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보라 장차 한 왕이...정사할 것이며 -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 도성을 공격하려던 대적들(앗수르)은 몰살되는 반면 그 도성은 영속성을 보장받게 되는데(31:4-9), 선지자는 계속해서 장차 그 도성에서 시행될 참되고 의로운 통치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 통치는 새로운 왕과 방백들, 즉 새로운 정부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제 동참할 '한 왕과 방백들'은 눌려 도망가는 '앗수르의 왕(반석)과 그 방백들'과 대비된다(31:9).저들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에들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 언급된 '왕'은 아마도 종교 개혁을 통해서 여호와 신앙을 부흥시킨 히스가야 왕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다. 선지자의 시선은 당대를 넘어 먼 미래에 미치며 그의 예언은 메시야 시대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성취되어진다. 의로...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 '의'(* ,체데크)와 '공평'(* ,미쉬파트)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통치 규범이다(1:21,27). '의'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제된 올바른 행동의 원리라면, '공평'은 그 원리의 구현이라 할수 있다. 이 시점에서 선지자는 전자를 왕의 덕목에, 후자를 방백들의 덕목에 각각 적용시킨다.
=====32:2
광풍을 피하는 곳...같으니 - 악한 정부의 통치가 백성을 괴롭히는 '광풍'과 '폭우' 그리고 '마른 땅'과 '곤비한 땅'과 같다면, 선한 정부의 통치는 그것들로부터의 백성을 보호해주는 '가리는 것'(* ,마하베), '덮는 것'(* ,세테르), '시냇물'(* ,펠레그), '무거운 바위의 그늘'(* - ,첼 셀라-카베그)과 같을 것이다. '광풍-폭우'와 '마른 땅-곤비한 땅'은 팔레스틴 땅의 여행객들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자연 재해들로서,전자는 큰 비를 동반한 폭풍을, 후자는 뜨거운 햇볕으로 사람의 목을 타게 만드는 무서움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4:6;25:4을 보라.
=====32:3
보는 자의 눈이...기울어질 것이니 - 공의로운 통치가 가져오는 유익은 비단 외적인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내면적인 변화까지도 유발된다. 선지자는 이것을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소경 같고 귀머거리 같았던 자들이 다시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게 된다(29:18,19). 이 약속은 전에 선지자가 들었던 것(6:9,10)이고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경고(29:10)와 대조된 것이다. '듣는자의 귀가 기울어진다'는 말은 '주의 깊게 경청한다'(* ,카솨브)는 뜻이다.
=====32:4
조급한 자의 마음이... 말을 분명히 할것이라 - 급하게 서두르며 초조하고 분주하여 헛된 일에 집착하던 '조급한 자'(* ,님하람)의 마음이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참된 지식과 통찰력을 갖게 된다. 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는 '어눌한 자'(* ,일김)가 되어 혀를 잘 놀릴지 못하던 자들이 이제는 세련되고 적절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일김'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를 경멸하는 자'를 빗된 말(28:11 참조,Knobel,Drechsler)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을 가리킨다.(Delitzsch,Alexander).
=====32:5
어리석은 자를...정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니 - 이와 같은 영적인 명징(明澄)함의 결과로,가치가 전도되어 참과 거짓이 뒤바뀌고 악덕과 미덕이 혼동되던 시대에 상습적으로 자행되어졌던 잘못된 일들이 바로잡아질 것이며 모든 일이 올바른 질서 위에서 시행되어짐을 의미한다. '어리석은 자'(* ,나발)는 '사악한 자'로도 번역 가능하다. '궤휼한 자'라 번역된 '킬라'(* )는 '간교하다'는 뜻을 가진 '네킬라'(* )의 단축형 (Gesenius) 혹은 '낭비하다'는 뜻을 가진 '칼라'(* )에서 파생된 말(Hitzig)로 설명되기도 하니 확실하지는 않다.
=====32:6,7
본문은 '왜냐하면'(* ,키)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선지자는 '어리석은 자'와 '궤휼한 자'가 전에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명예로운 칭호(관직)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의 본성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어리석은 자는...없어지게 함이며 - 성경에서 '어리석음'은 머리의 둔함에 관련된 말이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에 관계되는 말이다(신 32:6; 시 14:1 ; 74:22). 어리석은 자는 먼저 하나님을 거스려 죄악을 범하고 다음에는 동료 인간들에 대하여 악행을 저지른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관계에서 옳지 못한 인간 관계가 배태(胚胎)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린 자의 '심령(* ,네페쉬)을 비게 한다"는 말은, 굶주린 자를 먹이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그의 양식을 빼앗아 생존할 수조차 없게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죄악을 밥먹듯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궤휼한 자는...그리함이어니와 - '궤휼한 자'는 재물과 이권을 획득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 하여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된 먹이는 스스로를 보호할 줄 모르는 '가련한 자'(* ,아니윔)와 '빈핍한 자'(* ,에브욘)이다.
=====32:8
고명(高明)한 자는...서리라 - '고명한 자'(* ,나디브)는 외부적인 요인에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발적인 동기에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힘쓰는, 천성적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이다. 그는 궤휼한 자가 끊임없이 악한 계책을 도모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고귀하고 덕스러운 일을 생각하고, 또한 생각한 그것을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려고 애쓴다. 이러한 그의 덕행은 시간이 지난다 하여도 변하지 않으며 어떤 장애가 가로막을지라도 중단되지 않는다. '서리라'(* ,쿰)는 말은 '자라나다', '견고히 서다'는 뜻이다(40:8).
=====32:9
너희 안일한 부녀들이...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 본문은 추수 절기에 춤을 추는 유다의 여자들에 대해서 말한다.(삿 21:20 이하, G.E.Wright). 선지자는 그들을 '안일 한 부녀', '염려 없는 딸들'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풍족한 수확의 기대와 즐거움에 도취되어 다가올 재난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재난의 때는 어김없이 임할 것이다. 예루살렘 부녀들의 허영과 교만을 그린 3:16-4:1과 본문을 비교하라.
=====32:10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 직역하면 '너희 자신 만만하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여자들아 너희가 몸을 떨것이다(즉, 두려움에 전율할 것이다)'이다. 극히 대조되는 앞말과 뒷말의 결합을 통하여 선지자는 충격을 가중시킨다.
=====32:11
옷을 벗어...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 이제 선지자는 재난의 때에 그들이 취해야 될 마땅한 태도를 설명한다. 평상복을 벗고 가슴을 치는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 큰 재난을 당했을 때 슬픔을 나타내는 관습화 된 것이다.( 3: 24 ; 15:3 ; 22:12 ;욜 1:13; 나2:7). 좋은 밭...포도나무를 위하여 - 이전에 풍성한 곡식을 산출했던 좋은 밭과 열매 많던 포도나무가 재난으로 황폐하게 변해버리는 것, 곧 삶의 터전을 상살하는 것이 그들이 애통한 이유인 것이다(16:7-11).
=====32:13
형극과 질려가 내 백성의 땅에 나며 - '내 백성의 땅'과 '형극과 질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출 3:8,17;13:5;33:3)에서 어떻게 '형극과 찔레'가 나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7;5:6;7:23). 희락의 성읍...나리니 - 본문은 불변사 '키'(* )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것은 앞의 사상을 확대, 설명하는 '...까지도'로 해함이 무난하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야기되는 황폐함이 땅에 만이 아니라 심지어 희락의 성읍, 기쁨이 넘치는 집들까지도 미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이것은 다음절에서 확인된다.
=====32:15
우리에게 부어질 때까지'이다. 성령을 부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기까지 재난은 지속 된다. 그때가 언제일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반드시 도래한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변화 될 것이다. 영을 부어 주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왕권 확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만 일어난다.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될 때 거기에는 무력함과 불의만이 판을 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어 인생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이 땅은 풍요함을 되찾고 집집마다 희락이 찾아 들며 나라 전체에 평안이 깃들게 될 것이다. 광야가 아름다운 발이 되며...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야기되는 복스러운 변화는 먼저 땅에서부터 나타난다. '광야' 곧 곡식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이 '아름다운 밭' 곧 경작된 땅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거둔 소출도 나중에 산출될 그 풍성함에 비추어 보면 야생숲으로 여겨질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32:16
공평이...있으리니 - 물질의 풍요로움은 축복의 서장에 지나지 않는다. 선지자는 변화된 땅에 거할 변화될 백성들의 영적 특성에 주목한다. '곡식을 산출하는 비옥한 밭이나 경작되지 않는 목초지에도 의와 공평이 거한다'는 말은, '의와 공평이라는 새 시대의 규범들이 온 땅 위에 편만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 ,체다카)와 '공평'(* ,미쉬파트)은 '하나님을 높임'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함'이라는 율법의 두 기본적인 의무 조항들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말들이다(Calvin, Kissane).
=====32:17
의의 공효는...평안과 안전이라 -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주어짐을 역설한 말이다. 이를 신약의 언어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32:18
본문은 그 의미상 13절과 대조된다. 한때 희락과 기쁨이 감돌던 곳이었으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형극과 질려가 자라던 '내 백성'의 집에 하나님의 의로부터 발출되는 참된 평화가 깊이 스며들 것이다.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 그리고 '종용히 쉬는곳'은 모든 이들이 꿈꾸는 곳이겠거니와 이러한 곳에서 거할 수 있는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경건한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요 14:27 참조).
=====32:19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심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 본문은 세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그리고 삼림은 철저히 가라앉고 성읍은 전적으로 황폐해지리라'(RSV). (2)'그때에는 삼람 비탈이 서늘하겠고 성읍은 평화롭게 될 것이다'(NEB). (3)'비록 우박이 삼림에 쏟아져 내리고 성읍은 평지처럼 될지라도'(NIV). 문맥상 세번째가 가장 무난하겠다(G. W. Grogan).
=====32:20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너희는 복이 있으니라 - 하나님의 백성이 편안하게 농사 짓는 행복한 전원시적인 분위기로 본장은 마감된다. 물기 마를 염려가 없는 땅, 곧 '물가'에서는 농부가 뿌린 씨앗마다 풍성한 수확으로 결실한다. 소와 나귀 등의 가축들을 씨뿌린 밭에서 몰아내는 것이 상례임에도 여기에 나오는 농부는 오히려 가축을 이끌어 일찍 나온 잎들을 뜯어먹게 한다. 왜냐하면 땅이 너무나 비옥하여 곡식이 속히 자라기 때문이다. 이 같은 풍성한 생산력은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복주심의 결과로서 묘사된다. 30:23-25을 참조하라.
여호와를 향한 진정한 회개와 그결과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전장(31장)에 이어
서 본장은 여호와의 통치가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에
찬 내용을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를 소개하고 있는
본장은 (1) 여호와의 나라를 다스릴 왕의 행사를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8절) (2) 당
시 이스라엘 자손들의 윤리적인 상태를 지적하는 중반부(9-14절) (3) 성신(聖神)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5-20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장에서 제시되고 있는 '한 왕'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주석가들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크게 (1) 역사적 상황을 고
려하여 히스기야로 보는 입장, (2) 내용의 완전성을 고려하여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
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특별히 이 문제는 중대한 신학적인 의미
와 관련되어 있다. 만약 첫 번째의 견해를 취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 나라는 히스기
야 통치 시대의 이스라엘에 국한된다. 반면에 두 번째의 견해를 취한다면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본장의 내용을 고려하여 보았을 때 이 두가지 견해를 동시에 취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 해석이다.
물론 이 예언 자체가 일차적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히
스기야 시대의 왕국으로 보는 것은 전혀 틀린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구약이
신약의 전망 하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원리를 생각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의 예표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구약에 있는 모든 내용을
메시야적인 해석으로 일관하는 것은 구약의 특수성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의
내용 자체가 메시야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면, 이와 같은 해석으로 받아들여도 무관하
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본장의 예언의 내용은 히스기야 시대의 이스라엘을 암시하
지만 동시에 메시야적인 왕국을 예표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본장의 내용은 히스기야 왕의 통치를 총괄적으로 요약한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왕
하 18 : 1-4). 즉, 히스기야가 즉위하면서 시작하게 될 선한 개혁 사업과 그 백성에게
미칠 혜택, 통치 중반기에 앗수르의 침입으로 야기될 혼란상, 그리고 통치 말기의 평
안함이 순차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1
절)에서는 미래에 있을 메시야의 통치에 대해서 예언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15절)라는 표현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예언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본장은 히스기야 왕의 통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왕국을 예표하는 부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특성을 염두에 두면서
본장의 내용을 좀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 왕의 통치(32 : 1-8)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예언적으로 묘사하는 전 단락(31 : 8, 9)에 이어서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경구투의 문체나 담고있는 사상면
에서 지혜 문학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잠 16 : 10-13 ; 20 : 8, 28 ; 29 : 4, 14 ;
31 : 3-9). 특별히 여기서는 공의의 왕(7 : 14 ; 9 : 6, 7, 11 ; 11 : 1-5)뿐 아니라
왕에게 종속된 방백들까지도 종말론적 구원에 관한 예표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내용
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통치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전반부(1-4절), 그
부정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후반부(5-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의 특징
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왕의 통치의 성격(1-4절) : 저자는 한 왕을 통하여 이루어질 나라의 성격에 대
하여 의와 공평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성격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와는 달리 왕이 마음대로 통치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다스려야만 한다. 이와 같은 독특한 질서,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대리 통치 방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을 반영하
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양면성(5-8절) : 저자는 한 왕을 통해서 다스려지는 나라에 대
해 언급하면서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시행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은 '어리
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6절), '궤휼한 자는 악한 계획을 베푸는'(7절) 모습
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는 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뿐만 아
니라 죄악도 역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양면성
은 출애굽 사건 속에서 확연히 찾아볼 수 있다. 유월절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애굽 백성들에게 있어서 심판을 가져다 주었다.
2. 이스라엘의 패역에 대한 경고(32 : 9-14)
하나님의 통치가 한 왕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
(1-8절)과는 달리 본 단락은 현재의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한 책망으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철저한 이기주의로 인하여 사회적 불의를 자행하고 있는 어리석은 여자에 대해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3 : 16-4 : 1 ; 암 4 : 1-3). 이러한 내용이 나타나는 본
단락은 개인에 대한 경고를 묘사하는 전반부(9-11절), 전체적인 공동체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후반부(12-1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 단락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안일한 여자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탈굼역에서는 이 부분이 방백들을 향한
경고라고 이해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안일한 여자들을 향한 경고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
당하다. 이제 이스라엘의 안일함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본 단락의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무지는 세태에 대한 안일한 판단으로 귀결되었다
(9-11절) : 현재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앗수르의 위협이 눈앞에 있는 절대 절명(絶對絶
命)의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전혀 위기 의식없이 경솔하고 안일하게
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당시 백성들은 주변의 변화에 대해서 무감각하였으며
세대를 분별하는 영적인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올바로 깨닫지 못할 때는 잘못된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은 전체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12-14절)
: 저자는 개인적인 경고의 차원에서 벗어나 이제는 심판이 전공동체에 미칠 것임을 묘
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죄악이 극도에 달해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인의 죄와 공동체의 죄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밀접
한 관계에 있음을 알려준다. 실례로 여호수아의 행군 도중에 있었던 '아간의 범죄'는
한 개인의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취급되고 있다(수 7 : 11).
3. 성신의 임함으로 이루어지는 나라(32 : 15-20)
현재의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전 단락(9-14절)과 달리 본 단락
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한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장차 의로우신 왕
이 오셔서 통치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성신을 부어주시고, 하나님과 인간과 자
연 사이의 온전한 조화를 이루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성신의 임함과 그 결과를 극적
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 단락은 성신의 임함으로 이루어지는 자연(自然)과 축복을 묘사
하고 있는 전반부(15절), 그 나라의 통치 원리를 묘사하는 후반부(16-20절) 등으로 구
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의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신의 출처는 위로부터이고 그 결과는 땅의 축복으로 나타난다(15절) : 15절
의 '필경은'이라는 말은 '마침내'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15절 이하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임을 예언해준다. 특히
'위에서부터'라는 어구는 이러한 해석을 더욱더 지지해준다. 이 표현은 성신의 임하심
의 근원이 신(神)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시기가 역사 가운데 매우
비상한 시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성신이 임하시면 광야가 아름다운 밭으로
변하는 자연적 축복이 수반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종국에
이루실 우주적 갱신을 예표하는 예언으로서 성령의 능력적인 통치를 생생하게 보여주
는 것이다.
(2) 성신의 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는 백성에게 영원한 안식을 제공한다(16-20
절) : 성신의 임하심의 결과는 자연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가져다 준다. 성령의 임하심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영역에 영향
을 미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평강을 보장해준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나
라에 참여하는 자들의 삶의 특성과 동일하다(17절). 예수께서도 보혜사 성령에 대한
예언을 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밝힘으로써 이 평안이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평안임을 보여
준다(요 14 : 27). 결국 이러한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의 궁극적 통치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완악하고 절망적일지라도 예수님은 반드시 의와 평강이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므로(렘 23 : 6) 하나님의 백성은 낙심치 말고 화평과 안식의 축복을 기대하며(계 7 : 17 ; 21 : 4 ; 22 : 3) 날마다 찬양과 경배의 삶을 생활화해야 한다.
보라 장차 한 왕이...정사할 것이며 -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 도성을 공격하려던 대적들(앗수르)은 몰살되는 반면 그 도성은 영속성을 보장받게 되는데(31:4-9), 선지자는 계속해서 장차 그 도성에서 시행될 참되고 의로운 통치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 통치는 새로운 왕과 방백들, 즉 새로운 정부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제 동참할 '한 왕과 방백들'은 눌려 도망가는 '앗수르의 왕(반석)과 그 방백들'과 대비된다(31:9).저들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에들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 언급된 '왕'은 아마도 종교 개혁을 통해서 여호와 신앙을 부흥시킨 히스가야 왕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다. 선지자의 시선은 당대를 넘어 먼 미래에 미치며 그의 예언은 메시야 시대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성취되어진다. 의로...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 '의'(* ,체데크)와 '공평'(* ,미쉬파트)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통치 규범이다(1:21,27). '의'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제된 올바른 행동의 원리라면, '공평'은 그 원리의 구현이라 할수 있다. 이 시점에서 선지자는 전자를 왕의 덕목에, 후자를 방백들의 덕목에 각각 적용시킨다.
=====32:2
광풍을 피하는 곳...같으니 - 악한 정부의 통치가 백성을 괴롭히는 '광풍'과 '폭우' 그리고 '마른 땅'과 '곤비한 땅'과 같다면, 선한 정부의 통치는 그것들로부터의 백성을 보호해주는 '가리는 것'(* ,마하베), '덮는 것'(* ,세테르), '시냇물'(* ,펠레그), '무거운 바위의 그늘'(* - ,첼 셀라-카베그)과 같을 것이다. '광풍-폭우'와 '마른 땅-곤비한 땅'은 팔레스틴 땅의 여행객들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자연 재해들로서,전자는 큰 비를 동반한 폭풍을, 후자는 뜨거운 햇볕으로 사람의 목을 타게 만드는 무서움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4:6;25:4을 보라.
=====32:3
보는 자의 눈이...기울어질 것이니 - 공의로운 통치가 가져오는 유익은 비단 외적인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내면적인 변화까지도 유발된다. 선지자는 이것을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소경 같고 귀머거리 같았던 자들이 다시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게 된다(29:18,19). 이 약속은 전에 선지자가 들었던 것(6:9,10)이고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경고(29:10)와 대조된 것이다. '듣는자의 귀가 기울어진다'는 말은 '주의 깊게 경청한다'(* ,카솨브)는 뜻이다.
=====32:4
조급한 자의 마음이... 말을 분명히 할것이라 - 급하게 서두르며 초조하고 분주하여 헛된 일에 집착하던 '조급한 자'(* ,님하람)의 마음이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참된 지식과 통찰력을 갖게 된다. 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는 '어눌한 자'(* ,일김)가 되어 혀를 잘 놀릴지 못하던 자들이 이제는 세련되고 적절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일김'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를 경멸하는 자'를 빗된 말(28:11 참조,Knobel,Drechsler)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을 가리킨다.(Delitzsch,Alexander).
=====32:5
어리석은 자를...정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니 - 이와 같은 영적인 명징(明澄)함의 결과로,가치가 전도되어 참과 거짓이 뒤바뀌고 악덕과 미덕이 혼동되던 시대에 상습적으로 자행되어졌던 잘못된 일들이 바로잡아질 것이며 모든 일이 올바른 질서 위에서 시행되어짐을 의미한다. '어리석은 자'(* ,나발)는 '사악한 자'로도 번역 가능하다. '궤휼한 자'라 번역된 '킬라'(* )는 '간교하다'는 뜻을 가진 '네킬라'(* )의 단축형 (Gesenius) 혹은 '낭비하다'는 뜻을 가진 '칼라'(* )에서 파생된 말(Hitzig)로 설명되기도 하니 확실하지는 않다.
=====32:6,7
본문은 '왜냐하면'(* ,키)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선지자는 '어리석은 자'와 '궤휼한 자'가 전에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명예로운 칭호(관직)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의 본성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어리석은 자는...없어지게 함이며 - 성경에서 '어리석음'은 머리의 둔함에 관련된 말이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에 관계되는 말이다(신 32:6; 시 14:1 ; 74:22). 어리석은 자는 먼저 하나님을 거스려 죄악을 범하고 다음에는 동료 인간들에 대하여 악행을 저지른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관계에서 옳지 못한 인간 관계가 배태(胚胎)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린 자의 '심령(* ,네페쉬)을 비게 한다"는 말은, 굶주린 자를 먹이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그의 양식을 빼앗아 생존할 수조차 없게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죄악을 밥먹듯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궤휼한 자는...그리함이어니와 - '궤휼한 자'는 재물과 이권을 획득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 하여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된 먹이는 스스로를 보호할 줄 모르는 '가련한 자'(* ,아니윔)와 '빈핍한 자'(* ,에브욘)이다.
=====32:8
고명(高明)한 자는...서리라 - '고명한 자'(* ,나디브)는 외부적인 요인에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발적인 동기에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힘쓰는, 천성적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이다. 그는 궤휼한 자가 끊임없이 악한 계책을 도모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고귀하고 덕스러운 일을 생각하고, 또한 생각한 그것을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려고 애쓴다. 이러한 그의 덕행은 시간이 지난다 하여도 변하지 않으며 어떤 장애가 가로막을지라도 중단되지 않는다. '서리라'(* ,쿰)는 말은 '자라나다', '견고히 서다'는 뜻이다(40:8).
=====32:9
너희 안일한 부녀들이...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 본문은 추수 절기에 춤을 추는 유다의 여자들에 대해서 말한다.(삿 21:20 이하, G.E.Wright). 선지자는 그들을 '안일 한 부녀', '염려 없는 딸들'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풍족한 수확의 기대와 즐거움에 도취되어 다가올 재난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재난의 때는 어김없이 임할 것이다. 예루살렘 부녀들의 허영과 교만을 그린 3:16-4:1과 본문을 비교하라.
=====32:10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 직역하면 '너희 자신 만만하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여자들아 너희가 몸을 떨것이다(즉, 두려움에 전율할 것이다)'이다. 극히 대조되는 앞말과 뒷말의 결합을 통하여 선지자는 충격을 가중시킨다.
=====32:11
옷을 벗어...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 이제 선지자는 재난의 때에 그들이 취해야 될 마땅한 태도를 설명한다. 평상복을 벗고 가슴을 치는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 큰 재난을 당했을 때 슬픔을 나타내는 관습화 된 것이다.( 3: 24 ; 15:3 ; 22:12 ;욜 1:13; 나2:7). 좋은 밭...포도나무를 위하여 - 이전에 풍성한 곡식을 산출했던 좋은 밭과 열매 많던 포도나무가 재난으로 황폐하게 변해버리는 것, 곧 삶의 터전을 상살하는 것이 그들이 애통한 이유인 것이다(16:7-11).
=====32:13
형극과 질려가 내 백성의 땅에 나며 - '내 백성의 땅'과 '형극과 질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출 3:8,17;13:5;33:3)에서 어떻게 '형극과 찔레'가 나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7;5:6;7:23). 희락의 성읍...나리니 - 본문은 불변사 '키'(* )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것은 앞의 사상을 확대, 설명하는 '...까지도'로 해함이 무난하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야기되는 황폐함이 땅에 만이 아니라 심지어 희락의 성읍, 기쁨이 넘치는 집들까지도 미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이것은 다음절에서 확인된다.
=====32:15
우리에게 부어질 때까지'이다. 성령을 부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기까지 재난은 지속 된다. 그때가 언제일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반드시 도래한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변화 될 것이다. 영을 부어 주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왕권 확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만 일어난다.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될 때 거기에는 무력함과 불의만이 판을 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어 인생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이 땅은 풍요함을 되찾고 집집마다 희락이 찾아 들며 나라 전체에 평안이 깃들게 될 것이다. 광야가 아름다운 발이 되며...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야기되는 복스러운 변화는 먼저 땅에서부터 나타난다. '광야' 곧 곡식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이 '아름다운 밭' 곧 경작된 땅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거둔 소출도 나중에 산출될 그 풍성함에 비추어 보면 야생숲으로 여겨질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32:16
공평이...있으리니 - 물질의 풍요로움은 축복의 서장에 지나지 않는다. 선지자는 변화된 땅에 거할 변화될 백성들의 영적 특성에 주목한다. '곡식을 산출하는 비옥한 밭이나 경작되지 않는 목초지에도 의와 공평이 거한다'는 말은, '의와 공평이라는 새 시대의 규범들이 온 땅 위에 편만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 ,체다카)와 '공평'(* ,미쉬파트)은 '하나님을 높임'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함'이라는 율법의 두 기본적인 의무 조항들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말들이다(Calvin, Kissane).
=====32:17
의의 공효는...평안과 안전이라 -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주어짐을 역설한 말이다. 이를 신약의 언어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32:18
본문은 그 의미상 13절과 대조된다. 한때 희락과 기쁨이 감돌던 곳이었으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형극과 질려가 자라던 '내 백성'의 집에 하나님의 의로부터 발출되는 참된 평화가 깊이 스며들 것이다.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 그리고 '종용히 쉬는곳'은 모든 이들이 꿈꾸는 곳이겠거니와 이러한 곳에서 거할 수 있는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경건한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요 14:27 참조).
=====32:19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심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 본문은 세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그리고 삼림은 철저히 가라앉고 성읍은 전적으로 황폐해지리라'(RSV). (2)'그때에는 삼람 비탈이 서늘하겠고 성읍은 평화롭게 될 것이다'(NEB). (3)'비록 우박이 삼림에 쏟아져 내리고 성읍은 평지처럼 될지라도'(NIV). 문맥상 세번째가 가장 무난하겠다(G. W. Grogan).
=====32:20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너희는 복이 있으니라 - 하나님의 백성이 편안하게 농사 짓는 행복한 전원시적인 분위기로 본장은 마감된다. 물기 마를 염려가 없는 땅, 곧 '물가'에서는 농부가 뿌린 씨앗마다 풍성한 수확으로 결실한다. 소와 나귀 등의 가축들을 씨뿌린 밭에서 몰아내는 것이 상례임에도 여기에 나오는 농부는 오히려 가축을 이끌어 일찍 나온 잎들을 뜯어먹게 한다. 왜냐하면 땅이 너무나 비옥하여 곡식이 속히 자라기 때문이다. 이 같은 풍성한 생산력은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복주심의 결과로서 묘사된다. 30:23-25을 참조하라.
여호와를 향한 진정한 회개와 그결과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전장(31장)에 이어
서 본장은 여호와의 통치가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에
찬 내용을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를 소개하고 있는
본장은 (1) 여호와의 나라를 다스릴 왕의 행사를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8절) (2) 당
시 이스라엘 자손들의 윤리적인 상태를 지적하는 중반부(9-14절) (3) 성신(聖神)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5-20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장에서 제시되고 있는 '한 왕'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주석가들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크게 (1) 역사적 상황을 고
려하여 히스기야로 보는 입장, (2) 내용의 완전성을 고려하여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
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특별히 이 문제는 중대한 신학적인 의미
와 관련되어 있다. 만약 첫 번째의 견해를 취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 나라는 히스기
야 통치 시대의 이스라엘에 국한된다. 반면에 두 번째의 견해를 취한다면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본장의 내용을 고려하여 보았을 때 이 두가지 견해를 동시에 취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 해석이다.
물론 이 예언 자체가 일차적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히
스기야 시대의 왕국으로 보는 것은 전혀 틀린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구약이
신약의 전망 하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원리를 생각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의 예표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구약에 있는 모든 내용을
메시야적인 해석으로 일관하는 것은 구약의 특수성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의
내용 자체가 메시야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면, 이와 같은 해석으로 받아들여도 무관하
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본장의 예언의 내용은 히스기야 시대의 이스라엘을 암시하
지만 동시에 메시야적인 왕국을 예표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본장의 내용은 히스기야 왕의 통치를 총괄적으로 요약한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왕
하 18 : 1-4). 즉, 히스기야가 즉위하면서 시작하게 될 선한 개혁 사업과 그 백성에게
미칠 혜택, 통치 중반기에 앗수르의 침입으로 야기될 혼란상, 그리고 통치 말기의 평
안함이 순차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1
절)에서는 미래에 있을 메시야의 통치에 대해서 예언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15절)라는 표현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예언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본장은 히스기야 왕의 통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왕국을 예표하는 부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특성을 염두에 두면서
본장의 내용을 좀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 왕의 통치(32 : 1-8)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예언적으로 묘사하는 전 단락(31 : 8, 9)에 이어서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경구투의 문체나 담고있는 사상면
에서 지혜 문학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잠 16 : 10-13 ; 20 : 8, 28 ; 29 : 4, 14 ;
31 : 3-9). 특별히 여기서는 공의의 왕(7 : 14 ; 9 : 6, 7, 11 ; 11 : 1-5)뿐 아니라
왕에게 종속된 방백들까지도 종말론적 구원에 관한 예표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내용
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통치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전반부(1-4절), 그
부정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후반부(5-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의 특징
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왕의 통치의 성격(1-4절) : 저자는 한 왕을 통하여 이루어질 나라의 성격에 대
하여 의와 공평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성격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와는 달리 왕이 마음대로 통치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다스려야만 한다. 이와 같은 독특한 질서,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대리 통치 방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을 반영하
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양면성(5-8절) : 저자는 한 왕을 통해서 다스려지는 나라에 대
해 언급하면서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시행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은 '어리
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6절), '궤휼한 자는 악한 계획을 베푸는'(7절) 모습
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는 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뿐만 아
니라 죄악도 역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양면성
은 출애굽 사건 속에서 확연히 찾아볼 수 있다. 유월절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애굽 백성들에게 있어서 심판을 가져다 주었다.
2. 이스라엘의 패역에 대한 경고(32 : 9-14)
하나님의 통치가 한 왕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
(1-8절)과는 달리 본 단락은 현재의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한 책망으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철저한 이기주의로 인하여 사회적 불의를 자행하고 있는 어리석은 여자에 대해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3 : 16-4 : 1 ; 암 4 : 1-3). 이러한 내용이 나타나는 본
단락은 개인에 대한 경고를 묘사하는 전반부(9-11절), 전체적인 공동체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후반부(12-1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 단락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안일한 여자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탈굼역에서는 이 부분이 방백들을 향한
경고라고 이해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안일한 여자들을 향한 경고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
당하다. 이제 이스라엘의 안일함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본 단락의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무지는 세태에 대한 안일한 판단으로 귀결되었다
(9-11절) : 현재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앗수르의 위협이 눈앞에 있는 절대 절명(絶對絶
命)의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전혀 위기 의식없이 경솔하고 안일하게
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당시 백성들은 주변의 변화에 대해서 무감각하였으며
세대를 분별하는 영적인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올바로 깨닫지 못할 때는 잘못된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은 전체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12-14절)
: 저자는 개인적인 경고의 차원에서 벗어나 이제는 심판이 전공동체에 미칠 것임을 묘
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죄악이 극도에 달해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인의 죄와 공동체의 죄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밀접
한 관계에 있음을 알려준다. 실례로 여호수아의 행군 도중에 있었던 '아간의 범죄'는
한 개인의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취급되고 있다(수 7 : 11).
3. 성신의 임함으로 이루어지는 나라(32 : 15-20)
현재의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전 단락(9-14절)과 달리 본 단락
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한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장차 의로우신 왕
이 오셔서 통치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성신을 부어주시고, 하나님과 인간과 자
연 사이의 온전한 조화를 이루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성신의 임함과 그 결과를 극적
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 단락은 성신의 임함으로 이루어지는 자연(自然)과 축복을 묘사
하고 있는 전반부(15절), 그 나라의 통치 원리를 묘사하는 후반부(16-20절) 등으로 구
성되어 있다. 이제 본 단락의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신의 출처는 위로부터이고 그 결과는 땅의 축복으로 나타난다(15절) : 15절
의 '필경은'이라는 말은 '마침내'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15절 이하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임을 예언해준다. 특히
'위에서부터'라는 어구는 이러한 해석을 더욱더 지지해준다. 이 표현은 성신의 임하심
의 근원이 신(神)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시기가 역사 가운데 매우
비상한 시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성신이 임하시면 광야가 아름다운 밭으로
변하는 자연적 축복이 수반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종국에
이루실 우주적 갱신을 예표하는 예언으로서 성령의 능력적인 통치를 생생하게 보여주
는 것이다.
(2) 성신의 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는 백성에게 영원한 안식을 제공한다(16-20
절) : 성신의 임하심의 결과는 자연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가져다 준다. 성령의 임하심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영역에 영향
을 미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평강을 보장해준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나
라에 참여하는 자들의 삶의 특성과 동일하다(17절). 예수께서도 보혜사 성령에 대한
예언을 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밝힘으로써 이 평안이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평안임을 보여
준다(요 14 : 27). 결국 이러한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의 궁극적 통치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완악하고 절망적일지라도 예수님은 반드시 의와 평강이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므로(렘 23 : 6) 하나님의 백성은 낙심치 말고 화평과 안식의 축복을 기대하며(계 7 : 17 ; 21 : 4 ; 22 : 3) 날마다 찬양과 경배의 삶을 생활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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