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섬들 민족들 - 전자는 '이임'(* )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를 가리키는데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블레셋, 페니키아 등이 그런 나라들이겠다. 그러나 '이임'이 후자 곧 '민족들'로 번역된 '레우밈'(* )과 나란히 사용할 경우, 이것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들을 포함한 세계 모든 민족들을 가리킬 수 있다.
서로 변론하자 - 문자적인 뜻은 '함께 재판하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논쟁하다', '조목조목 따져 보다'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논쟁을 통하여 가려볼 사실은 각 열방들이 각각의 신들을 신뢰하고 있는 이유 및 참신은 과연 누구냐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혹자는 이렇게 본 구절을 번역하고 있다 : '자함께 엄숙한 토론의 장으로 들어가 보자'(Lowth).
=====41:2
본정 상반절의 맛소라 원문 직역은 이와 같다 : '누가 동방에서 일으켰느냐. 그 의가 그 발 뒤를 따르리라.' 본절에는 두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전자는 완료형인 '일으켰느냐'로 번역된 '헤이르'(* )이고 후자는 '이르게 하였느뇨'로 번역된 '이크라에후'(* )로서 미래형이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40-66장을 제2이사야서로 보고 그 저작 시기는 포로기 말엽 혹은 포로 귀한 후로 추측하는데, 더욱이 '혜이르' 곧, 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그 당시 이미 활약 중이던 고레스를 지칭하는 것이라 단정한다. 그러나 또 다른 동사가 분명한 미래형이며 그 내용도 미래적임을 고려할 때, 이 완료형 동사는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하나님이 사용하기 위하여 세운 동방의 사람은, 고레스가 그 그림자인 미래에 임하실 메시야를 예언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41:3
안전히 지났나니 - 여기 '안전히'의 원문 직역은 '평화롭게'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으킨 인물이 정복 사역을 감당하되 그 사역은 피를 흘리게 하는 폭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하게 암시한다.
=====41:4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命定)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 문자 그대로는 '시초부터 시대들을 불러서 존재케 하신 분이 누구냐?'는 뜻인데 여기 역사적 의미의 시간을 의미하는 '도르'(* )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본 구절이 강조하는 바는 역사의 주제 곧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인 것이 분명하다. 앞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유일 독특성과 이스라엘의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음이 언급된 후에 비록 열국과의 변론 형식을 취하긴 하지만 동방에서 사람을 불러내어 세계를 정복케 하리라는 언급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본문에서 특히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이란 그 인물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41:5
섬들, 땅 끝, 곧 세계 만민을 놀라 떨게 할 대상이 생략되어 있지만 문맥상 동방에서 일으킬 한 인물이 바로 그 대상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1:6
담대하라 - 원문 직역은 '강하라'이다. 이것은 한 인물의 출현으로 온 세계가 떨면서도 내놓는 자구책의 일종인데, 그것은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41:7
본절은 두려워하는 역국이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도모하는 자구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우상 손질이며 그 묘사는 회화적이다. 즉, 본절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한 상황이 닥칠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서도 인간의 지혜, 능력을 대변하는 우상을 손질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분주함을 그림을 보여주듯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41:8
나의 종 야곱 아브라함의 자손 - 먼저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그의 도구로 택함받은 존재를, 두 번째는 족장사에서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선택된 존재를, 세 번째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상속자 곧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각각 함축하는 호칭들이다. 본 예언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역하다가 심판당하여 노예로 잡혀감으로 온 나라가 없어진 상황인데,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그의 뜻을 이루는 당신의 도구로 부르신다. 그렇다면 족장사를 통해서 택한 이스라엘의 선택은 아직도 유효하며,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속에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아브라함의 씨로서 하나님이 세우기로 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41:9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 이는 하나님이 땅 끝과 같이 먼 곳에까지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과 여전히 관계를 맺고 계심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유효성은 불변한다는 사실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
=====41:10
놀라지 말라(* , 알 티쉬타) - 여기 '티쉬타'(* )는 '보다', '주시하다'의 뜻인 '솨아'(* )에서 온 말로서 다급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눈을 크게 뜨고 그 대상을 주시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이 이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한 사실의 유효성은 아직 불변함 곧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1:11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 수치와 욕을 당한다는 것은 정복당하고 멸망한 개인이나 단체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한편 40장이 주는 바벨론으로부터의 유다를 구한다는 수동적 측면을 다룬다면, 본장은 여기 보듯이 역으로 적국들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구원의 적극적 측면을 다룬다. 물론 이 예언은 메시아의 초림에 따른 복음의 영적 승리와 재림에 따른 메시아의 종말론적 승리를 복합적으로 예언한 내용이라고 보아도 무난하겠다.
=====41:12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 이 표현은 그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될 정도로 말끔히 치워버린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36:37 참조). 대적의 멸망으로 입증될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41:13
나 내가 - 둘다 원어로는 1인칭 강조사인 '아니'(* )로서 다른 성경 특히 다른 선지서들에 비해 월등히 많이 본서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14-46, 48, 49, 52장 등에서 지배적으로 나오고 있다. 중재자를 가운데 두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심을 강조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 이 강조사는 본절에서 하나님이 힘을 주고 도우실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J. Watts).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 '지렁이'에 해당하는 '톨라아트'(* )는 부패한 물질에서 생겨나는 벌레(14:11;출 16:20) 혹은 식물을 파괴하는 해충(신28:39;욘4:7)등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흔히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41:15
신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같게 할 것이라 - 본서에서 산, 언덕은 정치적 권세를 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을 이스라엘이 부숴뜨린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스라엘의 대적임에 틀림없다. 한편 앞 문맥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노하던 자가 멸망한 것이라고만 말했는데, 본절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무가치한 이스라엘이 힘이 있는 세계 열강들을 무너뜨릴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복자로서의 이스라엘을 제시하고 있는데 본장 초두와 이 사실을 연결시킬 때, 동일하게 정복자로 묘사된 초두의 한 인물과 이스라엘은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특별한 의미가 파악되어진다.
=====41:16
그들을 까부른즉 - 문자 그대로 키질을 의미한다. 타작한 곡식을 바람이 부는 가운데 키질을 하면 알곡은 채 안에 남고 껍데기는 날아가버리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은 본 문맥에서 이스라엘을 통한 대적의 완전한 멸망,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 고대 사람들은 폭풍 혹은 회오리 바람이 사람을 휩쓸어 버린다고 믿었는데, 아마도 대적의 완전한 멸망을 생생하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익숙해 있던 믿음에 호소하는 것 같다.
=====41:17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 물은 생명을 보존케하는 중요한 수단인데, 그것이 없어서 구한다는 것은 생명 유지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는 의미이다. 40:3에서 나온 바있는 '광야'란 심판, 죽음의 땅을 의미했는데, 본 구절과 관련시켜 볼 때 그 광야는 징계 아래있는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을 찾을 수 없어 그것을 구하는 상태란, 하나님의 극심한 징계 아래에 있는 상태를 암시한다 하겠다.
=====41:18
자산 - 문자적인 뜻은 '메마른 고지(高地)'로, 토질이 척박하여 나무 한 그루 없는 벌거숭이 산들을 가리킨다(욥33:21;렘3:2;7:29등).
강 - '네하로트'(* )로서 문자적인 뜻은 '강들'이며 생수의 풍성함을 암시한다.
못 -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나 항상 생수가 비축되어 있는 오아시스 비슷한 곳이다. 이상 몇 단어들의 의미를 주해해 본 결과가, 본절은 생수공급이 불가능한 땅을 근원으로 만들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담고 있다.
=====41:19
본절에서 하나님은 식물의 생장(生長)이 불가능한 광야에 온갖 수목이 자라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 약속은 단순히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 정도만을 암시한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특히 광야에 생수를 공급하는 이미지는 그리스도를 연결시키지 않고는 그 온전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고전 10:1-5).
=====41:20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었으나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 을 위하여', 곧 목적을 의미하는 전치사 '레마안'(* )이 붙어 있다. 즉, 본절은 하나님께서 '가련하고 빈핍한 자'(17절)에게 초현실적 긍휼을 베푸시는 목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은 보고, 알고, 체험하여, 곧 깊이 숙고하고 그 뜻을 상고하여 오직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베푸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41:21
소송을 일으키라 - 문자적 뜻은 '너희 건을 내놓으라'인데, 이것은 너희 입장이 옳다는 것을 제시해보라는, 즉 시비를 따져 보자는 의미이다. 또한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는 그 문자적인 뜻이 '너희 강한 것들을 제시해 보라'로서 소송 사건에서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킬 논거(論據)를 펴보이라는 의미이다. 그 논거의 핵심은 참신의 증거이다. 바로 앞 문맥에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는 목적은 그 백성으로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열국의 신들을 헛되고 하나님만이 참신으로서 유일하게 영광과 찬송을 받을실 만한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41:22
장차 당할 일 이전 일 - 전자는 미래사를, 후자는 과거사를 각각 의미한다. 과거사와 미래사를 구별하여 양쪽 다 말해보라는 것은 한마디로 누가 역사의 주관인가에 의해서 참신의 여부를 가려보자는 의미이다. 진정한 역사의 주관자는 과거 역사가 어떤 경륜, 계획에 의해 일어났는가를 알고 또 미래의 역사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경륜의 의미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41:23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 원문 직역은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하라'이다. 우상이 추종자를 옹호하고 그 대적들을 좌절케 하기 위하여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만한 무언가를 행해보라는 뜻이다. 이 표현들은 이방 우상들이 무능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동일한 강조를 위하여 그들을 벙어리, 귀머거리, 움직이지 않는 것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시115편등).
=====41:24
이와같이 이사야가 우상들의 무력함을 만방에 공포하는 까닭은 우상 숭배자들의 어리석음과 가증함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정치 권력, 경제적인 부(富), 군사력, 과학 기술 등을 숭배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41:25
앞에서는 우상들과의 비교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사까지 결정하시는 참신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이제 본절로부터는 그러한 논증의 실례를 증거로서 제시한다.
내 이름을 부르는 자 -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를 고레스에 대한 지칭으로 보는 데에 동의한다(G. W. Grogan, Whybray). 한편 본문과 같은 호칭은 반드시 고레스가 개종자가 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무관하겠다.
=====41:26
누가 처음부터 알게 하였느뇨 - 본문은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 25절에서 언급된 인물의 출생, 성품 등에 관하여 예언한 자가 하나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이 같은 의미에 이르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를 출생에 따른 성품 등으로 해석한 결과이다(Barnes). 그러나 문맥적으로 볼 때 역사의 미래사나 과거사를 주관하는 존재가 하나님 외에 있었느냐는 질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1:27
기쁜 소식 전할 자 - 본절이 포로 귀환과 관련된 예언임을 고려할 때, 본문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재건 운동을 일으켰던 스룹바벧, 느헤미야, 에스라 등과 같은 인물에 적용될 수 있겠다(J. Watts).
=====41:28
본절은 이방세계의 선지자를 가장한 자들 가운데 미래사를 정확히 예언할 존재는 하나도 없음을 강조한다.
=====41:29
본절은 이방 선지자들이 미래지사를 예언할 수 없는 까닭을 말함으로써 1절에서 제시한 논쟁을 결론짓고 있는데, 그 까닭이란 그들이 미래지사를 알려주기는 커녕 그 존재 자체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이다.
포로 생활 중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주는 위로가 담겨 있는 본장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포괄적인 근거들을 거론하고 있는 전장(40장)에 비해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설명함으로써 분명한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이 동방에서
한 구원자를 일으키시고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을 진멸하실 것임을 선포함으로써 역사
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 하나님이 한 구원자를 세우심을 기술하는 전반부(1-16절)와 (2) 새로운 차원의 구
원을 암시하고 있는 후반부(17-29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본장은 법정의 형식이 나타난다. 먼저 1-4절은 '이방의 법정 소환->변론 과
정' 등의 구조를 지닌다. 이를 좀더 세분화하면 '법정 소환(1절)->질문(2절)->상대방
침묵(가상)->하나님의 대답(4절)' 등이다. 두 번째 변론에 해당되는 21-29절은 두 개
의 심리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그 결론(24,28,29절)은 동일하다. 첫번째 심리는 21-23
절로서 '피고(이방)를 향한 논리 제시 요구(21,22 상반절)->피고 침묵(가상)' 등이며
두 번째 심리는 25-28절로서 '원고(하나님)의 증거 제시->피고 침묵(가상)' 등이다.
이와같이 저자는 참과 거짓을 가리는 법정의 재판 과정을 사용하여 하나님만이 진전한
구원을 성취하실 수 있는 참신이심을 증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있다.
이외에도 본장은 이방이 숭배하는 우상이 헛되고 무가치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 제조 과정을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6,7절). 또
한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하여 짤막짤막한 명사문과 완료형 구문을 자주 사용하여 본
장의 의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8-13절).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본장은 특별히 한 가지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세우실 한 구원자(2,25절)의 사역을 통해 이방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할
결과는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먼저 출현할 구원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이방은
당황하여 우상 제조를 통해 그 대비책을 강구하지만 철저한 심판을 당하고 만다
(15,16,25절).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출현할 구원자에 대한 정체('동방에서 일
으킨 한 사람'의 정체(identity)에 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인식 부족으
로 이방과 동일하게 떨지만 결국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 구원이 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상반된 결과가 임하는 것은 어떤 인간적인 장.단점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의 주권적 선택에 근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
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신실하게 구원을 성취하시는 것이다(8,9절).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한 구원자를 세우시다(41:1-16)
현재 당하고 있는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불평하는 이
스라엘에게 자신의 속성을 증거로 들며 구원의 확신을 반복해서 강조하셨던 하나님은
(40:27-31) 본 단락에서 구체적인 구원의 방법을 소개함으로써 하나님 자신만을 의뢰
하도록 유도하신다. 특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국제적 사건들까지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고스레 왕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예언되고 있는 본문은 (1) 하나님이 세우신 한 구원자(1-5절), (2)
이방의 반응(6,7절), (3)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스라엘(8-13절), (4) 구원받을 이스
라엘의 사역(14-16절)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제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과 주도적인
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구원 방법(1-5절) : 하나님이 정하신 이스라엘 구원의 방법은 열방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을 본토로 귀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설
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방인을 법정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변론 과정으로 들어간
다. 먼저 동방의 한 사람이 누구에 의해 일으킴을 받았는지 물음으로써 변론을 시작하
신다. 그리고 그 한 사란에 대한 설명을 마칠 때까지 소환된 이방은 침묵으로 일관한
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당신이 동방의 한 사람을 일으킨 장본인임을 밝히심으로써 당
신이 한 구원자를 세우셨음을 증명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법정의 형식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확정적으로 제시하신다.
(2)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방의 반응(6,7절)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
해 한 사람을 일으키자 이방들이 보인 반응은 우상 제작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방인들
의 어리석은 위기 대처 방식에 대해 비판하고 아울러 거짓 신의 허무함을 폭로하고 있
다. 특히 우상 제작 과정을 극히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방인들이 그토록 신
뢰하는 우상이 실제로 인간적 산물임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3) 이스라엘의 구원의 근거(8-13절) : 하나님께서 동방의 한 사람을 일으킨 목적
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
이 이스라엘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할 이유는 전혀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복되는 경고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했으므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늬 종, 택한 야
곱,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이다. (까) '하나님의 종'이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
해 택함을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다) '택한 야곱'이란 족장사에서 최종적으로 하나
님 나라의 상속자로 낙점된 야곱의 특성을 강조하는 용어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
라의 상속자임을 암시한다. (따) '아브라함의 씨'란 약속의 후손이란 뜻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를 의미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조건과 무관하게 구원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
다.
(4) 이스라엘의 사명(14-16절) : 이스라엘은 단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 뿐만 아
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강력한 정복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책임이 주어진다. 저자는
동방에서 일으킴 받은 한 인물에 이어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 이스라엘도 역시 정복자
로 묘사함으로써 동방의 한 인물과 이스라엘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대임을 강력히
암시한다. 이러한 연관은 종말론적으로 메시야와 교회의 유기적 관계를 제시해 준다.
2. 새로운 차원의 구원(41:17-29)
하나님께서 한 구원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바벧론 포로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말
한 전 단락(1-16절)에 이어 본 단락에서는 미래에 새로운 차원의 구원이 펼쳐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특별히 저자는 그 구원이 참신이신 하나님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을 의
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40장 이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구조로
서, '바벧론 포로로부터의 구원--(여기에 근거한) 새로운 차원의 구원'이라는 내용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궁핍한 자의 간구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새로운 구원을 서술하는 본 단락은
(1) 생생한 비유적 표현을 통한 새 구원의 암시를 담고 있는 전반부(17-20절)와 (2)
하나님만이 구원을 성취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법정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묘사
하고 있는 후반부(21-29절)등으로 나누어진다. 이제 본 단락의 주도적인 내용을 구체
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차원의 구원 고지(告知)(17-20절) : 기도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 본 단락에서 새로운 차원의 구원은 전 단락과 연관성을 고려해 볼 때
바벧론 포로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된 이미지들을
분석해 보면, 바벧론 포로로부터의 구원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먼저 '사막에
풍성한 물이 흐른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자. '사막'은 바벧론에서 팔레스틴 땅으로의
이동로가 사막 지대라는 점을 생각할 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풍성한
강과 샘이 형성된다는 것은 바벧론 포로 귀환 그 이상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성경에서
사막은 죽음의 땅을 뜻하며, 그곳에 물이 흐른다는 것은 영적 생명이 시작됨을 의미한
다(41:17). 예수님께서도 영적 생명의 회복을 의미하는 대목에서 바로 이와 동일한 이
미지를 사용하셨다(요 5:1-9, 7:37, 38). 그러므로 기갈의 고통 호소에 대한 응답으로
묘사되고 있는 사막의 강이나 샘물의 이미지는 바벧론 포로 귀환뿐만 아니라 나아가
오실 메시야를 통한 새 생명의 시작이라는 차원과 일치한다. 오직 메시야이신 그리스
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영적 기갈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안
식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두 번째 법정적 이미지를 통하여 드러난 새로운 구원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21-29절):선지자는 다시 법정적 무대를 통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번에 무대
위에 올려진 주인공은 이방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상 그 자체이다. 사실 신이란 초인
간적 능력을 갖는 존재로서 인간의 숭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래에 관해 예
언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이시야는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변론을 전개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이방신)에게 신이라는 주장(23a절)
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신다(21, 22a절). 하나님의 이 요구에 대
해 이방신들은 답변이 불가능함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신의
주장에 대해 무효를 선언하신다. 그후 하나님은 행동(25절)과 말(27절)로서 당신만이
참신임을 증거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제시한 증거는 장차 이스라엘의 바벧론 포로
귀환을 도울 한 인물의 출현이다. 이 사람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바벧론 포로에서
해방시킬, 동방에서 출생한 고레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바벧론과의 군사적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누명에 대해 미래에
대한 예측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완전히 극복하고 있다.
이상의 본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우상들은 거짓 신으로서(45:20;대하 25:14;33:15;행 17:18) 공허하고 허무하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선택하신 메시야를 통해서 참된 구원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며 생활해야 한
다.
* 동방의 한 인물의 정체(identity). 본장은 하나님에 의해 동방에서 일어난 신비
의 인물 한 사람을 소개한다. 이 사람은 열왕들을 진압할 강한 용사로서 열방을 두려
움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많은 학자들은 본장에 나타난 이 사람에 대해 이스라엘을
바벧론 포로로부터 해방시킨 '고레스'라고 이해한다. 이 주장은 본장의 역사적 시점이
바벧론 포로 귀환을 앞둔 시대임을 고려할 때 상당히 타당헤 보인다. 그러나 본 인물
은 '고레스'에 국한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 인물은 40장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죄
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17-20절은 본 인물의 사역이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세계에 새 생명을 제공하는 일과 연관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에 나타난 신비의 인물을 고레스에게 국한시킴은 무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적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메시야 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약도 이러한 결론을 증명해 준다(요 1장). 신비의 인물에 대한 예언이 겨냥하는 최종 과녁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다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본장에서 바벧론 포로 귀환을 성취시킨 고레스의 사역으로 예표된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해방자 고레스를 통하여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적절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섬들 민족들 - 전자는 '이임'(* )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를 가리키는데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블레셋, 페니키아 등이 그런 나라들이겠다. 그러나 '이임'이 후자 곧 '민족들'로 번역된 '레우밈'(* )과 나란히 사용할 경우, 이것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들을 포함한 세계 모든 민족들을 가리킬 수 있다.
서로 변론하자 - 문자적인 뜻은 '함께 재판하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논쟁하다', '조목조목 따져 보다'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논쟁을 통하여 가려볼 사실은 각 열방들이 각각의 신들을 신뢰하고 있는 이유 및 참신은 과연 누구냐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혹자는 이렇게 본 구절을 번역하고 있다 : '자함께 엄숙한 토론의 장으로 들어가 보자'(Lowth).
=====41:2
본정 상반절의 맛소라 원문 직역은 이와 같다 : '누가 동방에서 일으켰느냐. 그 의가 그 발 뒤를 따르리라.' 본절에는 두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전자는 완료형인 '일으켰느냐'로 번역된 '헤이르'(* )이고 후자는 '이르게 하였느뇨'로 번역된 '이크라에후'(* )로서 미래형이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40-66장을 제2이사야서로 보고 그 저작 시기는 포로기 말엽 혹은 포로 귀한 후로 추측하는데, 더욱이 '혜이르' 곧, 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그 당시 이미 활약 중이던 고레스를 지칭하는 것이라 단정한다. 그러나 또 다른 동사가 분명한 미래형이며 그 내용도 미래적임을 고려할 때, 이 완료형 동사는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하나님이 사용하기 위하여 세운 동방의 사람은, 고레스가 그 그림자인 미래에 임하실 메시야를 예언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41:3
안전히 지났나니 - 여기 '안전히'의 원문 직역은 '평화롭게'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으킨 인물이 정복 사역을 감당하되 그 사역은 피를 흘리게 하는 폭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하게 암시한다.
=====41:4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命定)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 문자 그대로는 '시초부터 시대들을 불러서 존재케 하신 분이 누구냐?'는 뜻인데 여기 역사적 의미의 시간을 의미하는 '도르'(* )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본 구절이 강조하는 바는 역사의 주제 곧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인 것이 분명하다. 앞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유일 독특성과 이스라엘의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음이 언급된 후에 비록 열국과의 변론 형식을 취하긴 하지만 동방에서 사람을 불러내어 세계를 정복케 하리라는 언급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본문에서 특히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이란 그 인물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41:5
섬들, 땅 끝, 곧 세계 만민을 놀라 떨게 할 대상이 생략되어 있지만 문맥상 동방에서 일으킬 한 인물이 바로 그 대상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1:6
담대하라 - 원문 직역은 '강하라'이다. 이것은 한 인물의 출현으로 온 세계가 떨면서도 내놓는 자구책의 일종인데, 그것은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41:7
본절은 두려워하는 역국이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도모하는 자구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우상 손질이며 그 묘사는 회화적이다. 즉, 본절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한 상황이 닥칠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서도 인간의 지혜, 능력을 대변하는 우상을 손질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분주함을 그림을 보여주듯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41:8
나의 종 야곱 아브라함의 자손 - 먼저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그의 도구로 택함받은 존재를, 두 번째는 족장사에서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선택된 존재를, 세 번째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상속자 곧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각각 함축하는 호칭들이다. 본 예언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역하다가 심판당하여 노예로 잡혀감으로 온 나라가 없어진 상황인데,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그의 뜻을 이루는 당신의 도구로 부르신다. 그렇다면 족장사를 통해서 택한 이스라엘의 선택은 아직도 유효하며,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속에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아브라함의 씨로서 하나님이 세우기로 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41:9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 이는 하나님이 땅 끝과 같이 먼 곳에까지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과 여전히 관계를 맺고 계심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유효성은 불변한다는 사실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
=====41:10
놀라지 말라(* , 알 티쉬타) - 여기 '티쉬타'(* )는 '보다', '주시하다'의 뜻인 '솨아'(* )에서 온 말로서 다급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눈을 크게 뜨고 그 대상을 주시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이 이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한 사실의 유효성은 아직 불변함 곧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1:11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 수치와 욕을 당한다는 것은 정복당하고 멸망한 개인이나 단체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한편 40장이 주는 바벨론으로부터의 유다를 구한다는 수동적 측면을 다룬다면, 본장은 여기 보듯이 역으로 적국들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구원의 적극적 측면을 다룬다. 물론 이 예언은 메시아의 초림에 따른 복음의 영적 승리와 재림에 따른 메시아의 종말론적 승리를 복합적으로 예언한 내용이라고 보아도 무난하겠다.
=====41:12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 이 표현은 그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될 정도로 말끔히 치워버린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36:37 참조). 대적의 멸망으로 입증될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41:13
나 내가 - 둘다 원어로는 1인칭 강조사인 '아니'(* )로서 다른 성경 특히 다른 선지서들에 비해 월등히 많이 본서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14-46, 48, 49, 52장 등에서 지배적으로 나오고 있다. 중재자를 가운데 두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심을 강조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 이 강조사는 본절에서 하나님이 힘을 주고 도우실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J. Watts).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 '지렁이'에 해당하는 '톨라아트'(* )는 부패한 물질에서 생겨나는 벌레(14:11;출 16:20) 혹은 식물을 파괴하는 해충(신28:39;욘4:7)등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흔히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41:15
신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같게 할 것이라 - 본서에서 산, 언덕은 정치적 권세를 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을 이스라엘이 부숴뜨린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스라엘의 대적임에 틀림없다. 한편 앞 문맥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노하던 자가 멸망한 것이라고만 말했는데, 본절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무가치한 이스라엘이 힘이 있는 세계 열강들을 무너뜨릴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복자로서의 이스라엘을 제시하고 있는데 본장 초두와 이 사실을 연결시킬 때, 동일하게 정복자로 묘사된 초두의 한 인물과 이스라엘은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특별한 의미가 파악되어진다.
=====41:16
그들을 까부른즉 - 문자 그대로 키질을 의미한다. 타작한 곡식을 바람이 부는 가운데 키질을 하면 알곡은 채 안에 남고 껍데기는 날아가버리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은 본 문맥에서 이스라엘을 통한 대적의 완전한 멸망,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 고대 사람들은 폭풍 혹은 회오리 바람이 사람을 휩쓸어 버린다고 믿었는데, 아마도 대적의 완전한 멸망을 생생하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익숙해 있던 믿음에 호소하는 것 같다.
=====41:17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 물은 생명을 보존케하는 중요한 수단인데, 그것이 없어서 구한다는 것은 생명 유지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는 의미이다. 40:3에서 나온 바있는 '광야'란 심판, 죽음의 땅을 의미했는데, 본 구절과 관련시켜 볼 때 그 광야는 징계 아래있는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을 찾을 수 없어 그것을 구하는 상태란, 하나님의 극심한 징계 아래에 있는 상태를 암시한다 하겠다.
=====41:18
자산 - 문자적인 뜻은 '메마른 고지(高地)'로, 토질이 척박하여 나무 한 그루 없는 벌거숭이 산들을 가리킨다(욥33:21;렘3:2;7:29등).
강 - '네하로트'(* )로서 문자적인 뜻은 '강들'이며 생수의 풍성함을 암시한다.
못 -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나 항상 생수가 비축되어 있는 오아시스 비슷한 곳이다. 이상 몇 단어들의 의미를 주해해 본 결과가, 본절은 생수공급이 불가능한 땅을 근원으로 만들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담고 있다.
=====41:19
본절에서 하나님은 식물의 생장(生長)이 불가능한 광야에 온갖 수목이 자라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 약속은 단순히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 정도만을 암시한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특히 광야에 생수를 공급하는 이미지는 그리스도를 연결시키지 않고는 그 온전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고전 10:1-5).
=====41:20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었으나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 을 위하여', 곧 목적을 의미하는 전치사 '레마안'(* )이 붙어 있다. 즉, 본절은 하나님께서 '가련하고 빈핍한 자'(17절)에게 초현실적 긍휼을 베푸시는 목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은 보고, 알고, 체험하여, 곧 깊이 숙고하고 그 뜻을 상고하여 오직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베푸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41:21
소송을 일으키라 - 문자적 뜻은 '너희 건을 내놓으라'인데, 이것은 너희 입장이 옳다는 것을 제시해보라는, 즉 시비를 따져 보자는 의미이다. 또한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는 그 문자적인 뜻이 '너희 강한 것들을 제시해 보라'로서 소송 사건에서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킬 논거(論據)를 펴보이라는 의미이다. 그 논거의 핵심은 참신의 증거이다. 바로 앞 문맥에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는 목적은 그 백성으로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열국의 신들을 헛되고 하나님만이 참신으로서 유일하게 영광과 찬송을 받을실 만한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41:22
장차 당할 일 이전 일 - 전자는 미래사를, 후자는 과거사를 각각 의미한다. 과거사와 미래사를 구별하여 양쪽 다 말해보라는 것은 한마디로 누가 역사의 주관인가에 의해서 참신의 여부를 가려보자는 의미이다. 진정한 역사의 주관자는 과거 역사가 어떤 경륜, 계획에 의해 일어났는가를 알고 또 미래의 역사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경륜의 의미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41:23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 원문 직역은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하라'이다. 우상이 추종자를 옹호하고 그 대적들을 좌절케 하기 위하여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만한 무언가를 행해보라는 뜻이다. 이 표현들은 이방 우상들이 무능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동일한 강조를 위하여 그들을 벙어리, 귀머거리, 움직이지 않는 것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시115편등).
=====41:24
이와같이 이사야가 우상들의 무력함을 만방에 공포하는 까닭은 우상 숭배자들의 어리석음과 가증함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정치 권력, 경제적인 부(富), 군사력, 과학 기술 등을 숭배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41:25
앞에서는 우상들과의 비교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사까지 결정하시는 참신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이제 본절로부터는 그러한 논증의 실례를 증거로서 제시한다.
내 이름을 부르는 자 -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를 고레스에 대한 지칭으로 보는 데에 동의한다(G. W. Grogan, Whybray). 한편 본문과 같은 호칭은 반드시 고레스가 개종자가 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무관하겠다.
=====41:26
누가 처음부터 알게 하였느뇨 - 본문은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 25절에서 언급된 인물의 출생, 성품 등에 관하여 예언한 자가 하나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이 같은 의미에 이르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를 출생에 따른 성품 등으로 해석한 결과이다(Barnes). 그러나 문맥적으로 볼 때 역사의 미래사나 과거사를 주관하는 존재가 하나님 외에 있었느냐는 질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1:27
기쁜 소식 전할 자 - 본절이 포로 귀환과 관련된 예언임을 고려할 때, 본문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재건 운동을 일으켰던 스룹바벧, 느헤미야, 에스라 등과 같은 인물에 적용될 수 있겠다(J. Watts).
=====41:28
본절은 이방세계의 선지자를 가장한 자들 가운데 미래사를 정확히 예언할 존재는 하나도 없음을 강조한다.
=====41:29
본절은 이방 선지자들이 미래지사를 예언할 수 없는 까닭을 말함으로써 1절에서 제시한 논쟁을 결론짓고 있는데, 그 까닭이란 그들이 미래지사를 알려주기는 커녕 그 존재 자체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이다.
포로 생활 중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주는 위로가 담겨 있는 본장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포괄적인 근거들을 거론하고 있는 전장(40장)에 비해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설명함으로써 분명한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이 동방에서
한 구원자를 일으키시고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을 진멸하실 것임을 선포함으로써 역사
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 하나님이 한 구원자를 세우심을 기술하는 전반부(1-16절)와 (2) 새로운 차원의 구
원을 암시하고 있는 후반부(17-29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본장은 법정의 형식이 나타난다. 먼저 1-4절은 '이방의 법정 소환->변론 과
정' 등의 구조를 지닌다. 이를 좀더 세분화하면 '법정 소환(1절)->질문(2절)->상대방
침묵(가상)->하나님의 대답(4절)' 등이다. 두 번째 변론에 해당되는 21-29절은 두 개
의 심리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그 결론(24,28,29절)은 동일하다. 첫번째 심리는 21-23
절로서 '피고(이방)를 향한 논리 제시 요구(21,22 상반절)->피고 침묵(가상)' 등이며
두 번째 심리는 25-28절로서 '원고(하나님)의 증거 제시->피고 침묵(가상)' 등이다.
이와같이 저자는 참과 거짓을 가리는 법정의 재판 과정을 사용하여 하나님만이 진전한
구원을 성취하실 수 있는 참신이심을 증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있다.
이외에도 본장은 이방이 숭배하는 우상이 헛되고 무가치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 제조 과정을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6,7절). 또
한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하여 짤막짤막한 명사문과 완료형 구문을 자주 사용하여 본
장의 의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8-13절).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본장은 특별히 한 가지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세우실 한 구원자(2,25절)의 사역을 통해 이방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할
결과는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먼저 출현할 구원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이방은
당황하여 우상 제조를 통해 그 대비책을 강구하지만 철저한 심판을 당하고 만다
(15,16,25절).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출현할 구원자에 대한 정체('동방에서 일
으킨 한 사람'의 정체(identity)에 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인식 부족으
로 이방과 동일하게 떨지만 결국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 구원이 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상반된 결과가 임하는 것은 어떤 인간적인 장.단점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의 주권적 선택에 근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
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신실하게 구원을 성취하시는 것이다(8,9절).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한 구원자를 세우시다(41:1-16)
현재 당하고 있는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불평하는 이
스라엘에게 자신의 속성을 증거로 들며 구원의 확신을 반복해서 강조하셨던 하나님은
(40:27-31) 본 단락에서 구체적인 구원의 방법을 소개함으로써 하나님 자신만을 의뢰
하도록 유도하신다. 특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국제적 사건들까지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고스레 왕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예언되고 있는 본문은 (1) 하나님이 세우신 한 구원자(1-5절), (2)
이방의 반응(6,7절), (3)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스라엘(8-13절), (4) 구원받을 이스
라엘의 사역(14-16절)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제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과 주도적인
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구원 방법(1-5절) : 하나님이 정하신 이스라엘 구원의 방법은 열방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을 본토로 귀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설
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방인을 법정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변론 과정으로 들어간
다. 먼저 동방의 한 사람이 누구에 의해 일으킴을 받았는지 물음으로써 변론을 시작하
신다. 그리고 그 한 사란에 대한 설명을 마칠 때까지 소환된 이방은 침묵으로 일관한
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당신이 동방의 한 사람을 일으킨 장본인임을 밝히심으로써 당
신이 한 구원자를 세우셨음을 증명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법정의 형식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확정적으로 제시하신다.
(2)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방의 반응(6,7절)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
해 한 사람을 일으키자 이방들이 보인 반응은 우상 제작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방인들
의 어리석은 위기 대처 방식에 대해 비판하고 아울러 거짓 신의 허무함을 폭로하고 있
다. 특히 우상 제작 과정을 극히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방인들이 그토록 신
뢰하는 우상이 실제로 인간적 산물임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3) 이스라엘의 구원의 근거(8-13절) : 하나님께서 동방의 한 사람을 일으킨 목적
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
이 이스라엘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할 이유는 전혀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복되는 경고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했으므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늬 종, 택한 야
곱,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이다. (까) '하나님의 종'이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
해 택함을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다) '택한 야곱'이란 족장사에서 최종적으로 하나
님 나라의 상속자로 낙점된 야곱의 특성을 강조하는 용어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
라의 상속자임을 암시한다. (따) '아브라함의 씨'란 약속의 후손이란 뜻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를 의미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조건과 무관하게 구원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
다.
(4) 이스라엘의 사명(14-16절) : 이스라엘은 단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 뿐만 아
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강력한 정복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책임이 주어진다. 저자는
동방에서 일으킴 받은 한 인물에 이어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 이스라엘도 역시 정복자
로 묘사함으로써 동방의 한 인물과 이스라엘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대임을 강력히
암시한다. 이러한 연관은 종말론적으로 메시야와 교회의 유기적 관계를 제시해 준다.
2. 새로운 차원의 구원(41:17-29)
하나님께서 한 구원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바벧론 포로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말
한 전 단락(1-16절)에 이어 본 단락에서는 미래에 새로운 차원의 구원이 펼쳐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특별히 저자는 그 구원이 참신이신 하나님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을 의
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40장 이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구조로
서, '바벧론 포로로부터의 구원--(여기에 근거한) 새로운 차원의 구원'이라는 내용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궁핍한 자의 간구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새로운 구원을 서술하는 본 단락은
(1) 생생한 비유적 표현을 통한 새 구원의 암시를 담고 있는 전반부(17-20절)와 (2)
하나님만이 구원을 성취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법정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묘사
하고 있는 후반부(21-29절)등으로 나누어진다. 이제 본 단락의 주도적인 내용을 구체
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차원의 구원 고지(告知)(17-20절) : 기도에 대한 응답 형식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 본 단락에서 새로운 차원의 구원은 전 단락과 연관성을 고려해 볼 때
바벧론 포로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된 이미지들을
분석해 보면, 바벧론 포로로부터의 구원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먼저 '사막에
풍성한 물이 흐른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자. '사막'은 바벧론에서 팔레스틴 땅으로의
이동로가 사막 지대라는 점을 생각할 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풍성한
강과 샘이 형성된다는 것은 바벧론 포로 귀환 그 이상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성경에서
사막은 죽음의 땅을 뜻하며, 그곳에 물이 흐른다는 것은 영적 생명이 시작됨을 의미한
다(41:17). 예수님께서도 영적 생명의 회복을 의미하는 대목에서 바로 이와 동일한 이
미지를 사용하셨다(요 5:1-9, 7:37, 38). 그러므로 기갈의 고통 호소에 대한 응답으로
묘사되고 있는 사막의 강이나 샘물의 이미지는 바벧론 포로 귀환뿐만 아니라 나아가
오실 메시야를 통한 새 생명의 시작이라는 차원과 일치한다. 오직 메시야이신 그리스
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영적 기갈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안
식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두 번째 법정적 이미지를 통하여 드러난 새로운 구원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21-29절):선지자는 다시 법정적 무대를 통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번에 무대
위에 올려진 주인공은 이방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상 그 자체이다. 사실 신이란 초인
간적 능력을 갖는 존재로서 인간의 숭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래에 관해 예
언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이시야는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변론을 전개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이방신)에게 신이라는 주장(23a절)
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신다(21, 22a절). 하나님의 이 요구에 대
해 이방신들은 답변이 불가능함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신의
주장에 대해 무효를 선언하신다. 그후 하나님은 행동(25절)과 말(27절)로서 당신만이
참신임을 증거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제시한 증거는 장차 이스라엘의 바벧론 포로
귀환을 도울 한 인물의 출현이다. 이 사람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바벧론 포로에서
해방시킬, 동방에서 출생한 고레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바벧론과의 군사적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누명에 대해 미래에
대한 예측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완전히 극복하고 있다.
이상의 본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우상들은 거짓 신으로서(45:20;대하 25:14;33:15;행 17:18) 공허하고 허무하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선택하신 메시야를 통해서 참된 구원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며 생활해야 한
다.
* 동방의 한 인물의 정체(identity). 본장은 하나님에 의해 동방에서 일어난 신비
의 인물 한 사람을 소개한다. 이 사람은 열왕들을 진압할 강한 용사로서 열방을 두려
움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많은 학자들은 본장에 나타난 이 사람에 대해 이스라엘을
바벧론 포로로부터 해방시킨 '고레스'라고 이해한다. 이 주장은 본장의 역사적 시점이
바벧론 포로 귀환을 앞둔 시대임을 고려할 때 상당히 타당헤 보인다. 그러나 본 인물
은 '고레스'에 국한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 인물은 40장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죄
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17-20절은 본 인물의 사역이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세계에 새 생명을 제공하는 일과 연관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에 나타난 신비의 인물을 고레스에게 국한시킴은 무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적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메시야 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약도 이러한 결론을 증명해 준다(요 1장). 신비의 인물에 대한 예언이 겨냥하는 최종 과녁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다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본장에서 바벧론 포로 귀환을 성취시킨 고레스의 사역으로 예표된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해방자 고레스를 통하여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적절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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