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여호와의 말씀이...가라사대 - 이 표현이 계속 반복되어 언급되는 것은 에스겔의 예언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적으로 보여준다. 본장에서도 하나님은 다른 몇몇 부분에서처럼 에스겔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하여 예루살렘 거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신다(4:1-17;5:1-4;12:1-15).
=====15:2
포도나무가...나은 것이 무엇이랴 - 포도나무는 그 모양과 자태가 별볼일 없으며 그 꽃도 다른 화려한 꽃들에 비해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제공해 줌으로 경작자에게 유익과 기쁨을 준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포도나무를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돌려야 할 이스라엘 족속으로 흔히 비유하고 있다(창 49:22;신 32:32;시 80:8-16;사 5:1-7;렘 2:21;호 10:1).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비유되고 있다(요 15:1-7). 그러나 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에 그 나무는 용도 면에서 거의 쓸모없다. 본 구절에서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과 그 결과에 대해 지적하시기 위해 포도나무의 유익성이 무엇인지 반문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본 구절은 포도나무 비유의 실체인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지 못하여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유용하지 못하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무엇이랴 - 본 구절을 근거로 혹자는 이 포도나무가 포도원에서 재배되는 것이 아니라 들에서 자라는 들포도나무라고 진술한다(Wycliffe). 포도나무가 포도원에서 자라지 않고 살림 가운데 자란다는 것은 그것이 들포도나무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 들포도나무의 볼품없고 뒤틀려 자라는 가지는 숲 속의 다른 훌륭한 원목으로 자라는 나무들과 좋은 대조를 보여준다(Cooke). 그리고 들포도나무에서 맺히는 들포도도 재배 포도보다 훨씬 가치가 없다(사 5:4). 따라서 이 표현도 앞 구절처럼 들포도나무의 무가치함을 지적하고 있다.
=====15:3
그 나무를 가지고...제조할 수 있겠느냐 - 이는 들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 이상 그것으로부터는 집 등을 짓기 위한 재목으로도 전혀 사용될 수 없디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 성경에서는 '못'에 대해 크게 두 종류, 곧 나무 못과 금속 못이 언급된다. 여기서는 못이 전자의 의미로 언급되었으며 대상 22:3;대하 3:9 등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언급되었다. 포도나무 가지로는 이 못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가 아주 사소한 것도 만들 수 없는 무익한 나무임을 상징한다.
=====15:4'
히네'(* )가 첨가되어 있다. 이 말은 놀람 또는 감탄의 느낌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이 감탄사가 본 구절 앞머리에 언급된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써 재목으로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포도나무가 단지 불에 던져지는 화목의 존재로서 전락된 것에 대한 비참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족속을 상징하는 바 그들의 비극성을 드러내 준다. 한편 '불'이란 단순히 나무나 짚 그리고 풀등을 사르는 물리적 차원에서의 불을 뜻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포오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 족속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1:4 참조).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족속을 당신의 진노로 심판하심을 암시한다.
두 끝을 사르고...태웠으며 - '사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켈라'(* )는 '먹다', '삼키다', '태워버리다'의 뜻을 갖는다. 이는 불로서 온전히 살라 소멸시킴을 가리킨다. 반면 '태웠으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하르'(* )는 본래 '녹이다', '태우다' 등의 뜻을 지니지만 '아켈라'와는 달리 어떤 것을 불로서 태우되 온전히 없애기보다는 반쯤 태우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포도나무의 양끝이 태워 없어지고 그 가운데도 반쯤 타서 그 나무가 전혀 쓸모 없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의 '두 끝'이란 이스라엘의 두 왕국, 즉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붕괴된 북왕국 이스라엘과 B.C. 586년에 멸망된 남왕국 유다를, 그리고 '그 가운데'란 유다의 지도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된 예루살렘 성읍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고 본다(Carley, Lange).
=====15: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합당하겠느냐 - 히브리어 본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도 4절의 경우처럼 놀람이나 감탄을 나타내는 감탄사 '히네'(* )로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하는 바는 4절과 약간 다르다. 4절에서는 그 감탄사가 단지 화목(火木)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는 포도나무의 비참성이 상징하는 것처럼 심판의 불에 처해질 이스라엘 족속의 비극성과 관련하여 언급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것이 불에 살라진 포도나무의 무용성, 즉 심판의 불에 살라지고 타게 될 이스라엘 족속의 무가치성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15:6
본절은 2-5절에 언급된 비유의 실제적인 의미를 하나님께서 직접 밝히시는 내용이다. 구약적 의미에서 비유란 지혜의 가르침이나 교훈 또는 경고 등을 보다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전하고 가르쳐 주기 위해 주위의 일상적인 사실을 예증(例證)으로서 표현해주는 것을 말한다(삼하 12:1-4;잠 6:7-11;전 9:13-16).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본절에서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다 실감있게 전하고 계신다.
=====15:7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 나타티 에트 파니 바헴) - 히브리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본 구절은 '내가 나의 얼굴을 그들에 대(항)하여 둘 것이다'(I will set my face against them, NIV, RSV)의 뜻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향하신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사람 또는 대상에 대해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을 지닌다(시 13:1;22:24;31:16;42:5;80:3).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신다는 뜻을 나타낸다(시 34:16;90:8;벧전 3:12). 본 구절에서 그것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불의하고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은 예루살렘 거민에게 공의의 진노로 대항하시사 심판하신다.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사르리니 -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신적 의지가 표명된 이상 이스라엘 족속의 그 어떤 도피 수단이나 노력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홀로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계 19:16)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불의로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벌을 받는 자는 그것을 대항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말고 겸손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을 인정하고 감당하며 한편으로는 회개해야만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의 진노를 끝내시고 용서해준신다(레 26:40-46;잠 28:13;요일 1:9).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을 핵심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그들이 징계를 통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회개하며 돌아가게 됨을 가리킨다(6:7 참조).
=====15:8
내가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 6:14;12:19 주석을 참조하라.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 '범법함이니라'(* , 마알루)는 특별히 제사장 직분과 관련하여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서 14:13에서는 '불법하여'로 번역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말씀, 즉 율법을 지켜야 할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을 어김으로써 스스로 언약의 파기자가 되었으며 결국 그 율법의 예언대로 징벌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레 26:14-39;신 28:15-68).
두 가지 징조(12:1-20)와 다섯 개의 메시지(12:21-14:23)를 준 다음에 에스겔은 이
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보여주는 일련의 비유들을 기술한다(15-17장).
이중에서 첫 번째 비유에 해당되는 본장은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비유로서 이스라엘의
우월 의식을 불식시키고 전적으로 무익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당시 이스라
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 의식에 빠져 배도와 반역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교만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포도나무의 쓸모 없음을 부각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돌보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은 타민족에 비해 내세울 것이 하
나도 없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시 80:8;사 5:1,2;렘 2:21).
이러한 본장은 (1) 쓸모없는 포도나무가 버려지는 것의 당연함을 기술하는 전반부
(1-5절), (2) 예루살렘이 포도나무처럼 버려질 것을 예언하는 후반부(6-8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런 내용을 통하여 본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죄악을 일삼는
이스라엘 족속은 반드시 멸망하게 됨을 생생하게 지시하고 있다.
한편, 본장은 전 단락(14:12-23)처럼 교훈적으로 기록되지 않고 비유적 표현을 사
용하고 있다. 이처럼 우회적으로 충고와 권면을 하는 이유는 일상적인 평범한 말과 차
별성을 두어 긴장과 주의를 부러일으키려는 의도이다.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도 청중들
에게 강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우화를 사용하곤 했다(사 5:1-12;28:26-28;암 5:19).
또한, 본장은 포도나무의 가치를 열매로 측정하지 않고 나무의 재질로 평가한다(3
절). 이러한 시각은 성경에서 매우 독특하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질책할 때, 아직 열매를 맺지 못했다거나 모든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썩고 비틀어지고 익지 않은 열매를 맺었음을 부각시켰다(사 5:1-7;호 10:1). 반
면에 본장은 나무의 질을 통해 포도나무의 무용성을 드러낸다. 더구나 불에 타버린 포
도나무의 무가치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4절). 이와 같은 비유를 통해 저자
는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스라엘 족속의 교만함을
공박하며 겸손하게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1.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비유(15:1-5)
본 단락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으므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만, 나무 자체
는 다른 나무와 비교할 때 작고 보잘것 없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
여 선지자는 만약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다면 유다 민족은 타민족에 비해 전혀 내세울
것이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실 하나님은 종종 이스라엘 족속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설명하셨다(17:6-10;
창 49:22;신 32:32;시 80:8-16;사 5:1-7;렘 2:21;호 10:1).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이스
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다른 이방 민족들
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내 아들, 내 장자'(출 4:22)라고 하셨으
며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사 43:7)라고 언급하셨다.
그런데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온갖 압제와 살육을 자행했으며
(7:23;11:6), 우상 숭배의 가증한 범죄를 행하였다(8:3-17). 이런 상황에서 하나은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2절),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
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3,4절)고 지적하심으로써 포도나무가 하나님을 벗어날 경우에는 무가치하
고 무익한 존재로 전락하게 됨을 알려주고 있다.
포도나무의 좋은 특징은 그 꽃이나 나무의 우아함 또는 목재로서의 유용성 등에 있
에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비교할 때 포도나무는 전혀 가치가 없는 존재일 뿐이다.
오직 포도나무의 특징은 포도 열매를 풍성히 맺는 데에 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주렁
주렁 맺을 때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때에는
쓸모없는 존재로 되어 결국에는 자불에 던져지는 땔감으로 전락되게 도니다. 마찬가지
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영적 열매를
풍성히 맺을 때만 가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들이 자신의 존재를 과대
평가하여 우월 의식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사명을 망각할 때는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 국내에서 활동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
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인간은 본질
상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로서(엡 2:3;골 1:21)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전 15:10. (2) 인간은 조금 성공하면 교만해질 우려가 있다. 그
러나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반드시 넘어지게 되므로(고전 10:12) 항상 조심해야 한
다.(3) 성도는 말씀과 성령을 따름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23;엡
5:8,9).
* 구약에 나타난 비유의 의미.
구약 성경에서 '비유'란 말은 그리 흔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 말은 시편에 두번己
(시 49:4;78:2), 잠언에 한번(잠 1:6), 에스겔서에 네 번(17:2,12;20:49;24:3), 호세
아서에서 한 번(12:10) 등 총 8번 언급된다. 이중에서 잠 1:6의 '멜리차'(* ,
풍차, 경구)와 호 12:10의 '다마'(* ,닮음, 같음)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솰'(*
,통치하다, 다스리다, 지배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정신적인) 우월성'이란 뜻을
갖으나 또 한편으로는 '유사함', '비슷함', '비교', '비유', '속담', '잠언' 등 다양
한 뜻을 내포한다. 그리고 흔히 구약에서 '비유'(* ,마솰)란 말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이 '마솰'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흔히 유행되는 속담이나 잠언
의 뜻을 가리키는 경우에 쓰이기도 했으며(12:22,23;16:44;18:2,3;삼상 10:12;24:13)
어떤 심오한 가르침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욥 27:1;29:1;시 49:4;78:2). 특히
이중에서 속담으로 쓰일 경우에는 종종 조롱이나 경멸의 뜻을 함축하는 말로 쓰였다
(14:8;신 28:37;왕상 9:7;대하 7:20).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신탁
(信託)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민 23:7,18;24:3,15,20,21,23). 다시 말하면 이 '마솰'
이란 말은 구약 시대에서 일상 생활 가운데서 유행되어지는 속담, 잠언의 뜻으로 사용
되나 또 한편으로는 지혜로운 현자(賢者)들이 가르치는 심오한 가르침, 교훈의 뜻을
함축하는 말, 신적 계시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 말은 어떤 낯익은 대상을 비유 또는 비교의 상대로 삼아 참된 의미를 돌출
시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는 비유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낯익은 대상, 상황 등을 통하여 진리를 보다 생생하고
실감있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특히 성경에서 이 비유는 거의 대부분이 도덕적 또는 신
앙적인 교훈의 뜻을 함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비유 중의 하나는 삿 9:8-15자에 나타나는 나무들의 우화에
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분수를 넘어 과욕까에 빠지는 자의 어리석음을 잘
나타내 주는 예이다. 이 외에도 대표적인 비유로는 나단 선지자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삼하 12:1-4), 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이 말한 가시나무와 백향목의 이야기(왕하
14:9), 이사야 선지자의 포도원 이야기(사 5:1-6), 에스겔 선지자의 독수리와 포도나
무 이야기(17:3-10), 아모스 선지자의 다림줄 이야기(암 7:7, 8) 등이 있다.
2. 예루살렘 거민의 심판(15:6-8)
전 단락(1-5절)에서는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심판을 비유적인 형식에 의해 다루었
다. 특히 포도나무의 재질에 근거한 무가치성, 무익성을 지적하면서(2,3절0 본질적으
로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4절) 언급하였다. 그러나 본 단락은 전 단락의 비
유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으로서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불사름이란 표현으로 언급
하면서(6,7절), (2) 예루사렘 거민들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결론적으로 설
명하고 있다(8절).
이상과 같은 본 단락은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을 잘 보여준
다. 하나님은 '내(하나님)가 그들은(이스라엘 족속) 대적한즉'(7a절)이라고 말씀하신
다. 이 말은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나타티 에트 파니 바헴'(*
)으로서 '내가 나의 얼굴을 그들을 대하여 둘 것이나'(I will place may face
against them)란 뜻이다. 원래 '얼굴'이란 단어는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의 호의, 자비,
구원 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시 13:1;27:9;42:5;105:4),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
를 나타낸다(시 51:9; 벧전 3:12). 그런데 본문에서는 후자의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들에 대하여 은혜와 긍휼, 축복 등을 베푸시지 않고 거
룩한 분노를 발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창 17:2-14)을 맺으신 후 이스라엘 족속을 '아들'
(출 4:22), '기업의 백성'(신 4:20;시 33:12), '양'(시 78:52;100:3) 등으로 삼으셨
고, 친히 '아버지'(신 32:6), '남편'(사 54:5) 등이 되셨다. 그리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시었다(신 32:10). 그런데 언약 백성은
계속해서 반역을 거듭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언약적 저주의 일환으로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는 것이다. 특히 본 단락에 나타난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
르리니'(7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절대성 및 참혹성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거
민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악은 심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도를 떠난 백성
에게 철저한 파멸을 주신다. 이것은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이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됨으로 성취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죄가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고나계를 악화시키는 주범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죄는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사망을 가져오며(롬 6:23),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게 만든다(사 59:2). 또한 성도들로 하여금 괴롭고 고통스럽게 하며(사 43:24) 형통치 못하게 하고(잠 28:13) 욕되게 한다(잠 14:34). 더 나아가서 성도들의 영적 부요를 잠식하며(잠 13:23), 고귀한 성도들로 하여금 천하고 비참하게 만든다(애 4:2).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는 말씀을 기억하며 정결하게 생활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가라사대 - 이 표현이 계속 반복되어 언급되는 것은 에스겔의 예언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적으로 보여준다. 본장에서도 하나님은 다른 몇몇 부분에서처럼 에스겔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하여 예루살렘 거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신다(4:1-17;5:1-4;12:1-15).
=====15:2
포도나무가...나은 것이 무엇이랴 - 포도나무는 그 모양과 자태가 별볼일 없으며 그 꽃도 다른 화려한 꽃들에 비해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제공해 줌으로 경작자에게 유익과 기쁨을 준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포도나무를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돌려야 할 이스라엘 족속으로 흔히 비유하고 있다(창 49:22;신 32:32;시 80:8-16;사 5:1-7;렘 2:21;호 10:1).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비유되고 있다(요 15:1-7). 그러나 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에 그 나무는 용도 면에서 거의 쓸모없다. 본 구절에서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과 그 결과에 대해 지적하시기 위해 포도나무의 유익성이 무엇인지 반문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본 구절은 포도나무 비유의 실체인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지 못하여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유용하지 못하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무엇이랴 - 본 구절을 근거로 혹자는 이 포도나무가 포도원에서 재배되는 것이 아니라 들에서 자라는 들포도나무라고 진술한다(Wycliffe). 포도나무가 포도원에서 자라지 않고 살림 가운데 자란다는 것은 그것이 들포도나무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 들포도나무의 볼품없고 뒤틀려 자라는 가지는 숲 속의 다른 훌륭한 원목으로 자라는 나무들과 좋은 대조를 보여준다(Cooke). 그리고 들포도나무에서 맺히는 들포도도 재배 포도보다 훨씬 가치가 없다(사 5:4). 따라서 이 표현도 앞 구절처럼 들포도나무의 무가치함을 지적하고 있다.
=====15:3
그 나무를 가지고...제조할 수 있겠느냐 - 이는 들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 이상 그것으로부터는 집 등을 짓기 위한 재목으로도 전혀 사용될 수 없디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 성경에서는 '못'에 대해 크게 두 종류, 곧 나무 못과 금속 못이 언급된다. 여기서는 못이 전자의 의미로 언급되었으며 대상 22:3;대하 3:9 등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언급되었다. 포도나무 가지로는 이 못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가 아주 사소한 것도 만들 수 없는 무익한 나무임을 상징한다.
=====15:4'
히네'(* )가 첨가되어 있다. 이 말은 놀람 또는 감탄의 느낌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이 감탄사가 본 구절 앞머리에 언급된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써 재목으로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포도나무가 단지 불에 던져지는 화목의 존재로서 전락된 것에 대한 비참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족속을 상징하는 바 그들의 비극성을 드러내 준다. 한편 '불'이란 단순히 나무나 짚 그리고 풀등을 사르는 물리적 차원에서의 불을 뜻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포오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 족속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1:4 참조).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족속을 당신의 진노로 심판하심을 암시한다.
두 끝을 사르고...태웠으며 - '사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켈라'(* )는 '먹다', '삼키다', '태워버리다'의 뜻을 갖는다. 이는 불로서 온전히 살라 소멸시킴을 가리킨다. 반면 '태웠으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하르'(* )는 본래 '녹이다', '태우다' 등의 뜻을 지니지만 '아켈라'와는 달리 어떤 것을 불로서 태우되 온전히 없애기보다는 반쯤 태우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포도나무의 양끝이 태워 없어지고 그 가운데도 반쯤 타서 그 나무가 전혀 쓸모 없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의 '두 끝'이란 이스라엘의 두 왕국, 즉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붕괴된 북왕국 이스라엘과 B.C. 586년에 멸망된 남왕국 유다를, 그리고 '그 가운데'란 유다의 지도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된 예루살렘 성읍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고 본다(Carley, Lange).
=====15: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합당하겠느냐 - 히브리어 본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도 4절의 경우처럼 놀람이나 감탄을 나타내는 감탄사 '히네'(* )로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하는 바는 4절과 약간 다르다. 4절에서는 그 감탄사가 단지 화목(火木)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는 포도나무의 비참성이 상징하는 것처럼 심판의 불에 처해질 이스라엘 족속의 비극성과 관련하여 언급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것이 불에 살라진 포도나무의 무용성, 즉 심판의 불에 살라지고 타게 될 이스라엘 족속의 무가치성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15:6
본절은 2-5절에 언급된 비유의 실제적인 의미를 하나님께서 직접 밝히시는 내용이다. 구약적 의미에서 비유란 지혜의 가르침이나 교훈 또는 경고 등을 보다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전하고 가르쳐 주기 위해 주위의 일상적인 사실을 예증(例證)으로서 표현해주는 것을 말한다(삼하 12:1-4;잠 6:7-11;전 9:13-16).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본절에서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다 실감있게 전하고 계신다.
=====15:7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 나타티 에트 파니 바헴) - 히브리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본 구절은 '내가 나의 얼굴을 그들에 대(항)하여 둘 것이다'(I will set my face against them, NIV, RSV)의 뜻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향하신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사람 또는 대상에 대해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을 지닌다(시 13:1;22:24;31:16;42:5;80:3).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신다는 뜻을 나타낸다(시 34:16;90:8;벧전 3:12). 본 구절에서 그것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불의하고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은 예루살렘 거민에게 공의의 진노로 대항하시사 심판하신다.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사르리니 -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신적 의지가 표명된 이상 이스라엘 족속의 그 어떤 도피 수단이나 노력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홀로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계 19:16)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불의로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벌을 받는 자는 그것을 대항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말고 겸손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을 인정하고 감당하며 한편으로는 회개해야만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의 진노를 끝내시고 용서해준신다(레 26:40-46;잠 28:13;요일 1:9).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을 핵심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그들이 징계를 통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회개하며 돌아가게 됨을 가리킨다(6:7 참조).
=====15:8
내가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 6:14;12:19 주석을 참조하라.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 '범법함이니라'(* , 마알루)는 특별히 제사장 직분과 관련하여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서 14:13에서는 '불법하여'로 번역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말씀, 즉 율법을 지켜야 할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을 어김으로써 스스로 언약의 파기자가 되었으며 결국 그 율법의 예언대로 징벌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레 26:14-39;신 28:15-68).
두 가지 징조(12:1-20)와 다섯 개의 메시지(12:21-14:23)를 준 다음에 에스겔은 이
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보여주는 일련의 비유들을 기술한다(15-17장).
이중에서 첫 번째 비유에 해당되는 본장은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비유로서 이스라엘의
우월 의식을 불식시키고 전적으로 무익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당시 이스라
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 의식에 빠져 배도와 반역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교만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포도나무의 쓸모 없음을 부각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돌보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은 타민족에 비해 내세울 것이 하
나도 없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시 80:8;사 5:1,2;렘 2:21).
이러한 본장은 (1) 쓸모없는 포도나무가 버려지는 것의 당연함을 기술하는 전반부
(1-5절), (2) 예루살렘이 포도나무처럼 버려질 것을 예언하는 후반부(6-8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런 내용을 통하여 본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죄악을 일삼는
이스라엘 족속은 반드시 멸망하게 됨을 생생하게 지시하고 있다.
한편, 본장은 전 단락(14:12-23)처럼 교훈적으로 기록되지 않고 비유적 표현을 사
용하고 있다. 이처럼 우회적으로 충고와 권면을 하는 이유는 일상적인 평범한 말과 차
별성을 두어 긴장과 주의를 부러일으키려는 의도이다.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도 청중들
에게 강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우화를 사용하곤 했다(사 5:1-12;28:26-28;암 5:19).
또한, 본장은 포도나무의 가치를 열매로 측정하지 않고 나무의 재질로 평가한다(3
절). 이러한 시각은 성경에서 매우 독특하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질책할 때, 아직 열매를 맺지 못했다거나 모든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썩고 비틀어지고 익지 않은 열매를 맺었음을 부각시켰다(사 5:1-7;호 10:1). 반
면에 본장은 나무의 질을 통해 포도나무의 무용성을 드러낸다. 더구나 불에 타버린 포
도나무의 무가치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4절). 이와 같은 비유를 통해 저자
는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스라엘 족속의 교만함을
공박하며 겸손하게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1.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비유(15:1-5)
본 단락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으므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만, 나무 자체
는 다른 나무와 비교할 때 작고 보잘것 없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
여 선지자는 만약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다면 유다 민족은 타민족에 비해 전혀 내세울
것이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실 하나님은 종종 이스라엘 족속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설명하셨다(17:6-10;
창 49:22;신 32:32;시 80:8-16;사 5:1-7;렘 2:21;호 10:1).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이스
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다른 이방 민족들
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내 아들, 내 장자'(출 4:22)라고 하셨으
며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사 43:7)라고 언급하셨다.
그런데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온갖 압제와 살육을 자행했으며
(7:23;11:6), 우상 숭배의 가증한 범죄를 행하였다(8:3-17). 이런 상황에서 하나은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2절),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
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3,4절)고 지적하심으로써 포도나무가 하나님을 벗어날 경우에는 무가치하
고 무익한 존재로 전락하게 됨을 알려주고 있다.
포도나무의 좋은 특징은 그 꽃이나 나무의 우아함 또는 목재로서의 유용성 등에 있
에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비교할 때 포도나무는 전혀 가치가 없는 존재일 뿐이다.
오직 포도나무의 특징은 포도 열매를 풍성히 맺는 데에 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주렁
주렁 맺을 때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때에는
쓸모없는 존재로 되어 결국에는 자불에 던져지는 땔감으로 전락되게 도니다. 마찬가지
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영적 열매를
풍성히 맺을 때만 가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들이 자신의 존재를 과대
평가하여 우월 의식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사명을 망각할 때는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 국내에서 활동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
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인간은 본질
상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로서(엡 2:3;골 1:21)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전 15:10. (2) 인간은 조금 성공하면 교만해질 우려가 있다. 그
러나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반드시 넘어지게 되므로(고전 10:12) 항상 조심해야 한
다.(3) 성도는 말씀과 성령을 따름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23;엡
5:8,9).
* 구약에 나타난 비유의 의미.
구약 성경에서 '비유'란 말은 그리 흔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 말은 시편에 두번己
(시 49:4;78:2), 잠언에 한번(잠 1:6), 에스겔서에 네 번(17:2,12;20:49;24:3), 호세
아서에서 한 번(12:10) 등 총 8번 언급된다. 이중에서 잠 1:6의 '멜리차'(* ,
풍차, 경구)와 호 12:10의 '다마'(* ,닮음, 같음)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솰'(*
,통치하다, 다스리다, 지배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정신적인) 우월성'이란 뜻을
갖으나 또 한편으로는 '유사함', '비슷함', '비교', '비유', '속담', '잠언' 등 다양
한 뜻을 내포한다. 그리고 흔히 구약에서 '비유'(* ,마솰)란 말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이 '마솰'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흔히 유행되는 속담이나 잠언
의 뜻을 가리키는 경우에 쓰이기도 했으며(12:22,23;16:44;18:2,3;삼상 10:12;24:13)
어떤 심오한 가르침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욥 27:1;29:1;시 49:4;78:2). 특히
이중에서 속담으로 쓰일 경우에는 종종 조롱이나 경멸의 뜻을 함축하는 말로 쓰였다
(14:8;신 28:37;왕상 9:7;대하 7:20).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신탁
(信託)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민 23:7,18;24:3,15,20,21,23). 다시 말하면 이 '마솰'
이란 말은 구약 시대에서 일상 생활 가운데서 유행되어지는 속담, 잠언의 뜻으로 사용
되나 또 한편으로는 지혜로운 현자(賢者)들이 가르치는 심오한 가르침, 교훈의 뜻을
함축하는 말, 신적 계시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 말은 어떤 낯익은 대상을 비유 또는 비교의 상대로 삼아 참된 의미를 돌출
시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는 비유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낯익은 대상, 상황 등을 통하여 진리를 보다 생생하고
실감있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특히 성경에서 이 비유는 거의 대부분이 도덕적 또는 신
앙적인 교훈의 뜻을 함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비유 중의 하나는 삿 9:8-15자에 나타나는 나무들의 우화에
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분수를 넘어 과욕까에 빠지는 자의 어리석음을 잘
나타내 주는 예이다. 이 외에도 대표적인 비유로는 나단 선지자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삼하 12:1-4), 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이 말한 가시나무와 백향목의 이야기(왕하
14:9), 이사야 선지자의 포도원 이야기(사 5:1-6), 에스겔 선지자의 독수리와 포도나
무 이야기(17:3-10), 아모스 선지자의 다림줄 이야기(암 7:7, 8) 등이 있다.
2. 예루살렘 거민의 심판(15:6-8)
전 단락(1-5절)에서는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심판을 비유적인 형식에 의해 다루었
다. 특히 포도나무의 재질에 근거한 무가치성, 무익성을 지적하면서(2,3절0 본질적으
로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4절) 언급하였다. 그러나 본 단락은 전 단락의 비
유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으로서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불사름이란 표현으로 언급
하면서(6,7절), (2) 예루사렘 거민들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결론적으로 설
명하고 있다(8절).
이상과 같은 본 단락은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을 잘 보여준
다. 하나님은 '내(하나님)가 그들은(이스라엘 족속) 대적한즉'(7a절)이라고 말씀하신
다. 이 말은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나타티 에트 파니 바헴'(*
)으로서 '내가 나의 얼굴을 그들을 대하여 둘 것이나'(I will place may face
against them)란 뜻이다. 원래 '얼굴'이란 단어는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의 호의, 자비,
구원 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시 13:1;27:9;42:5;105:4),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
를 나타낸다(시 51:9; 벧전 3:12). 그런데 본문에서는 후자의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들에 대하여 은혜와 긍휼, 축복 등을 베푸시지 않고 거
룩한 분노를 발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창 17:2-14)을 맺으신 후 이스라엘 족속을 '아들'
(출 4:22), '기업의 백성'(신 4:20;시 33:12), '양'(시 78:52;100:3) 등으로 삼으셨
고, 친히 '아버지'(신 32:6), '남편'(사 54:5) 등이 되셨다. 그리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시었다(신 32:10). 그런데 언약 백성은
계속해서 반역을 거듭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언약적 저주의 일환으로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는 것이다. 특히 본 단락에 나타난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
르리니'(7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절대성 및 참혹성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거
민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악은 심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도를 떠난 백성
에게 철저한 파멸을 주신다. 이것은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이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됨으로 성취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죄가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고나계를 악화시키는 주범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죄는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사망을 가져오며(롬 6:23),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게 만든다(사 59:2). 또한 성도들로 하여금 괴롭고 고통스럽게 하며(사 43:24) 형통치 못하게 하고(잠 28:13) 욕되게 한다(잠 14:34). 더 나아가서 성도들의 영적 부요를 잠식하며(잠 13:23), 고귀한 성도들로 하여금 천하고 비참하게 만든다(애 4:2).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는 말씀을 기억하며 정결하게 생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