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향하니라 - 이 말은 본서에 모두 다섯 번 나온다(1:1;2:13:1;37:21). 선지자가 자신의 신분을 암시하는 이 말은 본문에 덧붙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귀한 신분을 가진 선지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를 활보함은 세인들의 눈에 놀라움을 넘어서 의미 심장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Lange).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 '베(* 사크)는 애통하거나 회계하는 표시로 몸에 걸치는 의복의 일종(창 37:34;삼하 3:31;왕상 20:31;21:27;왕하 6:30;19:1)인데,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의 예복으로 여겨졌다(왕하 1:8;슥 13:4;마 3;4히 11:37). 이 옷을 바로 갖춰 입기 위해서는 허리에 띠를 둘러야 했다. 의복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던 동방에서는 이 옷(겉옷)을 벗는 자체만으로도 벌거벗은 것으로 간주되었다(삼하 6:20, Delitzsch). 속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더구나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것이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복하였다.
=====20:3
삼 년 동안 - 이 말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에 걸리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를 따르면, 그 의미는 선지자가 3년 동안 계속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했다는 뜻이 된다(Calvin, Lange, Delitzsch). 반면에 후자를 따르면, 선지자의 단한번의 기이한 행위가 3년 동안 예표와 기적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Jerome, Hitzig, Knobel, Alexander). 히브리어의 구문상 어느 하나를 확장하기는 어렵다. 다만 더위나 추위 등의 다양한 기상 여건 속에서도 선지자가 3년 내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닐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전달되어져야 할 표적과 기적이 그처럼 중대한 것이라면 단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미에서 전자를 지지한다. '삼 년'이라는 숫자는 아마도 앗수르 군대에 의해 아스돗이 포위된 기간 혹은 애굽이 멸망하기 직전의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 이는 전쟁 포로의 비참한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4절).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었느니라 - '예표와 기적'(* ,오트 우모페트)은 직역하면 '표적과 기사(혹은 징조)'이다(8:18;신 13:1, 2;28:46;29:3;34:11;시 135:9;렘32:20,21).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선지자의 행위를 예표와 징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미래에 있을 애굽과 구스의 불행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음절에서 그 의미가 제시된다.
=====20:4
이와 같이...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 이사야가 온몸으로 실연(實演)한 예언적 행위는 아스돗이 점령된 지 약 30년 후에 사실로 이루어졌다. 앗수르 왕 에살핫돈은 애굽을 공격하여 디르하가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멤치스를 점령했으며(B.C. 681년), 그의 아들 앗술바니팔에 의해 애굽은 재차 유린되었다(B.C. 669년). 나이의 노소를 불문하고 붙잡혀간 수많은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원문대로는 '애굽의 포로들과 구스의 추방된 자들')는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끌려가야 했으며, 심지어 엉덩이가 드러나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포로들의 복장에 대하여는 대하 28:15, 그리고 하부를 드러내는 치욕과 수치에 대하여는 3:17;겔 16:37;23:10,29을 참조하라.
=====20:5
그들이...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 여기서 '그들'은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던 유대인 및 팔레스틴 거민들을 가리킨다. 애굽과 구스의 포로됨의 소식은, 그들에게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안겨다 준다. 놀라움은 그토록 강대하게 보이던 애굽과 구스가 몰락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요, 부끄러움은 그런한 나라를 그들이 바라고(* ,마바트) 자랑했다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것이다. '마바트'(* )는 도움을 얻기 위하여 바라봄을 의미한다.
=====20:6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 전절의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그들 자신의 입으로 토로되어진다. '해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 )는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물'에 대조되는 의미에서 '물', '내륙'에 대조되는 의미에서 '해변', 그리고 '본토'에 대조되는 의미에서 '섬'이다. 여기서는 두 번째 뜻으로 쓰여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나라들을 가리킨다(23:2,6;습 2:5). 여기에 유다가 포함됨을 물론이다.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 하나님 대신 믿고 의지하던 모든 것이 끊어질 때 느껴지는 암울한 절망의 표현으로 본장은 마감된다(왕하 10:4 참조).
그러나 행간 속에 숨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던지는 선지자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왜 하나님으로 피난처를 삼지 않느냐?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느냐?
구스와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18-20장) 중 1부(18장)와 2부(19장)가 끝
나고 이제 본장에서는 마지막 3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전의 내용에
는 심판의 메시지가 비교적 완곡하게 나타나 있고 또한 심판의 메시지와 함께 구원의
메시지가 부분적으로 함께 나타나고 있지만, 본장에서는 오로지 앗수르의 군사적 침략
을 통한 수치스런 심판의 메시지만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성격상 본장은 19
: 17에 이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 단락(19 : 18-25)에서 언급된
바 애굽에 임할 영적 풍요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성취될 예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애굽에 임할 심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본장은 앗수르 최대의 정복 군주
중의 한 사람인 사르곤의 재위 기간(B.C. 722-706) 중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관계를
맺고 있다. 사르곤은 살만에셀의 후계자요, 산헤립의 아버지로 앗수르를 가장 견고하
게 세운 군주였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켰으며, 본장 초두
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반앗수르 동맹 세력의 본거지인 블레셋의 수도 아스돗을 점
령하였고(B.C. 713년경) 결국에는 블레셋을 지원했던 애굽과 구스까지도 정복하였다.
이와 같은 철저한 정복 사역에 대해 이사야는 미리 예언을 통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
다.
한편, 본장은 이전 예언의 시점과는 달리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기록되었다. 그
래서 많은 비평학자들이 본장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저작권을 부인한다. 그중 어떤
이들은 본장이 이사야의 제자들(8 : 16)에 의해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
다. 그러나 성경의 기자들이 자신을 가리킬 때에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일은 흔히
있던 일로서 대단히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본장에는 한 가지 특이한 예언 양식이 있다. 즉 이사야 선지자가 입을 통해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예언의 내용을 보인 다음, 그 행동에 담긴 의미를 말
로써 설명하는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사야는 애굽과 구스 백성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포로로 앗수르 왕 앞에 끌려갈 것을 풍자하여 3년간 속옷만을 입은 채 맨
발로 생활했다. 이러한 사실은 마치 상연 시간이 긴 한 편의 풍자극을 보는 것과 같
다. 선지자는 상징적인 행동을 통하여 더욱 생생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
다. 이렇게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말이 아닌 자신의 행동으로 예언 활동을
한 경우는 구약 선지자들에게서 가끔 발견할 수 있다(8 : 1-4 ; 왕상 11 : 29-31 : 렘
13 :1-11 ; 호 1-3장).
이러한 특징을 담고 있는 본장은 역사적 서술을 위해 산문체로 기록되어 있는 짧은
장으로서 (1) 이사야의 행동으로 보여준 심판 메시지(1, 2절), (2) 애굽과 구스의 포
로들이 당하는 수치(3, 4절). (3) 애굽과 구스에 임한 심판의 영향(5, 6절) 등으로 구
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애굽과 같은 세상 권력이나 힘을 의지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장을 그 내용적 흐름에 따라 세 단락으로 구분하여 핵심 사항을 정리해 보
면 다음과 같다.
1. 이사야의 행동으로 보여준 심판의 메시지(20 : 1-2)
본 예언은 앗수르 왕 사르곤이 반앗수르 동맹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 장관(타
르탄, Tartan)을 아스돗에 보내어 그 곳을 점령할 때 선포되었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허리의 베를 끌러 겉옷을 벗고, 신도 신지 말고
생활하도록 지시한다. 선지자의 이러한 복장은 포로의 외형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
다. 곧 하나님은 선지자의 벗은 몸과 벗은 발을 통해 애굽인들과 구스인들이 앗수르의
포로가 될 것을 알리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무감각한 세대를 향하여 충격적인 방법으
로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세상 권력을 의지하지 말도록 지시하는 것이다.(미 1 :
11).
2. 애굽과 구스의 포로들이 당하는 수치(20 : 3-4)
앞에서(1, 2절) 이사야의 행동을 통해 상징적으로 당신의 뜻을 계시하던 하나님께
서는 이제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즉 이사야의 '벗은 몸과 벗은 발'은 애굽과
구스의 백성이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감에 대한 예표와 징표라는 것이다. 앗수르 왕 앞
에 포로로 끌려 갈 때는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어떤 사람은 엉
덩이까지 드러내는 수치를 무릅쓰고 끌려가게 된다. 이처럼 애굽과 구스의 백성들이
앗수르의 포로가 된다는 사실은 두 나라가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살륙당할 것
까지도 포함하는 결과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이사야 선지자를 3년 동안 맨발에 속옷만 입고 생활
하게 하심으로 애굽과 구스가 당할 포로됨의 수치를 증거케 하신 것은 단지 애굽과 구
스에 대한 예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보다 강대국의 군사력을 의지하려는 유다
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경고하기 위함이다.
3. 애굽과 구스에 임한 심판의 영향(20 : 5-6)
본문은 애굽과 구스에 대한 심판 예언(18-20장)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애굽과 구스
를 의지했던 국가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유다를 포함하여 에돔, 모압, 블레
셋 등은 앗수르 왕의 침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기력한 애굽과 구스를 의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보호자가 될 수 없었다. 이전에도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를 의
지하다가 도리어 침공을 당해 곤란을 겪었다(7 : 20 ; 8 : 7, 8). 그런데 유다는 또다
시 하나님보다 세상 세력을 의지하려고 했다. 그 결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선지자는 유다와 주변 나라가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애굽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주변
나라 백성들로 목도케 하심으로 애굽을 의지하던 주변국과 친애굽파가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유다(30 : 1-5 ; 31 : 1-3)를 경계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선지자 에스겔
도 이스라엘이 애굽을 의지하는 것에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
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로 흔들리게 하였느
니라"(겔 29 : 6b-7). 결국 여호와 하나님 외에 인생이 의지하는 모든 것은 사실 부러
진 갈대 지팡이와 같이 무기력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앗수르의 침략에 대비해서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려던 해변의 거민들과 유다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게 된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과 구스는 결코 당면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우리는 유다 백성처럼 눈에 보이는 세상적 권력이나 힘을 신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진정한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고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대하 14 : 11 ; 시 52 : 9 ; 91 : 2 ; 렘 17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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