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 이 말이 왕이 죽기 전을 가리키는지 혹은 죽은 후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왕이 살아 있을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Gray). 웃시야 왕의 치세 때 유다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대하 26장) 백성들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번영의 이면에는 종교적 부패의 상처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규적인 제사는 있었으나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식어갔으며 향락과 사치 풍조가 더욱 번져갔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한편,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B.C. 745-727년)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런 때에 선지자는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을 찾아갔다.
내가 본즉 - 이 말이 선지자가 실제로 눈을 뜨고 보았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요 4:24). 그러면 선지자가 상상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의 내적 경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는가?(Gray, Knobel).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 경우에는 계시의 진실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양식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 즉 내적인 영혼의 눈으로 초자연적인 상(像)을 인식했음을 말할 것이다(G.Vos, Delitzsch).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느냐'이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환상 속에서 선지자는 지상의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성전으로 옮겨진다. 선지자가 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 '높이 들린 보좌'는 아마도 여섯 계단의 꼭대기에 놓여져 있는 솔로몬의 보좌에서 연상된 듯하다(왕상 10:18).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의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계속된다.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왕들은 보통 흘러 내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찰 만큼 방대했으니 여기서 지상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왕되신 하나님의 장엄하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Calvin). '성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칼'(* )은 웅장하게 건축된 궁전(잠 30:28;단 1:4) 혹은 여호와의 성전(왕하 24:13;시 29:9)을 뜻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사야가 본 이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다름 아니다(요 12:41). 이 영광은 죄많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비밀한 것이어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긴 옷자락으로 감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주의 영광에 있어서는 그 감추임조차도 영광이다. 그 영광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고 오직 공중나는 스랍들만 그를 찬미할 뿐이다.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모셔 섰다'(* , 오메딤 밈마알 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위에 섰다'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낸다(왕상 22:19;욥 1:6;슥 6:5). '스랍들'(* , 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뱀'을 뜻하는 '사라프'(* )이다(14:29;30:6;민 21:6,8;신 8:15).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세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그 둘로는...그 둘로는 날며 -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한 듯하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Leupold).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서로'(* , 제 엘 제)라는 말은 스랍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노래 부르는 방식(교송)을 나타낸다. '창화하다'(* , 카라)는 목소리를 드높여 찬양함을 뜻한다. 천상의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로는 욥 38:7;시 29:1,2;계 4:8;7:11 등이 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스랍들이 부른 찬양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의 '거룩'(* , 카도쉬)과 '영광'(* , 카보드)이었다. '거룩'이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아니하는 불가해한 신비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광'은 역사와 자연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한 신적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민 14:21;시 57:5,11;72:19). 다시 말하면, '거룩'은 인간과 구별되는 신적 본성으로서 은폐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영광'은 인간을 위한 신적 현현(顯現)으로서 계시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이래 기독 교회는 세 번 반복된 '거룩'이란 말에서 삼위 일체의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같은 반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최고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렘 7:4;겔 21:27). 칼빈(Calvin)조차도 이 구절에서 삼위 일체의 교의(敎義)를 인용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아니하였다.
=====6:4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 여호와가 강림하실 때 시내 산이 진동했던 것처럼(출 19:18) 여호와의 거룩과 영광을 찬미하는 스랍들의 드높은 노랫소리에 선지자가 서 있는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다고 하니, 이는 스랍들의 찬양이 얼마나 힘있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연기는 스랍들의 찬양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 연기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4:5;왕상 8:10;겔 10:4, Gray, Knobel).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직역하면 , '나에게 화로다. 왜냐하면 나는 끝장났기 때문이다'이다. 선지자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완전 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됨과 그 백성의 죄악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33:14) 부패한 인간이 그 앞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출 33:20;삿 13:22). 환상 가운데 여호와를 목도한 선지자는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의식 속에서는 자기가 벌써 죽은 것처럼 느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 선지자는 자신의 죄 가운데 특별히 부정한 입술을 지목해서 말한다. 이는 첫째로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조할 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이 입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마 15:11) 부정한 입술이 모든 죄악을 총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었다(약 3:2 참조).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깊은 연대 의식(혹은 책임 의식)을 느꼈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은 29:13에서 발견된다:"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그 자신과 민족의 깊은 절망 가운데서 선지자가 뵈온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었다. 성전 가득 뒤덮인 긴 옷자락, 주변에서 쉼없이 찬미하는 스랍들의 모습에서(1,2절) 선지자는 이 같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의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 의식(儀式)이 뒤따른다.
=====6:6,7
화저(火著)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내 입에 대며 - '단'은 제단이니 곧 하늘에 있는 향단을 가리킨다. 계시록에 의하면, 하늘 향단은 금으로 만들어졌다(계 8:3;9:13). '핀 숯'은 불타는 숯 혹은 뜨거운 돌을 뜻한다. 천상에서 거행된 죄사함의 성례는 스랍 중 하나가 단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정금으로 만든 화저(불집게)를 가지고 핀 숯을 취하여 선지자에게로 날아가 그가 부정하다고 탄식한 입술을 거기에 댐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적인 행동은 다만 선지자에게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결코 '핀 숯' 자체가 정화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보라...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스랍들의 말로 앞절의 신비한 행동의 의미가 밝혀진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평행법은 선지자에게 사죄의 확신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본문에서 선지자가 받은 사죄 의식에는 피흘림의 제사가 결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 행위로 인하여 그 같은 제사가 불필요하게 될 날이 올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그 영광을 뵈었던 선지자는 이제 사죄함을 받은 이후에 영적인 귀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그 음성은 직접적으로 선지자를 향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Jerome).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선지자는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에서 그곳에 참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왕상 22:19,20 참조). 그것은 헌신의 열정에 의해 자원하여 일하러 갈 사람을 구하는 음성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연관으로 인하여 '엘로힘'(* )이라고까지 불리웠다(창 6:2;시 8:5).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입술이 정결케 됨으로써 죄에서 자유함을 입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 가슴의 뜨거움만큼이나 불타는 정열로 이렇게 소리친다:'나를 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 히네니)란 말은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따라서 '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말이다(Alexander, Michaelis). 죄씻음을 받은 감격이 헌신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경우로는 시 51:12-15에 언급되어 있다.
=====6:9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 하나님의 명령은 '가서-말하라'는 두 개의 동사로 집약된다(출 3:16;7:15;삼하 7:5;18:21;왕상 18:8;대상 17:4). '이 백성'이란 말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경멸이 내포되어 있다(6:10;8:6,11,12;9:13;28:11, 14; 29:13;미 2:11;학 2:14).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을 상실하고 그 행위로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할 것이요 -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지자가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성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며',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무감각(혹은 영적인 불감증)은 예레미야가 말한 바 '마음이 강퍅하고 목이 곧은'(렘 7:24-26) 백성들의 상태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에 의해 그의 사역의 결과를 묘사한 말로 4복음서에서 인용되었으며(마 13:13;막 4:12;눅 8:10;요 12:39), 바울에 의해서 두번 인용되었다(행 28:26,27;롬 11:8).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 앞절의 명령이 백성들에게 내려진 것이라면, 본문의 명령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깨닫지 못하며 알지도 못하리라'로 단언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지 못지않게 선지자 역시 자신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미리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삼중의 명령으로 나타났다. (1)'둔하게 하라'(* , 하쉬멘):이는 '살지게 하라', '기름으로 덮이게 하라'는 뜻이니,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에 대해 마음으로 전혀 지각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2)'막히게 하라'(* , 하크베드):이는 '무디게 하라'는 뜻이니, 청력이 무디어져서 어떤 깨달음도 갖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3)'감기게 하라'(* , 하솨):이는 '흐려지게 하라'는 뜻이니, 시력과 함께 모든 통찰력을 상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사역으로 인해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된다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지자가 선포해야 할 말씀 그 자체에서 이 같은 결과가 직접적으로 초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의 등처럼, 길의 빛처럼'(시 119:105) 사람을 밝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전적으로 죄인의 부패한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비밀을 이렇게 묘사한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칼빈(Calvin)이 잘 말한 것처럼, 눈이 어두운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다 하여 원망할 수 없는 일이며, 귀가 막힌 사람이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여 불평할 수 없는 일이며, 지각이 둔한 사람이 자기가 이해 못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판의 제1차적인 원인은 늘 죄인에게 있다. 그위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말미암는 버려둠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롬 1:24,26,28).
=====6:11,12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마침내는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일 수 없다는 것을 선지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주여, 이 백성들의 눈먼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 되겠습니까?"(시 90:13 참조). 이 같은 물음의 배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즉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아니하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대답하시되...많을 때까지니라 - 선지자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이 너무 깊어서 완전한 파멸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위한 것이어서 그것은 온 나라가 황폐되고 백성들은 이방 민족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전국가적인 재난으로 실현되어지리라는 사실이다.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 본문은 내용상 앞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혹 심판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다 할지라도 - 1/10은 극히 적은 수를 가리킨다 - 그마저 계속되는 파멸의 와류에 삼키우고 말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인 마침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절망에서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베임을 당한 나무의 표상에서 이러한 사상이 암시되고 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남아 있는 것같이 -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상록수에 가까우며 완전히 베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는 강인한 속성 때문에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 선택된 듯하다(Delitzsch). '그루터기'라고 번역된 '마체베트'(* )는 '뿌리'(De Wette), '줄기'(Gesenius), '기둥'(Leupold)을 뜻하는 말로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담지하고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Alexander).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최후까지 보존되어질 이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 , 제라 코데쉬)이다. '거룩한 씨'는 '행악의 종자'(* , 제라 메레임)와 대조되는 것으로서(1:4), 거듭되는 심판을 겪고서도 끝까지 살아 남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롬 11:5). 이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어'(37:31) 거대한 나무를 이루게 될 것이다.
본장은 이 예언서의 저자인 이사야의 서명과 위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거의 모든 예언서는 이와같이 예언서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위탁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렘 1:1-19 ; 겔 1:1-3:15 ; 소선지서의 1장 초두), 이는 예언의 신빙
성에 대한 증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사야도 예언 선포의 대상인 유다 백성들에게
이 예언의 출처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예언의 선포를 위하여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본장을 기록했다.
이러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본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예언의 대상과 함께 중
심적인 메시지도 함께 주어지고 있다. 이 내용을 구분해 보면, (1)이사야가 본 환상(1
-4절), (2)성결케 된 이사야(5-7절), (3)선지자읫명과 위임(8-13절)등과 같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사야의 소명에 대해 기록하는 본장이 예레미야서나 에스
겔서처럼 1장 서두에 오지않고 6장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
러나 본서를 면밀히 검토해 볼 때 그 의도를 짐작학 수 있게 된다. 이미 살펴본 바아
같이유다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예언으로 이루어진 1-12장은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다. 1-11장의 유다에 관한 예언은 12장의 찬송시를 통해 일단 마무리되며, 13장부터
는 유다의 주변국들인 바벧론,모압,다메섹,애굽,앗수르,두로 등에 대한 심판 선언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사실은 본장이 1-12장까지의 예언의 한 가
운데위치하고 있으며 본 단락 안에 들어 있는 각 세부 단락의 예언은 본장과 7:1-17(
임마누엘장)을 중심 축으로 하여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1장의 총
론(prologue)은 유다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시작하였으나 12장의 결론은 찬송
시(doxology)로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 끝을 맺고 있다.
또한 본장과 7:1-17은 문체적으로도 1-12장의 다른 부분과 구별이 되고 있는데, 다
른 부분이 시형(poetic style)을 문체적 주틀로 하여 기록된 반면 이 부분은 서술
체(narrative style)를 주틀로 하여 기록되었다. 이러한 서술적 단락(narrati
vesection)은 36-40장에도 나타나는데, 본서의 전체 예언은 구조적으로 이 두 서술적
단락을 축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중에서 첫 번째 축이 되는 이 부분(6,7장)이 서술적
으로 기록된 것은 본장이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고
,7:1-17은 시로-에브라임전쟁(Syro-Ephraimite)을 배경으로 하여 이사야와 당시의 유
다왕 아하스와의 만남과 대화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서술체로
기록된 1절-7:17을 축으로하여 전반부에서는 심판을 강조하고 후반부에서는 구원을 부
각시킨다. 즉 이 부분은 유다의 심판에 대한 강조에서 구원에 대한 강조로 이행되어
가는 분기점으로서 예언 흐름의 변화를 대칭적으로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1-12장의 중심 축에 해당되는 본장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 기사를
삽입함으로써 예언의 신적 기원을 확증하고 성취의 확실성을 보증하려고 하였다. 이
제1-12장의 구조를 알기 쉽게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
| 전반부-심판강조 |
+---------+------------------+---------------+---------------------------------+
| | | 이사야의 소명 | |
| 1장 | 서언(prologue) | 임마누엘 예언 | 후반부-구원강조 |
| | | (6:1-7:17) | |
+---------+------------------+ +-----------+---------------------+
| 2:1-5 |구원(시온의 영광) | +----+ | 7:18-8:22 |심판(앗수르의 심판) |
+---------+------------------+ | 대 | +-----------+---------------------+
| 2:6-4:1 |심판(여로와의 날) | | 칭 | | 9:1:7 |구원(한 아기의 탄생) |
+---------+------------------+ | | +-----------+---------------------+
| 4:2-6 |구원(여호와의 싹) | | 구 | | 9:8-10:4 |심판(대적의 침략) |
+---------+------------------+ | 조 | +-----------+---------------------+
| 5:1-30 |심판(포도원 비유) | +----+ | 10:5-11:16|구원(이새의 한 싹) |
+---------+------------------+ 역사적 기록: +-----------+---------------------+
| | | | |
|예언 기록:시형(poetic style)| 서술전 문체 | 12:1-6 | 찬송시(doxology) |
| |(narrative | | |
+----------------------------+ style) +-----------+---------------------+
| | 예언 기록:시형(poetic style) |
+---------------+---------------------------------+
한편, 본장은 이사야의 소명 사건에 대한 기록과 함께 '하나님의 어전 회의' 장면
이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천상 회의는 왕상 22:19-23 ; 욥 1:6-12 ; 2:1-6 ; 슥 3:1-
5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천상 회의 장면을 환상으로 목격했고 하
나님으로부터 백성들에게 예언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세계의 통치자이신 하나
님께서는 유다의 미래에 관한 천상의 결정을 자신의 종 이사야에게 알려 주셨다. 그러
므로이사야의 메시지는 참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여호와의 회의'와 관련하여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기위해, 본장과 왕상22:19-23에 나타나 있는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선지자가 본 이
상'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제안으로 남유다 왕 여호사밧
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아람에게 빼앗겼던 땅인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
으키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런데 당시 약 400여명의 선지자들은 모두 승리
를 예언했으나 미가야 선지자는 전투에서의 패배와 함께 아합 왕의 죽음을 예언했다.
이가야는 아합왕과 400여 거짓 예언자들 중의 시드기야로부터 온갖 비난과 조롱을
당했으나 결국 전쟁의 결과는 미가야의 예언대로 되고 말았다. 이제 여호와의 어전 회
의에 관한 1-13절의 기록과 왕상 22:19-23을 비교하면서 참된 예언의 성격에 대해 알
아보도하자.
+---------------------------------+------------+-------------------------------+
| 왕상 22:19-23 | 비교점 | 사 6:1-13 |
+---------------------------------+------------+-------------------------------+
|여호와께서 보좌에 앉으시고,하늘의| 회의 광경 |여호와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 |
|만군이 보좌 좌우편에 섬(19절) | |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 | |함. 스랍들이 모셔 섰고 하나님의|
| | |거룩하심을 창화함(1-4절) |
+---------------------------------+------------+-------------------------------+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 |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20절) | 여호와의 |위하여 갈꼬"(8절) |
|(아합의 죽음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 |(이미 9-13절에 나타나 있는 유다|
|해 이미 결정됨. 단 그 일을 할 자 | 말씀 |의 심판의 철저함과 남은 자에 대|
|를 찾으심) | |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결 |
| | |정됨. 단 그 결정 사항을 전할 |
| | |사신을 찾으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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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의견 진술 중) 한 영이 나 | | |
|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내가 저를 |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은혜로 죄 |
|꾀이겠나이다"라고 말한 후, 그 구 | 그에 대한 |사함을 받은 이사야가 자원함으로|
|체적 방법을 물으시는 하나님께 "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
|가 나가서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 응답 | 소서"라고 말함(8절) |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고 | | |
|말함(21,22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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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너는 꾀이갰고 또 이루| |백성의 마음을 강퍅케 하여 회개 |
|리라 나가서 그리하라"(22절)고 말 | 회의의 |하지 못하도록 버려두시고(9,10절|
|씀하심으로 전쟁의 패배와 함께 아 | |),거룩한 씨 곧 그루터기를 남기 |
|합을 죽음으로 이끌 방법을 결정함 | 결정 사항 |심(11-13절) |
|(22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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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도표는 선지 사역의 본질을 밝혀주고 있다. 이사야서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서 이사야에게 직접 말씀이 약 60여회나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특별히 본장은 전
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천상 회의의 결정 사항을 이사야서에게 직접 알려주시고 위임하
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위
임을 받지도 않았다(렘 23:22).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스스로의 주관적
인식이나 착각이나 거짓에 근거한다 결국 참된 예언은 인간의 기발한 착상이나 논리
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역사를 운영하실 때 천상 회의를 통해 결정하시고 집행하신
다. 이 같은 경우는 욥 1:6-12 ; 2:1-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욥의 시험은 하늘에서
결정된 것으로서 일반 사람들은 알 수 없었으나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암
3:7).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수신자요 전달자로서
유다의 심판과 구원을 담대하게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상과 같은 특징과 내용
을 함유하고 있는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이사야가 본 환상(6:1-4)
유다에 대한 심판이 강조적으로 부각되는 내용에 이어지는 본 단락은 갑자기 흐름
을 바꾸어 이사야가 하나님의 천상 회의의 장면을 목격하는 환상을 소개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선지자는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선지자는 천상에서 열린 여호와의 어전 회의의 모습을 시청각적으로 묘사한
다.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좌정하셨고, 스랍들은 여호와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소
리높이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높이 들린 보좌'는 언약의 궤로 만들어진 지상 보좌에
대한 하늘의 원형이다(시 11:4). 하나님은 만유의 통치자이시기에 보좌에 앉아 계시며
,스랍들과 많은 영물들을 부리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 지존자(至尊者)께서는 또는 지
성자(至聖者)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와 상관 없는 영물들도 두려움을갖고 찬
송할 만큼 지극하다. 특별히 스랍들이 한, 세 번의 거룩송(Sanctus)은 삼위 일체 하나
님과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 사건의 기록인 본장을 기술함에 있어서 1인칭 서술자
시점을 사용하여 독백(monologue)의 형식으로 기록했는데, 아마도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받은 자신의 주관적 경험임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7장에서는 기술자의 시점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환되고 있다.
2. 성결케 된 이사야(6:5-7)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접한 이사야(1-4절)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부정함을 절실
하게 깨닫게 된다. 죄 많은 백성 가운데 살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뵌 이사야는 "화로
다나는 이제 망하는구나"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의 빛에
의해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 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사실 입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 기관
이다. 입술의 부정은 마음의 부정이요, 본질적인 내면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29:1
3). 이러한 맥락에서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의 죄성에 대해서도 "입술이 부정한 백성'
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사야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성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스랍들을 시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대게 하시
고 죄악이 사해졌음을 선포케 하셨다. 이사야의 죄악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사
하여진 것이다. 이제 비로소 이사야가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명을 수행(8,9절
)할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6:8-13)
이사야가 하나님의 천상 회의를 목격하고(1-4절) 사죄의 은총을 받은(5-7절)내용에
이어지는 본 단락은 하나님의 뜻을 유다 백성에게 전할 사자(messenger)를 찾는 부르
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선지자의 헌신이 주도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선지자로서의 소명과 위임은 바로 앞 단락(1-7절)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
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보고 죄사함을 받은 준비된 자를 통해 구속 역사를 진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과 위임이 드러나는 본문의 중요한
영적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선지자의 자발적 헌신(8절)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천상의 결정
을 전달할 대언자를 찾고 계실때, 이사야는 자진해서"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
서"라고 응답한다. 이사야는 죄에서 성결케 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소명
에대해 기꺼이 헌신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근 죄를 사함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일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50:4-7).
(2)유다의 죄악에 대한 철저한 심판(9-12절):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이스라엘에 대해
회개의 기회까지 박탈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며 예
외가 없다. 이에 대해 선지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요청하는 중보적 형태의 질문
을 드린다(11a)절. 사실 이 같은 물음은 아브라함(창 18:23-25),모세(출 32:11-14),아
모스(암 7:2,5)등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선지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께서는 성읍의 황폐,거민의 멸절,토지의 전폐,포로로 사로잡혀감 등과 같이 철저
한심판을 확증하셨다. 이러한 심판 선언은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되었다(마 13:13-15 ; 요 12:39,40).
(3)남은 자의 구원(13절) : 죄에 대한 단호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운 하나님
께서는 거룩한 씨가 다시 남아 새이스라엘을 형성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사상은앞에서 언급했던 남은 자 사상의 반복으로서 다른 선지자들의 견해와 조화를 이룬다(왕상 19:18 ; 암 3:12).
이상의 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1)성도는 하나님의영광을 본 이사야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2)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자들의 죄를 주권적 은혜로 용서하신다(22:14 ; 27:9 ; 렘 1:9). (3)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우리는 이사야를 본받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4)성도는 심판 중에도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은혜로우심을 찬송하고 감사해야 한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 이 말이 왕이 죽기 전을 가리키는지 혹은 죽은 후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왕이 살아 있을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Gray). 웃시야 왕의 치세 때 유다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대하 26장) 백성들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번영의 이면에는 종교적 부패의 상처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규적인 제사는 있었으나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식어갔으며 향락과 사치 풍조가 더욱 번져갔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한편,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B.C. 745-727년)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런 때에 선지자는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을 찾아갔다.
내가 본즉 - 이 말이 선지자가 실제로 눈을 뜨고 보았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요 4:24). 그러면 선지자가 상상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의 내적 경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는가?(Gray, Knobel).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 경우에는 계시의 진실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양식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 즉 내적인 영혼의 눈으로 초자연적인 상(像)을 인식했음을 말할 것이다(G.Vos, Delitzsch).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느냐'이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환상 속에서 선지자는 지상의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성전으로 옮겨진다. 선지자가 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 '높이 들린 보좌'는 아마도 여섯 계단의 꼭대기에 놓여져 있는 솔로몬의 보좌에서 연상된 듯하다(왕상 10:18).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의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계속된다.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왕들은 보통 흘러 내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찰 만큼 방대했으니 여기서 지상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왕되신 하나님의 장엄하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Calvin). '성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칼'(* )은 웅장하게 건축된 궁전(잠 30:28;단 1:4) 혹은 여호와의 성전(왕하 24:13;시 29:9)을 뜻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사야가 본 이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다름 아니다(요 12:41). 이 영광은 죄많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비밀한 것이어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긴 옷자락으로 감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주의 영광에 있어서는 그 감추임조차도 영광이다. 그 영광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고 오직 공중나는 스랍들만 그를 찬미할 뿐이다.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모셔 섰다'(* , 오메딤 밈마알 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위에 섰다'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낸다(왕상 22:19;욥 1:6;슥 6:5). '스랍들'(* , 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뱀'을 뜻하는 '사라프'(* )이다(14:29;30:6;민 21:6,8;신 8:15).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세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그 둘로는...그 둘로는 날며 -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한 듯하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Leupold).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서로'(* , 제 엘 제)라는 말은 스랍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노래 부르는 방식(교송)을 나타낸다. '창화하다'(* , 카라)는 목소리를 드높여 찬양함을 뜻한다. 천상의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로는 욥 38:7;시 29:1,2;계 4:8;7:11 등이 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스랍들이 부른 찬양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의 '거룩'(* , 카도쉬)과 '영광'(* , 카보드)이었다. '거룩'이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아니하는 불가해한 신비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광'은 역사와 자연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한 신적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민 14:21;시 57:5,11;72:19). 다시 말하면, '거룩'은 인간과 구별되는 신적 본성으로서 은폐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영광'은 인간을 위한 신적 현현(顯現)으로서 계시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이래 기독 교회는 세 번 반복된 '거룩'이란 말에서 삼위 일체의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같은 반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최고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렘 7:4;겔 21:27). 칼빈(Calvin)조차도 이 구절에서 삼위 일체의 교의(敎義)를 인용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아니하였다.
=====6:4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 여호와가 강림하실 때 시내 산이 진동했던 것처럼(출 19:18) 여호와의 거룩과 영광을 찬미하는 스랍들의 드높은 노랫소리에 선지자가 서 있는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다고 하니, 이는 스랍들의 찬양이 얼마나 힘있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연기는 스랍들의 찬양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 연기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4:5;왕상 8:10;겔 10:4, Gray, Knobel).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직역하면 , '나에게 화로다. 왜냐하면 나는 끝장났기 때문이다'이다. 선지자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완전 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됨과 그 백성의 죄악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33:14) 부패한 인간이 그 앞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출 33:20;삿 13:22). 환상 가운데 여호와를 목도한 선지자는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의식 속에서는 자기가 벌써 죽은 것처럼 느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 선지자는 자신의 죄 가운데 특별히 부정한 입술을 지목해서 말한다. 이는 첫째로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조할 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이 입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마 15:11) 부정한 입술이 모든 죄악을 총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었다(약 3:2 참조).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깊은 연대 의식(혹은 책임 의식)을 느꼈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은 29:13에서 발견된다:"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그 자신과 민족의 깊은 절망 가운데서 선지자가 뵈온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었다. 성전 가득 뒤덮인 긴 옷자락, 주변에서 쉼없이 찬미하는 스랍들의 모습에서(1,2절) 선지자는 이 같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의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 의식(儀式)이 뒤따른다.
=====6:6,7
화저(火著)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내 입에 대며 - '단'은 제단이니 곧 하늘에 있는 향단을 가리킨다. 계시록에 의하면, 하늘 향단은 금으로 만들어졌다(계 8:3;9:13). '핀 숯'은 불타는 숯 혹은 뜨거운 돌을 뜻한다. 천상에서 거행된 죄사함의 성례는 스랍 중 하나가 단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정금으로 만든 화저(불집게)를 가지고 핀 숯을 취하여 선지자에게로 날아가 그가 부정하다고 탄식한 입술을 거기에 댐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적인 행동은 다만 선지자에게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결코 '핀 숯' 자체가 정화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보라...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스랍들의 말로 앞절의 신비한 행동의 의미가 밝혀진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평행법은 선지자에게 사죄의 확신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본문에서 선지자가 받은 사죄 의식에는 피흘림의 제사가 결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 행위로 인하여 그 같은 제사가 불필요하게 될 날이 올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그 영광을 뵈었던 선지자는 이제 사죄함을 받은 이후에 영적인 귀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그 음성은 직접적으로 선지자를 향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Jerome).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선지자는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에서 그곳에 참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왕상 22:19,20 참조). 그것은 헌신의 열정에 의해 자원하여 일하러 갈 사람을 구하는 음성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연관으로 인하여 '엘로힘'(* )이라고까지 불리웠다(창 6:2;시 8:5).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입술이 정결케 됨으로써 죄에서 자유함을 입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 가슴의 뜨거움만큼이나 불타는 정열로 이렇게 소리친다:'나를 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 히네니)란 말은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따라서 '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말이다(Alexander, Michaelis). 죄씻음을 받은 감격이 헌신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경우로는 시 51:12-15에 언급되어 있다.
=====6:9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 하나님의 명령은 '가서-말하라'는 두 개의 동사로 집약된다(출 3:16;7:15;삼하 7:5;18:21;왕상 18:8;대상 17:4). '이 백성'이란 말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경멸이 내포되어 있다(6:10;8:6,11,12;9:13;28:11, 14; 29:13;미 2:11;학 2:14).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을 상실하고 그 행위로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할 것이요 -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지자가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성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며',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무감각(혹은 영적인 불감증)은 예레미야가 말한 바 '마음이 강퍅하고 목이 곧은'(렘 7:24-26) 백성들의 상태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에 의해 그의 사역의 결과를 묘사한 말로 4복음서에서 인용되었으며(마 13:13;막 4:12;눅 8:10;요 12:39), 바울에 의해서 두번 인용되었다(행 28:26,27;롬 11:8).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 앞절의 명령이 백성들에게 내려진 것이라면, 본문의 명령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깨닫지 못하며 알지도 못하리라'로 단언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지 못지않게 선지자 역시 자신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미리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삼중의 명령으로 나타났다. (1)'둔하게 하라'(* , 하쉬멘):이는 '살지게 하라', '기름으로 덮이게 하라'는 뜻이니,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에 대해 마음으로 전혀 지각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2)'막히게 하라'(* , 하크베드):이는 '무디게 하라'는 뜻이니, 청력이 무디어져서 어떤 깨달음도 갖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3)'감기게 하라'(* , 하솨):이는 '흐려지게 하라'는 뜻이니, 시력과 함께 모든 통찰력을 상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사역으로 인해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된다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지자가 선포해야 할 말씀 그 자체에서 이 같은 결과가 직접적으로 초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의 등처럼, 길의 빛처럼'(시 119:105) 사람을 밝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전적으로 죄인의 부패한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비밀을 이렇게 묘사한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칼빈(Calvin)이 잘 말한 것처럼, 눈이 어두운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다 하여 원망할 수 없는 일이며, 귀가 막힌 사람이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여 불평할 수 없는 일이며, 지각이 둔한 사람이 자기가 이해 못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판의 제1차적인 원인은 늘 죄인에게 있다. 그위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말미암는 버려둠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롬 1:24,26,28).
=====6:11,12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마침내는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일 수 없다는 것을 선지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주여, 이 백성들의 눈먼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 되겠습니까?"(시 90:13 참조). 이 같은 물음의 배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즉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아니하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대답하시되...많을 때까지니라 - 선지자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이 너무 깊어서 완전한 파멸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위한 것이어서 그것은 온 나라가 황폐되고 백성들은 이방 민족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전국가적인 재난으로 실현되어지리라는 사실이다.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 본문은 내용상 앞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혹 심판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다 할지라도 - 1/10은 극히 적은 수를 가리킨다 - 그마저 계속되는 파멸의 와류에 삼키우고 말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인 마침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절망에서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베임을 당한 나무의 표상에서 이러한 사상이 암시되고 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남아 있는 것같이 -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상록수에 가까우며 완전히 베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는 강인한 속성 때문에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 선택된 듯하다(Delitzsch). '그루터기'라고 번역된 '마체베트'(* )는 '뿌리'(De Wette), '줄기'(Gesenius), '기둥'(Leupold)을 뜻하는 말로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담지하고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Alexander).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최후까지 보존되어질 이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 , 제라 코데쉬)이다. '거룩한 씨'는 '행악의 종자'(* , 제라 메레임)와 대조되는 것으로서(1:4), 거듭되는 심판을 겪고서도 끝까지 살아 남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롬 11:5). 이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어'(37:31) 거대한 나무를 이루게 될 것이다.
본장은 이 예언서의 저자인 이사야의 서명과 위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거의 모든 예언서는 이와같이 예언서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위탁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렘 1:1-19 ; 겔 1:1-3:15 ; 소선지서의 1장 초두), 이는 예언의 신빙
성에 대한 증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사야도 예언 선포의 대상인 유다 백성들에게
이 예언의 출처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예언의 선포를 위하여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본장을 기록했다.
이러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본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예언의 대상과 함께 중
심적인 메시지도 함께 주어지고 있다. 이 내용을 구분해 보면, (1)이사야가 본 환상(1
-4절), (2)성결케 된 이사야(5-7절), (3)선지자읫명과 위임(8-13절)등과 같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사야의 소명에 대해 기록하는 본장이 예레미야서나 에스
겔서처럼 1장 서두에 오지않고 6장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
러나 본서를 면밀히 검토해 볼 때 그 의도를 짐작학 수 있게 된다. 이미 살펴본 바아
같이유다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예언으로 이루어진 1-12장은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다. 1-11장의 유다에 관한 예언은 12장의 찬송시를 통해 일단 마무리되며, 13장부터
는 유다의 주변국들인 바벧론,모압,다메섹,애굽,앗수르,두로 등에 대한 심판 선언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사실은 본장이 1-12장까지의 예언의 한 가
운데위치하고 있으며 본 단락 안에 들어 있는 각 세부 단락의 예언은 본장과 7:1-17(
임마누엘장)을 중심 축으로 하여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1장의 총
론(prologue)은 유다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시작하였으나 12장의 결론은 찬송
시(doxology)로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 끝을 맺고 있다.
또한 본장과 7:1-17은 문체적으로도 1-12장의 다른 부분과 구별이 되고 있는데, 다
른 부분이 시형(poetic style)을 문체적 주틀로 하여 기록된 반면 이 부분은 서술
체(narrative style)를 주틀로 하여 기록되었다. 이러한 서술적 단락(narrati
vesection)은 36-40장에도 나타나는데, 본서의 전체 예언은 구조적으로 이 두 서술적
단락을 축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중에서 첫 번째 축이 되는 이 부분(6,7장)이 서술적
으로 기록된 것은 본장이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고
,7:1-17은 시로-에브라임전쟁(Syro-Ephraimite)을 배경으로 하여 이사야와 당시의 유
다왕 아하스와의 만남과 대화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서술체로
기록된 1절-7:17을 축으로하여 전반부에서는 심판을 강조하고 후반부에서는 구원을 부
각시킨다. 즉 이 부분은 유다의 심판에 대한 강조에서 구원에 대한 강조로 이행되어
가는 분기점으로서 예언 흐름의 변화를 대칭적으로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1-12장의 중심 축에 해당되는 본장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 기사를
삽입함으로써 예언의 신적 기원을 확증하고 성취의 확실성을 보증하려고 하였다. 이
제1-12장의 구조를 알기 쉽게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
| 전반부-심판강조 |
+---------+------------------+---------------+---------------------------------+
| | | 이사야의 소명 | |
| 1장 | 서언(prologue) | 임마누엘 예언 | 후반부-구원강조 |
| | | (6:1-7:17) | |
+---------+------------------+ +-----------+---------------------+
| 2:1-5 |구원(시온의 영광) | +----+ | 7:18-8:22 |심판(앗수르의 심판) |
+---------+------------------+ | 대 | +-----------+---------------------+
| 2:6-4:1 |심판(여로와의 날) | | 칭 | | 9:1:7 |구원(한 아기의 탄생) |
+---------+------------------+ | | +-----------+---------------------+
| 4:2-6 |구원(여호와의 싹) | | 구 | | 9:8-10:4 |심판(대적의 침략) |
+---------+------------------+ | 조 | +-----------+---------------------+
| 5:1-30 |심판(포도원 비유) | +----+ | 10:5-11:16|구원(이새의 한 싹) |
+---------+------------------+ 역사적 기록: +-----------+---------------------+
| | | | |
|예언 기록:시형(poetic style)| 서술전 문체 | 12:1-6 | 찬송시(doxology) |
| |(narrative | | |
+----------------------------+ style) +-----------+---------------------+
| | 예언 기록:시형(poetic style) |
+---------------+---------------------------------+
한편, 본장은 이사야의 소명 사건에 대한 기록과 함께 '하나님의 어전 회의' 장면
이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천상 회의는 왕상 22:19-23 ; 욥 1:6-12 ; 2:1-6 ; 슥 3:1-
5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천상 회의 장면을 환상으로 목격했고 하
나님으로부터 백성들에게 예언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세계의 통치자이신 하나
님께서는 유다의 미래에 관한 천상의 결정을 자신의 종 이사야에게 알려 주셨다. 그러
므로이사야의 메시지는 참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여호와의 회의'와 관련하여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기위해, 본장과 왕상22:19-23에 나타나 있는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선지자가 본 이
상'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제안으로 남유다 왕 여호사밧
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아람에게 빼앗겼던 땅인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
으키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런데 당시 약 400여명의 선지자들은 모두 승리
를 예언했으나 미가야 선지자는 전투에서의 패배와 함께 아합 왕의 죽음을 예언했다.
이가야는 아합왕과 400여 거짓 예언자들 중의 시드기야로부터 온갖 비난과 조롱을
당했으나 결국 전쟁의 결과는 미가야의 예언대로 되고 말았다. 이제 여호와의 어전 회
의에 관한 1-13절의 기록과 왕상 22:19-23을 비교하면서 참된 예언의 성격에 대해 알
아보도하자.
+---------------------------------+------------+-------------------------------+
| 왕상 22:19-23 | 비교점 | 사 6:1-13 |
+---------------------------------+------------+-------------------------------+
|여호와께서 보좌에 앉으시고,하늘의| 회의 광경 |여호와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 |
|만군이 보좌 좌우편에 섬(19절) | |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 | |함. 스랍들이 모셔 섰고 하나님의|
| | |거룩하심을 창화함(1-4절) |
+---------------------------------+------------+-------------------------------+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 |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20절) | 여호와의 |위하여 갈꼬"(8절) |
|(아합의 죽음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 |(이미 9-13절에 나타나 있는 유다|
|해 이미 결정됨. 단 그 일을 할 자 | 말씀 |의 심판의 철저함과 남은 자에 대|
|를 찾으심) | |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결 |
| | |정됨. 단 그 결정 사항을 전할 |
| | |사신을 찾으심) |
+---------------------------------+------------+-------------------------------+
|(다양한 의견 진술 중) 한 영이 나 | | |
|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내가 저를 |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은혜로 죄 |
|꾀이겠나이다"라고 말한 후, 그 구 | 그에 대한 |사함을 받은 이사야가 자원함으로|
|체적 방법을 물으시는 하나님께 "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
|가 나가서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 응답 | 소서"라고 말함(8절) |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고 | | |
|말함(21,22절) | | |
+---------------------------------+------------+-------------------------------+
|여호와께서 "너는 꾀이갰고 또 이루| |백성의 마음을 강퍅케 하여 회개 |
|리라 나가서 그리하라"(22절)고 말 | 회의의 |하지 못하도록 버려두시고(9,10절|
|씀하심으로 전쟁의 패배와 함께 아 | |),거룩한 씨 곧 그루터기를 남기 |
|합을 죽음으로 이끌 방법을 결정함 | 결정 사항 |심(11-13절) |
|(22절) | | |
+---------------------------------+------------+-------------------------------+
이상의 도표는 선지 사역의 본질을 밝혀주고 있다. 이사야서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서 이사야에게 직접 말씀이 약 60여회나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특별히 본장은 전
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천상 회의의 결정 사항을 이사야서에게 직접 알려주시고 위임하
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위
임을 받지도 않았다(렘 23:22).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스스로의 주관적
인식이나 착각이나 거짓에 근거한다 결국 참된 예언은 인간의 기발한 착상이나 논리
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역사를 운영하실 때 천상 회의를 통해 결정하시고 집행하신
다. 이 같은 경우는 욥 1:6-12 ; 2:1-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욥의 시험은 하늘에서
결정된 것으로서 일반 사람들은 알 수 없었으나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암
3:7).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수신자요 전달자로서
유다의 심판과 구원을 담대하게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상과 같은 특징과 내용
을 함유하고 있는 본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이사야가 본 환상(6:1-4)
유다에 대한 심판이 강조적으로 부각되는 내용에 이어지는 본 단락은 갑자기 흐름
을 바꾸어 이사야가 하나님의 천상 회의의 장면을 목격하는 환상을 소개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선지자는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선지자는 천상에서 열린 여호와의 어전 회의의 모습을 시청각적으로 묘사한
다.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좌정하셨고, 스랍들은 여호와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소
리높이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높이 들린 보좌'는 언약의 궤로 만들어진 지상 보좌에
대한 하늘의 원형이다(시 11:4). 하나님은 만유의 통치자이시기에 보좌에 앉아 계시며
,스랍들과 많은 영물들을 부리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 지존자(至尊者)께서는 또는 지
성자(至聖者)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와 상관 없는 영물들도 두려움을갖고 찬
송할 만큼 지극하다. 특별히 스랍들이 한, 세 번의 거룩송(Sanctus)은 삼위 일체 하나
님과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 사건의 기록인 본장을 기술함에 있어서 1인칭 서술자
시점을 사용하여 독백(monologue)의 형식으로 기록했는데, 아마도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받은 자신의 주관적 경험임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7장에서는 기술자의 시점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환되고 있다.
2. 성결케 된 이사야(6:5-7)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접한 이사야(1-4절)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부정함을 절실
하게 깨닫게 된다. 죄 많은 백성 가운데 살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뵌 이사야는 "화로
다나는 이제 망하는구나"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의 빛에
의해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 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사실 입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 기관
이다. 입술의 부정은 마음의 부정이요, 본질적인 내면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29:1
3). 이러한 맥락에서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의 죄성에 대해서도 "입술이 부정한 백성'
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사야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성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스랍들을 시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대게 하시
고 죄악이 사해졌음을 선포케 하셨다. 이사야의 죄악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사
하여진 것이다. 이제 비로소 이사야가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명을 수행(8,9절
)할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6:8-13)
이사야가 하나님의 천상 회의를 목격하고(1-4절) 사죄의 은총을 받은(5-7절)내용에
이어지는 본 단락은 하나님의 뜻을 유다 백성에게 전할 사자(messenger)를 찾는 부르
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선지자의 헌신이 주도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선지자로서의 소명과 위임은 바로 앞 단락(1-7절)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
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보고 죄사함을 받은 준비된 자를 통해 구속 역사를 진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과 위임이 드러나는 본문의 중요한
영적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선지자의 자발적 헌신(8절)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천상의 결정
을 전달할 대언자를 찾고 계실때, 이사야는 자진해서"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
서"라고 응답한다. 이사야는 죄에서 성결케 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소명
에대해 기꺼이 헌신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근 죄를 사함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일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50:4-7).
(2)유다의 죄악에 대한 철저한 심판(9-12절):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이스라엘에 대해
회개의 기회까지 박탈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며 예
외가 없다. 이에 대해 선지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요청하는 중보적 형태의 질문
을 드린다(11a)절. 사실 이 같은 물음은 아브라함(창 18:23-25),모세(출 32:11-14),아
모스(암 7:2,5)등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선지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께서는 성읍의 황폐,거민의 멸절,토지의 전폐,포로로 사로잡혀감 등과 같이 철저
한심판을 확증하셨다. 이러한 심판 선언은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되었다(마 13:13-15 ; 요 12:39,40).
(3)남은 자의 구원(13절) : 죄에 대한 단호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운 하나님
께서는 거룩한 씨가 다시 남아 새이스라엘을 형성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사상은앞에서 언급했던 남은 자 사상의 반복으로서 다른 선지자들의 견해와 조화를 이룬다(왕상 19:18 ; 암 3:12).
이상의 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1)성도는 하나님의영광을 본 이사야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2)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자들의 죄를 주권적 은혜로 용서하신다(22:14 ; 27:9 ; 렘 1:9). (3)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우리는 이사야를 본받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4)성도는 심판 중에도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은혜로우심을 찬송하고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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