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무슨 연고니이까 - 예레미야 선지자는 악한 자들의 번성에 대해 탄원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끊임없이 적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악이 그처럼 종종 맹위를 떨칠 수 있는지, 그리고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겪으며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의아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모든 것이 다 바르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듯한 일들이 나타나는 사실에 대해 납득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는 바로 이 주제를 놓고 하나님과 쟁론을 벌이고자 하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다.
=====12: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뿌리가 박히고 - 예레미야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 중의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이러한 자들을 심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악인의 번성에 대한 의구심은 욥 21:7 이하에서도 표명된 바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는 말씀을 통해 찾아질 수 있겠다. 즉, 하나님의 섭리는 단순한 인과 응보의 법칙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악인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종국적으로 엄청난 심판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악인을 번성케 하셨다기보다는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악인이 번성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해 두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보다 차원 높은 공의와 자비의 실행을 위한 계획이 담겨 있다 하겠다.
=====12:3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그들을 끌어내시되 - 예레미야는 자신의 항변의 근거를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서 찾고자 한다. 즉 악행 중에서도 번영을 누리는 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오직 주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왔음을 주께서 잘 아신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행악자들을 도살당할 양을 끌어내듯이 끌어내실 것을 탄원한다.'끌어내시되'에 해당하는 '하티켐'(* )은 '잡아떼다', '근절하다', '당기다'는 뜻의 '나타크'(* )의 히필형으로서 완전하고 철저한 파멸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Delitzsch).
=====12:4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 혹자는 본절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 역시 1절 이하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확실하다. 예레미야는 창궐하는 악한 새력들로 말미암아 그 땅의 모든 거민과 심지어 짐승들에게까지 재앙이 미치게 되었음을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C.L. Feinberg) 이런 맥락에서 존 브라이트(J. Bright)는 이 부분을 다음 구절과 연결시켜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 '거기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짐승들과 새들이 모두 멸절하였습니다.'=====12:5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느닷없는 대답을 볼 수 있다. 아마 하나님은 '현재의 이런 고난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더욱 험난한 일이 닥치면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하고 타이르시고자 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또한 두 가지 은유법이 쓰이고 있는데, 첫 번째 것은 보행자와의 경주가 힘이 드는데, 어찌 말과의 경주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박해나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가 장차 임할 재난과 파멸에 비하면 은유는 요단 강의 창일함에 대한 내용으로서, 이것 역시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이 평화로운 땅을 덮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12:6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 5절 말씀에 대한 하나의 실례로서, 집안 사람들에게마저 핍박을 당하는 고통스럽고 다급한 상황이 소개되고 있다(Delitzsch).한편, 예수께서도 성도들의 당할 핍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셨다(마 10:21).
=====12:7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내 집, 내 산업,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과는 내용상 정반대되는 동사들이 쓰이고 있는데 버리며, 내어던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란 말들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의 애정과 보호의 대상이었던 백성이었지만, 이제 심판이 불가피한 것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12:8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는 고로 - 이는 유다 백성들의 뻔뻔한 반항심을 묘사한 말이다. 그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악의에 찬 교만한 행동을 보였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참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Calvin).
=====12:9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 '무늬 있는'의 히브리어 '차부아'(* )에 혹자는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육식조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한다(Blayney). 그러나 이 단어가 분사형인 점을 중시할 때, 이것은 단지 '매'를 수식하는 말로 이해됨이 더 낫겠다. 벌게이트역(Vulgate)이나 시리아역(Syriac Versions)은 이를 '다채로운', '변색된' 등의 의미로 옮겼다. 결국 '무늬 있는 매'란 포학하여 길들이기 힘든 완고함(Calvin), 우상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종교적 혼합주의, 가증스러운 변절성 등을 암시하는 듯하다.
=====12:10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 이 구절은 빈정대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즉 이제 유다 백성은 주변 열국들의 약탈과 유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적들에는 모압, 블레셋, 암몬, 앗수르, 애굽 등과 함께 특히 갈대아인들까지 포함될 수 있겠다(Clarke). 한편 하나님의 백성을 포도원에다 비유하는 표현은 이사야에서도 자주 나타난다(사 3:14;5:1-7).
=====12:11
온 땅이 황무함은 - 대적들의 침입으로 유다 땅 전체가 초토화되리라는 예언이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B.C. 7세기 말경 유다의 어떤 도시들, 예컨대 라기스 같은 도시는 두 단계에 걸쳐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12:12
훼멸하는 자들이 광야 모든 자산 위에 이르렀고 - 이들 '훼멸하는 자들', 곧 파괴자들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도구로서 그의 심판의 목적을 성취시키게 될 것이다. 이런 자들 중에는 느부갓네살(34:2, 3)과 앗수르 군대(사 10:5, 6)도 들어 있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실행에 옮기시는 날이면, 그 누구도 환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편, '혈육 있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사르'(* )는 창 6:12의 용례에서 미루어 볼 때 죄악된 인생을 암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12:13
우리가 말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 본절은 7-12절에 언급된 파멸 상황에 대한 결론 역할을 하는 바, 유다 백성의 죄악된 행위는 결국 그들의 기대와 노력과는 정반대의 불운을 초래할 수 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시사한다(Delitzsch). 그리고 구체적으로 본문은 애굽을 의지했다가 도리어 낭패에 봉착하게 될, 혹은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할 사실에 대한 언급이라 하겠다.
=====12:14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버리겠고 - 유다를 황폐화시키려고 작당한 주변의 모든 이웃 나라들은 이제 그들 차례를 맞이하여 황폐화되고 말 것이란 내용이다. 그들 역시 사악하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공의의 집행인들로 삼았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똑같이 공의의 집행이 시행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종종 한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악한 민족을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그런 다음 다른 민족을 불러 그 악한 민족을 응징하셨다(Clarke, Harrison).
=====12:15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 이것은 포로에서부터 귀환과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서, 여기에는 또한 적들 중에서도 얼마정도는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Clarke).
=====12:16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 원문상 이 구절은 '그들이 배우고 또 배우면'이라는 강력한 조건절로 시작된다. 또 이 구절뿐만 아니라 10:2에도 언급되고 있는 '도'(* , 데레크)란 '길', '여정', '양식' 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종교적 관행, 곧 여호와 신앙을 뜻하는 것 같다. 이들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이웃이 하나님의 관심의 테두리 내에 포함될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를 따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본문에서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맹세를 주장하는 자가 여호와를 섬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창 31:51-53 참조).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 전에는 그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으며 또한 바알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가르쳤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고 여호와를 그들의 주권적인 주시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장성할 것이고 또 하나님의 백성 중에 들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약속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놀라운 우주적 구원의 성격을 띤 분명한 서술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원수라고 하더라도 구원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유용한 것이다.
=====12:17
그리하지 아니하면 뽑으리라 -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는 자면, 이스라엘이든지 이방이든지 간에 재앙을 받아 끝장이 날 것이다.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가능성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Thompson).
본장은 파기된 언약을 다루고 있는 말씀(11, 12장)의 결론 부분으로서 후반부
(11:18-23)에서 언급된 아나돗 사람들의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한 암살 음모 사건과 직
접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항변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구체적으로 진술함으로써 사악한 유다 거민들의 비참한 결말을 예언
하고 있다. 아울러 징벌의 궁극적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개와 회복임자르 약속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1) 아나돗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예레미야의 항변을 진술하고
있는 전반부(1-6절)와 (2) 아나돗 거민들의 행동을 통한 유다 거민 전체의 재앙을 선
언하고 있는 중반부(7-13절), 그리고 (3)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진
술하고 있는 후반부(14-17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
자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징계와 의인의 최종적인 구원의 사실을 알려줌으로
써 절망 가운데 처해 있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다.
한편, 전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장의 전반부(1-6절)와 전장의 후반부
(11:18-23)는 형태상으로 매우 유사하다. 두 부분은 모두 주제 전개상 애가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유사한 표현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1절의 '주는 의로우시니이다'라는 언급은 11:20의 '공의로 판단하시는 만군의 하
나님'이라는 기도의 반향(echo)으로 볼 수 있다. (2)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을 나
타내는 주제에 있어서 3절의 '하나님께서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하나님'과 문맥상으로 통한다. (3) 두 부분은 모두 '양'에 관한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3절;11:19), 동시에 다양한 원예적 표현-나무, 과실, 뿌리, 열매, 채
소-을 사용하고 있다(2, 4절;11:19) (4) 두 부분은 모두 예레미야의 친족에 관하여 진
술하고 있다(6절;11:21-23).
이상의 유사점들을 지닌 본장과 11장이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적 주제를 다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
| (1) 언약의 본질 제시와 그것에 충실할 것을 요구(11:1-17) |
| (2) 이에 대한 유다인의 입장을 아나돗 사건을 통해 효과적으로 극대화(11:18-12:|
| 6) |
| (3) 유다의 거부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과 유다에 임할 재앙 선포(12:7-13) |
| (4) 재앙 이후의 회복을 선언함(12:14-17) |
+------------------------------------------------------------------------------+
아울러 이러한 문맥적 이해를 배경으로 본장의 구조적 특성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는 '예레미야의 질문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형식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 토대로 본장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 서론:악인의 형통한 이유에 관한 예레미야의 질문(1-|
| 4절) |
|(2) 본론:(가) 하나님의 간접적인 응답(5, 6절) |
| (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7-13절) |
|(3) 징계의 궁극적인 목적(회개와 회복을 위한 것임, 14-|
| 17절) |
+-----------------------------------------------------+
이상의 사실들을 토대로 하여 본장의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를 암살하려 했던 아나돗 거민들의 형태(11:18-23절)를 통하여 유다
백성 전체의 현실에 대한 강한 딜레마를 표출시키고 있다. 즉, 이와같이 악한 백성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형통하며 번영하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이다(1-4절). 이 의문은 단
순히 자신에게 해를 입히려 한 아나돗 거민들에 대한 반발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
라, 자신의 가족이나 진배없는 고향 사람들의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도대체 유다 전체
가 지금 언약 백성으로서 어떠한 상태에까지 도달했는지, 과연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결국 저자는 언약을 파기한 유
다 백성들의 운명과 최후에 대해 심각한 고뇌와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2) 본장에는 유다의 정체와 그 미래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상징적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다(7-17절). 이 사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내 산업(7절) |유다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가리킴 |
+-----------------------------+------------------------------------------------+
|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7절)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 |
+-----------------------------+------------------------------------------------+
| 삼림 중의 사자(8절) |참선지자를 핍박하는 유다인들의 성품에 대한 비유 |
+-----------------------------+------------------------------------------------+
|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합주의적 종 |
| 무늬 있는 매(9절) |교 사상을 가졌던 유다인들에 대한 비유적 표현. |
| | |
+-----------------------------+------------------------------------------------+
|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국토를, 간접적으로는 유 |
| 내 포도원(10절) |다인들을 가리킴(사 5:1-7) |
| | |
+-----------------------------+------------------------------------------------+
| 산업(14, 15절) |하나님과 유다와의 언약 관계를 통해 주어진 해택 |
+-----------------------------+------------------------------------------------+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유다의 독특한 위치를 상기
시키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강력히 촉구하는 것이다. 본
장을 통해 우리는 택함을 받은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절감하게 된
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악한 범죄의 결과로 말미압아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될 운명
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행동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해
야 할 것이다.
1. 선지자의 질문(12:1-6)
본 단락은 예레미야 자신의 고백과도 같은 기도로서 선지자의 깊은 내적 성찰의 모
습을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고향 사람들조차도 자신을 해치고자 한다는 사실을 깨달
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악인의 길이 형통한 까닭을 질문하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간접적으로 응답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필연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예레미야의 하나님께 대한 질문과 항변을 서술하고 있는 전
반부(1-4절), (2) 하나님의 응답을 언급하고 있는 후반부(5, 6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당시 유다 백성들의 영적 무감각, 곧 언약
백성으로서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오해를 드러냄으로써 다가올 심판의 정당성을 강조
하는 동시에 악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응징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본 단락은 전장의 후반부(11:18-23)와 하나의 동일한 단위를 이루고 있다.
다만 전장(11장)이 현실적인 사건 자체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본 단락은 그 사
건을 접한 선자자가 골똘히 생각해온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 저자는 '공의의 하나님'
이라는 대전제하에서 현실 속에서의 악인의 형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일
종의 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본 단락의 구조를 면
밀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1) 예레미야의 질문(1절):하나님의 공의와 악인의 번영 간의 관계 |
| (2) 현실의 긴장 관계(2절):악인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나 그들은 |
| 하나님을 부인함 |
| (3) 예레미야의 요청(3절):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요구함 |
| (4) 유다 백성의 현실(4절):계속하여 안전할 것임을 기대하고 있음 |
| (5) 하나님의 응답(5, 6절):선지자를 격려함 |
+-----------------------------------------------------------------+
또한 이상의내용을 좀더 효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본 단락에서는 두 가지 특이
한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첫째, 비유적 기법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성(2절, 원예적
표현)과 유다의 심판(3절, 양)이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둘째, 은유법적 기법으로서 예
레미야의 사역의 모습(5절, 경주)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배경으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악한 자들의 번영에 관한 예레미야의 불평이 드러나 있다(1-4절). 예레미야
는 하나님께 고소하면서(2:29) 우선적으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에 대하여 재차 묻곤 한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죄를 근본적으로 미워하신다면, 왜 그 사악한 자들의 길이 그토록 번영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욥 21:7;시 73:3-5, 12;94:3). 사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
성들을 심으신 후 뿌리가 박히고 성장해서 열매를 맺도록 만드셨다고 생각했다(2절).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자신들 가운데서 벌어
지고 있는 일들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단언했던 것이다(시 73:11;94:7). 이런 어
처구니 없는 상황을 목격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도록 요
구했다(11:20). 마치 양을 도살하기 위해서 끌어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끌어
내시기를 원했다(3절). 결국 선지자는 악인의 형통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하나님의
공정한 판결이 역사 현장에 드러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2) 악인의 일시적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이 기술되어 있다(5, 6절). 우선 하
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만일 현재의 상황을 어렵다고 이해하고 있다면, 장래에는 훨
씬 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5절).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
님께서는 두 가지의 비유(경마와 도보 횡단)를 사용하셨다. 만일 예레미야가 사람들과
도보로 경주를 하다가 지쳤다면 나중에 어떻게 말과 경주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범람한 요단 강물 속으로 던져졌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만
일 평화스러운 때문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물으신다. 아울러 현실적으로 악인들의 득세가 더욱 심해질 것음을 말씀하신
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팜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진다. 하나님은 악인의 번영이 극에 달할수
록 파멸이 임박해옴을 설명하시면서 소망을 가지고 낙관적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신
다.
이상의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 기준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자의 기준은 시간상으로 볼 때 현재가 아니라
미래여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환난과 고통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영광과 축
복을 생각하며 가볍게 지나쳐야 할 것이다.
2. 재앙 선언의 반복(12:7-13)
본 단락은 11:18에서부터 계속된 예레미야에 대한 음모 계획의 언급을 중단하고 다
시 한번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배척한 아나돗 거
민들의 태도를 유다 전체의 상황으로 간주하고 유다의 원수들을 도구로 하여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유다를 대적의 손에 넘기신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전반
부(7-9절), (2) 그로 인하여 황폐케 될 유다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는 후반부(10-13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악인의 결국에 대한 하나
님의 계획에 대해 설명한다. 즉, 악인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서
멸망당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단락은 전 단락과 유사한 형식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서 그 내용 전개에
있어서 다소 과정법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애가의 양식을 사용하
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하여 본 단락의 구조적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
다.
+---------------------------------------------------------+
| A. 유다는 대적의 손에 양도될 것임(7절) |
| B. 유다의 반응과 지속적인 재앙(8, 9절) |
| B'. 유다의 상태와 지속적인 재앙(10, 11절) |
| A'. 유다는 대적의 손에 양도될 것임(12, 13절) |
+---------------------------------------------------------+
또한, 본문은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표현법을 사용한
다. 첫째, 유다를 '내 집', 내 산업', '내 사랑하는 것'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7-9
절). 이 용어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묘사할 때 주로 쓰인다. '집'이
란 용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때 훈히 사용하고 있는 '내 산업'(내 기
업)이란 말과 주로 평행을 이루어(신 9:29;욜 2:17;3:2)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11:15;사 5:1). 둘째, 심판과 관련하여 '버리며', '내어던져', '대적
의 손에 붙었으미'(7절) 등과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이 동사들은 자기 백성에게 심판
을 가져오신 이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셋째, 유다를
대적하는 자들에 관한 묘사로서 '매', '들짐승', '목자', '훼파하는 자' 등과 같은 표
현이 쓰인다(9, 10절).
이상과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본 단락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던(11:18-12:6) 유
다에 대한 심판 선언을 제차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버리고 유다의 원수들에게
로 돌아선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예레미야는 유다를 자신의 집으로, 유업을
이어받을 자로(10:16), 사랑을 받은 자로 묘사하면서 대적의 손에 언약 백성을 넘겨주
는 데 따른 고통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심판을 받은 유다는 마치 하나님
을 향하여 울부짖는 사자와도 같이 반항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여전히 회개치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유다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며 약탈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약탈은 '목자'들이 포도원을 짓밟아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도구인 이방 민족에 의하여 칼로 황폐케 되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황폐의 결과로 말미암아 밀을 뿌렸던 자들은 쭉정이만을 거
두는 수치스런 심판의 수확을 하게 된다(레 26:16;신 28:38;호 8:7;미 6:15). 결국 예
레미야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거룩성을 상살한 유다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거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유다는 하나님의 선태된 백성
이었지만 율법을 어겼으므로 이방인에 의해 점령당하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므
로 신자는 죄를 과소 평가하지 말고 더욱 성결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회복에 대한 약속(12:14-17)
본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유다를 유린하였던 이방을 하나님의 적으
로 묘사하며, 결국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겪게 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동시에 열
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언약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의지하여 산다면 구
속의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사 2:1-4;19:16-25;56:6-8;60:11-14;미 4:1-3). 이
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1) 유다의 회복을 선언하고 있는 전반부(14, 15절)
와 (2) 이방의 회개와 구속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후반부(16, 17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적 특성을 분켱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본 단락에서는 1:10에서 쓰인 '뽑다', '세우다', '멸하다'등의 단어들이 발
견된다. 저자는 이처럼 유사한 단어의 재용(再用)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동시에 사역의 성격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배경으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한 사실을 근거로 그 산업에 침입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뿌리째 뽑혀질
것을 선언한다(25:12-14, 27-29;46-51장).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 백성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파괴당하도록 허락하시지만 흩어진 후에 다시 약속의 땅으로 모으실 것이다
(31:7-14;겔 37:1-14). 결국 유다의 추방은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한번 더 남은 자들에게 동정심을 보여주시며, 파기된 언약을 새로운 형태로 회복시키
신다. 이와 같은 약속은 본서의 여러 구절을 포함하여 구약의 수많은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16:15;23:3;24:6;27:22;29:10, 14;30:3;32:37;33:10, 11).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의 영원성에 근거하여 언약의 회복과 이방의 멸망을 확신하고 있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면서도 한편으로 긍휼을 베푸사
언약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고 말한다. 비록 적대적인 이방일지라도 유
다의 종교를 따르고 언약의 하나님을 경배하면 구원의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하
나님은 편협한 민족신이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음을 가진 자를 모두 받아들이는 우주적인 분이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러한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타락으로 인도한 이방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약 백성에 접붙여진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방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종교적 헌신에 있어서 깊은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전에 그들을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바알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을 돌이켜 재교육을 받고 하나님을 그들의 주권적인 주로서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 속하여 발전할 것이다.
이상의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유다가 비록 행악을 일삼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결코 변개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신자가 어떤 상태에서도 구원에서 단절될 수 없다는 견인(堅忍)에 대한 확신을 불러일으킨다(롬 8:35).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무슨 연고니이까 - 예레미야 선지자는 악한 자들의 번성에 대해 탄원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끊임없이 적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악이 그처럼 종종 맹위를 떨칠 수 있는지, 그리고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겪으며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의아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모든 것이 다 바르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듯한 일들이 나타나는 사실에 대해 납득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는 바로 이 주제를 놓고 하나님과 쟁론을 벌이고자 하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다.
=====12: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뿌리가 박히고 - 예레미야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 중의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이러한 자들을 심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악인의 번성에 대한 의구심은 욥 21:7 이하에서도 표명된 바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는 말씀을 통해 찾아질 수 있겠다. 즉, 하나님의 섭리는 단순한 인과 응보의 법칙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악인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종국적으로 엄청난 심판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악인을 번성케 하셨다기보다는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악인이 번성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해 두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보다 차원 높은 공의와 자비의 실행을 위한 계획이 담겨 있다 하겠다.
=====12:3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그들을 끌어내시되 - 예레미야는 자신의 항변의 근거를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서 찾고자 한다. 즉 악행 중에서도 번영을 누리는 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오직 주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왔음을 주께서 잘 아신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행악자들을 도살당할 양을 끌어내듯이 끌어내실 것을 탄원한다.'끌어내시되'에 해당하는 '하티켐'(* )은 '잡아떼다', '근절하다', '당기다'는 뜻의 '나타크'(* )의 히필형으로서 완전하고 철저한 파멸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Delitzsch).
=====12:4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 혹자는 본절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 역시 1절 이하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확실하다. 예레미야는 창궐하는 악한 새력들로 말미암아 그 땅의 모든 거민과 심지어 짐승들에게까지 재앙이 미치게 되었음을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C.L. Feinberg) 이런 맥락에서 존 브라이트(J. Bright)는 이 부분을 다음 구절과 연결시켜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 '거기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짐승들과 새들이 모두 멸절하였습니다.'=====12:5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느닷없는 대답을 볼 수 있다. 아마 하나님은 '현재의 이런 고난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더욱 험난한 일이 닥치면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하고 타이르시고자 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또한 두 가지 은유법이 쓰이고 있는데, 첫 번째 것은 보행자와의 경주가 힘이 드는데, 어찌 말과의 경주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박해나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가 장차 임할 재난과 파멸에 비하면 은유는 요단 강의 창일함에 대한 내용으로서, 이것 역시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이 평화로운 땅을 덮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12:6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 5절 말씀에 대한 하나의 실례로서, 집안 사람들에게마저 핍박을 당하는 고통스럽고 다급한 상황이 소개되고 있다(Delitzsch).한편, 예수께서도 성도들의 당할 핍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셨다(마 10:21).
=====12:7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내 집, 내 산업,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과는 내용상 정반대되는 동사들이 쓰이고 있는데 버리며, 내어던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란 말들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의 애정과 보호의 대상이었던 백성이었지만, 이제 심판이 불가피한 것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12:8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는 고로 - 이는 유다 백성들의 뻔뻔한 반항심을 묘사한 말이다. 그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악의에 찬 교만한 행동을 보였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참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Calvin).
=====12:9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 '무늬 있는'의 히브리어 '차부아'(* )에 혹자는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육식조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한다(Blayney). 그러나 이 단어가 분사형인 점을 중시할 때, 이것은 단지 '매'를 수식하는 말로 이해됨이 더 낫겠다. 벌게이트역(Vulgate)이나 시리아역(Syriac Versions)은 이를 '다채로운', '변색된' 등의 의미로 옮겼다. 결국 '무늬 있는 매'란 포학하여 길들이기 힘든 완고함(Calvin), 우상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종교적 혼합주의, 가증스러운 변절성 등을 암시하는 듯하다.
=====12:10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 이 구절은 빈정대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즉 이제 유다 백성은 주변 열국들의 약탈과 유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적들에는 모압, 블레셋, 암몬, 앗수르, 애굽 등과 함께 특히 갈대아인들까지 포함될 수 있겠다(Clarke). 한편 하나님의 백성을 포도원에다 비유하는 표현은 이사야에서도 자주 나타난다(사 3:14;5:1-7).
=====12:11
온 땅이 황무함은 - 대적들의 침입으로 유다 땅 전체가 초토화되리라는 예언이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B.C. 7세기 말경 유다의 어떤 도시들, 예컨대 라기스 같은 도시는 두 단계에 걸쳐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12:12
훼멸하는 자들이 광야 모든 자산 위에 이르렀고 - 이들 '훼멸하는 자들', 곧 파괴자들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도구로서 그의 심판의 목적을 성취시키게 될 것이다. 이런 자들 중에는 느부갓네살(34:2, 3)과 앗수르 군대(사 10:5, 6)도 들어 있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실행에 옮기시는 날이면, 그 누구도 환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편, '혈육 있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사르'(* )는 창 6:12의 용례에서 미루어 볼 때 죄악된 인생을 암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12:13
우리가 말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 본절은 7-12절에 언급된 파멸 상황에 대한 결론 역할을 하는 바, 유다 백성의 죄악된 행위는 결국 그들의 기대와 노력과는 정반대의 불운을 초래할 수 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시사한다(Delitzsch). 그리고 구체적으로 본문은 애굽을 의지했다가 도리어 낭패에 봉착하게 될, 혹은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할 사실에 대한 언급이라 하겠다.
=====12:14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버리겠고 - 유다를 황폐화시키려고 작당한 주변의 모든 이웃 나라들은 이제 그들 차례를 맞이하여 황폐화되고 말 것이란 내용이다. 그들 역시 사악하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공의의 집행인들로 삼았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똑같이 공의의 집행이 시행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종종 한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악한 민족을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그런 다음 다른 민족을 불러 그 악한 민족을 응징하셨다(Clarke, Harrison).
=====12:15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 이것은 포로에서부터 귀환과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서, 여기에는 또한 적들 중에서도 얼마정도는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Clarke).
=====12:16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 원문상 이 구절은 '그들이 배우고 또 배우면'이라는 강력한 조건절로 시작된다. 또 이 구절뿐만 아니라 10:2에도 언급되고 있는 '도'(* , 데레크)란 '길', '여정', '양식' 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종교적 관행, 곧 여호와 신앙을 뜻하는 것 같다. 이들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이웃이 하나님의 관심의 테두리 내에 포함될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를 따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본문에서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맹세를 주장하는 자가 여호와를 섬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창 31:51-53 참조).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 전에는 그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으며 또한 바알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가르쳤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고 여호와를 그들의 주권적인 주시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장성할 것이고 또 하나님의 백성 중에 들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약속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놀라운 우주적 구원의 성격을 띤 분명한 서술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원수라고 하더라도 구원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유용한 것이다.
=====12:17
그리하지 아니하면 뽑으리라 -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는 자면, 이스라엘이든지 이방이든지 간에 재앙을 받아 끝장이 날 것이다.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가능성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Thompson).
본장은 파기된 언약을 다루고 있는 말씀(11, 12장)의 결론 부분으로서 후반부
(11:18-23)에서 언급된 아나돗 사람들의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한 암살 음모 사건과 직
접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항변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구체적으로 진술함으로써 사악한 유다 거민들의 비참한 결말을 예언
하고 있다. 아울러 징벌의 궁극적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개와 회복임자르 약속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1) 아나돗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예레미야의 항변을 진술하고
있는 전반부(1-6절)와 (2) 아나돗 거민들의 행동을 통한 유다 거민 전체의 재앙을 선
언하고 있는 중반부(7-13절), 그리고 (3)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진
술하고 있는 후반부(14-17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
자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징계와 의인의 최종적인 구원의 사실을 알려줌으로
써 절망 가운데 처해 있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다.
한편, 전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장의 전반부(1-6절)와 전장의 후반부
(11:18-23)는 형태상으로 매우 유사하다. 두 부분은 모두 주제 전개상 애가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유사한 표현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1절의 '주는 의로우시니이다'라는 언급은 11:20의 '공의로 판단하시는 만군의 하
나님'이라는 기도의 반향(echo)으로 볼 수 있다. (2)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을 나
타내는 주제에 있어서 3절의 '하나님께서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하나님'과 문맥상으로 통한다. (3) 두 부분은 모두 '양'에 관한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3절;11:19), 동시에 다양한 원예적 표현-나무, 과실, 뿌리, 열매, 채
소-을 사용하고 있다(2, 4절;11:19) (4) 두 부분은 모두 예레미야의 친족에 관하여 진
술하고 있다(6절;11:21-23).
이상의 유사점들을 지닌 본장과 11장이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적 주제를 다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
| (1) 언약의 본질 제시와 그것에 충실할 것을 요구(11:1-17) |
| (2) 이에 대한 유다인의 입장을 아나돗 사건을 통해 효과적으로 극대화(11:18-12:|
| 6) |
| (3) 유다의 거부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과 유다에 임할 재앙 선포(12:7-13) |
| (4) 재앙 이후의 회복을 선언함(12:14-17) |
+------------------------------------------------------------------------------+
아울러 이러한 문맥적 이해를 배경으로 본장의 구조적 특성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는 '예레미야의 질문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형식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 토대로 본장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 서론:악인의 형통한 이유에 관한 예레미야의 질문(1-|
| 4절) |
|(2) 본론:(가) 하나님의 간접적인 응답(5, 6절) |
| (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7-13절) |
|(3) 징계의 궁극적인 목적(회개와 회복을 위한 것임, 14-|
| 17절) |
+-----------------------------------------------------+
이상의 사실들을 토대로 하여 본장의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를 암살하려 했던 아나돗 거민들의 형태(11:18-23절)를 통하여 유다
백성 전체의 현실에 대한 강한 딜레마를 표출시키고 있다. 즉, 이와같이 악한 백성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형통하며 번영하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이다(1-4절). 이 의문은 단
순히 자신에게 해를 입히려 한 아나돗 거민들에 대한 반발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
라, 자신의 가족이나 진배없는 고향 사람들의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도대체 유다 전체
가 지금 언약 백성으로서 어떠한 상태에까지 도달했는지, 과연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결국 저자는 언약을 파기한 유
다 백성들의 운명과 최후에 대해 심각한 고뇌와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2) 본장에는 유다의 정체와 그 미래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상징적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다(7-17절). 이 사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내 산업(7절) |유다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가리킴 |
+-----------------------------+------------------------------------------------+
|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7절)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 |
+-----------------------------+------------------------------------------------+
| 삼림 중의 사자(8절) |참선지자를 핍박하는 유다인들의 성품에 대한 비유 |
+-----------------------------+------------------------------------------------+
|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합주의적 종 |
| 무늬 있는 매(9절) |교 사상을 가졌던 유다인들에 대한 비유적 표현. |
| | |
+-----------------------------+------------------------------------------------+
|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국토를, 간접적으로는 유 |
| 내 포도원(10절) |다인들을 가리킴(사 5:1-7) |
| | |
+-----------------------------+------------------------------------------------+
| 산업(14, 15절) |하나님과 유다와의 언약 관계를 통해 주어진 해택 |
+-----------------------------+------------------------------------------------+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유다의 독특한 위치를 상기
시키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강력히 촉구하는 것이다. 본
장을 통해 우리는 택함을 받은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절감하게 된
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악한 범죄의 결과로 말미압아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될 운명
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행동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해
야 할 것이다.
1. 선지자의 질문(12:1-6)
본 단락은 예레미야 자신의 고백과도 같은 기도로서 선지자의 깊은 내적 성찰의 모
습을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고향 사람들조차도 자신을 해치고자 한다는 사실을 깨달
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악인의 길이 형통한 까닭을 질문하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간접적으로 응답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필연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예레미야의 하나님께 대한 질문과 항변을 서술하고 있는 전
반부(1-4절), (2) 하나님의 응답을 언급하고 있는 후반부(5, 6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당시 유다 백성들의 영적 무감각, 곧 언약
백성으로서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오해를 드러냄으로써 다가올 심판의 정당성을 강조
하는 동시에 악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응징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본 단락은 전장의 후반부(11:18-23)와 하나의 동일한 단위를 이루고 있다.
다만 전장(11장)이 현실적인 사건 자체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본 단락은 그 사
건을 접한 선자자가 골똘히 생각해온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 저자는 '공의의 하나님'
이라는 대전제하에서 현실 속에서의 악인의 형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일
종의 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본 단락의 구조를 면
밀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1) 예레미야의 질문(1절):하나님의 공의와 악인의 번영 간의 관계 |
| (2) 현실의 긴장 관계(2절):악인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나 그들은 |
| 하나님을 부인함 |
| (3) 예레미야의 요청(3절):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요구함 |
| (4) 유다 백성의 현실(4절):계속하여 안전할 것임을 기대하고 있음 |
| (5) 하나님의 응답(5, 6절):선지자를 격려함 |
+-----------------------------------------------------------------+
또한 이상의내용을 좀더 효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본 단락에서는 두 가지 특이
한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첫째, 비유적 기법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성(2절, 원예적
표현)과 유다의 심판(3절, 양)이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둘째, 은유법적 기법으로서 예
레미야의 사역의 모습(5절, 경주)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배경으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악한 자들의 번영에 관한 예레미야의 불평이 드러나 있다(1-4절). 예레미야
는 하나님께 고소하면서(2:29) 우선적으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에 대하여 재차 묻곤 한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죄를 근본적으로 미워하신다면, 왜 그 사악한 자들의 길이 그토록 번영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욥 21:7;시 73:3-5, 12;94:3). 사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
성들을 심으신 후 뿌리가 박히고 성장해서 열매를 맺도록 만드셨다고 생각했다(2절).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자신들 가운데서 벌어
지고 있는 일들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단언했던 것이다(시 73:11;94:7). 이런 어
처구니 없는 상황을 목격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도록 요
구했다(11:20). 마치 양을 도살하기 위해서 끌어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끌어
내시기를 원했다(3절). 결국 선지자는 악인의 형통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하나님의
공정한 판결이 역사 현장에 드러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2) 악인의 일시적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이 기술되어 있다(5, 6절). 우선 하
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만일 현재의 상황을 어렵다고 이해하고 있다면, 장래에는 훨
씬 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5절).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
님께서는 두 가지의 비유(경마와 도보 횡단)를 사용하셨다. 만일 예레미야가 사람들과
도보로 경주를 하다가 지쳤다면 나중에 어떻게 말과 경주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범람한 요단 강물 속으로 던져졌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만
일 평화스러운 때문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물으신다. 아울러 현실적으로 악인들의 득세가 더욱 심해질 것음을 말씀하신
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팜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진다. 하나님은 악인의 번영이 극에 달할수
록 파멸이 임박해옴을 설명하시면서 소망을 가지고 낙관적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신
다.
이상의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 기준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자의 기준은 시간상으로 볼 때 현재가 아니라
미래여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환난과 고통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영광과 축
복을 생각하며 가볍게 지나쳐야 할 것이다.
2. 재앙 선언의 반복(12:7-13)
본 단락은 11:18에서부터 계속된 예레미야에 대한 음모 계획의 언급을 중단하고 다
시 한번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배척한 아나돗 거
민들의 태도를 유다 전체의 상황으로 간주하고 유다의 원수들을 도구로 하여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유다를 대적의 손에 넘기신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전반
부(7-9절), (2) 그로 인하여 황폐케 될 유다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는 후반부(10-13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악인의 결국에 대한 하나
님의 계획에 대해 설명한다. 즉, 악인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서
멸망당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단락은 전 단락과 유사한 형식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서 그 내용 전개에
있어서 다소 과정법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애가의 양식을 사용하
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하여 본 단락의 구조적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
다.
+---------------------------------------------------------+
| A. 유다는 대적의 손에 양도될 것임(7절) |
| B. 유다의 반응과 지속적인 재앙(8, 9절) |
| B'. 유다의 상태와 지속적인 재앙(10, 11절) |
| A'. 유다는 대적의 손에 양도될 것임(12, 13절) |
+---------------------------------------------------------+
또한, 본문은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표현법을 사용한
다. 첫째, 유다를 '내 집', 내 산업', '내 사랑하는 것'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7-9
절). 이 용어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묘사할 때 주로 쓰인다. '집'이
란 용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때 훈히 사용하고 있는 '내 산업'(내 기
업)이란 말과 주로 평행을 이루어(신 9:29;욜 2:17;3:2)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11:15;사 5:1). 둘째, 심판과 관련하여 '버리며', '내어던져', '대적
의 손에 붙었으미'(7절) 등과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이 동사들은 자기 백성에게 심판
을 가져오신 이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셋째, 유다를
대적하는 자들에 관한 묘사로서 '매', '들짐승', '목자', '훼파하는 자' 등과 같은 표
현이 쓰인다(9, 10절).
이상과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본 단락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던(11:18-12:6) 유
다에 대한 심판 선언을 제차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버리고 유다의 원수들에게
로 돌아선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예레미야는 유다를 자신의 집으로, 유업을
이어받을 자로(10:16), 사랑을 받은 자로 묘사하면서 대적의 손에 언약 백성을 넘겨주
는 데 따른 고통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심판을 받은 유다는 마치 하나님
을 향하여 울부짖는 사자와도 같이 반항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여전히 회개치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유다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며 약탈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약탈은 '목자'들이 포도원을 짓밟아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도구인 이방 민족에 의하여 칼로 황폐케 되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황폐의 결과로 말미암아 밀을 뿌렸던 자들은 쭉정이만을 거
두는 수치스런 심판의 수확을 하게 된다(레 26:16;신 28:38;호 8:7;미 6:15). 결국 예
레미야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거룩성을 상살한 유다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거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유다는 하나님의 선태된 백성
이었지만 율법을 어겼으므로 이방인에 의해 점령당하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므
로 신자는 죄를 과소 평가하지 말고 더욱 성결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회복에 대한 약속(12:14-17)
본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유다를 유린하였던 이방을 하나님의 적으
로 묘사하며, 결국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겪게 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동시에 열
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언약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의지하여 산다면 구
속의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사 2:1-4;19:16-25;56:6-8;60:11-14;미 4:1-3). 이
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1) 유다의 회복을 선언하고 있는 전반부(14, 15절)
와 (2) 이방의 회개와 구속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후반부(16, 17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적 특성을 분켱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본 단락에서는 1:10에서 쓰인 '뽑다', '세우다', '멸하다'등의 단어들이 발
견된다. 저자는 이처럼 유사한 단어의 재용(再用)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동시에 사역의 성격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배경으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한 사실을 근거로 그 산업에 침입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뿌리째 뽑혀질
것을 선언한다(25:12-14, 27-29;46-51장).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 백성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파괴당하도록 허락하시지만 흩어진 후에 다시 약속의 땅으로 모으실 것이다
(31:7-14;겔 37:1-14). 결국 유다의 추방은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한번 더 남은 자들에게 동정심을 보여주시며, 파기된 언약을 새로운 형태로 회복시키
신다. 이와 같은 약속은 본서의 여러 구절을 포함하여 구약의 수많은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16:15;23:3;24:6;27:22;29:10, 14;30:3;32:37;33:10, 11).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의 영원성에 근거하여 언약의 회복과 이방의 멸망을 확신하고 있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면서도 한편으로 긍휼을 베푸사
언약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고 말한다. 비록 적대적인 이방일지라도 유
다의 종교를 따르고 언약의 하나님을 경배하면 구원의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하
나님은 편협한 민족신이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음을 가진 자를 모두 받아들이는 우주적인 분이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러한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타락으로 인도한 이방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약 백성에 접붙여진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방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종교적 헌신에 있어서 깊은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전에 그들을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바알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을 돌이켜 재교육을 받고 하나님을 그들의 주권적인 주로서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 속하여 발전할 것이다.
이상의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유다가 비록 행악을 일삼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결코 변개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신자가 어떤 상태에서도 구원에서 단절될 수 없다는 견인(堅忍)에 대한 확신을 불러일으킨다(롬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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