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나의 택한 사람 - 이 두 용어는 동격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전자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이나 모세 혹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걸출한 활약을 보였던 인물들에게 자주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이 인물은 하나님의 신을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본문의 문맥상 이상적인 통치자 곧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11:2에서는 다윗 계통의 왕에게 동일한 신이 임할 것을 예언한 바 있다.
=====42:2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 '외치지 아니하며'와 마찬가지로 본 구절 역시 격렬한 분쟁 중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크고 분에 찬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절이 묘사하고 있는 왕은 칼과 창으로 신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던 고레스와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르다. 즉, 이분의 통치 방식은 세속적인 정복자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 여기 '갈대'는 늪이나 습기가 많은 지대에서 서식하는 연약한 줄기 따위를 의미하는데, '상한 갈대'란 바람 때문에 그 연약한 줄기가 상처를 입지만 꺾이거나 뽑히지는 않는 갈대를 말한다. 본문은 마치 상한 갈대와 같이 연약하고 결점투성이인 인생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은혜로써 강하게 세워주시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말한다.
=====42:4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 문자적인 뜻은 '섬들이 그의 법을 고대한다'인데, 이것은 1, 2절이 묘사한 분의 의로운 통치를, 열방을 포함한 온 세계가 바란다는 뜻이다.
=====42:5
호흡을 주시며...신(神)을 주시는 -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뜻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온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 인간을 취하여 중개자로 삼으신다는 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6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종의 사역에 대해 다룬다. 결국, 본절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 종의 사역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42:6
백성의 언약 - 종의 사역 중 하나가 소개된다. 그 내용은, 종의 사역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즉, 메시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회복,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의미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이 새 언약은 혈통적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 곧 영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이방의 빛 - 본 사역은 종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 곧 열방에 생명의 축복을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그를 찾아온 헬라인(이방인)과 나눈 대화 속에서 밝혀졌다:"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의 이러한 취지를 가장 활발하게 받든 인물은 바로 바울 사도였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리라"(갈 2:8).
=====42:7
소경의 눈...갇힌 자...흑암에 처한 자 - 종의 사역을 설명하는 본절에서 등장하는 이 용어들은 종의 사역의 내용을 깨닫게 한다. 얼핏보면, 이 용어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된 상태에 대한 암시로 생각된다. 특히 '갇힌 자', '흑암에 처한 자'는 바벨론에 포로된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생각될 수 있겠다. 그러나 '소경의 눈'은 포로 상태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 표현은 본서에서 영적 무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43장). 본문의 종의 사역도 영적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메시야의 놀라운 계시로 말미암아 흑암과도 같이 캄캄한 무지 상태로부터 찬란한 구원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눅 4:18).
=====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 '여호와'라는 칭호의 뜻은,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스스로 있는 자'로서(출 3:14),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주권자이심과 함께(창 21:33;시 90:2;139:7-12) 언약의 주체이심을 강조하는 이름이다(출 3:7-15 주제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스스로 나타내시는 까닭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42:9
전에 예언한 일...새 일 - 계속해서 과거사와 미래사가 제시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참신이심을 보이는 증거이다. 한편 '전에 예언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때까지 전달되어졌던 모든 예언을 가리키며, 그중에서도 특히 39:5-7의 예언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새 일'이란 1차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 시대의 위대한 영적 해방을 시사한다.
=====42:10
섬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임'(* )은 먼 곳, 땅 끝까지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나, 여기서는 전세계 민족을 가리키고 있다. 새 노래로...찬송하라 - 문맥상 여기 '새 노래'는 하나님의 놀라운 새로운 구원 역사에 감격하여 땅 끝까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이다. 이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감사, 찬양하는 것이다.
=====42:11
게달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 -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의 이름(창 25:13)이나, 후에 아라비아 사막을 '게달'이라 불렀다.
셀라의 거민들 - '셀라'(* )의 문자적인 뜻은 '바위'이며, 후에 '페트라'(Petra)로 알려진 에돔의 성읍을 가리키는 듯하다(Whybray).
=====42:12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 - 다시 온 세계를 가리키는 용어인 '섬들'이 등장하고 있다. 저자는 온 세계에 구원을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42:13
용사...전사 - 하나님께서 강력한 권능으로 그 대적을 쳐서 멸하실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2, 3절에 나타난 메시야의 한없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모습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원의 실체를 아는 자들은 이 두 모습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외견상 무력하기 짝이 없어 보였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강력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도리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이 되었다(고전 1:22-24).
=====42:14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 '숨이 차서'에 해당하는 '에숌'(* )은 원래 산고 중에 있는 여인이 내뿜는 거친 호흡을 뜻하지만, 문맥상 매우 강도가 높은 분노를 암시하는 말로 이해된다. 또한 '심히 헐떡일 것이라'의 히브리어 '에쉬아프'(* ) 역시 거친 호흡을 뜻하는데, 특히 급박하게 대적을 쫓을 때 내뿜는 분노의 콧김을 가리킨다. 이 두 용어는 문맥상 용사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앞절과 연결되어 있다. 오랫동안 그 백성의 고통을 지켜 보시던 하나님은 이제 일어서시어 활동하실 것인데 그 활동 내용은 후속절에 이어지고 있다.
=====42:15
본절의 '큰 산', '작은 산' 등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을 가리키며, '강들'은 그들의 활동을 가능케 하는 동인(動因)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42:16
바로 앞 구절들에서 그의 대적에 관해 말쓰마신 하나님은 이제 그 대상을 바꿔 당신의 백성에 관하여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 소경된 그들을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끄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이끄실 이 길은, 단순히 포로 귀환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이 길은 이스라엘이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새 길을 말한다. 특히 본장의 주된 문맥이 메시야의 구원에 관해 말하고 있음을 볼 때, 이 길은 이스라엘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방법의 구원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소경들의 참 목자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다.
=====42:17
본절은 구약 성경에서 자주 취급되는 우상 숭배자들의 불행한 종말을 다루고 있다(시 35:4;70:3;97:7;겔 16:52 등). 그러나 16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 본절의 핵심은 우상 신뢰자들의 불행한 종말보다는 이스라엘을 소경으로 만들어버린 요소로서의 우상, 헛된 신에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로 깨닫고 회개한 자들도 예전에는 그러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절 이하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소경, 귀머거리가 언급된다.
=====42:18
귀머거리들...소경들 - 16절에서 언급되었던 소경이 재언급되고 있고, 또 다른 부류인 귀머거리가 첨가되고 있다. 여기 '귀머거리'란 듣는 능력을 상실한 자를 뜻하지만, 문맥상 영적 분별력, 참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결여한 자를 뜻한다(20절).
=====42:19
소경이...내 종이 아니냐 -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수행해야 할 종이 영적 소경이었다.
사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 여기 '사자'는 '메슐람'(* )인데, '보내심을 받은 자'로 고쳐 읽는 자도 있으나 원문상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자'로 해석하는 편이 낫다. 본절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특별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택하신 대상인 이스라엘이 귀머거리요 소경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큰 아이러니이다.
=====42:20
많은 것 - 재앙이나 환난으로부터의 기적적인 구원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다양한 구원 행위들을 뜻한다.
귀는 밝을지라도 - 문자적인 뜻은 '귀는 열렸으나'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선조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가르침, 곧 율법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던 것을 가리킨다(Barnes). 그들은 목격하고 들었으나 그 보고 들은 내용들의 참의미는 깨닫지 못하였다.
=====42:21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 원문 직역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위하여'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엄과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므로 그 백성도 마땅히 의로워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편, 여기 '의'(* , 체데크)는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떤 학자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의를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수 없다(Murray). 이 같은 사랑과 의의 밀접성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죄인을 죄없다 할 수 없는 공의를 동시에 총족시키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42:22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의 계시를 받는 등 선민으로서의 온갖 특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존귀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 곧 약탈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비참한 모습을 자초한 이스라엘의 비극상이 제시된다.
=====42:23
이 일(* , 조트) - 이스라엘이 당한 비참한 포로의 현실 혹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계시를 가리킨다.
=====42:24
본절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심판당하고서도 심판당한 이유를 깨닫지 못한 사실을 반문하는 형식을 통하여 들춰내고 있다.
=====42:25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닫지 못하며 -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영적 소경됨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 소경됨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무지, 듣지 않으려는 완악함 그리고 당하고 있는 현실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그런 의미에서 소경이요 귀머거리였다. 이쯤되면 본장 앞부분에 언급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인 종의 주요한 사역의 의미를 읽을 수 있겠다(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 중 가장 주요한 것이 바로 백성의 영적 무지와 맹목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전장(41장)은 이스라엘을 바벧론 포로로부터 구원할 한 구원자에 대해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단락(41:25-29)은 이방신이 미래에 올 구원자에 대해 무
지함을 부각시킴으로써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강조한 바 있다. 이제 본장은 그 동일
인물(구원자)을 종으로 부르면서 전장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속성을 부각시
키고 있다. 즉 여호와의 종은 신적 권위의 소유자(1, 5절)로서 겸손과 사랑(2,3,7절)
을 통치 원리로 삼고 승리와 기쁨의 나라를 건설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본장에서 선지
자는 메시야를 통해 완성될 이상적인 공동체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여호와의 종의 품성과 사역을 서술한 전반부(1-9
절)와 종의 사역에 대해 이방이 보일 반응과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기록하고 있는
중반부(10-17절), 여호와의 출현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형편을 다룬 후반부(18-25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본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표협법은 신인동형론 및 신인동정론이다. 저자
는 하나님이 그 백성의 대적을 무찌르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는 모습을 출정하는 용사
에 비유하였고(13절)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하나님의 개입을 실감나게 서술하기 위하여
산고하는 산모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다(14절). 이러한 내용은 구원자를 고대하는 포로
중의 이스라엘을 위로하기에 매우 적절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다 완전하게 묘사하는 본장이 강조하는 점은 다음과 같다.
(1) 여호와의 종의 사역의 핵심:저자는 전장(41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자가 큰 용사
로 나타날 것을 서술한 바 있다(41:2,3,25). 반면에 본장에서는 동일 인물에 대해 힘
없고 초라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2절). 이처럼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자를 강한
용사이면서도 동시에 힘 없는 존재로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중성은 백성들의 죄
를 대신 처리해야 하는 메시야의 독특한 사역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므로 죄를 간과하실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심각한 범죄를 자행하
였다(24절).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징벌을 받는다는
사실이 결코 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25절). 이스라엘 백성
에게 있어서 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존재로서 죄의 징벌을 대신 받음으로써 인간의 완전한 구원을 성취한다.
(2) 여호와의 종의 사역의 범위:여호와의 종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하여 사
역하지 않고 온 인류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사실은 여호와의 종이 '이방의 빛'
으로 묘사된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6절). 저자는 본장에서 특별한 부연 설명 없이
이방의 구원을 인하여 찬양하라고 명령함으로써(10-13절) 종의 사역이 세계적으로 확
대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상과 같은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여호와의 종의 품성과 그 사역(42:1-9)
전장의 마지막 단락(41:25-29)과 본 단락 사이에는 현저한 대조가 나타나 있다.
즉, 전자는 구원의 문제에 관한 한 이방 우상의 무능함을 설명하고 있으며, 후자는 반
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방 우상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에 대해 전적
으로 무지한 반면 하나님은 그 구원자를 세우시는 자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본 단락은 여호와의 종의 품성을 다루는 전반부(1-4절)
와 종의 사역을 다루는 후반부(5-9절)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여호와의 종의 성품
(까)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할 만큼 신중하고 온유한 존재이다(마 8:4). 이 묘
사는 종이 구원 사역을 감당할 때 보일 태도에 대해 나타내는 말이다. 즉, 고통 당하
는 종의 자세를 소개하는 내용으로서 52:13-53:12에 더욱 선명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종은 대속의 고통을 당할 때 말과 행동을 나타내지 않을 만큼 큰 인내
를 소유한 자이다.
(다) 또한 그는 쪼개져서 반쯤 부러진 상태에 있는 갈대를 꺾지 않을 뿐 아니라 약
하게 타고 있어 마치 꺼질 듯한 등불도 끄지 않는 존재이다(3절). 여호와의 종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 곧 더 이상 소생할 소망이 없는 자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치료하는 자기 희생적인 존재이다(눅 22:56-62;23:43;요 4:5-42).
(따) 마지막으로 그는 사역을 성취하기까지 결코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는 존재이다
(4절). 이상과 같은 여호와의 종의 품성을 상고하여 볼 때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리
스도임을 알 수 있다.
(2) 여호와의 종의 사역
(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됨(6절):여호와의 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
상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언약(창 22:16-18;롬
11;28;15:8)을 성취하신다(마 26:28). 그러므로 이전에는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이방인들도 새로운 언약을 약속받고(눅 22:20;고전 11:25)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다.
(다) 갇힌 자를 해방시킴(7절):여호와의 종은 참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자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요 8:34;롬 6:6,16,17;요 1:4;8:12;롬
6:23;8:10). 이러한 사역은 일차적으로 고레스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리고 미래에 도
래할 메시야에 의해 완성될 것이다.
2. 종의 사역에 대한 인류의 반응 및 포로 귀환(42:10-17)
여호와의 종의 품성과 그 사역을 기록한 전 단락(1-9절)에 이어 본 단락에서는 종
의 사역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인류가 보일 반응과 함께 종의 사역에 발단이 될 이스
라엘의 포로 귀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종의 사
역을 통해 전인류가 혜택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전반부(10-13절)와 종
의 사역의 효시가 될 포로 귀환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14-17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제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종의 사역은 우주적인 결과를 낳는다(10, 11절):선지자는 돌연히 항해자와 섬
들과 땅끝을 향해 찬양의 명령을 발한다(10절). 또한 찬양대의 구성원이 온 인류임을
분명히 제시한다(11절). 이러한 사실은 종의 구원 사역의 범위가 우주적임을 알려준
다. 아울러 온 인류가 함께 새 노래로 찬양드릴 것임을 암시한다. 과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부른 노래가 옛 노래라면 이제 여호와의 종의 사역의 결과로 구원받은 인
류가 부를 노래는 새 노래가 될 것이다(출 15:1-18). 그토록 무력하고 초라해 보이는
종이(2절) 새로운 출애굽을 실현시키라는 사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역설로서 종에 대
한 신비감을 더해준다.
(2) 종의 사역은 포로 귀환을 통해 예표적으로 제시된다:종의 사역은 구로하는 여
인이 고통속에서 인내하며 아이의 탄생을 고대하듯이 하나님께서 인내하며 진행시키신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으로 서막을 열게 된다. 비록 종이 본 귀환의 직접 관여하
시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통해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
이다. 또한 고레스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것처럼 메
시야는 믿는 자들을 죄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3. 종의 출현이 요청되는 이스라엘의 형편(42:18-25)
종의 사역이 인류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며 이스라엘 포로 귀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설명한 전 단락(10-17절)에 이어 본 단락에서는 종의 출현을 필요로하는 이스
라엘의 처지가 긴장감 넘치는 필치로 서술되고 있다. 사실 사건 기술의 논리상 순서로
는 본 단락이 종의 출현을 암시하는 본장 초두에 배열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먼
저 종의 출현을 선포하듯 기술하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종의 출현이 요청되는 현실
을 첨가하듯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하여 저자는 종의 출현 사실을 직접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종의 출현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
이다. 이러한 본 단락은 소경된 이스라엘을 슬퍼하는 전반부(18-20절)와 징벌로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묘사하는 후반부(21-25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본 단락의 핵심 내용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의 무책임함에 대해 애도(18-20절):저자는 우상을 신뢰하는 자들이란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소경처럼 살아가는 사실에 대해 슬퍼한다. 인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의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생활하는 행위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특별히 여기서 41:8, 9에 이어 이스라엘에게 '종'이란 호칭이 사용된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수행해야 할 어떤 임무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는 완전한 종인 반면에(1-7절) 이스라엘은 죄악으로 인하여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눈 멀고 귀먼 종이라고 할 수 잇다. 그러므로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악한 종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이다.
(2) 징벌을 당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21-25절):하나님께서는 임무 수행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고 각성케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본토에서 추방하시고 포로로 사로잡히게 만드셨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귀양살이를 통해서도 변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의 의미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햇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조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에게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여호와의 종을 보내셔야만 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영적 암흑 상태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는 종의 출현에 대한 강력한 요구라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바벧론에서 해방시켜 준 고레스가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신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메시야의 사역은 고레스의 귀환보다 더욱 큰 위로와 힘과 자유를 제공하게 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죄악과 불법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은 예수님이 없다면 일체의 구원의 소망이 단절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시야의 도래에 대해 감격하며 기쁨과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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