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
에돔...보스라 - 전자는 근접해 있는 까닭에 유다와 끊임없는 적대감을 가졌던 국가이며 후자는 위치상으로는 모압에 가까우나 이두매, 곧 에돔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던 곳이다. 이 두 곳은 본서 저자가 세상의 모든 유다의 대적을 의미할 때 언급한 곳이다(34:6). 홍의를 입고...오는 자 - 여기 '홍의를 입고'는 '하무츠 베가딤'(* )이다. 그런데 '하무츠'(* )는 '(맛이) 신', '(색깔이) 얼룩덜룩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하마츠'(* )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자줏빛, 주홍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원래 자줏빛으로 염색한 혹은 피가 그 옷자락에 튀어 피색으로 물든 용사의 망토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절이 묘사하고 있는 어떤 인물은 이 사실과 뒷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에 승리를 쟁취하고 귀환하는 큰 용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용사의 정체에 관한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중의 대표적인 두 견해는 메시야 혹은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이다. 62장과의 문맥적 연결 면에서 그리고 본절이 그려내는 용사의 모습이 대적들을 정복한 승리자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많다(Calvin, Delitzsch, Gesenius).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 입각해볼 때, 오히려 전자의 견해가 더 나을 것 같다. (1)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상황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상 일어날 일이라기보다는 마지막 보응의 날과도 관계된다. 이런 점에서 에돔 등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은 물론이고 나아가 메시야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사단의 모든 세력까지 상징한다. (2) 피묻은 옷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을 암시한다(계 19:11-14).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을 파하신 승리의 십자가였다(골 2:15).
화려한 의복 - 문자적인 뜻은 '그 의복에 있어 영광스러운'이다. 이것은 고위직에 있는 고대 용사들의 영예롭고 눈부신 군복을 가리킨다.
큰 능력으로 걷는 자 - 두말할 나위 없이 이 표현은 그의 대적을 완전히 섬멸한 사실을 드러내듯 승리의 정복자로서 당당한 보무로 입성하는 용사에서 따온 이미지이다.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 지금까지는 제삼자가 화자(話者)였다면 본 구절부터는 메시야 자신이 화자가 되고 있으며, 본 화자는 앞선 화자의 의문에 대답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 '의'는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63:2
본절은 메시야가 그 대적을 진멸하신 사실을 포도즙 짜는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당시 포도즙을 짤 때에는 먼저 큰 통에 포도를 넣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밟았다. 한 시간 정도 밟으면 질이 좋지 않은 포도는 맨 위로 떠올랐으며 그후 계속해서 30분 정도를 더 밟으면 향기 좋은 포도즙이 각 송이에서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더 밟으면 신 포도까지 터져 전체 포도즙의 맛은 좋지 않게 된다고 한다(Burder). 본절은 이같이 포도즙을 짤 때 그 즙이 튀어 옷에 몰은 어떤 사람을 연상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해 언급하곤 한다(신 32:14). 어떤 학자는 여기서 저자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하고 있는 까닭은 1절에 언급된 '보스라'라는 지역이 포도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Calvin). 이 경우 '보스라'가 포도 산지인 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더 실감나게 본절의 의미를 파악했을 것이다.
=====63:3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 본절은 2절에 묘사된 바 포도즙 틀을 밟다가 그 즙이 옷에 묻은 것과 같은 데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63:4
원수 갚는 날 - 여기 '원수 갚는다'는 표현은 공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돔 혹은 이두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성경은 에돔 자손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까지 파괴할 정도로 악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진술하고 있다(시 137:7). 이 같은 대적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방(사단의 세력)이 징벌받는 이 날은 역으로 이스라엘(모든 성도)의 구원의 날이다(34:8;61:2 참조).
=====63:5
도와 주는 자도 없고...없으므로 - 아무도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조력하지 않으며 조력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메시야께서 감당하시는 인류 구원의 대업(大業)은 메시야 자신의 대속 사역으로써 충분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 이 표현은 59:16의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를 연상시킨다.
=====63:6
그들을 취케 하고 - 혹자는 본절을 3절 하반절의 반복적 유사 평행구로 보고 본문의 히브리어 '아솨크램'(* )을 '쳐부수다'는 의미의 '아솨브램'(* )으로 수정하고자 한다(탈굼역, Whybray). 그러나 굳이 원문 수정을 하지 않더라도, 본문은 메시야의 진노의 공포 아래 있는 자가 만취한 자처럼 자제력을 잃고 땅 위에 엎드러져 있는 상황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시 75:8 참조).
=====63:7
내가 - 본절에서부터 화자가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1-6절) 화자가 주로 메시야이셨다면 이제부터는 대적의 진멸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이며(7-14절) 그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선지자가 직접적 화자로 나서고 있다. 그런데 여기 대적의 진멸이란 1-6절에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역사속에 수차례 반복된 이방으로부터의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가리킨다. 하나님 찬양으로 시작되는 본절로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15절부터 64:12까지의 큰 단락은 이스라엘의 억압과 파멸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자비를 탄원하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63:8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 이것은 언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킨다.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 -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었을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기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에 신실할 것을 기대하셨다. 아울러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반역과 거짓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지만,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은총을 따라 택하신 백성을 회개시켜 새로이 회복시키시리라는 암시도 담겨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구절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63:9
- 짧지만 번역하기 난해한 구절이다. 그 이유는 '...이 아니다'의 뜻을 닌 '로'(* ) 때문이다. '로'를 생략해버릴 경우,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부합하는 번역이 가능하다:'그들의 모든 고통의 때에 하나님도 고통하였다'(In all their affiction he was afflicted, KJV, LB, RSV). 그러나 원문의 단어 자체를 생략하는 이 같은 번역은 수용하기 어렵다. 반면 '로'를 그대로 두고 문자적 번역을 하면 '모든 그들의 고통의 때에 하나님은 고통하지 않으셨다'라는 다소 애매한 내용이 되어버린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뒷문맥을 고려하고 본 구절 자체에 어떤 용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다. 그 같은 경우 다음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모든 그들의 빈궁의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그의 선하심에 있어) 빈궁하지 않으셨다'(Houbigant). 여기 '빈궁'은 '고통'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번역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자기 앞의 사자 - 이 사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하였던 적이 있다(출 32:34;33:2;민 20:16). 따라서 천사로 보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구체적으로 가브리엘(눅 1:19), 미가엘(단 10:13-21)로 보는 견해가 있다(Clark, Jarchi). 그런데 이 용어는 오실 메시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실제로 메시야로 보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는 부분에서 이 용어가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출 14:19;23:20, 21). 따라서 본 용어는 1차적으로는 천사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예표하는 용어로 정리하면 되겠다.
드시며 - 그의 양떼를 모든 목자 혹은 그의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 혹은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독수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출 19:4;신 32:11, 12).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광야의 연단 중에서 보존하시고 결국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이신 것을 가리킨다.
=====63:10
성신(* , 루아흐 카데쇼) - 어떤 학자는 이것을 '선지자들의 말씀'(갈대아역 등) 혹은 '하나님'으로 각각 번역한다(Grotius, Gesenius, Rosenmuller).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 때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갱신시키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삼위(三位) 중 성령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물론 당시 히브리인들이 이 용어를 하나님에게 적용시켰다는 사실과, 오늘날의 성도들과 달리 삼위의 독립된 존재 양식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용어가 '성령'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동일하게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셨듯이 성령 하나님도 영원 전부터 계셨다.
=====63: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말을 추억하여 가로되 - 원문 직역은 '그가 모세와 그의 백성들, 옛날을 기억하셨다'이다. '기억하셨다'는 '이즈코르'(* )로서 3인칭 단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인칭 복수로 바꾸어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는데(NIV),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 시도의 이유는 이어지는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원(의문)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백성의 탄원(의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탄원(의문)을 그대로 묘사하는, 말하자면 그들의 의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이즈코르'의 인칭 문제는 해결된다. '이즈코르' 곧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징벌을 받아 마땅한, 심지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으셔도 될 만한 악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계속 그 약속에 신실하셨던 것이다. 이 신실함은 모세와 그의 백성의 시대 곧 광야 시대 때 나타났었다. 이제 그 후대 이스라엘은 바로 그 신실하심의 결과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고통의 현실에 대하여 동일한 신실함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본절에서 14절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의문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현실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결과를 알려주고 계신다.
바다 -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라엘이 탈출하여 나왔던 애굽을 가리킨다. 홍해 사건은 12절에 나온다.
성신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궁극적 목적은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승한 거룩한 민족이 되게하기 위함이었다(출 19:4-6). 그런데 그 목적에 도달하게끔 역사하는 힘은 그들 가운데 보내신 성신으로 말미암았다.
=====63:12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만이 참신이신 것을 이스라엘과 온 세계에 알리는 데 있었다. 애굽은 당시 세계에서 모든 과학, 문명의 중심 국가라 할 만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되어진 혹은 발생되어진 사건, 결과 등을 쉽게 온 세계로 퍼져 나갔다.
=====63:13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 여기 '광야'는 그 여러 특성 중 그 여정에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곳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63:14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 높은 언덕 위로부터 비옥하고 물이 많은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의 떼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시 23:2). 이들 가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성령은 지친 광야의 방황 이후 이스라엘을 약속하셨던 땅에 들여보내사 그들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셨다. 본절은 과거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 중에 있는 그 후손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암시한다.
=====63:15
주여 하늘에서...보옵소서 - 본절에서부터 현재의 재난과 역경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 시작된다. 그들의 탄원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과 과거 그의 조상들을 동일한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간곡한 자비(* , 하몬 메에이카) - '하몬'(* )은 빗소리와 같은 소리(왕상 18:41), 노랫소리(겔 26:13), 무리의 떠드는 소리(삼상 4:14;14:19)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풍요', '풍부' 정도의 의미로 보면 무난하겠다. 그리고 '메에이카'(* )는 '부드럽다'는 뜻의 사용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복부' 혹은 상징적으로 '동정심'을 뜻한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할 때 본 구절의 뜻은 '풍부한 자비' 정도가 되겠다.
=====63:16
아브라함은...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대비적 표현이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야곱)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자들이다. 한편, 본문은 49:15을 생각나게 한다:"여인이 어찌 그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63:17
어찌하여...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 인간이 냉소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는 일을 멈추고 그들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신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데, 이 경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으로 판단하고 불평하게 된다. 본 구절은 바로 이스라엘의 그 같은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Keil & Delitzsch). 그러나 16절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 구속자로 고백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사실을 고백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64:5).
=====63:18
주의 거룩한 백성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졌었다(62:12;신 7:6).
=====63:19
본절은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원문과 문맥에 충실하면 의미 규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핵심은 개역 성경의 '우리는 ...같으며'부분을 정확히 규정하는 일인데 원문은 이렇다:'하이누 메올람 로 마솰타 밤'(* ).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당신은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읍니다'이다. 바로 앞절에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가나안을 점령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 언급 후 바로 이어지는 '영원 전부터, 곧 옛적부터 우리는 당신의 것'이라는 고백은 대적이 그들의 본토를 점령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능한 추론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니 그것을 근거로 그 대적을 본토로부터 몰아내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고백은 자신들의 본국 귀환의 근거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다'의 '그들'이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본국 귀환의 또 다른 근거로서, 그 대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같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할 것은 당연하다. 이상의 소고를 정리할 때 본 절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서인 사실과 그의 대적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민족인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본토로의 귀환을 호소하는 탄원으로 볼 수 있다.
본서 저자의 일관된 의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동시에 언약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전장(62장)에서 종말론
적인 시온의 회복, 즉 교회의 회복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통해서 알려졌
다. 반면에 본장은 에돔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
수들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에
돔에 대한 심판의 구체성을 묘사하는 전반부(1-6절), 과거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던
하나님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는 중반부(7-14절),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한 이스라엘
의 탄식과 호소를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15-19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에돔에 대한 심판(21 : 11, 12 ; 34 : 5-17)은 이미 두 차례나 선포된 바
있다. 21장에서는 심판의 상황이 짤막하게 개괄적으로 언급되었고, 34장에서는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에돔의 특별한 죄악을 부각시키
기보다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상징화시키고 있다. 특별히 저자가 에돔을 반하
나님적인 국가로 상징화시키고 있는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적
대적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시 137 : 7). 참고적으로 34장과 본
장에 나타난 에돔의 심판에 대해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34 장 | 63 장 |
+------------------------+---------------------------+-------------------------+
| 심판의 강도 | 매우 강함 | 강함 |
+------------------------+---------------------------+-------------------------+
| 심판의 묘사 | 구체적으로 언급함 | 심판의 당위성만을 강조함|
+------------------------+---------------------------+-------------------------+
| 심판의 주체에 대한 언급| 여호와의 칼(5, 6절) | 홍의를 입은 자(1절) |
+------------------------+---------------------------+-------------------------+
한편 본장에서 발견되는 문학적인 특징은 애가(lament)의 형태가 두드러진다는 점
이다. 이러한 문학적인 양식은 15-19절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64 : 9-12에도 등장한
다. 이렇게 애가의 형식이 두드러진 것은 본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주도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여 애
가의 형식을 빌어서 하나님께 호소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심판자 메시야(63 : 1-6)
장차 있게 될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을 시온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
는 전 단락(62 : 11, 12)에 이어서 본 단락은 하나님의 적대 세력으로 상징화되고 있
는 에돔의 심판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전 단락의 소망스러운 분위기
에서 절망적인 분위기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의 반전은 이전의 묵시적인 성
격의 장(24-35장)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심판과 구원의 양면적인 계시를
동시에 밝히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난다
는 사상이 성경의 일관적인 신학적인 특징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심판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본 단락은 심판
자의 모습과 그에 대한 반응을 소개하고 있는 전반부(1, 2절), 심판에 대한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는 후반부(3-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저자는 본 단락에서 심판하시는 메시야에 대해 전투에 참가한 군대의 지휘관
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에 대하여 군대 장관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일반적인 비유 방식이기도 하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 전투를 앞
에 두었을 때 나타났던 인물도 바로 '여호와의 군대 장관'(수 5 : 14)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묘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전투적인 삶임을 암시하고 있다(엡 6
: 10-17). 이제 본 단락의 중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메시야의 심판의 대상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들이다(1, 2절). 저자는 종종
'에돔'을 하나님께 반대하는 세력으로 상징화시켜 왔다(34 : 5). 즉 에돔은 어떤 한
지역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총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세력을 그
대상으로 함을 알 수 있다.
(2) 메시야의 심판과 구속 사역은 인간의 조력이 전혀 없이 이루어진다(5절).
2.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함(63 : 7-14)
에돔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1-6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로 초점을 돌린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하나님의 역사가 심판으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저자는 에돔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난 다음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
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가 나타나는 본 단락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묘사하는 전반부(7-9절),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여주는 후반부(10-14절)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여호와의 긍휼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돌아보는 형태로 나타난다
(7-9절) : 저자는 여호와의 긍휼이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
들을 구원하시며'(9절)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의 긍휼은 무지한 이스라엘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완벽하게 보호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무기력하
고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는 역할을 감당하
게 되는 것이다.
(2) 주의 성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10-14절) : 본문은 신약 시대에만
성령이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
하게 밝히는 구절이다. 특히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의문문의 형태로 표현하
고 있다. 성령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실제적으로 인
도하셨다. 신약 시대에는 이러한 구약의 사상을 더욱 온전한 형태로 계시하기 위하여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고 그 결과로 교회가 탄생되었던 것이다(행 2장).
3.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63 : 15-19)
과거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역사와 이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
을 서술하고 있는 전 단락(7-14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구원을 요청하는 간절한 호소
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은혜가 풍성하신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
이다. 이러한 본 단락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호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전반부
(15-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의 상황을 탄식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 후반부
(18, 19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구하는 기도이다(15-17절) :
15절의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라는 표현은 실제로 하나님의 긍휼이 그쳤다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간절히 바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이러한 이스라
엘 백성들의 신실하심을 구하는 기도 16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우선 본문은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이 자신들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여호와는 자신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고백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
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실 것을 믿으며 기도하는 것이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주의 통치를 바라는 기도이다.(18, 19절) : 이스라
엘 백성들은 현재 자신의 형편이 하나님의 통치권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음을 고백한
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교제가 살아있는 '주의 성소'가 유린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18절).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생생하게 체험되어져야
했던 '주의 성소'가 대적들로 인하여 상실되었으므로 하루 빨리 회복케 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19절). 결국 이러한 간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다시 하나님
의 다스리심이 생생하게 체험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본장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단하시고 반면에 성도들에 대해서는 은혜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살전 4 : 14-17). 둘째, 우리는 자신의 상대가 얼마나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에서 멀어져 있는가를 헤아려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해야 한다.
에돔...보스라 - 전자는 근접해 있는 까닭에 유다와 끊임없는 적대감을 가졌던 국가이며 후자는 위치상으로는 모압에 가까우나 이두매, 곧 에돔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던 곳이다. 이 두 곳은 본서 저자가 세상의 모든 유다의 대적을 의미할 때 언급한 곳이다(34:6). 홍의를 입고...오는 자 - 여기 '홍의를 입고'는 '하무츠 베가딤'(* )이다. 그런데 '하무츠'(* )는 '(맛이) 신', '(색깔이) 얼룩덜룩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하마츠'(* )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자줏빛, 주홍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원래 자줏빛으로 염색한 혹은 피가 그 옷자락에 튀어 피색으로 물든 용사의 망토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절이 묘사하고 있는 어떤 인물은 이 사실과 뒷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에 승리를 쟁취하고 귀환하는 큰 용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용사의 정체에 관한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중의 대표적인 두 견해는 메시야 혹은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이다. 62장과의 문맥적 연결 면에서 그리고 본절이 그려내는 용사의 모습이 대적들을 정복한 승리자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많다(Calvin, Delitzsch, Gesenius).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 입각해볼 때, 오히려 전자의 견해가 더 나을 것 같다. (1)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상황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상 일어날 일이라기보다는 마지막 보응의 날과도 관계된다. 이런 점에서 에돔 등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은 물론이고 나아가 메시야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사단의 모든 세력까지 상징한다. (2) 피묻은 옷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을 암시한다(계 19:11-14).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을 파하신 승리의 십자가였다(골 2:15).
화려한 의복 - 문자적인 뜻은 '그 의복에 있어 영광스러운'이다. 이것은 고위직에 있는 고대 용사들의 영예롭고 눈부신 군복을 가리킨다.
큰 능력으로 걷는 자 - 두말할 나위 없이 이 표현은 그의 대적을 완전히 섬멸한 사실을 드러내듯 승리의 정복자로서 당당한 보무로 입성하는 용사에서 따온 이미지이다.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 지금까지는 제삼자가 화자(話者)였다면 본 구절부터는 메시야 자신이 화자가 되고 있으며, 본 화자는 앞선 화자의 의문에 대답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 '의'는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63:2
본절은 메시야가 그 대적을 진멸하신 사실을 포도즙 짜는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당시 포도즙을 짤 때에는 먼저 큰 통에 포도를 넣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밟았다. 한 시간 정도 밟으면 질이 좋지 않은 포도는 맨 위로 떠올랐으며 그후 계속해서 30분 정도를 더 밟으면 향기 좋은 포도즙이 각 송이에서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더 밟으면 신 포도까지 터져 전체 포도즙의 맛은 좋지 않게 된다고 한다(Burder). 본절은 이같이 포도즙을 짤 때 그 즙이 튀어 옷에 몰은 어떤 사람을 연상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해 언급하곤 한다(신 32:14). 어떤 학자는 여기서 저자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하고 있는 까닭은 1절에 언급된 '보스라'라는 지역이 포도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Calvin). 이 경우 '보스라'가 포도 산지인 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더 실감나게 본절의 의미를 파악했을 것이다.
=====63:3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 본절은 2절에 묘사된 바 포도즙 틀을 밟다가 그 즙이 옷에 묻은 것과 같은 데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63:4
원수 갚는 날 - 여기 '원수 갚는다'는 표현은 공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돔 혹은 이두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성경은 에돔 자손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까지 파괴할 정도로 악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진술하고 있다(시 137:7). 이 같은 대적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방(사단의 세력)이 징벌받는 이 날은 역으로 이스라엘(모든 성도)의 구원의 날이다(34:8;61:2 참조).
=====63:5
도와 주는 자도 없고...없으므로 - 아무도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조력하지 않으며 조력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메시야께서 감당하시는 인류 구원의 대업(大業)은 메시야 자신의 대속 사역으로써 충분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 이 표현은 59:16의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를 연상시킨다.
=====63:6
그들을 취케 하고 - 혹자는 본절을 3절 하반절의 반복적 유사 평행구로 보고 본문의 히브리어 '아솨크램'(* )을 '쳐부수다'는 의미의 '아솨브램'(* )으로 수정하고자 한다(탈굼역, Whybray). 그러나 굳이 원문 수정을 하지 않더라도, 본문은 메시야의 진노의 공포 아래 있는 자가 만취한 자처럼 자제력을 잃고 땅 위에 엎드러져 있는 상황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시 75:8 참조).
=====63:7
내가 - 본절에서부터 화자가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1-6절) 화자가 주로 메시야이셨다면 이제부터는 대적의 진멸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이며(7-14절) 그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선지자가 직접적 화자로 나서고 있다. 그런데 여기 대적의 진멸이란 1-6절에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역사속에 수차례 반복된 이방으로부터의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가리킨다. 하나님 찬양으로 시작되는 본절로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15절부터 64:12까지의 큰 단락은 이스라엘의 억압과 파멸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자비를 탄원하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63:8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 이것은 언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킨다.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 -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었을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기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에 신실할 것을 기대하셨다. 아울러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반역과 거짓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지만,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은총을 따라 택하신 백성을 회개시켜 새로이 회복시키시리라는 암시도 담겨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구절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63:9
- 짧지만 번역하기 난해한 구절이다. 그 이유는 '...이 아니다'의 뜻을 닌 '로'(* ) 때문이다. '로'를 생략해버릴 경우,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부합하는 번역이 가능하다:'그들의 모든 고통의 때에 하나님도 고통하였다'(In all their affiction he was afflicted, KJV, LB, RSV). 그러나 원문의 단어 자체를 생략하는 이 같은 번역은 수용하기 어렵다. 반면 '로'를 그대로 두고 문자적 번역을 하면 '모든 그들의 고통의 때에 하나님은 고통하지 않으셨다'라는 다소 애매한 내용이 되어버린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뒷문맥을 고려하고 본 구절 자체에 어떤 용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다. 그 같은 경우 다음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모든 그들의 빈궁의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그의 선하심에 있어) 빈궁하지 않으셨다'(Houbigant). 여기 '빈궁'은 '고통'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번역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자기 앞의 사자 - 이 사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하였던 적이 있다(출 32:34;33:2;민 20:16). 따라서 천사로 보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구체적으로 가브리엘(눅 1:19), 미가엘(단 10:13-21)로 보는 견해가 있다(Clark, Jarchi). 그런데 이 용어는 오실 메시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실제로 메시야로 보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는 부분에서 이 용어가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출 14:19;23:20, 21). 따라서 본 용어는 1차적으로는 천사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예표하는 용어로 정리하면 되겠다.
드시며 - 그의 양떼를 모든 목자 혹은 그의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 혹은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독수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출 19:4;신 32:11, 12).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광야의 연단 중에서 보존하시고 결국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이신 것을 가리킨다.
=====63:10
성신(* , 루아흐 카데쇼) - 어떤 학자는 이것을 '선지자들의 말씀'(갈대아역 등) 혹은 '하나님'으로 각각 번역한다(Grotius, Gesenius, Rosenmuller).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 때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갱신시키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삼위(三位) 중 성령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물론 당시 히브리인들이 이 용어를 하나님에게 적용시켰다는 사실과, 오늘날의 성도들과 달리 삼위의 독립된 존재 양식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용어가 '성령'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동일하게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셨듯이 성령 하나님도 영원 전부터 계셨다.
=====63: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말을 추억하여 가로되 - 원문 직역은 '그가 모세와 그의 백성들, 옛날을 기억하셨다'이다. '기억하셨다'는 '이즈코르'(* )로서 3인칭 단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인칭 복수로 바꾸어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는데(NIV),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 시도의 이유는 이어지는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원(의문)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백성의 탄원(의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탄원(의문)을 그대로 묘사하는, 말하자면 그들의 의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이즈코르'의 인칭 문제는 해결된다. '이즈코르' 곧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징벌을 받아 마땅한, 심지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으셔도 될 만한 악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계속 그 약속에 신실하셨던 것이다. 이 신실함은 모세와 그의 백성의 시대 곧 광야 시대 때 나타났었다. 이제 그 후대 이스라엘은 바로 그 신실하심의 결과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고통의 현실에 대하여 동일한 신실함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본절에서 14절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의문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현실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결과를 알려주고 계신다.
바다 -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라엘이 탈출하여 나왔던 애굽을 가리킨다. 홍해 사건은 12절에 나온다.
성신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궁극적 목적은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승한 거룩한 민족이 되게하기 위함이었다(출 19:4-6). 그런데 그 목적에 도달하게끔 역사하는 힘은 그들 가운데 보내신 성신으로 말미암았다.
=====63:12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만이 참신이신 것을 이스라엘과 온 세계에 알리는 데 있었다. 애굽은 당시 세계에서 모든 과학, 문명의 중심 국가라 할 만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되어진 혹은 발생되어진 사건, 결과 등을 쉽게 온 세계로 퍼져 나갔다.
=====63:13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 여기 '광야'는 그 여러 특성 중 그 여정에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곳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63:14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 높은 언덕 위로부터 비옥하고 물이 많은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의 떼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시 23:2). 이들 가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성령은 지친 광야의 방황 이후 이스라엘을 약속하셨던 땅에 들여보내사 그들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셨다. 본절은 과거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 중에 있는 그 후손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암시한다.
=====63:15
주여 하늘에서...보옵소서 - 본절에서부터 현재의 재난과 역경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 시작된다. 그들의 탄원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과 과거 그의 조상들을 동일한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간곡한 자비(* , 하몬 메에이카) - '하몬'(* )은 빗소리와 같은 소리(왕상 18:41), 노랫소리(겔 26:13), 무리의 떠드는 소리(삼상 4:14;14:19)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풍요', '풍부' 정도의 의미로 보면 무난하겠다. 그리고 '메에이카'(* )는 '부드럽다'는 뜻의 사용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복부' 혹은 상징적으로 '동정심'을 뜻한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할 때 본 구절의 뜻은 '풍부한 자비' 정도가 되겠다.
=====63:16
아브라함은...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대비적 표현이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야곱)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자들이다. 한편, 본문은 49:15을 생각나게 한다:"여인이 어찌 그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63:17
어찌하여...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 인간이 냉소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는 일을 멈추고 그들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신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데, 이 경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으로 판단하고 불평하게 된다. 본 구절은 바로 이스라엘의 그 같은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Keil & Delitzsch). 그러나 16절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 구속자로 고백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사실을 고백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64:5).
=====63:18
주의 거룩한 백성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졌었다(62:12;신 7:6).
=====63:19
본절은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원문과 문맥에 충실하면 의미 규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핵심은 개역 성경의 '우리는 ...같으며'부분을 정확히 규정하는 일인데 원문은 이렇다:'하이누 메올람 로 마솰타 밤'(* ).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당신은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읍니다'이다. 바로 앞절에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가나안을 점령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 언급 후 바로 이어지는 '영원 전부터, 곧 옛적부터 우리는 당신의 것'이라는 고백은 대적이 그들의 본토를 점령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능한 추론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니 그것을 근거로 그 대적을 본토로부터 몰아내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고백은 자신들의 본국 귀환의 근거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다'의 '그들'이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본국 귀환의 또 다른 근거로서, 그 대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같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할 것은 당연하다. 이상의 소고를 정리할 때 본 절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서인 사실과 그의 대적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민족인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본토로의 귀환을 호소하는 탄원으로 볼 수 있다.
본서 저자의 일관된 의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동시에 언약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전장(62장)에서 종말론
적인 시온의 회복, 즉 교회의 회복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통해서 알려졌
다. 반면에 본장은 에돔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
수들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에
돔에 대한 심판의 구체성을 묘사하는 전반부(1-6절), 과거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던
하나님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는 중반부(7-14절),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한 이스라엘
의 탄식과 호소를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15-19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에돔에 대한 심판(21 : 11, 12 ; 34 : 5-17)은 이미 두 차례나 선포된 바
있다. 21장에서는 심판의 상황이 짤막하게 개괄적으로 언급되었고, 34장에서는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에돔의 특별한 죄악을 부각시키
기보다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상징화시키고 있다. 특별히 저자가 에돔을 반하
나님적인 국가로 상징화시키고 있는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적
대적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시 137 : 7). 참고적으로 34장과 본
장에 나타난 에돔의 심판에 대해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34 장 | 63 장 |
+------------------------+---------------------------+-------------------------+
| 심판의 강도 | 매우 강함 | 강함 |
+------------------------+---------------------------+-------------------------+
| 심판의 묘사 | 구체적으로 언급함 | 심판의 당위성만을 강조함|
+------------------------+---------------------------+-------------------------+
| 심판의 주체에 대한 언급| 여호와의 칼(5, 6절) | 홍의를 입은 자(1절) |
+------------------------+---------------------------+-------------------------+
한편 본장에서 발견되는 문학적인 특징은 애가(lament)의 형태가 두드러진다는 점
이다. 이러한 문학적인 양식은 15-19절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64 : 9-12에도 등장한
다. 이렇게 애가의 형식이 두드러진 것은 본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주도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여 애
가의 형식을 빌어서 하나님께 호소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심판자 메시야(63 : 1-6)
장차 있게 될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을 시온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
는 전 단락(62 : 11, 12)에 이어서 본 단락은 하나님의 적대 세력으로 상징화되고 있
는 에돔의 심판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전 단락의 소망스러운 분위기
에서 절망적인 분위기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의 반전은 이전의 묵시적인 성
격의 장(24-35장)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심판과 구원의 양면적인 계시를
동시에 밝히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난다
는 사상이 성경의 일관적인 신학적인 특징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심판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본 단락은 심판
자의 모습과 그에 대한 반응을 소개하고 있는 전반부(1, 2절), 심판에 대한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는 후반부(3-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저자는 본 단락에서 심판하시는 메시야에 대해 전투에 참가한 군대의 지휘관
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에 대하여 군대 장관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일반적인 비유 방식이기도 하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 전투를 앞
에 두었을 때 나타났던 인물도 바로 '여호와의 군대 장관'(수 5 : 14)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묘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전투적인 삶임을 암시하고 있다(엡 6
: 10-17). 이제 본 단락의 중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메시야의 심판의 대상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들이다(1, 2절). 저자는 종종
'에돔'을 하나님께 반대하는 세력으로 상징화시켜 왔다(34 : 5). 즉 에돔은 어떤 한
지역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총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세력을 그
대상으로 함을 알 수 있다.
(2) 메시야의 심판과 구속 사역은 인간의 조력이 전혀 없이 이루어진다(5절).
2.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함(63 : 7-14)
에돔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1-6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로 초점을 돌린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하나님의 역사가 심판으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저자는 에돔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난 다음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
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가 나타나는 본 단락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묘사하는 전반부(7-9절),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여주는 후반부(10-14절)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여호와의 긍휼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돌아보는 형태로 나타난다
(7-9절) : 저자는 여호와의 긍휼이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
들을 구원하시며'(9절)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의 긍휼은 무지한 이스라엘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완벽하게 보호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무기력하
고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는 역할을 감당하
게 되는 것이다.
(2) 주의 성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10-14절) : 본문은 신약 시대에만
성령이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
하게 밝히는 구절이다. 특히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의문문의 형태로 표현하
고 있다. 성령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실제적으로 인
도하셨다. 신약 시대에는 이러한 구약의 사상을 더욱 온전한 형태로 계시하기 위하여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고 그 결과로 교회가 탄생되었던 것이다(행 2장).
3.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63 : 15-19)
과거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역사와 이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
을 서술하고 있는 전 단락(7-14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구원을 요청하는 간절한 호소
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은혜가 풍성하신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
이다. 이러한 본 단락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호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전반부
(15-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의 상황을 탄식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 후반부
(18, 19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구하는 기도이다(15-17절) :
15절의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라는 표현은 실제로 하나님의 긍휼이 그쳤다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간절히 바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이러한 이스라
엘 백성들의 신실하심을 구하는 기도 16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우선 본문은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이 자신들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여호와는 자신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고백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
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실 것을 믿으며 기도하는 것이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주의 통치를 바라는 기도이다.(18, 19절) : 이스라
엘 백성들은 현재 자신의 형편이 하나님의 통치권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음을 고백한
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교제가 살아있는 '주의 성소'가 유린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18절).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생생하게 체험되어져야
했던 '주의 성소'가 대적들로 인하여 상실되었으므로 하루 빨리 회복케 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19절). 결국 이러한 간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다시 하나님
의 다스리심이 생생하게 체험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본장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단하시고 반면에 성도들에 대해서는 은혜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살전 4 : 14-17). 둘째, 우리는 자신의 상대가 얼마나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에서 멀어져 있는가를 헤아려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