이 많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한 때 은혜받았던 경험으로 자만하여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간구하고 누리고 전하는 일을 도외시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입과 머리로써만 믿기도 한다.
이렇듯 가시적 교회(可視的敎會)는 불완전하여 알곡과 가라지가 뒤섞여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완전한 교회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한 자들은 흔히 절대 무흠의 공동체로 알고 있었던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약삭빠르고 난폭하게 행동할 때 큰 절망감에 빠져들게 된다. 어찌되었든 이같은 불완전한 모습의 교회는 한시적(限詩的)인 현상일 뿐이다. 진정 주님 오시는 그날에는 가라지의 실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며 교회는 완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13:24-30).

* 대신할 수 없는 구원.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줄 것을 요청했을 때, 슬기로운 처녀들은 이를 거부했다(8,9절). 왜냐하면 기름을 서로 나누게 되면 열 처녀 모두가 결혼 예식이 파할 때까지 쓰기에 모두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 개인의 구원이 그 각 인격의 믿음과 신앙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결단코 타인의 믿음이나 간구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귀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겔 18:2-4). 실로 이것은 윤리적(倫理的)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存在論的)인 문제이며,
더 나아가 최후 심판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주위 사람들을 구원에로 인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결단을 내릴 책임은 당자(當者)에게 있다. 즉 오직 하나님과 자신과의 일대일 관계로써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렘 31:29).

* 예측할 수 없는 주의 재림.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은 열 처녀들이 졸음에 겨워 잠잘 때에 나타났다(5,6절). 여기서 모두 잠에 빠졌던 사실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다만 처녀들이 예상하고 있던 초저녁보다 훨씬 늦은 시간인 한밤중에 신랑의 일행이 들어닥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재림의 불시성(不時性)과 그러한 때를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도 지금과 똑같이 정치,경제, 문화 등 사회 각 분야는 분주하게 움직일 것이며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다반사(茶飯事)를 위해 이리 저리로 뛰어다닐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분별있 는 설교자는 외개를 외칠 것이며, 듣는 무리들은 결단을 여전히 뒤로 미룰 것이다.
요컨대, 성도는 너무 늦었다는 절망의 탄식이 나오기 전에, 일할 수 없는 밤이 도래하기 이전에 주님 맞을 준비를 갖추어야 하겠다. 실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너무 더디온다고 생각할 무렵 마치 밤에 도적같이 재림하시게 될 것이다(살전 5:2). 마치 신부가 사랑하는 신랑을 기다리기 위해 자지 않고 밤을 새우며 문 소리에 귀기울이듯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열정으로 주의 오심을 기다린다면 주께서 언제 오신다 하더라도 아무런 주저나 당황없이 기쁨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2. 달란트 비유(25:14-30)
본문은 그 자체로서 심오한 뜻을 전달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앞 뒤 단락의 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즉, 앞 단락(1-13절)에서는 성도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해야한다고 하는 성령 충만의 '상태'가 강조되었다고 한다면, 본문은 그 은혜로운 상태가 적극적으로 성령의 열매로서 결실을 맺어야한다는 구체적 '행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의 주인이 타국에서 돌아와 그 종들과 회계(會計)한다는 사실은(19절) 모든 사람의 행실을 선악간에 심판하는 시기가 필히 도래할 것임을 가리키는 바, 이는 뒷 단락(31-46절)의 으뜸되는 주제이다.
한편 예수께서 강조하시려 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이 받은 갖가지 재능들을 최대한 활용하며 성실히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힘써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삶에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있다'는 기독교인의 직업 소명론이기도 하다.

* 하나님 나라 사업의 창조성. 하나님 나라의 일꾼의 바람직한 자태(姿態)를 묘사하는 본문의 달란트 비유가 장사하는 사례에서 착안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불공정한 분배와 가진 자의 못가진 자에 대한 착취를 세계 도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목격하고 있는 우리들은 본 비유를 통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폐단을 곧 바로 연상하기도 한다(29절).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입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인간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지식에 억지로 끌어맞추려는 조악한 노력일 뿐이다.
따라서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니라 창조의 원리라 하겠다. 무에서 유를,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미께서는(창 1장) 인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신실한 종들을 통해 시종 창조적 결실을 맺어오셨다. 특히 구원의 복음과 관련된 사역은 부패하고 죽은 자들을 영원히 썩지 않을 참 생명 가운데로 건져 올린다는 점에서 위대한 '새창조'라 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성도는 자기 본위의 틀에 갇혀 출구없이 계속 자기의 이익만을 채우는 사해와도 같이 부패한 냄새를 풍길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삼십배 백배의 창조적 결실을 뱉는 이타적 삶에로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요 12;24).

* 진취적 신앙.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모두 '바로 가서'(16절) 그것으로 장사하여 각기 갑절의 이익을 남겼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진취적이고도 적극적인 신앙의 면모를 목도하게 된다.
때로 우리는 겸손의 미덕을 오해하여 매사에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많이 경험한다. 그러나 이같은 소극성은 창조적 결실은 커녕 정체(停滯)와 나아가 퇴보를 가져올 뿐이다. 장차 되어질 일의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조바심하는 자는 아무런 일도 이루어내지 못하며 어떤 공동체 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존재로 낙인찍힐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비록 여러가지 결점과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도모하는 자는 다소 시행착오를 겪을지는 모르지만 창조적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분야에 있어 위대한 성공자로 출생하는 사람은 없다. 천부적 능력의 차이는 인정한다 할지라도 성공적 삶의 대부분은 후천적인 경주(노력) 여하에달려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함에 있어 치밀한 사전 계획도 중요하지만 실수를 두려워않는 용기, 실패하면 잿더미에서라도 다시 일어서리라고 하는 불굴의 진취성이 무엇보다 긴요하게 요청된다 하겠다.

* 작은 일에 대한 충성. 달란트 비유의 초점은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로 모아지고 있다. 회계할 즈음에 주인에게 고한 그의 말을 통해(24, 25절)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자리 부정적 심리 상태를 몇가지 짐작해볼 수 있다.
첫째로, 그는 겉으로는 겸손하듯 해보이나 실상은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나태한 심리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별로 도움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 중에도 '내가 어찌 하나님의 사업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하고 매사를 하나님께 일임(一任)하려는 자들이 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주의 일을 완전히 할 수 없으마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 순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맡긴다는 것은 일체의 임무로부터 해방되어 방관자적 자세를 취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내포한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청지기적 사명을 지니고서 더욱 더 적극적으로 주의 일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으로서 응당해야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회피하는 자는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하겠다.
둘째로, 그의 말 속에는 고작 한 달란트 밖에 받지 못한 사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담겨있으며, 또한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 받은 자들과 스스로를 비교함으로써 느깨는 상대적 열등감이 반영되어 있다. 남들 보다 크고 위대한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주인의 대답에서 명시되었듯이(21,23절) 한 달란트 뿐만 아니라 다섯 달란트 역시 '작은 일'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편에서 상대적으로 아무리 크고 위대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초라해 보일 뿐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자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 모든 성도는 재능이나 권세, 돈, 지식, 건강 등에 있어 크로 작거나 혹은 다양한 달란트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다양한 달란트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엡 4:16). 따라서 마치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하지 못하듯이(고전 12:21) 모든 성도는 그 각자의 받은 바 은사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깊이 인식하고 받은 바 소명(召命)에 충실해야 하겠다.

3. 양과 염소의 비유(25:31-46)
감람산 강화(24:1-25:46)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본문은 마지막 날의 심판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예언이 천국의 종말론적 도래를 다루는 예수의 마지막 강화의 결론부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특히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을 네번째 예고하기(26:2) 직전에 이 예언을 말씀하신 것 또한 큰 의의가 있다. 즉 예수께서 마지막 날 심판주로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성도들로 하여금 어떠한 곤경과 핍박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디게끔 하는 큰 힘으로 작용한다. 또한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거듭된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듯이(27:32-44;28:1-10) 예수의 재림과 심판 또한 엄연한 역사적 현실로서 다가올 것임을 본문은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앞의 두 비유에서 시사된 내용을 집약하고 더 심화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예컨대 1-13절에 나타난 가시적 교회의 불완전성은 본문에 이르러 양과 염소의 뚜렷한 양분(兩分)을 통해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19, 30절에 시사된 심판의 메시지는 본문 전체에 걸쳐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32절을 제외하면 본문에는 비유로서의 특징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비유라기 보다는 16:19의 예언을 보다 심층적으로 소상히 묘사한 하난의 시적 진술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본장 전체의 문맥의 흐름상 이를 하나의 비유에 포함시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본장의 세 비유들에서 공통적으로 마지막 날 축복받을 자와 멸망당할 자 간의 구별이 뚜렷하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특히 본문은 염소와 양의 흑백의 선명한 대조를 통해 강한 시각적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대조법은 히브리 시적(時的)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문은 편의상 서론(31-33절), 본론(34-45절) 그리고 결론(46절)으로 구분된다. 이중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임금과 의인들과의 대화(37-40절) 및 임금과 악인들과의 대화(44, 45절)가 선명한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정연한 문학적 구성을 통해 본문은 영벌(永罰)과 영생(永生)의 엄청난 대조적 의미를 극명하게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하여. 마지막 날의 심판 상황을 진술하는 본문의 예언 속에는 심판의 주체, 대상, 방법 및 결과가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먼저, 심판의 주체는 말구유에서 탄생하사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종내(終乃)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인자(人子)이다(31절). 이처럼 예수는 자발적으로 백성들의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으로 희생당하셨으나, 마지막 날에는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될 것이다(빌 2:10, 11). 이 사실은 주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된다.
둘째로,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이다(32절). 그 날에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백보좌(白寶座)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계20;11-15). 그리하여 하나님을 부인하고 내세(來世)를 부인한 채 세상적 열락에만 골몰했던 모든 불신 세력들은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짐을 받게 될 것이며, 동시에 구원을 약속받은 성도들은 상급에 대한 생명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3:11-15;딤후4:7,8;계 22:12).
셋째로, 심판의 방법은 각 사람의 행한 자취를 증거로 삼아 진행될 것이다. 그 때에는 세상 신분의 고하나 능력의 다소는 아무런 역할로도 작용하지 못하며 오직 믿음으로써 역사한 사랑의 행실을 있고 없음 혹은 많고 적음 만이 심판의 근거가 될 것이다.
끝으로, 심판의 결과는 영생과 영벌이라고 하는 너무도 엄청난 차이를 초래한다. 영생의 축복이나 영벌의 불행에 대해 과연 누가 충분히 설명해 보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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