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 하나님은 폭풍, 불 그리고 구름 가운데 땅 위에 내려오시는 분으로 묘사되어지곤 하는데 그 목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그 백성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대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이다(시 18:9;144:5). 토론의 여지없이 여기서는 후자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64: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 여기 사름을 당하고 끓음을 당하는 것은 '산들'(1절)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임하실 때 그 단단한 산은 불을 받고 그 강한 열기의 작용으로 인해 액체처럼 밑으로 흘러 내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것인데, 특히 화산을 연상케 한다. 저자가 화산 폭발을 보고 그 이미지를 본절에서 인용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리아, 팔레스틴 및 사해 주변에서 당시 화산 분출이 빈번했다는 역사적 고증을 고려할 때(Lyell)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아무튼 저자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문학적 혹은 실제적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의 막강한 영향력을 묘사하고 있다.
=====64:3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 - 이전에 결코 목도하지 못했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을 가리키는데, 그 일이란 출애굽 사건을 뜻한다.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 이것은 불과 연기 가운데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셨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출 19:18). '진동하였사오니'(* , 나졸루)보다는 '흘러 내렸으니'가 더 원문적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이 역사가 자신들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64:4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 여기 '앙망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인데, 바울은 이 같은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고 있다(고전 2:9).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 본 구절을 바울은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자'로 적고 있다(고전 2:9). 이 같은 사실 때문에 어떤 학자는 바울이 원문을 오해했거나 원문이 파손되어 이 부분만 외경의 유사 부분에서 인용했다고 주장하거나(Lowth), 혹은 이를 바로 앞의 '들은자도 없고'와 표현만 다른 반복 구절로 보기도 하나 근거없는 주장이다.
=====64:5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 - '기쁨으로 기꺼이 의를 행하는 자'란 뜻이다(요 7:17;행 10:35).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 - 원래 '기억하는 자'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경이로운 구원 역사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그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 예배, 찬양을 드리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길'이란 율법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선대하시거늘 -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으로 언약 관계를 설정하셔서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에게 평화, 안정을 주시고 계속적으로 우애를 나누시는 것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뜻한다.
진노하셨사오며 - 이것은 탄원자의 깊은 사색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자비가 있으시고 그 언약 백성을 축복하는 분임을 알면서도, 본절의 '우리'는 하나님이 큰 진노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히 그 앞에 나아가시 못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의 죄악과 타락상에 대해 통절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진정한 회개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그 마음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이다(눅 18:13, 14).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 바헴 올람) - 여기 '바헴'(* )은 '그들(혹은 그것들) 안에'로 번역될 수 있는데 그 선행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난해 구절로 만들어버린다. '그들(혹은 그것들)'에 대한 해석으로는, 먼저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가 있다('선대하시거늘'). 이 해석을 따를 경우, 본문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적 자비'를 뜻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원한 언약적 자비 때문에 이스라엘이 구원얻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피력하는 대목이 되어버린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 선행사를 바로 앞구절에 있는 '범죄'로 보는 해석이다. 이 해석을 따를 경우, 본절 하반절은 그 오랜(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람'(* )은 '영원히'로 주로 번역되나 '옛날', '오랫동안'으로 번역되기도함)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조차도 할 수 없어 애타하는 심정을 묘사하는 대목이 된다. 이 경우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우리는 후자의 해석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중요한 전제인 '바헴'을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로 보는 근거가 타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절 이후 문맥을 고려할 때 후자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범죄한 사실을 들고 있다.
=====64:6
부정한 자(* , 타메) - 레위기적 의미의 오염되거나 더러워진 그 무엇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모세의 율법에 따른 오염되거나 혐오스러운 동물(레 11:29, 30), 인간(레 15:2-12) 등에 특히 문둥병자에게 주로 적용되었는데(레 13:3) 이 같은 자는 성도의 회중에서 추방당하였다.
더러운 옷(* , 이딤) - 문자적인 뜻은 '더러운 걸레'이다. '사용한 생리대'를 뜻하기도 한다(레 15:33;20:18).
=====64:7
스스로 분발하여(* , 미트오레르) - 이는 '깨어나다', '일어나다'는 뜻인 '우르'(* )의 히트파엘형(강의 재귀형)으로서 눌려 있던 영적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 전체는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영적 무기력 상태를 깨닫지도 못하였다.
얼굴을 숨기시며 -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편에서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신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 은혜를 중단하자 많은 결과가 발생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이 빠졌던 영적 무기력이었다. 물론 하나님이 은혜 베풀기를 중단하신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 테무게누) - 문자적인 뜻은 '녹게 하셨나이다'이다. 얼음 따위가 녹아 내리는 모습 따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본 용어는 주로 이스라엘의 대적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초월적인 현상 앞에서 공포로 떨 때의 심적 상태를 묘사할 경우 사용되고 있는데(출 15:15), 여기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다.
=====64:8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자신들을 진흙에 비유하고 있다(45:9;렘 18:6). 토기장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흙을 주무른다. 진흙이 어떤 모양의 용기가 되는 것은 혹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에 달려 있다. 성경에서 본 토기장이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자손들의 운명, 존재 자체가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하는 까닭은 구원을 호소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오직 그들의 운명을 쥐고 계신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구원을 호소하려는 것이다.
=====64:9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 여기 '주의 백성'이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읽게 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언약 때문에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징벌에서 놓이고 다시 언약 백성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로 나가는 출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의 호소이다.
=====64:10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 지금 서술된 장면은 그 성취 시점이 미래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시점은 서술된 내용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미 성취된 듯 완료 시제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내용이 미래에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거룩한 성읍들'에 대해 어떤 학자는 동일한 예루살렘의 고지대와 저지대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본다(Vitringa). 그러나 성경 다른 부분에서 예루살렘을 고지대, 저지대로 나누고 있는 예가 없으므로 이 견해는 받기 어렵다. 아마도 예루살렘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 본토가 쑥밭이 되어버린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복수형을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64:11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전 - 여기 '찬송하던...전'이란 하나님께 예배하던 전을 가리킨다. 지금 이스라엘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요소는 전토나 가옥의 파괴 및 손실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예배 처소로 삼아왔던 성전의 파손이다. 진지한 회개의 일면이 엿보인다.
즐거워하던 곳 - 원문 직역은 '소망의 대상들'이다. 성전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살던 가옥들 그리고 온 도성을 가리킨다.
=====64:12
일이 이러하거늘 - 여기 '일'이란 '어러한 것들', 곧 지금까지 자세히 열거한 재앙들을 가리킨다(10, 11절). 참회개(5절)와 재앙의 진상을 아뢴 후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에돔의 심판 예언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묘사하고 있는 전장(63장)에 이어서
본장도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전장이 자신들의
현재의 상태를 긍휼히 여길 것을 바라는 기도(63 : 15-19)인 반면 본장은 과거의 상태
를 돌아보며 용서를 바라는 간구를 싣고 있다. 또한 전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포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본장의 기도는 구체적인 성격을 갖는다(6, 7, 9절). 이
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장은 주의 강림을 기도하
는 전반부(1, 2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고백하는 중반부(3-9절), 시온
의 회복을 호소하는 후반부(10-1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장의 기도는 다니엘서의 기도(단 9 : 4-19)와 공통적인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이 사 야 | 다 니 엘 |
+-----------------------+---------------------+--------------------+
|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 1, 2절 | 9 : 4 |
+-----------------------+---------------------+--------------------+
| 죄의 고백 | 6, 7, 9절 | 9 : 5, 11 |
+-----------------------+---------------------+--------------------+
| 용서를 바라는 내용 | 8-12절 | 9 : 17-19 |
+-----------------------+---------------------+--------------------+
| 언약 관계를 상기함 | 8, 9절 | 9 : 4 |
+-----------------------+---------------------+--------------------+
또한 본장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강림을 언급(1절)하면서 이스라엘의 지나온 과거의
역사 가운데 괄목할 만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시내 산 임재 사건을 배경
으로 제시하고 있다(출 19 : 18). 사실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매우 비
상한 시기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강림은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의 두려우심과 위엄하심을 상기시키면서(시 97 : 5 ; 99 : 1),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강조할 때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의 기도의 문맥에서 이러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겸손히 고백하는 모습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저자
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이방 세계 속에 여호와
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를 열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가 드러나는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주의 강림을 구하는 기도(64 : 1-2)
전 단락(63 : 15-19)에 이어서 본 단락은 계속해서 기도의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
다. 그러나 본 단락은 전 단락보다 더욱 강한 어조를 드러내고 있다. 즉, 63 : 15에서
의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정적인 요소가 강하나, 본 단락의 서두(1절)에서는
하나님의 강림을 원하는 동적인 요소가 강하게 부각된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강림을 원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여호와만이 유일
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산들로 진동'(1절)
시킬 수 있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동시에 섭리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세상의 진
정한 통치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앗수르의 위협으로 여호와가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라는 사실이 위협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
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역사의 주인이심을 보여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2. 죄를 고백하는 기도(64 : 3-9)
주의 대적들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알게 하기 위해 주의 강림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전 단락(1, 2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고백하는
기도를 담고 있다. 이제까지의 기도가 하나님께 집중되었다면, 본 단락부터는 하나님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하나님과 대
면하여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고백이 드러나는 본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한 절망적인 상태를 고
백하는 전반부(3-7절),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후반부(8, 9절)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 단락에서는 이미 자주 사용된 바와 같이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
를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29 : 16 ; 30 : 14 ; 41 : 25). 이 비유
는 예레미야서에서도 사용되고 있고(렘 18 : 1-6) 바울도 언급한 바 있다(롬 9 :
20-24). 이제 본 비유가 각각 어떤 상황에서 기록되고 있는지를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 | 사 29:16 | 사 30:14 | 사 41:25 | 사 64:8 | 렘 18:1-6 | 롬 9:20-24 |
+----+----------+----------+----------+------------+------------+--------------+
|문맥|심판적상황|심판적상황|심판적상황|긍휼을구하는|경고적인상황|하나님의주권적|
| | | | | 상황 | |선택을설명하는|
| | | | | | |상황 |
+----+----------+----------+----------+------------+------------+--------------+
여기서 각 비유의 문맥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
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으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제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5, 6절) : 저자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전혀 의가 없다는 점을 밝힌다. 그래서 6절에서는 인간을 '더러운 옷'으로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죄악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바
리새인들은 예수임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는(마 23 : 27) 평가를 받게 된다. 이사
야는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을 폭로함으로써 스스로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자각시키고 있다.
(2)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되어야만 가능하다(8, 9절) :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자신의 구원으로 기도의 초점을 돌린다. 특히 토기장이의 비유를 사용
하여 자신들이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있
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계시된다. 모든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바
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무려 164회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소망이 있으며 구원이 가능한 존재이다.
3. 시온의 회복을 호소함(64 : 10-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전 단락(3-9절)에 이어
서 본 단락은 전공체적인 회복을 간절히 구하는 호소를 담고 있다. 전 단락에서 이스
라엘 백성들의 기도가 개인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본 단락은 좀더 폭을 넓혀서 공동체
의 회복을 구하는 호소를 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저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이스라엘 전공동체의 부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같은 본 단락은 이스라엘의 현
재의 폐허된 상태를 묘사하는 전반부(10, 11절), 비참한 상황에 대한 호소를 담고 있
는 후반부(1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
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된 기쁨은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때 가능
하다(11절) : 저자는 성전을 가리켜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성전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영적인 교제가 있었던 곳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재 성전이 황폐하게 되었으므로 즐거움이 고갈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
나님과 함께 동행할 때만 진정한 희락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신약의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 진정한 만족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빌 1:18).
(2)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동체의 회복이다(12절) : 저자는 자신의 기도를
끝맺는 부분에서 공동체의 회복을 갈망하는 호소를 드린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이 공동체의 회복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본서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영광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65, 66장). 이와 같은 공동체의 회복은 신약 시대의 교회의 탄생을 암시하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있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전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토대로 하여 현재의 환난에서 건져주실 것을 기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 12 : 1-3)을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과 정복 전쟁을 성실하게 수행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기도로써 이겨내야 할 것이다.(눅 18 : 1-8).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 하나님은 폭풍, 불 그리고 구름 가운데 땅 위에 내려오시는 분으로 묘사되어지곤 하는데 그 목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그 백성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대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이다(시 18:9;144:5). 토론의 여지없이 여기서는 후자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64: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 여기 사름을 당하고 끓음을 당하는 것은 '산들'(1절)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임하실 때 그 단단한 산은 불을 받고 그 강한 열기의 작용으로 인해 액체처럼 밑으로 흘러 내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것인데, 특히 화산을 연상케 한다. 저자가 화산 폭발을 보고 그 이미지를 본절에서 인용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리아, 팔레스틴 및 사해 주변에서 당시 화산 분출이 빈번했다는 역사적 고증을 고려할 때(Lyell)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아무튼 저자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문학적 혹은 실제적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의 막강한 영향력을 묘사하고 있다.
=====64:3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 - 이전에 결코 목도하지 못했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을 가리키는데, 그 일이란 출애굽 사건을 뜻한다.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 이것은 불과 연기 가운데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셨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출 19:18). '진동하였사오니'(* , 나졸루)보다는 '흘러 내렸으니'가 더 원문적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이 역사가 자신들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64:4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 여기 '앙망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인데, 바울은 이 같은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고 있다(고전 2:9).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 본 구절을 바울은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자'로 적고 있다(고전 2:9). 이 같은 사실 때문에 어떤 학자는 바울이 원문을 오해했거나 원문이 파손되어 이 부분만 외경의 유사 부분에서 인용했다고 주장하거나(Lowth), 혹은 이를 바로 앞의 '들은자도 없고'와 표현만 다른 반복 구절로 보기도 하나 근거없는 주장이다.
=====64:5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 - '기쁨으로 기꺼이 의를 행하는 자'란 뜻이다(요 7:17;행 10:35).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 - 원래 '기억하는 자'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경이로운 구원 역사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그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 예배, 찬양을 드리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길'이란 율법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선대하시거늘 -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으로 언약 관계를 설정하셔서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에게 평화, 안정을 주시고 계속적으로 우애를 나누시는 것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뜻한다.
진노하셨사오며 - 이것은 탄원자의 깊은 사색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자비가 있으시고 그 언약 백성을 축복하는 분임을 알면서도, 본절의 '우리'는 하나님이 큰 진노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히 그 앞에 나아가시 못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의 죄악과 타락상에 대해 통절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진정한 회개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그 마음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이다(눅 18:13, 14).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 바헴 올람) - 여기 '바헴'(* )은 '그들(혹은 그것들) 안에'로 번역될 수 있는데 그 선행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난해 구절로 만들어버린다. '그들(혹은 그것들)'에 대한 해석으로는, 먼저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가 있다('선대하시거늘'). 이 해석을 따를 경우, 본문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적 자비'를 뜻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원한 언약적 자비 때문에 이스라엘이 구원얻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피력하는 대목이 되어버린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 선행사를 바로 앞구절에 있는 '범죄'로 보는 해석이다. 이 해석을 따를 경우, 본절 하반절은 그 오랜(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람'(* )은 '영원히'로 주로 번역되나 '옛날', '오랫동안'으로 번역되기도함)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조차도 할 수 없어 애타하는 심정을 묘사하는 대목이 된다. 이 경우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우리는 후자의 해석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중요한 전제인 '바헴'을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로 보는 근거가 타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절 이후 문맥을 고려할 때 후자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범죄한 사실을 들고 있다.
=====64:6
부정한 자(* , 타메) - 레위기적 의미의 오염되거나 더러워진 그 무엇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모세의 율법에 따른 오염되거나 혐오스러운 동물(레 11:29, 30), 인간(레 15:2-12) 등에 특히 문둥병자에게 주로 적용되었는데(레 13:3) 이 같은 자는 성도의 회중에서 추방당하였다.
더러운 옷(* , 이딤) - 문자적인 뜻은 '더러운 걸레'이다. '사용한 생리대'를 뜻하기도 한다(레 15:33;20:18).
=====64:7
스스로 분발하여(* , 미트오레르) - 이는 '깨어나다', '일어나다'는 뜻인 '우르'(* )의 히트파엘형(강의 재귀형)으로서 눌려 있던 영적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 전체는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영적 무기력 상태를 깨닫지도 못하였다.
얼굴을 숨기시며 -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편에서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신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 은혜를 중단하자 많은 결과가 발생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이 빠졌던 영적 무기력이었다. 물론 하나님이 은혜 베풀기를 중단하신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 테무게누) - 문자적인 뜻은 '녹게 하셨나이다'이다. 얼음 따위가 녹아 내리는 모습 따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본 용어는 주로 이스라엘의 대적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초월적인 현상 앞에서 공포로 떨 때의 심적 상태를 묘사할 경우 사용되고 있는데(출 15:15), 여기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다.
=====64:8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자신들을 진흙에 비유하고 있다(45:9;렘 18:6). 토기장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흙을 주무른다. 진흙이 어떤 모양의 용기가 되는 것은 혹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에 달려 있다. 성경에서 본 토기장이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자손들의 운명, 존재 자체가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하는 까닭은 구원을 호소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오직 그들의 운명을 쥐고 계신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구원을 호소하려는 것이다.
=====64:9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 여기 '주의 백성'이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읽게 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언약 때문에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징벌에서 놓이고 다시 언약 백성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로 나가는 출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의 호소이다.
=====64:10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 지금 서술된 장면은 그 성취 시점이 미래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시점은 서술된 내용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미 성취된 듯 완료 시제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내용이 미래에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거룩한 성읍들'에 대해 어떤 학자는 동일한 예루살렘의 고지대와 저지대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본다(Vitringa). 그러나 성경 다른 부분에서 예루살렘을 고지대, 저지대로 나누고 있는 예가 없으므로 이 견해는 받기 어렵다. 아마도 예루살렘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 본토가 쑥밭이 되어버린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복수형을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64:11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전 - 여기 '찬송하던...전'이란 하나님께 예배하던 전을 가리킨다. 지금 이스라엘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요소는 전토나 가옥의 파괴 및 손실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예배 처소로 삼아왔던 성전의 파손이다. 진지한 회개의 일면이 엿보인다.
즐거워하던 곳 - 원문 직역은 '소망의 대상들'이다. 성전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살던 가옥들 그리고 온 도성을 가리킨다.
=====64:12
일이 이러하거늘 - 여기 '일'이란 '어러한 것들', 곧 지금까지 자세히 열거한 재앙들을 가리킨다(10, 11절). 참회개(5절)와 재앙의 진상을 아뢴 후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에돔의 심판 예언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묘사하고 있는 전장(63장)에 이어서
본장도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전장이 자신들의
현재의 상태를 긍휼히 여길 것을 바라는 기도(63 : 15-19)인 반면 본장은 과거의 상태
를 돌아보며 용서를 바라는 간구를 싣고 있다. 또한 전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포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본장의 기도는 구체적인 성격을 갖는다(6, 7, 9절). 이
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장은 주의 강림을 기도하
는 전반부(1, 2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고백하는 중반부(3-9절), 시온
의 회복을 호소하는 후반부(10-1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장의 기도는 다니엘서의 기도(단 9 : 4-19)와 공통적인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이 사 야 | 다 니 엘 |
+-----------------------+---------------------+--------------------+
|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 1, 2절 | 9 : 4 |
+-----------------------+---------------------+--------------------+
| 죄의 고백 | 6, 7, 9절 | 9 : 5, 11 |
+-----------------------+---------------------+--------------------+
| 용서를 바라는 내용 | 8-12절 | 9 : 17-19 |
+-----------------------+---------------------+--------------------+
| 언약 관계를 상기함 | 8, 9절 | 9 : 4 |
+-----------------------+---------------------+--------------------+
또한 본장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강림을 언급(1절)하면서 이스라엘의 지나온 과거의
역사 가운데 괄목할 만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시내 산 임재 사건을 배경
으로 제시하고 있다(출 19 : 18). 사실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매우 비
상한 시기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강림은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의 두려우심과 위엄하심을 상기시키면서(시 97 : 5 ; 99 : 1),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강조할 때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의 기도의 문맥에서 이러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겸손히 고백하는 모습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저자
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이방 세계 속에 여호와
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를 열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가 드러나는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주의 강림을 구하는 기도(64 : 1-2)
전 단락(63 : 15-19)에 이어서 본 단락은 계속해서 기도의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
다. 그러나 본 단락은 전 단락보다 더욱 강한 어조를 드러내고 있다. 즉, 63 : 15에서
의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정적인 요소가 강하나, 본 단락의 서두(1절)에서는
하나님의 강림을 원하는 동적인 요소가 강하게 부각된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강림을 원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여호와만이 유일
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산들로 진동'(1절)
시킬 수 있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동시에 섭리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세상의 진
정한 통치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앗수르의 위협으로 여호와가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라는 사실이 위협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
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역사의 주인이심을 보여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2. 죄를 고백하는 기도(64 : 3-9)
주의 대적들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알게 하기 위해 주의 강림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전 단락(1, 2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고백하는
기도를 담고 있다. 이제까지의 기도가 하나님께 집중되었다면, 본 단락부터는 하나님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하나님과 대
면하여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고백이 드러나는 본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한 절망적인 상태를 고
백하는 전반부(3-7절),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후반부(8, 9절)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 단락에서는 이미 자주 사용된 바와 같이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
를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29 : 16 ; 30 : 14 ; 41 : 25). 이 비유
는 예레미야서에서도 사용되고 있고(렘 18 : 1-6) 바울도 언급한 바 있다(롬 9 :
20-24). 이제 본 비유가 각각 어떤 상황에서 기록되고 있는지를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 | 사 29:16 | 사 30:14 | 사 41:25 | 사 64:8 | 렘 18:1-6 | 롬 9:20-24 |
+----+----------+----------+----------+------------+------------+--------------+
|문맥|심판적상황|심판적상황|심판적상황|긍휼을구하는|경고적인상황|하나님의주권적|
| | | | | 상황 | |선택을설명하는|
| | | | | | |상황 |
+----+----------+----------+----------+------------+------------+--------------+
여기서 각 비유의 문맥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
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으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제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5, 6절) : 저자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전혀 의가 없다는 점을 밝힌다. 그래서 6절에서는 인간을 '더러운 옷'으로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죄악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바
리새인들은 예수임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는(마 23 : 27) 평가를 받게 된다. 이사
야는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을 폭로함으로써 스스로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자각시키고 있다.
(2)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되어야만 가능하다(8, 9절) :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자신의 구원으로 기도의 초점을 돌린다. 특히 토기장이의 비유를 사용
하여 자신들이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있
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계시된다. 모든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바
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무려 164회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소망이 있으며 구원이 가능한 존재이다.
3. 시온의 회복을 호소함(64 : 10-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전 단락(3-9절)에 이어
서 본 단락은 전공체적인 회복을 간절히 구하는 호소를 담고 있다. 전 단락에서 이스
라엘 백성들의 기도가 개인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본 단락은 좀더 폭을 넓혀서 공동체
의 회복을 구하는 호소를 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저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이스라엘 전공동체의 부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같은 본 단락은 이스라엘의 현
재의 폐허된 상태를 묘사하는 전반부(10, 11절), 비참한 상황에 대한 호소를 담고 있
는 후반부(1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
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된 기쁨은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때 가능
하다(11절) : 저자는 성전을 가리켜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성전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영적인 교제가 있었던 곳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재 성전이 황폐하게 되었으므로 즐거움이 고갈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
나님과 함께 동행할 때만 진정한 희락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신약의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 진정한 만족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빌 1:18).
(2)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동체의 회복이다(12절) : 저자는 자신의 기도를
끝맺는 부분에서 공동체의 회복을 갈망하는 호소를 드린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이 공동체의 회복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본서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영광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65, 66장). 이와 같은 공동체의 회복은 신약 시대의 교회의 탄생을 암시하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있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전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토대로 하여 현재의 환난에서 건져주실 것을 기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 12 : 1-3)을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과 정복 전쟁을 성실하게 수행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기도로써 이겨내야 할 것이다.(눅 18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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