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1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 본시의 주제가 환난에 대한 탄원이기 때문에 '찬양의 노래'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다소 우울하고 슬픈 음조를 띠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이러한 불평과 탄원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당히 찬송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이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의 지조를 버리지 않는 성도의 바른 자세를 더욱 고무시키며 성도의 눈물마저도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라 하겠다.
잠잠하지 마옵소서 - 자신을 해하려고 덤비는 대적들을 그냥 두고 보시지 말고 막아달라는, 즉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호소하는 탄원이다. 이는 자신이 당하는 환난과 핍박에 대해 하나님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실제로 하나님은 눈을 떼지 않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역설적으로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대적들로부터 이유없이 비방을 받고 악한 자로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이 자신의 무죄를 아시고 판단해 주신다면 주를 찬송할 수 있다는 굳건한 신앙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109:2
대저 - 히브리어 '키'(* )에 해당되는 말로서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악한 입과 궤사(詭詐)한 입 - 30절에는 시인이 입으로 여호와께 감사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본절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악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솨' (* )는 구체적인 악행을 나타내며 허망한 풍설(風說)을 전하거나 무함(誣陷)하는 증인인 악인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출 23:1). 그리고 '궤사한'의 히브리어 '미르마'(* )는 다분히 추상적인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말은 '속삭이다', '기만하다'(beguile, deal treacherously with)는 뜻의 '라마'(* )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는 중에 거짓 제물로 무게를 속이는 내용을 언급하는데, 저울의 눈금을 속인다는 것을 표현할 때 이 단어가 쓰였다(암 8:5). 구상 명사와 추상 명사가 이렇게 균형있게 쓰인것은 다윗 시에 흔히 등장하는 시적 기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인들이 의인을 괴롭힐 때 우선 무고한 말이나 속이는 말로 중상 모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사울과 시므이 등으로부터 이러한 비방과 저주를 받았던 바 있다. 우리 주님께서도 지상에 있을 때 유대인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저주를 받은 바 있으며, 심지어는 귀신의 힘을 빌어 능력을 행한다는 말까지 들은적이 있다(마 9:34).
입을 열어(* , 파타흐) - 이 말은 야수(野獸)가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 "우리의 모든 대적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애 3:46).
거짓된 혀 - 혀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 중에 야고보의 지적이 아마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한편 본절에서 시인은 악인들의 비방과 중상을 세 차례에 걸쳐 각기 다른 표현으로써 강조하고 있는 바, 대적들의 독설(毒舌)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VanGemeren).
=====109:3
미워하는 말로(* , 다바르 시네아) - 앞 구절의 '거짓된 혀로'와 대구를 이룬다. 시편은 특히 대구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러한 대구에 주의를 두고 읽을 때 한층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워하다'란 뜻의 '사네'(* )에서 파생된 '시네아'는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살인을 부를 정도의 심각한 증오심을 가리키며 관념이나 생각으로서의 증오심을 넘어 실체적이고 행동적인 미움을 뜻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하는 모습을 이 단어로 묘사한 바 있다(신 1:27). 그리고 민 35:20에서는 살인의 원인을 미움으로 언급하고 있다.
나를 두르고(* , 세바부니) - 22:16에서 이 말은 개들이 먹이를 두고 다투는 상황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109:4
나는 사랑하나 - 이는 다윗이 핍박자에게 어떠한 해(害)도 끼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정당한 이유없이 다윗의 원수로 자처하며 다윗을 공격하고 미워하였다. 다윗은 그들의 친구로 지내왔으며 단순히 그들에게 악을 행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비를 행하였던 것이다.
나를 대적하니 - 이 말 속에는 '나를, 도리어 나를 비방하니'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을 베푼 결과, 주어진 것이 너무나도 뜻밖에 적대감이라는 데 대한 당혹감이 곁들여져 있다 하겠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고 도리어 악으로 갚은 것은 분명 사단의 장난이다. 즉,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도리어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인 '와아니 테필라'는 '그러나 나로 말하면 기도뿐이라'는 뜻이다. 영역 성경 중 KJV나 NIV는 원문상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하고 있다(but I give myself unto prayer, KJV). 반면, 어떤 학자들은 '나는 사랑하나'를 '나를 대적하니'란 말에 연결시켜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본문은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함에도 불구하고'(even as I make prayer for them, RSV)가 된다. 다윗은 온갖 거짓과 교활한 말로 공격당할 때 악을 악으로 갚는 합당치 못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오히려 악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같다. 우리가 때로는 이유없이 손해를 보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 이를 보고하려고 하기 쉬우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것이 성도들의 바른 자세임을 깨닫게 해준다(롬 12:21).
=====109:5
저희는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 악인들의 배은 망덕(背恩忘德)하는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이다(35:12; 38:20; 렘 18:20; 요 10:32; 15:25). 여기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시무'(* )는 '야시무'(* )에 대한 '와우'(* )강조 요법으로 되어 있다.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시인의 원수들은 마귀의 상용 수단인 선을 악으로 갚는 방법으로 시인을 저주하였다. 이런 자들에게는 기도가 오히려 저주로 여겨진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7절 참조).
=====109:6
악인 - '라솨'(* )는 하나님이나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를 가리킨다(145:20; 잠 24:20; 합 1:4). 이사야는 이러한 악인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 본문은 다소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게데스(Geddes)의 경우에는 이를 '저가 악한 심판으로 고난을 당하게 하시며'로 번역하여, 법정에서 재판받는 광경을 염두에 두었다. 하반절과의 대구적 관계를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떤 주석가는 악한 심판관이 과연 악인들의 악행에 합당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본절 전반절의 히브리어 일부를 수정하려고 히도한다. 예컨대 '라솨'를 '레솨'(* )로 바꾸어 전반절을 '죄악이 그에게로 돌아가게 하시며'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 따위이다. 그러나 게데스의 입장을 따르더라도 별 무리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의 강조점은, 악인들이 무고하게 의인들을 핍박한 것처럼 그들 또한 무지막지한 심판 가운데 처하게 된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은 다윗의 저주를 보고 무작정 이를 모방하며 분별없이 남을 저주하거나 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악인으로부터 받은 고난에 집착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망각하고 보복심에 불타올라 악인과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것이다.
대적으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사탄'(* )인데 영역본 KJV는 이를 초자연적인 영적 존재, 마귀 곧 사단(Satan)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1)이 말이 4, 20, 29절 등에서도 동사형이나 명사형으로 나오되 신의 적대자들로 언급되고 있고, (2) 본절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대적들이 도리어 그 악한 꾀에 버금가는 곤경에 빠질 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 또한 (3) 본절의 상.하반절이 대구를 이룬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이 히브리어는 시인으 대적들을 도리어 대항하는 악한 세력(an accuser, NIV)혹은 불의한 재판관(an unfair judge, LB)을 뜻한다고 봄이 더 무난하겠다.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 재판정에서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고소자의 입장에 선다는 말과 같다(Anderson, Kidner). 한편, 스가랴는 사단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슥 3:1). 스가랴서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대적이 오른편에 서는 것은 고소하고 대적하기 위함인 것이다. 반면에 시인은 31절에서 대적의 위치인 오른편에 대신 여호와께서 서서 심판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줄 것을 간구한다.
=====109:7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 이에 대해서는 (1) 사후(死後)의 심판이라는 견해와, (2) 지상에서의 심판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현실상의 모든 법적 판결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판단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믿었고(출 18:13-27; 신 1:17), 또한 실제로 하나님의 판단을 묻는 방식이 시행되기도 했다는 점에서(출 28:15), (2)의 견해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문과도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 이것은 어떠한 자비도 없는 가혹한 형벌을 요구하는 기도이다. 즉, 악인들의 죄는 너무나 분명해서 정의의 집행을 모면할 방도가 없으며 용서를 구해도 허락하지 말아달라는 무서운 저주의 기도인 것이다. 악인은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타인들을 괴롭혔으며 무고한 자를 정죄하며 달아나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들이 그토록 심한 죄를 범했고 또 유죄로 판정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면하게 된다면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위배된다고 시인은 판단한 것 같다. 네로나 갈리굴라 같은 대박해자들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용서받게 된다는 것은 정말 온당치 못한 처사일 것이다.
그 기도가 죄로 변케하시며 - 악한 마음을 품고 악행을 저질러온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흉내를 내고 있다면 얼마나 가증스럽게 보이겠는가? 따라서 이들의 기도가 상달되지 말고 오히려 그의 호소가 죄를 덧붙이는 결과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도 오히려 기도하는 것이다.
=====109:8
그 연수를 단축케 하시며 - 세상을 괴롭히며 혼란스럽게 하는 악인보다는 미친개가 오래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은 곧 세상의 평화를 앞당기는 지름길이다. 본문에서 '연수'(* , 야마)는 부사로 쓰이고 있지만 명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이 부분을 배반자나 사악한 자들에게 적용시키곤 하였으며 베드로는 유다의 급속한 죽음을 보고 이 말씀의 성취로 보았다. 즉, 갑작스러운 죽음은 구약에서 현저한 죄를 범한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여겨졌던 것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55:23; 잠 10:27; 전 7:17). 반면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는 자비가 주어진다.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 베드로는 유다의 죽음 이후 그의 자리에 맛디아가 임명된 사건을 두고 바로 이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보고 이를 인용하였다(행 1:20, 26). 악한 인간은 좋은 직분조차도 나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 말씀은 더욱 확장되어 유대 민족에게 맡겨졌던 계시의 보고(寶庫)가 기독교 교회로 이전된 것으로 확대 적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직분'에 해당하는 '페쿠다'(* )는 '직원(職員)'(대하 23:18) 혹은 '쌓은 재물'(사 15:7) 등 두가지 뜻을 모두 지니지만, 대다수 최근의 주석가들은 '직분'(office)으로 이해한다(Deissler, Eaton, Kraus). 왜냐하면 재물에 관한 이야기는 11절에서 언급되기 때문이다.
=====109:9
고아가 되고...과부가 되며 - 한 남자가 죽으면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그 자녀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강조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즉, 사악한 자의 최후는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보호 아래 호의 호식하던 처자식에게까지 심한 타격을 끼치고 말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과부나 고아는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에게 아무런 관심과 배려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서도 큰 불행이 닥치게 될 것이다. 모든 고아와 과부에게는 동정과 연민을 베풀어야 마땅하지만 그 아비의 행위가 악독했을 때는 그들에 대한 동정의 근원이 말라버리는 것이다. 헤롯은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었다한들, 그의 자녀가 고아가 되었다한들 슬퍼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은 무서운 저주의 말씀은 우리가 임의대로 해석하여 사용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 판사가 어떤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할 때 사심(私心)을 두지 않고 정의를 선언해야 하듯이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 공의를 요청하고 있다.
=====109:10
본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빌어먹게 하시고, 그들로 저희가 거하는 그 황폐한 곳에서 쫓겨나게 하소서'(Horsley). 이것은 썩고 무너진 건물의 폐허 가운데서 한 가닥의 파난처를 이리저리 찾아다녔으나 그런 곳에서조차도 거할 곳이 없는 가련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렘 18:21 참조).
유리 구걸 - 조상의 죄가 자손들에게 전해짐으로써 자손이 당하는 경제적 빈곤을 가리킨다.
그 황폐한 집을 떠나(* , 다레슈 메하르보테헴) - '떠나'에 해당하는 '다라쉬'(* )는 '밟다', '쫓아내다'는 뜻 외에도 '찾다', '구하다', '조사하다' 등의 의미도 지닌다. 혹자는 본문에서 이 단어를 '조사하다'는 뜻의 수동형으로 해석하고 이 어구를 '그들의 집들이 평가인에 의해 조사되게 하시며'라고 옮겼다. 그러나 이 번역은 문맥의 흐름에 다소 어색한 감이 있다. 따라서 그보다는 '그들의 폐허가 된 집에서 양식을 찾게 하소서'(let them seek their bread also out of heir desolate places, KJV), 혹은 '그들의 황폐한 집에서 쫓겨나게 하소서'(may they he driven from their ruined homes, NIV)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109:11
고리대금하는 자 - 원문인 '노쉐'(* )를 번역한 말로서 채권자를 가리킨다. 히브리어 '나솨'(* )는 동사로 쓰이면 '빌려주다', '강요하다'는 뜻이 되고, 명사로 쓰일경우는 '채권자', '강탈자' 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빚을 미끼로 가난한 채무자의 남은 소유마저 철저히 빼앗아 가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느 5:1-5). 어느 선지자의 생도가 죽자 그 아내가 채주에게 두 아이를 종으로 빼앗기게 되었다고 엘리사에게 호소한 사실도 이것을 잘 입증해 준다(왕하 4:1).
취하게 하시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카쉬'(* )는 원래 '덫을 놓아 붙잡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고리대금업자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그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가게 해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저의 수고한 것을 - 이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하게 착취하였다가 그 자녀들에게 남겨준 재산을 가리킨다.
=====109:12
은혜를 계속할 자 - '은혜'에 해당하는 '헤세드'(* )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자(仁慈)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인다(창 19:19; 출 34:6; 대하 7:3; 렘 31:3 등).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친족이나 이웃의 친절과 자비를 뜻한다.
연휼(憐恤)할 자 - 히브리어 '호넨'(* )은 '아랫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히다', '은혜를 베풀다'는 뜻의 히브리어 '하난'(* )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정심을 갖는 사람을 뜻한다. 비록 과거에 큰 해악을 끼친 원수라 할지라도 그가 오랫동안 불행한 나날을 보내게 되면 그의 과거의 악행을 잊어버리고 불쌍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정(常情)이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악행을 결코 잊지 말기를 촉구한다. 이것이 다윗의 잔인성을 나타낸다고 오해할지 모르나 악인들의 범과가 너무도 엄청났다는 사실과 악인들이 긍휼을 얻지 못하는것 역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신 2:30; 수 11:20) 상기한다면 오해가 없을 것이다.
=====109:13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자손은 하나님의 귀한 축복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자손이 끊긴다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요 저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또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축복(창 12:2; 22:17)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한편, '후사'에 해당하는 '아하리토' (* )는 '후손'이라는 뜻 외에도 '끝' 혹은 '미래'라는 개념도 내포하는 말이다. 일례로 민 23:10에는 이것이 한 개인의 종말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의 유대인 주석가인 나마니데스(Nahmanides)는 '아하리토'란 개념속에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본문은 악인의 영원한 파멸이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후대에 - '베드로 아헤르'(* )를 번역한 말로서 앞 어구의 '아하리토'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본절은 69:28의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란 어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M. Dahood).
=====109:14
그 열조의 죄악을 - 여기 '열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아보타'(* )는 복수로서 원수의 지위가 상당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의 부친을 가리킬 때는 이와 같은 장엄 복수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8절 참조). 장엄 복수에 대해서는 사 14:21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 "너희는 그들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그 자손 도륙하기를 예비하여...." 기억하시며 - 히브리어 '자카르'(* )는 원래 '표시하다', '(대출 장부에) 기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 문구에는 죄악을 행한바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어미의 죄를 - '어미'는 히브리어로 '임모'(* )인데 단수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복수로 표현된 앞 어구의 '아보타이우'도 그 의미상 단수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도말하지 마시고 - 하나님은 언약에 근거해서 천 대까지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반면 악인에게는 삼사대까지 저주하신다고 말씀하셨다(출 34:7). 따라서 시인의 저주는 가혹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상벌 원리에 일치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부모의 죄가 그 자손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죄악된 길로 행하는 자는 그 후손에겐도 심각한 죄의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며, 특히 언약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부모의 패역한 행위의 악영향은 그 후손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환난을 초래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왕하 24:3; 렘 15:4). 그렇지만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겔 18:20)라는 말씀처럼 궁극적으로 죄의 형벌이란 본인에게 달린 것이다.
=====109: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 양피지나 토판(土版) 등에 기록하여 항상 기억되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인 90: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하나님앞에 숨길 수 있는 죄악이란 하나도 없고 또 지은죄로 말미암은 심각한 악영향이 후대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09:16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이라는 말씀속에 요약되어 있는 바, 이는 언약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철저히 무시했다는 뜻이다(Anderson). 무죄하고 가련한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정상적인 사람이면 이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것이다. 또한 시기와 질투는 대부분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 있을 경우에 발생한다. 그러나 본문의 악인은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비참한 자를 핍박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도리어 멸시하였다.
=====109:17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 본절에서 18절까지 동사 앞에 접속사 '와우'(* )가 다섯개나 쓰이고 있다. 이를 단순히 순접 관계의 접속사로 보면 이 두 절은 시인의 현재적 바램을 나열한 것이 된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이 동사들이 19절의 '...하소서'(* , 테히)에 연결된다고 보는 데서 찾아진(Dahood). 반면에 다섯 개의 '와우'(* )중 일부를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보면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달아날 때 다윗을 저주한 바 있다(삼하 16:5-13).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 욥 22:21의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는 어구와 표현 형태가 유사하다. 시므이는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했으나 솔로몬 왕 때 왕명을 어기고 참수형을 받고 죽은 바 있다(왕상 2:36-46).
=====109:18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 값진 옷 입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저주하기를 즐겨했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저주가 고질적인 질병처럼 몸에 배여 저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은 형국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에스겔은 심판날에 이스라엘이 당할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하며...'(겔 7:27).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 이는 민수기에 언급된 '증거의 쓴 물'을 연상시킨다(Anderson). 민 5:16-31에 보면 부정한 여인을 판단하기 위해 쓴 물을 마시게 하는 기록이 있다. 깨끗한 여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해(害)가 되지 않으나 부정한 여인에게는 독이 되어 넓적다리가 떨어져 나가게끔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저주로 말미암아 오히려 원수 자신이 그 저주에 버금가는 큰 해를 당했음을 시사한다.
=====109:19
저주가...띠와 같게 하소서 - 본절은 18절 상반절의 단순한 동의어 반복적 표현이 아니라 악인에게 임할 저주의 계속성과 영속성을 한층 강화한 표현이다. 특히 '항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타미드'(* )가 '계속적인', '영존하는'등의 뜻을 지닌 말임을 고려하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Alexander). 한편, 본문의 명사 '띠' (* , 메자흐)와 동사인 '띠는'(* , 하가르)은 히브리어 원어상 그 어근이 서로 다른 말이다.
=====109:20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 -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즉각적인 보응을 지적함으로써 어떠한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극심한 고통 중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사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해 심판을 경고하면서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1)고 하였다.
=====109:21
여기서부터는 저주를 그치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시작된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 -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곧 하나님 자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VanGemeren). 본 문맥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한다는 것은 특히 조상들과 맺었던 언약에 근거하여 간구드린다는 뜻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구약의 사상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 중의 하나이다. 이 말의 원어는 '헤세드'(* )인데 자비나 사랑, 인애, 인자하심 등으로 번역된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신 까닭에 하나님의 사랑에도 변함이 없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채찍을 맞는다 하여도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그들과 함께계신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의 개념인 것이다(44:23-26 강해, '하나님의 인자하심' 참조).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헤세드에 호소하고 있다.
=====109:22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 외적인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 신실한 성도는 더욱 겸손해 지기 바련이다. 그러나 이런 환난을 받고도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그는 환난에서 아무런 대가도 얻지 못한다. 한편 '상함이니이다'의 히브리어 '할랄'(* )은 16절의 '상한'에 해당하는 '나케'(* )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관통당한' 혹은 '찔려 죽은'등의 뜻을 내포하는 말이다(Alexander). 시인은 원수의 참혹한 적대 행위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더욱더 겸손해졌음을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 이러한 자세로 자신의 겸손하고 가난한 상태를 고백하는 자의 기도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인 것이다.
=====109:23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불려 가오며 -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석양 그림자에 비유하고 있다. 어스름 황혼의 희미한 그림자는 일몰과 동시에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이는 바로 앞일도 예측할 수 없는 시인의 불안한 심정이 잘 드러난 비유이다. 또한 본문은 사람의 생명이 극히 짧으며 풀과 같이 쇠잔한다는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102:11). 그리고 시인은 자신을 메뚜기로 비유한다. 메뚜기가 거센 바람을 만나 휩쓸려 가버리듯이(출 10:19; 나 3:17) 시인도 끊임없는 핍박으로 도망다녀야 했으며 평안히 쉬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109:24
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 혹자는 다윗이 극도의 상심과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식욕을 잃고 만 것이라고 본다(Barnes). 그러나 그보다는 오히려 환난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간구하며 또 위대한 신앙적 결단을 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음식을 멀리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69:10).
=====109:25
저희의 훼방거리라 - 대적들은 다윗의 곤고한 처지를 보고서 쾌재를 부르며 비웃었다. 아울러 본문은 대적들이 하나님 앞에서 취한 다윗의 겸손한 태도마저 위선으로 단정하고 조롱하였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Alexander). 한편 22:6, 7에서 다윗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있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 - 사람들이 시인을 보고 조소하는 광경을 표현한 말이다(22:7; 44:14).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다가 그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하나님께 호소한 바 있다(렘 20:7).
=====109:2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 사람들로부터 비록 비방을 받고 있으나(22-25절) 하나님은 당신을 의뢰하는 자를 기필코 구원하시며 또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21절에 이어 다시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호소한다.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구원하소서 - '구원하다'의 히브리어 '야솨' (* )의 본래 의미는 '열려 있다', '넓다' 혹은 '의롭다'로서 그 명사형인 '예솨'(* )와 마찬가지로 택한 백성을 위경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묘사하는 문맥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삼하 22:3; 사 17:10; 슥 9:9 등).
=====109:27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 원수의 핍박에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그들에게 밝히 보여주시라는 뜻이다. 이를 좀더 확대해서 이해하면 시인을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행 9: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구원받기를 소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또한 바라야 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109:28
본절에는 대적들의 어떠한 비방이나 핍박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고자 하는 시인의 담대한 믿음이 연속되는 두개의 대조 구문을 통해 뚜럿이 부각되어 있다.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 이 말씀은 원수들의 저주를 극복하겠다는 시인의 신앙적 투지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보다는 원수의 비난과 핍박을 이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시인의 담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라 - '복을 주소서'란 앞의 어구가 단순한 간구가 아니라 선취적 신앙에 근거한 일종의 찬양이란 사실이 여기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는 한 원수의 공격이 아무리 잔인하고 집요하다 할지라도 구원의 소망을 굳게 붙들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109:29
욕을 옷 입듯하게 하시며 - 18, 19절과 유사한 직유 형태이며 본문에서 '욕'은 히브리어 '켈림마'(* )를 번역한 것인데,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 당하게 될 수치와 부끄러움을 이 말로 지적하였다(사 45:16). 그리고 잠언 기자는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고 말한다. 여기서 시인은 원수의 박해가 참으로 어리석어서 자승자박(自繩自縛) 꼴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 있다.
=====109:30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 입으로 감사한다는 말은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다윗은 저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난 다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그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09:31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 히브리어 본문에는 앞 구절의 원인을 설명하는 접속사 '키'(* )가 문두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궁핍한 자'의 히브리어는 '에비욘'(* )이란 형용사인데 영어에서와 같이 히브리어에서도 형용사가 명사로 흔히 쓰인다. 이말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주로 가리킨다(출 23:6; 신 15:4). 그리고 '우편'의 원어는 '야민'(* )으로서 원래적 의미는 (좀더 강하거나 재주있는 것으로서의) '오른손'(혹은 '오른편')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붙드시사 그를 도울 것이라고 하였다(사 41:10). 또 에스겔은 그룹들이 성전 우편에 선 것을 보았다(겔 10:3). 이 경우에 있어 '우편'은 보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6절 주석과 비교하라).
본시는 저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시편들 중 마지막 작품으로서 비탄에 빠진 시인의
탄식과 고통이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슬픔이 잘 표현되
어 있으면서도 나약한 감상으로 경도(傾倒)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본시는 1 배신당한 사랑(1-5절) 2 악인을 향한 저주(6-20절) 3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21-31절)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윗이 이 시를 쓸 때의 역사적 배경에 과핸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본시에
나타난 다윗의 대적에 대해서는 사울, 에돔 사람 도엑, 아히도벧, 시므이 등 여러 가
지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는 없고 다만 다윗이 그 대적으로 말미암아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배신감을 느끼고 육체적, 정신적 곤욕과 수난 속에서 본시를 기
록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편 보 시편의 유형은 개인적인 '비탄시'로 볼 수 있다. 다윗은 원수의 냉소와 조
롱 속에서 금식하며 구원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였다.
그런데 본시를 조야(祖野)한 개인적 슬픔과 원한을 노래한 내용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본문에 나타나는 저주에 대한 여러 가지 신학적, 도덕적 난관에 봉착하게 될
수밖에 없다. 본시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본시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특수한 관점
을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본 시편은 신약에서 사도들이 '가롯유다'와 관련하여
인용한 것으로 볼 때 메시야에 대한 유형적 예언이다(행 1:20). 2 앞의 관점의 확대
적 해석으로 본시가 그리스도를 못박은 유대 민족이 당한 국가적 저주의 내용을 선명
하게 기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탄식을 표현하고 있다. 3 마지막으로 다윗
이 단지 개인적 감정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대적이 받게 될 저주를 예
언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상에서 제시된 관점들을 토대로 본 시편을 이해할 때 우리는 최소한 본시가 개인
적인 차원의 고백이 아니라 의로운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탄식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의 실체와 그들이 받게 될 저주의 처절함을 드러내는 작품임을 알 수 있
다. 이제 대적들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믿음이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본시를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배신당한 사랑(109:1-5)
무고한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본시를 시작한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지금까지 자신을 도우셨던 신실하신 하나님
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불평과 탄식을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의 결과라
고 볼 수 있다. 시인이 계속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탄식하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
께서 자신의 처지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확신하는 가운데 시인은 대적을 고발하고 동시에 자신의 무고함을 변
호하고 있다.
시인이 고발하고 있는 대적들의 두드러진 악행은 '말과 혀'에 관한 것이다. 시인은
그들의 말의 거짓됨과 사악함을 특별히 강조한다(2절). 사실 의인에 대한 대적들의 무
고한 비난과 욕설은 그들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악함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3-5절). 여기에 대해 시인은 자신이 이러한 공격을 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항변
한다. 자신은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베풀었으며 저들의 무고한 핍박에 대해서도 오
직 기도했다고 말한다(4, 5절).
사실 여기서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원수들의 혀로 인한 공격은 큰 군대의 어떤 무
서운 침략보다도 더욱 견디기가 어렵다. 오늘날도 사단은 거짓의 아비로서 놀라운 간
교와 술수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소하고 바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신
과 치명적인 공격을 당할지라도 악을 악으로 갚는 행위는 결코 성도들이 취할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은 아니다. 성도는 억울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써 자신의 개인적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억제하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고 보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의로우신 개입을 기대하여 끝까지 인내와 사랑과 기도의 태
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태도요(롬12:17-21)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의 정신이다(마5:44)
2. 악인을 향한 무서운 저주(109:6-20)
배신과 무고한 핍박 속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보여준 시인은 이
제 본 단락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의 시선을 자신의 변호자요,
원수들의 심판자되신 하나님께로 집중시키고 있다. 우리는 본문을 대할 때 원수를 위
해 기도하고 사랑하던 시인이 갑자기 분위기를 전화하여 원수들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보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원수에 대한 개인
적인 원한과 복수 감정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을 기대하고 있음을 간과해
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결코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시인의 마음이 악을 심판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구하고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또한 다윗이란 인물의 대표적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자신의 원수를 하나님의 대적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예언적으
로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롬1:18-32). 사실 저주의 정당성 여부는 결국 그 저주
하는 사람의 동기에 의해 좌우된다. 다윗처럼 참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대망하는
동기에서 행해지는 저주는 결국 그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암을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는 증가가 된다(58:6-9;69:22-28;137:7-9;렘11:20). 이러한 면에서 다윗은 물론 선지
자나 사도들의 저주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를 통한 죄인의
구원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회개치 않는 자의 심판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바로 이러
한 관점에서 이해할 때 본 단락의 저주의 기도는 바로 사사로운 분풀이가 아니라 하나
님 나라를 위한 구원의 기도인 것이다.
또한 시인의 본 단락에서 말하고 있는 저주의 내용은 가장 무섭고 철저한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한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떠나 죄에 거하는 자들은 죄의 대라로 자신은 물
론 그의 가족과 후손, 조상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고 긍휼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저주의 내용과 이유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악인 자신에게 관련된 저주(6-8절) : 시인은 악인이 선한 자들을 음모와 배신으
로 다룬 것처럼 악인들도 더 악한자에 의해 동일한 음모와 배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고 말한다(6절). 또한 그 악인에게는 대적하는 자와 고소하는 자가 따라붙어 그를 괴
롭히고 그의 죄악을 만천하에 공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은 재판을 받을때에 유죄
로 판정되고 그의 울부짖음과 호소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결코 받아들여지지 일는다
(7절). 악인은 고통과 환난 속에서 질병이나 사고로 일찍 죽게 될 것이며 그가 명예를
누렸던 직분은 빼앗기고 악인으로 기억될 것이다(8절). 결국 하나님은 극심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악인의 생명을 끊으심으로써 그가 호흡할 만한 가치도 없는 존재임을 증거
하신다. 특별히 악인이 직분을 빼앗기는 저주는 신약에서 사도들에 의해 가룟 유다가
명예로운 사도의 직분을 맛디아에게 빼앗기고 메시야를 죽인 살인자로 기억되는 사건
의 예언으로 인용되었다(행 1 : 20).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영광과 존귀함마저 그 목
숨과 함께 박탈하시고 그들을 권세와 권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신다. 그러므로 시인은
악인이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고귀한 지위와 높은 명예를 소유할지라도 결코 부러워
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음을 교훈하고 있는것이다.
2 악인의 가족, 후손 및 조상에 대한 저주(9-15절) : 악인이 이 세상에서 그가 행
한 악행이상의 보응을 받고 고통속에서 죽어가며 그의 직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말하
는 시인의 무서운 저주는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악인의 죄는 그의 모든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악인의 돌연한 죽음으로 그 가족이 고아와 과부가 되는데, 사람과 하
나님 앞에서 마땅히 보호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신 10 : 18 ; 24 : 17 ; 사 11 :
7 ; 렘 7 : 6), 오히려 악한 고리 대금 업자에게 가지고 있는 재산마저 탈취당하게 될
것이다. 즉 도적과 사기꾼이 그나마 수고한 곡식과 열매조차 약탈해감으로써 그들은
파산하고 유리하는 거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
개 될 것이라고 시인은 고백한다.(11, 12절). 이처럼 합법적으로 긍휼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어떠한 친절과 동정도 받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진노는 쓰라린 것이다.
오직 긍휼없는 심판만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을 뿐이다.(약 2:3). 그러나 더욱 치욕적
인 저주는 가문의 대가 끊어지는 아픔이다(13절). 이 땅에서 악인에 속한 모든 후손들
은 완전히 멸종할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순종하고 이행하는 자는 번영하게 된다(레
26 : 9). 시인은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기아와 질병에 빠지고 급기야 포로가 됨
으로써 황폐하게 된다고 선언하였다(레 26 : 14-39).
악인과 그 가족이 후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멸절될 것이라고 저주했던 시인은 여
전히 저주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이번에는 악인의 조상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14, 15
절). 악인의 죄는 악인의 조상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시인은 그 가문에 어떤 선행이
나 자랑이 있을지라도 모두 잊혀지고 오직 죄악들만 기억되기를 기도한다. 결국 시인
은 여기서 대적들이 조상에게서부터 후손에 이르기까지 죄인으로 낙인찍혀 그 가문이
완전히 멸망되는 무시무시하고 완벽한 저주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저주는 사사로운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마땅히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시적으로 형상
화한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죄에 대한 철저한 심판으로 귀결된다는 사
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특별히 우리는 아담의 예를 통해 한 사람의 좌악이 자신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마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
(롬 5:12-14). 아담의 죄로 말마암아 모든 인류는 죄의 노예가 되어 사망 아래 끌려가
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한 사
람의 순종함으로 모든 인류가 복을 받게 되었다(롬 5:15-21).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이 성취되었다.(출
20:6).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의 삼을 산다는 사실이 축복
임을 깨닫고 동시에 죄악에 대해 단호하게 물리쳐야 할 의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3 악인이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16-20절):악인에게 임하는 무서운 저주가 가족,
후손, 조상에게로 확장됨을 선포한 시인은 이제 악인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
해서 설명하고 있다. 까 악인은 전혀 긍휼이 없다(16절). 다 긍휼 대신 저주를 좋아한
다(17-20절). 시인은 원수들이 가난하고 궁핍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고 죽이려
했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긍휼이 부족한가에 대해 강조한다. 또한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하고, 마음이 상한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말함으로써(22
절)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견디기 어려운 상태인지를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
이다.
한편 시인은 악인이 얼마나 저주하기를 좋아 했는지에 대해 비유법을 사용하여 묘
사하고 있다. 즉, 대적의 저주는 사람들이 평상시에 입고 다니는 의복과 허리띠와 같
다고 하여 그들이 얼마나 습관적이며 일상적으로 저주를 일삼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저주를 인체에 필요한 물과 뼈 속에 있는 기름에 비유함으로써 악인의 저주가 자
신의 인격과 구별하거나 분리할 수 없을 만큼 고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임을 밝혀준다.
이상에서 우리는 악인이 저주를 받아야 할 필연성과 함께 저주의 심각성에 대해 구
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살펴보았다. 이처럼 다윗의 저주는 사적인 복수와 구별되는 하나
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한 거룩한 분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에 대해 기억
하며 경외심을 가지고 거룩하게 생활해야 할 것이다(대햐 6:31).
3.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109:21-31)
자신의 진실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바방과 배신의 아픔을 안겨준 원수들을 향해 개
인적인 분노와 감정을 자제하고 오직 기도하는 자세를 보인 시인은 자신의 변호자요
심판자되신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호소한다. 시인은 먼저 구원의 근거를
두 가지로 말한 후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끝을 맺는다.
1 구원의 첫 번째 근거인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21, 26절):시인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기초로 하여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향해서는 공
의의 심판을 발하시고 의인에 대해서는 인자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다(사43:1-3). 이
러한 하나님의 공평하신 성품은 시인의 구원은 물론 대적의 심판을 위한 가장 확실한
근거이다. 주의 인자하심뿐 아니라 주의 이름 또한 시인의 확신의 근거이다. 시인은
주의 이름이 자신의 상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 즉 자신이 주의 택하신
언약 백성임을 상기시키면서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소망하고 있다(마6:9). 역기
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시인 개인의 소망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대가 거의
구분되지 않고 선포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망은 우리에게 시인과 하나님의 완전한
일체감은 다윗의 위대한 신앙을 반증해 주며 모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전형을 보연준다.
2 구원의 두 번째 근거인 자신의 슬픔 상태(22-25절):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을 상고
하면서 자신이 언약 백성임을 자각하고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한 시인은 이제 자신의
연약하고 슬픈 상황을 애처롭게 묘사함으로써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
을 베푸셔야 할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 시인은 자신을 간난한 사람이요, 궁핍하고
마음이 상한 자라고 말한다(16, 22절). 자신의 인생을 석양의 그림자로 묘사하며 무상
하고 덧없이 불려 다니는 메뚜기 같다고 탄식한다(23절). 그의 육체는 수척하여 보는
사람마다 머리를 흔들며(25절)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시인은 육체적, 정신적으
로 너무나 애매하고 억울한 고난을 당하여 음식을 먹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절
망적이고 딱한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해 금식까지 하고 있다(69:10, 13). 이것
은 자신의 의를 내세워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을 바라보며 자신이 당한 가난과 슬픔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
이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겸손하게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에 호소하여 자신의 슬픈 상태를 낱낱이 고백함으로써 하나님
께서 자신을 구원해야하는 타당한 근거를 마련한 시인은 이제 확신에 찬 어조로 구체
적인 간구를 하고 있다. 시인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능력으로 역사하기
를 간구하고 하나님의 개입이 모든 대적들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한다(27절).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대적들의 저주와 공격은 자신을 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욕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29절). 시인은 여호와의 개입을 통해 자신에게 구체적인 복
가 즐거움의 표증이 보여짐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정당하고 의로운 자임을 입증케 되기
를 원하다. 동시에 대적들은 정죄당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의 개입을 요구한다. 하나
님의 종들의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과 연괸되어 있으며 원수들의 수치와 멸망에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과 같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게(벧전
5:6) 그분의 의로우신 능력의 개입을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기억하며 자신의 구원을 요청하는 간구를 힘있게 드린
시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백성의 우폄에 서서 부당하게 판단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변론하고 변호자가 될 것이라
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대적의 우편에는 의인들을 고소하는 사단이 있으나(6절) 신
자의 우편에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보호의 손길을 펴신다(히4:14-16).
그러므로 신자는 대적과 사단의 어떤 송사와 공격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시인은 이
러한 믿음을 감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사실 감사는 믿음의 가장 고차원적 표현이
다. 시인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입으로 표현하며 찬양하기를 즐거워한다.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찬미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선포한다. 아직 시인의
상황이 호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구원자되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의지함으
로써 담대한 믿음의 용기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의 행진을 통해 놀라우신 역사를 성취하실 것이다(수1:3-6). 우리는 찬양으로 시작하여 찬양으로 끝을 맺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서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통하여 참된 소망을 발견하는 참된 신자의 모델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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