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이사야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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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 이사야의 예언 활동은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 740-680년경) 계속된다.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적 격변기이다. 웃기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구가한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낳고 그것은 다시 전쟁을 낳았다. 아하스는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고(왕하 16:5),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방어해야만 하였다(왕하 18:13). 이 모든 것은 선지자에 의해 '백성들의 죄악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으로 정식화된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 '아모스'는 히브리어로 '아모츠'(* )라고 발음되며, 선지자 아모스(* )와는 다른 사람이다. 델리취(Delitzsch)는 선지자의 아버지의 이름이 표기된 것은 그 역시 선지자였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라고 말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 선지자의 예언은 주로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마리아를 비롯한 앗수르와 바벨론 등의 주변 열국들까지도 예언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13-27장, 34장). 이런 사실로 미루어 어떤 주석가들은 본절의 표제가 기껏해야 1-12장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들 열방들은 유다와 예루살렘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Alexander), 주제에 있어서 이차적 중요성밖에 갖고 있지 않음(Calvin)을 알 수 있다.
이상(異像)이라 - '이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존'(* )은 본래 엑스터시한 상태에서의 시각적 경험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되어 후에는 예언 일반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본서외에 오바댜와 나훔에서 이와 동일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옵 1:1;나 1:1, '묵시').

=====1:2,3
막(표제)이 오르면 독자의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장중하고 엄숙한 대자연의 법정으로 인도된다. 대재판관(여호와)이 있고 피고(이스라엘)가 있다. 그리고 증인들(하늘과 땅)이 있다. 이 재판은 통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 먼저 증인이 호출된다:'하늘이여...땅이여...'(2a절). 이어서 대재판관이피고에 대한 기소장을 읽는다(2b, 3절). 그 죄명은 반역죄이다. 선지자는 이 광경을 사람들이 잊을 수 없도록 아름답고도 슬픈 4행시로 노래지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 세계는 그 앞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선지자는 특별히 하늘과 땅을 지목해서 부른다. 그 까닭은 하늘과 당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걸쳐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하면서 그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과 보살핌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증인으로 참여한 바 있기 때문이다(신 4:26, 36;30:19;31:28;시 50:4, 5).
내가 지식을 양육하였거늘 -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가 부자(父子) 관계에 비유된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식이었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셨다(출 4:22;호 11:1). 이러한 관계성은 약속의 씨앗이라는 형태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말씀에서 암시되었다(창 15:4). 그 씨앗은 자라서 출애굽의 감격과 더불어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탐스러운 결실로 이어진다. 여호와는 갓태어난 이스라엘을 '자기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인도했으며 온갖 향기로운 것들로 먹게 하셨다(신 32:8-14).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장성한 성년이 되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신 26:19;28:1) 이름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에 가장 잘 부합되는 시대를 찾는다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 그리고 웃시야와 요담의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식인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지극한 돌보심이 개역 성경에는 '양육하였다'는 한 단어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키우고'(* , 깃달티)와 '향상시켰다'(* , 로마므티)는 두 단어로 되어 있다. '깃델'과 '로멤'은 종종 동의어로 사용된다(23:4;겔 31:4).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거역하다'로 번역된 '파솨'(* )는 본래 '도망치다', '달아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의지에서 여호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 이스라엘은 지각이나 통찰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이스라엘이라는 주어에 종속된 '알다'(* , 야다)라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러므로써 그 표현은 더욱 강력한 것이 되었다. 70인역(LXX)은 그 뒤에 여호와를 가리키는 '나를'(* , 메)이라는 목적어를 삽입하였다. 반면에 혹자는 주인을 가리키는 '그를'(him)이라는 목적어를 보충하였다(Gesenius, De Wette). 그러나 본문 그대로가 그 기소를 더욱 통렬한 것이 되게 한다(Leupold). '알다'와 '깨닫다'의 두 동사는 모두 경험에서 직접 취해진 말이다.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식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졌다. 언약 관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여호와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다(출 6:7). 그러나 그지식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는 데 이스라엘의 문제가 있다.

=====1:4
슬프다 - 여호와의 기소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만큼 이를 반향(反響)이라고 하듯 그 뒤를 따르는 화답은 '슬프다'는 감탄사로 시작된다. '슬프다'로 번역된 '호'(* )는 장례식의 애도를 표시하는 비탄의 감탄사(렘 22:18)로서 탄식이나 저주의 표현에 자주 쓰인다(G.E. Wright). 이 말은 다른 곳에서 '화로다' 혹은 '화있을진저'등으로도 번역되었다(5:8;6:5;10:5;28:1 등등).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 - 이스라엘은 정치적, 민족적 공동체로서 자신을 여호와의 나라(백성)라고 이해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약속에 근거하여 자기를 여호와의 자녀(종자)라고 이해하였다.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이해는 이스라엘의 삶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서 항상 작용하였다. 여호와의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당연히 '거룩한 나라'(* , 고이 카도쉬, 출 19:6)가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범죄한 나라'(* , 고이 호테)로 전락하였다. '호테'는 '과녁을 빗나가다'(miss the mark)는 뜻을 가진 동사 '하타'(* )의 능동 분사형으로, 이스라엘이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 , 암 카도쉬, 신 7:6)이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허물 진 백성'(* , 암 케베드 아온)으로 전락하였다. '케베드 아온'은 무거운 죄짐을 지고 허덕이는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다.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 - 여호와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씨'(* , 제라 코데쉬, 6:13)가 되도록 기대되었으나,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행악의 종자'(* , 제라 메레임)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 말을 속격으로 받아들여 '행악자의 자손'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오히려 동격의 의미에서 '행악자들로 구성된 자손'이라고 애해하는 것이 더 낫다(Gesenius' Hebrew Grammar, ed. E. Kautzsch). 여호와께서 양육한 '자식'(* , 바님)은 어찌되었는가 ? 그는 '행위가 부패한 자식'(* , 바님 마쉬히팀)이 되었다. '마쉬히팀'은 '타락한'(Gesenius, Henderson), '남들을 부패시키는'(Leupold), '파괴적으로 행동하는'(Lange), '변질된'(Calvin) 등으로 번역된다. 시적 평행법으로 구성된 이러한 묘사들은 이스라엘이 상습적이고도 계속적인 범죄 행위로 인하여 스스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악해졌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파괴적인 결과만을 산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물러갔도다 - 먼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다. 나아가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경멸하고 업신여겼다. 병행하는 두 구절에서 각기 '버리다'와 '경멸하다'로 번역된 '아자브'(* )와 '나아츠'(* )는 동이가어로서, 두 단어 모두 언약과 관련하여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 신들에게 전향하는 행위를 나타낸다(민 14:11;신 31:16, 20;32:19;삿 2:12 등). 랑게(Lange)는 '버렸다'를 소극적 죄악으로, '경멸하였다'를 적극적 죄악으로 분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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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어찌하여...패역하느냐 -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회개케 할 목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조치들을 취할 때마다 그 결과는 더욱더 악화되었다:'더욱더 패역하느냐.' 실로 극한점에 이른 저들의 죄악 때문에 주의 징계로써도 돌이키게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패역하다'(* , 사라)는 '진실에서 이탈하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여호와를 배신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불법을 더하다'로 번역하였다.
온 머리는...온 마음은 - '머리'(* , 로쉬)와 '마음'(* , 레바브)이란 명사에 관사가 수반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머리와 모든 마음'(every head and every heart)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Hitzig, Lange). 그러나 관사의 생략은 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자주 허용되었으며(9:12 참조), 또한 이 말이 인간의 신체에서 취해진 비유임을 고려할 때, '온 머리와 온 마음'(the whole head and the whole heart)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Alexander). 이것들은 일부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각각 다른 사회적 계층들(Hendewerk)이나 공동체의 내외적 상태(Umbreit)를 상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치명적인 두 부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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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 머리와 마음이 병들고 지친 이스라엘의 내적인 황폐함은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좀더 인상적으로 보여주려는 선지자의 의도에 따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 처절한 모습으로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 - 오래된 상처는 고름을 짜내야 하고 출혈을 막기 위해서는 붕대를 싸매야 한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부드럽게 하고 치료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기름을 발라주어야 한다(눅 10:34 참조).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치료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피폐함은 심각했다.

=====1:7
선지자의 시선은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로 옮겨간다. 그는 고국 이스라엘의 황폐한 정경에서 율법의 저주를 본다.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한 자에 대해서 일찍이 율법은 경고하기를, '그 땅과 성읍이 황폐할 것'(레 26:33)이며, '알지 못하는 민족이 그 토지 소산을 먹을 것'(신 28:33)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에 임한 일이 과연 그러하였다. 선지자에게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율법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이방인에 의해서 생기는 것과 같은 파괴'(Caspari, Lange, Knobel). 이것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채택되고 있으며 이방인을 파멸시키는 자로 명시하고 있는 앞 구절에서 강력한 근거를 얻고 있다. (2)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파괴'(Delitzsch). 이것은 '파괴됨'(* , 마흐페카)이란 낱말이 옛적에 소돔 성에 임했던 무서운 파멸을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다(13:19;신 29:23;암 4:11). 이중 어느 해석을 취하더라도 이스라엘의 황폐된 모습에서 율법의 저주를 읽으려는 선지자의 시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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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시온 - '시온'은 성전의 고귀함 때문에 예루살렘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경에서 '딸'(* , 바트)은 관용적으로 어떤 민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47:1, '바벨론의 딸';시 45:12, '두로의 딸'). 시온과 이스라엘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이룬다. 선지자는 '딸 시온'이란 말로써 사랑스럽고 정결한 이미지를 야기시킨 후 바로 뒤에서 정반대의 비유들을 대조시킴으로써 충격을 가중시킨다(Oswalt). 이 같은 기법은 3:17;4:4에서도 사용되었다.

=====1:9
7절에서 암시된 '소돔과 고모라와의 유사성'에 의해서, 그리고 8절에서 처음 싹을 틔운 '남은 자' 개념에 의해서(4장 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m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본절은 이중적으로 결합된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은 그 죄악의 격심함과 그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었다. 이 비교는 여호와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충격적이며 수치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스라엘에는 극소수의 남은 자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와는 구별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희망적인 것이었다. 부정과 긍정의 이런 이중적 의미는 사도 바울이 롬 9:29에서 본문을 인용할 때 전혀 손상됨이 없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즉 바울은 한편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유전만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여전히 유효함을 상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혹독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소수의 참된 신자들을 남겨두신다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 야훼 체바오트). 이는 '하늘과 땅과 별들과 모든 거민들의 주님'(Alexander)이라는 뜻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그 전능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남은 자를 보존하실 수도 있다. 만약 이스라엘이 그 악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 2절과 같은 동사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다르다. 죄악의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와 거의 동일하다. 그 죄는 겔 16:49에서 '불의와 탐욕과 힘없는 자에 대한 착취'로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는 주저함이 없이 그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적 병행어로 기술된 '관원'과 '백성'은 나라 전체가 한결같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심판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율법의 참된 해석가고 부름받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율법(* , 토라)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비난(11-15절)과 교훈(16, 17절)으로 진행되었다.

=====1:11
너희의 무수한 제물 - '제물'로 번역된 '제바힘'(* )은 '살해된 동물의 고기,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피뿌리는 제물에 대한 포괄적인 명칭으로 언급되었다(19:21;삼상 2:29;3:14). 이것은 13절에서 역시 '제물'로 번역된 '미느하트'(* )와 구별되는데, '미느하트'는 피 없는 제사 즉 식물로써 바치는 소제를 말한다. 제물의 종류와 횟수, 그리고 바쳐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7항을 참조하라.

=====1:12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 '너희에게'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너희의 손에서'이다. 에발트(Ewald)는 '너희에게'에 강조점을 두어 '그것을 누가 너 같은 사람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반면에 알렉산더(Alexander)는 '그것을'에 강조점을 두어 '그따위 헛된 출석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여기서 '마당'은 솔로몬 성전 주변의 경내를 가리킨다. 에스겔은 안뜰과 바깥뜰이 있다고 말한다(겔 8:16;10:5).

=====1:13,14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 이 말은 첫째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제사를 혐오하시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그들이 제사와 더불어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둘째 여호아가께서 혐오하시는 대상이 무엇임을 밝히 보여준다. 그것은 제사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근본 정신에서 이탈된 외식적인 행위이다. 본래 제사와 행악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한다. 서로 배타적인 이 둘이 결합된 모양을 가리켜 성경은 '외식'이라 부른다. 가짜와 거짓을 싫어하시는 여호와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진리이신 그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예배 행위에 대한 여호와의 태도는 14절에서 세 개의 동사로 보다 구체화된다:'싫다'-'귀찮다'-'지겹다'.

=====1:15
손을 펼 때에 - 문자적으로는 '손을 뻗칠 때'이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내적인 열망의 가시적 표현이라고 믿어졌다.
많이 기도할지라도 - 혹자는 이 말을 '중언 부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큰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불쾌할 뿐이다. 참되고 진실한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불의로 얼룩진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탄원이며,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려는 거룩한 열망이다(주기도문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헛된 몸짓과 공허한 울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경멸하시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붉은 '피'(* , 다밈)는 '악을 행한다'(13절)의 시각적 표현이다. 즉, 이 '피'는 희생 제물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혹은 상징적 의미에서의 악행을 의미하는 것이다(Calvin). 사해 사본의 이사야서는 이 말 뒤에 '너희 손가락은 불법으로 물들었다'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1:16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사랑을 기억하셔서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훈하신다. 그것은 먼저 악에서 떠나라는 말로 제시된다. '스스로 씻으라'(* , 라하추)는 말은 원래 신체적, 의학적 의미에서 자신을 세척하라는 말이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 , 하자쿠)는 도덕적 의미에서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의 상관 관계에 대해 델리취(Delitzsch)는 앞의 씻음은 단번의 회개요, 뒤의 씻음은 날마다의 점진적인 성화라고 하였다.

=====1:17
선행을 배우며 - 악을 그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그 필요 충분 조건에 응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적으로 너무나 무지해서 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초등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처럼 이제라도 선행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힘써 배워야 할 과목은 '공의'이며, 이 과목의 주된 학습 내용은 본절에서 세 가지 실천 사항으로 언급된다.

=====1:18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양털같이 되리라 - 평행으로 이루어진 이 두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다면, 그것이 어떻게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질 수 있겠느냐 ?'(Kaiser, Marti, Michaelis 등).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제사 행위를 통해서 그들의 죄를 중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과 착각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조롱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것을 의문문으로 해석해야 할 어떤 근거도 없다. 또 전후 문맥을 고려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음 해석을 취한다. (2)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을지라도,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지리라'(Alexander, Delitzsch 등). 죄가 여기서 붉은색으로 표현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피로 물든 손과의 연관성 때문이지만(15절), 종말론적인 표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흰색의 반대는 검은색이지만 종말론에서 희색의 반대는 붉은색이다. 흰색은 세마포를 입은 성도의 색이며 성결의 색으로 간주된다(전 9:8;단 7:9;마 17:2;계 1:14;3:4;7:9;19:8). 반면에 붉은색은 바벨론의 색이며 지상 나라의 색이며 마귀의 고유한 색이다(계 12:3, 9;17:4). 본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사이에 변론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에도 구하고'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자유이며 사랑이다. 공의대로만 보자면 이스라엘은 사형을 언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보적 상벌의 법칙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 자유로써 이스라엘을 변화시키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려고 하신다. 이러한 가능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유는 진실로 새로운 삶으로 결실한다.

=====1:19,20
수농과 거역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주제는 율법이 선언된 이래 불변의 주제로서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레 26장 ;신 28장). 본문은 그 내용의 대조와 발음의 유사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절의 '먹다'(* , 토켈루)와 20절의 '삼키우다'(* , 테우클루)는 언어 유희의 대표적인 예다. 19절과 20절은 두운법(頭韻法)으로 이루어졌다.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 3:18)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가인이 그 아우를 죽였을 때 그는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할 것이라'(창 4:12)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땅의 소산을 먹는 것과 인간의 행사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종종 물질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는데, 이는 참것의 그림자인 현재의 복락을 맛봄으로써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이다.

=====1:21
신실하던 성읍이...창기가 되었는고 - 원문대로 읽으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가, 신실하던 성읍이'이다. 2절에서 부자 관계로 표현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기서 부부 관계로 표현되었다. 부부 관계의 기초는 '신실함'(* , 네에마나)이다. '네에마나'는 '받치다', '기초하다', '기대다'는 뜻을 가진 '아만'(* )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성도들이 기도 끝에 낭송하는 '아멘'이란 말도 이 말에서 비롯된 것임). 칼빈(Calvin)은 이 말을 '순결함'으로 이해하였다. 부부 관계에서 순결이 파괴될 때 간음이 되듯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배반할 때 그것은 영적 간음이 된다(출 34:15, 16;신 31:16;호 1:2 이하). 그리하여 한때 순결하였던 신부 이스라엘은 창녀(* , 자나)가 되었다. 어찌하여(* , 예카). 이 말은 애가(elegy)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이 말로 시작하고 이 말로 표제를 삼았다(애 1:1;2:1;4:2). 선지자의 탄식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의 확인이다.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 과거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추함이 '이제는'(* , 아타)이란 말에서 극적으로 대비된다. '살인자들'(* , 메라츠힘)은 강도나 살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가장하여 부정직한 방법으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소유를 착취하는 자를 의미한다(엠 2:34;요일 3:15). 그 주범은 유다의 지도자라 자처하는 고관들과 방백들이다.

=====1:22
네 은은...너의 포두주에는 - 비유적으로 표현된 '은'과 '포도주'는 그 고상함과 귀중함에서 볼 때 높은 계급의 관원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나 은은 찌끼가 되고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다. 이 말은 이전 황금 시대에 고관들에 의해 나타났던 덕과 공의가 쇠퇴하고 지금은 그 찌꺼기와 그림자만 남았음을 뜻한다(Delitzsch). 비록 찌끼가 은을 대신하여 아직도 반짝이고 포도주가 불그레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순수를 상실한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럴 듯한 가짜를 싫어하신다(딤후 3:5).

=====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 '방백들'(* , 사림)과 '패역함'(* , 소레림)은 두운법에 맞춘 것이다. 선지자는 두운법을 사용함으로써 방백들과 그들의 패역함을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방백들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패역한 사람들이다'이다.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 '사랑하며'(* , 오헤브)와 '구하며'(* , 로데프)는 모두 분사로 쓰여 그들의 행위가 계속 지속되며 습관적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구하다'는 동사는 원어상 '따라가다', '열심히 추구하다'는 뜻을 갖는다. 그들이 그처럼 열심히 추구하고 흠모해 마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뇌물'(* , 솰르모님)이었다. '뇌물'은 '평화'를 뜻하는 '솰롬'(* )과 발음이 비슷하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구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뇌물'이었다.

=====1:24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 -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이처럼 한데 모아 놓은 곳은 이곳 외에 없다. '주'(* , 하아돈)라는 명칭은 본서에서 '만군의 여호와'와 결합되어 위협과 징벌을 가하는 경우에 쓰인다(3:1;10:16, 33;19:4). '만군의 여호와'에 대하여는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의 전능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권위있는 통치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창 49:24;시 132:2, 5 등에서는 '야곱의 전능자'라고도 표현되었다(49:26;60:16). 70인역(LXX)에서는 이것 대신 '야곱의 전능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선지자는 이 세 가지 이름을 한데 묶음으로써 여호와의 무한한 엄위와 전능하심을 최고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그 뒤에 이어질 말씀들이 매우 중요하며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하시되'(* , 네움)라는 동사에서 한결 분명해진다.
말씀하시되 - '네움'은 비밀스럽고 중요한 사실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창 22:16에서 처음 나오고 렘, 겔에서 자주 등장함).

=====1:25
나의 손을 내게 돌려 - '손을 되돌린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개입, 간섭하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렘 6:9;겔 38:12;암 1:8). 하나님의 간섭은 찌끼를 태우고 혼잡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것을 징벌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 그러나 '아쉬바'(* )라는 동일한 동사로 시작되는 26절과 비교해 볼 때 회복의 의미가 더 강한 듯하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 문자적으로는 '잿물처럼 너의 찌끼를 녹이고'이다. 하나님은 마치 잿물을 가지고 은에서 납 성분을 녹이듯이, 예루살렘의 경건치 못한 자들을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이다.

=====1:26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본래와 같이 - '사사들'과 '모사들'은 권력을 쥐고 있는 관원들과 방백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정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불순물이 제거된 뒤에 예루살렘은 21절 상반절에 기록된 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평화의 구현기요 메시아적 통치의 예표로서 상징된다. 그러면 이러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 가까운 미래에 있어서 어쩌면 그것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틴에 귀환할 때 이들을 지도한 스룹바벧이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히 실현되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24:23).

=====1:27
귀정(歸正)한 자 - KJV는 이것을 범죄로부터 돌아선 자라는 뜻의 '개종자들(converts)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랑게(Lange)는 '포로에서 귀환하느 자들'에게 이것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것을 이중적 전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가까운 미래에서는 '포로에서 풀려난 자들', 그리고 먼 미래에서는 '죄로부터 구속된 성도들'로 이해하는 것이다.

=====1:28
그러나 패역한 자와...멸망할 것이라 - 25절과 관련하여 정련 과정의 반대 측면, 즉 찌끼와 혼잡물의 운명이 제시된다(Lange). 그들의 운명을 강조하는 듯이 '패망'(* , 쉐베르)이란 명사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온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파멸, 패역한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그리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종말에 이르리라.'

=====1:29
상수리나무...동산 - 선지자는 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수법으로 '상수리나무'(* , 엘림)와 '동산'(* , 가노트)을 들어 당시에 편만해 있던 모든 유(類)의 거짓된 우상 숭배를 표현한다. 류폴드(Leupold)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이것들은 두 가지 방식의 우상 숭배, 즉 나무 숭배 의식(tree-cult)과 동산 숭배 의식(garden-cult)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무에 관하여는 57:5;왕하 16:4;렘 2:20;3:6;17:2;겔 6:13;호 4:13을, 동산에 관하여는 65:3;66:17을 참조하라.

=====1:30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물 없는 동산 - 늘 푸른 나무와 물기 어린 동산처럼 그렇게 번성하기를 꿈구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달려간 그들은 허무한 우상의 결국만큼이나 자신들도 헛되이 비참함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Alexander). 그러나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를 택하고 그로 즐거워하는 자들의 운명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할'(시 1:3) 것이다. 선지자가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과 관련하여 동산에서 물이 넘칠 것을 노래한 구절로는 35:6, 7;41:18;44:3;48:21;66:12 등이 있다.

=====1:31
강한 자는...그의 행위는 - '강한 자'(* , 헤하손)는 불법한 통치자(아마도 '우상 숭배를 조성한 지도자', Leupold)이며, '그의 행위'(* , 포알로)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우상(혹은 '안녕을 도모하는 그 수단과 고안물', Vitringa;'우상 숭배하는 행위', Lange)을 의미한다. 우상은 불티와 같아서 그것을 따라가는 자에게 재앙만을 야기시킨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왕국 분열(B.C. 930) 이후에 활동했던 B.C. 9세기 선지자들
(엘리야, 엘리사)의 뒤를 이어 아모스, 호세아, 미가와 함께 사역했던 B.C. 8세기의
선지자다. B.C. 8세기 선지자들의 특징은 그들 대부분이 '기록 선지자'(writing
prophets)라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계시를 기록하여 문서의
형태로 남겼다. 그 이전 선지자들의 예언은 전선지서(여호수아-열왕기 상하)의 역사
적 기록 사이에 삽입되어 기록되었으나, B.C 8세기 이후의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받
은 예언적 계시를 주요 내용으로하고, 꼭 필요한 역사적 사실만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는 형태의 선지서를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당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아모스와 호세아를 보내어
당신의 뜻을 선포케 하셨고, 남왕국 유다에는 미가와 이사야를 보내어 예언 사역을
하게 하셨는데, 이들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향한 심판과 구원의 선포'라
는 공통된 주제를 함유하고 있다. 특히 미가서는 이사야서에 비해 분량은 적지만 그
예언의 진행이 아주 유사하며 똑같은 부분도 드러나고 있다(2:2-5 ; 미 4:1-5). 이와
같은 통일성과 유사성은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동일한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왔음을 증
명해 준다.
B.C. 8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이사야서는 내용적, 구조적으로 (1)하
나님의 택하신 나라인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전반부
(1-39장)와 (2)하나님의 구원과 위로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후반부(40-66장)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좀더 세분해 보면 (까)이스라엘과 유다의 심판(1-12장), (다)만
국의 심판(13-27장), (따)재앙과 축복의 선언(28-35장), (마)역사적 서술(36-39장),
(바)이스라엘의 구원(40-48)장), (빠)여호와의 종(49-57장), (싸)예루살렘의 영광
(58-66장)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시야서는 첫째 부분에 해당되는 1-12장은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6장을 중심으로 구조상 대칭을 이루고 있
으며 그 주제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 선언'이다.
그중에서 특별히 본장은 서언(prologue)의 성격을 띤 이사야의 전형적인 메시지
로서 본서 전체의 내용이 압축적으로 들어 있는데, 그 내용은 (1)예언의 시대적 상황
과 저자, 예언의 대상이 기록되어 있는 표제(1절), (2)유다의 배역과 그에 대한 책
망(2-9절), (3)외식적 제사 의식에 관한 책망(10-17절), (4)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
나님의 변론적 책망(18-23절), (5)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24-31절)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먼저 대부분의 선지서의 처음 부분에 나타나는 표
제의 형식을 따라 머리말을 기록한 후(1절), 유다의 배역의 모습(2-23절)을 묘사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한편 본서의 역사적 배경은 유다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다스리
던 시기(B.C. 791-687년경)에 해당되는데, B.C. 8세기경부터 국제 무대에 새롭게 등
장한 앗수르가 점차 열국을 지배하며 세력 확장에 힘을 기울이던 때였다. 그 결과
디글랏 빌레셀(B.C. 745-727년), 살만에셀(B.C. 727-722년), 사르곤 2세(B.C.
722-705년), 산헤립(B.C. 705-681년)등과 같은 앗수르의 왕들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 초기에는 앗수르
가 이집트와 당시 국제 무대의 패권을 다투었고, 사역 말기에는 바벧론과 세력을 견
주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 근동의 국제적 상황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불안정을 조장
하게 되었다. 또한, 모세오경과 역사서의 문체가 서술적 산문체(narrative style)인데
비해 일반적으로 이사야서를 비롯한 선지서의 문체는 욥기. 잠언. 전도서. 시편 등의
시가서와 같이 시체(poetic style)이다. 선지서가 시의 형식을 도입하고 있는 것은
시가 서술체에 비해 형식적, 구조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더 명백히 나타내 줄 수 있
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요나서는 선지서이면서도 서술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산문체의 역사서 중
에도 부분적으로 예언(oracle), 노래, 찬송 등에는 시체가 쓰였고, 선지서에도 역사
적 흐름을 진술할 때는 부분적으로 산문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사야서도 대
부분이 시의 형식으로 기록 되었으나 6, 7, 36-39장의 많은 부분과 다른 장들이 일부
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상황의 변화를 기술하기 위해 산문체가 사용되었다. 이제 이상
과 같은 특징을 함유하고 있는 본장을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1.표제(1:1)

이사야서 전체의 성격을 규정해 주는 일종의 표제문에 해당되는 본 대목은 시대적
상황과 기록자, 예언의 대상 등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재공해 주고 있다. 이 같은
양식은 대부 분의 선지서의 특징으로 에스겔, 요나, 아모스,미가, 학개, 스가랴 등에
도 나타난다.
먼저 본문은 이사야 예언의 시대적 상황(유다 왕 웃시야, 요담, 아하드, 히스기
야가 다스리던 시기, B.C. 791-687년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언은 특
정한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선포되기 때문이다. 선지서의 예언은 모든 시대와 관
련하여 의미를 지니게 되지만, 일차적으로는 어느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이 있었던 그 시대의 상황을 바르게 이해 해야만이 그 메
시지의 의미를 바르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본서 전체의 기록자가 이사야이
며,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인 것을 말해 준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혈통
적으로 왕족 출신의 귀족인 것을 알게 해 주는데, 이는 그가 유다의 여러 왕들을 쉽
게 접촉하여 자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사실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다. 덧붙여 저자 이사야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것도 본서의 주제와
연관해 볼 때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이름은 본서 전체의 가
장 간략한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異像)'이라고 기
록함으로 이사야의 예언 사역의 대상이 예루살렘을 중심한 남왕국 유다임을 알려 준
다.

2.유다의 배역(1:2-23)

이사야는 예언의 초두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유다의 배역에 대해 포괄적, 함축적으
로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회상과 현
재 유다의 배역에 대한 책망이 기록되어 있는 전반부(2-9절), 이스라엘의 영적 생활
의 핵심인 제사 의식에 있어서의 죄악상과 그에 대한 책망이 들어 있는 중반부
(10-17절), 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변론적 책망이 언급되어 있는 후반부
(18-23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뒷부분에서는 이와 같은 배역의 모
습이 구체적인 죄악상으로 지적된다. 이제 유다의 반역을 강도높게 비난하고 있는
본 대목의 핵심적인 사상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유다의 배역에 대한 책망(2-9절) :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상황 속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악으로 가득 찬 유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재판 절차를 따라
기소하고 있다. 특히 자신과 유다의 관계를 거듭 부자관계로 언급하시면서 현재 배역
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킨다. 하나님은 천지를 증인으로 삼으시면서(신
31:27-32:1)이 스라엘의 과거 역사와 현재의 모습에 대해 '부성적 사랑에 대한 반역
의 역사'로 규정하고 신랄하게 비난하신다. 사실 이러한 책망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난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해 보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 불순종이 뒤섞인 배역
의 역사였디. 출애굽 후 광야 생활 40년이 그러했고, 가나안 정복 과정과 사사시대,
왕정시대(통일왕국,분열왕국)에도 동일한 배역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참으로 이스라엘
의 역사는 은혜->배역->심판->구원->(새 은혜)으로 순환되는 역사였으며, 발바닥부터
머리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의 매로 인해 성한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5-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계속해서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에 대해
이사야는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게
되었다(8절)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복을 상실한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책망
속에서도 자비와 긍휼로 인하여 소수의 남은 자를 남겨두셨다고 말씀하셨다(9절; 4:3
; 10:20,22; 11:11,16 ; 37:4,31).
(2)외식적 제사 의식에 관한 책망(10-17절) : 앞에서(2-9절) 이스라엘의 총체적
부패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발하던 이사야는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죄를 지적한다. 특
별히 선지자는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영역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이스라엘
의 범죄가 근본적으로 의식(儀式)적 영역, 즉 가장 핵심적인 영적 생활에서부터 잘
못되었다고 지적해 주고 있다.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제사 의식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속 은혜에 대한 예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신령과 진정이 결여된 형식적 제사만을 반복하였다. 따라서 하나
님은 제물,분향,월삭과 안식일의 준수, 대회로 모이는것 등을 가증히 여기시고, 많
이 기도해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면(11-15절), 연약한 자에 대한 압제를 그
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16, 17절 ; 렘 7:3-7).
(3)예루살렘의 부패와 회개에 대한 요청(18-23절) : 유다 백성의 배역에 대해 책
망하고 정죄하던(2-17절) 선지자는 이제 말씀을 거역한 예루살렘 거민에 대해 창기와
살인자라고 단언한다(21절).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김으로써
영적 간음을 저질렀고(54:5,6 ; 출 34:15,16 ; 신 31:16)혼합주의로 경도되었다(22
절). 특히 지도자들의 부패는 이스라엘 국가가 전반적으로 공평과 의를 저버리고 더
러운 이익을 위하여 도적과 짝하고, 뇌물을 좋아하여 재판을 굽게 했으며, 뇌물을
줄 능력이 없는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사정은 풀어주지도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예루살렘의 부패를 묘사하면서 이사야는 회개를 강력히 요청하고있다
(18-20절). 앞서 기소한 내용을 통해 백성의 양심을 자극한 선지자는 이제 간청과 은
총의 제안을 통하여 이중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3.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1:24-31)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기소 내용을 근거로 하여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
하신다(24,28-31절). 하나님의 심판이 된 유다는 하나님의 대적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심판은 완전한 멸망을 위한 심판이 아니라 바로 회복
과 구원을 위한 정화적 심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 예언 중에도 구원의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동반되고 있는 것이다(25-27절).
하나님은 공평한 심판을 통하여 회개한 자를 의로 구속하시고, 긔까지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멸망시키신다고 선언하신다.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하나님의 백
성들 사이에 편만하던 나무 숭배와 동산 숭배를 언급하며,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수
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29,30절). 이와같이 다양한 형태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하던 유다 백성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선고받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잘못된 예배 생활과 그로 인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유다 백성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압제함으로써 멸망을 자초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이 생략된 형식주의적 예배를 혐오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과의바른 수직적 관계를 바탕으로(요 4:23,24) 의와 사랑에 입각한 수평적 관계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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