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엿새 후에 - 이는16: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구이다. 즉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16:16)과 그의 수난 예고(16:21) 및 도래할 심판(16: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광휘를 예고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팔 일쯤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9:28). 이는 마태가 예수께서 앞 부분을 말씀하신 후의 기간의 첫째 날과 마지막째 날을 뺐는데 반해,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일과 본 번형 사건일을 모두 가산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일 것이다(Hendriksen). 더욱이 누가는 '팔일 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통해 대략적 시간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하튼 이 날은 16장의 사건이 있은 후 만 6일, 곧 온전한 한 주간이 경과한 때를 가리킨다(Wyciffe). 실로 예수께서는 그 한 주간이 완료하는 시점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J. P. Lange).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상징적 숫자 개념에 따라, '엿새'는 완전한 수요, 일상과 노동에의 숫자로 볼 수 있으며, '엿새 후'는 곧 '이레(7)'로 승리의 완전 수요,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슷자로 볼 수 있다(The Pulpit Commentry). 예수께서는 참안식과 천국이라는 새지평을 이제 여시고 계신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 이 세 사람은 전직(前職) 어부 출신들로서(눅 5 :10) 예수께서 주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시던 자들이다(26:37;막 5: 37;13:3;눅 8:51). 물론 이들의 피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런 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무(責務)를 맡기시었다. 실로 두, 세 사람의 증거야말로 진실된 중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신 19:15;요 8:17;고후 13:1). 더욱이 예수께서 증인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시킨 것은 혹시 발생하게 될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아직은 침묵의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9절). 한편 이들 3인의 제자는 이제 12제자 중 에서도 핵심 구성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런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3인의 제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10: 2의 주석을 참조하라.
따로(* , 카트이디안) - 문자적으로는 '따로 떨어져서', '개인적으로'(privately)이다. 이는 그들에 대해 예수의 영적이고 내밀한 친밀감을 암시한다.
높은산 -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近距離)라는 점에서 '예벧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W. Ewing).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근접성을(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고 있다(Wyliffe, Clarke, Carr).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신 3:8;대상 5:23), 시료(신 3:9)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참조, 시 133:3). 이 산은 구약에서는 '시온산'(신 4:48)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족장의 산'이라는 뜻인 '예벧 에쉬 쉐이크'(Jebel esh Sheikh), 또는 '설산'이란 뜻인 '예벧 에트 탈'(Jebel eth Thalg)등으로 지칭된다.
=====17:4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기에서 '주'(* , 퀴리오스)란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통치하는 자', '결정권을 가진 자', '주인'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영예의 칭호로써 일반적으로 부르는 주존칭이었다. 한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이 말에 대하여 '랍비'(* ,선생, 막 9:5) '에피스타테스'(* , 곁에서 서 있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주인, 통치자, 눅 9:33)로 각각 묘사되었다. 이 이유는 3절의 '모세와 엘리야'의 기록순서에 대한 이유와 같은 것 같다. 한편 눅 9:33에는 베드로의 강력한 요청과 관련하여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떤 강제적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주위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즉흥적인 말을 한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말은 그가 다음 몇가지 점에서 잘못 인식한 것임을 보여 준다. (1) 예수께서 아직 당신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 즉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이미 그 영광을 얻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고자 했다는 점(히 2:9, 10). (2) 산 아래에는 아직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지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안식(安息)을 취하고자 했다는 점(14-20절). (3)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전파된 다음에야 영광스러운 세계와 안식이 오는데 그 세계의 안식을 미리 구했다는 점(24:14;행 1:8) 등이다.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 베드로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시하지 않고 예수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 드렸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심히 육신 적이요 인간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심'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21-23).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사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수난과 대조되는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주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무지했는가를잘 보여 준다.
초막 - 이는 헬라어로 '스케나스'(* )로서 '장악', '천막' 등을 의미한다. 당시에 아랍인들은 존귀한 자가 왔을 때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하여 장막을 쳐주곤 했다 한다(왕하 4:9,10). 만약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초막치기를 제의했다면, 그는 아마 이 안전한 산상에서 지금 전개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휘와 영적 계시를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기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이 지체되거나 아예 무산되기를 소원하는 잠재적인 바램에서 이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명절의 하나인 장막 절기의 회상이라는 점이다(레 23:42, 43). 이 절기는 종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에 감사하며, 메시야 시대의 임박한 개시를 인식하고 장막짓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cARSON). 그러나 후자의 견해는 전체 문맥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하리이다 - 이는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스런 위치에서 예수와 동등시 취급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자의적 판단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과 자신의 동료 제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들로서의 그 세 사람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이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세 분을 수종드는 자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7:6
제자들이 듣고...심히 두려워하니 - 본 구절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께서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영광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의 절대적인 공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죄악된 인간의 통상적인 느낌이다(사 6:5;마 14:27;28:5,10).
=====17:7
예수께서 나아와...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 이는 예수의 다함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 보이는 행동이다(사 6:5-7;단 10:9, 10:계1:17).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깊은 공포에 휩싸여 있던 제자들의 산란(散亂)한 심령을 넉넉히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 사랑과 신적 권위에 입각한 예수의 이중 명령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공포의 자리를 떨고 일어날 뿐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완진히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셨다(14:27).
이 이중적 명령은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자 오직 당신만이 인간이 지닌 심연의 공포를 제거하실 수 있음 보여 주는 것이었다=====17:10
그러면 어찌하여 - 여기서 '그러면'(* , 운)은 논리적 연결사 또는 추정(推定) 불변사로 사용되어 앞의 사건과 바로 이어지는 질문의 내용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앞의 함구령과 연관된 제자들의 질문을 이끄는 말로 사용되었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제자들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출현과 계속되는 예수의 함구령에 그 근원이 있다. 사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말 3:1;4:5 등에 근거하여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주장했었다(M Eduyoth 8:7; M Baba Metzia 3:5). 따라서 엘리야가 출현하지 않는 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진정성은 의심받게 마련이었다. (1) 변화산상에서의 엘리야 출현은 에언된 말 4:5의 성취인지, (2)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마땅히 공표해야 하는데도 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이다.
=====17:12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임의로 대우하였도다 - 예수께서는 여기서 당신의 삶을 예표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두 가지 면을 제시, 비교 하셨다. 즉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눅 1:17)으로서 왔던 세례 요한을 영적으로 무지했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로 (1)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으며 오직 소수만이 그의 선구자적 메시지에 귀기울였다. 또한 그를 (2) '임의(任意)로 대우하였다'. 즉 그를 메시야의 선구자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배척, 박해하고 끝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 까닭은 자명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세례 요한이 그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완수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맡으신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셨던 예수께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예수는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왔으되 세상이 당신을 알아보고 환영하기는 커녕(요 1:9-11) 오히려 배척하며 끝내는 죽음에 내어줄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임의로'(* , 호사 에델레산)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지'(whatever they wished)를 의미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등을 거스릴 때 사용되는 말로서, 결국 임의로 행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임을 암시한다.
=====17:15
주여 - 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 )인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퀴리오스'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용어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8:2;17;4) 이런 관점에서 마가는 이때의 호칭을 단순히 '디다스칼로스'(* , 선생님)로 기술하고 있다(막 9:17).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막 9:21과 눅 9:38에 근거해 보면, 이 아들은 그 아비의 외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질병을 않고 있었다. 이러한 아들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비는 예수의 측은 지심(惻隱之心)에 호소한다. 실로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병자, 모든 죄인의 회복과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간질 - 이는 헬라어 '세레니아조마이'(* ,)로서 '달의 침범을 받다'(strucken by moon), '미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대인들이 간질병을 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데서 기인된 듯 싶다. 간질병은 보통 5-10분 동안 발작하는 병으로서, 이 병이 발작할 때에는 환자는 갑자기 나뒹굴며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막 9:20)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도 한다.
심히 고생하여(* , 카코스 파스케이) - 문자적으로는 '심하게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 병의 증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음 암시한다.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이는 간질병 환자의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돌발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위험성을 호소한 말이다. 한편 막 9:22에 따르면 귀신에 의해서 이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자해(自害)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실로 귀신과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평온하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악한 습성과 파괴적인 경향대로 그 인격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평형 감각마저 앗아감으로써 자멸을 유도 하곤 한다.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 환자의 아비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으나 예수의 변화산 행(行)으로 인해 만나지 못하고 대신 남은 아홉 제자들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제자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었다(10:1;눅 10:17). 그러나 그 같은 권능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었으며, 또 오직 온전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제자들의 실패는 13:54-19:2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주제이다(1416-19, 26, 23, 33;16:5, 22;17:4, 10, 11). 결국 이러한 실패는 제자들이 진보와 실패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14:26, 27, 31). 실로 이것은 천국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마술과는 달리,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그 자신의 믿음의 여하를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17:20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 '믿음이 적은'은 사본들에 따라 어떤 사본은 '아피스토스'(* , 믿음이 없음, unfaith) 또다른 사본은 '올리고피스토스'(* , 믿음이 부족함,little-faith, poor-faith)로 각각 표기하고 있다. 이 중 17절에 제시된 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는 책망과의 조화를 위해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좋다. 그러나 비록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해도 본문에서는 믿음이 적음을 지적한다기 보다 그들의 닐음이 결핍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Bonnard). 실로 적은 믿음은 아무리 하찮더라도 겨자씨와 같이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게 마련이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그 어떠한 결과도 산출해 낼 수 없다. 한편 마가는 본문과 기도의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다(막 9:29). 사실 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를 믿고 인정하는 자의 특권이요 의무라는 점에서 마가의 보고는 적절하다 하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예수께서 새릅고도 중요한 교훈을 말씀하실 때,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5:18).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 겨자씨는 보통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팔레스틴 지방 또는 지증해 연안 등지에 많이 자라며 최대로 성장하면 약 3-4.5m의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한다. 이것은 '니코티아나 그라우카'(Nicotianaglauca) 혹은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겨자나무는 원줄기와 몇개의 곁줄기로 자라는데 원줄기는 새가 앉아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국 믿음이 지닌 생명력과 감추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녕 믿음은 무한한 자생력을 지뉜 것으로,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찮을 정도일망정 그 있고 없고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그 뜻을 믿는 것으로서(Wyciffe) 자기 신뢰나 신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따라서 겨자씨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가시화(可視化)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믿음일 때에만 가능하다. 한편 공관복음에서는 겨자씨에 대한 언급이 다섯번 나온다(13:31;17:20;막 4:31;눅 13:19;17:6). 이 산을 명하여...옮길 것이요 - 겨자씨와 산은 표면적으로는 크나큰 대조를 이루며 '옳기는 것'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온전히 보존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지속하면 그 믿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주권적인 방법에 의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이뤄내고야 만다. 즉 겨자씨 믿음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꿇임없이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을 이 땅에 실현하게 한다. 한편 여기에서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難題) 등을 함측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21:21, 22:사 40:4;49:11;54:10;막 11:23;눅 17:6;고전 13:2).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카이 우덴 아뒤나테세이 휘민) - 문자적으로 '그리고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and noting shallbe impossoble to you)이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능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그 효력은 지금도 유효(有效)하다(19:26;빌 4:13;히 11;1).
=====17:22
갈릴리에 모일때에 - '모이다'(* , 아나스트레포데논)란 '거류하다', '머물다', '살다' 등의 뜻인 '아나스레포'의 헌현 분사다. 이는 예수께서 수 주간을 팔레스틴 북단에 머무시다가 다시 헤롯 안디바의 영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접근해 들어오셨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갈릴리 복귀는 예루살렘으로의 최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작업이었다. 한편 막 9:30은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라고 기록 함으로써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지 않으 시고 윗 갈릴리의 한적한 사잇길을 통해 자신의 고향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북쪽으로 헬몬산 근방에 위치한 티타니(레오테스)강, 서쪽으로 갈멜산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 에스드렐론 평원, 동쪽으로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등으로 구성된 남북 약 96km, 동서 약 48km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헬몬산 아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 지방으로 오시는 장면을 묘사할 것 같다(24절;막 9:30). 예수께서...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더해 말씀하신 두번째 예언이다(16:21). 여기서 '넘기워'(* , 파라디도스다이)란 두 가지 점에서 애매 모호(曖昧模糊)하다. (1) 이는 '넘기다', '배반하다'는 뜻일 수 있는데, 문맥에 따라서 강한 의미 가질 때는 후자의 뜻이고, 한 의미를 가질 때는 전자의 뜻을 가진다. (2) 수동형('넘겨주다')을 취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넘겨 주신 것인지(Origen, Clark),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인지(Bengle) 모호하다. 여하튼 본문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같은 다양한 견해는 조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본문의 '사람들의'란 말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대제사장(16:21) 또는 십자가 처형에 관여한 이방인들(20:19)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수난 고지(受難告知)는 순전히 믿음이 부죽한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일을 뚜렷이 기억하게 된다(눅 24:^).
=====17:23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 예수께서는 패역한 인간들의 순간적인 승리('죽음을 당하고')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를 대비시켜 닥쳐오는 당신의 삶을 정확히 예시 하셧다. 즉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들의 모든 궤계(詭計)와 포악(暴惡)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결국 이 논지의 초점은 승리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죽음을 필연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 막 9:32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소식에 온 정신이 쏠려 그 이후에 있을 영광스런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계시의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수난의 참의미를 이해하는 완전한 신앙에로 발전하여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겠으나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계시의 동시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요 16:16-22).
=====17:24
가버나움 -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에 이 성읍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텔 훔'이란 곳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곳은 예수의 선교 사역의 중심지였으나(8:5-15;9:2-8;18:1-5), 회개하지 않고 교만함으로서 인해 예수의 책망받는 지역이기도 하다(11:23). 이제 예수께서는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리 방문하셨다.
반 세겔 받는 자들이 - '반 세겔'이란 헬라어로 '디드라크마'(* )로서 '두드라크마'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 드라크마는 헬라어인 하루 품삯을 나타내는 동전 명칭으로서 유대인에게도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1/4세겔로 취급되었다. 한편 이 '반세겔'은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내었던 생명의 속전, 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여호와께 바쳤던 양과 같은 것이다(출 30:11-16).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의무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바벧론 포수 후 그 의무는 20세이상된 자로서 3/1세겔로 조정되었다(느10:32). 예수 당시에도 느헤미야의 수정된 의무조항에 따라 매년 유월절 전인 봄에(아달월 15일) 모세 당시의 환율에 의해 계산, 부과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반세겔을 바꾸려는 환전상으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이 환전상들은 그 수수료로 인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반세겔은 로마에 바치는 공공의 세금이라기보다 당시 주로 성소의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여기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 , 호이 타디드라크마 람바논테스, those receiving the didrachmas)은 일반적으로 국세를 거두는 '세리'(* , 텔로나이)와는 다르다(9:10). 이것은 반 세겔을 거두는 자들이 신분상 로마 위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을 위해 거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 이는 세금 징수자들이 이미 예수와 베드로 등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와 더불어 성전을 대하시는 예수의 태도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들은 예수께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17: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 히나 데 메 스칼달리소멘 아우투스) - 직역하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하여'(But that we may not offend them)가 된다. 길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율법 위에 계신 분으로서 율법이 정한 바 그 의무 조항을 능히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인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겸비(兼備)해지기를 원하셨다(3:15). 한편 본문의 '오해케 한다'는 '스칸달리소멘'은 단순히 넘어뜨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함정에 빠뜨려 치명적인 피해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성전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야기될 상황, 곧 예수가 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을 율법으로 파괴하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하여 마침내 당신의 복음을 먼저 배척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방적 조처로서 성전세 납부를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겸비의 모범을 따라 훗날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절제와 겸비의 도를 가르치게 된다(고전 8:13;9:12, 22).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 성전세 조달을 위한 예수의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다. 이로써 우리는 동전 한 닢이 고기 입 속에 있음을 미리 아시는 예수의 전지성(全知性)과 그 동전을 이미 있게 하신 다자신의 전능성(全能性)을 알수 있다(Wycliffe). 한편 신약에서는 낚시 기사가 이곳밖에 없고 대부분은 그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여하튼 예수의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의 요구에서 면죄되시지만, 율법에 순종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적 방식으로 예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수난 예고(22, 23절) 바로 뒤에 위치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겸비를 다시 생각케 한다. 즉 그분은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능력자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쓸데없이 남으로 오해케 하지 않으시려고 이러한 이적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11:28-30;12:20). 이같은 겸손의 교훈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및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한 세겔(* , 스타테르) - 그리이스에서 통요되던 금화로서 대략 4드라크마, 곧 한 세겔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이면 1인당 반세겔요구되는 성전세의 두 사람분을 납부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례수의 이적은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가장 정확한 은혜로 채워진다.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 '나와 너'란 예수와 베드로가 비록 하나같이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내시는 것이며, 베드로는 그 근본이 죄인된 인간이요 사망에 처헌 자로서 생명의 속전 곧 성전세를 내야 할 자였던 것이다.
앞장에서는 공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와 옴에 따라 예수께서 고난 받는 메시야로서의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획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거니돠, 이제 본장에서 예수의
자기 계시는 또 한번의 중대한 국면을 맞기에 이른다. 즉, 본장에서 예수는 모세와 엘
이야로 대변되는 전(全)구약에 의해 증거된 위대한 메시야이자 구약의 완성자로서 그
리구 궁극적 승리자로서 당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전후 문맥상 우리는 다음 두 사실에
주목해 조기로 하자.
(2) 본장의 변화산 사건은 제1차 수난 예고(16:21 및 제2차 수난 예고(22,23절) 사
이에 발생하였다는 사실. 이 사실은 첫째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뿐만
아니라 다시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궁극적 승리자로 만물의 주인으로서 만백성 앞에
서게 될 것임을 예시한다. 그리고 둘째로, 이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듣고서 깊은 불안
에 휩싸였던 제자들에게 담대한 용기와 위로를 주시고자 했던 주님의 의도를 반영한
다. 당시 제자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변형은 백마디 말씀보다 더 효력있게 수납되었을
큰 위로의 광경이었을 것이다.
(2) 수난 예고 - 변화산 사건으로 이어지는 순서. 이러한 순서는 예수의 십자가 처
형 및 부활로 이어지는 27장 - 28장의 순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6장의 분위기가 팽팽한 긴장과 고뇌가이 모습들로 말미암아 암으가한 반면 본
장에서는 한결 밝고 희망찬 색조가 지배적이듯이, 27장과 28장의 분위기 또한 이와 흡
사하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향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사적
의의상 뗄래야 뗄수 없는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수난 예고
자체에 부활에 대한 예고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점(16:21) 및 본문의 변화산상에서 모
세와 엘리야가 예수의 임박한 죽음에관해 이야기했다는 점(눅 9:31) 등에서 더욱 확연
해진다 하겠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깊으신 의도와는 상관 없이 제자들은 영적 무지
와 불신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17절). 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
시는 예수 곁에서 졸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26:43).
한편 본장은 크게 네 단락으로(1-13;14-21;22,23;24-27절) 구분되는데, 첫단락은
전장의 마지막 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세째 단락은 다시 논의 의 초점을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맡추
고 있다. 그리고 둘째 및 네째 단락은, 당시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
든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부딪쳐오는 여러 문제들을 잘 해결해 나가기 위해 명심해야
할 교훈이라 하겠으며, 이는 18장에서 보다 상세히 그리고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게 될
교훈에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1. 변화산에서의 변모(17:1-13)
예수 생애의 5대 사건(성육신, 변모, 신빠자가 수난, 부활, 그리고 승천) 중 하나
인 변화산 사건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막 9:2-8;눅 9:28-36). 공관복음
기자들은 한결같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 엿새 지난 날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모세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데리고 시내산에 오른 사실과 유사하다(출 24:1이하). 그리고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모습은(2절), 시내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 꺼풀에 비친 광채를 연상시킨
다(출 34:29). 그러나 모세와는 달자리 예수의 얼굴의 광채는 반사된 영광의 빛이 아
니라 예수 자신으로부터 나타난 빛이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本體)이
셨던 것이다(요 1:14;빌 2:6).
변화산 사건의 의의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마가복음 평행 구절의 강해에서 하
기로 하고 여기서는 본문에 수록된 사건의 의미를 사건 발생 순서별로 하나하나 살펴
보기로 하자.
(1) 예수의 변모(2절). 이는 그 자체의 신학적 의의를 일단 접어두고서라도 문맥의
흐름상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은 본장 강해에서 언급한 바 있다. 즉, 전장에 기
록돈 바 예수의 수난 예고와 십자가의 길에 대한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당혹과
불아을 안겨주었으며, 이 사실을 잘 아신 예수께서 전장 마지막 절에서 영광과 승리의
비번을 제시한 바도 있다. 이제 본장에 이르러, 예수의 변화된 모습은 바로 제자들의
그러한 불안을 말끔히 해소해 줄만한 놀라운 체험이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로서는 세
제자들이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그 영광스런 광경의 참된 의의를 깨달을 수 없었다. 하
지만 그것은 재림의 순간에 확연히 펼쳐질 천상의 영과이요 부활의 영광으로서 훗날
베드로와(벧후 1:16) 초대 교회에 큰 힘으로 작용한 중대한 체험이었다.
(2) 모세와 엘이야의 나타남(3, 4절).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
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크나큰 존경과 신망을 받는 인물들이었
다. 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그들의 위대함에 신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증거하는
그들의 역할에 맞추어져 있다 하겠다. 하지만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산 위에 계속
거하고자 하였다. 이는 엉겁결에 예수를 모세와 엘이야에 버금가는 인물고 파악하였을
뿐 모든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성취이신(5:17,18;눅 24:44) 주님의 유일무이(有一無
二)한 신분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다. 또한 베드로의 그러한 제안은 온갖 질고(疾苦)에
시달리는 무리들이 기다리는 산 아래의 목마른 부르짖음을 도외시한 도피적 태도를 반
영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향해 내딛는 주님의 거룩한 고난의 걸읊을 제시하
였던 16:22의 만류를 간접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3) 하나님의 음성(5-8절). 베드로의 분별없는 제안이 잇은 직후에 마치 그 제안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하늘로서 들려온 음성의 반복이며(3:16)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16:16) 확
정인 셈이다.
(4) 엘리야에 대한 문답(9-13절). 제자들의 영적 무지는 본문의 물음에서 여전히
계속되어짐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변화산상의 체험을 통해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다
시 한번 절실히 확인 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메시야 도래 전에 엘리야가
와서 메시야의 선구 역할을 감당하리라는 예언(말 4:5)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
은 성경 자체의 예언에 관한 명확한 이해에 근거했다기 보다는 당시 서기관들의 무모
한 가르침에 근거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바로 엘이야의 심령과 능력으오 온(눅
1:17) 메시야의 선구자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모세, 엘이야 그리소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 구약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구약
의 모든 선지자(서)들을 대표하는 엘이야 및 모든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신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만나신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1) 그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눅 9:31) 구약에 예언된 바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때가 이제 드디어 도래했음을 밝혀주는 계기가 된다.
(2) 율법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할을 하며, 또한 그리스도께 모두 귀
속, 승화됨을 시사한다.
(3)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예수의 변형은 그분의 영광스런 부활을 암시)로 인해
죽은자(모세)나 산 자(불병거로 승천했던 엘리야), 또는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가 완전하 화해9하나)를 이루게 될 것을 암시한다(골 1:20).
94) 곧 닥쳐올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지상에서의 완전한 실패나 끝잉 아니라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에로의 승귀(昇貴)를 전제한 생명의 대역사임을 보여 준다(빌
2:6-11).
2. 겨자씨 만한 믿음(17:14-21)
외견상 본문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의 불신과 무능을 책망하는 내용
으로 보여진다. 본문에는 물론 이러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전후의 문맥을
고려하건대, 예수의 책망은 단순히 제자들의 신유 능력의 부재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는 그들의 전반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공생애의 마지막 시점을
엄라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제자들이 아직도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영적 무지와 '믿음 없음'에 대한 단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
었다.
한편, 본문에서는 변화산 위의 영광과 산 아래의 참경이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 각
별한 주의 를 환기시킨다. 세상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성도들은(딤후 1:9) 세속에
물들이 않도록 늘 자신을 지켜양 한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과 결별하고 도피 내지는
핍거(乏居)의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세상에 존재하되 하늘에 속한 자로서(히
3:1)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5:13-16). 신앙의
눈은 저 변화산상의 영광은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보게 하며 세상이 알지 못
하는 참 소망에로 향하게 한다(요일 3:1-3), 하지만 눈을 산 아래 곧, 세상에로 돌려
보면, 이 따에는 온갖 죄악과 질병, 부조리와 모순이 판을 치고 있으며 고통의 절규가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고 있다. 여기서 성도의 사명이 저 억눌리고 빛을 잃은 무리들 속
에 들어가 그들로 더불어 살며 그들로 저 산위의 영광에로 눈을 돌리게하는 일임은 자
명해진다.
본문의 기사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막 9:14-29;눅 9:37-43a) 그 초
점은 한결같이 믿음의 문제에 맞추어져 있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목전에 둔 시점에
서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믿음이었던 것이다. 마가는 간질병 환자의
아버지와 예수와의 대화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는 등 공관복음서 중 가장 상세한 설명
을 보여준다. 반면 마태의 기록은 비교적 간단하되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본문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셨
던 사항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 실패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믿음. 예수의 부활과 영광스런 재림의 미래적 사실
을 현실화했던 모든 변화산상의 사건과는 대조적으로 변화산 아래에는 전혀 상반되는
장면이 진행되고 있었다. 즉 간질병 환자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의 실패로 인해 매우
혼란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실 갈릴리 전도 말기 기사(14:1-18:35)
의 가장 큰 이슈(issue)는 바로 이 제자들의 실패였다(14:16-21;15:6,23;16:5,22). 바
로 이러한 비극적 현실에 직면한 제자들에게 가장 요청되는 바는 오로지 '믿음'(17절)
이었다. 우리는 이같은 요구 조건에 대해 아래의 몇 가지 관점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믿음의 보존과 진보. 여기 제자들은 예수의 크신 권능을 생생하게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도록' 주께로부
터 파송받았던 자들이다(10:1). 그러나 본문에서는 믿음이 부족한 관계로 병을 고치지
못하였다(20절)고 되어 있다. 이로써, 한 때 믿음의 능력을 행사했다고 할지라도 끊임
없이 믿음 안에 깨어 있지 않으면 이전의 믿음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보게된
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내고 홍해를 륙지같이 건너게 하시던 하나님은 늘
동일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경계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이 겁장이가 되
었던 사실(민 14장) 또한 기억되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 줄로생각한 나머지
(고전 10:12) 영적 나태와 자만 가운데 빠져들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전신갑주9全
身甲胄)로 무장함으로써(엡 6:10-18) 이미 받은 귀중한 은사를 잘 보존함은 물론 날마
다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나가야 하겠다.
(2) 믿음의 본질. 믿음에 대한 정의는 여러 측면에서 내려질 수 있다. 특별히 본문
에서 예수는 가장 작은 씨앗에 속하는 겨자씨를 예로 들어 믿음의 중요한 본질을 밝히
고자 하셨다. 20절의 말씀 속에는 제자들의 믿음이 겨자씨 만큼도 못하다고 하는 책망
의 뜻이 내포되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는, 비록 겨자씨가 지극
히 작은 씨앗이로되 그 속에 생명이 있음으로하여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자라갈 수 있
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믿음의 본질이 그 생명력에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사상이나
지적 동의(知的同意)로서의 믿음, 더구나 인간의 합리적 사고에만 의존하는 반신반의
(半信半疑)의 믿음은 아무런 생명력을 발할 수 없다. 우리 심령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의 존재를 생샤가게 느끼며 지, 정, 의(知, 情, 意)를 포함한 전 인격을 그분께
의탁하고 두우시는 은혜를 구할 때 비로소 그 믿음은 생명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
다.
93) 믿음의 능력. 믿음은 이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조차도 가능하게
만드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이시고, 그 하
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창 1, 2장). 본문의 제자들 또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는 서기관들의 빈정거리는 누닛을 의식하
지 않고 오직 주의 이름과 그 약속에 의지하였더라면 능히 이적적 능력을 나타내 보일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의심많고 연향한 인생은, 파도를 보고 지레 믿음이 약해져
서 물 속에 빠져 들어갔던 저 베드로의 한계(14:30, 31)를 좀처럼 넘어서지 못하였던
것이다.
3. 두번째 수난 예고(17:22-23)
첫번째 수난 예고(16:21) 외에도 본서의 요소요소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간접적 암시가 나타나고 있지만(9:15;10:38;12:40;17:12b) 본문은 두번째 직접적 수난
예고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 예수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한 알의 밀알
로 썩어지는 (요 12:24) 대속 죽음이야말로 당신의 본질적 사명임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으셨다. 따라서 변화산 사건 후 제자들과 함께 모이자마자 또 다시 십자가 수
난에 대한 얘기를 신중하게 꺼내신 것이다. 이때에도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부화 마또
한 함께 언급하셨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첫번째 예고 때 베드로가 보였던 반응과 같은 성급한 제지가 나타
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베드로에게 내리셨던 주님의 호된 책망을 기억 속에 생생
하게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끼닫고 그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마가의 록에서 밝혀져 있듯(막 9:32)
제자들은 예수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다만 영문 모를 불안과 근심에 가득
차 있었을 따름이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
렇듯 근심 가운데 빠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주님의 메시야적 권능을 목도하고 당신의
신성을 왁신하였을 때 제자들이 십자가 수난의 예고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듯이, 이
제 예수의 수난 예고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궁극적 승리와 영광의 부활에 대한 소망
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저렇듯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전혀 생경(生硬)스럽지가 않다. 오늘날 완성
된 신.구약성경을 접하며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거듭 배우는 성도들마저 막상 복음으
로 인한 고난에 직면하였을 때 쉽게 낙심하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되기 때
문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훗날 성령의 조명하에 당신의 말씀을 재삼 숙고(熟考)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담대한
증거자로 설 수 있었다(행 2,3장). 한편, 예수는 공생애의 마지막 밤에 제자들의 저러
한 슬픔과 근심을 지적하시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셨
다(요 16:6이하).
4. 성제세 납세 문제(17:24-27)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본문은 향후 제자들에게 부딪혀 올 실제적인 여
러 문제에 대한 전형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기사애며 18장
의 강화 부분에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유대인의 예배 중심지였던 성전을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래
서 20세이상의 모든 남자는 그 비용 충당을 위해 반 세겔씩 내도록 규정되었다(출
30:11-16).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이 신앙 전통에 따랄 자발적으로 바치던 자치세였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로마 정부에 바치는 인두세(人頭稅) 징수 문제를 다룬 22:15-22의
사건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내용이다.
한편 스스로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서슴없이 자신의 존재를 밝히신(12:6) 예수의
위엄있는 모습은 당신의 사역과 교훈을 이단시하던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눈에 가시와도
같이 여겨졌음에 분명하다. 본문의 세리 또한 예수께 대한 조작된 악소문을 돋고서 의
혹을 잔뜩품고 있었을너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세리의 물음은 다분히 시비조였고,
베드로는 주께서 성전세를 낼 것이라 말하고는 이를 예수께 고하려 하였다. 여기서 예
수는 단순히 성전세를 내느냐 안내느냐의 문제를 떠나 제자들의 혼란된 마음 상태를
바로 잡아 주기 위한 의도에서 문답식의 대화를 통해 교훈을 베풀고자 하셨다. 즉 예
수는 당신이 성전보다 크신 분이시며912:6). 성전 제도를 마감하고 복음의 새 제도를
시작하러 오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성전세를 내심으로써 무모한 분쟁(紛爭)을 지양
(止揚)하시고 당신의 주어진 사명을 계속 수행해 가셨던 것이다.
* 성전의 실체로서의 특권과 관용. 먼저 예수는 원칙론적인 견지에서, 자신이 성전
보다 더 위대한 이요 성전은 임마누엘로 오실 메시야를 예표(豫標)하는(히 8:5) 일시
적 모형임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사실 성전의 모든 의식과 절차는 예수 안에서
완성되고 성취되었다. 그러나 성전 자체를 신성시하여 성전 숭배에 젖어 있었던 유대
주의자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 중에도 당시로서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예수의 가르침과 직접 부딛히면 자칫 혼란에 빠져 실족할 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당신이 결코 율볍이나 성전을 파괴할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
들을 보다 완전한 의미로 완성시키려 하셨음을 가르치기 위해, 먼저 '아들'(26절)의
특권을 강조하신 후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신 것이다. 특히 물고기의 입을 통해 동전을
얻게 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만물을 주관사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전의 주인되심을
행동으로 증거하신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넘치는 자유를 남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
제의 실족을 막기 위해서라면 일평생 고기도 먹지 않겠노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뜨
거운 사랑의 정신을 연상해 볼 수 있다(고전 8:13). 진정 주어진 자유와 특권은 자신
의 유익만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이웃의 이익과 건강을 위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 무모한 대립을 지양하신 예수. 가뜩이나 예수께 대한 의혹(疑惑)과 악소문이 자
자한 가운데, 거기다 제자들의 영적 상태가 아직은 아둔한 상태에서 예수는 굳이 성전
세 문제로 세리들과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싶지는 않으셨다고 짐작된다.
사실 예수는 구약의 성취자로 오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더 유대인의 의
식이나 절기를 중히 여기고 친히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등 율법에 충실하셨다.
그리고 성전 또한 자연스럽게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아버지의 집'(요 2:16)이 되었
어야 마땅했다. 결국 성전과 예수를 분리한 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이었지 예수 자신이
아니셨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때가 이르러 자신이 결정적으로 메시야 사역을 행사히기 전까지는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문제로 방해받지 않기 위해 지혜롭게 성전세 징수에 관련된 분쟁
을 피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1)절대 절명(絶對絶命)의 신앙 문제가 아닌 것에 있어서
는 쓸데없는 분쟁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딛 3:9)과 (2) 모든 일에는 때와 순서가 있음
을 알게 된다. 이처럼 대적자들의 오해를 미연에 봉쇄하기 위한 예수의 지혜로운 처신
은 비둘기 같이 순수하되 뱀같이 지혜롭게 현실 상황에 대처해 나가야 할 성도들에게 귀한 교훈으로 다가온다(10:16).
엿새 후에 - 이는16: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구이다. 즉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16:16)과 그의 수난 예고(16:21) 및 도래할 심판(16: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광휘를 예고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팔 일쯤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9:28). 이는 마태가 예수께서 앞 부분을 말씀하신 후의 기간의 첫째 날과 마지막째 날을 뺐는데 반해,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일과 본 번형 사건일을 모두 가산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일 것이다(Hendriksen). 더욱이 누가는 '팔일 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통해 대략적 시간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하튼 이 날은 16장의 사건이 있은 후 만 6일, 곧 온전한 한 주간이 경과한 때를 가리킨다(Wyciffe). 실로 예수께서는 그 한 주간이 완료하는 시점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J. P. Lange).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상징적 숫자 개념에 따라, '엿새'는 완전한 수요, 일상과 노동에의 숫자로 볼 수 있으며, '엿새 후'는 곧 '이레(7)'로 승리의 완전 수요,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슷자로 볼 수 있다(The Pulpit Commentry). 예수께서는 참안식과 천국이라는 새지평을 이제 여시고 계신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 이 세 사람은 전직(前職) 어부 출신들로서(눅 5 :10) 예수께서 주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시던 자들이다(26:37;막 5: 37;13:3;눅 8:51). 물론 이들의 피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런 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무(責務)를 맡기시었다. 실로 두, 세 사람의 증거야말로 진실된 중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신 19:15;요 8:17;고후 13:1). 더욱이 예수께서 증인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시킨 것은 혹시 발생하게 될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아직은 침묵의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9절). 한편 이들 3인의 제자는 이제 12제자 중 에서도 핵심 구성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런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3인의 제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10: 2의 주석을 참조하라.
따로(* , 카트이디안) - 문자적으로는 '따로 떨어져서', '개인적으로'(privately)이다. 이는 그들에 대해 예수의 영적이고 내밀한 친밀감을 암시한다.
높은산 -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近距離)라는 점에서 '예벧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W. Ewing).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근접성을(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고 있다(Wyliffe, Clarke, Carr).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신 3:8;대상 5:23), 시료(신 3:9)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참조, 시 133:3). 이 산은 구약에서는 '시온산'(신 4:48)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족장의 산'이라는 뜻인 '예벧 에쉬 쉐이크'(Jebel esh Sheikh), 또는 '설산'이란 뜻인 '예벧 에트 탈'(Jebel eth Thalg)등으로 지칭된다.
=====17:4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기에서 '주'(* , 퀴리오스)란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통치하는 자', '결정권을 가진 자', '주인'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영예의 칭호로써 일반적으로 부르는 주존칭이었다. 한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이 말에 대하여 '랍비'(* ,선생, 막 9:5) '에피스타테스'(* , 곁에서 서 있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주인, 통치자, 눅 9:33)로 각각 묘사되었다. 이 이유는 3절의 '모세와 엘리야'의 기록순서에 대한 이유와 같은 것 같다. 한편 눅 9:33에는 베드로의 강력한 요청과 관련하여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떤 강제적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주위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즉흥적인 말을 한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말은 그가 다음 몇가지 점에서 잘못 인식한 것임을 보여 준다. (1) 예수께서 아직 당신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 즉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이미 그 영광을 얻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고자 했다는 점(히 2:9, 10). (2) 산 아래에는 아직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지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안식(安息)을 취하고자 했다는 점(14-20절). (3)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전파된 다음에야 영광스러운 세계와 안식이 오는데 그 세계의 안식을 미리 구했다는 점(24:14;행 1:8) 등이다.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 베드로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시하지 않고 예수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 드렸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심히 육신 적이요 인간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심'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21-23).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사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수난과 대조되는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주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무지했는가를잘 보여 준다.
초막 - 이는 헬라어로 '스케나스'(* )로서 '장악', '천막' 등을 의미한다. 당시에 아랍인들은 존귀한 자가 왔을 때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하여 장막을 쳐주곤 했다 한다(왕하 4:9,10). 만약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초막치기를 제의했다면, 그는 아마 이 안전한 산상에서 지금 전개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휘와 영적 계시를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기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이 지체되거나 아예 무산되기를 소원하는 잠재적인 바램에서 이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명절의 하나인 장막 절기의 회상이라는 점이다(레 23:42, 43). 이 절기는 종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에 감사하며, 메시야 시대의 임박한 개시를 인식하고 장막짓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cARSON). 그러나 후자의 견해는 전체 문맥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하리이다 - 이는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스런 위치에서 예수와 동등시 취급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자의적 판단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과 자신의 동료 제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들로서의 그 세 사람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이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세 분을 수종드는 자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7:6
제자들이 듣고...심히 두려워하니 - 본 구절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께서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영광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의 절대적인 공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죄악된 인간의 통상적인 느낌이다(사 6:5;마 14:27;28:5,10).
=====17:7
예수께서 나아와...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 이는 예수의 다함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 보이는 행동이다(사 6:5-7;단 10:9, 10:계1:17).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깊은 공포에 휩싸여 있던 제자들의 산란(散亂)한 심령을 넉넉히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 사랑과 신적 권위에 입각한 예수의 이중 명령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공포의 자리를 떨고 일어날 뿐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완진히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셨다(14:27).
이 이중적 명령은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자 오직 당신만이 인간이 지닌 심연의 공포를 제거하실 수 있음 보여 주는 것이었다=====17:10
그러면 어찌하여 - 여기서 '그러면'(* , 운)은 논리적 연결사 또는 추정(推定) 불변사로 사용되어 앞의 사건과 바로 이어지는 질문의 내용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앞의 함구령과 연관된 제자들의 질문을 이끄는 말로 사용되었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제자들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출현과 계속되는 예수의 함구령에 그 근원이 있다. 사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말 3:1;4:5 등에 근거하여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주장했었다(M Eduyoth 8:7; M Baba Metzia 3:5). 따라서 엘리야가 출현하지 않는 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진정성은 의심받게 마련이었다. (1) 변화산상에서의 엘리야 출현은 에언된 말 4:5의 성취인지, (2)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마땅히 공표해야 하는데도 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이다.
=====17:12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임의로 대우하였도다 - 예수께서는 여기서 당신의 삶을 예표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두 가지 면을 제시, 비교 하셨다. 즉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눅 1:17)으로서 왔던 세례 요한을 영적으로 무지했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로 (1)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으며 오직 소수만이 그의 선구자적 메시지에 귀기울였다. 또한 그를 (2) '임의(任意)로 대우하였다'. 즉 그를 메시야의 선구자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배척, 박해하고 끝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 까닭은 자명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세례 요한이 그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완수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맡으신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셨던 예수께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예수는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왔으되 세상이 당신을 알아보고 환영하기는 커녕(요 1:9-11) 오히려 배척하며 끝내는 죽음에 내어줄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임의로'(* , 호사 에델레산)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지'(whatever they wished)를 의미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등을 거스릴 때 사용되는 말로서, 결국 임의로 행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임을 암시한다.
=====17:15
주여 - 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 )인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퀴리오스'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용어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8:2;17;4) 이런 관점에서 마가는 이때의 호칭을 단순히 '디다스칼로스'(* , 선생님)로 기술하고 있다(막 9:17).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막 9:21과 눅 9:38에 근거해 보면, 이 아들은 그 아비의 외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질병을 않고 있었다. 이러한 아들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비는 예수의 측은 지심(惻隱之心)에 호소한다. 실로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병자, 모든 죄인의 회복과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간질 - 이는 헬라어 '세레니아조마이'(* ,)로서 '달의 침범을 받다'(strucken by moon), '미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대인들이 간질병을 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데서 기인된 듯 싶다. 간질병은 보통 5-10분 동안 발작하는 병으로서, 이 병이 발작할 때에는 환자는 갑자기 나뒹굴며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막 9:20)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도 한다.
심히 고생하여(* , 카코스 파스케이) - 문자적으로는 '심하게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 병의 증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음 암시한다.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이는 간질병 환자의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돌발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위험성을 호소한 말이다. 한편 막 9:22에 따르면 귀신에 의해서 이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자해(自害)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실로 귀신과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평온하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악한 습성과 파괴적인 경향대로 그 인격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평형 감각마저 앗아감으로써 자멸을 유도 하곤 한다.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 환자의 아비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으나 예수의 변화산 행(行)으로 인해 만나지 못하고 대신 남은 아홉 제자들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제자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었다(10:1;눅 10:17). 그러나 그 같은 권능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었으며, 또 오직 온전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제자들의 실패는 13:54-19:2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주제이다(1416-19, 26, 23, 33;16:5, 22;17:4, 10, 11). 결국 이러한 실패는 제자들이 진보와 실패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14:26, 27, 31). 실로 이것은 천국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마술과는 달리,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그 자신의 믿음의 여하를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17:20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 '믿음이 적은'은 사본들에 따라 어떤 사본은 '아피스토스'(* , 믿음이 없음, unfaith) 또다른 사본은 '올리고피스토스'(* , 믿음이 부족함,little-faith, poor-faith)로 각각 표기하고 있다. 이 중 17절에 제시된 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는 책망과의 조화를 위해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좋다. 그러나 비록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해도 본문에서는 믿음이 적음을 지적한다기 보다 그들의 닐음이 결핍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Bonnard). 실로 적은 믿음은 아무리 하찮더라도 겨자씨와 같이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게 마련이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그 어떠한 결과도 산출해 낼 수 없다. 한편 마가는 본문과 기도의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다(막 9:29). 사실 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를 믿고 인정하는 자의 특권이요 의무라는 점에서 마가의 보고는 적절하다 하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예수께서 새릅고도 중요한 교훈을 말씀하실 때,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5:18).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 겨자씨는 보통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팔레스틴 지방 또는 지증해 연안 등지에 많이 자라며 최대로 성장하면 약 3-4.5m의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한다. 이것은 '니코티아나 그라우카'(Nicotianaglauca) 혹은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겨자나무는 원줄기와 몇개의 곁줄기로 자라는데 원줄기는 새가 앉아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국 믿음이 지닌 생명력과 감추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녕 믿음은 무한한 자생력을 지뉜 것으로,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찮을 정도일망정 그 있고 없고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그 뜻을 믿는 것으로서(Wyciffe) 자기 신뢰나 신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따라서 겨자씨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가시화(可視化)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믿음일 때에만 가능하다. 한편 공관복음에서는 겨자씨에 대한 언급이 다섯번 나온다(13:31;17:20;막 4:31;눅 13:19;17:6). 이 산을 명하여...옮길 것이요 - 겨자씨와 산은 표면적으로는 크나큰 대조를 이루며 '옳기는 것'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온전히 보존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지속하면 그 믿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주권적인 방법에 의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이뤄내고야 만다. 즉 겨자씨 믿음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꿇임없이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을 이 땅에 실현하게 한다. 한편 여기에서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難題) 등을 함측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21:21, 22:사 40:4;49:11;54:10;막 11:23;눅 17:6;고전 13:2).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카이 우덴 아뒤나테세이 휘민) - 문자적으로 '그리고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and noting shallbe impossoble to you)이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능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그 효력은 지금도 유효(有效)하다(19:26;빌 4:13;히 11;1).
=====17:22
갈릴리에 모일때에 - '모이다'(* , 아나스트레포데논)란 '거류하다', '머물다', '살다' 등의 뜻인 '아나스레포'의 헌현 분사다. 이는 예수께서 수 주간을 팔레스틴 북단에 머무시다가 다시 헤롯 안디바의 영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접근해 들어오셨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갈릴리 복귀는 예루살렘으로의 최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작업이었다. 한편 막 9:30은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라고 기록 함으로써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지 않으 시고 윗 갈릴리의 한적한 사잇길을 통해 자신의 고향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북쪽으로 헬몬산 근방에 위치한 티타니(레오테스)강, 서쪽으로 갈멜산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 에스드렐론 평원, 동쪽으로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등으로 구성된 남북 약 96km, 동서 약 48km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헬몬산 아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 지방으로 오시는 장면을 묘사할 것 같다(24절;막 9:30). 예수께서...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더해 말씀하신 두번째 예언이다(16:21). 여기서 '넘기워'(* , 파라디도스다이)란 두 가지 점에서 애매 모호(曖昧模糊)하다. (1) 이는 '넘기다', '배반하다'는 뜻일 수 있는데, 문맥에 따라서 강한 의미 가질 때는 후자의 뜻이고, 한 의미를 가질 때는 전자의 뜻을 가진다. (2) 수동형('넘겨주다')을 취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넘겨 주신 것인지(Origen, Clark),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인지(Bengle) 모호하다. 여하튼 본문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같은 다양한 견해는 조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본문의 '사람들의'란 말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대제사장(16:21) 또는 십자가 처형에 관여한 이방인들(20:19)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수난 고지(受難告知)는 순전히 믿음이 부죽한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일을 뚜렷이 기억하게 된다(눅 24:^).
=====17:23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 예수께서는 패역한 인간들의 순간적인 승리('죽음을 당하고')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를 대비시켜 닥쳐오는 당신의 삶을 정확히 예시 하셧다. 즉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들의 모든 궤계(詭計)와 포악(暴惡)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결국 이 논지의 초점은 승리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죽음을 필연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 막 9:32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소식에 온 정신이 쏠려 그 이후에 있을 영광스런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계시의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수난의 참의미를 이해하는 완전한 신앙에로 발전하여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겠으나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계시의 동시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요 16:16-22).
=====17:24
가버나움 -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에 이 성읍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텔 훔'이란 곳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곳은 예수의 선교 사역의 중심지였으나(8:5-15;9:2-8;18:1-5), 회개하지 않고 교만함으로서 인해 예수의 책망받는 지역이기도 하다(11:23). 이제 예수께서는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리 방문하셨다.
반 세겔 받는 자들이 - '반 세겔'이란 헬라어로 '디드라크마'(* )로서 '두드라크마'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 드라크마는 헬라어인 하루 품삯을 나타내는 동전 명칭으로서 유대인에게도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1/4세겔로 취급되었다. 한편 이 '반세겔'은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내었던 생명의 속전, 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여호와께 바쳤던 양과 같은 것이다(출 30:11-16).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의무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바벧론 포수 후 그 의무는 20세이상된 자로서 3/1세겔로 조정되었다(느10:32). 예수 당시에도 느헤미야의 수정된 의무조항에 따라 매년 유월절 전인 봄에(아달월 15일) 모세 당시의 환율에 의해 계산, 부과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반세겔을 바꾸려는 환전상으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이 환전상들은 그 수수료로 인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반세겔은 로마에 바치는 공공의 세금이라기보다 당시 주로 성소의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여기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 , 호이 타디드라크마 람바논테스, those receiving the didrachmas)은 일반적으로 국세를 거두는 '세리'(* , 텔로나이)와는 다르다(9:10). 이것은 반 세겔을 거두는 자들이 신분상 로마 위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을 위해 거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 이는 세금 징수자들이 이미 예수와 베드로 등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와 더불어 성전을 대하시는 예수의 태도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들은 예수께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17: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 히나 데 메 스칼달리소멘 아우투스) - 직역하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하여'(But that we may not offend them)가 된다. 길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율법 위에 계신 분으로서 율법이 정한 바 그 의무 조항을 능히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인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겸비(兼備)해지기를 원하셨다(3:15). 한편 본문의 '오해케 한다'는 '스칸달리소멘'은 단순히 넘어뜨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함정에 빠뜨려 치명적인 피해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성전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야기될 상황, 곧 예수가 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을 율법으로 파괴하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하여 마침내 당신의 복음을 먼저 배척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방적 조처로서 성전세 납부를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겸비의 모범을 따라 훗날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절제와 겸비의 도를 가르치게 된다(고전 8:13;9:12, 22).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 성전세 조달을 위한 예수의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다. 이로써 우리는 동전 한 닢이 고기 입 속에 있음을 미리 아시는 예수의 전지성(全知性)과 그 동전을 이미 있게 하신 다자신의 전능성(全能性)을 알수 있다(Wycliffe). 한편 신약에서는 낚시 기사가 이곳밖에 없고 대부분은 그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여하튼 예수의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의 요구에서 면죄되시지만, 율법에 순종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적 방식으로 예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수난 예고(22, 23절) 바로 뒤에 위치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겸비를 다시 생각케 한다. 즉 그분은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능력자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쓸데없이 남으로 오해케 하지 않으시려고 이러한 이적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11:28-30;12:20). 이같은 겸손의 교훈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및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한 세겔(* , 스타테르) - 그리이스에서 통요되던 금화로서 대략 4드라크마, 곧 한 세겔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이면 1인당 반세겔요구되는 성전세의 두 사람분을 납부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례수의 이적은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가장 정확한 은혜로 채워진다.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 '나와 너'란 예수와 베드로가 비록 하나같이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내시는 것이며, 베드로는 그 근본이 죄인된 인간이요 사망에 처헌 자로서 생명의 속전 곧 성전세를 내야 할 자였던 것이다.
앞장에서는 공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와 옴에 따라 예수께서 고난 받는 메시야로서의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획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거니돠, 이제 본장에서 예수의
자기 계시는 또 한번의 중대한 국면을 맞기에 이른다. 즉, 본장에서 예수는 모세와 엘
이야로 대변되는 전(全)구약에 의해 증거된 위대한 메시야이자 구약의 완성자로서 그
리구 궁극적 승리자로서 당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전후 문맥상 우리는 다음 두 사실에
주목해 조기로 하자.
(2) 본장의 변화산 사건은 제1차 수난 예고(16:21 및 제2차 수난 예고(22,23절) 사
이에 발생하였다는 사실. 이 사실은 첫째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뿐만
아니라 다시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궁극적 승리자로 만물의 주인으로서 만백성 앞에
서게 될 것임을 예시한다. 그리고 둘째로, 이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듣고서 깊은 불안
에 휩싸였던 제자들에게 담대한 용기와 위로를 주시고자 했던 주님의 의도를 반영한
다. 당시 제자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변형은 백마디 말씀보다 더 효력있게 수납되었을
큰 위로의 광경이었을 것이다.
(2) 수난 예고 - 변화산 사건으로 이어지는 순서. 이러한 순서는 예수의 십자가 처
형 및 부활로 이어지는 27장 - 28장의 순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6장의 분위기가 팽팽한 긴장과 고뇌가이 모습들로 말미암아 암으가한 반면 본
장에서는 한결 밝고 희망찬 색조가 지배적이듯이, 27장과 28장의 분위기 또한 이와 흡
사하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향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사적
의의상 뗄래야 뗄수 없는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수난 예고
자체에 부활에 대한 예고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점(16:21) 및 본문의 변화산상에서 모
세와 엘리야가 예수의 임박한 죽음에관해 이야기했다는 점(눅 9:31) 등에서 더욱 확연
해진다 하겠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깊으신 의도와는 상관 없이 제자들은 영적 무지
와 불신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17절). 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
시는 예수 곁에서 졸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26:43).
한편 본장은 크게 네 단락으로(1-13;14-21;22,23;24-27절) 구분되는데, 첫단락은
전장의 마지막 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세째 단락은 다시 논의 의 초점을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맡추
고 있다. 그리고 둘째 및 네째 단락은, 당시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
든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부딪쳐오는 여러 문제들을 잘 해결해 나가기 위해 명심해야
할 교훈이라 하겠으며, 이는 18장에서 보다 상세히 그리고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게 될
교훈에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1. 변화산에서의 변모(17:1-13)
예수 생애의 5대 사건(성육신, 변모, 신빠자가 수난, 부활, 그리고 승천) 중 하나
인 변화산 사건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막 9:2-8;눅 9:28-36). 공관복음
기자들은 한결같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 엿새 지난 날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모세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데리고 시내산에 오른 사실과 유사하다(출 24:1이하). 그리고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모습은(2절), 시내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 꺼풀에 비친 광채를 연상시킨
다(출 34:29). 그러나 모세와는 달자리 예수의 얼굴의 광채는 반사된 영광의 빛이 아
니라 예수 자신으로부터 나타난 빛이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本體)이
셨던 것이다(요 1:14;빌 2:6).
변화산 사건의 의의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마가복음 평행 구절의 강해에서 하
기로 하고 여기서는 본문에 수록된 사건의 의미를 사건 발생 순서별로 하나하나 살펴
보기로 하자.
(1) 예수의 변모(2절). 이는 그 자체의 신학적 의의를 일단 접어두고서라도 문맥의
흐름상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은 본장 강해에서 언급한 바 있다. 즉, 전장에 기
록돈 바 예수의 수난 예고와 십자가의 길에 대한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당혹과
불아을 안겨주었으며, 이 사실을 잘 아신 예수께서 전장 마지막 절에서 영광과 승리의
비번을 제시한 바도 있다. 이제 본장에 이르러, 예수의 변화된 모습은 바로 제자들의
그러한 불안을 말끔히 해소해 줄만한 놀라운 체험이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로서는 세
제자들이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그 영광스런 광경의 참된 의의를 깨달을 수 없었다. 하
지만 그것은 재림의 순간에 확연히 펼쳐질 천상의 영과이요 부활의 영광으로서 훗날
베드로와(벧후 1:16) 초대 교회에 큰 힘으로 작용한 중대한 체험이었다.
(2) 모세와 엘이야의 나타남(3, 4절).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
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크나큰 존경과 신망을 받는 인물들이었
다. 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그들의 위대함에 신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증거하는
그들의 역할에 맞추어져 있다 하겠다. 하지만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산 위에 계속
거하고자 하였다. 이는 엉겁결에 예수를 모세와 엘이야에 버금가는 인물고 파악하였을
뿐 모든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성취이신(5:17,18;눅 24:44) 주님의 유일무이(有一無
二)한 신분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다. 또한 베드로의 그러한 제안은 온갖 질고(疾苦)에
시달리는 무리들이 기다리는 산 아래의 목마른 부르짖음을 도외시한 도피적 태도를 반
영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향해 내딛는 주님의 거룩한 고난의 걸읊을 제시하
였던 16:22의 만류를 간접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3) 하나님의 음성(5-8절). 베드로의 분별없는 제안이 잇은 직후에 마치 그 제안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하늘로서 들려온 음성의 반복이며(3:16)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16:16) 확
정인 셈이다.
(4) 엘리야에 대한 문답(9-13절). 제자들의 영적 무지는 본문의 물음에서 여전히
계속되어짐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변화산상의 체험을 통해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다
시 한번 절실히 확인 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메시야 도래 전에 엘리야가
와서 메시야의 선구 역할을 감당하리라는 예언(말 4:5)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
은 성경 자체의 예언에 관한 명확한 이해에 근거했다기 보다는 당시 서기관들의 무모
한 가르침에 근거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바로 엘이야의 심령과 능력으오 온(눅
1:17) 메시야의 선구자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모세, 엘이야 그리소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 구약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구약
의 모든 선지자(서)들을 대표하는 엘이야 및 모든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신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만나신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1) 그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눅 9:31) 구약에 예언된 바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때가 이제 드디어 도래했음을 밝혀주는 계기가 된다.
(2) 율법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할을 하며, 또한 그리스도께 모두 귀
속, 승화됨을 시사한다.
(3)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예수의 변형은 그분의 영광스런 부활을 암시)로 인해
죽은자(모세)나 산 자(불병거로 승천했던 엘리야), 또는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가 완전하 화해9하나)를 이루게 될 것을 암시한다(골 1:20).
94) 곧 닥쳐올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지상에서의 완전한 실패나 끝잉 아니라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에로의 승귀(昇貴)를 전제한 생명의 대역사임을 보여 준다(빌
2:6-11).
2. 겨자씨 만한 믿음(17:14-21)
외견상 본문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의 불신과 무능을 책망하는 내용
으로 보여진다. 본문에는 물론 이러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전후의 문맥을
고려하건대, 예수의 책망은 단순히 제자들의 신유 능력의 부재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는 그들의 전반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공생애의 마지막 시점을
엄라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제자들이 아직도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영적 무지와 '믿음 없음'에 대한 단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
었다.
한편, 본문에서는 변화산 위의 영광과 산 아래의 참경이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 각
별한 주의 를 환기시킨다. 세상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성도들은(딤후 1:9) 세속에
물들이 않도록 늘 자신을 지켜양 한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과 결별하고 도피 내지는
핍거(乏居)의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세상에 존재하되 하늘에 속한 자로서(히
3:1)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5:13-16). 신앙의
눈은 저 변화산상의 영광은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보게 하며 세상이 알지 못
하는 참 소망에로 향하게 한다(요일 3:1-3), 하지만 눈을 산 아래 곧, 세상에로 돌려
보면, 이 따에는 온갖 죄악과 질병, 부조리와 모순이 판을 치고 있으며 고통의 절규가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고 있다. 여기서 성도의 사명이 저 억눌리고 빛을 잃은 무리들 속
에 들어가 그들로 더불어 살며 그들로 저 산위의 영광에로 눈을 돌리게하는 일임은 자
명해진다.
본문의 기사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막 9:14-29;눅 9:37-43a) 그 초
점은 한결같이 믿음의 문제에 맞추어져 있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목전에 둔 시점에
서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믿음이었던 것이다. 마가는 간질병 환자의
아버지와 예수와의 대화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는 등 공관복음서 중 가장 상세한 설명
을 보여준다. 반면 마태의 기록은 비교적 간단하되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본문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셨
던 사항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 실패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믿음. 예수의 부활과 영광스런 재림의 미래적 사실
을 현실화했던 모든 변화산상의 사건과는 대조적으로 변화산 아래에는 전혀 상반되는
장면이 진행되고 있었다. 즉 간질병 환자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의 실패로 인해 매우
혼란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실 갈릴리 전도 말기 기사(14:1-18:35)
의 가장 큰 이슈(issue)는 바로 이 제자들의 실패였다(14:16-21;15:6,23;16:5,22). 바
로 이러한 비극적 현실에 직면한 제자들에게 가장 요청되는 바는 오로지 '믿음'(17절)
이었다. 우리는 이같은 요구 조건에 대해 아래의 몇 가지 관점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믿음의 보존과 진보. 여기 제자들은 예수의 크신 권능을 생생하게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도록' 주께로부
터 파송받았던 자들이다(10:1). 그러나 본문에서는 믿음이 부족한 관계로 병을 고치지
못하였다(20절)고 되어 있다. 이로써, 한 때 믿음의 능력을 행사했다고 할지라도 끊임
없이 믿음 안에 깨어 있지 않으면 이전의 믿음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보게된
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내고 홍해를 륙지같이 건너게 하시던 하나님은 늘
동일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경계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이 겁장이가 되
었던 사실(민 14장) 또한 기억되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 줄로생각한 나머지
(고전 10:12) 영적 나태와 자만 가운데 빠져들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전신갑주9全
身甲胄)로 무장함으로써(엡 6:10-18) 이미 받은 귀중한 은사를 잘 보존함은 물론 날마
다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나가야 하겠다.
(2) 믿음의 본질. 믿음에 대한 정의는 여러 측면에서 내려질 수 있다. 특별히 본문
에서 예수는 가장 작은 씨앗에 속하는 겨자씨를 예로 들어 믿음의 중요한 본질을 밝히
고자 하셨다. 20절의 말씀 속에는 제자들의 믿음이 겨자씨 만큼도 못하다고 하는 책망
의 뜻이 내포되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는, 비록 겨자씨가 지극
히 작은 씨앗이로되 그 속에 생명이 있음으로하여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자라갈 수 있
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믿음의 본질이 그 생명력에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사상이나
지적 동의(知的同意)로서의 믿음, 더구나 인간의 합리적 사고에만 의존하는 반신반의
(半信半疑)의 믿음은 아무런 생명력을 발할 수 없다. 우리 심령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의 존재를 생샤가게 느끼며 지, 정, 의(知, 情, 意)를 포함한 전 인격을 그분께
의탁하고 두우시는 은혜를 구할 때 비로소 그 믿음은 생명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
다.
93) 믿음의 능력. 믿음은 이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조차도 가능하게
만드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이시고, 그 하
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창 1, 2장). 본문의 제자들 또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는 서기관들의 빈정거리는 누닛을 의식하
지 않고 오직 주의 이름과 그 약속에 의지하였더라면 능히 이적적 능력을 나타내 보일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의심많고 연향한 인생은, 파도를 보고 지레 믿음이 약해져
서 물 속에 빠져 들어갔던 저 베드로의 한계(14:30, 31)를 좀처럼 넘어서지 못하였던
것이다.
3. 두번째 수난 예고(17:22-23)
첫번째 수난 예고(16:21) 외에도 본서의 요소요소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간접적 암시가 나타나고 있지만(9:15;10:38;12:40;17:12b) 본문은 두번째 직접적 수난
예고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 예수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한 알의 밀알
로 썩어지는 (요 12:24) 대속 죽음이야말로 당신의 본질적 사명임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으셨다. 따라서 변화산 사건 후 제자들과 함께 모이자마자 또 다시 십자가 수
난에 대한 얘기를 신중하게 꺼내신 것이다. 이때에도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부화 마또
한 함께 언급하셨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첫번째 예고 때 베드로가 보였던 반응과 같은 성급한 제지가 나타
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베드로에게 내리셨던 주님의 호된 책망을 기억 속에 생생
하게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끼닫고 그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마가의 록에서 밝혀져 있듯(막 9:32)
제자들은 예수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다만 영문 모를 불안과 근심에 가득
차 있었을 따름이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
렇듯 근심 가운데 빠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주님의 메시야적 권능을 목도하고 당신의
신성을 왁신하였을 때 제자들이 십자가 수난의 예고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듯이, 이
제 예수의 수난 예고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궁극적 승리와 영광의 부활에 대한 소망
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저렇듯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전혀 생경(生硬)스럽지가 않다. 오늘날 완성
된 신.구약성경을 접하며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거듭 배우는 성도들마저 막상 복음으
로 인한 고난에 직면하였을 때 쉽게 낙심하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되기 때
문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훗날 성령의 조명하에 당신의 말씀을 재삼 숙고(熟考)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담대한
증거자로 설 수 있었다(행 2,3장). 한편, 예수는 공생애의 마지막 밤에 제자들의 저러
한 슬픔과 근심을 지적하시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셨
다(요 16:6이하).
4. 성제세 납세 문제(17:24-27)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본문은 향후 제자들에게 부딪혀 올 실제적인 여
러 문제에 대한 전형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기사애며 18장
의 강화 부분에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유대인의 예배 중심지였던 성전을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래
서 20세이상의 모든 남자는 그 비용 충당을 위해 반 세겔씩 내도록 규정되었다(출
30:11-16).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이 신앙 전통에 따랄 자발적으로 바치던 자치세였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로마 정부에 바치는 인두세(人頭稅) 징수 문제를 다룬 22:15-22의
사건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내용이다.
한편 스스로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서슴없이 자신의 존재를 밝히신(12:6) 예수의
위엄있는 모습은 당신의 사역과 교훈을 이단시하던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눈에 가시와도
같이 여겨졌음에 분명하다. 본문의 세리 또한 예수께 대한 조작된 악소문을 돋고서 의
혹을 잔뜩품고 있었을너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세리의 물음은 다분히 시비조였고,
베드로는 주께서 성전세를 낼 것이라 말하고는 이를 예수께 고하려 하였다. 여기서 예
수는 단순히 성전세를 내느냐 안내느냐의 문제를 떠나 제자들의 혼란된 마음 상태를
바로 잡아 주기 위한 의도에서 문답식의 대화를 통해 교훈을 베풀고자 하셨다. 즉 예
수는 당신이 성전보다 크신 분이시며912:6). 성전 제도를 마감하고 복음의 새 제도를
시작하러 오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성전세를 내심으로써 무모한 분쟁(紛爭)을 지양
(止揚)하시고 당신의 주어진 사명을 계속 수행해 가셨던 것이다.
* 성전의 실체로서의 특권과 관용. 먼저 예수는 원칙론적인 견지에서, 자신이 성전
보다 더 위대한 이요 성전은 임마누엘로 오실 메시야를 예표(豫標)하는(히 8:5) 일시
적 모형임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사실 성전의 모든 의식과 절차는 예수 안에서
완성되고 성취되었다. 그러나 성전 자체를 신성시하여 성전 숭배에 젖어 있었던 유대
주의자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 중에도 당시로서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예수의 가르침과 직접 부딛히면 자칫 혼란에 빠져 실족할 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당신이 결코 율볍이나 성전을 파괴할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
들을 보다 완전한 의미로 완성시키려 하셨음을 가르치기 위해, 먼저 '아들'(26절)의
특권을 강조하신 후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신 것이다. 특히 물고기의 입을 통해 동전을
얻게 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만물을 주관사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전의 주인되심을
행동으로 증거하신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넘치는 자유를 남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
제의 실족을 막기 위해서라면 일평생 고기도 먹지 않겠노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뜨
거운 사랑의 정신을 연상해 볼 수 있다(고전 8:13). 진정 주어진 자유와 특권은 자신
의 유익만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이웃의 이익과 건강을 위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 무모한 대립을 지양하신 예수. 가뜩이나 예수께 대한 의혹(疑惑)과 악소문이 자
자한 가운데, 거기다 제자들의 영적 상태가 아직은 아둔한 상태에서 예수는 굳이 성전
세 문제로 세리들과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싶지는 않으셨다고 짐작된다.
사실 예수는 구약의 성취자로 오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더 유대인의 의
식이나 절기를 중히 여기고 친히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등 율법에 충실하셨다.
그리고 성전 또한 자연스럽게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아버지의 집'(요 2:16)이 되었
어야 마땅했다. 결국 성전과 예수를 분리한 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이었지 예수 자신이
아니셨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때가 이르러 자신이 결정적으로 메시야 사역을 행사히기 전까지는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문제로 방해받지 않기 위해 지혜롭게 성전세 징수에 관련된 분쟁
을 피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1)절대 절명(絶對絶命)의 신앙 문제가 아닌 것에 있어서
는 쓸데없는 분쟁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딛 3:9)과 (2) 모든 일에는 때와 순서가 있음
을 알게 된다. 이처럼 대적자들의 오해를 미연에 봉쇄하기 위한 예수의 지혜로운 처신
은 비둘기 같이 순수하되 뱀같이 지혜롭게 현실 상황에 대처해 나가야 할 성도들에게 귀한 교훈으로 다가온다(10:16).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