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2
이스마엘의 그다랴 암살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칠 월에 - 연도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해는 예루살렘이 함락 되던 연도(B.C. 586년)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함락은 사월로 명시되어 있다(39:2). 그리고히브리 종교력의 칠 월은 현대력으로는 양력 10월경에 해당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이 이전에 40:7-16의 사건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다랴에 대한 암살은 예루살렘이함락된 지 1년이나 7년 후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유다인들은 그다랴에 대한 암살을 큰 사건으로 여겼으며, 그후 칠월을 이에 대한 기념의 달로 예식을 거행하였다(슥 7:5 ; 8:19). 이스마엘이...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암살하는 사건의 배경은 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다인의 관습에 따르면, 주인은 손님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또 손님은 주인에게 신뢰를 가지고 그에맞는 답례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다랴는 이스마엘을 손님으로 정중히 대접했을 것이고, 이스마엘을 믿고 무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Bright). 이에 대해 클라크(Clarke)는 보다 더 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즉 본절에서와 같이 함께 떡을 먹는것이 단순한 식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지리였다는 것이다.아무튼 그다랴를 살해한 행위는 그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한 갈대인들에 대한 공격이고 도전이었다(Thompson).
=====41:3
거기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 첫 번째 살인에 이어 또 다른 살인이 이어졌다.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몇몇 유다인들이 곧이어 살해 되었다. 이들은 미스바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의 대표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미스바에 주둔하고 있던 갈대아 군사들 중 몇몇도 살해되었다. 아마 이들도 식사에 참석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곳에참석해 있던 갈대아인 주둔 병사들을 모두 처치하지 않고는 그 음모를 실천할 수 없엇을 것이다. 아마 이들은 소수였을 것이고 기습을 당해 모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바벨론 군대의 보복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니콜슨(Nicholson)은이 사건에서 살해된 갈대아인들이 총독 관저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었으며, 일시적으로미스바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41:4
본절은 그다랴 살해 사건이 사전의 각본에 따라 주도 면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암시한다.
=====41:5
팔십 명이 그 수염을 깍고...몸을 상하고 - 북이스라엘의 옛 종교 중심지였던 세겜과 실로, 그리고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미스바에도착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제사하기 위해서 가던 중이었다.이 사실은 소제물이나 유향이란 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때가 칠월이었으니 이들은 가을의 큰절기인 초막절에 참석하고자 했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7월은 신년도와 같은 것이었다. 한편 순례자들이 북쪽에서 왔다고 하는 사실은 북 이스라엘지역에 살던 사람들 중에 적어도 얼마 정도는 B.C. 622년의 요시야의 개혁을 받아들이고 그때까지 계속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어쩌면 이들은 중앙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것을 명하고 있는 신명기의 규례들을 따르고자 했을 것이다(신12:5, 6). 또한 순례자들은 수염을 깍고 옷을 찢고 몸을 상하는 등 슬픔과 회개의 표시를 하고 있었는데(16:6 ; 48:37 참조), 이는 틀림없이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한 애곡의 표시였을 것이다. 전체 포로기에 걸쳐서 성전 파괴에 대한 애도는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시 74, 79편 ; 사 63:7-64:12, 애가서 등). 많은 주석가들은 성전 파괴이후에도 성전의 존엄성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으며 성전 지대에서의 종교 행사도 계속되었으리라 본다(Bright, Feinberg, Nicholson 등).
=====41:6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서 - 이스마엘은 극악 무도한 위선 행위로 위장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그 역시 이들 순례자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눌 사람들에게로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Clarke). 그다랴에게로 가자 - 이를 '그다랴의 이름으로 환영한다'라고 의역해 볼 수도 있겠다(Bright). 이런 이스마엘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정중한 초대였다. 한편 이스마엘이 이들조차 살해한 원인이 본문상에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아마 이들이 유다 총독그다랴를 방문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발각되지 않게 하려는동기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던 것 같다. 그러나 8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쩌면 이들에게서 양식을 얻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41:7
이스마엘이...그들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니라 - 순례자들의 시체는 '구덩이'에 던져졌다. '구덩이'는 시체들을 감쪽같이 처분해 버리기에 적절한 장소였다(38:6). 한편 이 '구덩이'는 물이 귀한 팔레스틴의 곳곳에서 볼수 있었던 것인데, 여기다 시체를 던져 넣는 것은 매우 몰지각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시체에 오염된 물은 부정하여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41:8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 본절에는 이스마엘이 숨겨 놓은 양식을 얻기 위해 이들 순례자들에게 어떤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암시가 엿보이긴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어쩌면 이스마엘은 이들 순례자들을 볼모로 잡아서 그들 가족들에게서 양식을 갈취 하려고 했었을 수도 있겠다. 이스마엘이 이 열명의 순례자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양식을 얻고자 하였으나, 아마 이것도 원래 약속대로 되지 않았을것이다. 많은 인명이 살해된 이런 사건의 전말은 조만간에 퍼져나갈 것이 틀림없었기때문에, 이들 열 명의 순례자들도 나중에는 피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이스마엘은 분명히 유다 땅에 남아 있을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절에는 그가 암몬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장면이 언급되는 바, 그는 이 여행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하고자했을 법하다.
=====41:9
아사 왕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 약 300년 전에 유다 왕'아사'가 미스바를 요새화하려는 일환으로 이 구덩이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왕상15:22에 따르면 아사는 북쪽 이스라엘 '바아사'왕의 영토에 있던 라마의 성벽을 허물고 거기서 얻은 재목을 가지고 미스바에 요새를 건축하였다. 오늘날의 텔 엔 나스베(Tell en-Nasbeh)를 발굴한 결과 이로 보이는 구덩이가 발견되었다(Thompson). 이 구덩이는 원래 그 지역의 물을 공급하기 위한 저장소였으나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전쟁을치르는 시기에 요새화의 일환으로 활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Clarke).
=====41:10
왕의 딸들 -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되고 있다. 바벨론 군대가 정치적으로상당히 비중이 있는 이들을 붙잡아가지 않았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다윗 왕족이나 방백들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드기야의 딸들이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재빨리 도피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Calvin). 한편, 예레미야에 대한 언급이 여태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는데, 어쩌면 예레미야는 이스마엘이포로로 잡아간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포로들이 요하난의도움으로 베들레헴 근처로 돌아올 수 있었을 때 예레미야가 이들 중에 있었던 것으로보이기 때문이다(42:2 이하). 그러나 이것도 추측일 따름이다.
=====41:11,12
여기서는 요하난과 다른 군대 장관들이 이스마엘의 악행 소식을 듣고서 이스라엘을추격하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기브온 큰 물가에서 이스마엘 일당과 마주치게 되는데,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9.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또한 '큰 물가'라고 하는 곳은 깍아지른 듯한 바위 사이의 거대한 웅덩이 정도 되는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이 기브온은 미스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4.8km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미스바로 추정되고 있는 텔 엔-나스베에서부터 기브온까지의 방향은 본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암몬 방향과는 각도가 약간 다르기 때문에, 틸 엔-나스베가 미스바의 위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잇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마엘이 추적을 따돌리려는 이유에서 우회했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Bright).한편, 니콜슨(Nicholson)은 삼하 2:12-17에 기록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바로 이 큰 물가였다고 본다.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9.5km 떨어진 오늘날의 엘-집(el-Jib), 곧 고대 기브온 지역에서 깊이 약 25km 정도되는 거대한구덩이를 발견했다. 이곳은 원래 물을 저장하거나 모아두기 위한 구덩이였던, 그 내부로 내려가는 계단이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에까지 닿아 있었다.
=====41:13,14
이스마엘에 의해 강제로 끌려 가던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잔인성과 장차 암몬에서의노예살이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마엘을 징벌하러 온 가레아의 아들 요나단과 그 군대 장관들을 대했을 때 매우 기뻐하며 달아날 수 있었다(Clarke).
=====41:15
여덟 사람과 함께 - 이스마엘을 끝까지 따라갔던 자들은 아마도 그다랴 살해 사건에 처음부터 연루되었던 골수 분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다랴를 살해하려는음모를 성공적으로 치르었기 때문에 그를 사주 하였던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로 곧장되돌아갔다.
=====41:16,17,18
여기에는 요하난이 인솔하는 무리가 그다랴 살해 사건으로 인해 바벨론의 보복을두려워한 나머지 이미 애굽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약 6마일 가량 떨어진 베들레헴 근방에도착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행로를 멈추고 예레미야에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42:1, 2). 한편 게롯김함이란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김함이란 사람 이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김함은 바실래의 아들이었는데, 이 바실래란 사람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피하던 중 다윗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중에 다윗을 호위하여 요단 강을 건넜다. 다윗은 바실래를 귀족의일원으로 초대했지만, 바실래는 연로한 이유를 내세워 그의 아들에게 그 영예를 허락하도록 요구하였다(삼하 19:31-40).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져 왕가의 일원이 됨과동시에 베들레헴 근처의 땅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로부터 이곳은 게롯김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게롯김함'이란 말의 뜻은 '김함의 소유'이다.
이스마엘의 그다랴 암살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칠 월에 - 연도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해는 예루살렘이 함락 되던 연도(B.C. 586년)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함락은 사월로 명시되어 있다(39:2). 그리고히브리 종교력의 칠 월은 현대력으로는 양력 10월경에 해당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이 이전에 40:7-16의 사건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다랴에 대한 암살은 예루살렘이함락된 지 1년이나 7년 후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유다인들은 그다랴에 대한 암살을 큰 사건으로 여겼으며, 그후 칠월을 이에 대한 기념의 달로 예식을 거행하였다(슥 7:5 ; 8:19). 이스마엘이...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암살하는 사건의 배경은 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다인의 관습에 따르면, 주인은 손님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또 손님은 주인에게 신뢰를 가지고 그에맞는 답례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다랴는 이스마엘을 손님으로 정중히 대접했을 것이고, 이스마엘을 믿고 무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Bright). 이에 대해 클라크(Clarke)는 보다 더 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즉 본절에서와 같이 함께 떡을 먹는것이 단순한 식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지리였다는 것이다.아무튼 그다랴를 살해한 행위는 그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한 갈대인들에 대한 공격이고 도전이었다(Thompson).
=====41:3
거기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 첫 번째 살인에 이어 또 다른 살인이 이어졌다.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몇몇 유다인들이 곧이어 살해 되었다. 이들은 미스바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의 대표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미스바에 주둔하고 있던 갈대아 군사들 중 몇몇도 살해되었다. 아마 이들도 식사에 참석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곳에참석해 있던 갈대아인 주둔 병사들을 모두 처치하지 않고는 그 음모를 실천할 수 없엇을 것이다. 아마 이들은 소수였을 것이고 기습을 당해 모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바벨론 군대의 보복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니콜슨(Nicholson)은이 사건에서 살해된 갈대아인들이 총독 관저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었으며, 일시적으로미스바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41:4
본절은 그다랴 살해 사건이 사전의 각본에 따라 주도 면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암시한다.
=====41:5
팔십 명이 그 수염을 깍고...몸을 상하고 - 북이스라엘의 옛 종교 중심지였던 세겜과 실로, 그리고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미스바에도착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제사하기 위해서 가던 중이었다.이 사실은 소제물이나 유향이란 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때가 칠월이었으니 이들은 가을의 큰절기인 초막절에 참석하고자 했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7월은 신년도와 같은 것이었다. 한편 순례자들이 북쪽에서 왔다고 하는 사실은 북 이스라엘지역에 살던 사람들 중에 적어도 얼마 정도는 B.C. 622년의 요시야의 개혁을 받아들이고 그때까지 계속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어쩌면 이들은 중앙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것을 명하고 있는 신명기의 규례들을 따르고자 했을 것이다(신12:5, 6). 또한 순례자들은 수염을 깍고 옷을 찢고 몸을 상하는 등 슬픔과 회개의 표시를 하고 있었는데(16:6 ; 48:37 참조), 이는 틀림없이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한 애곡의 표시였을 것이다. 전체 포로기에 걸쳐서 성전 파괴에 대한 애도는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시 74, 79편 ; 사 63:7-64:12, 애가서 등). 많은 주석가들은 성전 파괴이후에도 성전의 존엄성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으며 성전 지대에서의 종교 행사도 계속되었으리라 본다(Bright, Feinberg, Nicholson 등).
=====41:6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서 - 이스마엘은 극악 무도한 위선 행위로 위장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그 역시 이들 순례자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눌 사람들에게로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Clarke). 그다랴에게로 가자 - 이를 '그다랴의 이름으로 환영한다'라고 의역해 볼 수도 있겠다(Bright). 이런 이스마엘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정중한 초대였다. 한편 이스마엘이 이들조차 살해한 원인이 본문상에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아마 이들이 유다 총독그다랴를 방문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발각되지 않게 하려는동기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던 것 같다. 그러나 8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쩌면 이들에게서 양식을 얻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41:7
이스마엘이...그들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니라 - 순례자들의 시체는 '구덩이'에 던져졌다. '구덩이'는 시체들을 감쪽같이 처분해 버리기에 적절한 장소였다(38:6). 한편 이 '구덩이'는 물이 귀한 팔레스틴의 곳곳에서 볼수 있었던 것인데, 여기다 시체를 던져 넣는 것은 매우 몰지각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시체에 오염된 물은 부정하여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41:8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 본절에는 이스마엘이 숨겨 놓은 양식을 얻기 위해 이들 순례자들에게 어떤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암시가 엿보이긴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어쩌면 이스마엘은 이들 순례자들을 볼모로 잡아서 그들 가족들에게서 양식을 갈취 하려고 했었을 수도 있겠다. 이스마엘이 이 열명의 순례자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양식을 얻고자 하였으나, 아마 이것도 원래 약속대로 되지 않았을것이다. 많은 인명이 살해된 이런 사건의 전말은 조만간에 퍼져나갈 것이 틀림없었기때문에, 이들 열 명의 순례자들도 나중에는 피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이스마엘은 분명히 유다 땅에 남아 있을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절에는 그가 암몬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장면이 언급되는 바, 그는 이 여행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하고자했을 법하다.
=====41:9
아사 왕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 약 300년 전에 유다 왕'아사'가 미스바를 요새화하려는 일환으로 이 구덩이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왕상15:22에 따르면 아사는 북쪽 이스라엘 '바아사'왕의 영토에 있던 라마의 성벽을 허물고 거기서 얻은 재목을 가지고 미스바에 요새를 건축하였다. 오늘날의 텔 엔 나스베(Tell en-Nasbeh)를 발굴한 결과 이로 보이는 구덩이가 발견되었다(Thompson). 이 구덩이는 원래 그 지역의 물을 공급하기 위한 저장소였으나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전쟁을치르는 시기에 요새화의 일환으로 활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Clarke).
=====41:10
왕의 딸들 -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되고 있다. 바벨론 군대가 정치적으로상당히 비중이 있는 이들을 붙잡아가지 않았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다윗 왕족이나 방백들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드기야의 딸들이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재빨리 도피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Calvin). 한편, 예레미야에 대한 언급이 여태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는데, 어쩌면 예레미야는 이스마엘이포로로 잡아간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포로들이 요하난의도움으로 베들레헴 근처로 돌아올 수 있었을 때 예레미야가 이들 중에 있었던 것으로보이기 때문이다(42:2 이하). 그러나 이것도 추측일 따름이다.
=====41:11,12
여기서는 요하난과 다른 군대 장관들이 이스마엘의 악행 소식을 듣고서 이스라엘을추격하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기브온 큰 물가에서 이스마엘 일당과 마주치게 되는데,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9.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또한 '큰 물가'라고 하는 곳은 깍아지른 듯한 바위 사이의 거대한 웅덩이 정도 되는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이 기브온은 미스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4.8km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미스바로 추정되고 있는 텔 엔-나스베에서부터 기브온까지의 방향은 본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암몬 방향과는 각도가 약간 다르기 때문에, 틸 엔-나스베가 미스바의 위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잇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마엘이 추적을 따돌리려는 이유에서 우회했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Bright).한편, 니콜슨(Nicholson)은 삼하 2:12-17에 기록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바로 이 큰 물가였다고 본다.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9.5km 떨어진 오늘날의 엘-집(el-Jib), 곧 고대 기브온 지역에서 깊이 약 25km 정도되는 거대한구덩이를 발견했다. 이곳은 원래 물을 저장하거나 모아두기 위한 구덩이였던, 그 내부로 내려가는 계단이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에까지 닿아 있었다.
=====41:13,14
이스마엘에 의해 강제로 끌려 가던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잔인성과 장차 암몬에서의노예살이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마엘을 징벌하러 온 가레아의 아들 요나단과 그 군대 장관들을 대했을 때 매우 기뻐하며 달아날 수 있었다(Clarke).
=====41:15
여덟 사람과 함께 - 이스마엘을 끝까지 따라갔던 자들은 아마도 그다랴 살해 사건에 처음부터 연루되었던 골수 분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다랴를 살해하려는음모를 성공적으로 치르었기 때문에 그를 사주 하였던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로 곧장되돌아갔다.
=====41:16,17,18
여기에는 요하난이 인솔하는 무리가 그다랴 살해 사건으로 인해 바벨론의 보복을두려워한 나머지 이미 애굽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약 6마일 가량 떨어진 베들레헴 근방에도착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행로를 멈추고 예레미야에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42:1, 2). 한편 게롯김함이란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김함이란 사람 이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김함은 바실래의 아들이었는데, 이 바실래란 사람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피하던 중 다윗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중에 다윗을 호위하여 요단 강을 건넜다. 다윗은 바실래를 귀족의일원으로 초대했지만, 바실래는 연로한 이유를 내세워 그의 아들에게 그 영예를 허락하도록 요구하였다(삼하 19:31-40).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져 왕가의 일원이 됨과동시에 베들레헴 근처의 땅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로부터 이곳은 게롯김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게롯김함'이란 말의 뜻은 '김함의 소유'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