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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 '해변광야'는 바벨론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이다(9절) 아라비아 사막의 남단 대평원에 위치한 초기의 바벨론은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댐을 쌓기 전까지는 , 아비데누스(Abydenus)가 '마치 바다 처럼 보인다'고 말했을 정도로, 범람하는 유브라데 강물에 자주 침수되었다(Alexander). 그러나 '해변 광야'란 상징적인 이름에는 물에 잠겨 있는 바벨론의 지형 조건만이 아니라, 그 모습을 통하여 선지자가 미리 내다본 바, 바벨론의 궁극적인 운명의 불길한 전조까지 내포되어 있다(14:23;렘 51:13, Delitzsch). 그것이 선지자의 환상 속에서 점점 구체화된다. 적병이...남방 회리바람같이 몰려 왔도다. 바벨론에 임할 재난은 광대한 아바아 사막에서 급속도로 불어오는 태풍에 비유된다. 이 태풍의 무서움에 대하여는 욥 1:19;37:9;렘 4:11;13:24;호 13:15;슥 9:14 등을 참조하라. 광야 곧 두려운 땅에서 오리라고 예언된 적병은 다음절에 나오는 엘람과 메대인들을 가리킨다.

=====21:2
혹독한 묵시 - 이는 '묵시'(* ,하주트)의 내용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무겁다(* ,카솨)는 뜻이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 옛 주석가들은 본문을 포악한 바벨론 군주들에 대한 묘사로 본다. 이에 따르면, 바벨론이 왜 멸망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선지자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본문을 바벨론의 침략자들에게 적용시킨다. 두 가지가 다 문법적으로 가능하나 후자를 취한다(Alexander).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 '올라가고 에워싸라'는 말은 바벨론에 대한 공격 명령이다. 이 명령은 엘람과 메대에게 주어졌다. '엘람'은 현재의 이란 남부에 해당하며 바사 제국을 가리킨다. '엘람'은 히브리인들에게 잘 알려진 반면(창 14:1), '바사'는 그때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바사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엘람은 후에 바사에게 합병되었다. 바사와 메대는 B.C. 539년 고레스 왕의 주도하에 바벨론을 정복하였다. '메대'에 대하여는 13;17 주석을 참조하라. 이사야 선지자 당대에 엘람과 메대가 바벨론의 연합국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묵시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이러한 혜안(蕙眼)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영감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21:3,4
전절의 '혹독한 묵시'는 선지자에게 두 가지 신체적인 반응, 즉 극심한 요통(3절)과 마음의 진동(4절)을 야기시켰다. 포로기의 선지자들이 바벨론의 몰락을 환호한 데 비하면, 본문에 묘사된 선지자의 반응은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 카이저(Kaiser)는, 이 같은 표현은 선지자들이 자기 계시의 엄중함을 부가시키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수사학적인 기교라교 설명한다(15:5;16:9, 11;겔 21:6, 7;단 10:2, 3, Oswalt). 반면에 칼빈(Calvin)은 자기가 본 것을 백성들에게 생동감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자신을 바벨론과 동일시하여 마치 배우처럼 자신을 입을 통해 바벨론의 참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을 취하든지, 묵시의 혹독함이 간접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 본문의 히브리어 '할할라'(* )는 '춤추다', '꼬이다'는 뜻의 '훌'(* )에서 파생된 명사로, 몸부림치는 고통을 의미한다(겔 30:4,9). 선지자는 이 고통을 '임산한 여인의 고통'(* ,치림)으로 비견한다(13:8).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 '희망의 서광'(네쉐프 히쉐키,* )은 직역하면 '나의 기쁨의 저녁'이니, 한 날의 근심을 벗고 안식하리라고 기대되었던 저녁 시간조차 두려움의 때로 변한다는 말이다.

=====21:5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먹고 마시도다 - 포위 공격을 당하리라고 선언된(2절) 바벨론의 자세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 묘사된 상황은 바벨론의 대연회 장면이다. (적군의 내침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들은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신다. 루짜토(Luzzatto)는 본절을 대립적으로 이해한다 : '그들은 식탁을 베푼다, 파수꾼을 세워야 함에도;그들은 먹고 마신다,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발라야 함에도,' '파숫꾼을 세우고'(* ,차포하차피트)는 언뜻 봐서는 바벨론인들의 허랑 방탕한 연회 모습을 기록하는 있는 본문에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인다. 이 때문에 몇몇 주석가들은 이것을 '융단을 깔고'(sperad the carpets)로 번역한다(Hitzig, Knobel, Leupold, Gray, Alexander). 그러나 '차파'(* )란 '감시하다'는 뜻이며, 더욱이 이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파수꾼을 배치하는 최소한의 예방 조치도 없이 연회를 베푼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본래대로 해석함이 옳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 '그들은 파수꾼을 세우는 한 가지 예방 조치만으로도 모든 준비를 다했다는 듯이 안심하고서 아무 걱정없이 연회에 빠져든다.
' 너희 방백들아 일아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 전쟁 준비를 서두르라는 말이다. 방패에 기름을 바름은 적군이 내리치는 칼날이 미끄러져 빗겨가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에 앞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몇 가지 선행 조처들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이 시간까지도 방패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는 것은 저들의 태만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본문의 전체적인 상황은 바벨론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는 단5장과 흡사하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벧사살은 귀인 일천 명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며 놀다가 고레스의 군대에 의해 몰살당하였다.

=====21:6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 - 다가오는 메대-바사 군대와 바벨론의 멸망이 선지자 자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파숫군'이라는 제 삼자의 시가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할진데, 이 파수꾼은 선지자에 의해서 객관화된 또 다른 그의 모습이다. 파수꾼의 표상은 메시지를 보다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다.

=====21:7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약대 떼 - 파수꾼이 주목해서 봐야 할 내용이 소개된다. 기병대는 고레스가 자랑하는 바사의 주력 부대였다. 그 외 나귀 떼와 약대 떼는 군수품과 식량 운반 등에 활용된 듯하다. 그러나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고레스가 리다아인들(Lydians)을 물리칠 때는 나귀 떼를 이용했다고 한다(Gray). 이로 보건대, 나귀떼와 약대 떼는 운송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전쟁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크세노폰(Xenophon)은 바사의 군대가 둘씩 짝을지어 행군했음을 알려준다(Alexander).

=====21:8
파숫군이 사자같이 부르짖기를 -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외친다-사자-파수대 위에서'이다. 대분분의 주석가들은 '사자'(* , 아르예)가 파수꾼의 보고 내용이 아니라 보고하는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좋는 병행구는 계 10:3의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에서 발견된다. 파수꾼의 보고는 먼저 자신이 성실과 끈기를 다하여 임무에 임했다는 것(8b절)과 바벨론에서 벌어진 전쟁의 결과(9절)에 대한 것이다.

=====21:9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 6절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던 사태의 추이가 마침내 '바벨론이 함락되었다'는 파수꾼의 환호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것은 고레스 왕이 주도하는 메대-바사 군대에 의해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선언하는 말인데, 영적인 의미에서 그 참된 성취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8:2)라고 외치는 하늘 천사들의 합창에서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바벨론과 함께 그 우상들의 몰락이 언급된 것은 비록 이일이 직접적으로는 고레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이다.

=====21:10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 바벨론에 대한 경고의 마지막에서 예언의 목적이 제시된다. 그것은 바벨론에 의해 예속되어 고달픔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전하는 큰 기쁨의 소식은 바벨론이 몰락했다는 것이다.
'나의 마당의 곡식'(벤-가르니, * - )은 문자적으로는 '나의 마당의 아들'인데, '아들'은 어떤 물건에 소속됨(관련성)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Alexander). 이 말은 '나의 타작한 것'과 동의어다. 마치 농부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곡식을 타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바벨론이라는 징계 수단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타작하였으나 그 괴로움의 시간은 이제 곧 끝날 것이다(렘 51:33;미 4:12).

=====21:11
두마에 관한 경고라 - '침묵', '정적', '쓸쓸함'을 뜻하는 '두마'(* )는 에돔의 변형으로서, 에돔의 미래 운명을 상징하는 이름이다(시 94:17;115:17, Vitringa, Rosenmuller, Delitzch, Knobel). 어떤 이들은 '두마'가 이스마엘을 조상으로 하는 아랍 족속의 명칭(창 25:14;대상 1:30) 혹은 오늘날 '두마엘얀딜'(Dumah Eljandil)이라 불리우는 아라비아 북부의 한 지역이라고도 한다(Geseniuss, Hitzig, Michaelis, Umbreit, Ewald). 그러나 뒤에 나오는 '세일'(Seir) 자체가 에서의 자손 혹은 에돔인들의 거주 지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Alexander).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 파수꾼(선지자)을 부르는 소리는 사해의 남쪽에서 엘란 만(Elantic gullf)에 미치는 높은 산악 지대인 세일(창 14:6;32:3;36:8, 9)에서 들린다.
파수꾼이여 - 본무의 '파숫군'(* , 쇼메르)은 6절의 '파숫군'(* ,메차페)과 같지 않다. 후자가 주로 적의 침략으로부터 성(城)을 방비하는 일을 한다면, 전자는 밤에 깨어 성을 지키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62:6;시 127:1;130:6;아 5:7). 참다운 의미에서 선지자는 세계의 밤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는 온 세상이 잠에 취해 있을 때, 홀로 깨어 어둠을 응시한다. 깨어 있는 자로서, 감시하는 자로서, 어둠의 무게를 두 어깨에 짊어진 자로서, 그는 세계의 운명에 대해 말할 것을 강요받는다.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 '밤'은 재난의 시간이다. 이 밤의 지겨움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어린 물음이 새어 나온다. 그 물음은 이렇게 풀어 말할 수 있다:'우리는 지금 밤의 어느 지점에 있는가? 밤이 얼마나 남았는가? 이 고난의 밤은 언제나 끝나는가?' 반복된 물음은 그들의 답답함의 정도를 암시해준다.

=====21:12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 파수꾼의 대답은 간결하고 모호하다. 탈굼역(Targum)은 이 말을 '의로운 자에게는 보상의 아침이 밝을 것이나 불의한 자에게는 형벌의 밤이 임할 것이다'로 해석한다. 노벧(Knobel)은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의 아침이 돋을 것이나, 에돔인들에게는 고난의 밤이 계속되라라'로 해석한다. 반면에 그로티우스(Grotius)는 '비록 아침의 시간이 올지라도 영적인 흑암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좋은 해석은 아침과 밤의 순환이 여기서 말해지고 있다고 보는 해석이다(Gesenius). 밤이 재난의 사건이라면, 아침은 구원의 시간이다. 비록 구원의 때가 바벨론의 멸망과 더불어 도래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어둠에 삼킴을 당할 것이니, 즉 바사제국에 의해 그들은 지배될 것이다(Delitzsch).

=====21:13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 바벨론의 파멸은 에돔뿐만 아니라 인접한 아리비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라비아'(* ,아라브)라는 이름에는, '해변광야', '두마'와 같이 그 나라의 운명을 암시하는 '저녁'이라는 상징적 뜻이 담겨 있다. 그의 구성은 대단히 기교적이다. 세일 산지를 뒤덮은 어둠(12절)은 아라비아에도 어어져 뜨거운 태양 아래 대상들이 자유로이 왕래하던 나라 아라비아는 이름 그대로 저녁의 땅이 될 것이다. 드단 대상이여 너희가...유숙하리라 - 선지자의 경고는 먼저 사막을 횡단하는 드단의 대상들에게 향한다. 이들은 에돔과 이웃한 족속들(창 10:7;25:3;렘 49:8;겔 25:13;27:20)로 낙타를 이끌고 두로를 오가는 원거리 상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이 평상시에 통행하던 길에서 쫓겨나 수풀에서 은신처를 찾을 것이라는 말은 심각한 전쟁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요 아라비아 땅이 적에게 유린될 것을 시사한다.

=====21:14
데마 땅의 거민들아...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 선지자의 다음말은 드단 대상들이 숲속으로 도망한 곳 근처에 있는 데마(아라비아 북부에 있음) 주민들에게 주어진다. 도피자들에게 물과 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동정심을 표시하는 행위이다(신 23:4). 이 말은 데마 주민들의 동정심이나 또는 아라비아 땅의 나머지에는 그래도 몸을 쉴 곳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피자들의 비참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21:15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도망하였음이니라 - 드단 대상들이 왜 그토록 서둘러 몸을 피해야 했는지 그 이유가 설명된다. 한편, 본문은 '앞에서'(* , 미프네)라는 말을 4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칼날 앞에서...,뺀 칼 앞에서, 당긴 활앞에서, 전쟁의 무거움 앞에서'(원문)-, 이는 13절에 암시된 전쟁의 참사을 묘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21:16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다 쇠멸하리니 - '게달'(* ,카다르)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인데(창 25:13), 여기서는 아라비아 유목 민족을 대표하는 뜻으로 쓰였다(42:11;60:7;시 120:5;렘 2:10;49:28;겔 27:21). 지금도 유대 랍비들은 아라비아어를 '게달의 언어'라고 부른다(Alexander). 두로와의 상거래를 통하여 축적된 많은 부(富)와 풍부한 가축들, 그리고 활달한 용사들로 넘치는 게달의 '영광'(* , 케보드)은 가까운 장래에 전쟁의 '무거움'(* , 코베드)에 눌려 붕괴되고 말 것이다(Oswalt). '일 년 내에'란 말은 '품군의 정한 기한같이' 예정된 파멸의 시간이 결코 늦춰지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21:17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 그 조상 이스마엘 이래(창 21:20) 게달 자손들은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시 120:4 참조). 그러나 전쟁의 참화를 겪은 뒤에 저들의 수는 현저히 줄어 극소수만 남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경고는 아라비아를 징벌하시는 분이 결국 하나님이시며 그는 무한한 능력으로써 선지자의 입을 통해 예언된 이 모든 일을 기필코 이루실 것임을 확인, 공표하는 말로 끝맺는다.


이스라엘의 주변국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13-23장의 예언은 크게 두 부분으
로 구조적 병행을 이루고 있다. 즉 전반부(13-20장)는 바벧론에서 시작하여 애굽에서
끝나는 예언 단락이며, 후반부(21-23장)는 바벧론에서 시작하여 두로에서 끝나는 예언
단락이다.
본장은 새로운 예언 단락의 시작으로서 바벧론과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을 선
포한다. 그중에서도 바벧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가장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바벧론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예언은 이미 13, 14장에서 다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본장에 또다시 언급된 사실은 바벧론의 멸망에 관한 예언의 주제가 본서 예언의 진
행상 특별히 중요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바벧론의 멸망과 직접적으
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바벧론의 멸망에 관한 선지자의 예언은 다른 나라의
심판에 관한 예언보다 더욱 빈번히,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본서의 후반부에
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등장에 대한 예언과 함께 바벧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45-47장 ; 렘 29장). 본장에도 비록 세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이 언
급되어 있지만 에돔과 아라비아의 경우는 바벧론의 멸망에 관련된 부차적인 언급에 불
과함으로 중심 주제는 역시 바벧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현대의 비평가들은 서두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는 표현의 특수성과 난해
성 등을 이유로 본장, 특히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1-10절) 부분에 대한 이사야의
저작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본장의 예언이 후대의 필사자들에 의해 손질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해변 광야'는 문맥적으로 볼 때 바벧론을 지칭하
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으며, 오히려 본장은 문체상 이사야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본장은 표현된 사상과 예언의 양식 모두가 철저히 이사야적이므로 본장이
이사야의 저작물이라는 전통적 믿음을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본장이 이사야의 저작이긴 하지만 그의 다른 예언들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여러 가지 면에서 난해성과 모호성, 불명료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 예로 본장에 예언된 세 나라의 멸망에 관한 심판의 동기가 특별히 나타나 있지 않
다는 것이다. 또한 본장에는 그 예언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역
사적 인물이나 사건 등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실마리가 없기 때문에 본장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어떤 시대, 어떤 사건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
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장에 나타난 바벧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경우, 많은 학자들
이 주장하듯이 B.C. 539년경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바벧론 정복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B.C. 710년경 앗수르 사르곤 2세의 바벧론 정복이나 뒤이어 행해진 B.C. 701년경의 산
헤립에 의한 정복을 의미하는지 확정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본장은 예언의 대상에 의해 (1) 바벧론에 대한 심판 예언(1-10절). (2) 에
돔에 대한 심판 예언 (11, 12절), (3)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13-17절) 등 세 단
락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장에 나타나 있는 세 개의 표제
들(1, 11, 13절)이 전체의 내용을 셋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확실히 알 수 있
다. 이제 각 예언 단락의 핵심적인 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벧론에 대한 심판 예언(21 : 1-10)
본 단락은 이스라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바벧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저
자는 유다의 열방을 혹독하게 괴롭혔던 바벧론이 자신의 행위대로 심판 받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엘람과 메대의 군사들이 약탈과 에워쌈을 위해 남방으로부터 회오리바
람처럼 무서운 기세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결과 선지자는 마치 해산하는 여인
이 느끼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고 큰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
다(3절 ; 단 10 : 10-12참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바벧론은 멸망이 임박하고 있음을 모르고 연회를 베풀고 허랑
방탕하게 먹고 마시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단 5 : 1-30을 보면 바벧론 벧사살 왕
도 약 천명의 귀족들과 함께 큰 잔치를 벌이다가 그날 밤 메대 사람 다리오에 의해 멸
망 당하였다. 잔치를 벌이던 바벧론 사람들은(렘 51 : 39) 갑자기 적군의 침입을 알리
며 전투를 준비하라는 외침을 듣게 되었다. 당시 군사들은 방패의 부식을 방지하며 내
려치는 칼날을 비껴나게 하기 위해 방패에 기름을 바름으로 전투를 준비했었다.
선지자는 바벧론을 정복하기 위해 오고 있는 적군의 두려움을 좀더 명확히 드러내
기 위해서 파수꾼의 삽화(episode)를 사용하고 있다. 즉, 파수꾼은 기병대(騎兵隊)가
짝을 이루어 오는 것과 군사들이 올라타 있거나 군수품둘과 식량을 나르는 나귀와 약
대의 떼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수꾼의 삽화는 빈스(Binns)의 말대로 바벧론
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된 일종의 무대 장치이다.
그런데 기병대가 짝을 이루어 오는 모습을 보았다는 파수꾼의 보고를 들은 여호와
는 마침내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벧론이여 그 신들의 새긴 형상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라는 이 심판의 예언의 결론에 해당하는 중대한 메시지를 선포하신
다. 이와 비슷한 양식의 바벧론의 멸망에 대한 선포가 신약의 계시록 18 : 2에서는 종
말론적 견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실 바벧론은 인류의 전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한 사단의 세력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타락한 바벧론에 대
한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선언하
는 것이다.

2. 에돔에 대한 심판 예언(21 : 11-12)
바벧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이 끝나자 바벧론의 멸망과 관련하여 에
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예언하게 된다. 이러한 에돔의 심판에 관한 예언은
다른 구약 선지서에도 많이 나타나 있는데(렘 49 : 7-22 ; 겔 25 : 12-14, 35장 ; 암
1 : 11, 12 ; 옵 1장 ; 말 1 : 2-5), 이는 에돔이 이스라엘과 혈통적 관계를 맺고 있
는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형제인 야곱의 자손들
에게 포학을 행했으며, 유다의 패망을 방관하고 즐거워했다(옵 1 : 10-12).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편, 바벧론의 멸망에 관한 전 단락의 표제에서처럼 "두마에 관한 경고라"고 기록
되어 있는 본 단락의 표제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는데, 여기 두마는 에돔에 대한
상징적인 명칭이다. 또한 '두마'는 침묵을 의미하는 말로 에돔이 심판의 결과 침묵하
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본 단락은 바벧론의 멸망과 에돔의 멸망이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세일에서 파수꾼을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더군
다나 예언의 내용이 짧고 모호해서 우리는 에돔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충분히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사야는 에돔이 처한 곤경이 언제나 끝날 것
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파수꾼의 답변을 통해 (1) 당분간 고통의 때가 계속될 것이
며, (2) 하나님께서 에돔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3.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21 : 13-17)
이제 예언의 대상은 바뀌어 본 단락에서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이 예언되고 있다.
바벧론을 파멸시킨 힘은 멀리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하며 여행하는 대상(隊商)들에게까
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선지자는 당시 두로까지 왕래하며 장사하던 에돔의 이웃(창
10 : 7 ; 25 : 3 ; 렘 49 : 8 ; 겔 25 : 13), 드단의 대상들(겔 27 : 20)에게 그들이
원래 통행했던 사막 지역에서 유숙하지 말고 보다 은밀한 숲속에서 유숙하라고 경고한
다. 또한 보다 안전한 장소로 북서 아라비아의 오아시스인 데마라는 지역이 제시되고
있으며, 그곳에서 데마의 거민들의 협조를 받아 잠시 파난하도록 권고한다. 왜냐하면
드디어 대상들이 침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이 심판의 결론을 선포한다. 즉, 일년 내에
게달(궁수라는 뜻) 자손이 멸망하여 그들 중 소수의 활을 가진 용사만이 남을 것이라
는 말씀이다(렘 49 : 28-33 참고). 게달 자손은 이스마엘의 12아들 중 둘째 아들의 후
손들인데, 넓게는 아라비아에 거하며 유목 생활을 하던 이스마엘의 후손들을 의미하고
있다. 선지자는 이 단락에서 지금까지 예언한 모든 말씀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의 말씀임을 밝힘으로 본 예언을 마감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깨어 있지 못하고 오히려 연락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자는 바벧론의 멸망 때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2) 하나님은 바벧론의 신들을 벌하시고 에돔과 아라비아 백성들까지 판단,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참신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다. (3) 그러므로 우 리 그리스도인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와 시대의 상황에 대한 바른 분멸력을 가지고 올바르게 생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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