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들으라 - 이는 바로 앞장 뒷부분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영적 무지와 맹목성으로 말미암아 심판받았지만 이제 구원을 통하여 새 이스라엘을 재건하겠다는 약속을 함축하고 있다.
=====44:2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결정적 이유인 '선택'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예레미야, 바울 등도 자신들의 선지자됨 혹은 사도됨이 바로 이 선택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다(렘 1:5;갈 1:15).
=====44:3
상반절은 심판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내용의 일부로 메마른 당, 갈한자들에게 생수를 부으실 것을 언급한다. 또한 하반절은 성령을 붓고 축복을 내리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데, 이 둘은 유사적 평행구로 결국 성령 부어 주심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반절은 상반절의 비유적 표현의 실체라고 볼 수 있다.
=====44:4
솟아나기를 - 원래 이 표현은 물이 잘 공급되는 곳에서 쑥쑥 자라나는 나무나 풀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Barnes), 여기서는 성령 부음을 통하여 새 생명들이 영적으로 자라고 번성할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한편, 이는 많은 후손들이 번성할 것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케 한다(창 15장).
=====44:5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으로 자신을 일컬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주체는 생략되어 있다. 그 주체를 단순히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이라고만 볼 수도 있으나(J. Watts), 문맥이 새 생명으로의 소생, 성령 임재 등을 말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성령 부음을 통하여 영적 야곱의 후손에 합류될, 이방인까지도 포함하는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로 보는 것이 좋겠다(Westermann).
=====44:6
본절은 하나님이 전역사의 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인 것을 밝히고 있는데, 본절 후에 이어지는 내용을 고려할 때 오직 하나님만이 참신이라는 사실도 더불어 함축하고 있다:"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44:7
될 일과 장차 올 일 - 미래사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미래사를 알고 계시는 이유는 그가 역사의 주관자로서 역사의 진행 과정 전체를 계획하고 진전시키시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이 입증되고 있다.
=====44:8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관한 계시가 전달되었던 사실과 그 계시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던 사실을 회상시키는 말이다. 그 회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유일한 참신이심을 확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은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특권이었다:"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1, 2).
=====44:9
본절로 20절까지는 우상 숭배의 허망함을 열거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은 참신이심을 강조하는 앞 문맥(6-8절)의 의미를 한층 강화시킨다.
=====44:10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 - 이것은 우상을 만든 자에 대한 책망이기 이전에 우상 제작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임을 비꼬는 의미를 지닌다. 우상은 외형적으로는 인간이 섬기는 대상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그 조작물에게 인간의 생사 화복(生死禍福)을 맡긴다는 자체가 아이러니이다.
=====44:11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 곧 장인, 장색을 비롯하여 보석 세공인, 금속 세공인, 철공, 목공 등 우상 제조에 관여했던 모든 자들이 큰 수치와 두려움 가운데 심판당할 것을 나타낸다. 그들이 만든 신이 그들을 도울 수 없는 것은 그 신 자체가 연약한 인간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44:12
연약함에 매여 사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은 결코 초자연적인 힘을 낼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기 위하여 쇠로 만드는 우상의 제작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Whybray).
=====44:13
그 재질이 나무인 우상의 제작 공정이 묘사된다. 나무는 피조된 생물 가운데 가장 하층부에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자는 그런 것을 가지고 인간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신전에 안치하여 신으로 섬긴다. 새겨진 우상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그 피조물 중 하나님의 형사에 가장 가까운 형상인 인간 형상에 대한 숭배는 나름대로 가장 세련된 형태라 하겠다.
=====44:14
디르사나무(* , 티르자) - 이 용어는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온다. 아마도 이 용어는 '단단하다', '굳다' 등을 뜻하는 '타라즈'(* )에서 온 것 같다. 한편, 본절에서는 이 나무를 포함한 팔레스틴의 대표적 나무들을 인간이 마음대로 베거나 심고 자라게 한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 같은 운명의 나무로 만든 우상의 무가치성을 간접 강조하고 있다.
=====44:15
본절과 다음절은 인간에게 있어서 나무란 근본적으로 화목(火木), 곧 땔감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강조한다. 그런 나무로 인간은 자신의 생사 화복을 좌우할 것으로 믿는 우상을 만든다.
=====44:16
내가 불을 보았구나 - 불기운의 위력을 느꼈다는 말로서, 쉽게 풀면 '야, 불기운이 대단한데'이다.
=====44:17
나무가 땔감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의 행위로 증거했다. 그리고도 동일한 것으로 신을 만드는 아이러니컬한 모습이 그려진다.
=====44:18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자들이 동일한 재목을 가지고 이율 배반적인 두 가지 용도에 동시에 사용하는 아이러니를 범하는 것은 한마디로 그들의 죄악과 그로 말미암는 영적 무지 때문이라고 본절은 말한다.
=====44:19
아이러니에 대하여 숙고해보는 자가 없다는 것을 본절은 재차 강조한다.
=====44:20
재를 먹고 - 본 표현은 헛되고 무익한 것을 얻기 위하여 애쓰는 자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삼하 13:19;욥 30:19;겔 28:18 참조), 에브라임의 경우, '재' 대신 '바람'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호 12:1).
미혹한 마음에 미혹되어서(* , 레브 후탈 히타후) - 문자적인 뜻은 '미혹된 마음이 그를 오도하였다'이다. 이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는 근본적으로 그 마음이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한 때문임을 보여준다. 롬 1장은 이 부분의 주해라고 할 만큼 예리한 설명을 담고 있다.
나의 오른손에 거짓것이 있지 아니하냐 - 여기 '오른손'은 인간이 힘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48:13;왕상 2:19;욥 40:14;마 27:38 참조).
=====44:21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 로 티나쉐니) - 여기 '티나쉐니'(* )를 단순 능동형(칼형) 명령형으로 보고 '너는 나를 잊지 말라'로 번역하는 견해도 있으나, 문맥상 수동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 수동태인데도 이 같은 혼란을 준 것은 대개 단순 재귀형(니팔형)에서는 동작자가 '라멕'(* )을 통해 표시되기 마련인데, 본절에서는 '라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수동태인 본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개역 성경과 동일하다. 하나님께서는 열국이 섬기는 우상의 실상을 말한 후 본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위치를 재확인하심으로써 그들의 패역함을 끝내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을 보여주신다.
=====44:22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 구속이 회개 촉구에 선행하고 있다. 회개 촉구는 현재형으로, 구속 사실은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원문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강력히 변증한 후(1-5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영적 회생으로 연결시킨 반면), 여기서는 죄사함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로 보아 이스라엘의 영적 회생과 그들의 죄사함은 불가분적 관련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바벨론 포로라는 역사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죄사함, 영적 회생이라는 차원을 견지하며 53장까지 나아가고 있다 하겠다. 본서가 말하고 있는 구속은 고레스의 구원을 통하여 완전히 그리고 확연히 성취된다. 53장의 고난의 종과 그의 구속 사역이 본서 저자의 진정한 관심사요 본질적 내용이다.
=====44:23
본절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찬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찬양이란 구속을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의 감격의 표현이다. 따라서 참구속의 의미를 깨달은 자만이 바른 찬양을 할 수 있다.
=====44:24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 여기서는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속주가 될 뿐 아니라 본절 이하에 나오는 놀라운 사역을 능히 이루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적 권능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Fausset). '땅을 베풀었다'는 것은 땅을 평평하게 펼쳤다는 뜻이다. 이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번영하는 표현이다.
=====44:25
거짓말하는 자의 징조를 폐하며 - 여기 '거짓말하는 자'란 원문적으로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거짓 선지자를 비롯하여 점쟁이, 신접한 자등이 포함된다. 또한 '징조'는 '오토트'(* )로서 표적, 이적 등을 뜻한다. 당시 점쟁이나 신접한 자들은 그 배후에 있는 악령의 힘을 빌어 가시적인 이적들을 행하곤 했다.
=====44:26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 여기 '종'(* , 아보두)은 단수형이지만 일존의 집합적인 의미, 곧 복수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는 동의어격으로 나온 '사자'(* , 말르아카)가 복수형인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그의 참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케 하신 말씀을 이제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황폐한 곳 - 문자적인 뜻은 '쓸모없는 곳'이다. 바벨론의 침입을 받은 유다의 도시들은 부서지고 망가져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지 못할 것처럼 쓸모없는 곳이 되어버렸었다.
=====44:27
많은 학자들이 본절을 바벨론 정복을 위해 고레스가 유프라테스 강 지류들의 흐름을 바꿔 놓았던 사실에 대한 암시로 본다(Lowth, Grotius, Rosenmuller). 그리고 또 다른 학자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던 당시 홍해가 갈라졌던 사건에 대한 암시로 본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Gesenius). 이중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하나님의 전능성, 유일한 능력의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본 문맥과 합치한다.
=====44:28
나의 목자 - 이스라엘을 인도한 모세에게도 이 호칭이 붙여진 바 있다(시 77:20). 본절에서 이 호칭이 고레스에게 부여된 것은 그가 포로 귀환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았기 때문이다. 고레스에게 맡겨진 임무는 포로 귀환까지만일 뿐이며, 그 후의 온전한 구속은 앞으로 임할 종의 사역 곧 메시야의 사역에 의해 완수될 것이다.
40장 이후부터 본서는 꼬불꼬불한 수로를 연상케 할 정도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
로 자주 신속하게 변화하는 매우 짧은 단락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46장
끝 부분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구성 속에서 저자는 반복적으로 참신이신 하나님으로
인한 구원의 확실성을 선포하고 이에 대비되는 거짓 신 우상의 무기력함을 부각시킨
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용을 견지하면서도 저자는 전장(43장)에서 죄의 도말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처음으로 첨가하였고(43:25) 본장에서는 지금까지 익명으로 소개되었던
(41:2, 3, 25;43:14) 고레스(28절;45:1대하 36:22, 23;스 1:1, 2, 7, 8;3:7;4:3, 5;단
1:21;10:1)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고레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회복,
유다 성들의 중건,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26-28절) 등을 통해 예언의 말씀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구체화됨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1) 구원의 확실성을 고지(告知)
하는 전반부(1-5절), (2) 하나님만이 구원을 이룰 참신이심을 고백하는 중반부(6-20
절), (3) 죄의 도말 및 고레스의 출현을 예고하는 후반부(21-2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장은 다른 장과는 달리 예외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우상 숭배의 어
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역으로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6-20절). 또한 구원의 예표적 인물인 바사 왕 고레스에 대한
언급을 장 마지막 절에 놓아 클라이맥스로 삼음으로써(28절) 고레스의 사명에 예고로
시작되는 45장과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본장은 구조적으로 볼 때 전장에 나타난 첫 번째 여호와의 강화(speech,
43:22-28)에 이어지는 세 차례에 걸친 여호와의 강화로 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먼
저 1-5절에 나타난 여호와의 강화는 구원의 고지(告知)를 다루는데, 구조에 있어서 렘
28:15, 16;34:4, 5;겔 21:3-5;암 7:17;슥 3:8-10 등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
절들 중 본 단락과 같이 긍정적 구원 고지를 담고 있는 곳은 렘 34:4, 5과 슥 3:8-10
뿐이다. 뽀 다른 평행 구절은 51:21-23에서 발견된다. 본 구조는 청중을 직접 겨냥하
는 명령문을 포함하는데 하나님의 사역을 서술하는 동사와 함께 화자 하나님을 가리키
는 1인칭 주어가 돋보이게 나타난다. 다음으로 6-8절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강화는 사
자의 선포 형식으로 시작되고(6절 상반절) 여호와가 요구하시는 증인을 출두시켜 끝맺
고 있다(8절 하반절). 이 내용은 사실상 바벧론의 종교적 배경 속에 있는 이스라엘에
게 제1계명(출 20:3, 4)을 재확신케 하기 위한 일종의 도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스
라엘 민족은 이방 종교의 베경속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임을 증거하도록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1-23절에 나타나는 여호와 강화는 이스라엘에게 주는 권고
와 확신 그리고 피조물을 향한 찬양에로의 초대를 담고 있다. 이곳은 본서의 독특한
구조적 특징에 해당되기도 하는 두드러진 세 개의 명령문으로 구성되어 있다(기억하
라, 돌아오라, 노래할지어다). 특히 마지막 명령문은 그 성취에 있어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다.
또한 본장을 통하여 저자가 특히 강조하려는 점은 전체 내용의 반에 가까운 절들에
서 나타나고 있는 우상 숭배의 우매성에 대한 풍자를 통한 유일한 참신 하나님의 소개
이다. 40장 이후부터 짧막짧막하게 우상의 속성(40:18-20) 및 우상 제조(41:7)를 부정
적인 관점에서 묘사하던 저자가 이처럼 장황하게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신이심을 밝히
고 있는 것은 당시 포로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의 심적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
시 세계에 있어서 어떤 만족이나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의 무력
함을 뜻하였다. 그러므로 나라를 잃고 타국에 포로로 잡혀온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 백
성은 은연중에 하나님을 무력한 신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러한 대신(對神) 관념을 깨뜨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인 본서 저자는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풍자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
이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밝히고 있는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
어 핵심적인 내용을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고지(告知)(44:1-5)
저자는 신적 심판의 강한 확언을 담고 있는 전 단락(43:25-28)과 구원의 확실성을
알려주는 본 단락을 연속적으로 대조함으로써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한 기
대감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특히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호칭(2절) 및 용어(3, 4절)
를 사용하여 구원의 내용에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본 단락의 핵심 내용은 독
특하게 외관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실제적으로는 시간상의 순서에 따라 나열되고 있
다. 이와 같은 본 단락은 (1) 회복된 이스라엘의 축복에 대해 언급하는 전반부(1-4절)
와 (2) 이방에로의 확대에 대해 기술하는 후반부(5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이 강조하는 주도적인 사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죄인이지만 은혜의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2절):저자는 서로 상반된 뜻을 지니
고 있지만 동일하게 이스라엘에게 적용될 수 있는 두 호칭을 사용하여 그 의도한 바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먼저 사용된 '야곱'이라는 명칭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속이는 자'라는 뜻이다(창 27:36;32:28). 반면에 신명기에서 발견되는 '여수룬'(신
32:15;33:5, 26)이라는 말은 전자와 대비를 이루는 '정직한 자'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상반된 이름을 통하여 저자는 이스라엘이 '속이는 자'로서 죄의 대병사와 같은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수여자이며 대속적 목적을 담당할 존재임을 강력
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후손의 번성(3, 4절). 하나님께서는 범죄로 메말라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소개시키며, 마치 시냇가에서 자라나는 버드나무처럼 모든 나라들 중
에 가장 번성한 민족이 되도록 이끄실 것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훌륭한 직유법을 사
용하여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성경이 많은 후손을 흔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묘
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창 15:5;시 127:3-5). 그런데 특별히 저자
는 하나님의 '성령'(3절)의 강림을 기술함으로써 자손의 번성이 단지 이스라엘의 혈통
적 후손의 번성뿐만 아니라 이방까지 포함하는 영적 후손의 번성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영적 후손들이 고난의 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3) 이스라엘의 후손의 확장과 연계되는 이방인의 회심(5절):저자는 5절에서 경이
적으로 신학적 모티브의 변이를 시도한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사실은 이러한 진술
이 시간적 간격을 무시한 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저자는 이스라엘 자손의
확장 진술에 이어 아무런 해명없이 바로 이방인의 개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후손의 확장으로서의 이방인 개심자에 관한 모티브, 즉 '성령의 강
림'에 이어지는 이방인의 회심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이방의 복음화를 언급하는
신약과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욜 2:29).
2. 우상 숭배의 우매함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유일성(44:6-20)
전 단락의 구원 고지(告知)(1-5절)에 이어 본 단락에서는 참신 하나님이 주제로 다
뤄지고 있다. 특히 우상 숭배의 특성에 대해 예외적으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다각도
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전과는 조금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물론 저자의 의도
는 계속해서 우상 숭배의 무익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우상의 비신성(非神性)을 증명하
고, 그 결과를 통해 하나님의 유일성을 역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본 단락은 특히 9-20절 앞뒤 부분과 비교해 볼 때 운문체가 아니라 산문체로
분류된다. 사실 통상적으로 통렬한 풍자에서는 운문체보다 산문체가 주로 사용되고 있
다.이와같이 산문체를 사용하여 우상을 비판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본 단락은 (1) 하나
님만이 유일신임을 선포하는 전반부(6-8절)와 우상 숭배의 우매성을 신랄하게 풍자하
는 후반부(9-20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유일성(6-8절):하나님에 관한 다양한 호칭 중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의 왕'(43:15)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43:14)라는 호칭과 함께 '처음이요 마지막'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48:12;계 1:17;2:8;22:13). 특별히 예수님께도 적용된
'처음이요 마지막'이란 명칭은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어
울리는 말로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대변해준다. 과거에 하나님을 통한 구원을 경험했던
이스라엘은 미래에도 구원을 이룰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
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만방에 증거할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2) 저자가 우상 숭배에 관한 풍자에 과도하게 지면을 할애한 이유(9-20절):후대의
학자들은 9-20절에 대해 무리한 아이러니 기법을 사용하였고, 과도한 지면이 할애되었
으나 알맹이가 없는 부분이라는 이유로 정경성까지 의심하기도 한다. 사실 저자가 사
용한 우상 숭배에 대한 풍자는 우리가 보기에도 과도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 진정
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포로들의 하나님께 대한 심적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의 전쟁 포로는 자연적으로 신의 무익성과 패배를 인정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일반적
관습 때문에 이스라엘은 계속되는 구원의 고지(告知)에도 불구하고 흔들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저자는 좀더 강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유일적 신성을 선포하고 아
울러 우상의 우매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3. 죄의 도말 및 고레스 출현 예고(44:21-28)
전 단락에서 자신의 문학적 기법을 총동원하여 우상 숭배의 허구성을 풍자하고 유
일신 사상을 역설한(6-20절) 저자는 본 단락에서 선행된 진술을 기억하라고 촉구하면
서 함축적 의미가 담긴 '죄의 도말'을 거듭해서 언급하고(43:25) 이어서 40장 이후 등
장한 하나님의 대리자가 바로 이방 왕 '고레스'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처럼
40장 이후 예언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고 있는 본 단락은 (1) 죄의 도말을 선포하고
찬양하도록 요구하는 전반부(21-23절),(2) 찬송의 이유들을 구체적 생활 현장에서 찾
아내는 중반부(24-27절), (3)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고레스를 거명하는 후반부(2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의 주도적인 사상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죄의 도말 선포의 포괄적 의미:저자는 하나님과 우상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과거의 역사에 대한 회상을 통해 미래의 구원을 기대하도록 요청(21절)한 이후에 다시
금 '죄의 도말'을 반복해서 선포한다(43:25). 그런데 이 선포는 매우 급박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원래 속죄의 문제에 관한 한 (까) 범죄 행위 열거 (다) 대속물 제
시 (따) 대속물 신앙에 따른 회개 (마) 죄의 도말(속죄)이란 도식을 따라야 하기 때문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다)(따)을 생략한 채 곧바로 속죄를 선포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나타난 속죄의 선포 뒤에는 대속물 및 회개에 대한 기대와 요청이 함축적
으로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2) 40장 이후 예언에 대한 총정리:저자는 본장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24
절;40:12, 22, 26, 28;42:5)이며, 유일한 미래의 계시자(7, 8, 25, 26절 상반절;41:4,
26-29)이며 예루살렘과 유다를 위한 새 시대의 유일한 보증자(26절 하반절;40:2, 9)라
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새로운 출애굽의 수행자임을 암시하고 있다(27절,
렘 23:7, 8). 저자는 이와같이 한 단원(40-44장)에 나타난 내용을 요점적으로 정리하
면서 위로의 주체자로서 고레스를 구체적으로 거명한다. 이제 본서는 이스라엘을 해방
시켜 줄 고레스의 사역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하나님만이 죄로 가득 찬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유
일한 분임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40:2, 8;42:5;43:1, 7,
15;45:12;65:17;전 12:1)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6절;41:14;47:4;48:17;49:7,
26;54:5, 8;59:20;60:16;63:16). 그러므로 신자는 우상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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