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이사야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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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 본절은 예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로 - 에브라임 전쟁에 대한 요약이다. 선지자는 결과를 미리 말한 다음 세부적인 사항들을 밝히는 방식으로 예언을 진행시킨다. '웃시야-요담-아하스'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역사는 유다가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서 어떻게 국제적 분쟁의 회오리와 그 참혹한 파멸 가운데로 급락하게 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시로 - 에브라임 전쟁이었다(왕하 16장;대하 28장 참조). 구체적 설명은 강해란을 보라.

=====7: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 '다윗 집'은 다윗 왕조에 속한 아하스와 그의 정부를 가리킨다. 선지자가 본문에서 '다윗 집'으란 표현을 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함축되어 있다. (1)다윗의 집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르신-베가의 동맹군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다윗 왕조를 폐하고 괴뢰 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던 것이다(6절). (2)이 위기는 다윗 왕조가 여호와와 맺은 언약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데서 온 필연적 결과이며(삼하 7장), 따라서 아하스가 직면한 외부적 위협은 실은 여호와의 징계로 주어진 것임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9절에서 선지자가 다시금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왕의 마음과...흔들렸더라 - 이 불길한 소식을 접했을 때 왕과 온 백성 곧 나라 전체가 보인 반응은 심장이 얼어 붙는 듯한 두려움, 그것이었다. 선지자는 그것을 직유법으로 표현한다:'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이는 주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단적으로 드려내 주고 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불신은 오직 두려움만을 증폭시킨다.

=====7:3
때에 여호와께서...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 이 상황에서 선지자는 '스알야숩'이란 의미 심장한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과 더불어 아하스 왕을 만나라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다. '스알야숩'(* )은 '남은 자가 돌아 온다'는 뜻이다(10:21).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위협(단지 남은 자만 돌아온다) 혹은 약속(적어도 남은 자는 꼭 돌아올 것이다)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문맥상 위로의 약속에 더 큰 비중이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 왕은 스알야숩뿐만 아니라 그 곁에 서 있는 이사야를 또한 만나야 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이 있는 이사야의 이름은 스알야숩이란 이름과 함하여 완전한 계시를 이룬다(Leupold).

=====7:4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 이사야와 그 아들 스알야숩이 아하스 왕에게 보여진 것이 하나님의 시각적 메시지였다면, 본절부터는(9절까지) 청각적 메시지가 명료하게 전달된다. 그 메시지는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4개의 명령(혹은 권유)으로 시작된다. '삼가라'(* , 히솨메르)는 두려움에 쫓겨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종용하라'(* , 하쉬케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평온하고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수 1:6)는 명령이 덧붙여진다. 왜냐하면 두려움이야말로 믿음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는 마음이 녹아 내리는 낙심밖에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앞의 두 가지가 신앙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라면, 뒤의 두 가지는 불신앙에서 오는 전형적인 상태이다.

=====7:5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이르기를 - 개역 성경에는 '때문에'(* , 야안 키)란 말이 빠져 있다. 원문대로 읽으면 '아람이 너를 대적해서 악을 도모하여,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도, 말했기 때문에'이다. 언제나 아람이 먼저 거론된다(4절). 이는 원정군의 주도권을 쥔 나라가 아람이었음을 나타낸다.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은 동의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름을 셋으로 나누어 표기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운율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Alexander). 본문에서 시작한 긴 문장은 7절에서 끝난다(Gesenius, Hitzig, Ewald).

=====7: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하였으나 - 앞절에서 말한 '악한 꾀', 즉 원정군의 전쟁 목적이 명확하게 기술된다. 그것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그것을 곤하게 하고':'곤하게 하다'로 번역된 '네키체나'(* )는 '두렵게 하다', '포위하다'는 뜻이니, 곧 유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어넣어 스스로 무너지게 하자는 것이다. 고대의 전쟁은 신경전이 그 승패를 좌우했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쪽이 으레 패배하기 마련이었다. (2)'그것을 파하고':'파하다'(* , 나브키엔나)는 '산산이 쪼개다', '박살내다'는 뜻이니, 힘으로 유다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온 나라를 유린하자는 것이다. (3)'다브엘의 아들을...왕을 삼자':종적인 목표는 다윗 왕조를 폐하고 자기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괴뢰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다브엘의 아들'은 '르말리야의 아들'이란 이름처럼 경멸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더구나 이스라엘인인지 수리아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왕상 15:18에 나오는 수리아인 '다브림몬'과 그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수리아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7:7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 본문은 5절에서 시작한 긴 문장의 귀결절에 해당하며 동시에 새로운 절을 유도하는 상관적인 기능을 갖는다:유다를 공격하여 정권을 바꾸고자 하는(6절) 르신과 베가의 악한 꾀는(5절)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7절). 왜냐하면...(8,9절).

=====7:8,9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 여기서 '머리'(* ,로쉬)는 한 나라의 수도 혹은 주권(통치)을 뜻하는 비유 언어이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의역 가능하다:'아람의 수도는 (오직) 다메섹일 뿐, 예루살렘은 아니다. 르신이 다메섹의 왕이라면 그의 통치는 (오직) 다메섹에만 국한될 뿐, 예루살렘에는 미칠 수 없다.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
' 육십 오년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 본문은 앞에 나온 내용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아람에 대한 진술에 이어 에브라임이 나온다는 것이다. (2)본문의 시점(아하스 왕 2년, 곧 B.C. 734년)으로부터 보면 에브라임의 패망이 불과 십 몇 년 내의 일인데 선지자가 65년이라고 말한 것은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본문을 후대에 편집되어 삽입된 것으로 간주했다(Eichorn, Gesenius). 그러나 현대적인 논리를 앞세워 섣불리 성경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선, 선지자의 눈은 시종 일관 유다에 향해 있다. 주변 국가에 대한 언급도 유다에 관련있을 때만으로 한정된다. 그는 아람의 한계에서 그와 동맹한 에브라임의 운명을 읽고, 또한 에브라임의 운명에서 같은 민족인 유다의 미래를 읽는다. 그 미래는 전적으로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 둘째, 연대 문제에서 그것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한 B.C. 722년의 예루살렘 점령에 국한시키기보다, B.C. 669년에 있었던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에 의한 식민지 정책에 맞춘다면, 65년이라는 기한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앗술 바니팔은 주변 여러 민족들을 데려와서 사마리아에 거주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에브라임은 국가로서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고 혼합 민족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왕하 17:24;스 4:2).

=====7: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 앞절과 본절 사이에 짧은 휴지(休止)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는 선지자의 전언(傳言)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마음이 앗수르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된다.


=====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아하스 왕에게 그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징조'는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취해졌다. 그것은 때로는 이적(38:7,8;출 4:8)으로, 때로는 미래 사건들을 지명하는 지각 가능한 상징들(8:3,4,18;겔 12:6)로 나타난다. 만일 아하스가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한다면, 그는 이적적인 증거를 구함으로써 불신앙을 확신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였다.

=====7:12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 여호와를 시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언행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신 6:16의 금지 계명을 내세워 자신의 불신앙을 포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징조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의 불신앙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Umbreit)나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능력(Gesenius)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내적인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스스로 고안해낸 별도의 대책이 서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7:13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하려느냐 - 개역 성경에 단수로 나와 있는 '사람'은 원문에는 '사람들'(* , 아나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선지자 자신을 가리킨다기보다는(Bultema) 아마도 권세자들에 의해 압제받는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책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너희가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이제는 불신앙으로 그의 은혜마저 거절하는구나.

'=====7:14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문자적으로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창 29:32-35;30:6-13;3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관습으로 보인다(창 16:15;삼하 12:24;눅 1:62,63등). 그러나 누가 아이의 이름을 짓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 1:23에서는 본문의 주어가 3인칭 복수형(그들)으로 인용되었다. '임마누엘'(* )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 그 이름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르신-베가의 멸망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또 그의 어머니인 '처녀'(* , 알마)는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예로부터 학자들 간에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1)그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이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E.J.Young):이것은 아이의 성장과 아하스 당대의 정치적 상황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는 15-17절로 인해 수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본절의 아이와 15,16절의 아이를 구분하거나(박윤선), 혹은 본절과 15절의 아이와 16절의 아이를 각각 다른 인물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Bultema, Calvin), 이 경우에 해석의 자의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마 1:23에 의거, 본문이 메시야적 예언임에 틀림없다고 할지라도 시공간적 거리를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그 어머니는 아하스 왕의 왕비 혹은 후궁을 가리키며, 그 아이는 히스기야를 가리킨다는 주장(Lindblom, Steinmann):이는 주로 유태계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연대기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B.C.728년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 이미 25세였으므로,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10대의 소년이었던 것이다(대하 29:1). (3)그 어머니는 이사야 선지자의 아내이며 그 아이는 선지자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주장(Clements):이 경우에 선지자가 8:3에서처럼 '선지자의 아내' 혹은 '여선지자'(* , 하네비아)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굳이 '알마'(* )라는 모호한 말로 대신하였는가가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의 아내처럼 오래도록 결혼 생활을 한 여자를 '알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도 수긍하기 힘들다. (4)선지자가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당시 유다
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인격 속에 임마누엘의 약속과 구원을 구현할 메시야의 탄생에서이다. 따라서 추측컨대, 아이의 어머니는 선지자와 동(同)시대 사람으로서 다윗 가문에 속한 한 처녀이며, 그 아들의 이름 임마누엘은 위기의 순간에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장차 인간의 몸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함께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때에 미쳐 - 영아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 선악을 분별한다 함은 영아의 상태를 넘어섬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그 아이가 자라서 사물을 판단하는 나이에 이를 때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나이는 대략 3세 정도로 추정된다.

=====7:16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 '미워하는'은 문자적으로는 '두려워하는'이다. 유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 나라 수리아와 에브라임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과(B.C. 732년) 살만에셀 5세(B.C.722년)의 침공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며(왕하 15:29;16:9;17:6), 따라서 그들로부터 가해진 위협도 소멸될 것이다.

=====7:17
여호와께서...임하게 하시리니 - 비록 수리아와 에브라임에 의한 위협은 소멸된다 할지라도 유다의 시련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유다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앗수르로부터 올 것이다.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심판의 위협으로의 이 돌연한 변화는 실은 아하스 왕의 불신앙이 자초한 것이다(10-13절). 불신앙에 대한 심판은 여호와로부터 온다. 앗수르는 그 손의 막대기에 불과하다(10:5).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 앞으로 당할 환난의 무서움과 그 비참함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그 분열의 역사에 비견된다. 민족의 분열은 모든 비극의 뿌리요 모태였다.

=====7:18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 - 유다를 괴롭힐 침략군에는 앗수르 뿐만 아니라 애굽도 첨가된다. 선지자는 애굽을 파리로, 앗수르를 벌로 비유하고 있다. 나일 강을 끼고 있는 애굽에는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많은 종류의 곤충들, 그중에서도 특히 파리가 많았다. 반면에 많은 산과 숲으로 우거진 앗수르에는 벌떼가 많았다. 본문을 역사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황의 전후 관계가 불분명할 수 있다. 애굽 군대가 유다 땅을 유린하게 된 것은(왕하 23:28-30) 훨씬 후대의 요시야 왕 때였다(B.C.609년). 그리고 애굽 왕 바로느고가 이끄는 애굽 군대와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군대가 격돌한 저 유명한 갈그미스(Carchemish)전투에서 애굽이 패퇴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주도권은 사실상 바벨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B.C.605년). 앗수르 군대에 의한 피해는 히스기야 왕 때 가장 극심하였다(36,37장).

=====7: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 선지자의 비유는 계속된다. 파리와 벌로 비유된 애굽과 앗수르 군대는 여호와의 신호에 따라서 유다 땅 전역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여기 언급된 네 장소를 각각 파리와 벌의 서식지로 파악하여, 거친 골짜기와 가시나무 울타리는 파리에, 바위틈과 모든 초장은 벌에 연결시켰다. 또한 클레리커스(Clericus)는 이들 장소들이 군대가 주둔하기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오스발트(Oswalt)는 이들이 곤충들로 비유된 외국 군대로부터 유다 백성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선택한 장소들이라고 하였다.

=====7:20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 애굽은 유다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선은 다시 앗수르에게 향한다. 18절에서 벌로 비유된 앗수르가 여기서 다시 삭도로 비유된다. 그것은 '세내어 온 삭도'이다. 선지자는 아마도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상당한 양의 돈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듯하다(왕하 16:7,8).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수염도 깎으시리라 - 1:6에서 전신에 상처입은 패전(敗戰) 군인으로 그려진 유다 백성이 여기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깎여진, 더할 나위없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삼하 10:4,5).

=====7:21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 벌거벗은 상태 곧 황무지로 변하고 만 유다의 비참함을 선지자는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소유물은 겨우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젖을 뽑아낸들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현저한 인구 감소로 인하여 그 젖이 오히려 남아돌 것이라고 한다.

=====7:22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 앗수르의 삭도를 피하여 남아 있는 자에게 제공되어질 음식은 응결된 젖과 야생꿀이 그 전부이다. 그들은 싫증이 날 정도로 계속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Delitzsch).

=====7:23
그 날에는 천(千) 주(株)에 은 일천 개의 가치되는 포도나무...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 본절 이하에서 질려와 형극으로 특징지워지는 황무지에 대한 묘사가 계속 반복된다. 남은 자들이 뻐터와 꿀로 연명하게 되는 것은 포도와 곡식으로 가득 채워졌던 언덕들이 모두 가시덤불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은 일천 개'는 은화 일천 세겔을 말한다. 이처럼 최상품의 포도나무들이 재배되던 곳이 그 날에는 질려와 형극으로 무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 임할 비극을 극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7:24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 찔레와 형극으로 가득 차고 사나운 들짐승들이 서식하게 될 그곳에 살과 활을 갖지 않고 나가는 것은 크나큰 위험이 될 것이다. 그 땅이 쓸모가 있다면 어쩌면 사냥터로나 적합할지도 모른다.

=====7:25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 이전의 유다는 포도나무로 상징되는 농업 경제를 자랑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제는 소와 양으로 상징되는 유목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가 본 유다의 미래 모습이다(G.W.Grogan).


본장은 1-12장까지의 예언 단락 중 6장을 축으로 하는 두 번째 예언 단락(7-12장)
의 첫 부분이다. 이 예언 단락의 주제는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
로' 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소명 기사에 이어 메시야 예언들 중 가장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인 '임마누엘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이 임마누엘 예언은 8장까지 이
어져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심판 중에서도 이사야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게 된다. 이상과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 아하스를 만나는 이사야
의 모습이 나타나는 전반부(1-9절), (2) 임마누엘 예언이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중반부
(10-17절), (3) 앗수르를 통한 심판 예언이 들어 있는 후반부(18-25절)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여기서 전반부와 중반부는 동일한 사건의 연속으로서 내용상 중반부는 전
반부의 결론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앞의 두 단락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술
이기 때문에 서술체를 주로 사용한 반면 마지막 단락은 시가체로 기록된 심판에 관한
예언이다. 한편, 본장의 역사적 배경은 수리아(아람)와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이 동맹
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그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왕하 16장 ; 대하 28장). 새
로 등극한 유다왕 아하스가 친앗수르 노선으로 선회하자 반앗수르 동맹을 결성하고 있
던 수리아와 북 이스라엘은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끼고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그 목표는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아하스 왕을 폐위시키고 '다브엘의 아들' 을 정점으로
하는 괴뢰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르신이 이끄는 수리아 군대는 요르단 동편을 지나
남쪽으로 이르러 한때 웃시야 왕이 정복했던 항구 도시 엘랏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
다. 찬탈자 베가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직접 유다로 향하여 예루살렘 북쪽에서 하
루 동안에 용사 12만 명을 죽이고 20만 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초기에 각개
격파 작전을 세웠던 수리아 - 이스라엘 원정군은 드디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하
고자 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항 속에서 본장의 예언은 펼쳐지게 된다. 하나님은 두
려워하는 아하스와 백성들에게(2절), 두 동맹군들의 멸망을 선포하신다(309절). 그리
고 믿음 없는 아하스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 위한 한 징조
(sign)를 구하라고 하셨으나 아하스는 그 같은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표
징을 구하기를 거절한 아하스를 대신하여 친히 '임마누엘 예언' (14-17절)을 표징으로
주신 것이다. 이제, 매우 난해하여 많은 신학적 논란을 격꼬 있는 '임마누엘 예언'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비메시야적 견해: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것으로서 본 예언이 먼 미래
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하스 당시의 시대 상황에만 관계되는 것이므로 메시야 예언 구
절이 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이들은 14절의 '알마'(* )는 '처녀'가 아니라
'젊은 여인'을 의미하며, '아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사야나, 히스기야 또는 그 당
시의 다른 아이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들은 임마누엘 예언이 당시의 다른 아
이등일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들은 임마누엘 예언이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아하스에게만 징표로 작용하는 예언이며 메시야의 예언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 자체의 사도적 해석(使徒的 解釋, 마 1:23, 24)을 무시하므로 비성격적
이라고 볼 수 있다.
(2) 단일 언급설: 전통적인 기독 교회의 해석으로서 임마누엘 예언이 오직 예수 그
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만 관계하는 예언이라는 견해이다. 14절의 '알마'는 처녀 리
브가, 미리암 등을 지칭할 때 쓰였고 70인역(LXX)에서도 처녀를 의미하는 '파르데노스
'( )로 번역 되었으므로 당연히 처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처녀가
낳은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오직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만
관계하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임마누엘' (14절 ; 8:8 ; 9:6)이라는 칭호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도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3) 이중 언급설: 많은 개혁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받는 해석으로서 처녀가 잉태하여
낳을 아들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지만, 일차적으로는 당대의 한 인물과 관
계되어 당시의 아하스에게 표징으로 작용한다는 견해이다. 단일 언급설은 임마누엘 예
언이 메시야 예언 구적임을 잘 밝히고 있지만, 15-18절을 설명하기가 어렵다.즉 그 아
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 아람과 에브라임의 땅이 멸망할 것이라
는 예언의 내용은 아이가 실제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유다를 침공한 두 왕이 멸망하
는 것을 목격하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임마누엘 예언은 먼 미래의 (약 800년 후) 메
시야의 오심에 관계할 뿐아니라, 당시의 아하스와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3-9
절)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에 대한 실제 표징이 되어야 하기에 반드시 당대의 한 인물
과도 관계되어야 한다. 이 징조를 알리는 아이(sign-child)는 아하스와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알려주는 일종의 시간 측정기(chronometer)의 역
할을 한다. 그러므로 단일 언급설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맥에 조화되는 설명을 하기 의
해 '이중 성취설'(double-fulfillment theory)이 가장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장에 나타나고 있는 '임마누엘 예언'은 일차적으로 유다가 수리아 - 에브라임 동맹
군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궁극적으로는 처녀
에게서 나실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게 된다는 표징이다. 이 예언
은 후에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어 나타난다(8:8, 10 ; 9:6 ; 11:1). 하나님의 백성들
의 모든 구원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다.

1. 아하스를 만난 이사야 선지자(7:1-9)

본 단락은 이사야가 선지자로서의 소명에 자발적으로 응답한 후(6:8)실제로 사역하
는 장면에 해당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다 왕 아하스를 만나 에브라임과
아람의 본 단락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사상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두 동맹군의 침략은 하나님의 구속 경류에 대한 사단의 도전이다(5, 6절) : 하
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시고(11:1,10) 하나님의 나라를 견고
하게 건설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유다를 멸망시키려는 음모는 하나
님에 대한 반역 행위에 해당된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공
격이 실패할 것이며(7절) 결국 멸망하게 된다고 선언하셨다(16절 ; 8:4).
(2)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위로와 확신을 전달하셨다: 사실 동맹군의 소식을 들은 왕
과 백성들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큰 동요와 함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하
나님은 이사야와 그 아들 스알야숩으로 하여금 아하스를 방문하여 하나님의 돌보심을
전달하도록 명하셨다. 즉, 아람과 에브라임은 결코 유다를 파괴할 수 없으리라는 하나
님의 약속을 언급했다(4절). 그리고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지금까지 전달된 말씀을 믿
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적절한 시기에 말씀으로 확
신을 주신다.
(3) 하나님의 구원은 구체적인 역사 현장에서 수행된다 : 구원은 추상적이거나 관
념적인 영역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역사의 과정 속에서 실제적으로 실행되
는 것이다. 아하스는 강력한 두 동맹군의 침략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전달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적군으로부터의 구원은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임할 궁극적 구속
의 예표라고 볼 수 있다.

2. 임마누엘 예언(7:10-17)

앞 단락에서 하나님은 두 동맹국의 침입을 받고 불안해 하는 아하스에게 구원의 약
속을 선포하시며 믿음을 촉구하셨다. 그러나 아하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신실
함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음 그의 연약한 믿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한 징조(sign)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삿 6:36-40 ; 왕하 20:8-11). 표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하기 의해 징표로 주어지는 기적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집중시
켜 순종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하스는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12절) 라고 말함으로 경건을 가장한 위선과 불신의
응답(신 6:16)을 하고 말았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에 나타난 영적 교
훈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약속보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아하스(12절) : 아하스는 당면한 국
난의 극복을 약속하시는 아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도움으
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아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
의 침공을 받게 되며,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36:1-20).이와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
하지 않고 군대나 무기를 의지하는 태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이
다.
(2) 예언의 이중성 : 아하스가 징표를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 예언을 스
스로 말씀하셨다. 특별히 '보라'(* , 히나)는 단어를 사용하여 미래에 하실 일
에대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하나님은 이 임마누엘 예언을 아하스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실 것에 대한 당대의 징표로 삼으실 뿐 아니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이래적 예
언으로 삼으셨다. 이와같이 구약 선지서의 예언은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메시야의 도
래를 통해 이중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 구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예언이 나타
나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
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고 말씀하시며 구약 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고 있음을 확
증하셨다. 이 말씀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
키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구약 성경을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 히브리 원
어 성경 앞에도 이 말이 써 있다. 구약 성경이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하고 있음에 대해 증거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많은 성경 구절이 증거하고 있
다 (눅4:20,21 ; 22:37 ; 24:27 ; 요 5:39,46,47 ; 15:25 ; 행 3:18 ; 10:43 ; 17:2,3
; 롬1:2). 약 1,400여 년 동안 기록된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의 본성, 생애, 사역, 대
속적 죽음에 관한 예언이 직접적으로 350여 회, 간접적으로는 450여 회나 나타나 있다
.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성경 기록의 가장 큰 목적은 메시야의 속죄 사역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제시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모든 계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구약 중에서도 이사야서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아주 풍부하게
록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장이 7,8,9,11,42,49,53,61장 등이다. 그래서 많은 사
람들은 이사야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모든 구약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나, 이사야서에는 그 예언의 빈도와 깊이에 있어서 다른 성경보다도 더
풍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 중에 중요한 몇 가지를 도표로
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
| 예 언 내 용 | 구 약 의 예 언 | 신 약 의 성 취 |
+----------------------------------+----------------------+--------------------+
| 여인의 후손으로 나실 것 | 창 3:15 | 눅 2:6,7 ; 갈 4:4 |
| 아부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것 | 창 22:18 | 마 1:1 ; 갈 3:16 |
| 이새(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 | 사 11:1,10 | 마 1:6 |
| 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해 | 사 9:6 ; 미 5:2 | 요 1:1 ; 골 1:17 |
| 주(主)라고 불리실 것 | 시 110:1 | 히 1:8-13 |
| 처녀에게서 나실 것 | 사 7:14 ; 9:6 |마1:23 ; 눅1:31 ;2:7|
| 베들레헴에서 강생하실 것 | 미 5:2 | 마 2:1 ; 눅 2:4-7 |
| 헤롯이 아이들을 죽일 것 | 렘 31:15 | 마 2:16-18 |
|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실 것| 호 11:1 | 마 2:14,15 |
| 갈릴리에서 공생에를 시작하실 것 | 사 9:1,2 | 마 4:12-17 |
|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 | 시 69:9 | 요 2:12-17 |
|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 | 슥 9:9 | 요 12:13-15 |
| 친구에게 배반당하실 것 | 시 41:9 | 막 14:10 |
| 은 30에 팔리실 것 | 슥 11:12,13 | 마 26:15 ; 27:3 |
| 대속적 고난, 죽음의 구체적인 모습| 사 53장 ; 시 22편 | 4 복음서 |
| 죽었다가 다시 사실 것(부활) | 시 16:10 ; 118:17 | 행 3:15 ; 4 복음서 |
| 하늘에 오르실 것(승천) | 시 68:18 | 행 1:9 |
|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 | 시 110:1 |막16:19 ; 행 2:34,35|
+----------------------------------+----------------------+--------------------+

3. 앗수르를 통한 심판 예언(7:18-25)

선지자의 소명과 임마누엘 예언이 선포된 이후(6:1-7:17), 이제 다시 유다에 임할
심판에 대한 언급이 시작된다. 이러한 심판 예언은 문맥적으로 5:26-30에 이어지는 것
이다. 아하스 왕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앗수르 군대의 힘을 통해 위기를 극복
하려고 했을 때 유다는 필연적으로 파멸을 당하게 될 운명에 빠지게 된다. 본 단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유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철저한 심판을 구
체적이고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먼저 선지자는 외국 군대가 전영토를 뒤덮을 것
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한다(18,19절 ; 왕하 23:29-34). 이러한 사실을 효과적으로 설명
하기 위해 군대를 그 지역에 많았던 곤충, 즉 파리와 벌에 비유하고 있다.다음으로 선
지자는 유다 백성이 처참하게 유린당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21-25절). 아하스의 요청
으로 아람과 이수라엘의 두 왕을 폐한 앗수를 왕은 거기서 황폐화(23-25절)등을 경험
하게 된다. 사실 '뻐터와 야생 꿀'은 농산물의 경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구할 수 있
는 유일한 음식을 의미한다. 전쟁으로 인하여 포도원과 기타 과수원이 황폐케 되고,
경작인이 없어져 '온 땅'에 질려와 형극만 가득하게 될 것이므로 초식 동물의 젖과 야
생 꿀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서의 유다의
교만과 반역의 태도는 아하스 당대 외에도 B.C 714년(히스기야 14년)과 B.C 650년(므
낫세 47년)에 세 차례에 걸친 앗수르의 침략을 불러오게 된다.
우리는 본장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엄중성을 깨닫게 된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
씀을 무시하고 인간적 능력을 신뢰한 결과 처참한 심판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우리는 아하스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신뢰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한 임마누엘 예언을 표징으로 삼아 일체의 불신을 배격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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