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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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이에 - 본장 초두에 언급된 `이에'(* ,토테)는 마태복음에서 독특하게 사용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상관적 부사이다. 그런데 `이에'란 과거의 특정한 시점으로서의 `그 때'(then)를 의미하기도 하고, 단지 막연한 한 시점인 '그 때'(at that time)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시점이 지난 '그 후', 또는 '그 다음', `그리고' 등의 뜻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문맥상 '그 다음', '그리고'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23장은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장면을 다룬 22장에 바로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 이 구절은 예수께서 누구를 상대로 하여 설교를 시작하는지 말해준다. 여기서 '무리'(* , 오클로이스)란 군중 이외에 민중, 백성, 평민, 서민(the common people)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리'란 특수 계층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및 헤롯 당원들과는 구분되는 일반 평민들의 군집(群集)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22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와의 대화에서 곤경에 처하여 더 이상 예수에게 질문을 하지 못했음을 미루어(22:46) 볼때,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를 떠나 갔을 가능성이 많다.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 예수께서 질책하실 대상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특히 '서기관들'은 구약 율법을 연구, 교육하는 일을 전담(專擔)했던 자들이었으며(2:4), 바리새인들은 독선적일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던 자들이었다. 바로 이 바리새인들 중에서 서기관들이 주로 배출되었다. 한편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선생'(teacher)과 같이 어떤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서 신학적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런데 서기관이라는 말과 바리새인이라는 말이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바리새인으로서 서기관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지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질책(叱責)하신다기 보다 하나의 왜곡된 신학적, 신앙적 입장을 비판했으며 또한 그것을 신봉(信奉)하고 전파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계신 것이다. 실로 바리새인들(서기관들)은 율법에 남다른 열정과 열심있는 연구를 통해 요한 힐카너스 시대(B.C.135-105) 이후, `150년 간 백성들에게 최고의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아 왔지만 그들은 위선과 형식주의적(形式主義的)신앙 형태로써 이스라엘 종교 전반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먼저 '모세의 자리'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공식적인 율법 교사의 석재(石材)로 만든 자리를 가리킨다. 그 당시 유대의 바리새인 또는 서기관들 중 가장 유력한 자가 회당에 마련된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해석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E.L. Sukenik). 예수께서도 이 관례에 준하여 가르치신 적이 있다(눅 4:20-22).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일반적 관념으로는 '어떤 사람의 자리에 앉다'라는 것은 보통 '어떤 사람의 권위를 계승(繼承)하다'는 의미로 이해 되어졌다고 전한다(왕상 1:35,46;시 132:12;Jos.,Antiq. VII, 353, XVII,2). 따라서 율법 강론(講論)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았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모든 권위를 전수받은 공식적인 모세의 법적 계승자들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권위의식을 통박(痛駁)하시면서 계속해서 언행(言行)이 불일치한 그들의 허구성을 고발하셨다(3절 이하).

=====23:3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 이 구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교훈들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 힐책(詰責)하신 것은 단지 가르침과 행함이 일치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이율 배반적(二率背反的)인 삶의 태도였을 뿐이다. 사실 그들이 가르치는 바 율법 그 자체는 그들의 실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참된 진리요 신앙인의 실천 강령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행하고 지키되'라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을 빌어 강력한 어조로 그들의 가르침을 준수하라고 명하셨다. 한편 '행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사테'(* )는 상세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실행한다는 뜻이며, '지키되'의 원어 '테레이테'(* )는 거의 몸에 배듯이 자연스럽고도 완벽하게 지킨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이 땅에 율법의 폐기자(廢棄者)가 아닌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인간이 마땅히 습관처럼 지켜야만 될 절대적인 진리임을 천명(闡明)하셨다. 실로 참 진리는 어떤 구조적 모순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빛을 발하며 모든 인간의 삶을 인도하는 등불이 된다(시 119:105).

=====23:4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우되 - 이 구절은 3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바리새인들의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에 의한 위선적인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충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엄격성이나 막중한 의무(Alford)라 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바리새인들의 자의적 율법 해석에 따른 각종 규범과 전통적인 계율들 및 아주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세분화된 규칙과 예법 등을 가리킨다. 실로 그들은 율법의 생활 규범을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여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적용토록 강요했었다. 즉 그들은 마치 운반하기 곤란할 정도의 무거운 나무단이나 곡식단처럼 성가시고 귀찮고 감당키 어려운 규칙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백성의 어깨에 지움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을 율법의 보지자(保持者)가 아닌 곡해된 율법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자기들의 의(義)에 도취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첫번째 잘못이었다.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두번째 잘못이다. 즉 그들은 성가신 규칙들을 고의적으로 회피하거나 복종하기를 거절했던 것이(Born-Kamm,Josef Schmid,Schweizer, Sand) 아니라 그들이 만든 힘겨운 규칙들에 눌려 쓰러져가는 자들을 위해 그 의무 규정을 가볍게 해주거나 실천 가능하도록 그짐들을 경감(輕減)시켜주는 등의 도움주기를 거절했던 것이다(Manson, McNeile, Filson). 여기서 '손가락'이란 앞의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사람의 어깨'와 대조되는 말로서, 결국 '손가락으로 움직인다'는 표현은 아주 사소한 도움이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배려를 뜻한다. 진정 그들은 율법이 근본 명하는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에 대한 관심은 멀리한채 오히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같은 미세한 규범을 크게 부각시켜 백성들의 어깨에 종교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짐을 부과하였다(23절;행 15:10;갈 5:1). 진정 그들은 가르치고, 부과하고, 제한만을 일삼았을뿐 그 짐을 대신 지거나, 나누어지거나, 가볍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 짐을 대신 지시고, 나누어지셨다. 그분은 단호한 어조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30) 말씀하시며 당신의 가르침에 동참하기를 요구하신다.

=====23:5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 6:1에 이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는 허영적인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여기서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위 전체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임을 선언한다. 그들은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일종의 가증한 연극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과 찬사와 인정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요 12:43). 결국 이러한 비판은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적 심리를 정확히 찌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에 빠지기 쉽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숨겨져 있는 잠재적인 욕망까지 모두 제거하는 근본적 인간 변화를 암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 차는 경문(經文)을 넓게 하여 - 신약성경에서 경문(phylactery)이라는 단어는 여기서만 나타난다. 헬라어로 '퓔랖테리온'(* )이라고 하는 이 '경문'은 본래 '보호물', '호신패'(護身牌), '부적' 등의 뜻으로서 '표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토타포트'(* )라는 말에서(신 6:8) 유래한 것인데 예수 당시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기도의 끈'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테필로트'(* ) 또는 '테필린'(* )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퓔랖테리온'은 바로 이 '테필로트'의 번역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기 이후부터 이것을 차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율법을 기억하고 경건에 힘쓸 목적이었으나, 차차 자기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혹은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 이교도들의 부적 같은 것으로 믿고 착용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 경문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서에서 취한 네 부분들(출 13:2-10;11-16;신 6:4-9;11:13-21)을 써 넣은 한 조각의 고급 피지(皮紙)를 담은 사각형의 상자였는데 묶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가죽이나 양피지로 덮혀 있었다. 유대인들은 출 13:9,16;신 6:8;11:18을 여자적(如字的)이고 미신적으로 해석하여 왼팔 안쪽 부위에나 앞 이마에 가죽끈으로 부착하였다. 이 두 부분은 심장과 가까운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한편 처음 이것을 부착하기 시작했던 때는 아침 '쉐마'(신 6:4,5) 기도 때 뿐이었으나 점차 하루 종일 차는 것이 관행(慣行)으로 되었고 심지어는 취침 때에도 부착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경문'의 크기는 주로 랍비들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극단의 경건주의자들(사실은 외식주의자들)은 자신의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크고 눈에 잘 띄는 경문을 만들었으며 그와 더불어 묶은 끈을 푸는 법과 매는 법에 대한 세세한 규정(規定)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옷술을 크게 하고 - '옷술'이란 민 15:38;신 22:12등에 명한대로 '심라'(* )라는 겉옷의 네귀에 단 '술'(tassel)을 가리킨다(9:20). 그런데 이 '술'은 석류 문양의 장식으로 된 것이며, 주로 단청색실로 짰다고 한다. 여기 이 청색은 하늘의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의 영원성 및 순결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청색의 '술'을 달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 자기의 거룩성을 자랑하는데 힘썼다. 더욱이 그들은 이 옷술을 크고 길게하여 될 수 있는한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려 했다. 사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자신의 의복에 '술'을 다는 예를 취하셨지만(9:20;14:36)바리새인들처럼 위선의 탈(mask)로서 착용하신 것은 아니었다.

=====23: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 - 막 12:39에서는 어순이 바뀌어 나온다. 즉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으로 어순이 짜여 있다. 강조점을 우선하여 표현하는 것이 상식이라면 마가복음은 회당에 강조점을, 마태복음은 잔치에 강조점을 더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여기서 '잔치'(* , 테이프나)란 많은 손님을 초대하며 밤이 맞도록 즐기는 저녁 식사(supper)를 가리킨다. 이 잔치 자리의 '상석'(上席)은 상을 중심으로 바닥에 기댄 채 식사하는 유대 또는 헬라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출입구에서 제일 안쪽에는 잔치의 주역이, 그리고 그 오른쪽 끝에는 가장 귀한 손님이 앉는다. 이 우측 상단 끝이 바로 '상석'으로서 이곳에서는 몸을 틀거나 고개를 좌우로 하지 않아도 식탁 전면을 바라볼 수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 상석을 매우 원했기 때문에 연회마다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소한 시비(是非)가 발생했다고 한다(눅 14:7). 이같은 상석 차지는 결국 세상의 명예와 영광에 심취해 있는 바리새인들의 타락한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이와 함께 '회당의 상좌'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배치된 회당 내부 중 사람들을 정면으로 바라볼수 있는 회당 관리자 옆, 곧 궤 앞의 우측상단의 자리이다. 이 자리에 존경받는 자들 및 회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앉아 지혜를 설파하곤 했다고 한다(Lenski). 바리새인들은 참다운 예배보다는 바로 상좌 차지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는 그들의 추악한 종교적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약 2:2, 3). 실로 그들은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허영적 욕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적 즐거움(잔치)과 신앙적 희열(회당)을 놓쳐버린 채 메마르고 배타적(排他的)인 삶에 찌들어 있었다.

=====23:7
시장에서 문안(問安) 받는 것 - 시장 역시 공공장소이다. 공공장소에서 인사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월성을 인정받는 것이 된다.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 - 랍비(* )는 히브리어(* , 랍비)를 음역한 말로서 '나의 주', '나의 선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물론 이 용어는 존경의 표시이지만 때로는 자기 과시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랍비 학교에서는 흔히 이 용어를 반복(랍비여, 랍비여)하여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예수보다 한 시대 이전 시대인 힐렐(Hillel, 당시 유대교 율법 주석가 중 한 사람, A.D. 10.년경 사망) 때부터 사용 되었다. 그런데 이말이 공식적 직책으로 사용된 시기는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말은 존경의 표현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이었는데 예수에게도 사용된 바 있다(26:25,49;요 1:38;3:26). 물론 이 용어는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어떤 특수한 신분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한편 탈무드 시대(Talmudic times, A.D.3-5C)에는 랍비의 지위가 상당하여 랍비의 제자는 그의 명령에 어떤 이의(異議)도 제기할 수 없는 절대 복종만이 가능했으며, 그의 앞이나 옆에서 걸어갈 수도 없었고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Moses, Aberbach).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랍비의 지위가 그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23:8
그러나 너희는 - 여기서 이야기가 전환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율법 학자들을 향한 비판을 일단락 짓고 '너희는'(* , 휘메이스)이란 말을 강조하시어 청중과 제자들에게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설교가 단순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 이는 겸손에의 요청인 동시에 당시의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한 하나님, 한 주님을 모신 교회구성원 안에서 단지 하나님의 일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 허영심(虛榮心)이나 계급 의식을 버리고 오직 섬김의 자세를 취하라고 말씀하신다(20:25-28). 특별히 '받지 말라'(* , 메 클레데테)란 부정 과거형으로서 어느 때라도 칭함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이 금지 조치가 바리새인의 교만을 지적하는 시점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당시 특권 의식을 지니고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하던 특수 교권주의자들의 권위를 철저히 분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금지 조치는 제한적이며 정신적인 교훈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예수께서는 여기서 교회 내의 지도자들이나 교사들에 대한 존경 의식마저 금지시키신 것이 아니었다(고전 11:1;12:28;엡 4:11-13;딤전 1:2). 교직에 대한 합당한 칭호는 지나친 공명심(功明心)이나 사사로운 명예욕에 근거하지 않는 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 - 시내산 사본이나 베자사본 등에는 본문의 '선생'(* , 디다스칼로스) 대신에 '지도자'(* , 카데게테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의 흐름상 '지도자'란 말은 10절 이하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본절에서는 바티칸사본이 제시한 바대로 '선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한편 본문의 '너희 선생'이 과연 누구냐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다. 즉 (1)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Carson). (2) 하늘에 계신 모든 존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Bengel, The Puplit Commentary). (3) 각 개인의 내면에 내주하셔서 가르치시는 성령이시다(Alford). 이 가운데 (1) 의 견해는 비록 후대에 수정된 사본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하나 본문의 표현이 추구하는 바가 예수로 보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많다. 이에 비해 뒤이어지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는 말에 근거해 성도들은 모두가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자연스럽다고 본다(16:17;요 6:45;행 10:28).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 유언적 메시지로 성도들의 영원한 안내자요 교사이신 성령(聖靈)을 약속하셨다는 점에서(요 14:26), 그리고 뒤이어지는 성부(聖父, 9절)와 성자(聖子, 10절)에 대한 각각의 권위에 대한 삼위 일체(三位一體)하나님의 탁월함을 암시하는 구절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3)의 견해도 무시는 할 수 없다.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단 한 분, 영원한 랍비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형제라는 이 선언은 (1) 인간중에는 하나님의 권위를 능가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2) 지금껏 누려왔던 종교상의 독재나 특권을 모두 폐지(廢止)하시는 것이다. (3)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존재이므로 어떤 직책이나 전통(傳統)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갈 수는 없음을 명시하신 것이다.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 여기서 '땅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버지'가 대비 되고 있다. 먼저 '아비'(* )란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는 용어로서, 특히 '땅의 아버지'라 함은 그 시대 이전의 율법선생, 또는 위대한 스승, 원로 교사. 어떤 학파의 태두(泰斗) 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Prike,Aboth). 유대인들은 위와 같은 자들을 절대적으로 숭상(崇尙)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요 4:12). 한편 예수께서는 '땅의 아비'를 '하늘의 아버지'와 대비시켜 종교적인 의미에서 어떠한 사람의 영광과 권위도 하나님의 권위에 미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사람으로부터 찬양받으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암시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종교적 특별 대우는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다. 실로 초대고회 성도들은 오직 종교상의 아버지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인정하였었다(고전 8:6;고후 6:18). 그러나 이 교훈은 광의적,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즉 이 '아비'란 육친적으로도 능히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아버지로, 디모데의 아버지로 스스럼없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고전 4:15;딤전 1:2).

=====23:10
지도자 -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는 단어로서 헬라어로 `카데게타이'(* )라고 하는데, 이말은 `앞서간다', `안내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카데게테스'(* )의 복수형태이다. 따라서.이말은 '교사', '스승'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특히 이들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완전한 모범이 되며 그 각각의 제자들을 책임지는 전인적인 스승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감히 자신들에게 이 용어를 붙이곤 했다(롬 2:19,20). 실로 자기를 추켜 세워 선생이요, 지도자라 하여 사람들은 끌어 모아 이끌어가는 교만한 사람들이 많았던 그 혼란의 시대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한 분만 참된 스승이요, 참된 지도자라고 못박는다. 실로 예수께서 앞서(2-7절) 자칭 '지도자'라는 자들의 모순됨을 파헤쳐 비판한 바와같이 그들은 지도자의 자격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들이었다. 진정 전인격적인 면에서 모든 이를 바르게 인도하실 분은 예수 한 분 밖에 없다(히 12:2).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전인격을 그분께 맡기고 오직 그분의 가르침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앞서 가시는 그 분만을 바라며 좇아가야 할 것이다(11:28).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 이는 예수께서 질서상 인간 사회(교회 포함)에는 계급이 형성될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큰' 것이 한 개인의 영광과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겸손과 신뢰와 헌신으로 아래 사람을 섬기는데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0:26,27).
섬기는 자(* , 디아코노스) - 타인의 유익만을 위해 성심껏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자를 가리킨다. 실로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며 사람들이 존경하는 '큰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정녕 이들의 권위와 능력은 오직 섬김과 봉사와 헌신과 겸손을 통해 드러난다.

=====23:12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 본문의 역설적 교훈은 자연법(natural law)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법을 반영한다. 즉 종말의 심판에서는 스스로 높아지는 자를 낮추고, 낮아진자를 높일 것이다(겔 21:26). 그리고 본문이 전하는 것은 겸손과 봉사이지 겸손과 혼성된 노예적 봉사 행위나 바보스러움은 아니다. 한편 이러한 형태의 구절은 복음서에서 여러 군데 발견된다(18:4,눅 14:11;18:14). 빌립보서 2:8, 9에서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낮추시고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20:26-28에서는 예수 자신이 섬기러 왔음을 선언하고 있다. 실로 그가 보여준 겸손이나 타인에의 봉사는 굴욕적이고 노예적인 봉사 행위에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그가 행사하는 최고의 권위와 완벽히 조화되었다. 예수는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서의 최고의 겸손과 최상의 희생을 완수하신 후, 그 누구보다도 높임을 받으셨다(빌 2:8-11). 한편 이 역설적인 의미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1)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는 섬김의 자세이다. 다시말해 훌륭하고 성숙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일수록 그 섬김과 겸손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이다. (2) 참된 지도자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3) 이러한 진리는 명령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명령문이 아니다. 따라서 누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며 자발적 양심의 명령으로 하는 것이다.

=====23:13
화 있을진저 - 헬라어 '우아이'(* ),는 '오, 슬프다', `아이고'하는 탄식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저주를 선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저주를 내리는 선언문이다. 그런데 이 저주는 2중적 심판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즉 현재적이며(24:1,2) 또한 종말적(미래적)이다(계 20:7-15). 여기서부터는 계속하여 헬라어 '우아이'로 시작되는 저주문이 7가지로 이어진다. 이러한 저주 선언문을 흔히 7화(禍)선언이라 한다. 이 7화 선언은 예수의 신적 인격이 총동원될 만큼 중엄하며, 결코 감정적이지 않은 조용하고도 진실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상대의 자숙(自肅)과 회개를 촉구하며 상대를 압도하는 권위에 찬 선언이었다(Lenski). 예수께서는 이 7화의 대상이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임을 말한다. 외식이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극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인 헬라어 '휘포크리타이(* )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위선자'로 번역 되어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호칭은 '위선자'라는 아주 모욕적인 언어이다. 이같은 과격한 말은6:2, 5,16;7:5에 그리고 22:18에도 나온다.이렇게 위선자라고 단정짓는 이유는 앞부분(2-7절)에서 열거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이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 여기서는 위선자들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천국 문 - 천국에 들어가는 표현을 '천국 문'으로 표현한 것은 7:7,8,13,14;25:10에도 나타난다. 평행구절인 눅 11:52에서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라고 서술한다. 이 말은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진리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지식의 만용을 부려 율법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법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4절). (2) 진리를 독점(獨占)하고 있으면서 실천을 하지않아, 자신 마저도 천국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열쇠를 독점하여 들어 가고자하는 다른 사람까지도 못 들어가게 방해한다. (3) 위선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는 간접적인 방해가 아닌 적극적으로 천국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곧 그들의 천국 문까지 닫아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실로 오랜 교회 역사를 통해, 교회 문을 막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 특히 신앙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23:14
본절은 권위있는 고대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의 일부 사본들(8,9세기의 모스코, 아도스 사본 등)에는 개역 성경의 13절이 14절에 실려있고 대신 13절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과부의 재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심판이 더욱 무거우리라'(KJV)로 되어있다. 이는 막 12:40과 눅 20:47에서 보충한 후대 필사자들의 인용으로 볼 수 있다.

=====23:15
교인 하나 지옥 자식이 되게 - 두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역시 저주의 대상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여기서 먼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란 13절의 소극적인 면과는 대조적으로 적극적인 활약상을 암시한다. 한편 당시 유대교인들은 선교에 적극성을 띠었다고 전한다(Josephus, Antiq. XX 2,4; Calvin, Bengel). 물론 그들 유대인들의 전도활동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갖는 파당적인 종교적 성격을 추종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한편 여기 교인(* , 프로세뤼토스)이란 공동번역 성경과 같이 '개종자'로 이해해야 되는데 그 개종자들은 할례를 받고 성전세를 내는 등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모든 전통과 규범을 따름으로써 유대화해야만 했다. 이런 절차상의 문제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지녔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무지한 이방사람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잘못된 진리를 배운 사람들을 더 지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지옥'은 헬라어로 '게엔나'(* )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람어로는 게힌남(* ) 히브리어로는 '게힌놈'(* )이라고 음역되는데 이는 '힌놈 골짜기'(Valley of Hinnom)라고도 말한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서 유대의 후기신앙은 최후의 심판이 그곳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복음서에서는 이 말이 죽음 이후에 벌을 받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지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33절;5:22). 한편 본문에서는 더 지독한 위선자를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강조 하기 위해 개종한 자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그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이교적 습속(習俗)에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덧입힘으로써 구원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종자가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개종자들이 더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욱 완고한 위선자들을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저주를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를 위해 노력하지만 참으로 전도할 대상에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월감을 갖고 나간다거나 섬김의 자세 보다는 '선생'이라는 의식을 갖고 나간다면 도리어 교회 문을 막는 결과가 될 뿐 아니라 피 전도자가 비록 교인이 된다 하여도 잘못 배워 잘못된 신앙으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 잘못

=====23:16
소경된 인도자여 - 세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여기서 저주의 대상은 13절이나 15절과는 달리 '소경된 인도자'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 역시 진리에 눈이 먼 완고한 무지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것이 분명하다(10절;15:14). 자신들의 행실도 온전치 못하면서 자기를 따르라 하는 지도자는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지옥으로 빠뜨린다.
성전으로 맹세(盟勢)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 이 말은 성소나 지성소 또는 제단등의 건물로서의 성전을 근거로 맹세하면 이를 기필코 지켜야 하는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맹세의 구속력을 무시하는 처사인 동시에 성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가르침이다.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 여기서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치는 예물로서의 금이라고 볼 수도 있고, 성전 안에 비치된 금장식 또는 성전 금고에 간직된 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사나 하나님보다 성전 제물에 더 큰 관심을 지닌 바리새주의자들(교권주의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준다. 그러나 실로 율법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과 맹세했을 경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민 30장).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두고 맹세한 것만 효력(效力)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거짓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황금보다 낮추어 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셨던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라면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5:33-37). 예수께서는 인간의 탐욕과 공명심에 근거하여, 실천 의지가 전혀 깃들지 않은 맹세를 철저히 거부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23: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 여기서 다시 16절에서 지칭하였던 '소경된 인도자'를 우맹(愚氓)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우맹을 가리키는 헬라어 '모로이'(* )라는 말은 지각과 판단력이 결여된 '어리석은'(foolish)이라는 뜻으로서 5:22;고전 3:18,딤후 2:23등에서도 나온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말을 사용하여 저주받은 자들에 대한 경멸적 표현을 점증시킨다.
어느 것이 크뇨 - 이 구절은 16절에서 묘사한 행위에 대하여 반문하면서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즉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지키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책망하면서 그 답이 너무도 자명(自明)한 질문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명쾌한 질문을 통해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게 하고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극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셨다.이와 같은 질문의 의미는 신앙의 척도가 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로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들(하나님, 성전)에 의해 부차적으로 거룩한 것(성전의 금)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23:18
너희가 또 이르되 지킬지라 - 여기서 다시 16절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다만 '소경된 자'가 '너희'로 바뀌고, '성전'이 '제단'으로 바뀌었고, '성전의 금'이 '그 위에 있는 예물'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17절과 19절도 서로 대칭되고 있다. 이런 형태는 마태복음의 특징인 대칭적 구조이다. 이렇게 서로 교차하는 운율적 반복형태는 호소력이 강하다. 실로 거룩과 생명의 근원적인 실체를 외면한 모든 종교 행위는 허식이요 우상 숭배일 뿐이다.

=====23: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 이 구절 역시 17절과의 대칭적 구조로서 반복되는 형태의 문장이다. 17절과의 차이점은 17절의 '우맹'이라는 칭호가 빠졌다. 또 18절과 마찬가지로 '금'이 '예물'로 바뀌었고 '성전'이 '제단'으로 바뀌었다. 여하튼 예물은 제단으로 인해 거룩해지는 후속적 성물(聖物)이다(출 29:37).

=====23:20
그러므로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 이 구절은 맹세에 대한 결론적 선언이다. 내용은 제단 앞에서 맹세를 하는 것이나 예물을 제단위에 두고 맹세하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맹세는 어떻게하든 무조건 정직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5:33-37에서는 결단코 맹세는 하지말라고 선언하셨는데 그 내용과는 상호 모순(矛盾)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9절 주석참조). 표면상으로 볼 때 상호 모순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각각 그 언급 내용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오히려 모순이 아니라 상호보완(補完)적인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5:33-37의 내용은 엄격하게 맹세를 금지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외에 다른것을 두고 맹세하는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그 모든 맹세를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맹세 할수 있는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뿐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본문의 내용은 모든 맹세는 어떤 물질적 대상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정직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은 이미 5:33-37에서 언급된 맹세에 대한 교훈을 보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이 21-22절에 계속 점증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23: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 앞의 20절에서는 제단 위의 예물이 제단에 속하여 있음을 밝히고, 예물과 제단을 대비시켜 제단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높인 것에 이어서 본문에서는 그 제단이 있는 성전을 하나님과 대비시켜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물을 두고 맹세하는 자나,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자나, 그리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정직하게 지켜야 함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안에 계신 이 - 공동번역에서는 '그 안에 계신 분'으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계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케산티'(* )는 '카토이케오'(* )의 과거분사이다. 그 뜻은 '산다', '거주한다', '자리잡는다'(live, dwell)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초자연적 존재가(하나님, 성령, 그리스도 등) 사람과 가지는 관계를 묘사하는 말로서 '거하다' 등으로 쓰인다. 따라서 특정한 장소에 대해 쓰여지기도 하며, 사람과의 인격적관계의 의미로 쓰여지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카토이케산티'(* )라는 단어가 문법적으로 분사형이기 때문에 과거의 행위를 나타낸다(1회적 의미). 따라서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지금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 계신다는 의미로서 언급된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을 솔로몬이 완성하여 헌당하였을 때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는 전통적 믿음에 대한 고백이다(대하 6:2;7:1-3). 그러나 이러한 성전 중심 사상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보편적 하나님 임재 사상(臨在思想)으로 바뀐다. 즉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만 계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이 실현되는 곳,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속에 계신다(요일 4:16). 따라서 본문의 강조점은 성전이나, 제단 위의 제물, 또는 제단과 같이 장소나 물질적인 것을 두고 맹세의 근거를 삼아서는 안된다는데 있다. 그 맹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人格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실로 예수에게는 특정한 장소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내면적 신실성이 문제인 것이다.

=====23:22
하늘로 맹세하는 자 - 이 구절 역시 20절과 21절에 이어 똑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그 강조점을 점증(漸增) 시키고 있다. 즉 헬라어로 '우라노스'(* )는 원래 하나님의 피조물인 하늘(heaven)을 말한다. 그리고 이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적 의미로 쓰여지며(22절;행 7:55;히 8:1;벧전 1:12) 인격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21:25;막 11:30, 31;눅 15:18, 21;20:4,5). 이 본문에서는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적 의미로 쓰여졌다. 5:34에서도 역시 '하늘'을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와 같은 의미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보좌 -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행위와 하나님의 보좌를 두고 맹세하는 행위를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헬라어로 '드로노스'(* )라고 하는 보좌(寶座)는 '왕좌' 또는 '옥좌'(공동번역)로 해석한다. 이 단어는 왕이나 지배자의 권자로 사용되기도 하고(눅 1:32,52;행 2:30), 하나님의 자리로 사용되기도 한다(히 12:2;계 7:15), 그리고 하늘과 동등하게( 5:34;행 7:49) 또는 그리스도의 자리로 사용되기도 한다(19:28;25:31;히 1:8;계 22:1, 3 등).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으로 보아 장소적 의미의 '하늘'로 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보좌를 두고 맹세한 것은 하나님과 맹세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 위에 앉으신 이 - 이 구절은 20절의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과 21절의 '그 안에 계신 이'라는 구절과 같은 형식을 취하여 '그 위에 앉으신 이'라고 문장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단과 성전 안에 있는 이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맹세에 대한 관계성이 옮겨가고 있다. 여기서 '그 위'란 앞에 나온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킨다. 따라서 '앉은 이'는 하나님이 된다. 20-22절은 세번째 저주 선언문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 결론은 22절이 된다. 그런 점에서 20, 21절은 마지막 결론인 하나님에게로 이끌기 위해 서술한 잠정적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이 3단계에 걸쳐서 결론을 이끌어 냄으로써, 이 비판의 내용이 (1) 맹세에 대한 무조건 거부가 아님을 차근 차근히 밝혔고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맹세에 관한 가르침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그리고 (3) 성전 중심이나 예물 중심 사상을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갔다. 이와같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삼단논법의 형식을 사용하였다. 즉 제단-성전-하늘로 옮겨가고,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그 안에 계신 이-그 위에 앉으신 이의 형식으로 관점을 옮겨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제단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맹세의 관계를 옮겨갔다. 따라서 모든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23:23
박하와 십일조를 드리되 - 여기서는 네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된다. 여기서도 그 저주의 대상이 13절과 15절의 형식과 똑같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지목(指目)된다. 비판의 내용은 그들이 사소하고 세분된 규정과 전통에는 아주 민감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십일조 - 소출의 10분의 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서 그 기원은 족장 시대에 두고 있었는데(창 14:20;28:22)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되었다(레 27:30;신 14:22-27). 이 십일조의 근본 취지(趣旨)는 (1)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인정과 (2)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 운영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 사랑의 예물로서가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켜, 이것을 통해 유대인됨과 율법 완수자됨의 규준(規準)으로 삼았다.
박하 - 헬라어로 '헤뒤오스몬'(* )이라고 하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mint)이다. 이는 유월절 쓴나물의 양념으로 쓰였으며(출 12:8) 그 향내로 인해 회당의 방향제(芳香劑)로 쓰였다고 한다. 회향은 헬라어로 '안네돈'(* )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나리과의 식물이며 양념에 사용되는 식물로서(anise, dill) 약품과 향료에도 사용된다. 근채는 '퀴미논'(* )이라고 부르는 식물로서 이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된다. 근채를 다른 말로 구민초(cumin)라고도 한다.이상에서 나열한 식물 종류는 이스라엘의 농작물 중 매우 사소한 수확물이다. 따라서 이와같이 사소한 종류를 나열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레 27:30의 규례(規例)에 따라 얼마나 십일조에 철저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비판은 이렇게 세세한 십일조 생활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에 나오는 그들의 행실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비적으로 그들의 십일조 생활을 강조한다.
율법의 더 중한 바 - 여기서 '더 중한 바'(* , 바뤼테라)란 '더 어려운 일이나 `더 힘든 일'(De Wette)이 아니라 지엽적(枝葉的)이거나 사소한 일과 대조되는 '더 중심적이거나 결정적인 일'(Ridderbos) 또는 '더 중요한 일'(Meyer, NIV)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아주 중요한 율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차등(差等)적인 율법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앞에 나온 사소한 십일조 행위와 대비시킴으로써 더욱더 중요한 율법을 소홀히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있다.
의(義) - 헬라어로 '크리시스'(* )라고 부르는 이 말은 종말적 심판의 의미를 나타내기도하고 재판, 판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옮음(right)와, 공의(justice), 의(righteousnes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에서의 '의'는 정당하고 공정한 뜻으로서 '정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간 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를 분명하게 하도록 돕는다(신 16:19;사 1:17;렘 5:13).
인(仁) - 헬라어로 '엘레오스'(* )라고 하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자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22:37-40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信) - 헬라어 `피스티스'(* )는 믿음, 신뢰, 신용(faith, truth), 약속, 서약, 증거, 담보, 보증, 확신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히 11:6)와 이웃에 대한 신뢰(시 15:3,4)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가지 종류의 단어, 의(義),인(仁), 신(信)의 개념은 설명할 수 있거나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속에서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십일조는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보일 수 있지만 의(義), 신(信), 인(仁)은 삶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버렸도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버렸다'로'공동번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여기서 예수의 치밀함을 엿보게 된다. 예수께서 보신 유대인의 십일조 행습(行習)은 무조건 비판을 가할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의미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예수의 선언(5:1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번역되어 있다.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23:24
소경된 인도자여 - 이 구절은 3번째 저주문의 시작인 16절과 똑같은 문구이다.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실에 대해 또다른 형태의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 다음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 비유적이면서 상징적이고 과장된 표현이다. 하루살이와 약대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였는데 이러한 과장법은 19:24에도 나타나고 있다(5:29,30:17:20,21:21,특징적인 과장법들). 한편 여기에 나오는 하루살이는 팔레스틴 기후에서 흔한 곤충(昆蟲)이자 가장 조그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하루살이는 담근 포도주통에 몸을 던지곤 했는데,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음료로 사용하기 전에 채로써 포도주를 걸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정한 곤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나마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부정을 덧입을까 해서이다(레 11:20,23;17:10-14). 그리고 약대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몸집이 큰 짐승으로 취급되었으나 이것 역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동물로 간주되었다(레 11:4). 이와같이 부정한 곤충과 동물을 비유로 들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부정적인 것으로 강조한다. 더욱이 그들이 삼킨 약대는 곧 그들의 무한정(無限定)한 탐심과 육체적 향락 및 무절제한 죄악을 암시한다. 여하튼 이 비유는 네번째 저주 선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 요약하고 있다. 즉 하기 쉬운 일에는 생색을 내며 자랑하고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무른 척 하여 책임을 피해가는 위선적인 종교인에 대한 비판이다.

=====23:25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 다섯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된다. 여기서는 당시의 랍비들에 의해 제정될 의식적(儀式的) 정결에 관한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잔과 대접'은 먹고 '너는 그릇을 통칭(通稱)한 말인데, 이것을 정결히 한다함은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이고 가식적인 율법적 청결을 빗대어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하는 이유는 종교적 의식(儀式)보다는 음식을 깨끗하게 담기 위함이다. 따라서 물론 안팎을 모두 깨끗이 해야 되지만 우선적으로 깨끗이 해야 할 부분은 그릇 안쪽일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릇 안을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다. 다시 말해 정작 중요한 것은 속마음인데 겉으로는 거룩하고 깨끗한 척하면서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네번째 저주 선언문인 23,24의 내용과 비슷하다.
탐욕과 방탕으로 - 탐욕'은 헬라어로 '하르파게(* )라고 하는데 '강탈', '약탈', '도둑질'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는 주로 물질적인 측면의 죄악을 암시한다. 그리고 '방탕'은 헬라어로 '아크라시아'(* )인데 그 뜻은 '자제력 상실','무절제'이다. 이는 주로 윤리적 측면의 범죄를 암시한다. 한편 이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는 구절이 7:15의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마음속에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즉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실제로 남의 것을 착취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강조점은 악한 마음과 동시에 그 악독한 마음에서 비롯된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깨끗이 하라 - 이 본문은 진지한 충고(忠告)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소경된 바리새인'라는 호칭은 24절의 형태를 따랐지만 구체적으로 바리새인을 지칭하였고 복수형이 아닌 단수형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강렬한 의미를 제공한다는 점이 24절과 다르다. 눅 11:41의 평행구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즉 "안에 있는 것을 '구제하라'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이다.여기서 '구제하라'는 말은 아람어로는 '깨끗하다'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과는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본문의 전체적 의도는 다섯번째 저주 선언문의 내용이 갖는 목적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 목적은 속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물론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의'(義), '인'(仁), '신'(信)에 입각하여(23절) 행실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로, 결국 위선된 자기 생활로부터 전적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즉 회개하고 거룩에 이르라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과 행실을 바꾸는 것은 먼저와 나중이 없다. 실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知行合一). 그러나 여기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겉치레와 외식에만 치우쳐 있는 그들의 편협(偏狹)한 생활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23:27
이 본문은 여섯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25절과 같은 형태의 문장구조를 가졌다. 즉 '겉'과 '안'을 대칭적으로 묘사하면서 비판하고 있으며 특별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드러나지 않은 악한 영향력들을 집중 공박(功駁)하고 있다.
회칠한 무덤 - 무덤은 들판이나 길 옆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무덤은 겔 39:15에 근거한 랍비들의 명령에 따라 우기(雨期)가 지난 유월절 전 아달월 15일에 회가루를 뿌려 하얗게 칠한다. 그 이유는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가는 사람들(특히 유월절 순례자들)이 쉽게 식별하여 피해가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 시체나 무덤을 만진 사람은 7일동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 19:16). 한편 행 23:3에서 바울은 이와 유사하게 대제사장을 '회칠한 벽'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당시 바울은 이 말을 통해 대제사장의 위선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상징어법으로 나타내려한 의도를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회칠한 무덤'이란 그들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죄악성은 뒤로 하더라도 사람만을 의식하는 그들의 허영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형태에 대한 극히 독설적인 책망이다. (2)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극히 부정하다고 단죄(斷罪)하는 율법 조항에 의해 비판받게 하여 그들에게 지독한 모욕감과 수치감을 주고자 함이었다. 실로 그들은 회칠한 '무덤'에 비교될 만한 무가치하고 반신앙적 인물들이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칠한 무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곧이어 함으로써 이해를 보충시키고 있다. 즉 '겉'과 '안'을 대조(對照)시키고 다시 '아름답게'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대조시켜 위선자의 양면성을 밝힌다. 27절의 내용은 사실 25절의 저주 선언문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 -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인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창 3:9;요일 3:14,15). 따라서 주검은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누구든지 그것과 접촉하면 역시 부정에 전염(傳染)된다고 규정하였다(민 5:2;6:6). 한편 그러한 주검이 안장되어 있는 유대인의 무덤 속에는 송장의 뼈와 시체의 악취와 기타 오물로 가득하여 의식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위생학적으로도 더럽고 추한 몰골을 형성하였다. 실로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실체요 내면의 부정이었던 것이다(행 23:3). 한편 인위적이고 과도한 경건은 독선과 가식의 겉포장일 수 있다.

=====23:28
겉으로는 안으로는 - 여기서도 '겉'과 '안'으로 나누어 27절에서 상징적으로 비유했던 위선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겉으로 옳게 보이되'가 27절의 '아름답게 보이나'와 대응되고 의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가 27절에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로 대응된다. 이것은 마태 특유의 묘사 방법으로써, 강조적 표현이다.

=====23:29
이 본문은 일곱번째 저주 선언문이다(29-36절). 여기서도 역시 저주 대상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지만 그 전체 내용상 그릇된 율법주의에 심취(心醉)한 모든 유대인들이라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 추앙(推仰)받은 사람이나 영웅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유대교의 전통적 관습이었다. 더욱이 성전 금고의 일부분이 그 일에 사용될 만큼 전국민의 관심사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 사회에는 자연 무덤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스가랴,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등)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근본적인 동기는 그 선열들의 발자취를 좇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를 고쳐나갈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위선된 자신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아니하였으리라 -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보강(補强)하는 것이 34절에 나온다. 여기서는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조상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즉 자신들이 조상이 살았던 시대에 살았다면 결코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간접적으로 자신들이 조상보다 도덕적(道德的)으로나 종교적(宗敎的)으로나 우월하다는 것을 말한다. (2) 자신이 선지자들의 활동을 조상들과는 달리 용납하고 따르겠다는 말이거나, 지금 선지자들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고백일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였고 미화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선지자들의 무덤과 묘비를 세우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든 이유도 역시 여섯번째 저주 선언문과 같이(26, 27절) 묘비와 무덤을 세우는데 관심갖는 그릇된 종교인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그들의 자랑이라고 할수 있는 그들의 업적을 통해 비판을 가하여 비판효과를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영예를 통해 자신들이 이득(利得)을 보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멀리 있는 일일수록 자신있게 말할 수있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들과 같지 않다고 호언장담(濠言壯談)한 것이다.

=====23:31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 조상을 비난하는 자들이 선지자를 죽인 조상을 가리켜 '우리가 조상의 때에'라고 말함으로써 그 조상의 자손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실로 셈족 언어에서는 누구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과 본질적(本質的)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조상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조상의 죄를 이어 받아 같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원죄라는 의미와 다르다. 또 죄의 유전적인 전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필시 운명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죽은 자의 자손됨'에 대한 증거는 선지자를 죽인 자들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신들이 스스로 말한 점이다. 따라서 십계명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通念)에 따라서 그 가문의 죄과(罪過)에 대한 책임은 대(代)를 이어 져야했다(출 20:5). 진정 이러한 사실은 죄가 한개인의 돌발적 사고나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영향력과 함께 전달됨을 뜻한다. 즉 죄의 사회적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실로 죄악된 환경에서는 죄인이 많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조상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자손들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의 자손이라면 더욱 자숙(自肅)하고 남보다 선행에 힘쓰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일곱가지의 저주문을 통해 폭로한 바 처럼 도리어 위선이 절정에 다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조상의 죄까지 소급(溯及)하며 그 책임을 묻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이미 간파하신 바 있듯이, 당신을 모살(謨殺)하려는 그들의 음모가(21:46;22:15;요 11:47-53) 그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23: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 이 구절은 매우 도전적이고 역설적이면서 '화 있을진저'와 같은 암시적 저주가 담겨있는 문장이다. 여기서 조상의 양(量)은 30, 31절의 내용을 참고하며 이해해야 한다. 즉 조상이 저질렀던 죄의 양(量)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론'(* )은 분량을 재는 척도를 나타내는 말로서(quantity, number, measure), 본문은 결국 그 채우는 양에는 한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여하튼 본문은 너희 조상들이 시작했던 죄의 잔을 채우는 일을, 너희들이 그 충만한 데까지 채우라는 냉소적인 명령이다(살전 2:16). 한편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서는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조상들이 저질러온 죄악을 이어받아 더 많은 죄를 저질러 죄의 포화상태까지 채워 보라는 말이다. 물론 이 포화상태에 이르는 데 필요한 마지막 한 방울 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일이다(Meyer). 이러한 어투에서 몇가지 의미를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선지자를 죽였던 자들의 자손들이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조상들과 똑같이 살아가는데 대한 탄식이다. (2) 그들에 대한 희망의 포기이다. 즉 아무리 권면하여도 듣지않는 그들에게 너희 멋대로 해보라는 투의 말이다. 물론 채워진 이후에는 곧 징벌(徵罰)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창 15:16). (3) 역설적 의미이다.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하지 말라고 말리면 더 하려고 하다가 해보라고 포기해 버리면 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처럼 저주섞인 포기 선언을 통해 그들이 돌아서기를 바라는 충격 요법적인 어투이다. 이러한 의미를 통해 예수를 바라볼 때 예수께서 얼마나 죄인들에 대하여 연민(憐憫)의 정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연민의 정에서 무서운 저주 선언문이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열정적인 사랑이 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노하며 경멸적언어를 사용하게 한다. 사랑에 바탕이 되지 못한 비판과 저주는 분쟁만 낳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바탕을 둔 비판은 회개의 촉구가 되고 양심에 감동을 주게 된다.

=====23:33
이 구절은 가장 강렬하고 자극적인 어투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이 어투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퍼부었던 내용과 일치한다(3:7).
뱀들아 - 공동번역에서는 '이 뱀같은 자들아'로 번역하여 그 의미하는 바를 좀더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뱀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실제적인 동물로서의 예로 든것도 있고(7:10;막 16:18;눅 11:11;고전 10:9 등) 상징적 존재로서 악마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고후 11:3;계 12:9,14;20:2). 여기서는 타락하고 저주받을 자를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는 뱀이 간교(奸巧)하여 죄악의 씨앗으로 여기는 생각(창 3:1-5)과 저주받은 동물로서 생각하는 통념 때문이다(창 3:14,15).
독사의 새끼들아 - 먼저 독사란 독을 품은 뱀이라는 의미보다, 여기서는 사단의 기질과 악마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함이 좋다. 그리고 새끼란 문자적으로는 '산출된 것', '탄생된 것', '자식',`자손'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독사라는 동물을 취급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비유된 것이므로 '자식'이라는 말이나 '족속'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 비유에서 독사와 그 새끼는 똑같이 한 가지의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조상들의 죄를 비난하지만 그들이 비난하고 있는 그 조상들의 족속이므로 똑같이 악한 족속이라는 뜻이 된다.
지옥의 판결 - 이같은 표현은 랍비들에 의해 자주 사용된 바 있는데(Wetstein) 직역하면 '지옥에 떨어질 심판' 또는 '지옥(게엔나)에 위탁된 심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게엔나'에서의 심판은 영영한 멸망에의 판결이다(5:22). 한편 이와 같은 번역은 모두 종말적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이미 영원한 절망에로 결정된 것이다.
피하겠느냐 - 가정법적 표현이면서 반문하는 형식이다. 심판이 피할 수 없이 자명하게 닥칠 것이라는 강조적 표현법이다.

=====23:34
내가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 여기서 '선지자'란 구약의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들과 동등한 권위와 영적 감화력(感化力)과 자질을 갖춘 복음의 선포자로서 소위 순회 복음 전도자 정도로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엡 4:11). 그리고 '지혜있는 자들'이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덧입고 지혜있는 가르침으로 교회에 유익을 주는 자를 가리킨다. 또한 '서기관들'이란 유대교 인사가 아닌 그리스도 복음의 휼륭한 교사들을 뜻한다(13:52). 한편 이들은 베드로, 야고보, 스데반, 바울 등과 같은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산 증인들을 위시한 많은 교회의 역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특별히 예수께서 하신 '내가 보내매'(* , 에포스텔로)라는 말은 현재형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단회적 파송이 아닌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파송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계속적 파송으로 인한 당신의 사람들의 지속적인 박해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계시다. 그중 '죽임당하는' 박해는 스데반(행 7:59)과 야고보(행 12:2)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박해는 베드로(요 21:18,19;벧후 1:14)나 시므온이나 안드레가, '회당에서의 채찍질'은 많은 사도들이(행 5:40;22:19;26:11;고후 11:24,25), '구박당함'은 수많은 복음 전파자들이(10:23;행 13:50;14:6,20;26:11) 감수(甘受)해야 했었다. 한편 이러한 본문은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이해될 수 있다. (1) 30절에서 언급된 바리새인들의 호언장담에 대한 반박(反駁)으로서. 그들의 조상들이 지혜자와 선지자들에게 행했던 악행을 그대로 묘사하여 그들도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악행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절에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과 31절의 내용과 더불어 바리새인들도 조상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암시한다. (2)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직접 예수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장차 예수께서 파송할 자신의 제자와 전도자들에게도 그들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조상들을 비판한 것처럼 그들도 다시 그런 일은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고적인 의도로 볼 수 있다. (3) '죽이다', '십자가에 못박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 자신이 앞으로 당할 고난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예언은 예수께서 자주 해왔다(10:23;16:21).

=====23:35
아벧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 이 구절 역시 매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아벧이 성경에 나타난 첫번째 살인의 희생자인 것은 분명하다(창 4:8). 그러나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Zechariah son of Berekish)가 누구인가는 문제가 된다. 몇 가지 견해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1) 이 사람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Zecharish)였다는 설이 있으나(Chrysostom) 그가 순교했다는 증거는 없다. (2) 이 사람이 바리스(Baris, 또는 Baruch 또는 Bariscaeus, 이 이름들은 사본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의 아들로서 성전에서 두 열심당원들(Zealots)에게 죽임을 당한(Jos. Wars, IV, 334-44<4절.) 사가랴(Zechariah)였다는 설이 있다(Penn). 그러나 그가 선지자이거나 순교자(殉敎者)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비록 그가 성전 경내 한 가운데서(* , 엔 메소, in the mist)죽임을 당했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제사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증거도 없다. (3) 이 사람이 구약에서 베레갸의 아들(son of Berekish)인 선지자 스가랴(Zecharish)였다는 설이 있다(슥 1:1)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는 기록은 없다. (4) 이 사람이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사가랴였다는 설이 있는데(Albright and Mann) 이런 견해는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역시 증거가 없다. (5)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 사람이 대하 24:20-22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Zecharish the son of Jehoiada)일 것이라는 설이다. 이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이 사건은 히브리 정경(正經)에서 마지막 책의 끝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말, 곧 히브리 성경의 첫 책(창 4:8)에서 마지막 책(대하 24:20-22)에 기록된 모든 순교자들이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한다면 이 말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순교자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가 말하는 사가랴(Zechariah)가 대하 24:20-22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Zechariah)라고 생각한다면 '여호야다'라는 부칭(父稱)이 문제가 된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슥 1:1에서는 선지자 스가랴의 아버지인 베레갸의 이름이 언급되는 한편 스 6:14에서는 그의 할아버지인 잇도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여호야다가 대하 24장에 나오는 스가랴
의로운 피 - 이는 '의인의 피'(애 4:13), '무죄한 자의 피'(왕하 21:16;24:4)라는 표현과 흡사한 의미로서 의롭다 인정받는 자의 죽음 및 그 피흘림과 관련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범죄자(犯罪者)의 선고를 받은 것 까지를 포함한 넒은 의미이다(히 11:4). 즉 이것은 아벧과 마지막 순교자 스가랴까지 의(義)를 위해 순교당한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공동번역에서는 '땅에서 흘린 무죄한 피값'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러왔던 불의한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하는 형벌의 선언인 것이다. 한편 조상들이 저질러왔던 악행은 예언서들과 시편에 잘 나타나고 있다(시 94편).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공동번역에서는 '피'를 '피값'으로 번역하여 본문의 의미, 곧 악행에 대한 그 대가를 지불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한편 이 35절은 27:24, 25을 예언한다. 즉 그때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回避)한 데 비해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그 끔찍한 일에 대한 책임을 소리지르며 자청하여 떠맡았다.

=====23:36
다 이 세대(世代)에게 돌아가리라 - 주목할 점은 29절에서 일곱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될 때 그 대상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리고 35절에서도 '너희'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한 말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피값을 받아야 할 대상이 이 세대(世代)로 지목되고 있다. 즉 그 시대에 살던 모든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것은 죄에 대한 집단적, 사회적 책임성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31절 주석).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을 오늘 이 세대에서 회개하고 바로잡지 못하고 오히려 그 조상의 악의 양을 충만히 채우면(32절) 바로 이 세대가 멸망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예언을 한 후 A.D.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그들은 경험하였다. 실로 과거의 죄악을 오늘 청산(淸算)하지 못하면 오늘 이 세대는 과거의 죄악을 용인(容認)하고 반복하는 것이 되며 결국 과거와 마찬가지로 멸망의 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본절은 일곱 가지 저주 선언문의 최종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23:37
이 절은 23장 전체의 내용을 예수께서 직접 자신의 감정을 첨가하여 마무리 짓고 있다. 문장 형태는 탄식문 형태이다.
예루살렘 - 예루살렘을 반복하여 두 번 부름으로써 애절하고 격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이 부분에는 마태가 다른 곳에서 흔히 사용하였던 헬라식 발음으로서의 `예로솔뤼마'(* )가 아닌 히브리식 발음으로 민족적 동질성과 연대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할 수 있고 종교적 중심지로서 상징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 탄식은 종교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백성을 향한 애정어린 부름이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여 - 이는 평화의 성읍이요 하나님의 성전이였던 도성이 살인자와 반역의 도시로 변한 사실에 대한 예수의 엄숙한 개탄(慨嘆)이다(34절). 한편 모세 율법은 사술(레 20:27), 우상숭배(신 17: 5, 7)등을 위시한 가증스런 범죄자를 돌로 쳐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미쉬나(Mishnah, M. Sanhedrin 7:4)는 한발짝 더 나아가 거짓 선지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이처럼 돌로 치는 일은 분노한 폭도(21:35;행 7:57,58)나 사전에 계획된 공모(共謀)에 의해 이뤄지기도 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 이와 같은 표현은 36:7;사 31:5;36:7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에 대중들이 잘 알고 있는 격언구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격언구는 사랑과 애정과 보호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이 갖고 있는 강렬하고 순결한 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애정을 하나님께서 품으시는 사랑과 일치시키고 있다.
내가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 이 말은 어떤 면에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초월적으로 돌아보시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요 8:58). 그러나 본문의 '몇번이냐'(how often)라는 말은 주어(主語)가 예수자신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과 더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 기간 중 마치 암탉이 독수리의 침입을 예상하고 자기 새끼를 바삐 모으듯이 예루살렘(모든 유대인들을 뜻하는 환유법적 표현)을 모아서 보호하려고 노력하셨다(신 32:11;렘 48:40). 예수께서는 비록 유대지도자들을 책망하면서 심판과 화를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여호와 하나님처럼(겔 18:32) 누구든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단 1회만이 아니라 집요(執拗)하고도 끈덕지게 당신의 백성을 구원코자 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이 의미는 단지 그들이 원치 않는 수동적인 배척 뿐만 아니라 비난과 공격 등의 적극적인 배척을 하였다는 것을 앞의 '죽이고','돌로 치는'이라는 표현과 연관시켜 암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무모하게도 자신들의 멸망의 날을 앞당겼던 것이다. 정년 하나님의 사랑을 영속적으로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정한 때에 극렬하고도 단호한 심판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사 28:1, 2).

=====23:38
너희 집이 - 헬라어로 '오이코스'(* )라는 단어는 '집'이라는 뜻 외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일반적인 '집'이나 '거처'를 뜻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신령한 성전으로서 기독교인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딤전 3:15;벧전 2:5;4:17). 또 '나라'나 '가문'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집'을 두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예루살렘 성전을 나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전을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이러한 말씀을 하신적이 있으며(24:1), 그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지이기 때문이다(렘 12:9). (2)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적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국가의 멸망이다. 여하튼 예수를 끝까지 배척함으로써 버림받은 성전이나 국가는'나의 집'이 아닌 '너희 집'이 되는 것이다.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 몇몇 고대 사본들에는 '황폐하여'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이 말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한편.이 '황폐한'(* , 에레모스)이라는 단어는 '한적한', `사막', '버림받은' 등의 뜻으로 바로 뒤이어지는 `버린 바 되다'(* , 아피에타이)와 유사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실로 예루살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1:23)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정녕 생명(生命)과 복(福)의 근원이신 예수가 '버린 바 된' 곳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영영히 '황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사 5: 5, 6).

=====23:39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이 구절은 시 118:26을 인용한 문구로서 얼마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호산나'의 연호와 함께 사용된 구절이다(21:9). 아마 이 표현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예배드리러 온 자들에게 인사할 때 사용했던 말로 추측된다. 그런 점에서 성전의 주체요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도 존귀한 승리자로 오셨으므로 마땅히 모든 이들로부터 인사와 존경을 받아야 했다(France). 한편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배열됨으로써 ' 까지'라는 말을 예루살렘 입성 때 곧 종려 주일(Palm Sunday)까지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종려주일에 사람들이 이 말을 외쳐된 일은 여전히 종말의 완성을 고대하는 역설적인 성취(ironic fulfillment)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명 예수께서 있다. 특히 `이제부터'(* , 아프 아르티)란 말은 대부분 종말의 완성과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26:29, 64) 의해 더욱 확실해진다. 이와 더불어 본절의 '나를 보지못하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부활 후의 예수의 출현(出現)을 가리키지 않고(행 10:41) 그의 종말적 도래(Parousia)를 가르킨다고 본다. 그런데 문맥의 전개를 고려해 볼 때 예수의 재림은 곧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24:30, 31;빌 2: 9-11;계 1:7). 한편 인용된 시 118편의 구절, 즉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고려할 때, 예수는 심판자로서 뿐만 아니라 환영받는 왕으로도 재림할 것임을 알 수 있다(Benoit, Bonnard, Sohlatter).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지금껏 메시야를 배척해 온 잘못을 회개하며, 전민족적으로 그들이 거절했던 메시야를 '호산나' 찬송하며 그분의 절대 권위를 승인(承認)할 것이며(롬 11:26;슥 12:10), 그로 인해 선민의 영광스런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호 3:4, 5).




앞장에서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세차례에 걸친 시험적인 질문 공세 및 예수의 지혜롭로 권세있는 답변 그리고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역질문하심으로써 그들의 입을 막으신 기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본장에서 예수는 둘러선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교만 및 거짓 교훈들을 더욱 호된 어조로 경계시키신다.
여기서 우리는 본장에 관련된 문맥상의 유의점 두 가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첫째로, 본장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와의 계속되는 논쟁(21:23-22
:46)을 절정으로 이끌어올릴 뿐만 아니라 그 논쟁에 대한 최종적 결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본장이 22:41-46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기독론전(基督論的
) 논쟁 바로 다음에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42절의 '너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은 복음의 핵심과 관련되는 매
우 중요한 질문이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바리새인들이 실패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그들을 정죄하는 고소장과
같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는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많아 있었다는 (2절) 이 유로 인해 더욱 무거워진다. 따라서 24,25장의 감람산 강화에서 그들의 멸망이 선포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둘째로, 본장은 예수를 모함하고
핍박했던 자들이 바로 초대 교회사에 순교의 피를 얼룩지게 한 장본인이었음을 경계시키고 있다(행 7:1). 그들은 어둠에 속한 까닭에 진리의 빛을 본성적(本性
的)으로 배척하며(요 3:19),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하면서 실상은 열심히 하나님
을 대적하는 자들이었다(출 10:3).
한편 본장의 말씀 역시 고난 주간 중 세째날인 화요일에 주어진 것이며 성전
에서의 마지막 말씀에 해당한다. 세부 단락의 강해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본 장의 경고 대상, 본장과 신명기 32:1-43과의 형식상. 내용상의 비교, 그리고
본장의 내용 구성 등을 먼저 개관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본문 이해를 도모하기
로 하자.
(1) 경고 대상. 본장에서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종교 지도
자들을 경고 대상으로 삼으셨다. 특별히 그들을 겨냥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들은 스스로 그릇된 길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타락과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기 때문이다(13,15절). 그들은 교만하여 스스로 지도자로
자처하고 나서기를 좋아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하였 다. 따라서 그들은 마치 누룩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16:6). 둘째로, 그들
은 종교적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에 그 거짓되고 왜고된 진리에 몰두하여 참된
진리를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한편 저들에 대한 주님의 경고
는 오늘날 교회 지도자로 봉사하는 자들 모두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다. 사회
의 여러 가지 부패 중 종교적 부패는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 왜냐하면 종교적 양심은 그 사회를 지탱시키는 뿌리이자 마지막 보루(堡壘)
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부패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의 부패는 더욱 추악해보인
다.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각별한 까닭이다.
(2) 신명기 32:1-43과의 비교. 본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이스
라엘의 배반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로 노래한 '모세의 노래'(신 32:1-43) 와 형식상 유사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또한 유사하다. 이 노래는 타락과 심
판으로 점철되는 이스라엘의 암울한 미래사를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노래의
근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품으
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엄한 질책으로 시작하고 있으
되 하나님의 긍휼과 동정이 책망 위에 두드러지고 긔부분에 가서는 이스라엘의 최종 회복과 대적들의 최종 멸망을 선포하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끝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장에서 예수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거칠게 몰아붙이 며 일곱 차례에 걸쳐 화(禍)를 선포하셨지만,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고 한탄하셨다(37절). 이 애도는,
영적 암매(暗昧)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에로 인도하기 위해 노심초사(勞心焦
思)하셨던 구세주의 애절한 심정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
(3) 내용 구성. 본장의 내용은 서론(1-12절), 본론(13-36절), 결론(37-39절)
의 형식을 갖춘 일종의 경고투의 설교로 볼 수 있다. 서론은 바리새인들과 서
기관들을 위시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지적하고 섬김의 도를 가르치 신 내용이다. 본론에서는 매우 엄정하고 신랄한 어투로써 종교 지도자들의 위
선과 최악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는데,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일곱 가
지의 경고가 열거되었다. 그리고 결론은 멸망할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에 대한
주님의 애절한 탄식을 보여준다.

1. 종교 지도자들의 폐단(23:1-12)
본장을 한편의 설교라 할 때 본문은 그 서론격으로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들로 대표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전반적 안목에서 지적한 내용이 다. 타 공관복음에서는 본문에 해당하는 내용이 불과 두 세 구절로 축약되어
있거니와(막 12:38-40;눅 20:45-47),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매우 소상하게 수록
하고 있다. 내용상 본문은 다시 두 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는 바, 이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계(1-7절). 여기서 지적된 그들의 죄
상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그들의 언행(言行)이 불일치했다는 점 이다(3절). 서기관들은 구체적 생활 구석 구석에 율법 해석서만도 50권이 넘었 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들 중에는 너무 무로하고 엄격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큰 짐으로 작용한 것들이 많았지만(4절) 그 자체로서는 꼭 지켜야 할 내용도 있었 다. 하지만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등은 종교적 위선(僞善)에 몸이 배어 있 었기 때문에 스스로 가르친 바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에도 우려되는 바이다. 강단에 선 자들은 한결같이 거룩한 행실을 강조하며 예 수께서 가르치신 바 높은 수준의 삶을 권면한다. 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 여 먼저 모범을 보이는 자들은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성도들
중에는 설교자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모습을 보고서 실망하여 비판과 독설을
던진 후, 자신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는 생활로부터 멀어져가는 사람이 많
다. 이처럼, 말하는 것은 쉽고 행하기는 어려우며, 비판하기는 쉬워도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는 힘든 것이다. 둘째는, 그들의 외식(外飾)이다. 본장 설교의 본
문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하셨다. 경문이란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이행하기 위해, 이스 라엘 백성이 위에 인용한 명령을 포함하는 네 군데의 성경 말씀을 양피지
에 적어 놓은 것을 말한다(출 13:3-10;11-16; 신 6:4-9;11:13-21). 유대인
들은 이 경문을 조그마한 상자에 넣고 끈을 달아 이마에 두르거나 손목에 매고 다녔는데, 훗날에는 자신의 경건을 자랑할 목적으로 일부러 경문을 크게 만들 어 달고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옷술은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기 억하며 지키도록 하기 위해 의복의 옷단 귀에 술을 달게하신 것이다(민 15:37-4
1). 이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 그들의 일상 생활에까지 관여 하신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처럼 예수 당
시에 바리새인들은 이 옷술을 종교적 지위 표시 내지는 경건의 외양으로 악용
하였다. 세째는, 그들의 교만이다. 이 교만의 죄악은 앞서 지적된 두 가지 폐단
의 근본 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일반 백성 위엥 군림하여 존대받기를
원했던 까닭에 그들은 스스로 지키지도 않는 온갖 엄중한 계명들을 장황하게
설교하였으며 또한 경문과 옷술을 보란듯이 크게 만들어 과시하였던 것이다.
(2) 지도자의 합당한 자세(8-12절). 본문의 전반부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폐단을 지적한 내용인 반면(1-7절), 후반부에서 예수는 지도자에게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 할 자세를 적극적으로 가르치셨다(8-12절). 이 자세는 한 마디로 ' 겸손'이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겸손에 관한 주제는 예수의 교훈 속에 일관되 게 나타나며 특히 공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러 집중적으로 강조된 바 있
다(18:4;20:26). 특히 본문에서 예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일수록 더욱 겸
손하게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함을 강조하셨다. 이 교훈은 우리들에게 생생한 감
동 자체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입으로만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늘어놓았던 바
리새인들과는 달리, 에수는 일생을 통하여 친히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사 죄인 들과 병자들을 섬기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 상에서 내어 주시
기까지 하심으로써 섬김의 도를 실천적 모범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 외식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특별히 외식에 대해 단호히 책망하셨는데, 이
는 당시 형식주의와 의식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대교를 특징짓는 바를 한 마
디로 꼬집었을 때 그것이 바로 외식 내지는 위선이었기 때문이다.
(1) 소극적 의미의 외식:이는 스스로의 외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여기에 빠진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되 올바른 지식을 좇 은 것이 아니어서 도리어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아니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셈이다(롬 10:2,3). 그리고 이들은 대개 선조들의 유전이나 인습 등
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헌금을 하는 등으로써 종교적 의무를 완수한 것인 양 착각하는 자들이 있으나,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요 의(義)와
인(仁)과 신(信) 등의 내적 계율을 지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3절;
눅 11:42).
(2) 적극적 의미에서의 외식:이는 스스로 외식을 행하는 줄 알면서도 자신
의 기득권 수호나 기타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종교적 행사나 규례 등을 적극적 으로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애초에 바리새인들은 헬레니즘의 세속적, 이
교적 영향을 경계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선한 동기에서 엄격한 율법 고수적 태
도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유대교가 로마 당국과 밀착된
관계에 빠지게 되면서부터,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종교적 허울만을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수호하기에 급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로
부터 단호하고도 엄중한 책망(27절)을 들은 자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2. 일곱 가지 화(23:13-36)
본장 설교의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화(禍) 있을 진저'로 시
작하는 일곱가지 정죄 사항이 나열되고 있다. 이를 일명 '일곱 가지의 화(禍)' 라고 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눅 11:37-54에 나오는 '여섯 가지의 화'와 유사
한데 이제 이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첫째 화(13절)와 둘째 화(15절) 는 자신 뿐 아니라 구원을 얻으려는 다른 사람마저도 실족케 한 자에 대한 경고
이다. (2) 세째 화(16-22절)와 네째 화(23,24절)는 하나님 앞에서 전도(顚倒)
된 가치 판단을 드러내는 자에 대한 경고이다. (3) 그리고 다섯째 화(25,26절
)와 여섯째 화(27,28절)는 외식주의자에 대한 경고이다. (4) 마지막으로 일곱
째 화(29-36절)는 선지자를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그리고 본문은 5:3-12에 수록된 8복 강화와 비교된다. 공생애 초기에 복있는
자의 조건과 참 복의 내용을 말씀하신 예수께서, 이제 공생애를 마감하는 시
점에 이르러 대적들의 가증(可憎)스런 외식을 신랄하게 지적하신 것이다. 본문 에 거듭 등장하는 '외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탈을 쓴 배우라는 뜻을 내포하
고 있다. 마태복음서 전체에 걸쳐 이처럼 격렬하고 신랄한 어투의 경고는 다
시 발견되지 않는다 하겠다. 이는 외식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시사한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당시 유대 사회의 타락상이 어느 정도였던
가를 가히 짐작해볼 수 있다. 랍비의 자리에 있었던 자들의 영적 상태가 그토록
암담했다면, 그 가르침을 받았던 일반 백성들 또한 영적 무지와 불법 가운데
방치되어졌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렇듯 극에 달한 캄캄한 어둠을 뚫고 마침내
'의로운 해'가 떠올랐으되(말 4:4), 어둠은 본성적으로 빛을 싫어한는 관계로
저 의의 태양을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은 살인이나 간음, 도적질과 같은 것이긴 하지만(19:18) 그에 못지 않게 증오하시는 죄악이 곧 외식 행위와 형제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행위(15:14)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준염한 경고와 교훈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외식을 일삼을 뿐 아니라 이를 목도하는 형제들이
실족당하게 할 경우가 있는데 삼가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 진리의 걸림돌인 거짓 교사들. 거짖 교사들의 외식적인 근성은 자신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는 많은 사람들조차 파멸로 인도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
성이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마는 이치이기 때문
이다(15:14).
실로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잘못된 점은 다음과 같다. (1) 소
즉적인 면에서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눅 11:52). 진정 그들은 위선과 외식에 사
로잡혀 경직되고 왜곡된 시각으로 율법을 해석함으로써 일반 백성들을 진리로부
터 한층 더 멀리 유리(遊離)시켜 버리고 말았다. (2) 적극적인 면에서 그들은
열심으로 진리를 전파하되 잘못된 성경 지식 때문에 전도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빠뜨리는 역할을 한다. 즉 율법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정작 그들은 백성들을 그시스도의 원수가 되도록 유도했다.
차라리 그들의 활동이 없었더라면 백성들은 좀더 손쉽게 진리의 복음에 가
까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천국에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릇된 자기 교파에로 인도하기에 급급했던 셈이다. 단언하건대 그리스도와 그 복
음을 배제하거나 변질시키는 자는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한다 하더라도 복 음의 훼방꾼이요 진리의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 외식하는 자들의 가치 전도(顚倒). 속과 내용은 어찌되었던 겉과 형식만
번드르하게 치장하기에만 급급하는 외식적 태도는 필경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케
한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예수께서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경우를 대표적
으로 소개하고 있다(16-24절).
첫째는 맹세에 관한 내용이다. 원래 맹세란 자신의 약속과 주장이 진실하다
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 분의 인격
앞에서 행해졌다. 이 맹세는 의무 규정이 아니었으므로 하고 안하고는 순전히 자발적 의사에 맡겨졌다. 하지만 일단 맹세를 했을 경우에는 아무리 사소한 것 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져햐 했다(신 23:22; 시 15:4). 만약 이를 불이행했 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으로서(레 19:12) 하나님의 징
벌을 면치 못했다(겔 17:13,16,18,19).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자신의 신앙과 경
건을 대중 앞에 과하기 위해 지키지도 않을 맹세를 남발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특히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다. 심지어 본문에서처럼 바리새인들은 맹세에 내
포된 숭고한 정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물질적 이익을 얻기 위해 거짓된 맹 세 방법을 가르치기 까지 하였던 것이다.
둘째로는 십일조에 관한 내용이다. 모든 산업과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표로서 드려진 십일조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민 18:21-24), 성전 유
지비 조달을 위해(신 12:6,7,11-19) 혹은 사회적 약자들의 구제비를 위해(신
26:12-15)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는 십일조 자체의 문제
를 거론하신 것이 아니라, 형식에만 치우쳐 십일조의 정신을 망각한 채 그것을 쓸모없는 일에 오용한 죄악을 지적하셨다. 유대인들은 박하나 회향 혹은 근채
를 양념이나 약재로 쓰기 위해 가정에서 소량 지배하였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런
사소한 것에까지 십일조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듯 철저하게 거둬들인 십일
조는 종교 지도자들의 배를 채우는 일에 허비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의 순서를 알지 못함은 물론이고, 형식적
예배에는 충실하되 구체적 삶은 지극히 등하시하는 자들에게는 바리새인들에게 내려진 준엄한 경고가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 회칠(灰漆)한 무덤. 속에는 온갖 더럽고 추잡하며 사악한 것들이 썩어 문
드러진 채 악취로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치장하는 외식주의
자들의 실상을 예수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셨다(27절).
한편 유대인들의 무덤은 봉분형(封墳形)이 잇는가 하면 바위를 뚫어 만든
암굴형(岩窟形) 그리고 자연 동굴을 이용한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
은 1년에 한 번(주로 유월절 직전) 봉분에 회칠을 한다. 물론 그것은 통행인들 의 의식적 부패를 예방하려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다. 여하튼 회칠한 무덤은
비록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각종 더러운 것이 있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깨끗해 보인다. 이것은 예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에 족히 비교될 만하다. 실로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내면에는 각종 불 법이 득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현대의 문명 그 자체가 바로 회칠한 무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 백화점의 화려한 쇼우 윈도우 등 현대 사회의 외 관은 참으로 풍요롭고 아름다와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약육강식(弱肉强食
)의 물고 뜯는 암투와 불안과 무기력 그리고 실추된 도의심 등 엄청난 부패가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와 같이 표리부동하며 가치관이 전도된 세상을
똑바로 직시하고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내면을 정결케 하고(2
6절;시 119:9), 또 진리되신 그리스도만을 푯대로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겠다(
빌 3:14).

*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진리 배척. 외식하는 자와 가장 가증스러운
모습은, 스르로 진리를 수호하는 양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진리를 적극적으로 대
적하는 데서 발견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했던 역사상의 악인들을 비난하였으되 자기들 스스로 핍박자의 자리에 있는 줄을 몰랐다. 문제의 심각
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알맹이는 내팽개치고 그 껍데기에만
집착하였으므로 그들의 종교적 열성은 호히려 파괴적 결과만을 조채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진리에 대한 핍박의 역사라 해도 대과가 없을 것이다. 이
를 역으로 표현하자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암담한 어둠의 역사였다는 말이 된
다. 사사 시대를 통해 반복되었던 범죄의 악순환은 차치하고서라도, 남북 왕국 분열 이후 이스라엘의 열왕들은 한결같이 신정(神政) 왕국의 지도자로서의 사
명을 망각하므로 그 백성들을 목자 잃은 양과 같이 헤메이는 처지에 놓이게 했 다(왕상 22:31). 따라서 역사 속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선지
자들은 항상 핍박에 쫓겼으며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마저 감수해야 했던 경우도 많았다(왕상 19;2,4).
그런 의미에서 '아벧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라고 한 35절 말씀은 의미
심장하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아벧의 믿음의 제물(히 11:40이 하나님께 열납
되는 것을 시기하여 아벧을 쳐 죽이고 말았다(창 4:1-8).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한 사실을 두고 응당 반성하며 회개해야 마땅했지만 도리
어 시기와 질투에만 사로잡혀 극악한 살인을 범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사가랴 는 요아스왕 당시 우상 숭배를 좇는 유다를 책망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 여
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지칭한다(대하 24:20,21). 당시 유다의 왕과 백성들
의 귀에는 스가랴의 외침이 귀에 가시처럼 거슬렸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의 명성을 시기했으며,
예수의 입을 통해 나오는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그들의 허울이 벗겨지는 일을
참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적극 대적하고
심지어 그를 살해할 동기를 찾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을 좌시(坐視)하고 있지만은 않으시며 무고한 자의 피를 반드시 보수하신다
. 예컨대 가인은 그 생존의 토대였던 땅에서 추방당하는 형벌을 받았으며(창 4:12), 유다왕 요아스는 수년 후 아람왕 하사엘의 침입을 받아 부상 상태에 있던 중 신복들의 칼에 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대하 24;25).

3. 예루살렘에 대한 애도(23:37-39)
본장의 결론부로서 종내 돌이키지 않는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에 대한 멸망
선포의 내용이다. 지금까지(1-36절)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가 다 그들에게로 돌아가리라(36절)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그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계신다. 그것은 곧 외식하는 자들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멸망이다.
그러나 이 같은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한탄하신
점에서 우리는 (1) 예수의 이 한탄은 지금까지 거듭 선고하셨던 화(禍)가 실제 적으론 동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는 사실(13절)과 (2) 암탉이 그 새끼를 날
개 아래 모음같이 끝까지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시려고 갈망하며 노력해 왔던 구
세주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겔 33:11)이 곧 하 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니 우리는 자신의 삶 가운데서 '악은 모든 모양이 라도 버리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살전 5:22).
한편 이 부분은 평생 구절인 눅 13:34,35를 참조하라.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모든 인류
에게 열어 놓고 계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훤하신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되어 삶의 목표와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은 은혜로운 섭리를 베푸시사 노아를 통해 인류의 씨앗을 보존하였고(창 6:8-22), 아브라함을 이방의 악한 풍습 가운데 불러내사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
셨다(창 12:1-3). 그리고 족장들을 거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택하사 온 세
계에 당신의 빛을 드러내는 거룩한 선민으로 삼으셨다. 그 뿐 아니라 택함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는 타락과 패역의 기로 빠질 때마다 당신의 선지자를 보내사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셨다.
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때로는 그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의 패망은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호 13:9). 이러한 완악한 마음은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나타난 것이 아
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배척하고자 하는 교만과 아집이 남아 있다. 피조(被造)된 자의 신분을 망각하게 만드는 사단의 유혹에 쉬 넘어 가기 쉬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며, 사랑 보다는 미움에로, 건설보다는 파괴에
로 몰아가는 저 가인의 기질은 인류의 동맥을 면면히 타고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까지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피 의 공로를 의지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자만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극복할 수 있다. 지금도 주님은 피묻은 손, 자애로우신 음성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두
드리고 계신다(계 3:20). 그러나 이 문은 우리의 내부로부터 잠겨 있기 때문
에 스스로 열 때에야 비로소 주께서 들어오사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 관하며 책임져 주실 것이다(시 37:5). 하나님의 오래참으시는 사랑을 업신 여
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도적같이 임하게 될 것이다.
한편 본문에 기록된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은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1차적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궁극적 성취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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