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 본장은 7장과 동일한 역사적 맥락 위에 놓인다. 앞서 선지자는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가 성장하기 전에 먼저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몰락하고 그 다음에 유다가 황폐해질 것을 예언한 바 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경과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1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Kissane).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 새로 주어질 이 징조는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도 뚜렷이 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큰 서판을 취하도록 명령되었다. '서판'(* , 길라욘)은 금속으로 만든 판을 가리킨다(30:8).
그 위에 통용 문자로 - '통용 문자로'(* , 베헤레트 에노쉬)라는 말은 직역하면, '(한)사람의 필체(writing style)로'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자로 기록하라는 것이다.
마헬살랄하스바스 - 본래의 음대로 읽으면 '마헤르-솰랄-하쉬-바즈'이다. 그 뜻은 '신속하게-약탈물을-급속히-노획물을', 즉 '약탈과 노획이 급속히 이르름'이다. 이는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의해 머지 않은 장래에 노략당할 것을 나타낸다(4절).
=====8:2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 -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왕에게 빌붙어 후에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앗수르 제단을 건립하는 데 협력한 자이며(왕하 16:10-16), 스가랴는 아마도 아하스 왕의 장인을 가리킬 것이다(왕하 18:1,2;대하 29:1). 이들이 진실한 증인이라 불리는 것은 그 지명도와 영향력이 커서 백성들에게 사실을 왜곡됨 없이 말해주리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8:3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 직역하면 '내가 여선지자를 가까이하매'이다. '여선지자'(* , 하느비아)는 그의 아내를 말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대개 그 남편이나 부친의 품위를 따라 여자에게도 그와 비슷한 칭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출 15:20) 그녀가 반드시 어떤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했으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8:4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 '아빠'(* , 아비)와 '엄마'(* , 임미)는 갓난 아이가 최초로 발음하는 소리이다. 이제 예언 성취의 시간은 임마누엘의 때보다 더 앞당겨졌다. 왜냐하면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아는것'(7:15,16)보다 '아빠-엄마'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앗수르에 의한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몰락은 훨씬 더 급박한 사실로 눈앞에 놓이게 된다.
=====8:5
여호와께서 다시...일러 가라사대 -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약탈만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유다가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한 일로 인하여 장차 벌어질 사태를 백성들 또한 목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본절은 7:10에서 처럼, 짧은 시간의 경과를 전제할 수도 있다(Alexander).
=====8:6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 실로아 물은 기혼 샘물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냇물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에 대조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는 곧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근하고도 비밀한 보호를 뜻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짓눌려 있어서 천천히 흐르는 이 실로아 물이야말로 참된 구원이 됨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 유다 백성들이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의 파멸을 보고 자만하여 기뻐한다는 뜻이다(rejoice...,KJV, NIV). 참조로, 기뻐하다'는 뜻의 '마소스'(* )대신에 '두려워하다', '녹다'는 뜻의 '마사스'(* )를 대치시켜 해석하기도 한다(RSV, Hitzig).
=====8:7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 눈에 보이는것만으로 위로를 삼는 백성들에게 앗수르 군대의 힘과 위용이야말로 거세게 넘실대는 유브라데 강물처럼 마음 든든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범람하는 그 강물이 마침내 수리아와 사마리아를 넘어 유다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의지하는 이는 다 이와 같을 것이다.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목에까지 미치리라 - 앗수르에 의한 유다의 약탈은 목에까지 물이 차는 정도의 극심한 홍수 상태로 비유되었다. 선지자의 예언처럼, 디글랏 빌레셀의 대군은 몇 년 안 되어 유다의 넓은 지역을 파괴하고 예물뿐 아니라 공물까지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대하 28:20,21). 그러나 더 큰 피해는 그 후대의 왕, 특히 산헤립(B.C. 705-681) 때에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이여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말이 문장 맨 뒤에 놓여 있다. 선지자의 눈은 다시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한 아이에게 향한다. 이는 범람하는 물결이 거의 목에 차고 새의 편 날개가 온 땅을 덮는 것처럼, 유다 전역이 물에 잠긴 듯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란 오직 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스러운 이름을 기점으로 하여 선지자의 어조와 전망은 일변한다. 비록 가까운 장래에 적들로부터 주어질 재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승리와 구원은 이 땅 위에 임할 것이다.
=====8:9,10
명령법과 반복법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임마누엘이 주는 위로와 보호를 말하고 있다. 그 요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을 세상의 나라들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 '민족들'(* , 아밈)은 앗수르인들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하는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훤화하다'(* , 로우)는 '격노하다', '시끄럽게 날뛰다'(Henderson), '제멋대로 날뛰다'(Alexander)는 뜻으로 전쟁의 함성을 말한다.
필경 패망하리라 - 격동하고 허리를 동이며 모략을 짜내는 등 저들이 온갖 수고와 준비를 아끼지 않을지라도 그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뭇 세력들에게 주어질 궁극적인 운명은 패망뿐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말이 9절에서만 3번, 10절에서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로 2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 저들이 필경, 궁극적으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이 놀라운'임마누엘'(* )의 선언 때문이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칭호로 쓰이지 않고 선언적인 진술로 사용되었다.
=====8:11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 임마누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선지자의 마음은 자연 위축되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처음부터 예측된 것이었다(6:9,10). 따라서 하나님은 연약해진 그를 강하게 만드실 필요가 있었다. '손'(* , 하야드)은 전능자 여호와의 손을 가리키며, 그 손이 선지자에게 얹혀질 때 특별한 영감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다(겔 1:3).
=====8:12
이 백성의 맹약(盟約)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 '맹약'이라 번역된 '케쉐르'(* )는 '공모하다', '협력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그 현대적 의미는 '반역', '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신하가 군주를 거역하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다(왕하 11:14;14:19;15:30).
당시 르신-베가 동맹군에 맞서 친앗수르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노선을 추종치 않고 반대하는 자들은 - 이사야 선지자가 대표적이다 -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반역자들로 간주되었다. 본문에서 선지자에 대한 동(同)시대인들의 시각을 확연하게 엿볼 수 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에게도 이와 동일한 비난이 가해졌다(렘 20:1,2;26:8-11;암 7:11-13).
=====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하고 -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만 주어진다. 그의 거룩하심을 인식한다 함은 그가 만군의 여호와, 곧 피조세계와 구별되어 홀로 높이 계시는 절대 주권자이심을 알아뵙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안절부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8: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 '거룩한 피할 곳'으로 번역된 '미크다쉬'(* )는 '거룩한 것'(a holy thing)이란 뜻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피난처, 은둔처로 간주되어온 거룩한 장소 곧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왕상 2:28, Gesenius, Rosenmuller, Ewald). 여호와는 그를 믿고 그에게 도피하는 이들에게 피난처요 산성이 되어 주실 것이다(시 18:2).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올무가 되시리니 - '이스라엘의 두 집'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직 인간의 생각만을 의지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들의 길을 가로막는 거북한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신약 성경에서 보다 명백하게 표현되었으니, '거룩한 자'(* , 토 하기온, 눅 1:35)-'미크다쉬'에 상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그가 보배가 될 것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될 것이다(롬 9:33;벧전 2:7,8). '예루살렘'은 강조적인 의미로 첨가된 것이다.
=====8:15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 본문은 여호와가 그를 믿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될 것이라는 앞절의 위협의 연속이다. 그것은 5개의 동사로 구성되는데 앞의 세 동사들은 '돌과 바위'에 관계되며 뒤의 두 동사들은 '함정과 올무'에 관계된다.
=====8: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 이 명령은 여호와로부터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싸매며'로 번역된 '초르'(* )는 '기입하다', '새기다'는 뜻의 '추르'(* )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Vitringa), '묶다'는 뜻의 '차라르'(* )에서 파생된 말이다(Alexander). 선지자는 증거의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를 묶어 봉함하도록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계시가 무시되고 거절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 이제 그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 즉 그 마음속에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질 것이다. 선지자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작은 집단에 제한될 것이며 전체로서 그 나라는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주의 계시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Leupold).
=====8:17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 그의 공적 사역이 위축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로부터 얼굴을 돌리시는 이 암담한 때에 선지자가 취할 태도는 '기다림'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기다림은 '기대함'이다. 기대함은 소망으로 앞을 내다봄이다. 이러한 믿음의 자세가 '기다리며'(* , 하카), '바라본다'(* , 카와)는 두 동사에서 잘 나타난다. '카와'는 '기대한다'는 뜻이다.
=====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 주의 말씀이 거부되고 그의 활동이 제약되는 상황에서도 선지자의 마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였다. 이는 아마도 11절의 결과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몇몇 옛주석가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용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히 2:13)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는 메시야 자신이며, '자녀들'은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라고 주장한다(Henderson). 그러나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화자(話者)이며, '자녀들'은 그의 두 아들 즉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esenius, Ewald, Delitzsch, Rosenmuller). 이 해석이 타당하니 첫째, 선지자를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이 모두 그 이름을 통한 징조와 예표로서 백성들에게 보내어졌다는 것과, 둘째, 히브리서의 인용과 관련하여,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선지자와 그 아들들의 이름이 갖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모형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Delitzsch).
징조와 예표 - 이 두 용어는 '미래 사건의 표징, 암시'(* , 튀포스)를 뜻하는 같은 의미의 낱말들로서 자주 결합되어 쓰인다(신4:34;6:22;7:19;26:8;28:46; 29:2; 4:11;시 135:9 등).
=====8:19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 불신자들이 유혹하는 소리이다. '신접한 자'로 번역된 '오보트'(* )는 원래 '부풀게 하는 가죽'(욥 32:19)이란 뜻의 '오브'(* )의 복수형인데, 여기서는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 지하로부터 영을 부르는 사람, 즉 마술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신 18:11;삼상 28:8;대상 10:13). '마술사'로 번역된 '야데오님'(* )은 '알다'는 뜻의 '야다'(* )에서 파생된 말로, '아는 자', '지혜로운 자', '점쟁이'를 의미한다(레 19:31;신 18:11).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 불신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후에 신자의 마땅히 행할 바를 명시한다.
본문은 전쟁시에 사용되는 슬로건(표어)의 형태로 되어 있다(삿 7:18 참조):'율법과 증거(의 말씀)에게로!'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 '율법과 증거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이자 규범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앞서 말한 표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불행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8:21,22
아침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겪게 될 비참한 상태가 두 절에 걸쳐 묘사된다.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 우선, 그들의 처지는 사막의 불볕 아래 음식도, 물도 없이 허덕이는 비참한 모습과도 같다. 선지자는 아마도 앗수르의 압제 아래 백성들이 당하게 될 곤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번조(煩燥)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 그들의 고통이 너무도 격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하며 자기의 왕과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번조하여'(* , 히트카차프)는 '분노하다', '격노하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초한 불행에 대하여 그 모든 원인을 그들의 지도자에게,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하나님에게 돌려 저주하는 행위는 가장 비열한 짓으로 여겨졌다(출 22:28;왕상 21:10).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 문자적으로는 '어두움 속으로 내쫓기리라'이다. '아펠라'(* )는 짙은 어두움에 사용된다(출 10:22). '쫓겨 들어간다'로 번역된 '메누다'(* )는 '내몰다', '추방하다'는 뜻을 가진 '나다'(* )동사의 수동 분사형이다. 선지자의 묘사는 비유로 가득하다. 본장의 마지막 절에서 지배적인 색조는 흑암이며, 주된 정조는 절망이다. 이 모든 것이 아침을 빼앗긴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이들에게 예정된 운명이 된다.
일반적으로 7-12장은 '임마누엘서'(the Immanule book)로 불리워진다. 이 부분은
주로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구원의 표징으로서의 임만누엘 예언에 대해 설명하
고 있다. 특히 본장은 내용적으로 전장(7장)과 밀착되어 있는데, 이미 예언된 아람 왕
르신과 에브라임 왕 베가의 멸망(7:7-9)에 대한 다른 형태의 예표라고 볼 수 있다. 이
예언은 앞으로 '한 아기를 통한 구원'(9장), '이색의 한 싹을 통한 구원'(11장)등으
로 진전되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다 명확히 계시하게 된다.
이와같이 임마누엘의 예언을 계속해서 선포하고 있는 본장은 (1)마헬살랄하스바
스의 징조를 선포하는 전반부(1-4절), (2)임마누엘의 위로를 전달하는 중반부(5-10
절), (3)구별된 자들을 향한 위로와 경고를 전달하는 후반부(11-22절)등으로 구성되
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이사야는 '스알야숩'(7:3), '임마누엘'(7:14)의 징조
를 거부한 아하스에게 더욱 확실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한편, 본장의 역사적 배경은 전장과 동일하다. 현재 유다는 앗수르의 압제 아래
약탈을 당하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리아(아람)와 에브라임 동맹
군의 침입을 받은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쓴을 의지하지 않고 앗스를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여 난국을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하스의 요청
으로 아람과 다메섹을 정복한 앗수르는 그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도 정복하려고 시도
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계속해서 '임마느엘의 예언'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장은 7장의 예언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발전
을 제시한다. 7장에서는 임마누엘 예언이 아람과 에브라임 두 왕의 멸망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주신 하나의 징표로서 드러나고 있지만, 본장에서는 좀더 진전하여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와 승리'로 나타난다. 즉, 임마누엘은 심판 중
받게 되는 위로로서 이스라엘 땅의 주인이요,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요, 환난 중
에 그 백성이 도움을 호소하며 의지할 자라는 것이다(8-10절). 이러한 사실은 궁극적
으로 하나님의 백성 유다의 구원은 오직 임마누엘에 의해서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다. 임마누엘이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열방 중에서 부별되
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며, 이스라엘을 해하려는 모든 세상 세력이 그 앞에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답변이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장은 유다의 위기적 국면에 대해 임마누엘의 위로를
전달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몇 단락으로 세분하여 좀더 자세히 고찰하여 보기
로 한다.
1.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징조(8:1-4)
아람과 북왕국의 침약으로 두려움에 가득 찬 아하스는 스알야숩(7:3), 임마누엘
(7:14)의 징조를 보여 주면서 승리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래서
본 단락을 통해 마지막으로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징조가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사
야로 하여금 큰 서판에 당시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통용 문자로 '노략이 신속
하고 약탈이 급속하다'라는 뜻의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쓰게 하시며, 또한 아들의
이름을 서판에 쓴 그대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짓게 하셨다. 이러한 징표를 통하
여 선지자는 짧은 기간 내에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멸망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이제 본 징조를 통해 알 수 있는 영적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하신다 : 이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큰 서판을 준
비하여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글자를 썼고, 또한 아들의 이름도 동일하게 지었다.
하나님은 임박한 진노를 갈렬하게 포현하기 위하여 인간 자체를 증표로 삼으신다. (2)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을 통하여 당신의 예언을 확증하신다(2절) : 이사야를 통해 주어
진 말씀의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은 앗수르의 제단을 본 따 성전의 제단을 건축하으
로써 의심을 제거하시는 자상한 분이시다. (3)하나님의 예언은 분명히 성취된다(4절)
: 아기가 엄마, 아빠를 부르기 전에 두 나라가 멸망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
메섹이 B.C 732년, 사마리아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신실하게 수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2. 임마누엘의 위로(8:5-10)
다윗의 집을 해하려던 두 왕의 심판에 대한 징표와 예언이 끝나자, 하나님은 이사
야에게 그들이 심판받게 된 이유를 말씀하신다. 다메섹과 사마리아는 세상적 유익을
위하여 유다를 쳐서 곤하게 하고, 파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아하스를 폐위하고 다브
엘의 아들을 왕으로 삼아 다윗의 집의 계보를 끊고자 하였다(7:5,6).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의도는 다윗 왕조를 영원히 멸망시키려는 음모로서 영적으로 볼 때 다윗의 후
손을 통해 구속 역사를 성취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에 해당된다. 왜
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의 계보를 통해 메시야를 보내시고(11:1,10) 하나님 나
라를 굳게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9:7). 그러므로 다윗의 집에 도전한 아람과 에브
라임은 앗스르에 의하여 파멸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앗수르의 침략은 아람과 에브라임에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유다까지도
위급한 입장에 처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사야는 이미 계시된 '임마누엘
에 의 한 구원'(7:14)을 생각한다. 특히 여기서는 7장의 내용에다가 임마느엘이 온
이스라엘 땅의 주인(왕,통치자)이라는 사실이 첨가되어 나타나고 있다. 더 나아가 선
지자는 임마누엘이 주실 구원과 승리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열국의 패
망을 강하게 선포한다(9,10).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은 하나님의
백성을 방해할 수 있는 세상 세력이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적들이 전쟁의 함성을 높이고, 허리를 동여 전쟁 준비를 하며, 함께 전략을 짜고 계
획한다 해도 필경은 패망할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선지자는 낫수르에 대한 두
려움을 물리치고 승리의 서망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3. 구별된 자들을 향한 위로와 경고(8:11-22)
앞에서 다세멕과 사마리아의 패망을 알려주시고(1-4절)유다의 안전(5-10절)을 확
인해준 하나님께서는 이제 관심을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 더 폭넓게는 구별된 자들
에게 돌려, 위로와 경고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이스라엘은 결코 세상적인 가치나 주
술적인 우상에 빠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인내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하나님에 대한 겨외심(11-15절), (2)인
내하는 신앙(16-18절), (3)말씀에 대한 추구(19-22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본 단락의 주도적인 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언약 백성에 대한
경고(11-13절) : 하나님은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에게 듀다의 불신을 책망하고, 하나
님의 심판을 선포하도록 촉수하면서 설령"반역자'라는 잘못된 판단을 받을지라도 두
려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함정과 올무에 걸리게 되어 비참한 결과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
나님은 이와닿이 언약 백성이라도 범죄하면 은혜의 수여가 철회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를 발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청종 요구(20절) : 이사야는 구별된
자들에게 당시의 패역한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
게 묻지말고(신 18:9-14 ; 왕하 17:17 ; 21:6) 오직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으라고
당부한다. 그럴 때 모근 국가적 재난에서 벗어나 진정한 은혜와 평화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본장을 통해, 거룩한 경외심(holy reverence)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의 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11-15절).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들은 어떤 세상의 세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임마누엘되신 하나님은 어렵고 힘든 위기 상황을 당할 때마다 참된 위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요 6:44 ; 10:28 ; 17:6,12 ; 행 13:48 ; 롬 8:30) 담대하게 순례의 행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임마누엘이 오늘날 교회와 함께하시기에 어떤 세상 세력도 참된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 본장은 7장과 동일한 역사적 맥락 위에 놓인다. 앞서 선지자는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가 성장하기 전에 먼저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몰락하고 그 다음에 유다가 황폐해질 것을 예언한 바 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경과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1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Kissane).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 새로 주어질 이 징조는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도 뚜렷이 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큰 서판을 취하도록 명령되었다. '서판'(* , 길라욘)은 금속으로 만든 판을 가리킨다(30:8).
그 위에 통용 문자로 - '통용 문자로'(* , 베헤레트 에노쉬)라는 말은 직역하면, '(한)사람의 필체(writing style)로'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자로 기록하라는 것이다.
마헬살랄하스바스 - 본래의 음대로 읽으면 '마헤르-솰랄-하쉬-바즈'이다. 그 뜻은 '신속하게-약탈물을-급속히-노획물을', 즉 '약탈과 노획이 급속히 이르름'이다. 이는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의해 머지 않은 장래에 노략당할 것을 나타낸다(4절).
=====8:2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 -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왕에게 빌붙어 후에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앗수르 제단을 건립하는 데 협력한 자이며(왕하 16:10-16), 스가랴는 아마도 아하스 왕의 장인을 가리킬 것이다(왕하 18:1,2;대하 29:1). 이들이 진실한 증인이라 불리는 것은 그 지명도와 영향력이 커서 백성들에게 사실을 왜곡됨 없이 말해주리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8:3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 직역하면 '내가 여선지자를 가까이하매'이다. '여선지자'(* , 하느비아)는 그의 아내를 말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대개 그 남편이나 부친의 품위를 따라 여자에게도 그와 비슷한 칭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출 15:20) 그녀가 반드시 어떤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했으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8:4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 '아빠'(* , 아비)와 '엄마'(* , 임미)는 갓난 아이가 최초로 발음하는 소리이다. 이제 예언 성취의 시간은 임마누엘의 때보다 더 앞당겨졌다. 왜냐하면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아는것'(7:15,16)보다 '아빠-엄마'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앗수르에 의한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몰락은 훨씬 더 급박한 사실로 눈앞에 놓이게 된다.
=====8:5
여호와께서 다시...일러 가라사대 -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약탈만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유다가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한 일로 인하여 장차 벌어질 사태를 백성들 또한 목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본절은 7:10에서 처럼, 짧은 시간의 경과를 전제할 수도 있다(Alexander).
=====8:6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 실로아 물은 기혼 샘물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냇물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에 대조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는 곧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근하고도 비밀한 보호를 뜻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짓눌려 있어서 천천히 흐르는 이 실로아 물이야말로 참된 구원이 됨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 유다 백성들이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의 파멸을 보고 자만하여 기뻐한다는 뜻이다(rejoice...,KJV, NIV). 참조로, 기뻐하다'는 뜻의 '마소스'(* )대신에 '두려워하다', '녹다'는 뜻의 '마사스'(* )를 대치시켜 해석하기도 한다(RSV, Hitzig).
=====8:7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 눈에 보이는것만으로 위로를 삼는 백성들에게 앗수르 군대의 힘과 위용이야말로 거세게 넘실대는 유브라데 강물처럼 마음 든든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범람하는 그 강물이 마침내 수리아와 사마리아를 넘어 유다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의지하는 이는 다 이와 같을 것이다.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목에까지 미치리라 - 앗수르에 의한 유다의 약탈은 목에까지 물이 차는 정도의 극심한 홍수 상태로 비유되었다. 선지자의 예언처럼, 디글랏 빌레셀의 대군은 몇 년 안 되어 유다의 넓은 지역을 파괴하고 예물뿐 아니라 공물까지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대하 28:20,21). 그러나 더 큰 피해는 그 후대의 왕, 특히 산헤립(B.C. 705-681) 때에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이여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말이 문장 맨 뒤에 놓여 있다. 선지자의 눈은 다시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한 아이에게 향한다. 이는 범람하는 물결이 거의 목에 차고 새의 편 날개가 온 땅을 덮는 것처럼, 유다 전역이 물에 잠긴 듯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란 오직 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스러운 이름을 기점으로 하여 선지자의 어조와 전망은 일변한다. 비록 가까운 장래에 적들로부터 주어질 재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승리와 구원은 이 땅 위에 임할 것이다.
=====8:9,10
명령법과 반복법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임마누엘이 주는 위로와 보호를 말하고 있다. 그 요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을 세상의 나라들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 '민족들'(* , 아밈)은 앗수르인들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하는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훤화하다'(* , 로우)는 '격노하다', '시끄럽게 날뛰다'(Henderson), '제멋대로 날뛰다'(Alexander)는 뜻으로 전쟁의 함성을 말한다.
필경 패망하리라 - 격동하고 허리를 동이며 모략을 짜내는 등 저들이 온갖 수고와 준비를 아끼지 않을지라도 그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뭇 세력들에게 주어질 궁극적인 운명은 패망뿐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말이 9절에서만 3번, 10절에서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로 2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 저들이 필경, 궁극적으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이 놀라운'임마누엘'(* )의 선언 때문이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칭호로 쓰이지 않고 선언적인 진술로 사용되었다.
=====8:11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 임마누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선지자의 마음은 자연 위축되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처음부터 예측된 것이었다(6:9,10). 따라서 하나님은 연약해진 그를 강하게 만드실 필요가 있었다. '손'(* , 하야드)은 전능자 여호와의 손을 가리키며, 그 손이 선지자에게 얹혀질 때 특별한 영감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다(겔 1:3).
=====8:12
이 백성의 맹약(盟約)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 '맹약'이라 번역된 '케쉐르'(* )는 '공모하다', '협력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그 현대적 의미는 '반역', '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신하가 군주를 거역하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다(왕하 11:14;14:19;15:30).
당시 르신-베가 동맹군에 맞서 친앗수르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노선을 추종치 않고 반대하는 자들은 - 이사야 선지자가 대표적이다 -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반역자들로 간주되었다. 본문에서 선지자에 대한 동(同)시대인들의 시각을 확연하게 엿볼 수 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에게도 이와 동일한 비난이 가해졌다(렘 20:1,2;26:8-11;암 7:11-13).
=====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하고 -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만 주어진다. 그의 거룩하심을 인식한다 함은 그가 만군의 여호와, 곧 피조세계와 구별되어 홀로 높이 계시는 절대 주권자이심을 알아뵙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안절부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8: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 '거룩한 피할 곳'으로 번역된 '미크다쉬'(* )는 '거룩한 것'(a holy thing)이란 뜻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피난처, 은둔처로 간주되어온 거룩한 장소 곧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왕상 2:28, Gesenius, Rosenmuller, Ewald). 여호와는 그를 믿고 그에게 도피하는 이들에게 피난처요 산성이 되어 주실 것이다(시 18:2).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올무가 되시리니 - '이스라엘의 두 집'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직 인간의 생각만을 의지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들의 길을 가로막는 거북한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신약 성경에서 보다 명백하게 표현되었으니, '거룩한 자'(* , 토 하기온, 눅 1:35)-'미크다쉬'에 상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그가 보배가 될 것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될 것이다(롬 9:33;벧전 2:7,8). '예루살렘'은 강조적인 의미로 첨가된 것이다.
=====8:15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 본문은 여호와가 그를 믿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될 것이라는 앞절의 위협의 연속이다. 그것은 5개의 동사로 구성되는데 앞의 세 동사들은 '돌과 바위'에 관계되며 뒤의 두 동사들은 '함정과 올무'에 관계된다.
=====8: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 이 명령은 여호와로부터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싸매며'로 번역된 '초르'(* )는 '기입하다', '새기다'는 뜻의 '추르'(* )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Vitringa), '묶다'는 뜻의 '차라르'(* )에서 파생된 말이다(Alexander). 선지자는 증거의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를 묶어 봉함하도록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계시가 무시되고 거절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 이제 그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 즉 그 마음속에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질 것이다. 선지자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작은 집단에 제한될 것이며 전체로서 그 나라는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주의 계시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Leupold).
=====8:17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 그의 공적 사역이 위축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로부터 얼굴을 돌리시는 이 암담한 때에 선지자가 취할 태도는 '기다림'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기다림은 '기대함'이다. 기대함은 소망으로 앞을 내다봄이다. 이러한 믿음의 자세가 '기다리며'(* , 하카), '바라본다'(* , 카와)는 두 동사에서 잘 나타난다. '카와'는 '기대한다'는 뜻이다.
=====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 주의 말씀이 거부되고 그의 활동이 제약되는 상황에서도 선지자의 마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였다. 이는 아마도 11절의 결과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몇몇 옛주석가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용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히 2:13)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는 메시야 자신이며, '자녀들'은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라고 주장한다(Henderson). 그러나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화자(話者)이며, '자녀들'은 그의 두 아들 즉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esenius, Ewald, Delitzsch, Rosenmuller). 이 해석이 타당하니 첫째, 선지자를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이 모두 그 이름을 통한 징조와 예표로서 백성들에게 보내어졌다는 것과, 둘째, 히브리서의 인용과 관련하여,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선지자와 그 아들들의 이름이 갖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모형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Delitzsch).
징조와 예표 - 이 두 용어는 '미래 사건의 표징, 암시'(* , 튀포스)를 뜻하는 같은 의미의 낱말들로서 자주 결합되어 쓰인다(신4:34;6:22;7:19;26:8;28:46; 29:2; 4:11;시 135:9 등).
=====8:19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 불신자들이 유혹하는 소리이다. '신접한 자'로 번역된 '오보트'(* )는 원래 '부풀게 하는 가죽'(욥 32:19)이란 뜻의 '오브'(* )의 복수형인데, 여기서는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 지하로부터 영을 부르는 사람, 즉 마술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신 18:11;삼상 28:8;대상 10:13). '마술사'로 번역된 '야데오님'(* )은 '알다'는 뜻의 '야다'(* )에서 파생된 말로, '아는 자', '지혜로운 자', '점쟁이'를 의미한다(레 19:31;신 18:11).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 불신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후에 신자의 마땅히 행할 바를 명시한다.
본문은 전쟁시에 사용되는 슬로건(표어)의 형태로 되어 있다(삿 7:18 참조):'율법과 증거(의 말씀)에게로!'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 '율법과 증거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이자 규범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앞서 말한 표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불행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8:21,22
아침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겪게 될 비참한 상태가 두 절에 걸쳐 묘사된다.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 우선, 그들의 처지는 사막의 불볕 아래 음식도, 물도 없이 허덕이는 비참한 모습과도 같다. 선지자는 아마도 앗수르의 압제 아래 백성들이 당하게 될 곤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번조(煩燥)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 그들의 고통이 너무도 격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하며 자기의 왕과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번조하여'(* , 히트카차프)는 '분노하다', '격노하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초한 불행에 대하여 그 모든 원인을 그들의 지도자에게,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하나님에게 돌려 저주하는 행위는 가장 비열한 짓으로 여겨졌다(출 22:28;왕상 21:10).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 문자적으로는 '어두움 속으로 내쫓기리라'이다. '아펠라'(* )는 짙은 어두움에 사용된다(출 10:22). '쫓겨 들어간다'로 번역된 '메누다'(* )는 '내몰다', '추방하다'는 뜻을 가진 '나다'(* )동사의 수동 분사형이다. 선지자의 묘사는 비유로 가득하다. 본장의 마지막 절에서 지배적인 색조는 흑암이며, 주된 정조는 절망이다. 이 모든 것이 아침을 빼앗긴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이들에게 예정된 운명이 된다.
일반적으로 7-12장은 '임마누엘서'(the Immanule book)로 불리워진다. 이 부분은
주로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구원의 표징으로서의 임만누엘 예언에 대해 설명하
고 있다. 특히 본장은 내용적으로 전장(7장)과 밀착되어 있는데, 이미 예언된 아람 왕
르신과 에브라임 왕 베가의 멸망(7:7-9)에 대한 다른 형태의 예표라고 볼 수 있다. 이
예언은 앞으로 '한 아기를 통한 구원'(9장), '이색의 한 싹을 통한 구원'(11장)등으
로 진전되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다 명확히 계시하게 된다.
이와같이 임마누엘의 예언을 계속해서 선포하고 있는 본장은 (1)마헬살랄하스바
스의 징조를 선포하는 전반부(1-4절), (2)임마누엘의 위로를 전달하는 중반부(5-10
절), (3)구별된 자들을 향한 위로와 경고를 전달하는 후반부(11-22절)등으로 구성되
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이사야는 '스알야숩'(7:3), '임마누엘'(7:14)의 징조
를 거부한 아하스에게 더욱 확실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한편, 본장의 역사적 배경은 전장과 동일하다. 현재 유다는 앗수르의 압제 아래
약탈을 당하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리아(아람)와 에브라임 동맹
군의 침입을 받은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쓴을 의지하지 않고 앗스를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여 난국을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하스의 요청
으로 아람과 다메섹을 정복한 앗수르는 그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도 정복하려고 시도
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계속해서 '임마느엘의 예언'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장은 7장의 예언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발전
을 제시한다. 7장에서는 임마누엘 예언이 아람과 에브라임 두 왕의 멸망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주신 하나의 징표로서 드러나고 있지만, 본장에서는 좀더 진전하여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와 승리'로 나타난다. 즉, 임마누엘은 심판 중
받게 되는 위로로서 이스라엘 땅의 주인이요,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요, 환난 중
에 그 백성이 도움을 호소하며 의지할 자라는 것이다(8-10절). 이러한 사실은 궁극적
으로 하나님의 백성 유다의 구원은 오직 임마누엘에 의해서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다. 임마누엘이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열방 중에서 부별되
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며, 이스라엘을 해하려는 모든 세상 세력이 그 앞에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답변이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장은 유다의 위기적 국면에 대해 임마누엘의 위로를
전달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몇 단락으로 세분하여 좀더 자세히 고찰하여 보기
로 한다.
1.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징조(8:1-4)
아람과 북왕국의 침약으로 두려움에 가득 찬 아하스는 스알야숩(7:3), 임마누엘
(7:14)의 징조를 보여 주면서 승리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래서
본 단락을 통해 마지막으로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징조가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사
야로 하여금 큰 서판에 당시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통용 문자로 '노략이 신속
하고 약탈이 급속하다'라는 뜻의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쓰게 하시며, 또한 아들의
이름을 서판에 쓴 그대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짓게 하셨다. 이러한 징표를 통하
여 선지자는 짧은 기간 내에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멸망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이제 본 징조를 통해 알 수 있는 영적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하신다 : 이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큰 서판을 준
비하여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글자를 썼고, 또한 아들의 이름도 동일하게 지었다.
하나님은 임박한 진노를 갈렬하게 포현하기 위하여 인간 자체를 증표로 삼으신다. (2)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을 통하여 당신의 예언을 확증하신다(2절) : 이사야를 통해 주어
진 말씀의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은 앗수르의 제단을 본 따 성전의 제단을 건축하으
로써 의심을 제거하시는 자상한 분이시다. (3)하나님의 예언은 분명히 성취된다(4절)
: 아기가 엄마, 아빠를 부르기 전에 두 나라가 멸망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
메섹이 B.C 732년, 사마리아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신실하게 수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2. 임마누엘의 위로(8:5-10)
다윗의 집을 해하려던 두 왕의 심판에 대한 징표와 예언이 끝나자, 하나님은 이사
야에게 그들이 심판받게 된 이유를 말씀하신다. 다메섹과 사마리아는 세상적 유익을
위하여 유다를 쳐서 곤하게 하고, 파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아하스를 폐위하고 다브
엘의 아들을 왕으로 삼아 다윗의 집의 계보를 끊고자 하였다(7:5,6).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의도는 다윗 왕조를 영원히 멸망시키려는 음모로서 영적으로 볼 때 다윗의 후
손을 통해 구속 역사를 성취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에 해당된다. 왜
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의 계보를 통해 메시야를 보내시고(11:1,10) 하나님 나
라를 굳게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9:7). 그러므로 다윗의 집에 도전한 아람과 에브
라임은 앗스르에 의하여 파멸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앗수르의 침략은 아람과 에브라임에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유다까지도
위급한 입장에 처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사야는 이미 계시된 '임마누엘
에 의 한 구원'(7:14)을 생각한다. 특히 여기서는 7장의 내용에다가 임마느엘이 온
이스라엘 땅의 주인(왕,통치자)이라는 사실이 첨가되어 나타나고 있다. 더 나아가 선
지자는 임마누엘이 주실 구원과 승리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열국의 패
망을 강하게 선포한다(9,10).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은 하나님의
백성을 방해할 수 있는 세상 세력이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적들이 전쟁의 함성을 높이고, 허리를 동여 전쟁 준비를 하며, 함께 전략을 짜고 계
획한다 해도 필경은 패망할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선지자는 낫수르에 대한 두
려움을 물리치고 승리의 서망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3. 구별된 자들을 향한 위로와 경고(8:11-22)
앞에서 다세멕과 사마리아의 패망을 알려주시고(1-4절)유다의 안전(5-10절)을 확
인해준 하나님께서는 이제 관심을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 더 폭넓게는 구별된 자들
에게 돌려, 위로와 경고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이스라엘은 결코 세상적인 가치나 주
술적인 우상에 빠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인내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하나님에 대한 겨외심(11-15절), (2)인
내하는 신앙(16-18절), (3)말씀에 대한 추구(19-22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본 단락의 주도적인 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언약 백성에 대한
경고(11-13절) : 하나님은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에게 듀다의 불신을 책망하고, 하나
님의 심판을 선포하도록 촉수하면서 설령"반역자'라는 잘못된 판단을 받을지라도 두
려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함정과 올무에 걸리게 되어 비참한 결과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
나님은 이와닿이 언약 백성이라도 범죄하면 은혜의 수여가 철회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를 발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청종 요구(20절) : 이사야는 구별된
자들에게 당시의 패역한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
게 묻지말고(신 18:9-14 ; 왕하 17:17 ; 21:6) 오직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으라고
당부한다. 그럴 때 모근 국가적 재난에서 벗어나 진정한 은혜와 평화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본장을 통해, 거룩한 경외심(holy reverence)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의 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11-15절).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들은 어떤 세상의 세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임마누엘되신 하나님은 어렵고 힘든 위기 상황을 당할 때마다 참된 위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요 6:44 ; 10:28 ; 17:6,12 ; 행 13:48 ; 롬 8:30) 담대하게 순례의 행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임마누엘이 오늘날 교회와 함께하시기에 어떤 세상 세력도 참된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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