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 이전에 고운 얼굴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었던 여자들이 더할 나위 없는 비참함으로 남자를 구걸하는 지경에까지 떨어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곱'은 완전수로서 허다하게 많은 여자들이 한 남자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본문의 한 남자는 전쟁에서 죽지 않고 생존한 사람이다. 그에게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애걸한다.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 우리를 먹여 달라, 입혀 달라 조르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본처가 아닌 첩이라 할지라도 부양받을 권리를 지녔다. 그러나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는 여인들은 그러한 당연한 권리조차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 그들의 소원은 한 가지뿐이다. 제발 결혼만 해달라는 것이며 '...의 아내'라고 불리우게 해 달라는 것이다(창12:17, '아브람의 아내 사래';창 46:19, '야곱의 아내 라헬').
우리로 수치를 면케하라 - 그들이 이처럼 결혼하기를 구걸하는 것은 수치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수치는 과부의 수치요(54:4), 또한 자식을 갖지 못한 수치이다(창 30:23). 시온의 부녀들의 교만과 허영은 끝내 수치를 면케 해달라고 비는 굴욕으로 마감된다.
=====4:2
그 날에(* , 바욤 하후) - 앞절과 동일한 '그 날에'라는 말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용은 정반대이다. 1절의 '그 날'이 심판의 날이요 수치의 날이며 서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날이라면, 본문의 '그 날'은 회복의 날이요 영광의 날이며 새로운 싹이 돋는 날이라고 할 것이다. 여호와의 싹이...그 땅의 소산은 - '여호와의 싹'이 메시야를 가리킨다고 보는 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일치한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미 시작하신 구원 운동을 비유하는 것이며, 그 운동의 일직선상에서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Leupold). '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체마흐'(* )는 식물의 자라남이 함축하고 있는 신선한 생명력과 활력을 나타내는 말로서, 우리말의 '싹', '가지'보다 더 포괄적이다(창 19:25;렘 23:5;겔 16:7;호 8:7;슷 3:8). 때로 망각되고 때로 은폐되었던 여호와의 싹, 즉 여호와의 구속 사역은 질긴 생명력으로 엄동(嚴冬)의 땅을 뚫고 솟아올라 그 가냘픈 듯이 보이는 싹을 틔운다. 어떤 주석가들은 병행하는 구절에서 이와 동의어로 쓰인 '땅의 소산'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이중적 기원을 읽기도 한다(Vitringa, Hendewerk). 곧 그것이 '여호와의 싹'인 한에서 신적인 기원을, 다른 한편 그것이 '땅의 소산'인 한에서 인간적인 기원을 묘사한다는 것이다(롬 1:3, 4 참조). 그러나 선지자가 그 같은 것을 말하고자 의도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계속해서 선지자는 거듭되는 4개의 명사로 여호와의 싹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 개역 성경에는 '아름답다'와 '영화롭다'로만 표현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비슷한 뜻을 가진 4개의 명사, 즉 '체비'(* ), '카보드'(* ), '가온'(* ), '티프에레트'(* )로 표현되어 있다. '체비'는 광채 혹은 영광을 뜻하며, '카보드'는 명예와 존귀 혹은 영광을 뜻하며, '가온'은 고상함과 위엄을 뜻하며, '티프에레트'는 장식 혹은 광채를 뜻한다. 이처럼 '아름다움'을 뜻하는 4개의 명사를 병렬시킴으로써 선지자는 여호와의 싹이 나타내는 비할 데 없는 영광과 그 아름다움을 최고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아름다움이 모든 이들에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메시야의 영광이 믿음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만 밝히 보이듯이, 여호와의 싹과 땅의 소산으로 비유된 여호와의 구원 운동이 지니는 지극한 아름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 - 이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며, 2:2-4:1에 묘사된 심판에서 생존한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Leupold). 이들에 대한 묘사가 다음절에서 계속된다.
=====4:3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 '시온'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집을 가리키는 동일한 이름이다(2:3). '남아 있는 자'(* , 하니쉬아르)와 '머물러 있는 자'(* , 하노타르)는 동의어로서 둘 다 집합적인 의미를 갖는 단수로 쓰였다(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n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고 칭함을 얻으리니 - '녹명된'이란 표현은 '생명의 책'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출 32:32;시 69:28;단 12:1;말 3:16;눅 10:20;빌 4:3;계 3:5;13:8;17:8;20:12, 15;21:27). 고대의 도성(都城)들은 그 도성의 시민으로 인정된 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한 시민 인명록(人名錄)을 보존하였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고 혹은 지워지는 것은 공동체의 삶가가 관련하여 개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종말론적으로 표상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요 세말의 구원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차이는 단지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느냐 안하느냐를 넘어서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의 문제로까지 부각되는 것이다(행 13:38 참조). 따라서 이들에게 '거룩'(* , 카도쉬)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부여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화하는 심판을 통해서 더러움의 때를 벗고 순결한 원상태로 회복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4:4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 '루아흐'(* )는 '영' 혹은 '바람'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영은 땅 위를 휩쓰는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놀라운 힘과 권능으로써 더러운 모든 것들을 제거하신다. 그 앞에서 악인이 징벌을 당하기 때문에 그것은 '심판의 영'이라 불리우며, 또한 불로 태움같이 악을 철저히 제거하기 때문에 그것은 '소멸의 영'이라 불리운다(Delitzsch). 이러한 씻음이 선행된 뒤에야 이스라엘은 비로소 본래의 '거룩한 나라'(출 19:6)로 회복될 것이다.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정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 '시온의 딸들'의 죄악을 선지자는 '더러움'으로 표현하고, '예루살렘'(의 남자들)의 죄악을 '피'로 표현한다. 남자들, 특히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피'(* , 데메)라 불러 마땅하다. 여자들은 허영과 사치속에서 음욕을 찾아 헐떡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더러움'(* , 초아트)이라 불러 당연하다. '오물(혹은 배설물)'을 뜻하는 '초아트'는 그들의 도덕적 불결함을 드러내고, '피'는 그들의 법적인 살인 행위를 고발한다(Delitzsch).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온전히 씻겨지며, 청결케 될 날이온다. 그날은 여호와의 구원의 날이다. '씻으시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하츠'(* )는 '몸을 정결케 한다'는 신체적 의미 이외에도 법적으로 '사면되다', '깨끗케 되다'는 의미로 내포하고 있다.
=====4:5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만드시고 -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그리고 창조하실 것이다(* , 우바라), 여호와께서. 시온 산의 모든 장소(* , 메콘) 위에와 그녀의 집회(* , 미크라에하)위에...' 시온산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여호와의 전의 산'(2:2)일 뿐 아니라 거룩한 백성들이 모여서 축제를 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여호와는 과거 광야 유랑 때 시내 산에서 보였던 영광을 훨씬 능가하는 새로운 영광을 창조하신다. 이 영광으로 인해 '시온 산 구석구석이 찬란하게 빛날 것'(Calvin)이며, 이 영광의 빛으로 인해 시온 산은 모든 산 위에 뛰어나 굳게 서며 만방이 그리로 몰려들게 될 것이다(2:2).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 - 선지자는 독자의 시선을 멀리 광야 유랑 시대로 인도한다. 그때 여호와는 낮의 구름과 밤의 불로써 출애굽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해주셨던 것이다(출 13:21, 22). 낮의 구름과 밤의 불은 여호와의 임재와 보호의 표징이었다. 구름과 화염 사이에 놓여 있는 '연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델리취(Delitzsch)는 '구름과 연기'를 중음법(重音法)으로 파악한다. 즉, 형체는 구름이면서 실체는 연기로 되어 있어 일반적인 구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구름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이가 주석가들은 불이 없이는 연기가 생길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화염'에 연결시킨다(70인역, Vitringa, Lange, Hengstenberg). 공동 번역은 본문을 이렇게 풀이하였다:'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솟아오르는 연기와 환한 불길.
'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 '천막'(* , 후파)은 덮여 있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시온 산위에 구름 형태로, 연기와 화염의 빛의 형태로 떠 있게 된다.
=====4:6
또 천막이 있어서...되리라 - 본절에 나오는 낮의 더위와 풍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적대적인 세력들에 대한 상징어이다. 이들에 맞서 그늘을 지어주고 숨을 곳을 만들어 주는 '천막'은 '구름'(Lowth)이나 '시온 산'(Delitzsch)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으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Gesenius, Gray).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의 그늘이며 피난처가 되시는 것이다(시 91:1):"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6, 7).
유다의 지도자들과 시온의 딸들의 죄로 인해 받게 될 심판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3장의 내용은 처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이제까지의 비참함과는 대조적으로 남은 자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본서의 전반부(1-39장)에는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40-66장)에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말씀이 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본장은 전반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서 두드러지게 계시될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소망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본장에서 드러나는 구원 약속은 근본적으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라고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장차 오실 메시야의 속죄 사역을 통해 죄악과 심판에서 구속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특별히 본장은 이와 같은 메시야의 도래로 인한 남은 자들의 구원과 영광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여호와의 싹'을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의 싹'은 '다윗의 후손'이나 '가지'로도 불려지는 그리스도의 명칭으로서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의 역할을 알려주고 있다. 선지자는 이와같이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메시야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사야서가 '구약 중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어떤 선지서보다도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보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보다 풍성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장은 전체가 6절로 이루어진 짧은 장이다. 더군다나 1절이 내용적으로 3장에 속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체가 5절로 이루어지고, 하나의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짧은 장이다. 그러므로 본장은 사실상 단락 구분이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용적 구분을 해보면 (1)심판의 결과(1절), (2)'여호와의 싹'으로 인한 남은 자의 영광(2,3절), (3)'여호와의 싹으로 인한 시온의 정화(4절), (4)정화된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5,6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제 본서에서 처음으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본장의 주도적인 사상과 영적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장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시온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거룩함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메시야의 중보로 인해서 구속 역사는 완성된다. 이러한 사실은 앞 부분(3장)을 마무리 짓는 참혹한 심판(1절)으로부터 갑자기 비약적 구원(2절)으로 진전된 사실에서 확인된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구원은 인간의 도리와 노력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무상의 주권적 은혜에 기인한다(요 3:5 ; 롬 3:23,24).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3:16-4:1)과 예루살렘의 피(1:15-18)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그리스도의 사역(마 3:11,12)으로 인하여 정결해질 것이다.
둘째, 구원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속죄 사역으로 이루어짐을 밝힌다. 본장에서는 '여호와의 싹'(* ,체마 야훼), '그 땅의 소산'등을 통하여 남은 자들이 구원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2,3절). 이와 같은 메시야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은 본서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며 53장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특히 메시야를 의미하는 '여호와의 싹'은 예언이 진행되면서 '거룩한 씨'(6:13),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11:1), '연한 순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52:2)등으로 계속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렘23:5,6 ; 33:15,16에서는 장차 왕이 되어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유다를 구원할 '한 의로운 가지'로 묘사되고, 슥 3:8 ; 6:12에서는 하나님의 종 '순'(筍)으로 묘사되어 나타난다.
셋째, 본장은 남은 자를 통하여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이스라엘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출 13:21,22 ; 민 9:14-23). 이스라엘 백성의 거듭된 반역에도 불구하고 성막에 임재하시며 끝까지 보호하셨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께서는 메시야의 속죄 사역을 통해 성결케 된 이스라엘 위에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백성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성결하게 만드시고, 이전보다 더욱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인도를 베푸시는 것이다. 결국 남은 자에게 임할 영광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남은 자'(The Remnant)사상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며(1:9 ; 10:20-22 ;11:11,16 ; 37:4,31),미가서의 곳곳에서도 나타난다(미 2:12 ; 4:6,7 ; 5:3,7,8 ; 7:18,19).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통해 생명을 얻도록 선택한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며 생명책에 기록하여 하늘의 영광을 맛보도록 허락하신다(출 32:32,33 ; 시 139:16 ; 단 12:1 ; 행 13:48).
우리는 본 단락을 통해 (1)심판중에도 '남은 자'를 남기시는 하나님은 지극히 은
혜로우신분이며(2,3절), (2)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인생들의 칭의(稱義)는 오로지 메시야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4절), (3)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인생들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된다(5,6절)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남은 자(The Remn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 남은 자(The Remnant)사상은 본서 1:9 ; 4:3 ; 10:20-22 ; 11:11,16 ; 37:4,31,32등에 나타나고 있는 이사야서의 핵심
사상중의 하나다. 이 남은 자 사상은 특이하게도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아들 중 하나에게 붙여준 이름 '스알야숩'에도 나타난다(7:3). 스알야숩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위협(심판)임과 동시에 약속(구원)이다.
이 같은 남은 자 사상은 B.C. 9세기 선지자인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
에도 나타난다(왕상 19:15-18 ; 롬 11:2-5). 엘리야가 받은 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철저히 심판하시되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은혜로 남은 자를 남겨두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메시지는 모든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심지어 모세도 이것을 이미 말했다(신 28:58-62). 그리고 B.C. 8세기 이후의 선지자들의 메시지에는 엘리야가 받은 메시지가 더욱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남은 자 사상은 엘리야 시대 이전, 아니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부터 있어 왔다. 즉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이 남은 자의 원리는 역사하였다. 아담의 첫 아들인 가인은 의로운 동생 아벧을 죽임으로 약속의 씨가 아님이 드러났고, 약속의 씨는 아벧 대신에 주신 셋을 통하여 보존되었다. 남은 자의 원리는 특별히 노아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당시에는 노아만이 남은 자였다. 그 악한 세대 전체가 홍수로 멸망을 받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하나님앞에 의로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창6:8,9 ; 7:1)가족과 함께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철저한 심판 속에서도 이렇게 남은 자를 남겨두신 이유는 약속된 여인의 후손(창 3:15)의 출현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사 그와 언약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사건에서도 아브람은 당시의 남은 자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도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기시는 것은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한 것이다. 남은 자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남은 자'는 혈통적 유대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벧론에 사로잡혀 갔다가 다시 돌아올 자들을 의미하지만 장차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메시야의 속죄 사역의 은혜 안으로 부름받게 될 모든 인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천하 만민을 위하여 하신 일이다. 미가서의 "야곱의 남은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미 5:7), "야곱의 남은 자는 역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미 5:8) 등과 같은 말씀을 생각해 볼때 남은 자는 혈통적 이스라엘뿐 아니라 천하 열국의 많은 백성으로 그 범위가 확대됨을 알 수 있다(19:23-25 ; 25:6-8 ; 55:5 ; 시 86:9). 이처럼 이스라엘의 심판은 열방의 구원을 가져오는데, 이러한 이방 백성의 구원은 욜 2:28-32 ; 암 9:7 등에 나타난다. 이같이 남은 자 사상 안에서는 육적 이스라엘과 이방인들과의 갈등과 차이가 해소되게 된다.
바울 사도는 남은 자는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며(롬 9:24), 호세아의 글을 인용하여 "내가 내 백성 아니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롬 9:25,26)라고 증거했다.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 이전에 고운 얼굴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었던 여자들이 더할 나위 없는 비참함으로 남자를 구걸하는 지경에까지 떨어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곱'은 완전수로서 허다하게 많은 여자들이 한 남자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본문의 한 남자는 전쟁에서 죽지 않고 생존한 사람이다. 그에게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애걸한다.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 우리를 먹여 달라, 입혀 달라 조르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본처가 아닌 첩이라 할지라도 부양받을 권리를 지녔다. 그러나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는 여인들은 그러한 당연한 권리조차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 그들의 소원은 한 가지뿐이다. 제발 결혼만 해달라는 것이며 '...의 아내'라고 불리우게 해 달라는 것이다(창12:17, '아브람의 아내 사래';창 46:19, '야곱의 아내 라헬').
우리로 수치를 면케하라 - 그들이 이처럼 결혼하기를 구걸하는 것은 수치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수치는 과부의 수치요(54:4), 또한 자식을 갖지 못한 수치이다(창 30:23). 시온의 부녀들의 교만과 허영은 끝내 수치를 면케 해달라고 비는 굴욕으로 마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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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 바욤 하후) - 앞절과 동일한 '그 날에'라는 말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용은 정반대이다. 1절의 '그 날'이 심판의 날이요 수치의 날이며 서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날이라면, 본문의 '그 날'은 회복의 날이요 영광의 날이며 새로운 싹이 돋는 날이라고 할 것이다. 여호와의 싹이...그 땅의 소산은 - '여호와의 싹'이 메시야를 가리킨다고 보는 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일치한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미 시작하신 구원 운동을 비유하는 것이며, 그 운동의 일직선상에서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Leupold). '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체마흐'(* )는 식물의 자라남이 함축하고 있는 신선한 생명력과 활력을 나타내는 말로서, 우리말의 '싹', '가지'보다 더 포괄적이다(창 19:25;렘 23:5;겔 16:7;호 8:7;슷 3:8). 때로 망각되고 때로 은폐되었던 여호와의 싹, 즉 여호와의 구속 사역은 질긴 생명력으로 엄동(嚴冬)의 땅을 뚫고 솟아올라 그 가냘픈 듯이 보이는 싹을 틔운다. 어떤 주석가들은 병행하는 구절에서 이와 동의어로 쓰인 '땅의 소산'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이중적 기원을 읽기도 한다(Vitringa, Hendewerk). 곧 그것이 '여호와의 싹'인 한에서 신적인 기원을, 다른 한편 그것이 '땅의 소산'인 한에서 인간적인 기원을 묘사한다는 것이다(롬 1:3, 4 참조). 그러나 선지자가 그 같은 것을 말하고자 의도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계속해서 선지자는 거듭되는 4개의 명사로 여호와의 싹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 개역 성경에는 '아름답다'와 '영화롭다'로만 표현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비슷한 뜻을 가진 4개의 명사, 즉 '체비'(* ), '카보드'(* ), '가온'(* ), '티프에레트'(* )로 표현되어 있다. '체비'는 광채 혹은 영광을 뜻하며, '카보드'는 명예와 존귀 혹은 영광을 뜻하며, '가온'은 고상함과 위엄을 뜻하며, '티프에레트'는 장식 혹은 광채를 뜻한다. 이처럼 '아름다움'을 뜻하는 4개의 명사를 병렬시킴으로써 선지자는 여호와의 싹이 나타내는 비할 데 없는 영광과 그 아름다움을 최고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아름다움이 모든 이들에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메시야의 영광이 믿음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만 밝히 보이듯이, 여호와의 싹과 땅의 소산으로 비유된 여호와의 구원 운동이 지니는 지극한 아름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 - 이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며, 2:2-4:1에 묘사된 심판에서 생존한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Leupold). 이들에 대한 묘사가 다음절에서 계속된다.
=====4:3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 '시온'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집을 가리키는 동일한 이름이다(2:3). '남아 있는 자'(* , 하니쉬아르)와 '머물러 있는 자'(* , 하노타르)는 동의어로서 둘 다 집합적인 의미를 갖는 단수로 쓰였다(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n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고 칭함을 얻으리니 - '녹명된'이란 표현은 '생명의 책'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출 32:32;시 69:28;단 12:1;말 3:16;눅 10:20;빌 4:3;계 3:5;13:8;17:8;20:12, 15;21:27). 고대의 도성(都城)들은 그 도성의 시민으로 인정된 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한 시민 인명록(人名錄)을 보존하였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고 혹은 지워지는 것은 공동체의 삶가가 관련하여 개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종말론적으로 표상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요 세말의 구원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차이는 단지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느냐 안하느냐를 넘어서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의 문제로까지 부각되는 것이다(행 13:38 참조). 따라서 이들에게 '거룩'(* , 카도쉬)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부여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화하는 심판을 통해서 더러움의 때를 벗고 순결한 원상태로 회복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4:4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 '루아흐'(* )는 '영' 혹은 '바람'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영은 땅 위를 휩쓰는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놀라운 힘과 권능으로써 더러운 모든 것들을 제거하신다. 그 앞에서 악인이 징벌을 당하기 때문에 그것은 '심판의 영'이라 불리우며, 또한 불로 태움같이 악을 철저히 제거하기 때문에 그것은 '소멸의 영'이라 불리운다(Delitzsch). 이러한 씻음이 선행된 뒤에야 이스라엘은 비로소 본래의 '거룩한 나라'(출 19:6)로 회복될 것이다.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정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 '시온의 딸들'의 죄악을 선지자는 '더러움'으로 표현하고, '예루살렘'(의 남자들)의 죄악을 '피'로 표현한다. 남자들, 특히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피'(* , 데메)라 불러 마땅하다. 여자들은 허영과 사치속에서 음욕을 찾아 헐떡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더러움'(* , 초아트)이라 불러 당연하다. '오물(혹은 배설물)'을 뜻하는 '초아트'는 그들의 도덕적 불결함을 드러내고, '피'는 그들의 법적인 살인 행위를 고발한다(Delitzsch).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온전히 씻겨지며, 청결케 될 날이온다. 그날은 여호와의 구원의 날이다. '씻으시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하츠'(* )는 '몸을 정결케 한다'는 신체적 의미 이외에도 법적으로 '사면되다', '깨끗케 되다'는 의미로 내포하고 있다.
=====4:5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만드시고 -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그리고 창조하실 것이다(* , 우바라), 여호와께서. 시온 산의 모든 장소(* , 메콘) 위에와 그녀의 집회(* , 미크라에하)위에...' 시온산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여호와의 전의 산'(2:2)일 뿐 아니라 거룩한 백성들이 모여서 축제를 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여호와는 과거 광야 유랑 때 시내 산에서 보였던 영광을 훨씬 능가하는 새로운 영광을 창조하신다. 이 영광으로 인해 '시온 산 구석구석이 찬란하게 빛날 것'(Calvin)이며, 이 영광의 빛으로 인해 시온 산은 모든 산 위에 뛰어나 굳게 서며 만방이 그리로 몰려들게 될 것이다(2:2).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 - 선지자는 독자의 시선을 멀리 광야 유랑 시대로 인도한다. 그때 여호와는 낮의 구름과 밤의 불로써 출애굽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해주셨던 것이다(출 13:21, 22). 낮의 구름과 밤의 불은 여호와의 임재와 보호의 표징이었다. 구름과 화염 사이에 놓여 있는 '연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델리취(Delitzsch)는 '구름과 연기'를 중음법(重音法)으로 파악한다. 즉, 형체는 구름이면서 실체는 연기로 되어 있어 일반적인 구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구름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이가 주석가들은 불이 없이는 연기가 생길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화염'에 연결시킨다(70인역, Vitringa, Lange, Hengstenberg). 공동 번역은 본문을 이렇게 풀이하였다:'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솟아오르는 연기와 환한 불길.
'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 '천막'(* , 후파)은 덮여 있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시온 산위에 구름 형태로, 연기와 화염의 빛의 형태로 떠 있게 된다.
=====4:6
또 천막이 있어서...되리라 - 본절에 나오는 낮의 더위와 풍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적대적인 세력들에 대한 상징어이다. 이들에 맞서 그늘을 지어주고 숨을 곳을 만들어 주는 '천막'은 '구름'(Lowth)이나 '시온 산'(Delitzsch)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으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Gesenius, Gray).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의 그늘이며 피난처가 되시는 것이다(시 91:1):"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6, 7).
유다의 지도자들과 시온의 딸들의 죄로 인해 받게 될 심판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3장의 내용은 처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이제까지의 비참함과는 대조적으로 남은 자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본서의 전반부(1-39장)에는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40-66장)에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말씀이 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본장은 전반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서 두드러지게 계시될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소망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본장에서 드러나는 구원 약속은 근본적으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라고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장차 오실 메시야의 속죄 사역을 통해 죄악과 심판에서 구속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특별히 본장은 이와 같은 메시야의 도래로 인한 남은 자들의 구원과 영광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여호와의 싹'을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의 싹'은 '다윗의 후손'이나 '가지'로도 불려지는 그리스도의 명칭으로서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의 역할을 알려주고 있다. 선지자는 이와같이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메시야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사야서가 '구약 중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어떤 선지서보다도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보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보다 풍성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장은 전체가 6절로 이루어진 짧은 장이다. 더군다나 1절이 내용적으로 3장에 속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체가 5절로 이루어지고, 하나의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짧은 장이다. 그러므로 본장은 사실상 단락 구분이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용적 구분을 해보면 (1)심판의 결과(1절), (2)'여호와의 싹'으로 인한 남은 자의 영광(2,3절), (3)'여호와의 싹으로 인한 시온의 정화(4절), (4)정화된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5,6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제 본서에서 처음으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본장의 주도적인 사상과 영적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장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시온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거룩함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메시야의 중보로 인해서 구속 역사는 완성된다. 이러한 사실은 앞 부분(3장)을 마무리 짓는 참혹한 심판(1절)으로부터 갑자기 비약적 구원(2절)으로 진전된 사실에서 확인된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구원은 인간의 도리와 노력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무상의 주권적 은혜에 기인한다(요 3:5 ; 롬 3:23,24).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3:16-4:1)과 예루살렘의 피(1:15-18)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그리스도의 사역(마 3:11,12)으로 인하여 정결해질 것이다.
둘째, 구원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속죄 사역으로 이루어짐을 밝힌다. 본장에서는 '여호와의 싹'(* ,체마 야훼), '그 땅의 소산'등을 통하여 남은 자들이 구원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2,3절). 이와 같은 메시야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은 본서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며 53장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특히 메시야를 의미하는 '여호와의 싹'은 예언이 진행되면서 '거룩한 씨'(6:13),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11:1), '연한 순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52:2)등으로 계속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렘23:5,6 ; 33:15,16에서는 장차 왕이 되어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유다를 구원할 '한 의로운 가지'로 묘사되고, 슥 3:8 ; 6:12에서는 하나님의 종 '순'(筍)으로 묘사되어 나타난다.
셋째, 본장은 남은 자를 통하여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이스라엘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출 13:21,22 ; 민 9:14-23). 이스라엘 백성의 거듭된 반역에도 불구하고 성막에 임재하시며 끝까지 보호하셨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께서는 메시야의 속죄 사역을 통해 성결케 된 이스라엘 위에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백성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성결하게 만드시고, 이전보다 더욱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인도를 베푸시는 것이다. 결국 남은 자에게 임할 영광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남은 자'(The Remnant)사상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며(1:9 ; 10:20-22 ;11:11,16 ; 37:4,31),미가서의 곳곳에서도 나타난다(미 2:12 ; 4:6,7 ; 5:3,7,8 ; 7:18,19).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통해 생명을 얻도록 선택한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며 생명책에 기록하여 하늘의 영광을 맛보도록 허락하신다(출 32:32,33 ; 시 139:16 ; 단 12:1 ; 행 13:48).
우리는 본 단락을 통해 (1)심판중에도 '남은 자'를 남기시는 하나님은 지극히 은
혜로우신분이며(2,3절), (2)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인생들의 칭의(稱義)는 오로지 메시야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4절), (3)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인생들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된다(5,6절)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남은 자(The Remn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 남은 자(The Remnant)사상은 본서 1:9 ; 4:3 ; 10:20-22 ; 11:11,16 ; 37:4,31,32등에 나타나고 있는 이사야서의 핵심
사상중의 하나다. 이 남은 자 사상은 특이하게도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아들 중 하나에게 붙여준 이름 '스알야숩'에도 나타난다(7:3). 스알야숩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위협(심판)임과 동시에 약속(구원)이다.
이 같은 남은 자 사상은 B.C. 9세기 선지자인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
에도 나타난다(왕상 19:15-18 ; 롬 11:2-5). 엘리야가 받은 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철저히 심판하시되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은혜로 남은 자를 남겨두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메시지는 모든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심지어 모세도 이것을 이미 말했다(신 28:58-62). 그리고 B.C. 8세기 이후의 선지자들의 메시지에는 엘리야가 받은 메시지가 더욱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남은 자 사상은 엘리야 시대 이전, 아니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부터 있어 왔다. 즉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이 남은 자의 원리는 역사하였다. 아담의 첫 아들인 가인은 의로운 동생 아벧을 죽임으로 약속의 씨가 아님이 드러났고, 약속의 씨는 아벧 대신에 주신 셋을 통하여 보존되었다. 남은 자의 원리는 특별히 노아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당시에는 노아만이 남은 자였다. 그 악한 세대 전체가 홍수로 멸망을 받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하나님앞에 의로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창6:8,9 ; 7:1)가족과 함께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철저한 심판 속에서도 이렇게 남은 자를 남겨두신 이유는 약속된 여인의 후손(창 3:15)의 출현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사 그와 언약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사건에서도 아브람은 당시의 남은 자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도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기시는 것은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한 것이다. 남은 자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남은 자'는 혈통적 유대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벧론에 사로잡혀 갔다가 다시 돌아올 자들을 의미하지만 장차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메시야의 속죄 사역의 은혜 안으로 부름받게 될 모든 인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천하 만민을 위하여 하신 일이다. 미가서의 "야곱의 남은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미 5:7), "야곱의 남은 자는 역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미 5:8) 등과 같은 말씀을 생각해 볼때 남은 자는 혈통적 이스라엘뿐 아니라 천하 열국의 많은 백성으로 그 범위가 확대됨을 알 수 있다(19:23-25 ; 25:6-8 ; 55:5 ; 시 86:9). 이처럼 이스라엘의 심판은 열방의 구원을 가져오는데, 이러한 이방 백성의 구원은 욜 2:28-32 ; 암 9:7 등에 나타난다. 이같이 남은 자 사상 안에서는 육적 이스라엘과 이방인들과의 갈등과 차이가 해소되게 된다.
바울 사도는 남은 자는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며(롬 9:24), 호세아의 글을 인용하여 "내가 내 백성 아니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롬 9:25,26)라고 증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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