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그 열 두 제자 - 이 어구는 마태복음에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지만 정관사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열 두 사람의 제자들은 이 이전에 이미 선택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예비적 단계들(4:18-22; 요 1:35-51)이 여기에 와서 결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수훈 이전, 예수께서 밤새껏 기도하신 후 제자들은 택하셨고(막 3:13-18; 눅 6:12-16)또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제자 훈련을 실시하신 후에야(막 6:7-13; 눅 9:1-6) 비로소 그들을 선교지로 파송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열 두 제자 임명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갑자기 탄생할 개척 교회를 책임질 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 둘'이라는 숫자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한 새로운 탄생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12족장이 옛 시대의 이스라엘을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이들 12명의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2제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갱신(eschatological renewal)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들의 직무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선생이신 예수로부터 가르침받은 교훈과 그가 세우신 종교의 본질,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열 둘이라는 숫자는 이 목적에 가장 적절한 숫자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한편으로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큰 숫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하게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을 만큼의 작은 숫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도 같이 배운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또 자기들의 기교나 재주로 이 종교를 전파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고 상당한 지위나 신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이 종교를 강요할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보고 들은 대로만 전달하는 정직하고 평범한 상식을 소유한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사(* , 프로스칼레사메노스) - 이 말의 원뜻은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위해 소집하였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주춧돌이 될 12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역사를 쟁취하시기 위하여 불러 모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주권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을 통해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민족 전체에게 소명(召命)을 부여하신다(막 3:13; 행 2:39; 고전 1:1, 2).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여기서 먼저 '권능' (* , 여수시안)이란 '권세와 능력(힘)' 또는 '권위와 통치권'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특별히 정복자들로서의 능력을 가리킨다(F.R. Fay).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필요에 따라 천국 일꾼을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한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에는 먼저 '귀신을 쫓아내는'것이 있었다. 여기서 '귀신'이란 문자적으로 '더러운 영들', '악한 영들'이라는 뜻으로서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에게 원수가 되며, 직.간접으로 인간의 정신과 도덕과 육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영들이다(12:43). 그런데 예수께서이 같은 더러운 영들을 쫓는 능력을 병고치는 능력과 구별하여 제공하신 것은, 그 일이 병고치는 일보다 탁월하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고, 또한 사단의 왕국을 허물어뜨리는 직접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다른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소명받은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하는 데 유효한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유전(12족장의 유언, Lev. 18:12)에 의하면 이처럼 악한 영을 정복, 축출하는 일은, 곧 대제사장적 메시야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일은 메시야와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확실한 증표임에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은 본래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4:23; 9:35 참조) 이제 당신의 권위를 덧입은 12제자들에게도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권능은 일반 성도에게 부여된 '병고치는 은사들'(고전 12:9, 28)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부여된 그 은사는 은사받은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고, 그들이 고칠수 있는 병의 종류도 받은 바 은사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로부터 신적 권위를 직접 위임받은 12제자들은 '모든 병과 모든 악한것'을 고치는 특수한 은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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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 아포스톨로스) - 이는 '내가 보내다'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냄을 받은 자', '사신'(messenger, 요 13:16), '선교사들'(missonaries), '대리자들'(representatives), '전권대사(ambassador, 엡 6:20)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문에는 특별하고도 협의적(狹義的)인 의미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된 특사, 또는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 확장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할 예수의 증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도직'의 조건에 대해서는 행 1:21, 22에 규정하고 있는데 (1)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 승천시까지 예수와 동행한 자(행 1:21), (2)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자(행 1:22; 막 3:14), (3) 예수의 부활을 목격, 증언할 자(행 1:22) 등이다 <막 3:13-19, '사도직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사도'라는 용어는 예수 부활 이후에 좀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 사용되어 단지 12제자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수많은 전도자들(고전 9:1-5; 15:7; 갈 1:17), 바울과 바나바(행 14:4, 14; 갈 1:1),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실루아노(살전 1:1, 6), 예수의 형제들(갈 1:19)등에게도 지칭되었다. 여하튼 본문이 의미하는 바대로 좁은 뜻으로서의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훗날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여기서 탈락되며 그 자리는 맛디아로 대신 채워진다(행 1:26). 그리고 바울은 물론 넓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의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고전 15:8-10)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좁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할 수 있다(롬 1:;1; 갈 1:1). 한편 본절 이하에 제시된 12제자의 이름들에 대한 각 복음서간의 비교 도표에 대해서는 본절의 강해를 참조하라.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먼저 히브리어로 '듣다'는 뜻인 '시몬'(Simon)은 '시므온'(Simeon)의 단축형 명칭으로서(창 29:33) 베드로(* )의 본명이다. 이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는 요나의 아들들이자 어부 출신들로서(4:18-20) 갈릴리 벱새다의 토박이였다(요 1:44). 또한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 같다(요 1:35-42). 한편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바'(Cephas)라는 새이름을 지어주셨는데(16:18; 요 1:42; 갈 1:18),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된다(요 1:44). 향후(向後) '베드로'라는 이름은 사도로서의 공적 지위를 암시하는 이름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가 제자 명단에서 늘 첫째를 차지한 것은 (1) 다른 제자들에 우선한 그의 신앙 고백(16:16), (2) 예수의 예언적 인준, (3)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교회 창설의 주역(행 2:14), (4) 이방인에 대한 최초 선교자(행 10장) 등의 이유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와 사명의 대표성이나 우선성을 말한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지위의 선천적 탁월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하튼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신실히 감당하게 된다(행 2:15 ff; 고전 15:5). 그러나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장적(首長的) 권위나 법왕권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한다(갈 2:11; 벧전 5:1). 실로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던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신실한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한편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바벧론까지 선교 활동을 하다가 말년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안드레(* ) - 이름의 뜻이 '용감한 자', '남자' 등인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요 어부 출신으로서 성경에는 그렇게 두각(頭角)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막 13:3; 요 1:35-44; 6:8; 12:22). 특히 그의 활동중 두드러진 것은 그가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했다는 사실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구디아, 헬라, 소아시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A.D. 70년경 파트라에서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야고보, 요한(* ) - '발꿈치를 잡다'(창 25:26),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가 각각의 이름의 뜻이다. 이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께 각별히 인정받던 3대 제자에 속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기록에서 요한 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함으로써(행 12:2, A.D. 44년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참수당함) 그의 형제 요한 만큼의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출신이자 세베대의 아들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삯꾼을 둘만큼 부자였으며(막 1:20), 그 아내는 예수의 사역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27:55, 56; 눅 8:3). 그런제 12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또한 그의 가족이 대제사장 집안과 어떤 연계가 있었던 것은(요 18:15, 16) 아마도 세베대의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이어받은 듯한데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받은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은(막 3:17; 9:38-41; 눅 9:54-56) 그 별명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불같은 기질(氣質)을 반영해 준다. 여하튼 요한은 베드로와 각별한 우애를 다진 가운데 초대 교회의 한 모퉁이 돌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으며(눅 22:8; 요 18:15; 20:2-8; 행 3:1-4; 8:14; 갈 2:9),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에베소에 정착하여 선교, 교육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한편 그는 A.D.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때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해 넬바 황제때 에베소에 돌아와 지속적인 복음 사역을 감당하다가 트라얀 황제 때에 영면(永眠)함으로써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하여 폴리캅(Polycarp), 파피아스(Papias), 익나티우스(Ignatius)등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등 초대 교회의 인재 양성에 남다른 공헌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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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 , 필리포스) - 순수한 헬라명으로 그 뜻은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도 역시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랐으며(요 6:5-7; 12:21, 22; 14:8-14) 베드로와 같은 고향인 벱새다 출신이다(요 1:44). 그는 주로 헬라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한(요 12:20-22) 것으로 보아 적어도 헬라의 언어와 문화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다른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12제자 명단 중 제 2그룹의 첫번째에 언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게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A.D. 2세기 감독인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빌립이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에서 사역하다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바돌로매(* ) - 히브리 이름으로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이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 '나다나엘'과 동일시 되고 있다(Carr, Ewald, Meyer). (1) 나다나엘은 12제자와 관련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요 1:43-51; 21:2). (2)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데려왔다(요 1:43-46). (3) 사도들의 명단들에서 빌립과 바돌로매가 항상 연결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증거가 확실한 것이 아닐지라도 만일 바돌로매가 곧 나다나엘이라 한다면 그는 적어도 가나 출신이며(요 21:2), 예수께 칭찬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요 1:47). 한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애굽, 인도, 알마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도마(* ) - 도마는 '디두모'(Didymus, 요 11:16; 21:2)라고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서 '쌍동이'(Twins)를 의미한다. 실로 그는 회의론적 신앙인의 대명사로 통할만큼 의심이 많았지만, 그와 더불어 용기있고(요 11:16), 바른 신앙 고백자로도(요 20:28) 널리 알려졌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와 파르티아에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성 도마 교회'가 인도에 현존) 그곳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세리 마태(* , 맡다이오스 호 텔로네스) - 그의 본명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서론과 9:9 주석을 참조하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야코보스 호 알파이우) - 그는 '작은 야고보'로 불리어지는 자로서(막 15:4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된다. 한편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몸이 왜소한 야고보', '동생 야고보'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희박하다. 그러나 그가 만일 27:56; 막 16:1; 눅 24:10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본다면 적어도 그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때 다른 여인들과 그곳에 가까이 가 슬퍼했던 여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요 19:25에 언급된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가 곧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친족이라 보기도 한다(Eusebius).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명확히 확증지을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다대오(* , 닫다이오스) - 베자 사본에 따르면 '다대오'란 이름대신 '여자의 마음'이란 뜻인 '렙바이오스'(* )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대표적인 사본들(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Western)에는 본문과 같이 '다대오'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본서와 마가의 명단에 언급된 '다대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명단과 비교했을 때 그곳에 나온 '야고보의 형제(아들) 유다' (* , 유다스 야코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형제(아들)'라는 말이 없어 설왕 설래하고 있다. 그런데 유다서의 저자가 자신이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유 1:1), 만약 유다서 저자인 유다가 사도인 '야고보의 유다'와 동일 인물이라면 이는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된다. 반면에 혹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가 예수의 이복 형제이며 동시에 예수의 이복 형제인 야고보의 친 형제라면 '야고보의 유다'는 곧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된다. 한편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the beloved)를 의미하는 어근(語根)으로부터 유래하였다. 따라서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 유다' 즉 '유다 다대오'로 불리어졌을 것이며, 결국 이 명칭은 '가룟이 아닌 유다'(요 14:22)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일대기를 기술한 외경 '다대오전'에는 그가 시리아, 알마니아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10:4
가나안인 시몬(* , 시몬 호 카나나이오스) - '가나안인'은 아람어로서 헬라식 표기로는 '젤로테스'(* )인데, 이 둘은 모두 '열심가, 열심당원'이라는 의미이다(눅 6:15; 행 1:13). 이로 보건대 그는 제자로 부름받기 전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정치 단체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이 확실하다. 한편 셀롯당은 가다라 출신 유다가 A.D.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한 집단으로서, 예루살렘 패망의 불씨를 당긴 유대 전쟁(Jewish War)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그 활동이 대단치는 않았던 것 같다.
가룟 유다(* ,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 - 이 가룟 유다의 아비는 '가룟 시몬'(Simon Iscariot)이다(요 6:71; 13:26). 한편 '가룟'이라는 이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1) '케리옷 출신 사람'(man of Kerioth)이라고 보고, 남쪽 유다의 한 지역인 가룟이라는 동네에서 그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2) 가룟은 열심당원들의 운동(movement)과 유사한 운동을 의미하는데 사용된 라틴어인 '시카리우스'(sicarius)의 음역이라는 설명이 있다. (3) 가룟은 '여리고의 사람'(man of Jericho)을 뜻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헬라어와 와전(訛傳)을 근거로 한 설명이다. (4) 가룟은 '거짓'(falsehood). '배신'(betrayal)을 뜻하는 아람어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C.C. Torrey). (5) '가룟 유다'는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염색공 유다'(Judas of the dyer)라는 견해가 있다(A. Ehrman), (6) 다섯번째 견해를 약간 수정하여 '머리가 빨간 유다'(Judas the redhead)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Albright). 이중 두번째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나 첫번째와 여섯번째 견해도 주의를 귀기울일만하다. 여하튼 이 유다는 12제자 중 회계를 맡고 있었으나 지나친 물욕(物慾)으로 인해 정직하지 못하였고(요 12:6; 13:29), 그 결과 그는 스승인 예수를 완악한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 주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10:5
이방인의 길로도 - 이는 문자적으로 '이방인의 길을 통해서 떠나지 말라'이다. 이것은 결국 '이방인을 향해서 가지 말라'(Do not go in the direction of the Gentiles)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 같은 금지 명령은 어떤 민족적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영원적 엄명으로도 볼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한시적(限時的)명령으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 복음은 메시야의 탄생을 위임받은 바 있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파 되어야 했으며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훗날 예수께서 전세계에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임무를 맡기실 것이다(28:19; 행 1:8).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도 구원 역사의 순차성(順次性)을 역설한바 있다(롬 1:16; 2:9, 10). 실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온 인류에게 전파되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3; 사 49:6; 행 3:25).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 사마리아는 가나안 정복 당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분할되었던 지역으로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솔로몬 통치 이후 여로보암 때로부터 시작하여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패망 할 때까지(왕하 17:1-6, B.C. 722)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다. 그런데 정복자 살만에셀은 피지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이스라엘인을 포로로 끌고 가는 한편으로, 이민족(異民族)을 이곳에 대거 이주시켜 나머지 북이스라엘인과 통혼하게 함으로써 민족을 혼혈화시켰다(왕하 17:24). 그 결과 사마리아는 혈통과 문화와 종교에서까지 선민으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히브리 공동체에 끼이지 못하였으며, 포로기 이후 산발랏과 므낫세를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건축하였다(느 13:28). 이 성전은 B.C. 109년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곳을 성지(聖地)로 삼아 모세 오경을 근간으로 독특한 종교생활을 영위해 왔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합 족속이라고 경멸하였고 그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의 직통거리인 이 지역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왕래하곤 하였다.
=====10:6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 이는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Stendahl). 구약적 배경에서(레 50:6; 겔 34장) 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Hill). 예수는 이들 유대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다가 생명과 진리가 결여된 딴 길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9:36). 그런데 이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고 또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롬 1:16; 2:9)라는 선교 원칙을 준수하였다.
=====10:7
가면서 전파하여 - 이는 여행 중에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행하고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게 되므로 그 순간마다 그들에게 예수와 그의 구원의 능력을 선언해야 한다. 한편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케뤼쏘' (* )는 공적 차원에서 '널리 전하다', '선포하다'는 뜻으로서 마치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포고문(布告文)같이 긴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 , 케뤼그마)은 곧 주의 나라의 기습적인 도래였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이 선언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전파한 것이기도 하며(3:2), 또한 예수께서 친히 전파하신 말씀이기도 하다(4:17). 실로 유대인들은 바로 이 천국의 제 1차적 상속자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도래했으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천국이 지체하지 않고 구현될것이기 때문에 이 천국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들의 상속권은 이방 세계로 넘겨질 것이다(Quesnel).
=====10:8
병든 자를 고치며...귀신을 쫓아내되 - 이는 천국 도래를 실증적으로 확인시키는 네가지 이적으로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능력에 해당한다(1절). 한편 이 네 종류의 이적을 구분하면 (1) 신체적 치유(병든 자), (2) 존재론적 치유(죽은 자), (3) 종교.의식적 치유(문둥병자), (4) 영적.정신적 치유(귀신들린 자)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결국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능(1절)은 결함이 전혀 없는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능력이었다. 한편 '죽은 자를 살리라'는 이 명령은 대부분의 주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레기우스 사본 같은 2류 사본에는 1절 내용과의 조화를 위해 누락시키고 있다. 여하튼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 부활 이전에 죽은자를 살린 일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라는 권능의 명령을 예수 부활 이후에 전개될 제자들의 사명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행 9:36-41).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이 말의 원뜻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지켜야 할 대단히 주요한 원칙이다. 사실 복음 사역자들이 받은 복음과 권능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받은 것을 전하는 것으로 최상의 만족을 삼아야 했다. 사실 사역자는 재산을 모으거나 큰 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되며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타인에게 봉사하고서 그 대가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사역자가 굶주려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10절)은 마땅하지만 본문의 이 말씀은 거저 받은 복음의 권능을 사리 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오직 은혜로 받은 것을 은혜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10:9
전대에 - 이는 돈을 넣어 품속이나 허리춤에 넣고 다니는 돈주머니를 말한다. 이 전대는 의복의 일부로서 귀중한 것을 휴대하기 편하도록 만든 일종의 지갑과 같은 것이다.
금, 은, 동 - 로마나 헬라의 화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화폐 가치가 적은 헤롯의 화폐는 동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들은 모두 돈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가지지 말고 - 돈을 소유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전도 파송을 앞둔 주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수적이고도 한시적인 선교 방법이었다(눅 22:35, 3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복음 사역자는 돈을 탐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돈을 탐하여 마음에 두게 되면 죄의 유혹을 받게 되며 따라서 악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딤전 6:10) 복음 사역자는 이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당연히 그 보냄받는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부족함없이 주시리라는 것 또한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 명령은 물질적 욕구의 절제를 명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풍성한 후원을 약속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10:10
주머니 - 이것은 음식이나 식량을 가지고 다닐 때 쓰이는 것으로서 가죽이나 결이거친 천으로 만들어졌다. 제자들은 여행하는 도중에 식량 공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이런 주머니는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두 벌 옷 - 여행할 때는 반드시 갈아 입을 옷이 하나 더 필요하다. 더욱이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판 팔레스틴을 순회 전도해야 하는 제자들이 밖에서 밤을 지내야 할 경우에 입고 있는 옷 외의 다른 한 벌의 옷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주의 뜨거운 사랑의 후원을 받을 제자들에게 있어 '여분의 옷'은 분명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5:40).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그 당시 맨발로 다니는 것은 유대 전통에 이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신발 착용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명령은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것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부분을 '지팡이 외에는...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막 6:8, 9)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은 마치 서로 모순(矛盾)되어 보이는 것 같으나, 마가는 여행을 위해 제자들이 이미 여행할 차비를 마친 상태에서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준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 먹을 것 받는 것 - 이 어구는 제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 제자들의 생필품들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피전도자는 받은바 영적 은혜의 감사 표시로 전도자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줄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A.D. 100-120년 경에 기록된 '12사도훈'(Didache)에는 '여러분에게 온 주의 사도는 주님처럼 환영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도가 3일을 머물고자 한다면 그는 거짓 사도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나고자 할 때 여러분은 그가 다음 거처에 이를 때까지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돈을 요구하게 되면 그 자신이 스스로 거짓 사도임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녕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사역자들의 일을 방해할 수 없으며 두벌 옷이나 전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자들이 아무런 어려움이나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일꾼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열매를 허락하신다(고전 9:14; 갈 6:6; 딤전 5:17, 18).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한 일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일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Clement of Rome).
=====10:11
성이나 촌에 - 여기서 먼저 '성'(* , 포리스)이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달한 큰 도시를 의미하고, 이에 비해 '촌'(* , 코메)은 자연 발생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을 뜻한다. 이는 예수 제자들의 선교 대상지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방랑자들처럼 떠돌아 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합당한 자 - 이는 천국 메시지에 영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자(Homer A. Kent, Jr.)로서 복음 전파자들을 친절히 맞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순결한 영혼을 갖춘 자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윤리적으로도 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자로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자들은 자기가 머문 그곳을 기점으로 그 온 동네를 복음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경건하며 건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의 집에 머물러야 했던 것 같다. 떠나기까지...머물라 - 누가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눅 10:7)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는 것은 한 집으로 만족하지 않는 듯이 보이며 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 결국에는 복음사역의 가치를 떨어뜨려 복음 전파에 막중한 지장을 초래(招來)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10:12
평안하기를 빌라(* , 아스파사스데 아우텐) - 직역하면 단순히 '인사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은 '샬롬' (* ), 곧 '평화'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자들의 첫마디 인사가 '평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편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평화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의 인사말은 주로 '카이레인'(* , 기쁨, 은혜)이었다. 바울 서신서에는 이 양자를 모두 합한 인사, 즉 은혜와 평강을 동시에 묻는 인사말이 자주 등장한다(롬 1:7; 고전 1:3). 여하튼 주께서 이처럼 들어가는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경의를 표하고 또 그들을 정중하게 대하라는 명령이었던 것 같다. 복음 전파자라고 해서 사회 일상의 통념을 무시하고 무례한 행위를 할 권한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일반 사회인들보다 더욱 예절과 상식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10:13
그 집이 - 이는 가정이나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12절의 집과 같은 대상이다. 따라서 이 집은 복음 전도자가 머물러 유하기에 적절한 가정을 뜻하며 이 집의 가장(家長)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된 자이어야 한다.
합당하면 - 이는 그 집이 복음 전파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가리킨다.
거기 임할 것이요 - 제자들은 평안의 인사나 기도 또는 가르침 등을 통해 그 집에 행복과 번영 그리고 화평이 임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복음의 축복이 그들에게 부여되기를 기원(prayer)하였다. 그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순종할 때면 제자들이 한 평화의 기도는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관건(關鍵)인 것이다.
합당치 아니하면 - 이 말은 제자들이 머물러 유할 집이 복음을 기꺼워하지 않거나 또는 제자들이나 복음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 다윗은 원수들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한 바 있는데 이때 그의 기도가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자기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노래하였다(시 35:13). 제자들이 만나는 이에게 평안을 빌고 복음을 전할 때 만약 그들이 그 평안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그 평안과 복음을 통해 유익을 얻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복을 빈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빈 평안과 축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누구에게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족장 시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이미 말하여진 선한 축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체로 존재하여 결코 사장(死藏)될수 없고 그 성취의 순간까지 지속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믿어져왔다(창 27:33 ff; 사 45:23; 55:11). 따라서 누구든 타인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데 주저하거나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실로 타인의 평안을 원하지 않는 자는 주(主)의 제자되기에 적합치 않은 자이다.
=====10:14
영접도...아니하거든 - 예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축복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으로 저주를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물 한모금 주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를 떠나보내게 하는 것이며, 그들을 기쁘게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25:40). 실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입술과 인격을 통해 복 주기 원하신다.
그런데 그들이 복의 근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통로로 복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 이는 상대와의 관계 단절과 의식적 정결례를 상징하는 행위이다(느 5:13; 행 18:6).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문물(文物) 뿐만 아니라 먼지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이방인 지역에 갔다가 유대땅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그들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의식적 청결을 유지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를 영접치 않고 또 복음을 듣지도 않는 자들을 향한 이 먼지 떠는 행위는 그들이 참으로 구원의 복음과 무관한 자들로서 이교(異敎)적이고, 심히 부패해 있으며, 끝내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사 1:9; 눅 17:29; 벧후 2:6). 비시디아 안디옥을 전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바로 이같은 상징적 행위를 한 적이 있다(행 13:51).
=====10:15
내가 진실로 - 예수께서는 이런 형식으로 당신의 교훈의 각 마디를 종결 지으시며, 또한 주의를 환기시키셨다(23, 42절).
심판 날에 - 여기서 심판 날은 복음과 그 사역자들을 배척한 자들이 맞을 멸망의 순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날을 가리킨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독한 범죄로 인해 아브라함 당시 여호와가 보내신 불과 유황에 의해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으며(창 19장), 그 이후부터 모든 부패와 최후 심판의 대명사가 되었다(신 29:23; 사 1:9; 3:9; 렘 50:40; 유 1:7).
견디기 쉬우리라 - 앞에 언급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사역을 방해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보다는 약한, 단지 예시적(豫示的) 기능을 할 뿐이다.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한 죄가 이처럼 무서운 것이라면 복음 그 자체를 배척한 자들의 심판(11:20; 눅 12:47) 또 얼마나 무서운것이 되겠는가? 이처럼 복음은 결과론적인 이중성을 띠고 있다. 즉 복음이 선포된 후에는 영생과 축복, 아니면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 뒤따른다.
=====10:16
보라(* , 이두) -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 불변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제시되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 원문에는 '나'(* ,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를 파송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권자로 삼아 파송한다'는 뜻의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는 제자들이 위험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그들을 파견(dispatch)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보내시기에 가능했다.
양을 이리 가운데 - 이는 온순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의 사역자들인 제자들을 진리의 복음에 대해서 끝없이 반항하고 냉정하며 잔인한 세상으로 파견함을 가리킨다(7:15; 요 10:12; 행 20:2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때문에 온갖 핍박과 거절을 당하고 생명까지 노략질 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과 함께 고통과 박해까지도 감내(endurance)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 2: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현상적으로는 복음의 원수인 이리가 양을 찢어 생명을 노략(擄掠)질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파수꾼인 양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뱀같이 지혜롭고 - 이 말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대 근동 지역의 속담이었다. 성경에서도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창 3:1; 고후 11:3). 또한 애굽인들의 상형 문자판을 보면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뱀과 같이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신 까닭은 신중한 분별력을 지녀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뱀이란 징그럽긴 하지만 자기가 처한 위험 속을 능란하고 또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아주 기묘한 동물이며, 이런 면에서는 뱀을 당할 동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뱀과 같이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교(計巧)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로움이 순박감을 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쉽사리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순결'해야 했다.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먼저 '순결하라'(* , 아켈라이오이)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 )와 '섞다'는 뜻의 '케란뉘미'(* )의 합성어로서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솔직, 순진함을 뜻한다. 한편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둘기는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호 7:11). 사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양자를 조화시켜 뱀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은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Midrash)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넘어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하셨다.
=====10:17
사람들을 삼가라 - 먼저 '삼가라'(* , 프로세케테)란 말은 '...로부터 어져 마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이리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불필요하게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 가지 말고 분별력과 지혜를 적절히 활용하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이란 불신자(Calvin, Weiss) 또는 적극적인 박해자(Bruce)를 가리킨다(33절). 저희가...공회에 - '공회'를 뜻하는 원어 '쉬네드리아'(* )는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인 '쉬네드리온' (* )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본문의 '공회'는 지방의회들(local councils)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 당시 이 지방 의회들은 공공 질서와 치안(治安) 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신 16:18). 따라서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 지방 의회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본문의 '저희'란 말은 '공회'란 말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 동족 유대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저희 회당에서 - 어떤 이들은 '저희 회당'이란 말 속에는 교회와 회당의 개념이 구분되어 있으므로 이 말은 예수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훗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가 시작된 뒤 마태에 의해 편집되면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저희'란 말은 비난의 뉘앙스(nuance)를 풍기는 것인 까닭에 이것 역시 이 구절이 훗날 삽입된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참 신앙을 버린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해서 비난의 어감이 담긴 '저희'란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특히 마태는 구약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예수 또는 본서 기자인 마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반역과 진리 거부를 일삼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용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채찍질 하리라 - 채찍질이란 것은 신약성경에서 흔히 언급되는 체형(體刑)의 일부로서 모세의 율법에는 채찍질의 수가 40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신 25:1-3). 이 같은 체형을 선고 받은 죄수는 재판관이 보는 앞에서 땅 바닥에 엎드려 누워야 했고 그런 다음 그의 등에 채찍질이 가하여졌다. 채찍질을 가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매는 회초리와 같은 막대기였는데 그후에는 막대기에 가죽끈이 부착된 도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채찍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가죽끈에다 쇠조각 같은 것을 박아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대기에 가죽끈을 세줄로 달아 놓고 한 번에 세 대의 채찍질로 계산하여, 13번 때려 도합 39번의 채찍질로서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매질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다(고후 11:24). 한편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처벌이 넓은 의미의 구타(beating)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채찍질(flogging)인 것을 볼 때,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협적 핍박은 동족의 비난이나 폭력보다 사법적 절차에 이해 내려지는 형벌이 더욱 컸던 것 같다(Hare). 여하튼 회당에서 회당 회원들이 채찍질하는 것이 빈번했음을 잘 알고 계셨던(23:34; 행 22:19; 고후 11:24, 25)예수는 교회가 조성(助成)되어 회당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그의 제자들이 채찍질당할 것을 예견하셨다.
=====10:18
총독들과 임금들 - 여기서 총독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등급에 위치한 통치자들이나 지방 행정 장관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갈리오(Gallio), 베스도(Festus), 가리사랴의 벧릭스(행 23:26)나 데살로니가의 읍장(행 17:6)등과 같은 이들을 생각할 수 있고, 왕들이란 팔레스틴의 통치자들인 분봉왕(행 12;1)이나 로마제국의 비호(庇護) 아래 있는 지방 토호(yeoman) 세력들 및 로마 황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17절의 종교지도자들과 비교되는 세속의 통치자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표현들을 통해서 제자들이 세상 법정에도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복음이 갈릴리 지역과 유대 민족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이와 비례해서 이들에 대한 반대 세력들 역시 그만큼 증가할 것이란 점도 예상할 수 있다.
끌려가리니 - 예수께서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알고 계셨다. 그의 예언에 따라 베드로는 네로 황제 앞에 끌려갔던 것으로 보이며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 앞에,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여러 다른 임금들 앞에 끌려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 여기서 '저희'라고 하는것은 유대인을 지칭한 것이라기 보다는 복음 사역자들을 끌고 간 총독과 임금들로 보아야겠다. 여기서도 다시 암시되어 있다시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리란 것이 명확하게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증거가 되게 - 제자들은 동족들의 교권주의적, 문화적 핍박과 권력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통해 복음, 즉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와 구세주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폭발적이고도 생동감 있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순교는 곧 복음의 위대성과 진리의 무한한 생명력을 확증해 주는 최고, 최선의 증표(證票)가 될 것이다.
=====10:19
넘겨 줄 때에 - 넘겨 주는 주체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유대 지도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즉 훗날에 가서 주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복음을 곳곳에 전파했을 때 이 복음을 가장 방해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또 이들의 고소, 고발에 의해 제자들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어떻게...말할까 염려치 말라 - 근심과 걱정, 그리고 염려와 불안 등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치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당면한 위기를 처리하고자 할 때 나오는 것이다. 즉 미리 앞서 변명거리를 준비하는 근심어린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순수성에 위선과 허위의 탈을 덧씌우는 위험성을 낳게 한다. 따라서 답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인 동시에 본인으로서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순결한 영혼을 보존하는 일이된다.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처럼 그 염려의 원인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6:25).
그 때에 -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in that same, KJV)이다. 이는 결국 인간편에서 준비하기 전에 이미 그 인간의 대변자되신 성령께서 모든 답변 준비를 완벽히 해두고 계셨음을 암시해 준다.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 이는 고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가장 시기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이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나 서민 출신으로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고 또 위풍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위층의 세련된 관리나 총독 또는 임금 앞에 섰을 경우 도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대단히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10:20
너희가 아니라 - 이 말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나 이성적 판단 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말은 복음의 변증(辨證)과 신앙의 순수를 보존하는 일이 인간의 자력(自力)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고별 강화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 사역을 진척시켜나가게 되리라고 에언하셨던 바가 있다. 그러나 고별 강화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본문은 주의 제자 당대에만 적용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은 고별 강화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현저하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오순절 이후에 행해질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오순절 이전 주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행하심으로써 예수를 증거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그들의 처지를 안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핑계로 복음 사역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 이는 성령의 인격성과 사도적 기록의 영감성을 대변해 주는 구절이다. 실로 성령께서는 구술(口述)과 기술(記述)을 통해 복음 증거자들의 내면에 인격적으로 임재하셔서 충만한 영감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요 15:26, 27).
너희 아버지의 성령 - 예수께서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가리켜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라고 지칭했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녀로서의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아버지로서의 보호로 인해 그를 더욱 신뢰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 신자들 역시 하나님을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혈연 관게에 있고, 나를 조성(造成)하신 '나의 아버지', 나의 고통과 죄악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는 '나의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하는 이는 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행 4:8; 13:9; 고후 13:3). 실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든 인격들 속에 영원히 안주(安住)하시며(요 14:16, 17), 또한 환경과 처지를 따라 지혜와 선한 변증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삼위 하나님의 유기적 역사를 통해 보호하시는 은혜이다. 즉 성부 하나님의 부권적 보호의 약속과 성자 하나님의 그 약속에의 보증 및 성령의 실제적 보호와 후원이 그것이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아버지의 성령을 단순히 '성령'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 말이며, 성령의 호칭에는 이 외에 그리스도의 영(롬 8:9), 주의 영, 하나님의 신(사 11:2) 등이 있다.
=====10:21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 제자들에게 미칠 박해의 양상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지경, 곧 혈연관계에서 조차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실로 종교와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가장 원초적 생활 공동체인 가족 상호간에 반목(反目)과 적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익히 체험해온 바이다. 실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란 참 종교를 대적할 때는 모든 인륜의 사슬을 끊어버릴 만큼 가공할 만한 악을 품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의 갈등 상황은 혈육으로 치장된 피비린내 나는 영적인 싸움으로서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원인은 바로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데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죽게 하리라 - 유대 묵시 문학에는(4 Ezra5:9; Jub23:19, 2 Baruch 70:3) 말세에 가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리란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부분들이 흔히 발견된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아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5, 6)고 예언하였다. 한편 미가의 예언과 맥을 같이하는 예수의 이 예언은 실제로 네로와 같은 로마의 폭군하에서 복음을 믿는 신자들에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과 신자들은 화형(火刑)을 당하는 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사자의 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적 혈연보다는 영적으로 결합된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혈연이 절대적으로 더 가치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악의에 차서 복음을 핍박하는 가족들의 만류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과 신앙의 지조(志操)를 지켰던 것이다.
=====10:22
내 이름을 인하여(* , 디아 토 오노마 무) -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벧전 4:14), 또는 '그리스도로 인해'(5:10-12)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진정 제자들이 세상 관원(官員)과 자기 가족들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분의 삶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배척받은 데 그 근원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분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 이 같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 개인의 실수로 인한 고난과는 구별된다.
모든 사람에게 - 여기의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한 명도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all men without distinction), 곧 인종, 피부색,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서는 좀더 축소된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이란 박해 사건과 관계된 모든 사람을 가리키며 제자들을 핍박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로 인간의 마음이란것은 본질상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부패된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인간은 어느 위치,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모두다 멸망치 않을 수없는 것이며(롬 3:10) 또 그렇기 때문에 의(justice)를 향하여서는 부패한 본성에 따라 분노와 적의를 품는 것이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 '나중'이란 말은 생명이 끝날 때까지, 즉 길든 짧든 간에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될 때까지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나중'이란 말은 다른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칼빈(Calvin)은 이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지배하는 때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을(Clarke), 그리고 또 어떤 학자들은 세상 끝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Beza, Weiss)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전체 문맥상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를 생명이 끝날 때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요구될 필요가 없는 때까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께 충성하려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 )는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극한 고난 속에서도 배교(背敎)하지 않고 끝끝내 예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신실성과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의심없이 믿는 행위이다(갈 6:9).
구원을 얻으리라 -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의 획득이 약속되었다(눅 21:19). 즉 예수께서는 육체적 생명의 잠정적 손실에 대한 전인격적 생명의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신 것이다. 정녕 신앙인은 예수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상실케 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와 더불어 완전한 회복과 보존을 받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10:23
핍박하거든...피하라 - 이 말은 이기적인 자기 보존을 장려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할 목적으로 합리적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피하라'고 하는 말은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는 권고이지만 이는 오히려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또 사려깊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미련한 아집과 우직한 자아(自我)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끝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주를 부인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곳으로 피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주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잃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소유된 자의 올바른 생사관(生死觀)이다(롬 14:7, 8).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 이는 에수께서 선언하신 바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일어나기까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방문하지는 못랄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때부터 단지 40년후에 발생하기 때문에 다음 어구에 언급되는 인자의 오심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석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것을 지리적 측면에서라기 보다 복음 선교의 충만성으로 이해하여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충분히 전해져서 그들이 개종하게 되는 때까지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인자가 오리라 - 이 어구는 대단히 난해한 어구 중의 하나로서 이에 대한 몇가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자의 오심은 12제자들을 파송한 후 주께서 그들을 뒤따라가서 그들과 합류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였다(J. Dupont). (2) 이는 예수의 부활이나 또는 예수가 메시야로 널리 인정될 때를 가리킨다(Sabourin). (3) 인자의 오심은 곧 성령의 오심을 말한다(Chrysostom, Calvin). (4)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Agathangelus). (5) 예수 당신이 지상에 있을 때 종말이 임한다고 착각하여 잘못 내뱉은 말이다(Schweitzer). (6) 이는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한다(Walvoord). (7) 인자의 오심은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France). 이상과 같은 여러 학설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다들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고 보여지나 본문의 문맥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자의 오심'을 '천국의 도래(到來)'와 연결시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즉 인자의 임하심은, 곧 천국의 임재를 뜻하며 이 천국은 현재 이미 임해 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로 종말 때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를 메시야로 깨닫고 영접하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에게 그 실패로 인한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거듭 말했던 예수의 경고는 바로 이 '인자의 오심'과 관계가 있다(Feuilet). 이런 견지에서 예수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비슷한 입장에 있으나 그분의 경고는 그 선지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자신이 종말론적인 심판자이며, 메시야의 통치는 이제 축복과 진노 속에서 모두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8:11, 12; 21:31, 32). 결론적으로 본절의 '인자의 오심'은 거듭 경고된 심판이 마침내 천국이 임함으로써 유대인에게 떨어지고야마는 종말론적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성전에서의 구약적 예배와 혈통적 선민 의식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새 포도주는 필연적으로 새 부대에 담겨져야 했다(9:16, 17). 이로써 천국은 이제 그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5:17-48).
=====10: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 이 어구는 그당시 유행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미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분명하다. 사실 제자가 선생 이상의 지식을 얻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제자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도리는 불변하며 제자들은 항상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선생인 자신이 온갖 욕설과 핍박을 받는다면 적어도 너희는 더 큰 핍박을 각오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냐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본문의 이 격언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자는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전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종이 그 상전보다 - 이 말은 앞의 문구와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격언의 말씀을 통해서 윗사람이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면 그 아랫 사람은 두말할나위 없다는 점을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이 당한 고난을 제자들도 똑같이 당했으면 당했지 결코 더 나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10:25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서 이 부분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이라는 차원에서 당신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음을 역설하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생이 받는 박해와 고난 보다는 제자나 종이 받는 고통이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을 것이므로, 따라서 선생의 고통만큼만 되어도 만족할 것이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12:24). 예수는 이들의 빈정거리는 어투을 역이용(逆利用)하셔서 자신을 집 주인으로 또 제자들을 그 집 사람으로 비유하시면서, 집 주인을 '바알세불'로 비난한 그들이 제자들은 더욱 더럽고 악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사단에 해당되는 명칭인데(12:24-27; 막 3:22-26; 눅 11:18, 19) 다른 곳에는 바알세붑(왕하 1:2, 3, 6)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말의 어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흔히 이방 에그론의 신인(왕하 1:16) '파리대왕'이란 뜻을 가진 구약의 '바알세붑'(* )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똥의 왕' 또는 '교만의 왕'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혹자는(E.C.B. McLaurin) 이말이 '집의 왕'(head of the house)을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데스포테스'(* )를 직역한 것으로도 본다. 여하튼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관하는 집 주인을 고의적으로 마귀 집안의 우두머리로 전락(fall)시킨 것으로서 이는 참으로 괘씸한 신성 모독의 범죄였던 것이다.
선생이 이 정도의 모욕을 받았다면 하물며 그 제자는 과연 어떤 욕을 당하게 될 것인가?=====10:26
그런즉 -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에 대한 결과절을 유도(guiding out)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승이 핍박받는다면 제자들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므로 두려워 말라는 뜻으로 다음의 어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앞 어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문장을 도입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다음 어구의 이유, 즉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숨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저희를 - 이것은 접속사 '그런즉'이란 말의 의미와 관계없이 핍박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말씀으로서 세번씩이나(26, 28, 31절) 강조되어 있다. 이는 완전한 보호와 위로에의 약속인 동시에 제자들의 험난한 핍박이 필연(必然)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이러한 분부를 하신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즉 박해자들이 설령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하여도 그들은 결코 제자들의 영혼까지는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어떠한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불신의 세계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가서 그들을 정복해야 한다. 한편 두려움이란 것은 사단이 신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준비해 둔 무기들 중의 하나로서 사단은 언제나 신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한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 먼저 '드러나다'란 뜻의 헬라어 '아포칼류토'(* )는 원래 '벌거 벗기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깊이 숨겨둔 인간의 가장 수치스런 죄악까지도 낱낱이 파헤치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의 이 어구는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흔히 통용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막 4:22; 눅 8:17; 12:2). 즉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격언을 통해서 제자들을 격려하시면서 설령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무죄함을 입증시켜주실 것이고 또 진실을 밝혀주실 것임을 설명하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전 12:14; 롬 2:6; 골 3:3, 4; 계 20:12, 13).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이 말 역시 앞 어구와 대구를 이루는 동일한 표현이다. 주님의 이 격언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언제인가는 이해될 것이고 또 그들이 당한 고난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확신하에서 기꺼이 멸시 천대를 받았고 또 핍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0:27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 - 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주의 계시(revelation)의 발전과정 중 그 시초에 해당하는 묘사이다. 한편 이것은 신비스러운 이상한 밀의(密意) 교리로 볼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아무도 모르게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진리, 즉 주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제자들에게만 비유와 같은 숨겨진 말로 가르치신 비밀스러운 교훈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제자들이 이를 전파하기까지는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광명한 데서 말하며 - 예수로부터 사적인 교육이나 은거(隱居)된 언어로 전해받은 것을 아무런 두려움없이 공개적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선포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귓속으로 듣는 것을 - 유대 율법 학자들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할 때 가운데 통역자를 두어 그를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통역자의 귀에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삭이듯이 전달했으며, 이 통역자는 히브리어로 율법에 대해 들은 설명을 대중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큰 소리로 외쳤는데,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이미 관례화되어 있던 이러한 방법을 따라 은밀한 방법으로 전달된 진리를 제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하셨던 것이 분명하다(Lightfoot, 'Hor. Hebr.' 4:23; Talmud. Bab., 'Berach'., 22a).
집 위에서 전파하라 - 유대의 집 지붕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평평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바람을 쏘이거나 기도 또는 묵상 등을 하는데 이용했다(행 10:9). 이사야는 모압에 대한 심판의 에언을 하면서 모압 사람들이 지붕위에서 통곡하리라고 하였으며(사 15:3), 예레미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자손이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였음을 지적하였다(렘 32:29). 그리고 회당의 관리는 안식일 전날 밤에는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신호로서 대단히 높은 집의 지붕 위에서 나팔을 여섯번 불었는데, 예수께서는 아마도 이 같은 안식일 준비 나팔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셨던 것같다(Lightfoot). 여기서 잠시, 안식일 준비를 알리는 6번의 나팔 중에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나팔은 밭일을 중단하라는 신호이며, 두번째 나팔은 성(城) 중에서의 작업을 멈추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번째 나팔은 안식일 촛불을 켜라는 신호였다. 여하튼 본문을 살필 때 제자들은 예수보다 더 광범위한 공중(公衆) 전도의 책임을 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먼저 은밀히 개인적으로 가르쳐야만 했는데, 제자들은 에수의 부활 전까지만해도 그 가르침의 대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요 16:12-15).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마치 봇물이 터진 저수지처럼 강력한 음성과 몸짓으로 공개적인 선포 사역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 열 두 제자 - 이 어구는 마태복음에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지만 정관사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열 두 사람의 제자들은 이 이전에 이미 선택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예비적 단계들(4:18-22; 요 1:35-51)이 여기에 와서 결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수훈 이전, 예수께서 밤새껏 기도하신 후 제자들은 택하셨고(막 3:13-18; 눅 6:12-16)또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제자 훈련을 실시하신 후에야(막 6:7-13; 눅 9:1-6) 비로소 그들을 선교지로 파송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열 두 제자 임명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갑자기 탄생할 개척 교회를 책임질 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 둘'이라는 숫자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한 새로운 탄생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12족장이 옛 시대의 이스라엘을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이들 12명의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2제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갱신(eschatological renewal)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들의 직무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선생이신 예수로부터 가르침받은 교훈과 그가 세우신 종교의 본질,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열 둘이라는 숫자는 이 목적에 가장 적절한 숫자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한편으로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큰 숫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하게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을 만큼의 작은 숫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도 같이 배운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또 자기들의 기교나 재주로 이 종교를 전파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고 상당한 지위나 신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이 종교를 강요할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보고 들은 대로만 전달하는 정직하고 평범한 상식을 소유한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사(* , 프로스칼레사메노스) - 이 말의 원뜻은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위해 소집하였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주춧돌이 될 12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역사를 쟁취하시기 위하여 불러 모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주권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을 통해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민족 전체에게 소명(召命)을 부여하신다(막 3:13; 행 2:39; 고전 1:1, 2).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여기서 먼저 '권능' (* , 여수시안)이란 '권세와 능력(힘)' 또는 '권위와 통치권'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특별히 정복자들로서의 능력을 가리킨다(F.R. Fay).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필요에 따라 천국 일꾼을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한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에는 먼저 '귀신을 쫓아내는'것이 있었다. 여기서 '귀신'이란 문자적으로 '더러운 영들', '악한 영들'이라는 뜻으로서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에게 원수가 되며, 직.간접으로 인간의 정신과 도덕과 육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영들이다(12:43). 그런데 예수께서이 같은 더러운 영들을 쫓는 능력을 병고치는 능력과 구별하여 제공하신 것은, 그 일이 병고치는 일보다 탁월하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고, 또한 사단의 왕국을 허물어뜨리는 직접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다른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소명받은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하는 데 유효한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유전(12족장의 유언, Lev. 18:12)에 의하면 이처럼 악한 영을 정복, 축출하는 일은, 곧 대제사장적 메시야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일은 메시야와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확실한 증표임에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은 본래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4:23; 9:35 참조) 이제 당신의 권위를 덧입은 12제자들에게도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권능은 일반 성도에게 부여된 '병고치는 은사들'(고전 12:9, 28)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부여된 그 은사는 은사받은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고, 그들이 고칠수 있는 병의 종류도 받은 바 은사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로부터 신적 권위를 직접 위임받은 12제자들은 '모든 병과 모든 악한것'을 고치는 특수한 은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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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 아포스톨로스) - 이는 '내가 보내다'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냄을 받은 자', '사신'(messenger, 요 13:16), '선교사들'(missonaries), '대리자들'(representatives), '전권대사(ambassador, 엡 6:20)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문에는 특별하고도 협의적(狹義的)인 의미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된 특사, 또는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 확장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할 예수의 증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도직'의 조건에 대해서는 행 1:21, 22에 규정하고 있는데 (1)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 승천시까지 예수와 동행한 자(행 1:21), (2)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자(행 1:22; 막 3:14), (3) 예수의 부활을 목격, 증언할 자(행 1:22) 등이다 <막 3:13-19, '사도직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사도'라는 용어는 예수 부활 이후에 좀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 사용되어 단지 12제자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수많은 전도자들(고전 9:1-5; 15:7; 갈 1:17), 바울과 바나바(행 14:4, 14; 갈 1:1),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실루아노(살전 1:1, 6), 예수의 형제들(갈 1:19)등에게도 지칭되었다. 여하튼 본문이 의미하는 바대로 좁은 뜻으로서의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훗날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여기서 탈락되며 그 자리는 맛디아로 대신 채워진다(행 1:26). 그리고 바울은 물론 넓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의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고전 15:8-10)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좁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할 수 있다(롬 1:;1; 갈 1:1). 한편 본절 이하에 제시된 12제자의 이름들에 대한 각 복음서간의 비교 도표에 대해서는 본절의 강해를 참조하라.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먼저 히브리어로 '듣다'는 뜻인 '시몬'(Simon)은 '시므온'(Simeon)의 단축형 명칭으로서(창 29:33) 베드로(* )의 본명이다. 이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는 요나의 아들들이자 어부 출신들로서(4:18-20) 갈릴리 벱새다의 토박이였다(요 1:44). 또한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 같다(요 1:35-42). 한편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바'(Cephas)라는 새이름을 지어주셨는데(16:18; 요 1:42; 갈 1:18),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된다(요 1:44). 향후(向後) '베드로'라는 이름은 사도로서의 공적 지위를 암시하는 이름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가 제자 명단에서 늘 첫째를 차지한 것은 (1) 다른 제자들에 우선한 그의 신앙 고백(16:16), (2) 예수의 예언적 인준, (3)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교회 창설의 주역(행 2:14), (4) 이방인에 대한 최초 선교자(행 10장) 등의 이유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와 사명의 대표성이나 우선성을 말한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지위의 선천적 탁월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하튼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신실히 감당하게 된다(행 2:15 ff; 고전 15:5). 그러나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장적(首長的) 권위나 법왕권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한다(갈 2:11; 벧전 5:1). 실로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던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신실한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한편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바벧론까지 선교 활동을 하다가 말년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안드레(* ) - 이름의 뜻이 '용감한 자', '남자' 등인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요 어부 출신으로서 성경에는 그렇게 두각(頭角)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막 13:3; 요 1:35-44; 6:8; 12:22). 특히 그의 활동중 두드러진 것은 그가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했다는 사실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구디아, 헬라, 소아시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A.D. 70년경 파트라에서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야고보, 요한(* ) - '발꿈치를 잡다'(창 25:26),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가 각각의 이름의 뜻이다. 이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께 각별히 인정받던 3대 제자에 속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기록에서 요한 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함으로써(행 12:2, A.D. 44년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참수당함) 그의 형제 요한 만큼의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출신이자 세베대의 아들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삯꾼을 둘만큼 부자였으며(막 1:20), 그 아내는 예수의 사역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27:55, 56; 눅 8:3). 그런제 12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또한 그의 가족이 대제사장 집안과 어떤 연계가 있었던 것은(요 18:15, 16) 아마도 세베대의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이어받은 듯한데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받은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은(막 3:17; 9:38-41; 눅 9:54-56) 그 별명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불같은 기질(氣質)을 반영해 준다. 여하튼 요한은 베드로와 각별한 우애를 다진 가운데 초대 교회의 한 모퉁이 돌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으며(눅 22:8; 요 18:15; 20:2-8; 행 3:1-4; 8:14; 갈 2:9),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에베소에 정착하여 선교, 교육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한편 그는 A.D.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때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해 넬바 황제때 에베소에 돌아와 지속적인 복음 사역을 감당하다가 트라얀 황제 때에 영면(永眠)함으로써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하여 폴리캅(Polycarp), 파피아스(Papias), 익나티우스(Ignatius)등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등 초대 교회의 인재 양성에 남다른 공헌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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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 , 필리포스) - 순수한 헬라명으로 그 뜻은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도 역시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랐으며(요 6:5-7; 12:21, 22; 14:8-14) 베드로와 같은 고향인 벱새다 출신이다(요 1:44). 그는 주로 헬라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한(요 12:20-22) 것으로 보아 적어도 헬라의 언어와 문화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다른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12제자 명단 중 제 2그룹의 첫번째에 언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게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A.D. 2세기 감독인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빌립이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에서 사역하다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바돌로매(* ) - 히브리 이름으로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이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 '나다나엘'과 동일시 되고 있다(Carr, Ewald, Meyer). (1) 나다나엘은 12제자와 관련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요 1:43-51; 21:2). (2)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데려왔다(요 1:43-46). (3) 사도들의 명단들에서 빌립과 바돌로매가 항상 연결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증거가 확실한 것이 아닐지라도 만일 바돌로매가 곧 나다나엘이라 한다면 그는 적어도 가나 출신이며(요 21:2), 예수께 칭찬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요 1:47). 한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애굽, 인도, 알마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도마(* ) - 도마는 '디두모'(Didymus, 요 11:16; 21:2)라고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서 '쌍동이'(Twins)를 의미한다. 실로 그는 회의론적 신앙인의 대명사로 통할만큼 의심이 많았지만, 그와 더불어 용기있고(요 11:16), 바른 신앙 고백자로도(요 20:28) 널리 알려졌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와 파르티아에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성 도마 교회'가 인도에 현존) 그곳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세리 마태(* , 맡다이오스 호 텔로네스) - 그의 본명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서론과 9:9 주석을 참조하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야코보스 호 알파이우) - 그는 '작은 야고보'로 불리어지는 자로서(막 15:4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된다. 한편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몸이 왜소한 야고보', '동생 야고보'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희박하다. 그러나 그가 만일 27:56; 막 16:1; 눅 24:10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본다면 적어도 그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때 다른 여인들과 그곳에 가까이 가 슬퍼했던 여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요 19:25에 언급된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가 곧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친족이라 보기도 한다(Eusebius).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명확히 확증지을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다대오(* , 닫다이오스) - 베자 사본에 따르면 '다대오'란 이름대신 '여자의 마음'이란 뜻인 '렙바이오스'(* )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대표적인 사본들(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Western)에는 본문과 같이 '다대오'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본서와 마가의 명단에 언급된 '다대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명단과 비교했을 때 그곳에 나온 '야고보의 형제(아들) 유다' (* , 유다스 야코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형제(아들)'라는 말이 없어 설왕 설래하고 있다. 그런데 유다서의 저자가 자신이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유 1:1), 만약 유다서 저자인 유다가 사도인 '야고보의 유다'와 동일 인물이라면 이는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된다. 반면에 혹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가 예수의 이복 형제이며 동시에 예수의 이복 형제인 야고보의 친 형제라면 '야고보의 유다'는 곧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된다. 한편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the beloved)를 의미하는 어근(語根)으로부터 유래하였다. 따라서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 유다' 즉 '유다 다대오'로 불리어졌을 것이며, 결국 이 명칭은 '가룟이 아닌 유다'(요 14:22)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일대기를 기술한 외경 '다대오전'에는 그가 시리아, 알마니아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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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인 시몬(* , 시몬 호 카나나이오스) - '가나안인'은 아람어로서 헬라식 표기로는 '젤로테스'(* )인데, 이 둘은 모두 '열심가, 열심당원'이라는 의미이다(눅 6:15; 행 1:13). 이로 보건대 그는 제자로 부름받기 전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정치 단체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이 확실하다. 한편 셀롯당은 가다라 출신 유다가 A.D.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한 집단으로서, 예루살렘 패망의 불씨를 당긴 유대 전쟁(Jewish War)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그 활동이 대단치는 않았던 것 같다.
가룟 유다(* ,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 - 이 가룟 유다의 아비는 '가룟 시몬'(Simon Iscariot)이다(요 6:71; 13:26). 한편 '가룟'이라는 이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1) '케리옷 출신 사람'(man of Kerioth)이라고 보고, 남쪽 유다의 한 지역인 가룟이라는 동네에서 그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2) 가룟은 열심당원들의 운동(movement)과 유사한 운동을 의미하는데 사용된 라틴어인 '시카리우스'(sicarius)의 음역이라는 설명이 있다. (3) 가룟은 '여리고의 사람'(man of Jericho)을 뜻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헬라어와 와전(訛傳)을 근거로 한 설명이다. (4) 가룟은 '거짓'(falsehood). '배신'(betrayal)을 뜻하는 아람어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C.C. Torrey). (5) '가룟 유다'는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염색공 유다'(Judas of the dyer)라는 견해가 있다(A. Ehrman), (6) 다섯번째 견해를 약간 수정하여 '머리가 빨간 유다'(Judas the redhead)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Albright). 이중 두번째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나 첫번째와 여섯번째 견해도 주의를 귀기울일만하다. 여하튼 이 유다는 12제자 중 회계를 맡고 있었으나 지나친 물욕(物慾)으로 인해 정직하지 못하였고(요 12:6; 13:29), 그 결과 그는 스승인 예수를 완악한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 주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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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길로도 - 이는 문자적으로 '이방인의 길을 통해서 떠나지 말라'이다. 이것은 결국 '이방인을 향해서 가지 말라'(Do not go in the direction of the Gentiles)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 같은 금지 명령은 어떤 민족적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영원적 엄명으로도 볼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한시적(限時的)명령으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 복음은 메시야의 탄생을 위임받은 바 있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파 되어야 했으며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훗날 예수께서 전세계에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임무를 맡기실 것이다(28:19; 행 1:8).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도 구원 역사의 순차성(順次性)을 역설한바 있다(롬 1:16; 2:9, 10). 실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온 인류에게 전파되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3; 사 49:6; 행 3:25).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 사마리아는 가나안 정복 당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분할되었던 지역으로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솔로몬 통치 이후 여로보암 때로부터 시작하여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패망 할 때까지(왕하 17:1-6, B.C. 722)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다. 그런데 정복자 살만에셀은 피지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이스라엘인을 포로로 끌고 가는 한편으로, 이민족(異民族)을 이곳에 대거 이주시켜 나머지 북이스라엘인과 통혼하게 함으로써 민족을 혼혈화시켰다(왕하 17:24). 그 결과 사마리아는 혈통과 문화와 종교에서까지 선민으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히브리 공동체에 끼이지 못하였으며, 포로기 이후 산발랏과 므낫세를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건축하였다(느 13:28). 이 성전은 B.C. 109년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곳을 성지(聖地)로 삼아 모세 오경을 근간으로 독특한 종교생활을 영위해 왔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합 족속이라고 경멸하였고 그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의 직통거리인 이 지역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왕래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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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 이는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Stendahl). 구약적 배경에서(레 50:6; 겔 34장) 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Hill). 예수는 이들 유대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다가 생명과 진리가 결여된 딴 길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9:36). 그런데 이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고 또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롬 1:16; 2:9)라는 선교 원칙을 준수하였다.
=====10:7
가면서 전파하여 - 이는 여행 중에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행하고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게 되므로 그 순간마다 그들에게 예수와 그의 구원의 능력을 선언해야 한다. 한편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케뤼쏘' (* )는 공적 차원에서 '널리 전하다', '선포하다'는 뜻으로서 마치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포고문(布告文)같이 긴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 , 케뤼그마)은 곧 주의 나라의 기습적인 도래였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이 선언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전파한 것이기도 하며(3:2), 또한 예수께서 친히 전파하신 말씀이기도 하다(4:17). 실로 유대인들은 바로 이 천국의 제 1차적 상속자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도래했으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천국이 지체하지 않고 구현될것이기 때문에 이 천국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들의 상속권은 이방 세계로 넘겨질 것이다(Quesnel).
=====10:8
병든 자를 고치며...귀신을 쫓아내되 - 이는 천국 도래를 실증적으로 확인시키는 네가지 이적으로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능력에 해당한다(1절). 한편 이 네 종류의 이적을 구분하면 (1) 신체적 치유(병든 자), (2) 존재론적 치유(죽은 자), (3) 종교.의식적 치유(문둥병자), (4) 영적.정신적 치유(귀신들린 자)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결국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능(1절)은 결함이 전혀 없는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능력이었다. 한편 '죽은 자를 살리라'는 이 명령은 대부분의 주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레기우스 사본 같은 2류 사본에는 1절 내용과의 조화를 위해 누락시키고 있다. 여하튼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 부활 이전에 죽은자를 살린 일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라는 권능의 명령을 예수 부활 이후에 전개될 제자들의 사명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행 9:36-41).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이 말의 원뜻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지켜야 할 대단히 주요한 원칙이다. 사실 복음 사역자들이 받은 복음과 권능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받은 것을 전하는 것으로 최상의 만족을 삼아야 했다. 사실 사역자는 재산을 모으거나 큰 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되며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타인에게 봉사하고서 그 대가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사역자가 굶주려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10절)은 마땅하지만 본문의 이 말씀은 거저 받은 복음의 권능을 사리 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오직 은혜로 받은 것을 은혜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10:9
전대에 - 이는 돈을 넣어 품속이나 허리춤에 넣고 다니는 돈주머니를 말한다. 이 전대는 의복의 일부로서 귀중한 것을 휴대하기 편하도록 만든 일종의 지갑과 같은 것이다.
금, 은, 동 - 로마나 헬라의 화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화폐 가치가 적은 헤롯의 화폐는 동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들은 모두 돈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가지지 말고 - 돈을 소유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전도 파송을 앞둔 주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수적이고도 한시적인 선교 방법이었다(눅 22:35, 3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복음 사역자는 돈을 탐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돈을 탐하여 마음에 두게 되면 죄의 유혹을 받게 되며 따라서 악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딤전 6:10) 복음 사역자는 이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당연히 그 보냄받는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부족함없이 주시리라는 것 또한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 명령은 물질적 욕구의 절제를 명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풍성한 후원을 약속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10:10
주머니 - 이것은 음식이나 식량을 가지고 다닐 때 쓰이는 것으로서 가죽이나 결이거친 천으로 만들어졌다. 제자들은 여행하는 도중에 식량 공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이런 주머니는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두 벌 옷 - 여행할 때는 반드시 갈아 입을 옷이 하나 더 필요하다. 더욱이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판 팔레스틴을 순회 전도해야 하는 제자들이 밖에서 밤을 지내야 할 경우에 입고 있는 옷 외의 다른 한 벌의 옷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주의 뜨거운 사랑의 후원을 받을 제자들에게 있어 '여분의 옷'은 분명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5:40).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그 당시 맨발로 다니는 것은 유대 전통에 이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신발 착용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명령은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것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부분을 '지팡이 외에는...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막 6:8, 9)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은 마치 서로 모순(矛盾)되어 보이는 것 같으나, 마가는 여행을 위해 제자들이 이미 여행할 차비를 마친 상태에서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준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 먹을 것 받는 것 - 이 어구는 제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 제자들의 생필품들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피전도자는 받은바 영적 은혜의 감사 표시로 전도자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줄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A.D. 100-120년 경에 기록된 '12사도훈'(Didache)에는 '여러분에게 온 주의 사도는 주님처럼 환영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도가 3일을 머물고자 한다면 그는 거짓 사도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나고자 할 때 여러분은 그가 다음 거처에 이를 때까지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돈을 요구하게 되면 그 자신이 스스로 거짓 사도임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녕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사역자들의 일을 방해할 수 없으며 두벌 옷이나 전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자들이 아무런 어려움이나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일꾼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열매를 허락하신다(고전 9:14; 갈 6:6; 딤전 5:17, 18).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한 일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일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Clement of Rome).
=====10:11
성이나 촌에 - 여기서 먼저 '성'(* , 포리스)이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달한 큰 도시를 의미하고, 이에 비해 '촌'(* , 코메)은 자연 발생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을 뜻한다. 이는 예수 제자들의 선교 대상지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방랑자들처럼 떠돌아 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합당한 자 - 이는 천국 메시지에 영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자(Homer A. Kent, Jr.)로서 복음 전파자들을 친절히 맞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순결한 영혼을 갖춘 자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윤리적으로도 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자로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자들은 자기가 머문 그곳을 기점으로 그 온 동네를 복음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경건하며 건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의 집에 머물러야 했던 것 같다. 떠나기까지...머물라 - 누가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눅 10:7)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는 것은 한 집으로 만족하지 않는 듯이 보이며 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 결국에는 복음사역의 가치를 떨어뜨려 복음 전파에 막중한 지장을 초래(招來)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10:12
평안하기를 빌라(* , 아스파사스데 아우텐) - 직역하면 단순히 '인사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은 '샬롬' (* ), 곧 '평화'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자들의 첫마디 인사가 '평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편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평화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의 인사말은 주로 '카이레인'(* , 기쁨, 은혜)이었다. 바울 서신서에는 이 양자를 모두 합한 인사, 즉 은혜와 평강을 동시에 묻는 인사말이 자주 등장한다(롬 1:7; 고전 1:3). 여하튼 주께서 이처럼 들어가는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경의를 표하고 또 그들을 정중하게 대하라는 명령이었던 것 같다. 복음 전파자라고 해서 사회 일상의 통념을 무시하고 무례한 행위를 할 권한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일반 사회인들보다 더욱 예절과 상식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10:13
그 집이 - 이는 가정이나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12절의 집과 같은 대상이다. 따라서 이 집은 복음 전도자가 머물러 유하기에 적절한 가정을 뜻하며 이 집의 가장(家長)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된 자이어야 한다.
합당하면 - 이는 그 집이 복음 전파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가리킨다.
거기 임할 것이요 - 제자들은 평안의 인사나 기도 또는 가르침 등을 통해 그 집에 행복과 번영 그리고 화평이 임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복음의 축복이 그들에게 부여되기를 기원(prayer)하였다. 그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순종할 때면 제자들이 한 평화의 기도는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관건(關鍵)인 것이다.
합당치 아니하면 - 이 말은 제자들이 머물러 유할 집이 복음을 기꺼워하지 않거나 또는 제자들이나 복음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 다윗은 원수들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한 바 있는데 이때 그의 기도가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자기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노래하였다(시 35:13). 제자들이 만나는 이에게 평안을 빌고 복음을 전할 때 만약 그들이 그 평안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그 평안과 복음을 통해 유익을 얻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복을 빈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빈 평안과 축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누구에게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족장 시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이미 말하여진 선한 축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체로 존재하여 결코 사장(死藏)될수 없고 그 성취의 순간까지 지속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믿어져왔다(창 27:33 ff; 사 45:23; 55:11). 따라서 누구든 타인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데 주저하거나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실로 타인의 평안을 원하지 않는 자는 주(主)의 제자되기에 적합치 않은 자이다.
=====10:14
영접도...아니하거든 - 예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축복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으로 저주를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물 한모금 주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를 떠나보내게 하는 것이며, 그들을 기쁘게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25:40). 실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입술과 인격을 통해 복 주기 원하신다.
그런데 그들이 복의 근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통로로 복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 이는 상대와의 관계 단절과 의식적 정결례를 상징하는 행위이다(느 5:13; 행 18:6).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문물(文物) 뿐만 아니라 먼지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이방인 지역에 갔다가 유대땅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그들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의식적 청결을 유지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를 영접치 않고 또 복음을 듣지도 않는 자들을 향한 이 먼지 떠는 행위는 그들이 참으로 구원의 복음과 무관한 자들로서 이교(異敎)적이고, 심히 부패해 있으며, 끝내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사 1:9; 눅 17:29; 벧후 2:6). 비시디아 안디옥을 전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바로 이같은 상징적 행위를 한 적이 있다(행 13:51).
=====10:15
내가 진실로 - 예수께서는 이런 형식으로 당신의 교훈의 각 마디를 종결 지으시며, 또한 주의를 환기시키셨다(23, 42절).
심판 날에 - 여기서 심판 날은 복음과 그 사역자들을 배척한 자들이 맞을 멸망의 순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날을 가리킨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독한 범죄로 인해 아브라함 당시 여호와가 보내신 불과 유황에 의해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으며(창 19장), 그 이후부터 모든 부패와 최후 심판의 대명사가 되었다(신 29:23; 사 1:9; 3:9; 렘 50:40; 유 1:7).
견디기 쉬우리라 - 앞에 언급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사역을 방해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보다는 약한, 단지 예시적(豫示的) 기능을 할 뿐이다.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한 죄가 이처럼 무서운 것이라면 복음 그 자체를 배척한 자들의 심판(11:20; 눅 12:47) 또 얼마나 무서운것이 되겠는가? 이처럼 복음은 결과론적인 이중성을 띠고 있다. 즉 복음이 선포된 후에는 영생과 축복, 아니면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 뒤따른다.
=====10:16
보라(* , 이두) -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 불변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제시되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 원문에는 '나'(* ,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를 파송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권자로 삼아 파송한다'는 뜻의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는 제자들이 위험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그들을 파견(dispatch)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보내시기에 가능했다.
양을 이리 가운데 - 이는 온순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의 사역자들인 제자들을 진리의 복음에 대해서 끝없이 반항하고 냉정하며 잔인한 세상으로 파견함을 가리킨다(7:15; 요 10:12; 행 20:2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때문에 온갖 핍박과 거절을 당하고 생명까지 노략질 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과 함께 고통과 박해까지도 감내(endurance)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 2: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현상적으로는 복음의 원수인 이리가 양을 찢어 생명을 노략(擄掠)질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파수꾼인 양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뱀같이 지혜롭고 - 이 말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대 근동 지역의 속담이었다. 성경에서도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창 3:1; 고후 11:3). 또한 애굽인들의 상형 문자판을 보면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뱀과 같이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신 까닭은 신중한 분별력을 지녀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뱀이란 징그럽긴 하지만 자기가 처한 위험 속을 능란하고 또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아주 기묘한 동물이며, 이런 면에서는 뱀을 당할 동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뱀과 같이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교(計巧)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로움이 순박감을 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쉽사리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순결'해야 했다.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먼저 '순결하라'(* , 아켈라이오이)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 )와 '섞다'는 뜻의 '케란뉘미'(* )의 합성어로서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솔직, 순진함을 뜻한다. 한편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둘기는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호 7:11). 사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양자를 조화시켜 뱀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은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Midrash)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넘어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하셨다.
=====10:17
사람들을 삼가라 - 먼저 '삼가라'(* , 프로세케테)란 말은 '...로부터 어져 마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이리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불필요하게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 가지 말고 분별력과 지혜를 적절히 활용하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이란 불신자(Calvin, Weiss) 또는 적극적인 박해자(Bruce)를 가리킨다(33절). 저희가...공회에 - '공회'를 뜻하는 원어 '쉬네드리아'(* )는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인 '쉬네드리온' (* )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본문의 '공회'는 지방의회들(local councils)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 당시 이 지방 의회들은 공공 질서와 치안(治安) 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신 16:18). 따라서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 지방 의회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본문의 '저희'란 말은 '공회'란 말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 동족 유대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저희 회당에서 - 어떤 이들은 '저희 회당'이란 말 속에는 교회와 회당의 개념이 구분되어 있으므로 이 말은 예수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훗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가 시작된 뒤 마태에 의해 편집되면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저희'란 말은 비난의 뉘앙스(nuance)를 풍기는 것인 까닭에 이것 역시 이 구절이 훗날 삽입된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참 신앙을 버린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해서 비난의 어감이 담긴 '저희'란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특히 마태는 구약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예수 또는 본서 기자인 마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반역과 진리 거부를 일삼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용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채찍질 하리라 - 채찍질이란 것은 신약성경에서 흔히 언급되는 체형(體刑)의 일부로서 모세의 율법에는 채찍질의 수가 40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신 25:1-3). 이 같은 체형을 선고 받은 죄수는 재판관이 보는 앞에서 땅 바닥에 엎드려 누워야 했고 그런 다음 그의 등에 채찍질이 가하여졌다. 채찍질을 가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매는 회초리와 같은 막대기였는데 그후에는 막대기에 가죽끈이 부착된 도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채찍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가죽끈에다 쇠조각 같은 것을 박아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대기에 가죽끈을 세줄로 달아 놓고 한 번에 세 대의 채찍질로 계산하여, 13번 때려 도합 39번의 채찍질로서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매질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다(고후 11:24). 한편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처벌이 넓은 의미의 구타(beating)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채찍질(flogging)인 것을 볼 때,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협적 핍박은 동족의 비난이나 폭력보다 사법적 절차에 이해 내려지는 형벌이 더욱 컸던 것 같다(Hare). 여하튼 회당에서 회당 회원들이 채찍질하는 것이 빈번했음을 잘 알고 계셨던(23:34; 행 22:19; 고후 11:24, 25)예수는 교회가 조성(助成)되어 회당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그의 제자들이 채찍질당할 것을 예견하셨다.
=====10:18
총독들과 임금들 - 여기서 총독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등급에 위치한 통치자들이나 지방 행정 장관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갈리오(Gallio), 베스도(Festus), 가리사랴의 벧릭스(행 23:26)나 데살로니가의 읍장(행 17:6)등과 같은 이들을 생각할 수 있고, 왕들이란 팔레스틴의 통치자들인 분봉왕(행 12;1)이나 로마제국의 비호(庇護) 아래 있는 지방 토호(yeoman) 세력들 및 로마 황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17절의 종교지도자들과 비교되는 세속의 통치자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표현들을 통해서 제자들이 세상 법정에도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복음이 갈릴리 지역과 유대 민족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이와 비례해서 이들에 대한 반대 세력들 역시 그만큼 증가할 것이란 점도 예상할 수 있다.
끌려가리니 - 예수께서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알고 계셨다. 그의 예언에 따라 베드로는 네로 황제 앞에 끌려갔던 것으로 보이며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 앞에,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여러 다른 임금들 앞에 끌려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 여기서 '저희'라고 하는것은 유대인을 지칭한 것이라기 보다는 복음 사역자들을 끌고 간 총독과 임금들로 보아야겠다. 여기서도 다시 암시되어 있다시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리란 것이 명확하게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증거가 되게 - 제자들은 동족들의 교권주의적, 문화적 핍박과 권력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통해 복음, 즉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와 구세주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폭발적이고도 생동감 있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순교는 곧 복음의 위대성과 진리의 무한한 생명력을 확증해 주는 최고, 최선의 증표(證票)가 될 것이다.
=====10:19
넘겨 줄 때에 - 넘겨 주는 주체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유대 지도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즉 훗날에 가서 주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복음을 곳곳에 전파했을 때 이 복음을 가장 방해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또 이들의 고소, 고발에 의해 제자들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어떻게...말할까 염려치 말라 - 근심과 걱정, 그리고 염려와 불안 등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치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당면한 위기를 처리하고자 할 때 나오는 것이다. 즉 미리 앞서 변명거리를 준비하는 근심어린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순수성에 위선과 허위의 탈을 덧씌우는 위험성을 낳게 한다. 따라서 답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인 동시에 본인으로서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순결한 영혼을 보존하는 일이된다.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처럼 그 염려의 원인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6:25).
그 때에 -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in that same, KJV)이다. 이는 결국 인간편에서 준비하기 전에 이미 그 인간의 대변자되신 성령께서 모든 답변 준비를 완벽히 해두고 계셨음을 암시해 준다.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 이는 고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가장 시기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이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나 서민 출신으로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고 또 위풍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위층의 세련된 관리나 총독 또는 임금 앞에 섰을 경우 도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대단히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10:20
너희가 아니라 - 이 말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나 이성적 판단 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말은 복음의 변증(辨證)과 신앙의 순수를 보존하는 일이 인간의 자력(自力)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고별 강화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 사역을 진척시켜나가게 되리라고 에언하셨던 바가 있다. 그러나 고별 강화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본문은 주의 제자 당대에만 적용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은 고별 강화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현저하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오순절 이후에 행해질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오순절 이전 주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행하심으로써 예수를 증거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그들의 처지를 안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핑계로 복음 사역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 이는 성령의 인격성과 사도적 기록의 영감성을 대변해 주는 구절이다. 실로 성령께서는 구술(口述)과 기술(記述)을 통해 복음 증거자들의 내면에 인격적으로 임재하셔서 충만한 영감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요 15:26, 27).
너희 아버지의 성령 - 예수께서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가리켜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라고 지칭했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녀로서의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아버지로서의 보호로 인해 그를 더욱 신뢰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 신자들 역시 하나님을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혈연 관게에 있고, 나를 조성(造成)하신 '나의 아버지', 나의 고통과 죄악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는 '나의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하는 이는 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행 4:8; 13:9; 고후 13:3). 실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든 인격들 속에 영원히 안주(安住)하시며(요 14:16, 17), 또한 환경과 처지를 따라 지혜와 선한 변증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삼위 하나님의 유기적 역사를 통해 보호하시는 은혜이다. 즉 성부 하나님의 부권적 보호의 약속과 성자 하나님의 그 약속에의 보증 및 성령의 실제적 보호와 후원이 그것이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아버지의 성령을 단순히 '성령'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 말이며, 성령의 호칭에는 이 외에 그리스도의 영(롬 8:9), 주의 영, 하나님의 신(사 11:2) 등이 있다.
=====10:21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 제자들에게 미칠 박해의 양상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지경, 곧 혈연관계에서 조차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실로 종교와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가장 원초적 생활 공동체인 가족 상호간에 반목(反目)과 적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익히 체험해온 바이다. 실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란 참 종교를 대적할 때는 모든 인륜의 사슬을 끊어버릴 만큼 가공할 만한 악을 품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의 갈등 상황은 혈육으로 치장된 피비린내 나는 영적인 싸움으로서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원인은 바로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데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죽게 하리라 - 유대 묵시 문학에는(4 Ezra5:9; Jub23:19, 2 Baruch 70:3) 말세에 가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리란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부분들이 흔히 발견된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아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5, 6)고 예언하였다. 한편 미가의 예언과 맥을 같이하는 예수의 이 예언은 실제로 네로와 같은 로마의 폭군하에서 복음을 믿는 신자들에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과 신자들은 화형(火刑)을 당하는 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사자의 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적 혈연보다는 영적으로 결합된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혈연이 절대적으로 더 가치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악의에 차서 복음을 핍박하는 가족들의 만류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과 신앙의 지조(志操)를 지켰던 것이다.
=====10:22
내 이름을 인하여(* , 디아 토 오노마 무) -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벧전 4:14), 또는 '그리스도로 인해'(5:10-12)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진정 제자들이 세상 관원(官員)과 자기 가족들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분의 삶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배척받은 데 그 근원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분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 이 같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 개인의 실수로 인한 고난과는 구별된다.
모든 사람에게 - 여기의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한 명도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all men without distinction), 곧 인종, 피부색,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서는 좀더 축소된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이란 박해 사건과 관계된 모든 사람을 가리키며 제자들을 핍박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로 인간의 마음이란것은 본질상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부패된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인간은 어느 위치,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모두다 멸망치 않을 수없는 것이며(롬 3:10) 또 그렇기 때문에 의(justice)를 향하여서는 부패한 본성에 따라 분노와 적의를 품는 것이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 '나중'이란 말은 생명이 끝날 때까지, 즉 길든 짧든 간에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될 때까지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나중'이란 말은 다른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칼빈(Calvin)은 이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지배하는 때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을(Clarke), 그리고 또 어떤 학자들은 세상 끝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Beza, Weiss)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전체 문맥상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를 생명이 끝날 때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요구될 필요가 없는 때까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께 충성하려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 )는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극한 고난 속에서도 배교(背敎)하지 않고 끝끝내 예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신실성과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의심없이 믿는 행위이다(갈 6:9).
구원을 얻으리라 -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의 획득이 약속되었다(눅 21:19). 즉 예수께서는 육체적 생명의 잠정적 손실에 대한 전인격적 생명의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신 것이다. 정녕 신앙인은 예수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상실케 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와 더불어 완전한 회복과 보존을 받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10:23
핍박하거든...피하라 - 이 말은 이기적인 자기 보존을 장려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할 목적으로 합리적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피하라'고 하는 말은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는 권고이지만 이는 오히려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또 사려깊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미련한 아집과 우직한 자아(自我)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끝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주를 부인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곳으로 피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주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잃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소유된 자의 올바른 생사관(生死觀)이다(롬 14:7, 8).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 이는 에수께서 선언하신 바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일어나기까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방문하지는 못랄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때부터 단지 40년후에 발생하기 때문에 다음 어구에 언급되는 인자의 오심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석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것을 지리적 측면에서라기 보다 복음 선교의 충만성으로 이해하여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충분히 전해져서 그들이 개종하게 되는 때까지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인자가 오리라 - 이 어구는 대단히 난해한 어구 중의 하나로서 이에 대한 몇가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자의 오심은 12제자들을 파송한 후 주께서 그들을 뒤따라가서 그들과 합류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였다(J. Dupont). (2) 이는 예수의 부활이나 또는 예수가 메시야로 널리 인정될 때를 가리킨다(Sabourin). (3) 인자의 오심은 곧 성령의 오심을 말한다(Chrysostom, Calvin). (4)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Agathangelus). (5) 예수 당신이 지상에 있을 때 종말이 임한다고 착각하여 잘못 내뱉은 말이다(Schweitzer). (6) 이는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한다(Walvoord). (7) 인자의 오심은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France). 이상과 같은 여러 학설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다들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고 보여지나 본문의 문맥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자의 오심'을 '천국의 도래(到來)'와 연결시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즉 인자의 임하심은, 곧 천국의 임재를 뜻하며 이 천국은 현재 이미 임해 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로 종말 때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를 메시야로 깨닫고 영접하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에게 그 실패로 인한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거듭 말했던 예수의 경고는 바로 이 '인자의 오심'과 관계가 있다(Feuilet). 이런 견지에서 예수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비슷한 입장에 있으나 그분의 경고는 그 선지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자신이 종말론적인 심판자이며, 메시야의 통치는 이제 축복과 진노 속에서 모두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8:11, 12; 21:31, 32). 결론적으로 본절의 '인자의 오심'은 거듭 경고된 심판이 마침내 천국이 임함으로써 유대인에게 떨어지고야마는 종말론적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성전에서의 구약적 예배와 혈통적 선민 의식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새 포도주는 필연적으로 새 부대에 담겨져야 했다(9:16, 17). 이로써 천국은 이제 그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5:17-48).
=====10: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 이 어구는 그당시 유행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미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분명하다. 사실 제자가 선생 이상의 지식을 얻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제자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도리는 불변하며 제자들은 항상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선생인 자신이 온갖 욕설과 핍박을 받는다면 적어도 너희는 더 큰 핍박을 각오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냐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본문의 이 격언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자는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전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종이 그 상전보다 - 이 말은 앞의 문구와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격언의 말씀을 통해서 윗사람이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면 그 아랫 사람은 두말할나위 없다는 점을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이 당한 고난을 제자들도 똑같이 당했으면 당했지 결코 더 나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10:25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서 이 부분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이라는 차원에서 당신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음을 역설하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생이 받는 박해와 고난 보다는 제자나 종이 받는 고통이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을 것이므로, 따라서 선생의 고통만큼만 되어도 만족할 것이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12:24). 예수는 이들의 빈정거리는 어투을 역이용(逆利用)하셔서 자신을 집 주인으로 또 제자들을 그 집 사람으로 비유하시면서, 집 주인을 '바알세불'로 비난한 그들이 제자들은 더욱 더럽고 악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사단에 해당되는 명칭인데(12:24-27; 막 3:22-26; 눅 11:18, 19) 다른 곳에는 바알세붑(왕하 1:2, 3, 6)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말의 어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흔히 이방 에그론의 신인(왕하 1:16) '파리대왕'이란 뜻을 가진 구약의 '바알세붑'(* )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똥의 왕' 또는 '교만의 왕'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혹자는(E.C.B. McLaurin) 이말이 '집의 왕'(head of the house)을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데스포테스'(* )를 직역한 것으로도 본다. 여하튼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관하는 집 주인을 고의적으로 마귀 집안의 우두머리로 전락(fall)시킨 것으로서 이는 참으로 괘씸한 신성 모독의 범죄였던 것이다.
선생이 이 정도의 모욕을 받았다면 하물며 그 제자는 과연 어떤 욕을 당하게 될 것인가?=====10:26
그런즉 -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에 대한 결과절을 유도(guiding out)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승이 핍박받는다면 제자들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므로 두려워 말라는 뜻으로 다음의 어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앞 어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문장을 도입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다음 어구의 이유, 즉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숨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저희를 - 이것은 접속사 '그런즉'이란 말의 의미와 관계없이 핍박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말씀으로서 세번씩이나(26, 28, 31절) 강조되어 있다. 이는 완전한 보호와 위로에의 약속인 동시에 제자들의 험난한 핍박이 필연(必然)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이러한 분부를 하신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즉 박해자들이 설령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하여도 그들은 결코 제자들의 영혼까지는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어떠한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불신의 세계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가서 그들을 정복해야 한다. 한편 두려움이란 것은 사단이 신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준비해 둔 무기들 중의 하나로서 사단은 언제나 신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한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 먼저 '드러나다'란 뜻의 헬라어 '아포칼류토'(* )는 원래 '벌거 벗기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깊이 숨겨둔 인간의 가장 수치스런 죄악까지도 낱낱이 파헤치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의 이 어구는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흔히 통용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막 4:22; 눅 8:17; 12:2). 즉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격언을 통해서 제자들을 격려하시면서 설령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무죄함을 입증시켜주실 것이고 또 진실을 밝혀주실 것임을 설명하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전 12:14; 롬 2:6; 골 3:3, 4; 계 20:12, 13).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이 말 역시 앞 어구와 대구를 이루는 동일한 표현이다. 주님의 이 격언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언제인가는 이해될 것이고 또 그들이 당한 고난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확신하에서 기꺼이 멸시 천대를 받았고 또 핍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0:27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 - 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주의 계시(revelation)의 발전과정 중 그 시초에 해당하는 묘사이다. 한편 이것은 신비스러운 이상한 밀의(密意) 교리로 볼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아무도 모르게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진리, 즉 주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제자들에게만 비유와 같은 숨겨진 말로 가르치신 비밀스러운 교훈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제자들이 이를 전파하기까지는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광명한 데서 말하며 - 예수로부터 사적인 교육이나 은거(隱居)된 언어로 전해받은 것을 아무런 두려움없이 공개적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선포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귓속으로 듣는 것을 - 유대 율법 학자들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할 때 가운데 통역자를 두어 그를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통역자의 귀에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삭이듯이 전달했으며, 이 통역자는 히브리어로 율법에 대해 들은 설명을 대중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큰 소리로 외쳤는데,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이미 관례화되어 있던 이러한 방법을 따라 은밀한 방법으로 전달된 진리를 제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하셨던 것이 분명하다(Lightfoot, 'Hor. Hebr.' 4:23; Talmud. Bab., 'Berach'., 22a).
집 위에서 전파하라 - 유대의 집 지붕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평평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바람을 쏘이거나 기도 또는 묵상 등을 하는데 이용했다(행 10:9). 이사야는 모압에 대한 심판의 에언을 하면서 모압 사람들이 지붕위에서 통곡하리라고 하였으며(사 15:3), 예레미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자손이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였음을 지적하였다(렘 32:29). 그리고 회당의 관리는 안식일 전날 밤에는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신호로서 대단히 높은 집의 지붕 위에서 나팔을 여섯번 불었는데, 예수께서는 아마도 이 같은 안식일 준비 나팔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셨던 것같다(Lightfoot). 여기서 잠시, 안식일 준비를 알리는 6번의 나팔 중에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나팔은 밭일을 중단하라는 신호이며, 두번째 나팔은 성(城) 중에서의 작업을 멈추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번째 나팔은 안식일 촛불을 켜라는 신호였다. 여하튼 본문을 살필 때 제자들은 예수보다 더 광범위한 공중(公衆) 전도의 책임을 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먼저 은밀히 개인적으로 가르쳐야만 했는데, 제자들은 에수의 부활 전까지만해도 그 가르침의 대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요 16:12-15).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마치 봇물이 터진 저수지처럼 강력한 음성과 몸짓으로 공개적인 선포 사역에 주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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