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에스겔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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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 에스겔 선지자를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이상 중에 예루살렘 성전 가운데로 인도하셨던 성령께서(8:3) 그를 계속 인도하고 계심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에스겔의 선지자 사역이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에 의해 행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1:3;2:2). 동문 -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내의 문제를 심의, 재판하고 처리하기 위해 모이는 재판소이거나(Dyer) 지배층 인사들의 회합 장소일 것이다(Cooke). 이십 오인이 있는데...방백이라 - 이들은 8:16에 언급된 이십 오인이 아니다. 이들이 거하고 있는 장소도 8:16의 이십 오인이 있는 장소와 서로 다르다. 또한 이들은 신분상에 있어서도 8:16의 이십 오인과는 다르다. 즉, 이들 중에는 '방백'(* , 사리) 두 사람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행정적인 일을 관장하는 지배층 인사들이었다. 8:16에서 '이십 오인'이란 수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이스라엘의 각 열 두 지파에서 두명씩 선출된 사람에 우두머리 한 사람을 더한 수효로 추측된다(Lange). 특히 이들 중 '야아사냐'의 아버지 '앗술'이 렘 28:1의 '앗술'과 동일 인물이라면 '야아시냐'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방해하고 거짓 에언을 한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형제이다(렘 28:1-4). 그러나 '브나야'나 '블라댜'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다만 블라댜가 이곳 동문에 있는 자로서 언급된 것은 그가 같이 있는 자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지도자층에 속한 자로서 상당한 귀족이었음을 암시해준다.

=====11:2
그가 내게 이르시되...베푸는 자니라 - 1절에 언급된 '이십 오인'은 남들이 알지 못하고 자신들만이 거하는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 숭배를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들의 은밀한 죄를 아시고 당신의 종에게 드러내 폭로 하신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온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여 계시므로 모든 것을 아시고 인간들의 은밀한 죄악과 불의들을 드러내시고 책망하실 수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들 특별한 인물들 이십 오인의 불의를 지적하신 것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로서 그들의 죄악이 예루살렘 성읍을 패망으로 이끈 큰 원인 중 하나임을 암시해준다(마 15:14;눅 6:39).

=====11:3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 이는 여고니야 곧 여호야긴 왕과 기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되었을 때 그 포로된 백성들에게 선포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과 깊은 연관을 가지는 것 같다. 즉,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화정되자 바벨론 포로들에게 그곳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 거할 수 있도록 집을 지으며 밭을 개간하도록 권고했었다(렘 29:5). 그러나 이곳 예루살렘 성읍에 남아 있는 자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과는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못하고 평안의 때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고기가 된다 하나니 - 본 구절도 앞 구절처럼 예레미야 선지자가 끊는 가마의 비유로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것과 연관이 있는 표현이다(렘 1:9 참조).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의 심판으로 인한 그들의 멸망을 의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끊는 가마 속의 고기처럼 예루살렘 성벽이 바벨론 군대로부터 보호되어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족속의 영적 무지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인해 지혜가 사라지고 영적 소경이 되었기 때문이다(요 9:40, 41).

=====11:4
그들을 쳐서...예언할지니라 - '그들을 쳐서'란 히브리어로 '알리헴'(* )으로서 문자적으로 '그들을 대하여'(against them, KJV, NASB)의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커다란 반향적인 감정을 가지고 대하심을 암시해준다. 이런 감정은 질투의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으로서 그분을 섬기고 따라야 할 자들이 오히려 거역하고 우상 숭배한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본절의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란 반복적 표현은 예언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이 예언이 선포됨으로써 그 예언을 듣지 않은 자들에게 심판의 근거가 된다.

=====11:5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 이 표현은 본서에서 이곳에 단 한 번 나온다(Wycliffe). 그러나 이 의미는 2:1;3:14, 24 등에 계속 연관되는 말씀이다. 이는 에스겔이 자신의 선지자 사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 그의 능력과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행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 '마음'(* , 루아흐)이란 문자적으로는 '영'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다 아신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을 창조하신 전능한 분으로서 인간 내부의 모든 것, 즉 생각하고 품은 뜻 등을 다 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은 신약 시대에 예수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시던 때에도 구체적으로 보여졌다(마 9:3, 4).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고 진술하여 하나님의 전지성을 잘 보여주었다.

=====11:6
너희가 이 성읍에서...살륙하여...채웠도다 - 이는 7:11, 23;9:9과 연관되는 말씀으로서 예루살렘 성읍에서 도덕적으로 많은 불의가 행해졌음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족속 중 특히 지도자들은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강포한 죄악을 행했다. 그들은 온갖 불법과 권력 등을 이용해 일반 백성들을 살해하고 착취하며 갖은 불의를 행하였던 것 같다(22:12). 혹자는 '살륙'이라는 말이 육체적인 몸의 살해라는 의미보다는 연약한 자에 대한 압제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로 보기도 한다(Kraetzschmar). 이 해석도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다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심하게 압제함으로 간접적인 폭력과 살육을 자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1:7
이 성읍 중에서...끌려 나오리라 - 유다 족속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있으면 자신의 안전과 평안이 보장될 것으로 생각했으나(3절)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비참하게 무너뜨리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역하고 불의를 행한 자들의 생각과 뜻을 헛것으로 만드신다는 뜻이다(고전 1:19;3:20).

=====11:8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임하게 하고 -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벌하시되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응하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상황과 경우에 따라 그 수단과 방법이 다를 수 있으나 징벌의 대상자에게 가장 힘겹고 고통스러운 형태로 임하게 됨을 보여준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당시 유다가 얼마나 부패해 있었는가 하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1:9
너희를...타국인의 손에 붙여 -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을 헛된 것으로 만드시고 당신의 징벌을 감행하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예언이 성취될 때 그들이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예언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주셨다. '타국인의 손에 붙여'란 표현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표현에는 비록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 할지라도 당신을 떠나고 불의한 일을 행할 때에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도구로 쓰셔서 그들을 징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 징벌하심으로 이방 나라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 예언되었다(레 26:27-39;신 28:63-65).

=====11:10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국문하리니 -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전하다고 여겼던 예루살렘 성읍에서 쫓겨나고 포로되어져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멸망당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벨론 군대의 침략으로 인해 유다 왕국의 멸망시 시드기야 왕과 기타 유다 지도자들에게 이루어졌다(왕하 25:4-7, 18-21;렘 39:5-7;52:24-27).

=====11:11
이 성읍은 너희 가마가...되지 아니할지라 - 이는 3절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부정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7절의 예언과 같이 그들의 생각, 즉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스스로 여기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간주하시며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하신 당신의 뜻을 확정적으로 말씀하신다.

=====11:12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 6:7 주석을 참조하라. 이방인의 규례대로 행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언약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으 뜻과 율법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의 불법을 좇았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은밀히 이방 우상을 숭배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6:2-13;8:3-16).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곳 이방인들의 풍습과 규례를 좇지 말 것을 율법으로 엄숙히 명하신 적이 있다(레 18:3, 26, 30;20:2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를 어기고 스스로 불의를 자행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다.

=====11:13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로 '블라댜'는 1절에서 언급된 대로 여호와의 성전 동문에서 불의를 행한 이십 오인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암시하신 것처럼 그의 가증하고 불의한 죄악으로 인한 것이다(3, 12절). 그의 죽음은 불의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본보기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지금 8:3 이하에서 계속 환상 중에 하나님께 이끌려 있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블라댜의 죽음을 본 것도 환상 중에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11:24, 25, Wycliffe, Calvin). 내가 엎드리어 큰 소리로...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 하나님의 징벌의 본으로서 블라댜가 죽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에스겔 선지자의 중보 기도는 전후 문맥상 갑자기 행해진 것으로서 그의 심령에서 나오는 부담을 토로한 것이며 이와 비슷한 중보 기도는 9:8에도 언급된다.

=====11: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가라사대 - 이는 이 말씀의 배경으로서 구체적인 연대에 대한 언급이나 장소의 변경에 대한 암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8:1-5에 암시되어진 두 번째 환상 중에 계속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되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6:1;7:1 참조). 그러나 그 내용면에서는 1-13절의 내용과 다르다.

=====11:15
예루살렘 거민이..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바벨론 등지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향하여 업신여기며 조롱하였다. 그 조롱의 이유는 그들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예루살렘 성에 남아 거하게 되었고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들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 에스겔 선지자 같은 훌륭한 신앙인들이 고난 속에서도 그들의 신앙을 지켜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예루살렘 성읍에 거한 자들은 많은 불의와 가증한 죄악을 범하였다(6:3-14;7:23;8:3-18). 따라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두 무화과 광주리의 비유를 통해 예루살렘 성읍에 남아 있는 자들의 악함과 바벨론 포로된 자들의 선함을 드러내기도 했다(렘 24:1-10). 한편 본 구절에서 '형제'나 '친족'이란 표현은 빚을 대신 갚고 속량해야 할 자(레 25:25, 48)를 가리킨다.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형제애를 버리고 교만히 행하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11:16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에게 직접 '성소' 자체가 되신다는 뜻이다. 이 표현은 구약 시대에서 하나님의 성소가 장막이나(출 25:8, 9;40:1-35) 솔로몬 성전(왕상 6:1-38)과 같은 가시적 건물 모습으로 나타나는 관례에 비춰볼 때 특이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소'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어 다스리시고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는 처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본 구절이 영적 성소에 대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바벨론 포로로 잡힌 자들 가운데 임재하시어 그들을 보호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잠간'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 임재하시어 함께하시는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바벨론에 영원히 머물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 가나안 땅에 돌아오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고레스 왕 때 바벨론 포로들이 귀환해 학개 선지자의 권면으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한 사실에서 성취되었다(스 1:1-11;학 1-3장). 한편 신약적 차원에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어 사람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셨으며(요 2:21),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하나님 자신이 성전이 되신다(계 21:22).

=====11:17
너는 또 말하기를...주리라 하셨다 하라 - 남은 자들에 대한 회복의 말씀이다(6:8).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에 대한 심판 속에서도 당신의 은혜로 남아 있는 경건한 자들을 보존하시고 구원하심으로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과 경륜을 이루신다(시 4:3). 이러한 남은 자 사상은 본서에서 20:34,41,42; 28:25;29:13; 34:13;36:24;37:21 ;38:8;39:27 등에도 나타난다. 다른 예언서에서는 사 43:5, 6;54:7;56:8;렘 23:3;29: 14;31:8, 9;32:37;미 7:18-20;슥 10:8, 9 등에도 나타난다. 한편 본절에서 이스라엘 땅, 즉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주신다는 뜻은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 시대 때 체결된 언약을 이행하시는 것을 뜻한다(창 15:7-21;17:7, 8;26:3;35:9-15). 그리고 언약의 땅에 대한 회복은 모세의 율법에서도 예언되었다(레 26:42).

=====11:18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지라 -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이란 이스라엘 족속들이 산이나 성전 은밀한 곳에 세워두고 숭배한 우상들을 가리킨다(6:3-11;8:3-17). 그런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이런 것들을 제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운 개혁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사람이 새롭게 되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은 그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의해서만 되어짐을 교훈해준다(엡 2:8).

=====11:19
내가 그들에게...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은혜를 베푸신다. 이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께서 율법 언약을 체결하시고 율법을 주시사 지키라고 명하신 것과는 다르다(출 19:5, 6;24:3). 오히려 이 은혜의 형태는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체결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사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신 것과 상통한다(히 8:10-13).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시내 산의 율법 언약으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그 율법을 지킬 힘과 능력이 없어 실족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는 36:24-31과 렘 31:31-34 등에도 나타난다. 특히 본서 36;26에서는 본 구절의 '일치된 마음' 대신에 '새 마음'으로 되어 있다.

=====11:20
내 율례를 좇으며...행하게 하리니 -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 자체는 의롭고 온전하다(시 19:9;롬 7:12). 그러나 죄악된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다(롬 8:3). 이처럼 무능력에 빠진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사람을 새롭게 하시어 말씀을 다라 살 수 있게 하신다(19절).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성도의 마음에 이 말씀을 새기어 두시고 성도로 하여금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게 하신다(롬 8:2;히 8:10-13).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되리라 - 본 구절은 본서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는 말씀이나 이후에는 몇 번 더 언급된다(14:11;36:28;37:23, 27). 이 사상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실 때부터 주셨던 말씀이다(창 17:7-14). 그리고 하나님이 언약의 말씀을 친히 지키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셨다(출 6:7;레 11:45;22:33). 따라서 본 구절은 구속사의 주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근본 의도는 이 땅에 당신의 통치권을 확립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어 다스리시며 경배받으시고 그 백성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는 천국 도래를 선포하심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사역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마 4:17;눅 17:21). 한편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여기서 다시 언급하신 것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죄악과 불의에서 회복되어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으로서 다시 재정립될 것을 바라심을 나타낸다.

=====11:21
미운 것과 가증한 것 - 18절 주석을 참조하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 9:10 주석을 참조하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확언하시고 그 말씀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시는 말씀이다. 이는 이전에 5:15, 17에 한 번 나왔으며 이후에 12:25, 28;13:8, 16;14:11, 14 등에 다시 나타난다.

=====11:22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 이는 그룹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을 개시하려는 모습을 나타낸다(1:9, 23, 24;10:16, 19). 이전에 그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좌하며 수종하는 가운데 성전 동문에 머물러 있었다(10:19).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이곳을 떠나려 한다. 특히 이 그룹들은 성령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1:20, 21).

=====11:23
여호와의 영광이...성읍 동편 산에 머물러 - 하나님이 성소를 떠나실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읍을 떠나심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소와 기타 수많은 산당 동지에서 우상 숭배하며 범죄하는(6:3-14;8:3-17)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시는 것을 가리킨다(8:6;10:18 참조). 특히 하나님께서 성전 문지방에서(10:18) 성전 동문(10:19)으로, 그곳에서 다시 성읍을 올라 성읍 동편 산으로 단계적인 절차를 통해 떠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된 이스라엘 가운데를 떠나시는 데에 대한 안타까운 미련을 가지고 계심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가 이스라엘을 확실히 떠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만큼 사랑하셨음을 나타낸다. 예루살렘 성읍의 동편 산은 감람 산을 가리킨다(삼하 15:30;슥 14: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떠나신 방향대로 다시 돌아오신다(겔 43:1-7).

=====11:24
주의 신이 나를 들어...이르시더니 - 에스겔 선지자가 성령을 통해서 이상 중에 예루살렘 성읍에서 다시 바벨론의 포로 지역을 시공을 초월하여 옮겨지게 되었음을 뜻한다(8:3 참조).

=====11:25
내가 사로잡힌 자들에게...고하니라 - 에스겔이 환상 중에서 정상적인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왔을 때 바벨론 포로된 자들에게 그가 본 이상에 대해 말한 것을 가리킨다. 특히 그가 말한 대상은 8:1을 근거로 해 볼 때 포로된 이스라엘 족속을 대표하는 장로들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본토에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바벨론 포로된 자들도 여전히 완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감(反感)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므로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이상을 통해 경고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이다(2:3;3:24-26).



다가올 심판에 대한 일련의 환상(8-11장)의 마지막 대록에 해당되는 본장은 예루살
렘에 남아서 악을 행하고 있는 교만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가 절
망 중에 있는 자들에 대한 위로가 드러나 있다. 사실 예루살렘에 남아서 재앙과 사로
잡힘을 면한 자들은 포로로 끄려간 자들과 연대 책임을 느깨며 애통해 하기보다는 포
로된 자들을 멸시하며 업신여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정반대의 시각을
공포함으로써 새로운 현실 인식과 역사 이해에 도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1)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범죄한 이스라엘 방백에 대한 심판을 예
고하는 전반부(1-13절), (2) 바벧론 포로들의 회복과 구원을 약속하는 중반부(14-21
절), (3)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장면을 묘사하는 후반부(22-25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성과 구원의 은혜를 동시에
드러내주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심은 단순히 환상 속에서 예루살렘에 오셨
다가 떠나신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루살렘 성전 및 이
스라엘 족속과의 관계를 살펴볼 때 더욱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
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창 17:2-14). 이 언약은 은혜의 언약으
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입각하여 신실하게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며 은혜와 축복을 수여하셨고, 더 나아가 상주하시기 위해 출애굽 후 광야에
서 성막을 짓게 하셨다(출 25:8, 9, 22). 성막은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의 건립
으로 영광스러운 위용을 나타내게 되었다(왕상 6:1-38). 이와 같은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하시는 가시
적 처소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곳을 떠나시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떠나심을 암
시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으로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해해 진노하시고 단절을 선언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므로 '악이 주
와 함께 유하지'못한다(시 5:4)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본장은 하나님께서 영광가운데서 환상을 통해 예루살렘에 오신 후 말씀하시
고, 다양한 가시적(可視的) 장면을 보여주시는 마지막 부분이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주로 영적이면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바벧론 포로 지역에 거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
씀을 선포하신다(24절; 14:1;20:1).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권능과 이상 가운데서
선지자에게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여주시기도 한다(27:1-10;40:1-48:35).
이상과 같은 본방에는 유다의 비관적인 현실과 미래의 소망이 역설적으로 대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이스라엘 족속을 철저히 멸망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성전의 현존, 언약과 율법과 혈통의 계승에
근거하여 안전과 평안을 확신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탄식하며 심판을 선고하
였다. 예루살렘 성읍의 건재함을 자신하던 지도자들은(3절) 이방 군대에 의해 멸망당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청종하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거짓 평화를
외치는 자들은 비참한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참지 않으시
고 이방군대를 동원하여 예루살렘 성읍을 초토화시킬 것이다(왕하 25:21).
이처럼 절망적인 예언을 전하던 에스겔은 동시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선포한다. 비록 이스라엘 족속들이 성전을 떠나 이국에서 방황할지라도 하나님
은 늘 함께 계시며(사 43:2),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새 영을 백성들의 마음 속에 부어 주셔서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시고(19, 20절)
모든 우상을 제거하며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도록 만드신다. 하나님은 비록 첫
째 성전을 버리고 파괴하도록 허락하셨지만, 새로운 성전을 회복하시고(40-48장) 궁극
적으로는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 완성시키신다(갈 6:16). 이와같이 하나님은
언약에 입각하여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지만, 결국에 가서는 종말론적 구원을 성
취시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영원한 구원의 희망을 품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믿음으로 전진해야 할 것이다.

1. 예루살렘의 지도층에 대한 심판(11:1-13)
본 단락은 예루살렘의 영적 지도자들이 여전히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업신 여기며
거짓 평안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에스겔의 선포가 들어있는 부
분이다. 사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불의를 행할 때 사회
전체는 부정과 부패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국가적 멸망의 가장 큰 원
인 제공자인 방백들에게 책임을 물으며 공의로운 심판이 집행됨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은 (1) 예루살렘에 남은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의 선고를 하는 전반부
(1-4절), (2) 살육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중반부(5-7절), (3) 심판의 과정과
블라댜의 죽음을 설명하는 후반부(8-1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
여 저자는 예루살렘에 남아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결코 바벧론 포로민들보다 많은 축
복을 받은 것이 아니며, 머지 않은 장래에 멸망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본 단락에 앞서 이미 환상 가운데 범죄한 성읍 예루살렘 성전에
오셔서 두 번이나 심판을 선고하신 바 있다. 즉, 에스겔에게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들
을 통해서 예루살렘 거민을 살육케 하신 장면(9:1-7)과 천사를 통해 예루살렘 성읍에
대해 하나님의 불로 상징되는 심판을 예시한 장면(10:1-8) 등을 보여주신 후 다시금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참혹한 심판을 제시하는 것이다(1-13절). 그런데 이상에서 언급
된 세 가지 환상은 각기 독특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첫째 환상(9:1-7)은 하나님께
서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심판에 앞서 남은 자들의 이마에 구원의 표를 하심으로 그들
을 구원하신 장면이 묘사되었다. 두 번째 환상(10:1-8)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서 심판의 총체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반면에 세 번째 환상(1-13절)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유력 인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표현함으로써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모습(2,3,12절) :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이 불의를 품고
성중에서 악한 꾀를 베풀며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는 자들이라고 평가한다. 지도자들
은 임박한 심판을 목전에 두고도 예레미야의 선포(렘 29:5)와 반대로 예루살렘이 절대
로 망하지 않으며 평안할 것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즉, 예루살렘 성읍은 견고하여 능
히 바벧론 군대의 공격을 받더라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방백들
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무감각했고 인간적인 자만으로 가득 차 백성들을 회개로 인
도하기는 커녕 앞장서서 악으로 달려갔다. 그 결과 모든 백성들은 신앙을 저버리고 윤
리적,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며 이방인의 부패한 우상을 추종하게 되었다(8:5, 10, 14,
16).
(2)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운명(6-11절) : 지도자들은 아주 소용도 없는 전쟁을
옥려함으로 인하여 많은 백성을 죽게 했으며, 기근과 온역을 유발시켜 성읍을 시체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5:12). 그래서 시체들은 가마 속의 고기와 같은 신세가 되었고,
방백들은 안전하다고 착각한 성읍(3절)에서 끌려나와 비참한 운명을 겪게 되었다. 그
들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전쟁을 통해 많은 귀중한 생명을 희생시켰으므로 결국
이방인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 포로로 끌려가거나 살해된다(왕하 25:1-7). 이처
럼 하나님은 불신앙적이고 타락한 지도자들에게 환난을 주시고 징계하신다. 특별히 하
나님은 동문에 모여 있던 25인의 방백 중 하나인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즉시로 죽게
함으로써 성읍의 멸망이 가까워왔으며,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알리고 있다. 하나님께
서는 불의한 블라야를 심판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며, 장차 나타날 일에 대
한 경고로 사용하셨다(행 5:5, 10).
이상에서 우리는 영적 지도자들의 중요성을 거듭 깨닫게 된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좋은 양식으로 먹이는 목자와 같다. 그러므로 신앙과
말과 행동 등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사명감을 가지고 사랑으로 돌보아
야 할 것이다(벧전 5:1-4). 또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하였다. 이처럼 지도자는 하나
님의 엄중한 심판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더욱 근신해야 할 것이다.

2. 구원의 회복과 하나님의 영광의 떠남(11:14-25)
전 단락(1-13절)에는 예루살렘에 남아서 범죄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
과 과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반면에 본 단락에서는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
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완전히 떠나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하나
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영원히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
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 사랑과 죄에 대한 진노하심을 동시
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포로된 자들을 비웃는 모습을 기술
하는 전반부(14, 15절), (2) 포로된 자들에 대한 구원과 자비의 약속을 언급하는 중반
부(16-21절), (3) 여호와의 영광과 에스겔의 환상이 사라짐을 언급하는 후반부(22-25
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여원성과 언
약의 신실성을 보여주며, 죄와 결별하는 개혁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당시의 예루살렘 백성들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은 하나님
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고,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은 저주를 받고 소망이 없는
자들로 취급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계셨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는 무화과로 생각한 반면, 바벧론 포로민들은 처음 익
은 최상품의 무화과로 취급하셨다(렘 21:1-7). 왜냐하면 예루살렘 거주자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교만한 반면 바벧론 포로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으며, 다
니엘과 에스겔(1:1-3;단 1:1, 2) 같은 견고한 신앙인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18절).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심오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상과 같은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비록 공의에 입각한 심판이
엄중할지라도 뉘우치고 돌아올 때는 언제든지 사랑으로 받아 주신다. 이러한 회복에
대해서는 이미 수 백년 전에 모세 율법에 예시되었다(레 26:40-45). 모세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죄악으로 이방 열국 중에 흩어질 것을 예고하면서(레 26:33, 36, 38, 39;신
28:63-65), 동시에 회개할 경우에는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특히
그는 회복의 조건으로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귀환하게 된다고 말
하였다. 특히 그는 회복의 조건으로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특히 그는 회복의 조건으로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
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형벌을 순히
받으면'(레 26:41)이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사실은 범죄자들에 대한 회복이 단순히 무
원칙적인 사랑이나 불공정한 편애(偏愛)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철저한 겸손
과 회개를 바탕으로 이루어짐을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심령을 사랑하시며
구원으로 인도해주시는 분이시다.
(2) 하나님은 조상들과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 주신다. 하
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창 12:1-3) 언제나 돌보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언약에 근거하여 출애굽을 일으키시고(출 2:24;6:5)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
록 역사하셨다(수 24:32). 이와 동일하게 범죄한 이스라엘이 멸망한 상황 속에서도 신
실하게 새로운 구원이 성취되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어떤 환
경 속에서도 약속을 변개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언약적 사랑에 기초하여 성도는 구원
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이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
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구원에서 끊어지게 할 수 없다
(롬 8:35, 38, 39).
(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결코 좌절됨이 없이 진행되어 나간다. 세상을 섭리하시
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패역함이나 연약함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종
말론적 완성을 향하여 치밀하게 전개되어 나간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의
소유자로서 인류 구언을 향한 계획을 조금도 차질없이 수행해 나가신다(사 46:10;단
4:35).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나라가 일시적으로 멸망당했다 할
지라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선택된 백성을 은혜로 보호하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시세벧이 하나님의 사
람들을 모두 죽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신 것처럼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구원 역사가 계승되도록 하신다(왕상
19:1-18;롬 11:1-5).
(4)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영을 부어 주신다(19, 20
절).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새 영은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성결을
유지시켜 주며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만들어 준다(고후 5:17). 이러한 새 영에 대한 언
급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온전한 모습을 구비
하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직 인간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죄와 사망의 법을
극복하고, 진정한 생명과 평안의 법을 따르게 될 수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
나님과 원수가 되지만,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롬 8:1, 6). 그러므로 하
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을 재창조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치유를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의
죄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심판하실지라도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2)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취소되지 않고 실현된다. (3)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의 지배안에 거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
고 감사하며 피차 사랑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엡 5:18-21).

* 하나님의 '영광의 떠나심'에 대한 고찰
1. 영광의 개념 : '영광'이란 히브리어로 '카보드'(* )로서 '카베드'(*
, 무겁다, 많은)에서 유래된 말인데, 일차적으로 '무거움', '풍부함'등의 뜻을 가지
며, 여기에서 '영광' '화려함' 등의 뜻을 유추되었다. 이 말이 신학적으로 쓰일 때는
하나님의 완전성, 탁월성, 임재하심 등을 표현하기 위한 말로 쓰여진다. 사실 이 말은
하나님의 외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온갖 아름다움과 화
려함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과 밀접한 관
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가지고 계신 목적 중 하나는 그들을 영광
스럽게 하시는 것이다(롬 8:30). 따라서 사도 바을은 '자녀이면...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우리가...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
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고 했으며,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이가'(벧전 5:10)라고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인간을 영화롭게 하길 원하셨지만, 인간의 죄
로 인하여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2)라고 하였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여행할 때였다(출 15:6;16:7, 10;24:10,16,17). 그러
나 하나님의 영광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
라 성막을 치었을 때였다(출 40:34, 45). 그리고 이 영광은 후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을 때에도 더욱 충만히 임재하였다(왕상 8:11). 또한, 개힌적으로 비록 일
시적이기는 하지만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며 말씀을 을을 때 하
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나타나기도 했었다(출 34:29, 30; 고후 3:7).
3. 하나님의 영광의 상실 :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성전에서 영광이 사라졌다는 사실(23절;10:18)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유한다. (1)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떠나심으로써 더 이상 축복과 은혜의 주로서 관계를 맺지 않으신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사 징계와 심판과 저주를 받게 하신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하지 않으시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사실을 빗대어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애 1:6)라고 하였다.
4. 결론 :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와 함께 동거할 수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상 숭배와 불의에 탐닉되어 타락했을 때, 더 이상 성전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떠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성도들은 성령의 전으로서 자신을 이렇게 취급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를 욕되게 하지 말아야(고전 3:16)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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