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이사야 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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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그 때에 - 바벨론의 사절들이 히스가야 왕을 찾아온 것은, 왕의 병이 회복된 직후였다. 본장의 사건은 38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므로닥발라단이...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앗수르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두 번에 걸쳐 바벨론을 통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맨 처음에 그는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 반대하여 B.C. 721-710년까지 12년간 바벨론을 통치했다. B.C. 710년에 사르곤 2세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 뒤 재기하여 산헤립에 대항하여 다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다. 여기 언급된 사건은 이중 후자의 연대(B.C. 701년 직후)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병에서 회복한 왕에게 사절을 통해 선물과 축하의 서한을 보내는 것은 고대의 관례에 속한 일이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사절들을 파송하면서 외교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히스가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그 사실을 축하하기 위함이었지만(대하 32:31 참조). 진정한 속셈은 유다의 도움을 입어 앗수르에 대항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있었다.

=====39:2
히스가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며 - 히스가야의 기쁨은 사절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정중한 방식으로 그에게 존경을 표시한 바벨론 왕의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기도 하지만(Alexander), 더 크게는 유다와 같은 약소 국가가 감히 바벨론의 군사 동맹 상대로 인정받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이다(Leupold). 그에게 궁중 보물...다 보였으니 - 히스가야 왕이 바벨론의 사절들에게 궁중의 보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보여준 것은 이러한 자부심의 외적 표현이며, 유다의 국력을 널리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왕은 바벨론이 지리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왕은 자기를 드러내고 세상의 보물을 자랑하는 데 급급하였다. 역대하 기자는 이 장면을 '하나님이 히스가야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신' 것으로 본다(대하 32:31). 왕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취함으로써 이 시험에 실패하였으며, 결국 이로 인해 유다의 바벨론 포로가 예고되기에 이른다.

=====39:3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나아와 -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가야 왕에게 나아온 것은 바벨론 사절들이 떠난 직후였을 것이다. 이사야라는 이름 앞에 '선지자'라는 직함이 언급된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사람으로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묻되...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가야 왕에게 세 가지 물음을 던진다. (1)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나이까?' : 이에 대해 왕은 대답하지 않는다. 외국과의 동맹에 대한 선지자의 부정적인 입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왕으로서 이 문제를 가급적이면 회피하고 싶었을 것이다(Gesenius, Oswalt). (2)'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 이에 대해 히스가야는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까닭을 학자들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왕의 개인적인 명성과 정치적인 중요성이 먼 거리에 있는 바벨론에까지 퍼졌음을 은근히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Calvin). 둘째, 친선과 우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먼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환대한다는 것은 마땅한 도리라는 점을 내세워 자신의 잘못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다 (Vitringa). 셋째, 선지자의 의심과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Knobel). 둘째 의견이 가장 자연스럽게 보인다.

=====39:4
이사야가 가로되...하나도 없나이다 - 선지자의 세 번째 물음이 주어진다. 즉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 왕의 대답은 매우 솔직하다. 그러나 왕의 대답 속에 담긴 솔직함이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참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39:5
왕은...들으소서 - 엄숙하고도 권위있는 신적(神的)인 판결이 주어질 때, 전형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병행구인 왕하 20:16에는 '만군의'(* ,체바오트)라는 말이 빠져 있다.

=====39:6
보라 날이 이르리니...남을 것이 없으리라 -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형벌은 히스가야가 지은 죄-역대하의 기록에 따르면, 그것은 교만의 죄이다(대하 32:25)-에 상응해서 주어진다. 히스가야가 왕가의 모든 보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 사절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였듯이, 그와 그의 조상들이 축적한 바로 그 보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기우게 될 것이다(Jarchi, J. Watts, Leupold).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된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미래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옮겨지게 되니, 본서의 제 1부가 앗수르와 관계했던 방식으로, 이제 본서의 제 2부는 바벨론에 관계하게 될 것이다.

=====39:7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하셨나이다 - 바벨론으로 옮기우는 것은 히스가야의 보물만이 아니다. 장차 그에게서 날 자손 중 몇 명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서 왕궁의 환관(* ,사리심)이 될 것이다. 참조로 '사리스'(* )에는 '고자', '환관'이라는 뜻도 있다(창 37:36; 39:1; 왕하 8:6 등 참조,Targum,Gesenius, Lange). 본절 첫구절에 표현된 미래형을 통해서 히스가야가 아직 자손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Delitzsch, Alexander). 본 예언의 성취 여부에 대하여는 왕하 24:12-16;단 1:1-7을 보라.

=====39:8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당신의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긍적적인 의미로, 혹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이 말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히스가야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파멸 선고가 그 당대에는 임하지 아니하고 그 후손들에게 일어날 것을 생각하며 기뻐한다는 것이다(Gesenius, Hitzig, Oswalt). 그러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는 말은 그러한 이기심의 절정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파멸의 선고 중에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때를 늦쳐 주신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대하 32:26 참조). 이와 유사한 경우에 대하여는 왕하 22:18-20을 보라. 따라서 히스가야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많은 주석가들과 더불어 '좋소이다'라는 말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가 '타당하다'(just)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인식과 그리고 형벌의 때를 늦쳐준 것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크나큰 '자비로움'에 대한 감사가 복합적으로 함축된 개념으로 파악한다(Alexander, Calvin, Delitzsch, Leupold, J.Watts, Lange).



본장은 히스기야가 교만하여져서 바벧론의 사신에게 자신의 재물과 군사력을 모두
보여줌으로써 바벧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비극적 예언을 듣게 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전장(38장)의 내용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현격한 대조
를 이루고 있다. 전장(38장)이 히스기야 개인의 경건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본장은 히스기야의 치명적인 실수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한 개인에 대한
상반된 결과는 성경이 인간의 본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매우 정직하게 기술하고 있
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본장은 짧은 내용(8절)임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계속되는
내용들의 전체적인 전망을 제공해주고 있다. 즉, 본장은 이스라엘의 바벧론 포로 생활
을 예언하고 있는데(6, 7절), 이어지는 40장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이 바벧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장은 본서의 후
반부라고 할 수 있는 40-66장까지의 예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본장은 (1) 히스기야가 바벧론의 사신을 맞이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 2절), (2) 히스기야의 실수에 대한 이사야의 예
언을 묘사하고 있는 중반부(3-7절), (3) 이사야의 예언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을 짤
막하게 표현하고 있는 후반부(8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본장은 바벧론의 사신이 히스기야에게 오는 것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신이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사실을 알 때에 비로소 본장의 내
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선 바벧론의 사신들이 오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대하 32
: 31에 언급된 것처럼 해시계 사건(38 : 8)을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바벧론 사람들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까닭에 해시계 사건이 전해지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히스기야의 병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의 보호가 있는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어 앗수르와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러한 바벧론의 의중
을 파악하지 못하고 모든것을 적군에게 다 보여주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히스기
야의 실수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배역한 유다가 결정적으로 패망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본장에서는 유다가 망하고 바벧론이 흥왕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반면에
21 : 1-10에 의하면 바벧론이 멸망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 본문은 외
견상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예언의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본장이 시점을 좀더 넓혀서 유다의 포로 이후에 되어지는 사건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
이다. 결국 본장은 패망을 앞둔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40장부터 시작
되는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더욱더 의미 있고 실감나게 받아들여지기 위한 전주곡이
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본장의 내용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1.바벧론의 특사가 히스기야를 방문함(39 : 1-2)
이사야의 예언대로 히스기야의 병이 치유되는 사건을 그리고 있는 전 단락(38 :
21, 22)에 이어서 본 단락은 히스기야의 기적적인 치유 사건을 듣고 바벧론의 사신이
방문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히스기야의 치유사건이 유다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건 때
문에 바벧론에서 사신을 보낸 것은 이전에 앗수르의 신하 랍사게가 와서 이스라엘을
조롱했었던 모습(37장)과는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담고 있는 바벧
론의 사신이 히스기야에게 예물을 보내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부분(1절)과 이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2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경건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병 때문에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아 기적적인 체험을
할 때의 모습(38장)과는 달리 매우 교만하고 경거 망동하게 행동한다.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치유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벧론의 사자를 보고 의기 양양해져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
고 모든 군사력과 재물을 공개하게 되었다(2절). 이러한 히스기야의 신앙적인 자만은
성경의 유명한 인물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삼하
7장) 전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후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심각한 영적인 위기에
직면했고, 베드로도 역시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함으로써 신안정인 절망을 경험했
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인간의 경건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때 교만으로 나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겸손해야 함을 느끼게 된다.

2. 이사야와 히스기야의 대화(39 : 3-8)
히스기야의 교만에 찬 모습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본 단락은 이사야
의 집중적인 추궁과 이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히스기야의
모습은 전 다락(1, 2절)에서 바벧론 신하들에게 보였던 당당함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매
우 형편없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이사야가 히스기야의 과오에 대해 집중
적인 추궁을 하고 있는 전반부(3, 4절),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 (5-7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영적
인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3, 4절):본 단락에서느 히스
기야가 먼저 이사야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가 히스기야를 먼저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랍사게에게 조롱을 당하고 신하들을 이사야
에게 보냈던 모습(37 : 2), 그리고 치명적인 병에 걸려 하나님께 간절한 도움을 요청
하던 모습(38 : 2)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
을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자신의 환경이 개선되자 쉽게 하나님을 등져버리는 자기 중
심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자기 중심성은 사사기의 역사 가운데서
명백히 발견된다. 이스라엘은 '범죄->징계->회개->구원'의 악순환을 계속해서 반복하
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은 이미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되었고 구약의 역사가 실
패의 역사로 끝마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였다.
(2)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다(3, 4절) : 이사
야가 히스기야에게 찾아가서 추궁하고 있는 질문들은 그 상황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
문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3절의 '이에'라는 표현은 1, 2절의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
한 일의 심각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반응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인간은 스스로 죄악을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3)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다(5-7) : 히스기야의
무감각한 반응에 대하여 이사야는 단호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이러한 하나님
의 심판 선언을 통하여 히스기야는 잃어버리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회복하였
다.
3. 히스기야의 반응(39 : 8)
히스기야는 자신과 국가에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 겸손하게 인정했다. 이러한
태도는 다윗이 나단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을 지적받았을 때 겸손하게 회개하였던 사
실과 동일하다(시 51편).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징계와 가르침을 통해서 올바른 삶
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본장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의 완악함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아무리 하
나님의 커다란 은혜를 경험한 사람일지라도 쉽게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들을 자신의 힘으로 치부해 버리는 교만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며(40 : 31) 하
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시 1 : 1, 2) 성령 충만하게 생활해야 한다(엡 5:18). 그럴
때 성명을 연장받은 히스기야의 배역을 되풀이하지 않게 될 것이다.
* 인간의 중요성. 성경만큼 인간에 대하여 정직하고 진실한 책은 없다. 그만큼 성
경은 인간의 본성, 성향, 기질 등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
실은, 성경이 일관되게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분명해
진다. 그런데 구약은 사건적으로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신약은 서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묘사하면서 '허물과 죄
로 죽었던'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긍정적인 인간을 소개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형성된 새 사람인 것이다. 이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더 풍성히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더욱 감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사실 인간의 이중성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신분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나 실존적으로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 죄를 짓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는 자에게는 철저한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다만 자기 부정은 인간의 도덕적인 결단이나 결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령을 의지할 때에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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