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2
히스가야 왕이 듣고...보내매 - 본장은 그 내용상 앞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신들의 비통한 보고에 접한 히스가야 왕의 반응은 4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사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옷을 찢었다. 인느 극심한 슬픔과 분노를 표시하는 관습적인 행위이다(삼하 3:31;스 9:3;욥 1:20;렘 36:24). 둘째, 더 나아가 그는 '굵은 베' 곧 '삼베옷'(* ,사크)을 입었다. '삼베옷'은 재난 때에 입는 옷이며 참회의 때에 입는 옷이기도 하다(왕상 20:31,32; 21:27;느 9:1;단 9:3;욜 1:13;욘 3:6;마 11:21). 셋째, 그는 기도하러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이후, 그곳은 공적인 중보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는 장소로 인정되었다(왕상 8:29,33,34). 마지막으로, 그는 엘리아김과 셉나, 그리고 제사장 중 어른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냈다. 이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위로하심을 듣기 위한 것이다. 당시에 이미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해설, 전달하는 자로 높임 받고 있었으며 왕으로부터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22:14;렘 37:3을 참조하라. 그러나 왕상 22:9의 경우는 정반대되는 사례이다,Alexander). 재난의 때를 당하여 히스가야 와잉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성도가 이세상에서 원통한 일을 당할 때 본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신앙의 본으로 남아 있다.
=====37:3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 사신들이 전한 히스가야의 말을 통해서 그가 현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환난'(* ,차라)은 '누르다', '억압하다'는 뜻의 '차라르'(* )에서 파생되 말로서 외부적인 괴로움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복합적인 영적인 짓눌림까지도 함의하는 말이다(Vitringa). 이 단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참회의 시편에 나온다(시 20:1;50:15;77:2;86:7). '책벌'(* ,토케하)은 호 5:9의 '견책하는 날'과 동일하게 쓰였다. '환난'과 '책벌'은 앗수르를 통해 유다에게 주어진 것이긴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인 것이다. '능욕'(* ,네아차)은 '조롱하다', '멸시하다'는 뜻의 '나아츠'(* )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앗수르인들이 '훼방한다'(신성 모독)는 의미이다(4절, J. Watts).
=====37:4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본문은 '혹시', '아마도'(* ,울라)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듣지 못하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는 히스가야 자신의 겸허한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의 경건함은 그가 나라의 새존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받지 않으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주어지기만을 우선적으로 간구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Oswalt).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모독은 그들이 하나님을 이방 신들과 혼동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대하 32:19). 따라서 히스가야는 생명없고 무기력한 우상들과 대조, 구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적절하게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신 5:26;수 3:10;시 42:2;84:2;렘 5:2;10:10;23:36;단 6:26;마 16:16;26:63 참조 ,Alexander).
=====37:5
이와 같이...나아가매 - 본문은 히스가야 왕의 전갈이 끝나고 이사야 선지자의 답신이 곧 시작됨을 알려주는 구실을 한다.
=====37:6
앗수르 왕의 종들이...두려워 말라 - 이사야의 메세지는 '두려워 말라'는 강한 권고로부터 시작된다. 전에 아하스 왕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떨릴 때도 선지자는 이와 비슷한 권고를 해준 바 있다(7:4). 여기서 '(앗수르의) 종들'로 번역된 단어는 앞절의 '(히스가야) 신하들'과 같은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어린것들', '풋내기들'(* ,나아레)을 뜻하며, 경멸적인 어감을 나타내기 위해 선지자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말이다.
=====37:7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 앞으로 전개될 사태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니, 그는 앗수르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불려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부터 철수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신'(* ,루아흐)은 '악인들을 멀리 날려버리는 강한 바람'(Calvin)이나 '악인들을 파괴하는 천사'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좌우하는 경향성, 태도, 혹은 기질'(19:14;민 5:14;호 4:12;슥 13:2;딤후 1:7 참조)을 가리킨다(Alexander, Oswalt, Leupold).
그가 풍성(風聲)을 듣고 - 앗수르 군대의 퇴각은 그들이 듣게 될 '풍성' 곧 '소문'과 깊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에디오피아 왕 디르하가 앗수르를 치기 위해 나아온다는 소문을 가리킨다(9절 이하, Delitzsch, Lange).
=====37:9
랍사게가...돌아가다가...만나리라 - 랍사게가 돌아간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추측컨대,아마도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아무런 반응이나 응답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왕으로부터 후속 조처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 그리했을 것이다(Lange, Leupold).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라기스'는 르호보암 왕이 세운 15개 요새중의 하나로서(대하 11:5-10) 훗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침략해 왔을 때, 끝까지 맞서 싸운 '견고한 성읍'으로 유명한 곳이다(렘 34:7). '립나'는 레위인이 거하던 성읍으로 도피성 가운데 하나(수 21:13)인데, 라기스보다 북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나 이동하였는가도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산헤립으로서는 에디오피아 군대가 자신을 치러올 경우를 대비해서 립나를 먼저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군사 전략상 보다 좋은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구스 왕 디하르가'가 앗수르 군대를 치러 올라온다는 소식이 산헤립의 귀에 들린 것은 이때였다(Oswalt, Leupold).
사자들을 히스가야에게 보내며 - 산헤립이 랍사게에 이어 다시 사자들을 보낸 까닭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히스가야를 위협, 굴복시킴으로써 앞뒤로부터 적을 맞는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37:11
앗수르 왕들이...얻겠느냐 - 본절은 '보라'(* ,힌네)라는 말로 시작된다.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이 말 속에 앗수르인의 자랑과 오만이 함축되어 있다.
=====37:12,13
나의 열조가 멸하신...어디 있느냐 - 랍사게가 산헤립의 업적으로 돌려 말한 모든 일들(36:18-20)을 산헤립은 그의 선조들의 업적으로 돌려 말한다. 그는 히스가야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지명들을 골라 자신의말을 뒷받침하는 예증을 전개한다. '고산'은 티그리스 강의 왼쪽 지류인 하불 강 동쪽에 있는 '수산'(Zuzan)인데,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뒤 그 포로들이 이주한 곳이기도 하다(왕하 17:6). '하란'은 아브라함이 그의 부친과 더불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다가 머물러 살던 곳(창 11:31;행 7:2,4)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다. '레셉' 역시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성읍인데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있고, '들라살'은 갈그미스 너머 북쪽에 있으며, '에덴 자손'은 스바와 거래하던 상인들이다(겔 27:23). '하맛'과 '아르밧', 그리고 '스발와임'에 대하여는 10:9주석을 참조하라. '헤나'와 '이와'의 위치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37:14,15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기도하여 가로되 - 히스가야의 반응은 같은 지경에 처했던 아하스와 크게 대비된다. 아하스는 그를 도와주겠다는 하나님의 요청과 징조를 구하라는 권고마저 거부한 반면(7:11,12), 히스가야는 하나님께만 도움이 있음을 믿고 그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왕은 산헤립이 보내온 편지들을 읽은 뒤, 성전에 올라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펼쳐 놓았는데 이는 하나님이 모르는 그 무엇을 알려드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비통함과 충격을 당하여 하나님께 그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 위함이었다(Alexander, Oswalt).
=====37:16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 히스가야의 기도는 '만군의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룹 사이에 계신...'(원문)으로 시작된다. 그가 나님의 이름을 이처럼 길고도 장엄하게 부르는 까닭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이름이 앗수르인들의 입을 통해서 더럽혀졌기 때문이다(겔 36:20-32 참조).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전체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는 분, 곧 '만군의 여호와'임을 고백한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기시도 하다. 그럴진데, 왕의 통치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앗수르의 힘이 지상에서 강력하다 하나 그들 또한 만군의 여호와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신 언약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과 독특한 유대를 맺고 계심을 지시해준다.
=====37:17
여호와여...보시옵소서...들으시옵소서 - 눈은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우상들(43:8 참조)과 대조하여, 히스기야는 천지 만물을 감찰하시고 들으시는 '사시는 하나님'께 호소한다(Oswalt).
=====37:18,19
앗수르 왕들이 과연...불에 던졌사오나 - 히브리어 원문에는 서두에 '진실로', '과연'(* ,암남)이란 말이 나온다. 주변 열국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신(우상)들을 불에 던져 파멸시켰던 앗수르의 군사적 업적에 관해서 히스가야는 '과연'이란 말로써 시인한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는 산헤립이 모르고 있는 한 가지 사실, 즉 산헤립이 멸망시킨 다른 나라들과 이스라엘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차이전을 말한다. 이들은 참신이 아니라...멸망을 당하였나이다 - 우상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역시 사람의 손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37:20
이제 으리를 그의 송에서 구원하사...알게 하옵소서 - 히스가야의 기도는 본문에서 그 핵심에 이른다. 그는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그와 그의 나라를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할 때조차 그의 관심은 하나님과 그 영광에 향해 있다. 이 점에서 히스가야의 기도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37:21
이사야가 보내어 히스가야에게 이르되 - 이사야는 히스가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그에게 '보냈다'. 즉, 그의 제자들 중 한명(혹은 종)을 보내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37:22
처녀 딸 시온이...머리를 흔들었느니라 - 현재와 같이 위축된 상황(3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유다가 앗수르를 조롱하며 멸시할 날이 미구에 이를 것이라는 예언이 시적으로 주어진다. '머리를 흔드는 것'은 경멸하는 몸짓(시 22:7;44:14;109:25;렘 18:16;애 2:15;마 27:39)이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퇴각하는 날,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등을 향하여'(* ,아하레카) 머리를 흔들어 댈 것이다. '처녀'란 말은 예루살렘 성이 위협을 당했을지언정 아직 정복되지 아니하였음을 상징하는 말이다(Michaelis, Hitzig).
=====37:23
네가 훼방하며...누구에게냐 -예루살렘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은 그 오만과 방자함으로 인하여 단순한 군사적 의미를 넘어 감히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훼방하며 능욕하는 신성 모독의 차원에까지 미쳤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37:24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이를 것이며 - 이하에서 산헤립이 말한 되풀이로 이해되는 본절은 고대의 왕들이 남겨놓은 기념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어투와 매우 흡사하다. 산헤립이 교만하게 '감히 우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으며 우리가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지 못 갈 데가 없다'고 호언하는데, 그의 교만은 전적으로 '병거'(* ,레케브)로 대표되는 앗수르의 무력에 근거한 것이다.
=====37:25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밟아 말리리라 - 앞절에서처럼 본문은 과거형으로 시작해서 미래형으로 끝난다. 이는 지금까지 그의 원정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던 만큼 앞으로의 원정도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다(Alexander). 앞서 레바논의 우거진 삼림들이 앗수르 군대의 나아감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머나먼 원정길에서 피할수 없이 따라오는 목마름조차도 역시 문제가 못 될 것이다. 그는 물이 없는 곳에서는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다고 노래한다. 그의 허풍은 앗수르 군대의 수효가 엄청나기 때문에 그들이 단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애굽의 모든 강들이 다 말라버릴 것이라는 말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산헤립(B.C. 705-681)은 애굽 델타에까지 결코 원정하지 못하였다. 실제 애굽 공격은 그의 후계자 에살핫돈(B.C. 670년)과 앗술바니팔(B.C. 668년) 때에 이르러서야 수행되었던 것이다(Leupold).
=====37:26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겠느냐...되게 하였노라 - 앗수르 왕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1인칭으로 기술된다(26-29절). 하나님은 앗수르 왕이 내세운 공적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지도 않는다. 본문에서 그 초점은 '(네 말이 다 사실일진대) 땅에서 되어진 그 모든 일의 참된 주체가 과연 누구냐?'에 모아진다. 하나님은 앗수르가 거두었던 놀라운 군사적 성공도 당신께서 태초부터 이미 작정하셨던 신적인 계획 속에 포함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앗수르는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시켜 나가는 신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10:5).
=====37:27
그러므로 그 거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같았었느니라 - 앗수르 군대 앞에서 평평한 지붕 위에 돋아나서 햇볕이 들면 쉬어 시들어버리는 약한 풀이나 아직 영글지도 않아서 낫을 댈 필요조차 없는 곡식과도 같았다(시 129:6). 그들은 이 모든 현상이 자기들의 위압적인 힘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며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 중에 포함됨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37:28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이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앉고 일어섬'에 대하여는 시 139:2, '나가고 들어옴'에 대하여는 신 28:6;시 121:8 등을 보라(Alexander).
=====37:29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돌아가게 하리라 - '코에 갈고리를 꿰고 자갈을 먹이는 것'은 말 안 듣는 짐승을 다룰 때 사용하는 수법이다(욥 41:2;겔 19:4;29:4;38:4). 하나님은 분노와 교만으로 길길이 날뛰는 앗수르를 강제적으로 유다로부터 철수시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드신다는 말이다.
=====37:30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먹을 것이니이다 -오만한 정복자에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응징의 말쓰메 이어 선지자가 히스가야 왕에게 말한다. 발언의 핵심은 한 '징조'는 사건에 앞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어떤 기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이 일우어진 다음에 '하나님께서 진실로 역사하셨구나!'하는 것을 확인하게끔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출 3:12,18 참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쟁의 참상과흔적이 남아있는 금년과 제2년에는 정상적인 파종과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때까지 백성들은 땅에서 절로 자라나는 것만을 먹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제3년이 되면 백성들의 생활은 정상으로 회복되고 자신이 뿌린 씨에서 수확을 거두고 그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포위 상태로 인해 유다의 농업 경제의 기초가 다 훼파되었다 할지라도 그 상처가 아물어 흔적초차 볼 수 없는 날이 곧 이르리라는 것이다.
=====37:31,32
남는 자는...나을 것임이라...이를 이루시리이다 - 앞절의 농사 비유를 확대하여 선지자는 그것을 유다으가 예루살렘의 구원에 적용한다. 즉,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이 온전히 회복되듯이 포위된 성읍으로부터 '남은 자'가 나와 다시 번성하게 될 것이다. '남은 자'의 주체가 다시 등장한다(4:3;6:13;10:21,22;11:11,16 참조). '남은 자'와 동의어로 쓰이는 '피하는 자'(* ,펠레타)의 문자적인 뜻은 '피난', '구출'인데, 여기서는 '피신한 사람들'이라는 집합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Alexander, Calvin). '여호와의 열심'은 이 모든 일의 절대적 확실성을 보증하는 근거로서 덧붙여진다(9:7).
=====37:33,34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이 성에 이르지 못하니라 - 앞에서 대체적으로 말해졌던 앗수르 왕의 장래가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보다 명확하게 예언된다. 그 요지는 '그 왕이 이 성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본문에서 2번 반복되고 있다. '방패'(* ,마겐)는 화살과 창을 막을 뿐 아니라 성벽에 접근했을 때, 위에서 떨어지는 돌이나 역청을 막는데도 사용되었다. '흉벽'으로 번역된'솔렐라'(* )는 돌을 들어 던지는 전쟁 무기(Calvin)가 아니라 언덕 위에 있는 도성을 공략하거나 포위할 목적으로 쌓아 올린 작은 토성을 가리킨다(렘 32:24, Delitzsch, Oswalt).
=====37:35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구원하리라 -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받은 것은, 첫째로, 산헤립에 의해서 모욕되고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23절)을 보존하고 그 영광을 천하 만국에 증거(20절)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 종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한 것이다. 다윗 언약의 핵심은 '다윗의 나라와 그 위가 그의 자손들로 더불어 견고케 되며 영원히 보존된다'는 것이다(삼하 7:12,13,16). 이 약속은 후에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영적으로 참되고 온전하게 성취되었다(9:7;11:1;55:3;렘 30:9;겔 37:24;호 3:5 참조,Oswalt,Calvin).
=====37:36
여호와의사자가 나가서 - 선지자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의 대군을 잃고 비참한 모습으로 고국으로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을 보도한다. 이러한 패배는 그가 하나님과 더불어 대적하고 싸운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것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첫째로, 앗수르 군대의 몰살은 단 하룻밤 사이에 기적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기적적인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들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근거해서,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가 사용한 치명적인 살육의 도구는 쥐가 옮기는 페스트 전염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결정적인 단서는 없다. 설혹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전염병으로 인해 엄청난 숫자의 대군이 몰살당한것 역시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이 기적의 주체는 '여호와의 사자'였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유월절의 밤에 애굽의 장자들을 단번에 살육하였던 '죽은의 천사'를 연상시킨다(출 12:12).
=====37:37
떠나 돌아가서 - 직역하면 '(야영지를) 해체하고(* ,이사), 떠나서(* .옐레크) 돌아왔다(* ,야솨브)'이다. 연속적으로 배치된 이들 세 동사는 그들이 혼란 중에 서둘러 퇴각하였음을 보여준다.
=====37:38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그를 칼로 죽이고 - 산헤립의 최후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되었다(7절). 그는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암살은 그가 신전에서 '니스록'신에게 경배할 때에 일어났다. '니스록'(* )은 '결합자'라는 뜻인데 아마도 산헤립의 개인 수호신인 듯하다. 앗수르의 대표적인 신들 이름에는 '니스록'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가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의 개인 이름에는 '니스록'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가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이 그의 신에게 기도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이 아니라 아들들의 손에 의한 비참한 죽음이었다.
랍사게와 히스기야 신하들의 대화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전장(36장)에 이어서
본장은 랍사게의 조롱을 받은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직책이 이스라엘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
을 차지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달리 하나님
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선지
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기술하
고 있는 본장은 신하들의 보고에 대한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전
반부(1-7절), 앗수르의 이스라엘에 대한 조롱과 히스기야의 기도를 서술하고 있는 중
반부(8-20절), 이사야의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과 그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후반부
(21-3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26, 27장과 38, 39장의 역사적 순서가 바뀌었다는 이유 때문에 본장의 진정성
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순서에 따라 성경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의 순서에 따라 역사적인 사건
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단지 역사적 사건의 차서에 따라 성경의 내용에 의심을
품는 것은 성경에 대한 정당한 태도가 아니다. 특히, 36장과 본장이 바로 앞의 예언들
의 배경이 되는 데 비해서 39장은 바벧론의 발흥과 애굽에 대한 암시를 하고 있는 40
장의 배경이 되기에 순서가 변경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또한 본장 20절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저자가 논의를 진행시킴에 있어서 두 가지 표
현 방식을 채택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야기식의 형태(narrative)와 연
설체식의 형태(speech)이다. 저자는 이러한 형식을 빌어서 그 당시 상황을 묘사하면서
'듣다'라는 말을 '모티브'(motif)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이야기식|'듣다'의| 연 설 식 |'듣다'의|
| |사용회수| |사용회수|
+--------+--------+---------------------------------------------------+--------+
| 1, 2절| 1 |신하들이이사야에게 히스기야의말을 전하는모습(3,4절)| 2 |
+--------+--------+---------------------------------------------------+--------+
| 5, 6절| 1 | 여호와의 명령을 이사야가 대신 전하는 모습(7절) | 1 |
+--------+--------+---------------------------------------------------+--------+
| 8, 9절| 2 | 산헤립의 연설(10-13절) | 1 |
+--------+--------+---------------------------------------------------+--------+
|14, 15절| 0 | 히스기야의 기도(16-20절) | 2 |
+--------+--------+---------------------------------------------------+--------+
이러한 형식으로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본장의 내용을 몇 단
락으로 세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랍사게의 조롱에 대한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37 : 1-7)
랍사게의 조롱에 대하여 묵묵부답으로 듣고만 있었던 신하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
는 전 단락(36 : 13-22)에 이어서 본단락은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자리를 전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과 이사야 선지자의 반응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장(36장)에서는 랍
사게의 조롱에 형편없이 수치스러운 모욕을 당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데
반하여 본 단락부터는 이러한 조롱으로 인한 지적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어떻게 하나님
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히스기야의 신앙적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전반
부(1절), 신하들을 통하여 히스기야의 말을 이사야에게 전하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
중반부(2-4절), 이사야의 답변을 밝히는 후반부(5-7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회개는 즉각적이며 참되야 한다(1절) :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은 매우 위
급한 상황이었고 왕으로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히스
기야는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동이 얼마나 즉각적이었는가
는 짧은 한 절 안에 네가지의 동작이 연속해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
다. 즉,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등이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경건한 신
앙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히스기야의 회개는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심령 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회개였다(눅 18 : 13). 그러므로 하나님은 히스
기야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2) 어려운 환경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2-4절) : 위기 상황에 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본 단락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어려
운 시기에 히스기야의 신하들을 이사야에 보낸 의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사야에 대
해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2절)라고 수식어를 붙인다. 이러한 언급은 이사야의 직
책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 위해서라기보다는 선지자가 이스라엘 내
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위치에 있음을(신 18 : 15 ; 말 2 : 7) 부각시
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환난의 날에 오직 하나
님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2. 앗수르의 회유와 히스기야의 기도(37 : 8-20)
랍사게의 조롱에 대한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1-7절)
에 이어서 본 단락은 앗수르 왕의 집요한 회유와 그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을 중점적
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들은 전 단락보다 더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갈등 관계
가 증폭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양국의 긴장 관계가 현저하게 나타
나고 있는 본 단락은 여호와의 역사에 대하여 앗수르 왕이 비웃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
고 있는 전반부(8-13절)와 이에 대한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히스기야의 모습
이 드러나는 후반부(14-20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에 나타난 핵심적인 사상
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히스기야는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내놓고 기도했다(14-17절) : 지금 히스기야
는 이전의 랍사게의 조롱보다 더 집요한 앗수르 왕의 반복되는 협박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건한 왕인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기도했
다(14절). 왜냐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위협을 해결해주시
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간구할 때 역
사하신다.
(2) 히스기야의 기도는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구하는 기도이다(18-20절) : 히스기야
는 자신의 구체적인 소원에 대해 여호와께서 만국의 주이심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한
다(20절).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는 자신이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
의 통치를 구하는 태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제일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 : 9)라고 하셨
다. 또한 염려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시면서도 결론적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 : 33)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 세상을 다스리며 통치하시는 분임이 만방에 알려지기를 원하는
히스기야의 기도는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간구의 모범이라고 볼 수 있다.
3. 이사야의 예언과 그 성취(37 : 21-38)
앗수르 왕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 앞에 굴하지 않고 기도로써 난관을 헤쳐나가는 히
스기야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전 단락(8-20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이사야의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과 그 성취를 묘사하고 있다. 유다가 비록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는 등 범죄했을지라도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오만 방자한
산헤립을 물리치실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본 단락은 심판을
예언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21-35절)와 실제적으로 일어난 심판의 상황을 묘사
하고 있는 후반부(36-38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앗수르의 심판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21-29절) :
이사야는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면서 반문조의 형식을 빌어 앗수르를 책망하고 있다
(23절). 이러한 반문조의 형식은 강한 부정적 표현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표현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사야의 책망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저자는 23
절에서 '누구에게냐'라고 반복함으로써 앗수르의 조롱이 하나님에게 향해 있으므로 심
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대적하는 불신앙적인 세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철저히 멸하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게 수행된다(36-38절) :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묘사함에 있어서 저자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36절)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속에 개입하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였으므로 한치의 오차도 나지 않았다. 이러한 구약의 심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행해질 최후 심판의 모습을 예표적으로 보여준다(마 25 : 31-46). 하나님은 모든 죄악에 대해 반드시 공의로 판결하신다.
이상과 같은 본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도는 언제나
자신의 환경을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잇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둘째, 여호와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렘 33 : 3). 셋째,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마 6 : 9).
히스가야 왕이 듣고...보내매 - 본장은 그 내용상 앞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신들의 비통한 보고에 접한 히스가야 왕의 반응은 4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사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옷을 찢었다. 인느 극심한 슬픔과 분노를 표시하는 관습적인 행위이다(삼하 3:31;스 9:3;욥 1:20;렘 36:24). 둘째, 더 나아가 그는 '굵은 베' 곧 '삼베옷'(* ,사크)을 입었다. '삼베옷'은 재난 때에 입는 옷이며 참회의 때에 입는 옷이기도 하다(왕상 20:31,32; 21:27;느 9:1;단 9:3;욜 1:13;욘 3:6;마 11:21). 셋째, 그는 기도하러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이후, 그곳은 공적인 중보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는 장소로 인정되었다(왕상 8:29,33,34). 마지막으로, 그는 엘리아김과 셉나, 그리고 제사장 중 어른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냈다. 이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위로하심을 듣기 위한 것이다. 당시에 이미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해설, 전달하는 자로 높임 받고 있었으며 왕으로부터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22:14;렘 37:3을 참조하라. 그러나 왕상 22:9의 경우는 정반대되는 사례이다,Alexander). 재난의 때를 당하여 히스가야 와잉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성도가 이세상에서 원통한 일을 당할 때 본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신앙의 본으로 남아 있다.
=====37:3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 사신들이 전한 히스가야의 말을 통해서 그가 현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환난'(* ,차라)은 '누르다', '억압하다'는 뜻의 '차라르'(* )에서 파생되 말로서 외부적인 괴로움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복합적인 영적인 짓눌림까지도 함의하는 말이다(Vitringa). 이 단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참회의 시편에 나온다(시 20:1;50:15;77:2;86:7). '책벌'(* ,토케하)은 호 5:9의 '견책하는 날'과 동일하게 쓰였다. '환난'과 '책벌'은 앗수르를 통해 유다에게 주어진 것이긴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인 것이다. '능욕'(* ,네아차)은 '조롱하다', '멸시하다'는 뜻의 '나아츠'(* )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앗수르인들이 '훼방한다'(신성 모독)는 의미이다(4절, J. Watts).
=====37:4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본문은 '혹시', '아마도'(* ,울라)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듣지 못하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는 히스가야 자신의 겸허한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의 경건함은 그가 나라의 새존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받지 않으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주어지기만을 우선적으로 간구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Oswalt).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모독은 그들이 하나님을 이방 신들과 혼동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대하 32:19). 따라서 히스가야는 생명없고 무기력한 우상들과 대조, 구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적절하게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신 5:26;수 3:10;시 42:2;84:2;렘 5:2;10:10;23:36;단 6:26;마 16:16;26:63 참조 ,Alexander).
=====37:5
이와 같이...나아가매 - 본문은 히스가야 왕의 전갈이 끝나고 이사야 선지자의 답신이 곧 시작됨을 알려주는 구실을 한다.
=====37:6
앗수르 왕의 종들이...두려워 말라 - 이사야의 메세지는 '두려워 말라'는 강한 권고로부터 시작된다. 전에 아하스 왕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떨릴 때도 선지자는 이와 비슷한 권고를 해준 바 있다(7:4). 여기서 '(앗수르의) 종들'로 번역된 단어는 앞절의 '(히스가야) 신하들'과 같은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어린것들', '풋내기들'(* ,나아레)을 뜻하며, 경멸적인 어감을 나타내기 위해 선지자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말이다.
=====37:7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 앞으로 전개될 사태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니, 그는 앗수르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불려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부터 철수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신'(* ,루아흐)은 '악인들을 멀리 날려버리는 강한 바람'(Calvin)이나 '악인들을 파괴하는 천사'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좌우하는 경향성, 태도, 혹은 기질'(19:14;민 5:14;호 4:12;슥 13:2;딤후 1:7 참조)을 가리킨다(Alexander, Oswalt, Leupold).
그가 풍성(風聲)을 듣고 - 앗수르 군대의 퇴각은 그들이 듣게 될 '풍성' 곧 '소문'과 깊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에디오피아 왕 디르하가 앗수르를 치기 위해 나아온다는 소문을 가리킨다(9절 이하, Delitzsch, Lange).
=====37:9
랍사게가...돌아가다가...만나리라 - 랍사게가 돌아간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추측컨대,아마도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아무런 반응이나 응답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왕으로부터 후속 조처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 그리했을 것이다(Lange, Leupold).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라기스'는 르호보암 왕이 세운 15개 요새중의 하나로서(대하 11:5-10) 훗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침략해 왔을 때, 끝까지 맞서 싸운 '견고한 성읍'으로 유명한 곳이다(렘 34:7). '립나'는 레위인이 거하던 성읍으로 도피성 가운데 하나(수 21:13)인데, 라기스보다 북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나 이동하였는가도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산헤립으로서는 에디오피아 군대가 자신을 치러올 경우를 대비해서 립나를 먼저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군사 전략상 보다 좋은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구스 왕 디하르가'가 앗수르 군대를 치러 올라온다는 소식이 산헤립의 귀에 들린 것은 이때였다(Oswalt, Leupold).
사자들을 히스가야에게 보내며 - 산헤립이 랍사게에 이어 다시 사자들을 보낸 까닭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히스가야를 위협, 굴복시킴으로써 앞뒤로부터 적을 맞는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37:11
앗수르 왕들이...얻겠느냐 - 본절은 '보라'(* ,힌네)라는 말로 시작된다.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이 말 속에 앗수르인의 자랑과 오만이 함축되어 있다.
=====37:12,13
나의 열조가 멸하신...어디 있느냐 - 랍사게가 산헤립의 업적으로 돌려 말한 모든 일들(36:18-20)을 산헤립은 그의 선조들의 업적으로 돌려 말한다. 그는 히스가야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지명들을 골라 자신의말을 뒷받침하는 예증을 전개한다. '고산'은 티그리스 강의 왼쪽 지류인 하불 강 동쪽에 있는 '수산'(Zuzan)인데,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뒤 그 포로들이 이주한 곳이기도 하다(왕하 17:6). '하란'은 아브라함이 그의 부친과 더불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다가 머물러 살던 곳(창 11:31;행 7:2,4)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다. '레셉' 역시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성읍인데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있고, '들라살'은 갈그미스 너머 북쪽에 있으며, '에덴 자손'은 스바와 거래하던 상인들이다(겔 27:23). '하맛'과 '아르밧', 그리고 '스발와임'에 대하여는 10:9주석을 참조하라. '헤나'와 '이와'의 위치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37:14,15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기도하여 가로되 - 히스가야의 반응은 같은 지경에 처했던 아하스와 크게 대비된다. 아하스는 그를 도와주겠다는 하나님의 요청과 징조를 구하라는 권고마저 거부한 반면(7:11,12), 히스가야는 하나님께만 도움이 있음을 믿고 그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왕은 산헤립이 보내온 편지들을 읽은 뒤, 성전에 올라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펼쳐 놓았는데 이는 하나님이 모르는 그 무엇을 알려드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비통함과 충격을 당하여 하나님께 그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 위함이었다(Alexander, Oswalt).
=====37:16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 히스가야의 기도는 '만군의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룹 사이에 계신...'(원문)으로 시작된다. 그가 나님의 이름을 이처럼 길고도 장엄하게 부르는 까닭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이름이 앗수르인들의 입을 통해서 더럽혀졌기 때문이다(겔 36:20-32 참조).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전체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는 분, 곧 '만군의 여호와'임을 고백한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기시도 하다. 그럴진데, 왕의 통치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앗수르의 힘이 지상에서 강력하다 하나 그들 또한 만군의 여호와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신 언약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과 독특한 유대를 맺고 계심을 지시해준다.
=====37:17
여호와여...보시옵소서...들으시옵소서 - 눈은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우상들(43:8 참조)과 대조하여, 히스기야는 천지 만물을 감찰하시고 들으시는 '사시는 하나님'께 호소한다(Oswalt).
=====37:18,19
앗수르 왕들이 과연...불에 던졌사오나 - 히브리어 원문에는 서두에 '진실로', '과연'(* ,암남)이란 말이 나온다. 주변 열국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신(우상)들을 불에 던져 파멸시켰던 앗수르의 군사적 업적에 관해서 히스가야는 '과연'이란 말로써 시인한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는 산헤립이 모르고 있는 한 가지 사실, 즉 산헤립이 멸망시킨 다른 나라들과 이스라엘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차이전을 말한다. 이들은 참신이 아니라...멸망을 당하였나이다 - 우상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역시 사람의 손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37:20
이제 으리를 그의 송에서 구원하사...알게 하옵소서 - 히스가야의 기도는 본문에서 그 핵심에 이른다. 그는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그와 그의 나라를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할 때조차 그의 관심은 하나님과 그 영광에 향해 있다. 이 점에서 히스가야의 기도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37:21
이사야가 보내어 히스가야에게 이르되 - 이사야는 히스가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그에게 '보냈다'. 즉, 그의 제자들 중 한명(혹은 종)을 보내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37:22
처녀 딸 시온이...머리를 흔들었느니라 - 현재와 같이 위축된 상황(3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유다가 앗수르를 조롱하며 멸시할 날이 미구에 이를 것이라는 예언이 시적으로 주어진다. '머리를 흔드는 것'은 경멸하는 몸짓(시 22:7;44:14;109:25;렘 18:16;애 2:15;마 27:39)이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퇴각하는 날,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등을 향하여'(* ,아하레카) 머리를 흔들어 댈 것이다. '처녀'란 말은 예루살렘 성이 위협을 당했을지언정 아직 정복되지 아니하였음을 상징하는 말이다(Michaelis, Hitzig).
=====37:23
네가 훼방하며...누구에게냐 -예루살렘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은 그 오만과 방자함으로 인하여 단순한 군사적 의미를 넘어 감히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훼방하며 능욕하는 신성 모독의 차원에까지 미쳤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37:24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이를 것이며 - 이하에서 산헤립이 말한 되풀이로 이해되는 본절은 고대의 왕들이 남겨놓은 기념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어투와 매우 흡사하다. 산헤립이 교만하게 '감히 우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으며 우리가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지 못 갈 데가 없다'고 호언하는데, 그의 교만은 전적으로 '병거'(* ,레케브)로 대표되는 앗수르의 무력에 근거한 것이다.
=====37:25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밟아 말리리라 - 앞절에서처럼 본문은 과거형으로 시작해서 미래형으로 끝난다. 이는 지금까지 그의 원정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던 만큼 앞으로의 원정도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다(Alexander). 앞서 레바논의 우거진 삼림들이 앗수르 군대의 나아감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머나먼 원정길에서 피할수 없이 따라오는 목마름조차도 역시 문제가 못 될 것이다. 그는 물이 없는 곳에서는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다고 노래한다. 그의 허풍은 앗수르 군대의 수효가 엄청나기 때문에 그들이 단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애굽의 모든 강들이 다 말라버릴 것이라는 말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산헤립(B.C. 705-681)은 애굽 델타에까지 결코 원정하지 못하였다. 실제 애굽 공격은 그의 후계자 에살핫돈(B.C. 670년)과 앗술바니팔(B.C. 668년) 때에 이르러서야 수행되었던 것이다(Leupold).
=====37:26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겠느냐...되게 하였노라 - 앗수르 왕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1인칭으로 기술된다(26-29절). 하나님은 앗수르 왕이 내세운 공적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지도 않는다. 본문에서 그 초점은 '(네 말이 다 사실일진대) 땅에서 되어진 그 모든 일의 참된 주체가 과연 누구냐?'에 모아진다. 하나님은 앗수르가 거두었던 놀라운 군사적 성공도 당신께서 태초부터 이미 작정하셨던 신적인 계획 속에 포함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앗수르는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시켜 나가는 신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10:5).
=====37:27
그러므로 그 거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같았었느니라 - 앗수르 군대 앞에서 평평한 지붕 위에 돋아나서 햇볕이 들면 쉬어 시들어버리는 약한 풀이나 아직 영글지도 않아서 낫을 댈 필요조차 없는 곡식과도 같았다(시 129:6). 그들은 이 모든 현상이 자기들의 위압적인 힘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며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 중에 포함됨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37:28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이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앉고 일어섬'에 대하여는 시 139:2, '나가고 들어옴'에 대하여는 신 28:6;시 121:8 등을 보라(Alexander).
=====37:29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돌아가게 하리라 - '코에 갈고리를 꿰고 자갈을 먹이는 것'은 말 안 듣는 짐승을 다룰 때 사용하는 수법이다(욥 41:2;겔 19:4;29:4;38:4). 하나님은 분노와 교만으로 길길이 날뛰는 앗수르를 강제적으로 유다로부터 철수시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드신다는 말이다.
=====37:30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먹을 것이니이다 -오만한 정복자에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응징의 말쓰메 이어 선지자가 히스가야 왕에게 말한다. 발언의 핵심은 한 '징조'는 사건에 앞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어떤 기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이 일우어진 다음에 '하나님께서 진실로 역사하셨구나!'하는 것을 확인하게끔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출 3:12,18 참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쟁의 참상과흔적이 남아있는 금년과 제2년에는 정상적인 파종과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때까지 백성들은 땅에서 절로 자라나는 것만을 먹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제3년이 되면 백성들의 생활은 정상으로 회복되고 자신이 뿌린 씨에서 수확을 거두고 그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포위 상태로 인해 유다의 농업 경제의 기초가 다 훼파되었다 할지라도 그 상처가 아물어 흔적초차 볼 수 없는 날이 곧 이르리라는 것이다.
=====37:31,32
남는 자는...나을 것임이라...이를 이루시리이다 - 앞절의 농사 비유를 확대하여 선지자는 그것을 유다으가 예루살렘의 구원에 적용한다. 즉,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이 온전히 회복되듯이 포위된 성읍으로부터 '남은 자'가 나와 다시 번성하게 될 것이다. '남은 자'의 주체가 다시 등장한다(4:3;6:13;10:21,22;11:11,16 참조). '남은 자'와 동의어로 쓰이는 '피하는 자'(* ,펠레타)의 문자적인 뜻은 '피난', '구출'인데, 여기서는 '피신한 사람들'이라는 집합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Alexander, Calvin). '여호와의 열심'은 이 모든 일의 절대적 확실성을 보증하는 근거로서 덧붙여진다(9:7).
=====37:33,34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이 성에 이르지 못하니라 - 앞에서 대체적으로 말해졌던 앗수르 왕의 장래가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보다 명확하게 예언된다. 그 요지는 '그 왕이 이 성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본문에서 2번 반복되고 있다. '방패'(* ,마겐)는 화살과 창을 막을 뿐 아니라 성벽에 접근했을 때, 위에서 떨어지는 돌이나 역청을 막는데도 사용되었다. '흉벽'으로 번역된'솔렐라'(* )는 돌을 들어 던지는 전쟁 무기(Calvin)가 아니라 언덕 위에 있는 도성을 공략하거나 포위할 목적으로 쌓아 올린 작은 토성을 가리킨다(렘 32:24, Delitzsch, Oswalt).
=====37:35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구원하리라 -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받은 것은, 첫째로, 산헤립에 의해서 모욕되고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23절)을 보존하고 그 영광을 천하 만국에 증거(20절)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 종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한 것이다. 다윗 언약의 핵심은 '다윗의 나라와 그 위가 그의 자손들로 더불어 견고케 되며 영원히 보존된다'는 것이다(삼하 7:12,13,16). 이 약속은 후에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영적으로 참되고 온전하게 성취되었다(9:7;11:1;55:3;렘 30:9;겔 37:24;호 3:5 참조,Oswalt,Calvin).
=====37:36
여호와의사자가 나가서 - 선지자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의 대군을 잃고 비참한 모습으로 고국으로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을 보도한다. 이러한 패배는 그가 하나님과 더불어 대적하고 싸운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것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첫째로, 앗수르 군대의 몰살은 단 하룻밤 사이에 기적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기적적인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들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근거해서,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가 사용한 치명적인 살육의 도구는 쥐가 옮기는 페스트 전염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결정적인 단서는 없다. 설혹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전염병으로 인해 엄청난 숫자의 대군이 몰살당한것 역시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이 기적의 주체는 '여호와의 사자'였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유월절의 밤에 애굽의 장자들을 단번에 살육하였던 '죽은의 천사'를 연상시킨다(출 12:12).
=====37:37
떠나 돌아가서 - 직역하면 '(야영지를) 해체하고(* ,이사), 떠나서(* .옐레크) 돌아왔다(* ,야솨브)'이다. 연속적으로 배치된 이들 세 동사는 그들이 혼란 중에 서둘러 퇴각하였음을 보여준다.
=====37:38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그를 칼로 죽이고 - 산헤립의 최후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되었다(7절). 그는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암살은 그가 신전에서 '니스록'신에게 경배할 때에 일어났다. '니스록'(* )은 '결합자'라는 뜻인데 아마도 산헤립의 개인 수호신인 듯하다. 앗수르의 대표적인 신들 이름에는 '니스록'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가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의 개인 이름에는 '니스록'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가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이 그의 신에게 기도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이 아니라 아들들의 손에 의한 비참한 죽음이었다.
랍사게와 히스기야 신하들의 대화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전장(36장)에 이어서
본장은 랍사게의 조롱을 받은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직책이 이스라엘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
을 차지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달리 하나님
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선지
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기술하
고 있는 본장은 신하들의 보고에 대한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전
반부(1-7절), 앗수르의 이스라엘에 대한 조롱과 히스기야의 기도를 서술하고 있는 중
반부(8-20절), 이사야의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과 그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후반부
(21-3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26, 27장과 38, 39장의 역사적 순서가 바뀌었다는 이유 때문에 본장의 진정성
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순서에 따라 성경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의 순서에 따라 역사적인 사건
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단지 역사적 사건의 차서에 따라 성경의 내용에 의심을
품는 것은 성경에 대한 정당한 태도가 아니다. 특히, 36장과 본장이 바로 앞의 예언들
의 배경이 되는 데 비해서 39장은 바벧론의 발흥과 애굽에 대한 암시를 하고 있는 40
장의 배경이 되기에 순서가 변경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또한 본장 20절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저자가 논의를 진행시킴에 있어서 두 가지 표
현 방식을 채택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야기식의 형태(narrative)와 연
설체식의 형태(speech)이다. 저자는 이러한 형식을 빌어서 그 당시 상황을 묘사하면서
'듣다'라는 말을 '모티브'(motif)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이야기식|'듣다'의| 연 설 식 |'듣다'의|
| |사용회수| |사용회수|
+--------+--------+---------------------------------------------------+--------+
| 1, 2절| 1 |신하들이이사야에게 히스기야의말을 전하는모습(3,4절)| 2 |
+--------+--------+---------------------------------------------------+--------+
| 5, 6절| 1 | 여호와의 명령을 이사야가 대신 전하는 모습(7절) | 1 |
+--------+--------+---------------------------------------------------+--------+
| 8, 9절| 2 | 산헤립의 연설(10-13절) | 1 |
+--------+--------+---------------------------------------------------+--------+
|14, 15절| 0 | 히스기야의 기도(16-20절) | 2 |
+--------+--------+---------------------------------------------------+--------+
이러한 형식으로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본장의 내용을 몇 단
락으로 세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랍사게의 조롱에 대한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37 : 1-7)
랍사게의 조롱에 대하여 묵묵부답으로 듣고만 있었던 신하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
는 전 단락(36 : 13-22)에 이어서 본단락은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자리를 전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과 이사야 선지자의 반응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장(36장)에서는 랍
사게의 조롱에 형편없이 수치스러운 모욕을 당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데
반하여 본 단락부터는 이러한 조롱으로 인한 지적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어떻게 하나님
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히스기야의 신앙적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전반
부(1절), 신하들을 통하여 히스기야의 말을 이사야에게 전하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
중반부(2-4절), 이사야의 답변을 밝히는 후반부(5-7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회개는 즉각적이며 참되야 한다(1절) :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은 매우 위
급한 상황이었고 왕으로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히스
기야는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동이 얼마나 즉각적이었는가
는 짧은 한 절 안에 네가지의 동작이 연속해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
다. 즉,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등이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경건한 신
앙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히스기야의 회개는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심령 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회개였다(눅 18 : 13). 그러므로 하나님은 히스
기야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2) 어려운 환경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2-4절) : 위기 상황에 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본 단락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어려
운 시기에 히스기야의 신하들을 이사야에 보낸 의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사야에 대
해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2절)라고 수식어를 붙인다. 이러한 언급은 이사야의 직
책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 위해서라기보다는 선지자가 이스라엘 내
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위치에 있음을(신 18 : 15 ; 말 2 : 7) 부각시
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환난의 날에 오직 하나
님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2. 앗수르의 회유와 히스기야의 기도(37 : 8-20)
랍사게의 조롱에 대한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1-7절)
에 이어서 본 단락은 앗수르 왕의 집요한 회유와 그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을 중점적
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들은 전 단락보다 더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갈등 관계
가 증폭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양국의 긴장 관계가 현저하게 나타
나고 있는 본 단락은 여호와의 역사에 대하여 앗수르 왕이 비웃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
고 있는 전반부(8-13절)와 이에 대한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히스기야의 모습
이 드러나는 후반부(14-20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에 나타난 핵심적인 사상
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히스기야는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내놓고 기도했다(14-17절) : 지금 히스기야
는 이전의 랍사게의 조롱보다 더 집요한 앗수르 왕의 반복되는 협박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건한 왕인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기도했
다(14절). 왜냐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위협을 해결해주시
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간구할 때 역
사하신다.
(2) 히스기야의 기도는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구하는 기도이다(18-20절) : 히스기야
는 자신의 구체적인 소원에 대해 여호와께서 만국의 주이심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한
다(20절).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는 자신이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
의 통치를 구하는 태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제일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 : 9)라고 하셨
다. 또한 염려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시면서도 결론적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 : 33)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 세상을 다스리며 통치하시는 분임이 만방에 알려지기를 원하는
히스기야의 기도는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간구의 모범이라고 볼 수 있다.
3. 이사야의 예언과 그 성취(37 : 21-38)
앗수르 왕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 앞에 굴하지 않고 기도로써 난관을 헤쳐나가는 히
스기야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전 단락(8-20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이사야의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과 그 성취를 묘사하고 있다. 유다가 비록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는 등 범죄했을지라도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오만 방자한
산헤립을 물리치실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본 단락은 심판을
예언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21-35절)와 실제적으로 일어난 심판의 상황을 묘사
하고 있는 후반부(36-38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앗수르의 심판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21-29절) :
이사야는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면서 반문조의 형식을 빌어 앗수르를 책망하고 있다
(23절). 이러한 반문조의 형식은 강한 부정적 표현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표현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사야의 책망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저자는 23
절에서 '누구에게냐'라고 반복함으로써 앗수르의 조롱이 하나님에게 향해 있으므로 심
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대적하는 불신앙적인 세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철저히 멸하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게 수행된다(36-38절) :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묘사함에 있어서 저자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36절)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속에 개입하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였으므로 한치의 오차도 나지 않았다. 이러한 구약의 심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행해질 최후 심판의 모습을 예표적으로 보여준다(마 25 : 31-46). 하나님은 모든 죄악에 대해 반드시 공의로 판결하신다.
이상과 같은 본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도는 언제나
자신의 환경을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잇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둘째, 여호와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렘 33 : 3). 셋째,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마 6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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