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이사야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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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이상(異像)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 '이상 골짜기'(* ,게 히자욘)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이다(5절). '골짜기'는 다윗 성이 서 있는 언덕(산) 기슭에서 마주치는 힌놈, 기드론 등의 골짜기에서 연유된 듯하고, '이상'은 그곳에 선지자의 거주지가 있고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시온 산'이라 불렸음을 생각할 때, '이상 골짜기'라는 이름에는 경멸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산' 과 '골짜기'의 대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산의 높은 곳에서는 먼 데까지도 전망이 가능하나, 어두운 골짜기에서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못한다. '이상'에 관한 한, 예루살렘은 골짜기와 같다. 선지자가 그 이름을 통해서 풍자하고 있는 바, 미래를 예측하는 시력을 상실한 예루살렘은 임박한 재난 앞에서도 회개하기는 켜녕, 기쁨으로 소동하며 분요하는 모습만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2절).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 '어찜인고'(* - , 마-라크)는 직역하면 '네게 무슨 일이냐?'(What to you)이다. 이 물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조롱의 뜻이 담겨 있다(삿 18:23). 예루살렘 주민들이 떼를 지어 지붕에 올라감(삿 16:27)은 아마도 (퇴각하는) 적군(산헤립의 군대)의 모습을 지켜 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36:22, Gray, Leupold). 본문과 관련되는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학자들간에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사실 여기서 제시되는 주장들은 기껏해야 개연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본문의 상황이 B.C. 701년에 있었던 앗수르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당시 산헤립은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양의 공물을 받고 그의 군대를 철수시켰다(왕하 18:14-16).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자세한 사항에 대하여는 36,37장;왕하 18장을 참조하라.

=====22:2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 예루살렘 성읍을 떠들석하게 만든 이 소동은 기쁨과 안도감에서 촉발된 것이다. 백성들은 퇴각하는 적군을 바라보면서 모든 위협이 사라진 양, 자만하며 허랑 방탕한 환락에 도취되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전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즐거워하다'(* , 알리자)는 말은 헛된 자만에서 분출되는 득의 양양한 기쁨을 나타낸다(습 2:15, Delitzch).

=====22:3
너희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결박을 당하였도다 - 백성들을 지켜야 할 관원들이 오히려 제 몸을 보전히기 위하여 활도 팽개치고 도망하다가 포로가 되어 결박을 당한다. 명예와 용기가 자취를 감추고 수치와 비겁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것이 이상을 상실한 백성들의 결국이다. '활을 버리고'(* , 미케쉐트)는 직역하면 '활로부터'이니, 그 의미는 '활을 쏴보지도 못하고' 혹은 '아예 저항을 포기하고'이다. 유다의 지도자들에 관한 선지자의 부정적인 시선은 1:23;3:2, 3;5:13;7:2;28:7, 14;29:15 등에도 나와있다.

=====22:4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 예루살렘의 미래가 이러하므로 선지자는 기쁨으로 환호하는 성읍의 한 가운데서 홀로 눈물을 흘린다. 그는 어떠한 위로도 거부한채 실컷 울기만을 소원한다. 이상을 결여한 시대에 선지자는 얼마나 특이하고 외로운 존재인지! 그는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깨어 어둠을 응시하며(21:11,12), 모두가 기쁨에 들떠 분요할 때 홀로 슬픔에 잠긴다. 그는 백성을 향하여 선포하는 자이며, 동시에 백성과 그 운명을 함께 나누자는 자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눈물은 백성의 고난에 참예하려는 그의 애끊는 가슴에서 흘러 내리는 것이다.

=====22:5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로다 - 직역하면 '성벽을 무너뜨림과 산악에 대하여 부르짖음(* ,쇼아)이로다'이다. 두 소리가 들린다. 먼저 들리는 소리는 적군의 공격을 받아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요, 그와 때를 같이해서 살려달라는 백성들의 비명소리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서 메아리쳐 울린다. '쇼아'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이다(Alexander).

=====22:6
엘람 사람...기르 사람 - 예루살렘 성을 포위 공격하는 앗수르 군대 중에 주도적인 두 나라가 진술된다. '엘람'과 '기르'는 산헤립 당시에 이미 거대한 앗수르 제국의 한 주(속국)로 편입되었다. '엘람'은 바벨론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21:2),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 '기르'는 코카서스에서 발원하여 카스피해로 유입되는 큐로스 강에 근접한 지방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경에서 그곳은 '아람 사람의 기원지'(암 9:7)로, '아람 사람이 포로로 사로잡혀온 곳'(엄 1:5)으로, 또는 디글랏 빌레셀이 다메섹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킨 장소(왕하 16:9)로 언급되고 있다. '엘람'과 '기르'는 여기서 각각 바사와 메대 대신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Alexander). 이 두 나라로 대표되는 앗수르 군대의 위용은 곧 궁사들과 전차 부대와 기병대와 보병대로 구성된다.

=====22:7
병거는...정렬되었도다 -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마다 적들의 병거가 가득하고, 성문 앞에는 마병이 정렬해 있는 일촉 즉발(一觸卽發)의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다고 아니할 수 없다.

=====22:8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 직역하면 '그가 유다의 베일(* ,마사크)을 벗기매'이다. '마사크'는 사람의 눈을 가려 보지 못하도록 하는 무엇을 뜻하는데(출 26:36;민 4:5;삼하 17:19;시 105:39;고후 3:15, 16), 여기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베일로 해석함이 가장 무난하다(Alexander, Leupold).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우쳐 주심으로 백성들은 그제서야 자기들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이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회개하도록 하는 데까지는 이르게 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병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22:9
아래 못의 물도 모으며 - 포위당했을 때를 대비하여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사전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아래 못'은 시온 산 서쪽 맞은편 힌놈 골짜기에 아직도 남아 있는 저수지를 가리키는 듯하다.

=====22:10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며 - 성읍 내의 가옥을 계수함은 그것을 헐어내기 위함이요, 그것을 헐어냄은 성벽을 견고케 하는 데 필요한 건축 재료를 얻기 위함이다(9절;렘 33:4).

=====22:11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존경하지 아니 하였느리라 - 선지자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백성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행위의 이면에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이 없음을 질책하는 것이다. '앙망하다'와 '존경하다'는 히브리어로 '바라보다'(의지하다)는 뜻이다. '이 일을 하신 자'(* ,오세야)와 '이 일을 경영하신 자'(* ,요체라)는 문자적으로는 각각 '그것을 만드신 자'와 '그것을 빚으신 자'인데, 이는 유다 앞에 놓인 위기를 조성하신 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께 돌아옴이 없이는 그들이 어떤 자구책을 강구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22:12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 예루살렘 성읍 앞에서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위기 상황들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경고요, 부르심이었다. 이것은 백성들이 특별히 깨닫기 어려운 것도 아니며, 올바른 지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능히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통고하며 애호함'은 가슴을 치고 우는 것이니, 하나님을 거스려 범죄하였음을 뉘우치는 행위이다.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띰'은 회개의 외적 증거로서 동방에서 널리 시행되어 온 관습이었다(15:2,3 참조). '굵은 베'(* ,사크)는 슬픔의 날에 입는 굵은 삼베옷을 가리킨다(3:24;창 37:34;에 4:1;욘 3:6).

=====22:13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 그러나 회개에의 기대는 깨어졌다. 백성들은 미래의 재난 앞에서 찰나적인 쾌락으로 일관하였다. 니느웨가 보인 반응과 비교해 보라(욘 3:6-9). 그들의 행위는 미래를 상실한 데서 오는 자기 파멸적 경향성일 수도 있고, 또는 '선지자가 내일 죽는다고 하니 그 말을 존중해주는 의미에서라도 오늘만큼은 실컷 즐기며 놀자'는 조롱의 표현일 수도 있다. 내일은 없으며 따라서 인생에는 영원한 것도, 가치있는 것도 없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은 먹고 마시는 쾌락의 한 순간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의 눈에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며 자기 부정과 희생의 길을 걸어 가는 신앙인의 삶은 얼마나 기이하고 또 어리석게 보일 것인가(고전 15:19,32)!=====22:14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 회개하기를 거부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절대로 맛볼 수 없음을 엄숙히 선고하는 말이다. '속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파르'(* )는 본디 '덮다', '가리다'는 뜻이다. 구약 시대에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뿌려진 황소와 염소의 피는 백성들의 죄를 없이 하지 못하고 다만 일시적으로 가리울 뿐이었으므로 해마다 반복될 필요가 있었다(히 10:3,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이 같은 필요가 소멸되게 된 것이다.

=====22:15
그 국고(國庫)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 - 직역하면 ' 이 국고 맡은 자(* , 하소켄 하제), 그 집 위에(* - ,알-하바이트) 있는 셉나'이다. 셉나의 직위가 소개된다. 그는 '집 위에 있는 사람', 즉 왕궁을 다스리는 궁내 대신이다(창 39:4;44:1, 4;왕상 4:6;18:3;왕하 15:5 참조).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왕을 가까이 하는 사람(* , 소켄)이라 불렀다(Lange). '소켄'은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며 그 여성형인 '소케네트'(* )가 다윗 왕을 수종든 젊은 여자 아비삭에게 적용되었다(왕상 1:2, 4). 그 앞에 붙은 지시 대명사 '이'(this)라는 말 속에 경멸적인 어감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셉나'란 이름 앞에 '...의 아들'이라는 소개가 생략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22:16
높은 곳에...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 2인칭에서 3인칭으로 전환된다. 셉나의 헛된 야망의 높이를 상징하는 '높은 곳'은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대하 32:33)이란 말에서 보여진 것처럼 열왕들의 묘실을 기리킨다. 이들 무덤들은 예루삼렘 주변 산들의 경사진 곳에 바위를 뚫어 만들었는데 이는 침해를 방지하고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Gray).

=====22:17,18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속박하고...던질 것이라. 그러나 예루살렘 높은곳에 왕들처럼 묻히고자 하는 셉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는 단단히 속박된 채로 공처럼 말려져 광막한 지경에 던져질 것이다.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거기 있으리라 - 원문상 '그 곳'(* , 솨마)이 2번 쓰여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의미상으로 16절의 '여기'와 대조된다. 후자가 고귀한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면, 전자는 수치스러운 이국 땅을 뜻한다. 이국 땅에서 최후를 맞이함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불행으로 간주되었다(암 7:17, Leupold). 셉나의 영광은 곧 왕궁의 부끄러움이다. 그 같은 인물을 등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왕궁은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영달을 좇아가면 욕과 멸시가 그 뒤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이치이다(23:9).

=====22:19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고 - 본문은 다음절에서 엘리아김의 등장을 말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셉나는 서기관으로 강등되었으며(36:3), 그 자리를 엘리아김이 차지했다.

=====22:20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 엘리야김은 36:3에서 셉나와 함께 다시 언급된다. 그 이름 앞에 '내 종'이란 수식어를 첨가한 것은 그가 여호와의 충실한 종복으로서(20:3;삼하 3:18;암 3:7) 셉나와 대조적인 인물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Alexander).

=====22:21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힘있게 하고 - '옷'은 사람의 신분과 권세를 나타낸다. '예복'(* , 케토네트)과 그 위에 두른 '띠'(* ,아브네트)는 취임식 때 입는 관복을 가리킬 것이다(출 28:4,39;레 8:7, 13).

=====22:22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 '다윗 집'은 유다 왕궁이다.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둔다'는 말은 위정자의 책임의 무거움을 강조하는 비유적 표현인데 무겁고 긴 열쇠를 어깨에 두러메었던 고대의 풍습이 반영되고있다(9:6). 열쇠를 가진 자는 집 안의 출입을 비롯해서 모든 살림 살이를 관장해야 했다. 이 열쇠는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자에게 주어졌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했을 때도 이와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다(마 16:19).

=====22:23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 새로이 공직에 취임한 엘리아김의 위치가 확고 부동할 것을 선지자는 두가지로 표현한다. 첫째, 국가에 관한 한, 그는 단단한 곳에 박힌 목처럼 흔들림이 없이 견고할 것이다(슥 10:4 참조). 둘째, 가문에 관한 한, 그는 그 아비 집에서 온 가족이 의지하는 보좌 같이 될 것이다. 즉, 영광이 될 것이다.

=====22:24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항아리 까지리라 - 그 가문에 속한 모든 이들이 견고한 못 같은 엘리아김에게 의지함을 말한다. '후손과 족속'(* , 하체에차임웨하츠피오트)은 대립적 의미-'아들과 딸'(성의 구분), '아들과 손자'(세대 구분), '고귀한 자와 천한 자'(계급 부분)-로 이해된다(Alexander).

=====22:25
본절은 해석자들에게 큰 어려움을 야기시킨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엘리아김이 친족을 등용하여 족벌 정치를 행사하다가(24절), 그로 인하여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25절)는 해석을 취한다. 그러나 앞에서 엘리아김의 좋은 면을 이야기하다가 돌연 그에 대한 비난과 비극적 최후를 말한다는 것은 매우 납득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몇몇 주석가들은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24절을 엘리아김에게, 본절을 셉나에게 적용하는 것이다(Calvin, Umbereit). 그러나 이 경우에 23, 24절에서 엘리아김을 가리킨 못이 어째서 돌연 셉나로 바뀌어야 하는지 그 까닭이 분명치 않다. 따라서 문맥에 비추어 부자연스러운 감은 있지만 앞의 해석을 받아들인다.


유다의 주변 지역에 위치한 열국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던 선지
자는 본장에서 갑자기 여호와의 언약의 당사자인 다윗의 집 유다를 향한 심판의 메시
지를 발한다. 그런데 저자는 본 예언의 표제에 있어서 '예루살렘에 관한 경고'라는 말
대신에 '이상(異像) 골짜기(the valley of vision)에 관한 경고'라는 표현으로 사용하
고 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이 지형적으로 볼 때 남동쪽으로는 기드론(kidron) 골짜기
와 남서쪽 으로는 힌놈(Hinnom) 골짜기에 의해 둘러 싸여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선
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우매한 예루살렘이 임박한 멸망
앞에서도 전혀 회개하지 못하고 인간적 안락에 빠져 있는 상태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
다.
그런데 예루살렘(유다)을 향한 심판 예언이 이스라엘의 근접 국가들에 대한 심판
예언(14 : 28-17장)이자 원방의 나라들에 대한 심판 예언(18-21장)보다 후에 나타나는
것을 볼 때-물론 두로를 향한 심판 예언이 더 뒤에 나타나긴 하지만-하나님의 관심의
주대상이 먼저 이스라엘 주변국들에 대해 언급한 후 마지막에 이르러 유다와 이스라엘
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집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본장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본
예언의 연대를 대략 B.C. 701년경으로 추정한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왕하 18장에
의하여 살펴보면, 그때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 많은 공물을 요
구하던 때였다. 그는 유다로부터 조공을 약속받고 잠시 군대를 철수시켰으나 다시 군
사적 위협을 해왔다. 본장은 바로 이러한 위협(36, 37장) 속에서 선포된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앗수르와 그 연합군의 침입이 본장에 예언된 대로 역사적으
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이 예언은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회개할 때 예
언된 심판을 철회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고자 하신다. 그러나 비록 이 예언
이 실제로 성취되지는 않았으나 폐기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불신과 회개치
않음을 인해 장차 바벧론에 의한 더 큰 심판을 내리신다. 본 예언은 본래의 목적대로
성취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을 주제로 하고 있는 본 장은 (1) 결박당한 예루
살렘의 거민들(1-4절) (2) 회개하지 않는 유다의 거민들(5-14절) (3)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예언(15-25절)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별히 본장은 24, 25절을 제외하고
는 전체가 시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을 몇 단락으
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결박당한 예루살렘의 거민들(22 : 1-4)
열국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던 이사야는 이제 본 단락에서 예루살렘의 교만을 언급
하고 멸망을 선언한다. 예루살렘은 임박한 진노를 짐작하지 못하고 전쟁에 대한 자신
감에 도취되어 있었다(2절). 이러한 교만은 급기야 멸망과 수치로 드러날 것이다(시
119 : 21 ; 잠 6 : 16, 17 ; 약 4 : 6).
이러한 사실을 좀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이사야는 돈호법(頓呼法)을 사용하여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라고 외친다. 이는 예루살렘 거민의 관심을
모으며, 그 도성의 즐거웠던 과거와 비참한 현재를 비교하는 것이다. 특히 현재의 비
참성은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하였던 유다의 관원들과 거민들이 모두 잡혀 결박
당한 채 끌려가는 광경을 통해 묘사되어 있다(3절 ; 왕하 25 : 1-7 ; 렘 39 : 4-7).
이러한 비참한 광경은 선지자로 하여금 슬피 통곡하게 만들었으며, 유다의 패멸(敗滅)
함을 인한 어떤 위로로도 그를 위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의 눈물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예루살렘 거민들의 종말을 목격
함으로써 더욱 죄의 심각성을 절감하게 된다.

2. 회개하지 않는 유다의 거민들(22 : 5-14)
본 단락은 예루살렘에 대한 적군의 대대적인 공격 준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회
개하지 않으며 오직 전쟁 준비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다의 패역함이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유다는 더 큰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
키게 된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적군의 공격 준비(5-7절), (2) 유다의 전쟁 준비(8-11절),
(3) 회개하지 않는 유다(12-14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각 부분의 핵심 사항과
영적 교훈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적군의 대대적인 공격 준비(5-7절) : 예루살렘을 치러 온 앗수르군 속에는 엘
람인과 기르인도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활, 전통, 방패로 무장했고 병거와 마병까지
있었다. 그들은 공격 준비를 다 끝내고 도열해 있었는데, 병거는 온 골짜기를 가득 채
울 만큼 많았고 마병도 성문 앞에서 장엄하게 정렬해 있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입힐
피해는 맨 앞절(5절)에 결론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즉 예루살렘의 성벽은 그들에 의해
무너뜨림을 당하고, 그 거민의 부르짖음은 산과 골짜기에 메아리쳐 사무칠 것이다, 특
히 그날은 분요(panic), 밟힘(subjugation), 혼란(confusion)의 날로 묘사되어 있다.
선지자는 비슷한 의미의 세 단어들을 반복하여 의미를 중첩시키고 있다. 특히 여기에
는 각 단어 '메후마'(* ), '메부사'(* ), '메부카'(* )
등이 모두 '메'(* )라는 두운과 '우'(* )와 '아'(* )라는 요운과 각운을 지니고 있
어서 그 의미와 뉘앙스가 더 한층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사야는 탁월한 언어 감각을
활용하여 적군의 공격으로 인한 폐허의 상태를 실감 있게 나타내고 있다.
(2) 유다의 전쟁 준비(8-11절) : 애굽을 의지하며 나태함 가운데 있던 유다는 하나
님께서 무분별의 가리개를 그 눈에서 벗기신 후에야 비로소 현실 상황의 심각성을 깨
닫고 전쟁 준비를 시작한다. 그들은 여호와를 의지하려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지혜와
힘만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인간적 노력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까) 솔로몬이 건축했던 병기 창고(왕상 7 : 2-5 ; 10 : 17, 21참고)
를 열어 무기를 점검하고, (다) 예루살렘의 가옥에 사용된 건축 자재를 빼다가 다윗
성의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따) 수로를 만들고 저수지를 파서 식수를 확보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이 비록 인간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철저한 준비를 했지만, 회개
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사실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 무장이야말로 유다의 승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유다 백성은 선
지자의 말대로 그 심판을 계획하신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았고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
므로 유다는 멸망을 향하여 맹렬한 속도로 치닫게 된다.
(3) 회개하지 않는 유다(12-14절) : 선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한 유다
백성을 향해 '통곡하고 울며 머리털을 뜯고 굵은 베를 띠라'는 하나님의 회개 명령을
전한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더욱 악해져서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연락을 즐기며,
소와 양을 잡아 그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 또한 그 입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반
항의 뜻을 담아 "내일 죽으리니 오늘 마시자"는 망언을 일삼는다(13절). 혹시 그들은
자신들의 전쟁 준비로만으로도 적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교만한 확신에 차 있었는지
모른다. 그 결과 유다를 향한 여호와의 심판 작정은 더욱 굳어져 하나님은 선지자의
귀에 '그들의 죄악은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진노의 말씀을 전하신다. 하나
님에 대한 철저한 불신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된다(롬 2 : 5).

3.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예언(22 : 15-25)
유다 백성 전체에 대한 심판 예언에 이어 본 단락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가득찬 탐욕적인 지도자 셉나에 대한 개인적인 심판이 예언되고 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헹을 때 협상의 책임을 담당하기도 했던 셉나(36 : 3, 11, 22 ; 왕하 18 : 18, 26, 37 ; 19 : 2)는 탐욕을 일삼는 유다의 지도자(국고(國庫)를 맡은 궁내 대신)로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유다 왕들이 묻혀 있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 위에 자신의 묘를 팠다. 16절에서 '여기'라는 말이 세번이나 되풀이되고 있는 곳은 셉나를 향한 대단한 힐난의 말이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공같이 단단히 말아 싸서 광야에 멀리 던지므로 결국 영광스럽게 타고 다니던 수레와 함께 수치스럽게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18절). 여기서 수치스런 그의 죽음과 영광의 수레는 묘한 대조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를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주석가들은 셉나를 애굽과의 동맹을 주장한 친애굽파였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반즈(Barnes)는 아랍 사람일 가능성까지 언급한다. 하여튼 그는 유다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고, 더욱이 유다 왕실의 묘실이 있는 시온의 동쪽 경사진 곳에 묻힐 자격은 더욱 없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관직에서 쫓아내며 그 지위를 낮추실 것에 대한 예언을 전한다.
이제 셉나를 강등시킨 하나님은 그 자리에 새 인물을 임명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셉나와 앗수르 왕 산헤립과의 협상에 참가했던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내 종'이라고 부르셨는데,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충성스러운 인물로 다스리며 보호하게 하시며, '다윗의 집 열쇠'(마 16 : 19 ; 계 3 : 7 참고)를 주어 모든 결정권을 갖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영광을 걸머질 잘 박힌 못 같은 그도 삭아 부러지는 못같이 되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엘리아김은 후손과 친척들에 의한 족벌 정치를 함으로써 영광에서 탈락하게 된다(24절).
이 부분과 관련하여 많은 비평가들은 엘리아김의 떨어짐을 산문체로 기술하고 있는 24, 25절에 대해 후대인의 첨가물로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 인물에 대한 긍정적 예언의 바로 뒤를 이어 그 인물에 대한 부정적 예언이 나타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긍정적 묘사의 바로 뒤를 이어 부정적 묘사가 나타나는 반전적인 표현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선지자는 신실했던 엘리아김의 타락을 부각시킴으로써 유다의 총체적 부패를 실감있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본 단락에서 한 개인을 향하여 탄핵성 예언을 함으로써 유다 전체의 미래에 대한 운명을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영달(榮達)에만 관심이 있었던 셉나와 족벌 정치를 야기시켰던 엘리아김 개인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모두 부정적인 결말로 끝을 맺고 있는 사실은 예루살렘이 바벧론에 의해 정복당한 후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본장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위험에 처했을 때 오직 하나님을 찻고 불러야 하며(시 50 : 15)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만을 의뢰하고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함을 배울 수 있다(잠 3 : 5, 6). 더욱이 그 위험이 자신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 차원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성도는 어떤 일을 직면할 때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된 회개(요일 1 : 9)를 통하여 하나님의 죄 용서와 도우심, 새로운 인도를 구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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