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가뭄에 대하여 - 팔레스틴 땅에는 강우량의 부족으로 원래 가뭄이 잦기는 하였으나, 성경에서 가뭄은 기근과 함께 언약적 저주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예가 많다(신 28 :23, 24 참조). 본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겠다(R.K. Harrison).
=====14: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애통하니 - 여기에서는 네 가지의 짤막한 서술들이 등장하고 있다. '성문의 무리'의 문자적 번역은 '성문들'로서 유다의 전도시들을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예루살렘에서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소리가 백성들 중에서 올라온다. 우리는 민족 재앙 때에 볼 수 있는 민족적 애도의 장면을 소개받고 있는것이다. 이런 애도의 장면은 대개 곤경, 가뭄, 적의 침략과 그에 대한 패배 등에 대한서술로 시작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2-9절을 시편에 등장하는 애도가들과 같은, 예배석상에서의 애도가로 이해하고 있으나(시 70, 74편 ; 욜 1, 2장) 근거가 불확실한 견해이다. 클라크(Clarke)는 '애통하니'에 해당하는 '카다르'(* )를 '검다'라고 번역하며, 슬픔과 재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머리에서 발까지 검은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Clarke).
=====14:3
그 머리를 가리우며 - '가리우며'의 히브리어 '하파'(* )는 '덮다', '가리우다'는 뜻이지만 브라이트(J. Bright)는 본문을 '고개를 떨군 채'라고 번역하였다. 어쨌든 이는 당황과 비탄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4절 끝부분에도 나온다. 70인역(LXX)에는 4절 후반부에 이것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한 어구를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 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표현이다(Thompson).
=====14: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 '갈라지니'(* , 하타)는 '낙담하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메마른 땅이 쩍쩍 쪼개짐으로 인한 농부들의 비통한 심경을 암시적으로 전달하는 말이다(Feinberg). 한편 심한 가뭄시에 팔레스틴 땅의 균열은 어떤 곳에서는 폭이 한 규빗 정도 되는 곳도 있으며, 또 때로는 깊이가 사람의 키만큼 이를 때도 있다고 한다(Clarke).
=====14:5
가뭄으로 인해 들의 야생 동물들도 고초를 격는다. 암사슴이 새끼를 낳았지만 새끼를 먹일 풀이 없으므로 그 새끼를 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4:6
들 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같이 헐떡이며 - '사랑'으로 번역된 '탄님'(* )은 때로는 하마와 같은 물 속에서 사는 짐승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물 속에 있다가 건조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오곤 하였다. 그리고 들 나귀는 갈증이나 굶주림을 오래도록 견뎌내는 강한 체질을 가진 짐승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으로 재앙이 어느 정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본문의 '들 나귀'는 굶주림에 지쳐 있음은 물론 뜨거운 열기로 인해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Calvin).
=====14:7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 예레미야는 자신을 자기 백성과 동일시 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대변자로 나서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민족의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죄악을 고백하면서 구원해줄 것을 요청한다(Thompson).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름은 종종 그 이름을 가진 이의 본질적 의미는 '당신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이름에 맞도록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소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J. Bright). 한편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의 명성과 명예가 위태롭다고 생각하거나, 여호와께서 이 반역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가하는 것이 그의 이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시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축복 조항들이 가동되게 하셨던 것과 같이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들의 가동을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여기서 비록 저주받아 마땅한 백성이지만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하는 간절한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 하겠다.
=====14: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 주께서는 이 백성의 유일한 희망의 대상이라는 호소이다(Clarke).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 예레미야는 여기서 여호와께 어찌하여 이 곤궁한 때에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손처럼 이 땅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지를 묻고 있다. '행인'이라 하는 것은 밤중에 잠시 투숙하였다가 날이 밝는 대로 급히 떠나가야 하는 여행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14:9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자이오니 - 여호와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다시금 반복된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에 절실히 요구되었던 사안은 갈대아인의 진군에 의한 임박한 재난으로부터의 실질적인 구원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땅에 영원히 관심이 없는,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처럼 멀리 계신다.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괴리를 자초한 측은 바로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주권을 거부하였으며 또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았던 이런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로우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같은 소외의 감정은 오직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였던 것이며, 설령 그들이 이론적으로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와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자들에게로 국한될 것이다.
=====14:10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 '어그러진'에 해당하는 '누아'(* )는 '흔들리다', '방황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헛된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변덕스러움을 지적하신 내용이다. 그러한 방황과 변덕의 구체적인 예는 그들이 이방 열국이나 이방의 우상들을 의지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위기가 닥쳐올수록 이 백성은 사 30:15의 말씀처럼 잠잠하고 여호와를 신뢰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으나 정반대로 행동하였다(Calvin).
=====14:11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말라 - 7:16;11:14에 이어 중보 기도 금지 명령이 다시금 주어졌다. 백성들을 중재하는 일은 선지자들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삼상 7:8). 그러나 당시 유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12절에 가서는 그들에게 임할 재앙이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14:12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 형식에 치우친 종교 제사의 무익함이 재강조되고 있다. 순종이 결여된 '금식', '번제', '소제' 등은 여호와께 수납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칼', '기근', '염병' 등의 세 항목은 전쟁 때에 언제나 수반되는 것들이었으며, 구약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5:12;14:15 ;29:18;삼하 24:13 등). 이러한 재난들은 B.C. 586년 예루살렘 파괴 때 적나라하게 임했다.
=====14:13
클라크(Clarke)는 본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여 의미 전달을 명확히 해보고자 하였다 : '오, 여호와여. 그들은 참으로 지나치게 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처벌을 완화해주옵소서.
=====14:14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 여호와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밝히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설교했었지만 그들이 설교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고 아무런 가치없는 복술, 혹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했다. 예레미야와 같은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사이의 구별은 그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Thompson).
=====14:15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 여호와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자들은 제일 먼저 '칼'과 '기근'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쉽게 현혹되었던 불충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며,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의를 두다가 묻어줄 자도 없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거리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16절). 땅에 묻히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결말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14:16
그들의 악을 그 위에 - '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 )는 도덕적인 악이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재앙을 동시에 다 가리킨다.
=====14:17
내 눈이 밤낮으로 - 본문의 1인칭 주어인 '나'는 예레미야를 가리키다. 여기서 선지자는 반대 감정 병존 상태(ambivalence)인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멸 선고를 받은 백성들의 대표자인 입장에서는 가슴이 녹아 내리는 듯한 비애감을, 아울러 그 백성을 징벌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큰 아픔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D.R. Jones). 한편 '파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르'(* )는 단순한 부상(wound, NIV) 정도 이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분쇄', '파멸', '파괴' 등의 뜻인 바, 개역 성경의 번역이 정확하다 하겠다.
=====14:18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 가는 곳곳마다 끔찍하고 무서운 광경이다. 상처입은 자, 죽어가는 자, 기아에 허덕이는 자, 살해당한 자들뿐이다. 죽은 자를 묻어줄 자도 없으며, 죽어가는 자를 위로해줄 자도 없다. 구원과 희망이 될 만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다 땅에 두루 다니며 - 선지자나 제사장들도 그 성읍들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다닌다(Clarke). 블레이니(Blayney) 박사는 이 어구를 '그들은 돈벌이를 위해 물건을 싸들고 다니는 행상들처럼 거짓 교리나 잘못된 예언을 퍼뜨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라고 이해하였다.
=====14:19
7-9절과 13절에 이어 또다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가 나오고 있다. 22절까지 이어지는 이 기도는 아브라함과 (창 18:23-33) 모세의(출 32:11-13) 중재의 탄원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응답이 점차 강렬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움츠러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버리지 마옵소서'(9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때문임을 참작하여 주십시오'(13절), 그리고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주의 언약을 생각하사 용서해주십시오'(21절)라고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14:20
우리가 우리의 악과 인정하나이다 - '우리 조상의 죄악'이란 말 속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지금까지 축적된 민족 공동의 죄가 포함된다. 선지자는 지금 이 백성을 대신해서 그리고 자신과 백성을 동일시하여 죄악을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선지자의 고백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Clarke). 이처럼 당대의 죄악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악을 인식하는 것은 전형적인 애가의 형식을 반영한다(레 26:40;시 79:8,9; 106:6, D.R. Jones)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이 언약 당사자와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듯이(창 18:1-8). 그것을 상실하게끔 만든 죄악과 거기에 대한 책임 또한 양자에게 속하는 것이다(3:24;7:26 ;11:10;16:12,13 참조).
=====14: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미워하지 마옵소서 - 이 백성의 곤경에 대한 묘사와 자비를 구하는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열방은 여호와를 유다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의 신용과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말것이라는 호소이다(Thompson).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의해 오해와 목욕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백성의 죄악을 철저히 징계하신다. 주의 영광의 위 - '당신의 영광스러운 보좌'란 뜻이다(J. Bright). 여호와는 성전 안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보좌가 유다 민족의 안전에 대한 보증인 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적 실체가 결여된 채 형식적 종교 행사만 치르어지는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었다(마 24:2 참조).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 이 '언약'은 출 24:7, 8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언약을 파기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절하였으며, 우상에게 자신의 몸을 바쳤던 것이다. 언약의 한 당사자가 이를 파기한 이상, 상대방은 이제 언약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Clarke).
=====14:22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 예상되는 심각한 기근 상황과 관련되는 호소인 듯하다.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사 비를 주시는 것은 참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인 것이다(Clarke).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 이 어구는 '우리는 주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라고도 번역된다(J. Bright). 따라서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기를 거부한다면 철저히 망하고 말 것이라는 애절한 탄원이다. 그러나 이 백성이 여호와의 사랑과 은혜를 인정하면서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기다린다고해도 이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허황되고 속이 빈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뿐이었다(Thompson).
본장은 심판에 관한 일반적 예언(2-20장) 중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14,
15장) 회개를 촉구하던 다섯 번째 설교에 이어 회개하지 않는 유다인들을 위한 예레미
야의 중보 기도가 중점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현실적으로 닥친 대기근으로 인하여 진
정한 구원자가 오직 하나님이심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여전히 거짓 선지자
들의 달콤한 유록에 이끌려 회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세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러한 보장은 (1) 가뭄 때의 애가와 탄원,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서술하고 있는
전반부(1-16절), (2) 패배와 기근을 기근을 당한 때의 애가와 탄원을 서술하고 있는
후반부(17-22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임박한 심판의
재앙을 돌이키게 하는 원동력이 오로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와 자비로운 주권에 달려
있음을 중점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본장은 내용상 15장과 하나의 단위(unit)를 형성하고 있다. 이 두 부분은 내
용의 전개 과정이 하나님과 예레미야 사이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정리해보
면 다음과 같다.
+---------------------------------------------------------------------+
| A. 전제:심각한 가뭄에 직면한 유다인들(14:1-6) |
| B. 첫 번째 중보 기도(14:7-9) |
| C. 하나님의 응답(14:10-12) |
| B'. 두 번째 중보 기도(14:13) |
| C'. 하나님의 응답(14:14-18) |
| B''. 세 번째 중보 기도(14:19-22) |
| C''. 하나님의 응답(15:1-9) |
| A'. 결론: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15:10-21) |
+---------------------------------------------------------------------+
이와 같은 구성에 견주어서 본장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두 개의 평형
구도를 지닌 애가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 A. 14:1-6(가뭄) A'. 14:17b, 18(파멸) |
| B. 14:7-9(간구) B'. 14:19-22(간구) |
| C. 14:10-17a(하나님의 반응) C'. 15:1-4(하나님의 반응) |
| D. 15:5-9(하나님의 슬픔) |
+---------------------------------------------------------------------+
이상의 구조에 들어있는 내용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뭄'과 '파
멸'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그 성격에 있어서 '공동체적 애가'를 묘사하고 있다. (2)
'간구'를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개인적 애가'를 묘사하고 있다. (3) '하나님의 반응'
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주로 심판과 결부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4) '하나님의
슬픔'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임박한 심판의 불가피성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안타까
움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본장이 쓰여진 역사적 상황은 요호야김 시대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1-6절
과 17, 18절에서이 기근과 염병에 대한 서술은 전쟁으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유다의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8:21;10:19). 선지자는 민족의 고난을 인식하고 주
야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다. 어디로 가든지 시체가 있고 기아의 고통으로 인하여 신
음하는 백성들의 고난이 산재해 있다. 이처럼 바벧론의 1차 침략으로 인한 재앙을 목
결한 상태에서 저자는 그 슬픔을 기도의 형식을 애절하게 표출시킨다.
이상의 사실들을 배경으로 본장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본 단락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예레미야의 증보 기도가 세 번이나 연속
적으로 기술되어 있다(7-9, 13, 19-22절). 이 기도들은 내용에 있어서는 점점 더 면밀
하고도 구체적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심리상으로는 오히려 점점 위축되어진다. 이 사
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간구 내용 | 심리 상태 |
+-----------------+-------------------------+---------------------------+
|첫 번째 중보 기도| 죄 고백과 구원에 | 단순하게 하나님의 자비만 |
| (7-9절) | 관한 탄원 | 을 기대함 |
+-----------------+-------------------------+---------------------------+
|두 번째 중보 기도| 백성들의 완고함은 거짓 | 자신의 슬픔을 더욱 심도있 |
| | 선지자들 때문임을 구체적| 게 표현함 |
| (13절) | 으로 드러냄 | |
+-----------------+-------------------------+---------------------------+
|세 번째 중보 기도|언약을 기억하시어 자비를 | 예정된 심판이 피할 수 없음|
| | 베풀도록 같구함 | 을 인식하고 비통한 심정 |
| (19-22절) | | 에 도달함 |
+-----------------+-------------------------+---------------------------+
이상에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고난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근거들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애
통해 하며 기도했던 예레미야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으며, 오늘날도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울며 기도하는 남은 자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2) 본 단락에는 선지자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통하여 유다의 처참한 미
래가 생생하게 드러난다(10-12, 14-18절),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하고 마치 술
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는 것처럼 일관성없이 행동한다. 그 결과 멸망을 피할 수 없
게 되었다. 선지자로 하여금 더 이상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도록 요구하셨
으며, 머지않은 장래에 칼과 기근과 염벙을 통하여 멸망이 도래함을 알리신다. 선지자
는 참혹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확인한 후 비통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선처를 호소한다.
이상의 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선지자가 영적 후퇴 속에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비로 인함을 깨닫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
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 가뭄으로 인한 애가와 하나님의 응답(14:1-16)
본 단락은 유다 전국을 강타한 가뭄으로 인하여 야기된 고통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
하고 이에 따른 참회의 울부짖음과 애처로운 하소연을 담고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호소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계속
해서 부정적인 응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6절)와 (2)
선지자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서술하고 있는 중반부(7-12절), 그리고 (3) 거
짓 선지자들의 예언과 그에 따른 대가를 서술하고 있는 후반부(13-16절) 등으로 나누
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당시 유다에 팽베해 있던 거짓 희망과
하나님의 확고한 심판 선언을 대조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언약의 공백 상황을 효과적으
로 드러내고 있다.
한편, 연속된 하나의 내용(14:1-15:4)을 도입하는 개막시로서 등장하고 있는 본 단
락은 대부분 시적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1-9절은 애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10-16절은
짧은 산문체 단락의 연속적 기술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실을 배경으로 본 단락의 내
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래해보면 다음과 같다.
+-----------------------------------------------------------+
|(1) 서언(1절;17:8) |
|(2) 가뭄으로 인한 고난의 현장(2-6절;15:6) |
|(3) 참회의 울부짖음(7절;서 25:11) |
|(4)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의문(8, 9a절) |
|(5)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 확신과 호소(9b절) |
|(6) 하나님의 응답(10-12절) |
|(7) 거짓 선지자들의 실상과 그 결말(13-16절;8:11;겔 14:10 |
+-----------------------------------------------------------+
이상의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뭄이라는 범민족적 참사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설명한다.
이미 앞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3:3;12:4) 사실 가뭄과 기근은 언약적 저주의 중요한
상징이었다(레 26:18-20;신 28:22-24). 이제 실제로 가뭄의 재앙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으로부터 고통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는 그치고 저장된 물은 말라버렸다. 귀
인들이 종들을 시켜 우물에서 물을 떠오도록 명했으나 빈 그릇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땅은 비가 오지 않음으로 인해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농부들은 곡식
이 싣르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당황하게 된다(3절). 이런 상황에 대해 예레미야는
성읍에 있는 백성들과 시골에 있는 농부들의 슬픔과 수치로 머리를 가리웠다고 표현하
였다(삼하 15:30). 가뭄은 들에 있는 동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암컷들은 먹일
풀이 모자라기 때문에 새끼들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들 나귀들도 사랑처럼 물이 없
어 메마른 산에 있었다(시 42:1). 거짓 우물을 위해 생명의 물을 거절하였던 유다는
심각한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거절한 언약 백성은 약송의 땅에서
배척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가뭄의 재앙으로 인하여 드리는 기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심
각한 재앙으로 고통받는 유다는 이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
시도록 간청하였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요(17:13), 구세주라고 부
르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백이 단지 피상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들은 한쪽으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라고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악을 행하는 데 바
빴다. 결국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심판을 선언하셨다. 하나
님께서 칼이나 기근 대신에 영원한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선언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13절;5:12, 13;6:13, 14;7:4, 9, 10;27:16;28:2-4)을 신뢰한 유다는 칼과 기근으로
고집하게 될 때 참혹한 멸망을 경험하게 된다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2. 애가와 탄원(14:17-22)
본 단락은 선지자의 간절한 탄원이 애가 형식을 빌어 나타나는 부분으로서 유다에
미친 참상의 현장을 서술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아울러
이전에 맺어진 언약 관계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며 궁극적인 기대를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유다 곳곳에 미친 심판의 참상을 설명하고 있는 전반부(17,
18절), (2) 유다의 계속된 죄악을 인정하면서 이전의 언약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
비가 이루어지기를 설명하고 있는 후반부(19-22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도출시킴으로써 현재 유다
의 배도를 중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본 단락은 15:4까지 내용상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또한 구조적
전개에 있어서는 1-6절의 구조와 유사하다. 이상의 사실을 근거로 본 단락의 구조적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 염병에 대한 서술(17, 18절;겔 7:15) |
|(2) 유다 백성의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질문함(19절) |
|(3) 유다의 죄를 고백함(20절;시 32:5;단 9:8) |
|(4)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함(21절;시 106:45) |
|(5) 구원 요청의 이유를 하나님께 듬(22절) |
+------------------------------------------------------+
이상의 사실을 배경으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
다.
(1)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심판을 생각하며 커다란 슬픔에 잠기었다(17, 18절).
그는 예루살렘에 다가올 멸망에 대하여 외칠 때마다 계속적으로 눈물을 흘렸다(9:1,
18;13:17;애 3:48-51). 사실 예루살렘 성읍은 마치 중한 병에 걸마 가곧 죽게 될 처녀
딸과 같았다(6:14;8:21;10:19 참조). 그리하여 선지자는 유다의 고난을 인식하고 밤낮
으로 끊임없이 울고 있다. 예루살렘과 그 주위에 있는 변방 어디를 가든지 온통 칼로
살육당한 시체로 덮여 있었으며, 기근의 침식으로 인하여 점점 더 쇠퇴해졌다. 또한
지금까지 백성들을 가르쳤던 선지자와 제사장들도 모두 이리저리로 방황하기에 이르렀
다. 이러한 민족적 고난에 대해 예레미야는 한없는 비애를 느끼며 눈물로 밤낮을 지새
고 있다.
(2)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간섭해주시기를 간구하였으나 마음의 변화를
수반하지 못했다(19-22절). 커다란 재앙을 직접 목격한 유다는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격적 특성(7절), 예루
살렘 성전(그분의 영광스러운 보좌, 3:17;17:12), 언약(11:2-5) 등에 근거하여 하나님
의 도움과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의무를 상기시키려 했으나 반대
로 언약 백성으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실된 회개와 행
동의 변활르 가져오지 못했고, 단지 피상적인 후회에 그쳤다. 결국 유다는 가뭄을 그
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었다.
이상의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인류의 구원과만 관계한 분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한 분이심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를 모두 지배하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여기고 생활해야 할 것이다.
가뭄에 대하여 - 팔레스틴 땅에는 강우량의 부족으로 원래 가뭄이 잦기는 하였으나, 성경에서 가뭄은 기근과 함께 언약적 저주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예가 많다(신 28 :23, 24 참조). 본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겠다(R.K. Harrison).
=====14: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애통하니 - 여기에서는 네 가지의 짤막한 서술들이 등장하고 있다. '성문의 무리'의 문자적 번역은 '성문들'로서 유다의 전도시들을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예루살렘에서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소리가 백성들 중에서 올라온다. 우리는 민족 재앙 때에 볼 수 있는 민족적 애도의 장면을 소개받고 있는것이다. 이런 애도의 장면은 대개 곤경, 가뭄, 적의 침략과 그에 대한 패배 등에 대한서술로 시작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2-9절을 시편에 등장하는 애도가들과 같은, 예배석상에서의 애도가로 이해하고 있으나(시 70, 74편 ; 욜 1, 2장) 근거가 불확실한 견해이다. 클라크(Clarke)는 '애통하니'에 해당하는 '카다르'(* )를 '검다'라고 번역하며, 슬픔과 재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머리에서 발까지 검은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Clarke).
=====14:3
그 머리를 가리우며 - '가리우며'의 히브리어 '하파'(* )는 '덮다', '가리우다'는 뜻이지만 브라이트(J. Bright)는 본문을 '고개를 떨군 채'라고 번역하였다. 어쨌든 이는 당황과 비탄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4절 끝부분에도 나온다. 70인역(LXX)에는 4절 후반부에 이것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한 어구를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 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표현이다(Thompson).
=====14: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 '갈라지니'(* , 하타)는 '낙담하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메마른 땅이 쩍쩍 쪼개짐으로 인한 농부들의 비통한 심경을 암시적으로 전달하는 말이다(Feinberg). 한편 심한 가뭄시에 팔레스틴 땅의 균열은 어떤 곳에서는 폭이 한 규빗 정도 되는 곳도 있으며, 또 때로는 깊이가 사람의 키만큼 이를 때도 있다고 한다(Clarke).
=====14:5
가뭄으로 인해 들의 야생 동물들도 고초를 격는다. 암사슴이 새끼를 낳았지만 새끼를 먹일 풀이 없으므로 그 새끼를 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4:6
들 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같이 헐떡이며 - '사랑'으로 번역된 '탄님'(* )은 때로는 하마와 같은 물 속에서 사는 짐승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물 속에 있다가 건조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오곤 하였다. 그리고 들 나귀는 갈증이나 굶주림을 오래도록 견뎌내는 강한 체질을 가진 짐승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으로 재앙이 어느 정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본문의 '들 나귀'는 굶주림에 지쳐 있음은 물론 뜨거운 열기로 인해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Calvin).
=====14:7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 예레미야는 자신을 자기 백성과 동일시 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대변자로 나서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민족의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죄악을 고백하면서 구원해줄 것을 요청한다(Thompson).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름은 종종 그 이름을 가진 이의 본질적 의미는 '당신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이름에 맞도록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소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J. Bright). 한편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의 명성과 명예가 위태롭다고 생각하거나, 여호와께서 이 반역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가하는 것이 그의 이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시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축복 조항들이 가동되게 하셨던 것과 같이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들의 가동을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여기서 비록 저주받아 마땅한 백성이지만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하는 간절한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 하겠다.
=====14: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 주께서는 이 백성의 유일한 희망의 대상이라는 호소이다(Clarke).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 예레미야는 여기서 여호와께 어찌하여 이 곤궁한 때에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손처럼 이 땅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지를 묻고 있다. '행인'이라 하는 것은 밤중에 잠시 투숙하였다가 날이 밝는 대로 급히 떠나가야 하는 여행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14:9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자이오니 - 여호와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다시금 반복된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에 절실히 요구되었던 사안은 갈대아인의 진군에 의한 임박한 재난으로부터의 실질적인 구원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땅에 영원히 관심이 없는,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처럼 멀리 계신다.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괴리를 자초한 측은 바로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주권을 거부하였으며 또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았던 이런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로우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같은 소외의 감정은 오직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였던 것이며, 설령 그들이 이론적으로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와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자들에게로 국한될 것이다.
=====14:10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 '어그러진'에 해당하는 '누아'(* )는 '흔들리다', '방황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헛된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변덕스러움을 지적하신 내용이다. 그러한 방황과 변덕의 구체적인 예는 그들이 이방 열국이나 이방의 우상들을 의지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위기가 닥쳐올수록 이 백성은 사 30:15의 말씀처럼 잠잠하고 여호와를 신뢰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으나 정반대로 행동하였다(Calvin).
=====14:11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말라 - 7:16;11:14에 이어 중보 기도 금지 명령이 다시금 주어졌다. 백성들을 중재하는 일은 선지자들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삼상 7:8). 그러나 당시 유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12절에 가서는 그들에게 임할 재앙이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14:12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 형식에 치우친 종교 제사의 무익함이 재강조되고 있다. 순종이 결여된 '금식', '번제', '소제' 등은 여호와께 수납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칼', '기근', '염병' 등의 세 항목은 전쟁 때에 언제나 수반되는 것들이었으며, 구약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5:12;14:15 ;29:18;삼하 24:13 등). 이러한 재난들은 B.C. 586년 예루살렘 파괴 때 적나라하게 임했다.
=====14:13
클라크(Clarke)는 본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여 의미 전달을 명확히 해보고자 하였다 : '오, 여호와여. 그들은 참으로 지나치게 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처벌을 완화해주옵소서.
=====14:14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 여호와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밝히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설교했었지만 그들이 설교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고 아무런 가치없는 복술, 혹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했다. 예레미야와 같은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사이의 구별은 그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Thompson).
=====14:15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 여호와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자들은 제일 먼저 '칼'과 '기근'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쉽게 현혹되었던 불충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며,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의를 두다가 묻어줄 자도 없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거리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16절). 땅에 묻히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결말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14:16
그들의 악을 그 위에 - '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 )는 도덕적인 악이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재앙을 동시에 다 가리킨다.
=====14:17
내 눈이 밤낮으로 - 본문의 1인칭 주어인 '나'는 예레미야를 가리키다. 여기서 선지자는 반대 감정 병존 상태(ambivalence)인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멸 선고를 받은 백성들의 대표자인 입장에서는 가슴이 녹아 내리는 듯한 비애감을, 아울러 그 백성을 징벌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큰 아픔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D.R. Jones). 한편 '파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르'(* )는 단순한 부상(wound, NIV) 정도 이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분쇄', '파멸', '파괴' 등의 뜻인 바, 개역 성경의 번역이 정확하다 하겠다.
=====14:18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 가는 곳곳마다 끔찍하고 무서운 광경이다. 상처입은 자, 죽어가는 자, 기아에 허덕이는 자, 살해당한 자들뿐이다. 죽은 자를 묻어줄 자도 없으며, 죽어가는 자를 위로해줄 자도 없다. 구원과 희망이 될 만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다 땅에 두루 다니며 - 선지자나 제사장들도 그 성읍들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다닌다(Clarke). 블레이니(Blayney) 박사는 이 어구를 '그들은 돈벌이를 위해 물건을 싸들고 다니는 행상들처럼 거짓 교리나 잘못된 예언을 퍼뜨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라고 이해하였다.
=====14:19
7-9절과 13절에 이어 또다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가 나오고 있다. 22절까지 이어지는 이 기도는 아브라함과 (창 18:23-33) 모세의(출 32:11-13) 중재의 탄원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응답이 점차 강렬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움츠러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버리지 마옵소서'(9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때문임을 참작하여 주십시오'(13절), 그리고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주의 언약을 생각하사 용서해주십시오'(21절)라고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14:20
우리가 우리의 악과 인정하나이다 - '우리 조상의 죄악'이란 말 속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지금까지 축적된 민족 공동의 죄가 포함된다. 선지자는 지금 이 백성을 대신해서 그리고 자신과 백성을 동일시하여 죄악을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선지자의 고백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Clarke). 이처럼 당대의 죄악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악을 인식하는 것은 전형적인 애가의 형식을 반영한다(레 26:40;시 79:8,9; 106:6, D.R. Jones)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이 언약 당사자와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듯이(창 18:1-8). 그것을 상실하게끔 만든 죄악과 거기에 대한 책임 또한 양자에게 속하는 것이다(3:24;7:26 ;11:10;16:12,13 참조).
=====14: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미워하지 마옵소서 - 이 백성의 곤경에 대한 묘사와 자비를 구하는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열방은 여호와를 유다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의 신용과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말것이라는 호소이다(Thompson).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의해 오해와 목욕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백성의 죄악을 철저히 징계하신다. 주의 영광의 위 - '당신의 영광스러운 보좌'란 뜻이다(J. Bright). 여호와는 성전 안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보좌가 유다 민족의 안전에 대한 보증인 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적 실체가 결여된 채 형식적 종교 행사만 치르어지는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었다(마 24:2 참조).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 이 '언약'은 출 24:7, 8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언약을 파기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절하였으며, 우상에게 자신의 몸을 바쳤던 것이다. 언약의 한 당사자가 이를 파기한 이상, 상대방은 이제 언약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Clarke).
=====14:22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 예상되는 심각한 기근 상황과 관련되는 호소인 듯하다.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사 비를 주시는 것은 참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인 것이다(Clarke).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 이 어구는 '우리는 주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라고도 번역된다(J. Bright). 따라서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기를 거부한다면 철저히 망하고 말 것이라는 애절한 탄원이다. 그러나 이 백성이 여호와의 사랑과 은혜를 인정하면서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기다린다고해도 이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허황되고 속이 빈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뿐이었다(Thompson).
본장은 심판에 관한 일반적 예언(2-20장) 중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14,
15장) 회개를 촉구하던 다섯 번째 설교에 이어 회개하지 않는 유다인들을 위한 예레미
야의 중보 기도가 중점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현실적으로 닥친 대기근으로 인하여 진
정한 구원자가 오직 하나님이심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여전히 거짓 선지자
들의 달콤한 유록에 이끌려 회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세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러한 보장은 (1) 가뭄 때의 애가와 탄원,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서술하고 있는
전반부(1-16절), (2) 패배와 기근을 기근을 당한 때의 애가와 탄원을 서술하고 있는
후반부(17-22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임박한 심판의
재앙을 돌이키게 하는 원동력이 오로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와 자비로운 주권에 달려
있음을 중점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본장은 내용상 15장과 하나의 단위(unit)를 형성하고 있다. 이 두 부분은 내
용의 전개 과정이 하나님과 예레미야 사이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정리해보
면 다음과 같다.
+---------------------------------------------------------------------+
| A. 전제:심각한 가뭄에 직면한 유다인들(14:1-6) |
| B. 첫 번째 중보 기도(14:7-9) |
| C. 하나님의 응답(14:10-12) |
| B'. 두 번째 중보 기도(14:13) |
| C'. 하나님의 응답(14:14-18) |
| B''. 세 번째 중보 기도(14:19-22) |
| C''. 하나님의 응답(15:1-9) |
| A'. 결론: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15:10-21) |
+---------------------------------------------------------------------+
이와 같은 구성에 견주어서 본장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두 개의 평형
구도를 지닌 애가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 A. 14:1-6(가뭄) A'. 14:17b, 18(파멸) |
| B. 14:7-9(간구) B'. 14:19-22(간구) |
| C. 14:10-17a(하나님의 반응) C'. 15:1-4(하나님의 반응) |
| D. 15:5-9(하나님의 슬픔) |
+---------------------------------------------------------------------+
이상의 구조에 들어있는 내용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뭄'과 '파
멸'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그 성격에 있어서 '공동체적 애가'를 묘사하고 있다. (2)
'간구'를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개인적 애가'를 묘사하고 있다. (3) '하나님의 반응'
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주로 심판과 결부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4) '하나님의
슬픔'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임박한 심판의 불가피성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안타까
움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본장이 쓰여진 역사적 상황은 요호야김 시대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1-6절
과 17, 18절에서이 기근과 염병에 대한 서술은 전쟁으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유다의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8:21;10:19). 선지자는 민족의 고난을 인식하고 주
야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다. 어디로 가든지 시체가 있고 기아의 고통으로 인하여 신
음하는 백성들의 고난이 산재해 있다. 이처럼 바벧론의 1차 침략으로 인한 재앙을 목
결한 상태에서 저자는 그 슬픔을 기도의 형식을 애절하게 표출시킨다.
이상의 사실들을 배경으로 본장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본 단락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예레미야의 증보 기도가 세 번이나 연속
적으로 기술되어 있다(7-9, 13, 19-22절). 이 기도들은 내용에 있어서는 점점 더 면밀
하고도 구체적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심리상으로는 오히려 점점 위축되어진다. 이 사
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간구 내용 | 심리 상태 |
+-----------------+-------------------------+---------------------------+
|첫 번째 중보 기도| 죄 고백과 구원에 | 단순하게 하나님의 자비만 |
| (7-9절) | 관한 탄원 | 을 기대함 |
+-----------------+-------------------------+---------------------------+
|두 번째 중보 기도| 백성들의 완고함은 거짓 | 자신의 슬픔을 더욱 심도있 |
| | 선지자들 때문임을 구체적| 게 표현함 |
| (13절) | 으로 드러냄 | |
+-----------------+-------------------------+---------------------------+
|세 번째 중보 기도|언약을 기억하시어 자비를 | 예정된 심판이 피할 수 없음|
| | 베풀도록 같구함 | 을 인식하고 비통한 심정 |
| (19-22절) | | 에 도달함 |
+-----------------+-------------------------+---------------------------+
이상에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고난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근거들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애
통해 하며 기도했던 예레미야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으며, 오늘날도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울며 기도하는 남은 자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2) 본 단락에는 선지자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통하여 유다의 처참한 미
래가 생생하게 드러난다(10-12, 14-18절),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하고 마치 술
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는 것처럼 일관성없이 행동한다. 그 결과 멸망을 피할 수 없
게 되었다. 선지자로 하여금 더 이상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도록 요구하셨
으며, 머지않은 장래에 칼과 기근과 염벙을 통하여 멸망이 도래함을 알리신다. 선지자
는 참혹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확인한 후 비통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선처를 호소한다.
이상의 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선지자가 영적 후퇴 속에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비로 인함을 깨닫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
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 가뭄으로 인한 애가와 하나님의 응답(14:1-16)
본 단락은 유다 전국을 강타한 가뭄으로 인하여 야기된 고통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
하고 이에 따른 참회의 울부짖음과 애처로운 하소연을 담고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호소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계속
해서 부정적인 응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6절)와 (2)
선지자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서술하고 있는 중반부(7-12절), 그리고 (3) 거
짓 선지자들의 예언과 그에 따른 대가를 서술하고 있는 후반부(13-16절) 등으로 나누
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당시 유다에 팽베해 있던 거짓 희망과
하나님의 확고한 심판 선언을 대조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언약의 공백 상황을 효과적으
로 드러내고 있다.
한편, 연속된 하나의 내용(14:1-15:4)을 도입하는 개막시로서 등장하고 있는 본 단
락은 대부분 시적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1-9절은 애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10-16절은
짧은 산문체 단락의 연속적 기술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실을 배경으로 본 단락의 내
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래해보면 다음과 같다.
+-----------------------------------------------------------+
|(1) 서언(1절;17:8) |
|(2) 가뭄으로 인한 고난의 현장(2-6절;15:6) |
|(3) 참회의 울부짖음(7절;서 25:11) |
|(4)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의문(8, 9a절) |
|(5)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 확신과 호소(9b절) |
|(6) 하나님의 응답(10-12절) |
|(7) 거짓 선지자들의 실상과 그 결말(13-16절;8:11;겔 1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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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뭄이라는 범민족적 참사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설명한다.
이미 앞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3:3;12:4) 사실 가뭄과 기근은 언약적 저주의 중요한
상징이었다(레 26:18-20;신 28:22-24). 이제 실제로 가뭄의 재앙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으로부터 고통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는 그치고 저장된 물은 말라버렸다. 귀
인들이 종들을 시켜 우물에서 물을 떠오도록 명했으나 빈 그릇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땅은 비가 오지 않음으로 인해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농부들은 곡식
이 싣르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당황하게 된다(3절). 이런 상황에 대해 예레미야는
성읍에 있는 백성들과 시골에 있는 농부들의 슬픔과 수치로 머리를 가리웠다고 표현하
였다(삼하 15:30). 가뭄은 들에 있는 동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암컷들은 먹일
풀이 모자라기 때문에 새끼들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들 나귀들도 사랑처럼 물이 없
어 메마른 산에 있었다(시 42:1). 거짓 우물을 위해 생명의 물을 거절하였던 유다는
심각한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거절한 언약 백성은 약송의 땅에서
배척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가뭄의 재앙으로 인하여 드리는 기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심
각한 재앙으로 고통받는 유다는 이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
시도록 간청하였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요(17:13), 구세주라고 부
르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백이 단지 피상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들은 한쪽으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라고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악을 행하는 데 바
빴다. 결국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심판을 선언하셨다. 하나
님께서 칼이나 기근 대신에 영원한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선언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13절;5:12, 13;6:13, 14;7:4, 9, 10;27:16;28:2-4)을 신뢰한 유다는 칼과 기근으로
고집하게 될 때 참혹한 멸망을 경험하게 된다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2. 애가와 탄원(14:17-22)
본 단락은 선지자의 간절한 탄원이 애가 형식을 빌어 나타나는 부분으로서 유다에
미친 참상의 현장을 서술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아울러
이전에 맺어진 언약 관계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며 궁극적인 기대를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유다 곳곳에 미친 심판의 참상을 설명하고 있는 전반부(17,
18절), (2) 유다의 계속된 죄악을 인정하면서 이전의 언약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
비가 이루어지기를 설명하고 있는 후반부(19-22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도출시킴으로써 현재 유다
의 배도를 중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본 단락은 15:4까지 내용상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또한 구조적
전개에 있어서는 1-6절의 구조와 유사하다. 이상의 사실을 근거로 본 단락의 구조적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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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염병에 대한 서술(17, 18절;겔 7:15) |
|(2) 유다 백성의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질문함(19절) |
|(3) 유다의 죄를 고백함(20절;시 32:5;단 9:8) |
|(4)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함(21절;시 106:45) |
|(5) 구원 요청의 이유를 하나님께 듬(2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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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사실을 배경으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
다.
(1)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심판을 생각하며 커다란 슬픔에 잠기었다(17, 18절).
그는 예루살렘에 다가올 멸망에 대하여 외칠 때마다 계속적으로 눈물을 흘렸다(9:1,
18;13:17;애 3:48-51). 사실 예루살렘 성읍은 마치 중한 병에 걸마 가곧 죽게 될 처녀
딸과 같았다(6:14;8:21;10:19 참조). 그리하여 선지자는 유다의 고난을 인식하고 밤낮
으로 끊임없이 울고 있다. 예루살렘과 그 주위에 있는 변방 어디를 가든지 온통 칼로
살육당한 시체로 덮여 있었으며, 기근의 침식으로 인하여 점점 더 쇠퇴해졌다. 또한
지금까지 백성들을 가르쳤던 선지자와 제사장들도 모두 이리저리로 방황하기에 이르렀
다. 이러한 민족적 고난에 대해 예레미야는 한없는 비애를 느끼며 눈물로 밤낮을 지새
고 있다.
(2)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간섭해주시기를 간구하였으나 마음의 변화를
수반하지 못했다(19-22절). 커다란 재앙을 직접 목격한 유다는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격적 특성(7절), 예루
살렘 성전(그분의 영광스러운 보좌, 3:17;17:12), 언약(11:2-5) 등에 근거하여 하나님
의 도움과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의무를 상기시키려 했으나 반대
로 언약 백성으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실된 회개와 행
동의 변활르 가져오지 못했고, 단지 피상적인 후회에 그쳤다. 결국 유다는 가뭄을 그
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었다.
이상의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인류의 구원과만 관계한 분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한 분이심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를 모두 지배하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여기고 생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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