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
나는...잠잠하지 아니하며 - 본절의 화자(話者)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먼저는 저자인 이사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기까지 이사야는 그의 수고와 중보 기도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것이 된다(Calvin, Gesenius). 한편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은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까지는 그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각오를 실은 구절이 된다(Delitzsch, Grotius). 이외에도 유대인, 신약교회 성도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유력한 견해는 아니다. 이중에서 본장의 전반적 흐름을 고려할 때, 본 화자는 1차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더 나아가서는 위대한 중보자이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영적 회복을 맛볼 때까지 그 백성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보 사역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가 특히 하나님을 향해 중보 기도를 드린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침묵 및 그의 백성의 불평이 전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오랜 포로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시행되지 않자 백성들은 불평을 하고 그 불평을 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대목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64:12; 시 28:1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57:11; 65:6등에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응답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 앞의 '공의가 빛같이'의 동의적 평행구이다. '횃불', '빛' 따위는 그 특징이 그 주위를 향해 빛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제 이스라엘에게 비롯된 구원이 마치 아침태양이 가까운 언덕, 들, 그리고 더 높은 산을 향해 그 빛을 펼쳐 나가듯이 온 세상을 향해 그 영향력을 펼쳐 나갈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나타날 구원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열방에도 미칠 것을 암시하는 셈이다.
=====62:2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 - '새 이름'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 후 그곳에서 살게 될 자들을 언급할 때 바로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계 2:17; 3:12).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이 회복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수치와 가난, 압제로 대변되는 삶의 상황 속에 처해 있다. 그러나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번영과 영광으로 삶의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인데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새 이름을 얻을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62:3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 원문직역은 '여호와의 손안에 있는 영광의 면류관'이다. 본문은 해석하기 힘든 구절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면류관이란 머리에 쓰는 것이 상식인데 여기서는 그 면류관이 손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면류관'을 축제 혹은 결혼식 따위 때에 손에 들고 행진하던 화환, 꽃다발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본절은 면류관 자체보다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내용으로 보고 해석되어야 할 것같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을 가리킨다(신 33:3). 그리고 후 문맥은 하나님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구절로 봄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영광의 '면류관' 혹은 ' 왕관'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될 수는 없다. 특히 '왕관'은 '체니프'(* )로서 '둥글다', '굴곡을 이루다'는 뜻을 내표하는 말이며 가장자리에 보석 따위가 박힌 둥근 면류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왕관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는 영광의 상징이다. 이 사실을 중시할 대 본절은 이스라엘이 이방 세계 앞에 두드러질 것을 암시한다고 간주될 수 있다. 앞 문맥은 사실 이것을 지지한다.
=====62:4
헵시바(* - , 헤프치 바) - 문자적인 뜻은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이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이 그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자신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한편 히스기야 왕의 아내가 '헵시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에(왕하 21:1) 착안하여, 히스기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 언급되기도 한다(32:1 참조).
쁑라(* , 베울라) - 문자적인 뜻은 '결혼한 자', '결혼한 부인'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결혼했다가 이혼 당한, 말하자면 버림을 받은 여인에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여기서는 한번 버림을 받았으나 다시 용서함 받은 이스라엘의 신분을 암시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근동에서는 한 왕이 다른 왕으로부터 왕권, 곧 통치권을 받았으면 그는 그 왕국과 혼인 관계에 들어갔다고 흔히 말한다(Robert). 또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의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곤 한다(요 3:29; 계 21;2,9). 저자는 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로 이 결혼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 한번 버림을 받은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과 재결합하는 이미지가 소개되는 문맥에서 본 비유는 좀 낯설다. 일반적으로 청년이 과부나 한번 결혼했던 여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쉽지 않다. 물론 왕실이 또 다른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 정략적인 목적 때문에 그 같은 경우가 흔히 생기기는 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한번 버림을 받았던 이스라엘과 재결합하는 사실을 청년과 처녀의 재결합 이미지로 묘사하는 저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다는 뜻을 보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 같다.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본문의 해석은 상당히 난해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1)'아들들'을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나타내는 복수형 칭호로 해석하는 견해. (2)' 네 아들들'에 해당하는 '바나이크'(* )를 '건축자'란 뜻의 '보네크'(* )로 읽어, 예루살렘의 건축자이신 하나님을(시 147:2)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Whybray). (3) '취하겠고'의 히브리어 '바알'(* )이 '결혼하다'는 뜻 외에 '다스리다', '관할하다'(26:13)는 뜻도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본문을 '네 자녀들이 네게 거하겠고'로 해석하는 견해(사해 사본, 벌게이트역, 70인역, 탈굼역), 세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62:6
파숫군을 세우고 - '파숫군'이란 대적의 침입을 살피거나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령을 확인하기 위하여 성벽 망대를 지키던 자이다(52:7,8).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임무를 맡았던 자들을 가리킨다(겔 3:17;33:7).
잠잠치 않게 하였느리라 - 이것은 시간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동방의 파수꾼들이 망대를 순회할 때마다 큰소리를 지르던 관습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는 백성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 하마즈키림 에트 야훼)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를 기억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여기서 '하마즈키림'(* )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 혹은 예배 의식 따위에 적용되는 용어로서(시 45:17; 102:12) '기억하다'로 번역되는 '자카르'(* )에서 온 단어이다. 따라서 본 용어는 여호와를 기억나게 하기 위하여 예배에 봉사하는 자 혹은 여호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그 백성에게 그의 이름, 곧 그의 전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존재 그 자체를 찬양 및 선포하는 자로 해석될 수 있겠다. 여기서는 후자로해석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1절에서 암시되었거니와 본절의 종교 지도자들의 임무란 다름 아닌 메시야를 통한 구원 사역을 계획하고 수행하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62:7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 이것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와 이전의 특권을 회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완전한 성취는 주의 재림 때에야 되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본 예언은 영적 예루살렘인 신약 교회에도 적용된다. 신약 시대 성도들 중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교회가 우주적인 존경과 기쁨의 대상이 될 재림의 날을 준비하며, 이스라엘의 국교지도자들이 그랬듯이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눅 18:1,7 참조).
=====62:8
여호와께서...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 고대에는 맹세의 방법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하늘을 행해 손을 드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신 32:40). 하나님은 그 맹세를 드릴 상대가 없는 분이므로 하나님의 맹세의 경우 그 자신에게 드려졌다(45:23).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오른손을 들고 맹세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의 오른손은 그의 백성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권능을 나타낸다. 이제 그의 강력한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하나님은 결코 그 백성을 이방에게 다시 넘겨주지 않으실 것이다. 네 곡식을...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 여기 곡식은 문자적으로 '옥수수', '곡물'을 뜻한다. 오늘날 옥수수는 동물의 먹이로 많이 사용되지만, 당시 팔레스틴에서의 옥수수란 중요한 식물(植物)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단지 옥수수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취하던 모든 양식이 앞으로는 결코 이방의 손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약속하고 계신 셈이다. 그러나 이 약속 후에도 이방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의 양식을 탈취한 바 있다. 그렇다면 본 약속은 종말론적 성격을 띤 약속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주의 재림 이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때 그 백성은 결코 사단의 위험이나 공격으로 인해 탈취당하지 않을 것이다.
=====62:9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수고한 것을 즐기게 된다는 말씀인데, 이 같은 결과는 안전의 상태가 조성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신의 수고한 것을 먹는다는 것만큼 안정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강력히 암시하는 표현도 드물다(Barnes).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규례를 따라 성전에서 먹고 마시곤 하였는데(레 6:16; 신 12:17,18; 14:23). 그때 그들이 보여 준 가장 큰 특징은 기쁨이었다. 그들로 기쁨을 느끼게 한 것은 그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자각이었다. 본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모든 축복의 결과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고 기쁨으로 낙을 누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62:10
본절은 본서 저자인 이사야(1절)와 파수꾼들로 호칭된 종교 지도자들(7절)의 중뵈도, 그리고 계속 이어진 하나님의 엄숙한 약속(8,9절)이라는 문맥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선지자 이사야와 종교 지도자들이 중보기도한 내용은 1차적으로 다름 아닌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이었다. 이제 그 귀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될 것인데 그 성취를 묘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본절이다.
기를 들라 - 이것은 한 군대가 행진을 재개할 때를 연상케 한다. 행진 중 어느 곳에 쉬다가 충분한 휴식 후 행진을 재개할 경우 깃발은 높이 쳐들어서 행렬을 재정비하라는 신호를 내곤 한다. 그와 유사하게 오랜 포로 생활로 이곳 저곳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은 정한 지도자를 앞세우고 전열을 정비하듯 한데 모여 본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62:11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 여기 '구원'은 1차적으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뜻한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그리고 보다 먼 조망에서 볼 때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력한 역본들은 본 '구원'을 '구세주'로 번역하고 있다(70인역, 벌게이트역).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 여기 '그'란 바로 메시야를 가리키며 '상급이 그에게 있고'란 구원이 그 손안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메시야께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암시한다.
=====62:12
4절에 이어 다시 한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 반복 강조되고 있다. 그 같은 결과는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 '여호와의 구속 하신 자'란 '대속적 피에 의해 그 죄를 씻음 받고 죽음에서 해방된 자'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이름만큼 아름다운 이름은 없다.
60-62장에는 계속해서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이스라엘의 영광이 취급되고 있다. 그
런데 6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한 개괄적인 선포가 이루어졌고, 61장에는 그
영광의 기초가 될 메시야의 사역이 부각되었다. 반면에 62장은 미래의 영광의 성취 과
정에 부과된 인간 사역자들의 의무를 강조하면서 60, 61장을 종합하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과 영광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세에 대
해 언급하고 있는 본장은 저자의 기도와 성도의 의무를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본장은 저자의 기도와 성도의 의무를 기록하고 있
는 전반부(1-7절)와 하나님의 의지와 명령을 기록하고 있는 후반부(8-12절)로 구성되
어 있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1) 이스라엘의 새 미래를 위한 기도(1-5절), (2) 말씀 전파에
대한 성도의 사명(6, 7절), (3) 이스라엘의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8, 9
절), (4) 회개하는 자를 위해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10-12절)이라는 소주제의 연
결을 통해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전반부의 화자는 일차적으로는 이사야를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화자의 변화는 본장 전
체의 문학적 골격을 이루며, 내용 구분의 기준이 된다.
또한, 본장은 반복을 통한 주제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
은 본서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4, 5절에는 49장 이후 계속
해서 등장하는 죄로 인하여 남편과 분리된 여인의 재화합에 대한 갈망의 비유가 나온
다. 10, 11절에는 앞부분(40 : 3 ; 48 : 20 ; 49 : 22 ; 52 : 11 ; 57 : 14)에 나타났
던 유사 문구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10절에는 이중 명령어도 반복해서 등장
한다. 또한 12절에는 4절의 주제가 발전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처럼 저자는 많은 반
복법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위로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함유하고 있는 본장은 시온이 영광스러운 도성으로서 세계 위에
드러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죄로 인하여 포로로 고통받고 있을지라도
시온으로 귀환하여 성벽을 재건하고(느 4 : 21-23) 곡식을 추수하게(느 5 : 11-13) 된
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예
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교회를 건설하시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도와 이스라엘의 영광(62 : 1-7)
종의 사역으로 성취될 이스라엘의 미래적 영광을 기록한 바 있는 전장(61장)에 이
어 본 단락에서는 이스라엘의 찬란한 영광이라는 동일 주제가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저자는 미래의 영광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종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
로 인간 편에서 할일은 오직 기도하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여호와의 목적이 드러나는 전반부(1-5절)와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요청하는 후반부(6, 7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저자가 나타내려는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미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한다(1절) : 저자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임하도록 간구한다. 그런데 이 기도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전달
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고 있다(60 : 1-3). 이처럼 신자의 간구는 하나님의 말
씀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어야 한다. 야곱도 이미 주신 약속들을 근거하여 간절한 기도
를 올린 바 있다(창 32 : 9-12). 우리도 다가올 찬란한 시온의 영광을 위하여 인내와
깊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이사야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2) 이스라엘은 미래에 새로운 운명으로 변화된다(2, 4절) : 저자는 이스라엘이 새
이름을 받는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이름'이란 어떤 대상의 신분, 성격, 본질 등을 의
미한다. 따라서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존재의 변화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굴복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다시 혼인 관계를 회복한 '쁑라' 곧 '결
혼한 여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회복의 소망을 가지고 생활하도록 위로하고
있다.
(3) 새 이스라엘의 건설을 위해서 사역자들은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6, 7절) : 특
별히 저자는 파수꾼들에게 계속적으로 기도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당부는
주님이 재림 때까지 교회를 섬기게 될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마치 대적
으로부터 도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뜬 눈으로 밤을 세우는 파수꾼들처럼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은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살전
5 : 6, 17). 그럴 때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교회를 보존하시고 완성하신다.
2. 하나님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영광(62 : 8-12)
이스라엘의 찬란한 미래 건설에 있어서 성도 편에서 해야 할 일을 다룬 전 단락
(1-7절)에 이어지는 본 단락에서는 찬란한 미래 건설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 및 그 결
과가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저자는 결연한 의지를 강력히 피력함으로써 성취의 확실
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은 (1) 하나님의 정의의 회복(8, 9절), (2) 하나님의
재건 명령(10절), (3) 구원과 심판의 선언(11절), (4) 회복된 이스라엘의 호칭(12절)
등으로 구분된다. 이제 본문에 드러난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적을 근절하시는 하나님(8, 9절) : 하나님께서는 맹세의 형식을 사용하여 수
고한 자가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
로 빈번하게 대적의 공적을 받았고 양식을 수탈당하였다(1 : 7, 8). 왜냐하면 하나님
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양식
수탈이 다시는 없겠다는 선언은 곧 이방 대적의 침입이 더 이상 없겠다는 뜻이다. 그
러나 이러한 약속은 실제적으로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성취될 수 없다. 결국 저
자는 종말론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조망하면서 실망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게 위로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후일에 완성될 새 예루살렘에서는 대적의 세력이 완
전히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안식과 평화만이 도래한다(9 : 3).
(2) 이방인의 구원을 예비하신 하나님(10절) : 마지막 때에는 엄청난 수의 이방인
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할 것이다(롬 11 : 25). 특별히 저자는 이러한 일
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 길을 예비해야 한다고 두 번이다 중복해서 말한다.
그러나 구원 사역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
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돌아오도록 인도할 것이다. 저자는 이방인의 구원을 주도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빈틈없는 계획하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통하여 구원의 우주성
을 드러내주고 있다.
(3) 심판과 구원을 시행하시는 하나님(11절)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
시고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신다. 한시적으로 보면 정반대의 경우도 가능하지만 궁극
적으로 사단의 세력은 멸망하고, 언약 백성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 이러한 종말론
적 심판과 구원은 역사 현장에서 대표적으로 제시된다. 즉, 유대인들을 지나치게 압제
한 바벧론은 하나님의 보응으로 B.C. 539년 메대 바사에 의해 멸망되었고(13장 ; 단 5
: 30), 이스라엘 포로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
님의 교회는 구원을 얻으나 그 대적 원수 마귀는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됨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계 21 : 1-8).
(4) 성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12절) :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될 때 하나님
은 새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 '찾은 바된 자', '버리지
않은 성읍' 등으로 명명하신다. 이 이름들은 신약 성도들을 의미하는 호칭으로서 결국
'성도'의 거룩한 영광을 드러내준다. 여호와의 종 메시야를 통해 죄 씻음을 받고 거룩
해진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교재에 들어가게 된다(고전 1 : 2 ; 살후 2 :
13). 아울러 하니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대하 23 : 18)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열조와 맺은 언약을 지키시고 반드시 언약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택한 백성은 자만하지 말고 더욱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인간의 헌신과 기도를 통하여 역사를 진행시켜 나가시는 분이다. 이제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명심하고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동시에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완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잠잠하지 아니하며 - 본절의 화자(話者)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먼저는 저자인 이사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기까지 이사야는 그의 수고와 중보 기도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것이 된다(Calvin, Gesenius). 한편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은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까지는 그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각오를 실은 구절이 된다(Delitzsch, Grotius). 이외에도 유대인, 신약교회 성도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유력한 견해는 아니다. 이중에서 본장의 전반적 흐름을 고려할 때, 본 화자는 1차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더 나아가서는 위대한 중보자이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영적 회복을 맛볼 때까지 그 백성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보 사역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가 특히 하나님을 향해 중보 기도를 드린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침묵 및 그의 백성의 불평이 전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오랜 포로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시행되지 않자 백성들은 불평을 하고 그 불평을 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대목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64:12; 시 28:1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57:11; 65:6등에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응답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 앞의 '공의가 빛같이'의 동의적 평행구이다. '횃불', '빛' 따위는 그 특징이 그 주위를 향해 빛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제 이스라엘에게 비롯된 구원이 마치 아침태양이 가까운 언덕, 들, 그리고 더 높은 산을 향해 그 빛을 펼쳐 나가듯이 온 세상을 향해 그 영향력을 펼쳐 나갈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나타날 구원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열방에도 미칠 것을 암시하는 셈이다.
=====62:2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 - '새 이름'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 후 그곳에서 살게 될 자들을 언급할 때 바로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계 2:17; 3:12).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이 회복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수치와 가난, 압제로 대변되는 삶의 상황 속에 처해 있다. 그러나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번영과 영광으로 삶의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인데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새 이름을 얻을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62:3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 원문직역은 '여호와의 손안에 있는 영광의 면류관'이다. 본문은 해석하기 힘든 구절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면류관이란 머리에 쓰는 것이 상식인데 여기서는 그 면류관이 손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면류관'을 축제 혹은 결혼식 따위 때에 손에 들고 행진하던 화환, 꽃다발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본절은 면류관 자체보다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내용으로 보고 해석되어야 할 것같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을 가리킨다(신 33:3). 그리고 후 문맥은 하나님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구절로 봄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영광의 '면류관' 혹은 ' 왕관'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될 수는 없다. 특히 '왕관'은 '체니프'(* )로서 '둥글다', '굴곡을 이루다'는 뜻을 내표하는 말이며 가장자리에 보석 따위가 박힌 둥근 면류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왕관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는 영광의 상징이다. 이 사실을 중시할 대 본절은 이스라엘이 이방 세계 앞에 두드러질 것을 암시한다고 간주될 수 있다. 앞 문맥은 사실 이것을 지지한다.
=====62:4
헵시바(* - , 헤프치 바) - 문자적인 뜻은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이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이 그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자신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한편 히스기야 왕의 아내가 '헵시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에(왕하 21:1) 착안하여, 히스기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 언급되기도 한다(32:1 참조).
쁑라(* , 베울라) - 문자적인 뜻은 '결혼한 자', '결혼한 부인'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결혼했다가 이혼 당한, 말하자면 버림을 받은 여인에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여기서는 한번 버림을 받았으나 다시 용서함 받은 이스라엘의 신분을 암시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근동에서는 한 왕이 다른 왕으로부터 왕권, 곧 통치권을 받았으면 그는 그 왕국과 혼인 관계에 들어갔다고 흔히 말한다(Robert). 또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의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곤 한다(요 3:29; 계 21;2,9). 저자는 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로 이 결혼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 한번 버림을 받은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과 재결합하는 이미지가 소개되는 문맥에서 본 비유는 좀 낯설다. 일반적으로 청년이 과부나 한번 결혼했던 여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쉽지 않다. 물론 왕실이 또 다른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 정략적인 목적 때문에 그 같은 경우가 흔히 생기기는 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한번 버림을 받았던 이스라엘과 재결합하는 사실을 청년과 처녀의 재결합 이미지로 묘사하는 저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다는 뜻을 보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 같다.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본문의 해석은 상당히 난해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1)'아들들'을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나타내는 복수형 칭호로 해석하는 견해. (2)' 네 아들들'에 해당하는 '바나이크'(* )를 '건축자'란 뜻의 '보네크'(* )로 읽어, 예루살렘의 건축자이신 하나님을(시 147:2)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Whybray). (3) '취하겠고'의 히브리어 '바알'(* )이 '결혼하다'는 뜻 외에 '다스리다', '관할하다'(26:13)는 뜻도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본문을 '네 자녀들이 네게 거하겠고'로 해석하는 견해(사해 사본, 벌게이트역, 70인역, 탈굼역), 세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62:6
파숫군을 세우고 - '파숫군'이란 대적의 침입을 살피거나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령을 확인하기 위하여 성벽 망대를 지키던 자이다(52:7,8).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임무를 맡았던 자들을 가리킨다(겔 3:17;33:7).
잠잠치 않게 하였느리라 - 이것은 시간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동방의 파수꾼들이 망대를 순회할 때마다 큰소리를 지르던 관습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는 백성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 하마즈키림 에트 야훼)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를 기억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여기서 '하마즈키림'(* )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 혹은 예배 의식 따위에 적용되는 용어로서(시 45:17; 102:12) '기억하다'로 번역되는 '자카르'(* )에서 온 단어이다. 따라서 본 용어는 여호와를 기억나게 하기 위하여 예배에 봉사하는 자 혹은 여호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그 백성에게 그의 이름, 곧 그의 전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존재 그 자체를 찬양 및 선포하는 자로 해석될 수 있겠다. 여기서는 후자로해석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1절에서 암시되었거니와 본절의 종교 지도자들의 임무란 다름 아닌 메시야를 통한 구원 사역을 계획하고 수행하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62:7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 이것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와 이전의 특권을 회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완전한 성취는 주의 재림 때에야 되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본 예언은 영적 예루살렘인 신약 교회에도 적용된다. 신약 시대 성도들 중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교회가 우주적인 존경과 기쁨의 대상이 될 재림의 날을 준비하며, 이스라엘의 국교지도자들이 그랬듯이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눅 18:1,7 참조).
=====62:8
여호와께서...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 고대에는 맹세의 방법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하늘을 행해 손을 드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신 32:40). 하나님은 그 맹세를 드릴 상대가 없는 분이므로 하나님의 맹세의 경우 그 자신에게 드려졌다(45:23).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오른손을 들고 맹세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의 오른손은 그의 백성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권능을 나타낸다. 이제 그의 강력한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하나님은 결코 그 백성을 이방에게 다시 넘겨주지 않으실 것이다. 네 곡식을...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 여기 곡식은 문자적으로 '옥수수', '곡물'을 뜻한다. 오늘날 옥수수는 동물의 먹이로 많이 사용되지만, 당시 팔레스틴에서의 옥수수란 중요한 식물(植物)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단지 옥수수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취하던 모든 양식이 앞으로는 결코 이방의 손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약속하고 계신 셈이다. 그러나 이 약속 후에도 이방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의 양식을 탈취한 바 있다. 그렇다면 본 약속은 종말론적 성격을 띤 약속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주의 재림 이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때 그 백성은 결코 사단의 위험이나 공격으로 인해 탈취당하지 않을 것이다.
=====62:9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수고한 것을 즐기게 된다는 말씀인데, 이 같은 결과는 안전의 상태가 조성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신의 수고한 것을 먹는다는 것만큼 안정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강력히 암시하는 표현도 드물다(Barnes).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규례를 따라 성전에서 먹고 마시곤 하였는데(레 6:16; 신 12:17,18; 14:23). 그때 그들이 보여 준 가장 큰 특징은 기쁨이었다. 그들로 기쁨을 느끼게 한 것은 그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자각이었다. 본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모든 축복의 결과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고 기쁨으로 낙을 누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62:10
본절은 본서 저자인 이사야(1절)와 파수꾼들로 호칭된 종교 지도자들(7절)의 중뵈도, 그리고 계속 이어진 하나님의 엄숙한 약속(8,9절)이라는 문맥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선지자 이사야와 종교 지도자들이 중보기도한 내용은 1차적으로 다름 아닌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이었다. 이제 그 귀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될 것인데 그 성취를 묘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본절이다.
기를 들라 - 이것은 한 군대가 행진을 재개할 때를 연상케 한다. 행진 중 어느 곳에 쉬다가 충분한 휴식 후 행진을 재개할 경우 깃발은 높이 쳐들어서 행렬을 재정비하라는 신호를 내곤 한다. 그와 유사하게 오랜 포로 생활로 이곳 저곳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은 정한 지도자를 앞세우고 전열을 정비하듯 한데 모여 본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62:11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 여기 '구원'은 1차적으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뜻한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그리고 보다 먼 조망에서 볼 때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력한 역본들은 본 '구원'을 '구세주'로 번역하고 있다(70인역, 벌게이트역).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 여기 '그'란 바로 메시야를 가리키며 '상급이 그에게 있고'란 구원이 그 손안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메시야께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암시한다.
=====62:12
4절에 이어 다시 한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 반복 강조되고 있다. 그 같은 결과는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 '여호와의 구속 하신 자'란 '대속적 피에 의해 그 죄를 씻음 받고 죽음에서 해방된 자'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이름만큼 아름다운 이름은 없다.
60-62장에는 계속해서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이스라엘의 영광이 취급되고 있다. 그
런데 6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한 개괄적인 선포가 이루어졌고, 61장에는 그
영광의 기초가 될 메시야의 사역이 부각되었다. 반면에 62장은 미래의 영광의 성취 과
정에 부과된 인간 사역자들의 의무를 강조하면서 60, 61장을 종합하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과 영광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세에 대
해 언급하고 있는 본장은 저자의 기도와 성도의 의무를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본장은 저자의 기도와 성도의 의무를 기록하고 있
는 전반부(1-7절)와 하나님의 의지와 명령을 기록하고 있는 후반부(8-12절)로 구성되
어 있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1) 이스라엘의 새 미래를 위한 기도(1-5절), (2) 말씀 전파에
대한 성도의 사명(6, 7절), (3) 이스라엘의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8, 9
절), (4) 회개하는 자를 위해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10-12절)이라는 소주제의 연
결을 통해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전반부의 화자는 일차적으로는 이사야를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화자의 변화는 본장 전
체의 문학적 골격을 이루며, 내용 구분의 기준이 된다.
또한, 본장은 반복을 통한 주제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
은 본서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4, 5절에는 49장 이후 계속
해서 등장하는 죄로 인하여 남편과 분리된 여인의 재화합에 대한 갈망의 비유가 나온
다. 10, 11절에는 앞부분(40 : 3 ; 48 : 20 ; 49 : 22 ; 52 : 11 ; 57 : 14)에 나타났
던 유사 문구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10절에는 이중 명령어도 반복해서 등장
한다. 또한 12절에는 4절의 주제가 발전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처럼 저자는 많은 반
복법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위로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함유하고 있는 본장은 시온이 영광스러운 도성으로서 세계 위에
드러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죄로 인하여 포로로 고통받고 있을지라도
시온으로 귀환하여 성벽을 재건하고(느 4 : 21-23) 곡식을 추수하게(느 5 : 11-13) 된
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예
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교회를 건설하시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도와 이스라엘의 영광(62 : 1-7)
종의 사역으로 성취될 이스라엘의 미래적 영광을 기록한 바 있는 전장(61장)에 이
어 본 단락에서는 이스라엘의 찬란한 영광이라는 동일 주제가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저자는 미래의 영광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종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
로 인간 편에서 할일은 오직 기도하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여호와의 목적이 드러나는 전반부(1-5절)와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요청하는 후반부(6, 7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저자가 나타내려는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미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한다(1절) : 저자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임하도록 간구한다. 그런데 이 기도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전달
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고 있다(60 : 1-3). 이처럼 신자의 간구는 하나님의 말
씀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어야 한다. 야곱도 이미 주신 약속들을 근거하여 간절한 기도
를 올린 바 있다(창 32 : 9-12). 우리도 다가올 찬란한 시온의 영광을 위하여 인내와
깊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이사야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2) 이스라엘은 미래에 새로운 운명으로 변화된다(2, 4절) : 저자는 이스라엘이 새
이름을 받는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이름'이란 어떤 대상의 신분, 성격, 본질 등을 의
미한다. 따라서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존재의 변화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굴복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다시 혼인 관계를 회복한 '쁑라' 곧 '결
혼한 여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회복의 소망을 가지고 생활하도록 위로하고
있다.
(3) 새 이스라엘의 건설을 위해서 사역자들은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6, 7절) : 특
별히 저자는 파수꾼들에게 계속적으로 기도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당부는
주님이 재림 때까지 교회를 섬기게 될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마치 대적
으로부터 도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뜬 눈으로 밤을 세우는 파수꾼들처럼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은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살전
5 : 6, 17). 그럴 때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교회를 보존하시고 완성하신다.
2. 하나님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영광(62 : 8-12)
이스라엘의 찬란한 미래 건설에 있어서 성도 편에서 해야 할 일을 다룬 전 단락
(1-7절)에 이어지는 본 단락에서는 찬란한 미래 건설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 및 그 결
과가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저자는 결연한 의지를 강력히 피력함으로써 성취의 확실
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은 (1) 하나님의 정의의 회복(8, 9절), (2) 하나님의
재건 명령(10절), (3) 구원과 심판의 선언(11절), (4) 회복된 이스라엘의 호칭(12절)
등으로 구분된다. 이제 본문에 드러난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적을 근절하시는 하나님(8, 9절) : 하나님께서는 맹세의 형식을 사용하여 수
고한 자가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
로 빈번하게 대적의 공적을 받았고 양식을 수탈당하였다(1 : 7, 8). 왜냐하면 하나님
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양식
수탈이 다시는 없겠다는 선언은 곧 이방 대적의 침입이 더 이상 없겠다는 뜻이다. 그
러나 이러한 약속은 실제적으로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성취될 수 없다. 결국 저
자는 종말론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조망하면서 실망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게 위로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후일에 완성될 새 예루살렘에서는 대적의 세력이 완
전히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안식과 평화만이 도래한다(9 : 3).
(2) 이방인의 구원을 예비하신 하나님(10절) : 마지막 때에는 엄청난 수의 이방인
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할 것이다(롬 11 : 25). 특별히 저자는 이러한 일
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 길을 예비해야 한다고 두 번이다 중복해서 말한다.
그러나 구원 사역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
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돌아오도록 인도할 것이다. 저자는 이방인의 구원을 주도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빈틈없는 계획하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통하여 구원의 우주성
을 드러내주고 있다.
(3) 심판과 구원을 시행하시는 하나님(11절)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
시고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신다. 한시적으로 보면 정반대의 경우도 가능하지만 궁극
적으로 사단의 세력은 멸망하고, 언약 백성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 이러한 종말론
적 심판과 구원은 역사 현장에서 대표적으로 제시된다. 즉, 유대인들을 지나치게 압제
한 바벧론은 하나님의 보응으로 B.C. 539년 메대 바사에 의해 멸망되었고(13장 ; 단 5
: 30), 이스라엘 포로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
님의 교회는 구원을 얻으나 그 대적 원수 마귀는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됨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계 21 : 1-8).
(4) 성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12절) :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될 때 하나님
은 새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 '찾은 바된 자', '버리지
않은 성읍' 등으로 명명하신다. 이 이름들은 신약 성도들을 의미하는 호칭으로서 결국
'성도'의 거룩한 영광을 드러내준다. 여호와의 종 메시야를 통해 죄 씻음을 받고 거룩
해진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교재에 들어가게 된다(고전 1 : 2 ; 살후 2 :
13). 아울러 하니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대하 23 : 18)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열조와 맺은 언약을 지키시고 반드시 언약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택한 백성은 자만하지 말고 더욱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인간의 헌신과 기도를 통하여 역사를 진행시켜 나가시는 분이다. 이제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명심하고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동시에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완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