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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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
요셉 -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나, 야곱의 장남 르우벤이 크게 범죄한 이후 장자의 자격이 박탈당하자 대신 장자의 명분을 얻은 자이다(창 35:22;49:3, 4;대상 5:1, 2). 따라서 그는 야곱으로부터 지극히 큰 축복을 받았고(창 49:22-28), 그의 두 아들이 모두 축복을 받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한 지파씩 속하는 복을 누렸다(창 48:8-22). 이는 장자에게는 다른 아들들보다 두 몫의 축복을 하는 율법과 일맥 상통한다(신 21:15-17). 결과 요셉의 후손 특히 야곱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은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내에서 한동안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다(78:9). 이런 배경하에서 본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대두된다. (1)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말이다(Anderson). (2) 요셉의 후손, 즉 에브라임이나 므낫세 등을 중심으로 남 왕국 유다와 구별되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킨다(Ridderbos, Briggs, Cohen). 이중에서 어느 것이 더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많은 경우에 (2)를 더 지지한다. 알렉산더(Alexander)도 (1)을 가정하면서도 (2)에 더 많은 개연성(蓋然性)을 두고 있다. 만약 본문이 (2)를 가리킨다면, 본절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을 배경으로 하여 구원을 부르짖은 기도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목자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하신 분으로서 그들을 통치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이다(23:1-3;78:52, 53;79:13, Tate).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 '그룹'(* , 케루브)이란 그 어원(語源)이나 뜻이 불분명하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수종하는 영적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며 그분을 수종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곳에 나타나는 자들로 주로 묘사된다(출 25:19-22;겔 9:3).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 지성소내에 위치한 법궤 위 속죄소에 있는 그룹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그룹들 사이 속죄소의 윗부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었다(출 25:19, 22;왕상 6:23-28).
빛을 비취소서 -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크신 능력과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간구이다(3절 주석 참조).

=====80:2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 이 세 지파들은 라헬의 후손들로서 열두 지파 중에서도 상호 단결력이 있었던 바 광야에서 같은 구역에 장막을 쳤으며(민 2:18-24), 광야 행군시에도 같은 부류로 진행하였다(민 10:21-24), 여기서 이들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들로 여겨진다(Anderson, Dahood). 그러나 여기에 약간의 의문점이 있다. 위의 세 지파들 중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완전히 예속된 자들이었으나, 베냐민 지파는 많은 경우에 남 왕국 유다에 속하는 자들로 언급되기 때문이다(왕상 12:21, 23;대하 11:1, 3, 23). 그러나 이에 대해서 앤더슨(Anderson)은 베냐민 지파는 때로는 남 왕국 유다로 간주되었지만, 때로는 북 왕국 이스라엘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헹스텐버그(Hengstenberg)나 쿡(Cooke), 케인(Cheyne)은 베냐민 지파가 남 왕국 유다에 예속된 것은 극히 적은 일부분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주석가 알렉산더(Alexander)도 베냐민 지파가 유다 왕국에 예속된다는 것은 단지 그들 중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헹스텐버그의 견해와 이 세 지파들이 한 라헬의 후손인 바 상호 가까운 인척 관계라는 점을 들어 위의 사실을 지지한다.
주의 용력(勇力)을 내사 - 여기에서 '주의 용력'이란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게부라테카'(* )로서 직역하면 '당신의 힘'(thy strength, KJV;your might, NIV)이다. 그리고 '내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르'(* )는 '잠에서 깨다', '일어나다', '분별하다'(stir up, KJV, RSV) 등의 뜻을 지닌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크신 능력으로 일어나시사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를 소원하는 말이다.

=====80:3서'라는
뜻으로 취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도록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돌이키시사 새롭게 해 달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Anderson, Delitzsch). 왜냐하면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고 그분의 뜻, 말씀을 저버림으로 심히 어려운 상태에 처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Turn us again to yourself, LB).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 하에르 파네카) -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을 비취사'(make your face shine, NIV;let thy face shine, RSV)란 뜻이다. 성경에서 흔히 얼굴을 향하사 비췬다는 것은 두 가지 대조적인 뜻을 나타낸다. (1) 범죄한 죄인에 대해 공의의 진노를 나타내사 심판을 행하심을 뜻한다(34:16;51:9;벧전 3:12). (2)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은혜와 호의, 도우심 등을 베푸시는 것을 암시한다(27:9;42:5;105:4;민 6:25, 26). 본문에서는 (2)에 해당된다.


=====80: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여호와'란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여진 하나님의 고유 이름으로서 '스스로 계시는 자'란 뜻이다(출 3:14, 15). 이는 창 4:26에서도 나타나나, 특히 모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혜와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이름으로 사용되어졌다. 그리고 '만군'이란 히브리어로 '차바'(* )로서 '집결하다', '소집하다'라는 뜻의 '차바'(* )에서 유래되었으며 '집단', '무리', '군대'의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경우에도 사용되었으나(44:9;출 7:4;12:41), 많은 경우에는 하늘의 우상 숭배 대상을 뜻하는 것으로(신 4:19;17:3;왕하 17:16;습 1:5), 또는 하늘의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로(103:21;148:2;왕상 22:19;대하 18:18)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본문의 '하나님'(* , 엘로힘)이란 복수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능력과 권세면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는 유일 무이(唯一無二)하신 하나님을 지칭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만군의 하나님'이란 하늘의 모든 천체와 영적 존재들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Alexander) 또는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다 '여호와'라는 말씀을 덧붙여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짖음으로 특히 이스라엘과 언약하사 관계를 맺으신 능력의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주의 백성의 기도에...노하시리이까 - '노하시리이까'에 해당하는 '아솬'(* )은 원래 '연기를 내다'의 뜻이며 상징적으로 '분노하다'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 진노를 '불'로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78:21). 한편으로 '아솬'은 분향단에서 나는 연기 곧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는 뜻으로도 쓰인다(141:2;레 16:13;계 5:8). 그렇다면 기자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계속되는 진노 사이의 일종의 긴장 상황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 같다(Alexander).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분노를 쏟으심을 암시한다. 이것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아직 만족되지 않으셨거나 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가 안 되어서 인 것 같다.


=====80:5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 '눈물 양식'(* , 레헴 디므아)이란 말은 구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42:3에도 나타난다. 본문은 눈물을 양식처럼 먹게 하신다는 비유적 표현으로서 심한 고난을 당케 하신다는 뜻이다. 앤더슨(Anderson)은 이를 후문(後文)과 연관시켜 고난이 양식과 음료처럼 백성들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언급한다.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 '다량'(* , 솰리쉬)은 '세 번(째)', '삼중의', '삼분의 일'(민 15:6, 7;삼하 18:2) 등의 뜻을 지닌다. 본문에서는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많은 양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 듯하다(in great measure, KJV). 결국 본문은 전문(前文)과 병행 구절로서 하나님께서 심한 고생을 당케 하셨음을 나타낸다.

=====80:6
우리로...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 여기서 '다툼거리'란 히브리어로 '마돈'(* )으로서 '경쟁', '싸움', '다툼'을 뜻한다. 아마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당하는 고난을 모독하고 더욱 악화시키기 위하여 그 이웃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다툰다는 것(Alexander) 또는 이스라엘 족속들로 하여금 더 심한 고난, 패망을 당하도록 그 이웃 이방 민족들이 애쓰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영역본 LB, RSV는 여기서 '다툼거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마노드'(* , 머리를 흔듦)로 보고 '경멸'(scorn)의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Anderson).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과 전문(前文)은 종속 관계가 아니라 '와우'(* )로 연결된 대등 관계이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전문처럼 하신 결과 본문의 내용이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 '웃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그 기본어가 '라아그'(* )로서 '비웃다', '조소하다'의 뜻이며, 79:4의 '조소'의 어원(語源)이 된다(mock, NIV).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고난당하고 천하게 하신 결과 그 이웃 이방 족속들이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것을 가리킨다(79:4).


=====80:7
만군의 하나님 - 4절 주석 참조.
우리를 돌이키시고 - 3절 주석 참조.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 3절 주석 참조.

=====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가져다가 -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비유한 표현이다. 팔레스틴은 기후상으로 포도나무를 재배하기에 알맞은 곳이어서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는 과실 중 주산물이기도 했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듯이, 성경에서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렘 2:21;겔 15:2-8;17:6-8;호 10:1),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을 살라는 의미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곧 극상품 포도 나무를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신 후 축복 가운데 깊이 뿌리박고 번져 나갈 약속의 땅에 심으셨다. 그러나 그 포도나무는 쓸모없는 들포도가 되고 말았다(사 5:1-7;렘 2:21). 열방을...심으셨나이다 - '열방'(79:1)이란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 등을 가리킨다(신 7:1).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은 물론이고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나 물리적인 군사력 등 이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나타낸다.


=====80:9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비유된 포도나무를 옮겨 심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신 것을 가리킨다. 특히 '준비하셨으므로'의 히브리어 '파나'(* )는 원래 '향하다', '대면하다' 등의 뜻이나 '제거하다', '방해물을 없애다', '길을 예비하다' 등의 의미도 있다(창 24:31;사 40:3;습 3:15). 본문에서는 어떤 방해물을 제거하고 깨끗이 하는 것을 암시한다(Alexander).
땅에 편만하며 - '편만하며'의 히브리어 '마레'는 '채우다', '충만하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포도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땅에서 크게 번성한 것을 뜻한다.


=====80:10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크게 번성하고 강하여져 가나안 땅을 장악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혹자는 후문(後文)이나 다음 절들이 북, 서, 동쪽 경계선을 암시한다고 보고 본문의 '산들'이 이스라엘 남부 지방의 산들을 가리킨다고 한다(Cheyne, Hengstenberg, Rawlinson).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 '백향목'은 소나무과의 상록수로서 높이 36m, 둘레 12m 정도까지 자랄 수 있는 곧고 웅장한 나무이다. 이는 건축 자재로 애용되었고 성경에서는 흔히 힘, 위엄, 번영 등을 상징하는 나무로 묘사된다(92:12;104:16;왕하 14:9). 이 나무는 보통 가나안 땅의 북쪽지역 레바논 땅에서 자라는데(왕상 4:33;5:6;사 2:13;호 14:5, 6), 아마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가나안 땅을 그 북쪽 경계선까지 점유하여 지배한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Rawlinson).

=====80:11
그 가지가 바다까지...강까지 - 여기에서 '바다'란 가나안 땅 서쪽의 지중해를 가리키며, '강'이란 가나안 땅 동쪽의 유프라테스강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이 번성하여 가나안 땅의 동서쪽 지역에까지 영토를 확장, 지배한 것을 말한다. 신 11:24에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영토를 '광야에서부터...서해까지라'고 했는데, 아마 저자는 이스라엘 왕국 역사에서 이곳까지이르는 넓은 영토를 지배하였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삼하 8:3-8;왕상 4:24, 25;대상 18:3-8;대하 9:28, Anderson).

=====80:12
주께서...따게 하셨나이까 - 본문은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그 보호하시는 손길을 철회하시사 주위의 이방 민족들로 하여금 그들을 훼파하고 패망케 한 사실을 가리킨다. '담'(* , 가데르)은 '둘러쌈', '울타리'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여기서는 포도원을 외부 들짐승이나 침입자들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담이나 울을 뜻한다. 그리고 이를 허셨다는 것은 그 포도원, 즉 이스라엘을 외부 침입자들에게 방치해 두신 것을 암시한다.


=====80:13
수풀의 돼지 - 멧돼지를 가리키는 듯하다(boar, KJV, RSV). '돼지'는 모세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 중 하나로 여겨졌는데(레 11:7;신 14:8),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이방 민족들의 특성을 잘 예시해 준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침입한 앗수르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왕하 15:29;17:19-33;18:9-12, Alexander, Rawlinson).
들짐승들 - 이는 전반절에 언급된 이방 세력(수풀의 돼지)에 동조한 이방 동맹국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0:14
만군의 하나님 - 4절 주석 참조.
구하옵나니(* , 나) - 직역하면 '제발', '부디'라는 뜻으로서 애원을 나타내는 히브리식 불변사(不變詞)이다.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 하나님께서 당신의 처소인 하늘 높은 곳에서 땅의 낮은 곳을 내려다보신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암시한다(14:2).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 '권고하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 )는 '방문하다', '보살피다'란 뜻이다(visit, KJV;Watch over, NIV).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로 오셔서 보살펴 달라는 구원의 간청이라 하겠다(3절).

=====80:15
주의 오른손으로...줄기요 - 히브리 사상에서 오른편(쪽)이 복, 힘, 권능 등을 뜻하는 바 '주의 오른손'이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암시한다(78:54;출 15:6, 12). 그러나 '줄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맛소라 사본(MT)상으로는 '카나'(* )로서 '줄기', '식물'(the stock, RSV)을 뜻한다. (2) 70인역(LXX)과 일부주석가들은 이를 '견코케 하다'란 뜻의 동사로 취한다(Michaehs, Hupfeld, Cooke,Alexander). (1)을 취할 경우 본문은 하나님이 그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안식케 하신 것을 뜻한다. 반면, (2)를 택할 경우 본문은 하나님이 가나안땅에 거주케 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 속에 두지 마시고 보호하사 강건케 해 달라는 간구의 뜻을 나타낸다(Protect what you yourself have planted, LB).
가지(* , 벤) - 직역하면 '아들'(the son, NIV)이다.

=====80:16
그것이 소화(燒火)되고...망하오니 -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들에 의해 침략당하고 훼멸됨을 뜻한다. 특히 본문의 '주의 면책'(* , 가아라트 파네카, 당신의 얼굴의 책망)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말로서 구원을 암시하는 '주의 얼굴 빛'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보여준다(3, 7절).


=====80:17
주의 우편에 있는 자(* , 이쉬 예미네카) - 직역하면 '당신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the man of thy right hand, KJV, RSV)이다. 여기에서 '오른편'이란 힘, 권능 등을 상징하는 바, 본문은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붙드신 자 또는 높이신 자를 뜻한다 하겠다. 그러나 이 자(者)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가리킨다(Clark). (2) 이스라엘을 뜻한다(Rawlinson). (3)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킨다(Anderson). 이중에서 문맥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을 뜻하는 (3)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110:1). 한편 겔스톤(Gelston)과 힐(Hill)은, 본문은 한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뜻하지 않고 왕을 가리키며 아울러 메시야를 암시할 수는 있다고 본다. 인자의 위에...얹으소서 - 여기서 '인자'란 탈굼역(Targum)에서는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나, 그보다는 이스라엘의 왕이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Anderson). 그리고 '손'이란 하나님의 권능, 능력을 상징하는 바(겔 1:3) 이를 얹는다는 것은 곧 능력으로 힘을 북돋우는 것, 공급해 보살펴 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붙드사 힘주시는 것을 암시한다.

=====80:18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 하나님을 떠나 신앙적 후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특히 '물러가지'(* , 수그)는 신앙적인 배교(背敎)를 암시하는 말로도 쓰인다(53:3, 4, Alexander).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과 간구의 뜻을 암시하나 또한 경배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79:6).

=====80: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4절 주석 참조.
우리를 돌이키시고 - 3절 주석 참조.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 3절 주석 참조.

 

 

 

 본 시편은 슬픔이 가득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노래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속히 괴로운 처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이전에 베푸셨던 크신 은총과 현실을 비교하며 설명한다.
 특별히 본시는 아삽 가문에서 저술한 시로서 생동감있는 표현과 역사에 대한 섭리적 이해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표제의 '소사님에듯'( )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증거의 백합화곡'이란 의미이다.
 한편 본시는 구족적으로 볼 때 8행으로 된 5개의 구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시인의 간절한 기도의 표현인,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는 후렴이 첫째, 둘째, 다섯째, 구절에서 등장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반면에 내용상으로 보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서언적 진술, 과거의 구원 행위에 대한 회고, 애가(哀歌), 신앙고백, 간구, 소원, 찬양 등이 복합적으로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본시는 내용을 중심으로,
 1)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에서 베푸시기를 소망함(1-3절)
 2) 이스라엘의 슬픔을 거두어 가시기를 소망함(4-7절)
 3) 멸망당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소망함(8-19절)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원문의 서술 형태와 운율(metric)에 근거하여 그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기원과 간구(1-3절)                         |
  |      애  가  (4-7절)                            |
  |      포도나무의 비유                            |
  |        1.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낭송(8-11절)     |
  |        2. 포도나무의 현재 상태(12-16절)         |
  |        3. 간청과 맹세(17-19절)                  |
  +-------------------------------------------------+
 본 시편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의견은 학자들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요셉"(1절)이라고도 하고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2절)라도고 한 사실을 볼 때, 남국왕 유다가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이 당한 국난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본시의 침울한 분위기나 절망적인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아마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된 시기에 저술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존시의 저작 시기는 B.C.722년 이후 왕하17:1-24은 본시를 이해하는 데 요긴한 자료가 된다.
 이제 본 시편의 내용을 몇 단락으로 구분하여 각 단락의 내용 개요와 주도적 사상 및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함(80:1-3)
 시인은 먼저 서두에서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강력한 개입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간구는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다가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과거를 통해 체험한 교훈에서 연유한다. 시인은 마치 강한 짐승으로부터 자기 생명을 지키듯이(3-36) 능력의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먼저 '이스라엘의 목자'로 부르고 있다(1절). 마치 양떼를 지도하는 목자와 같이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하나님께 특별히 하나님의 자애스런 보호를 염두에 두고 있다(50:2). 시인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면서 특별히 하나님의 자애스런 보호를 염두에 두고 있다(74:1;78:52; 미7:14). 목자는 하나님의 궤의 그룹 사이에 왕좌를 가지고 계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다시 빛난다면, 양무리는 위험에서 구원될 것이다(3절;94:1;사60:1,2).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특히 3절의 "주의 얼굴 빛"으로 묘사된다. 이 표현은 전체적인 분위기와 대조되는 시인의 강한 소망을 드러내 준다. 역사적으로 이 빛은 환난을 당한 모든 성도들에게 유일한 희망을 제공해 주었다. 예를 들면 에스더(에4:16), 다니엘(단6:10), 욥(욥1:20,21), 다윗(삼상30:6)등 무수히 많은 신앙의 용사들은 한결같이 이 빛을 바라보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성도들도 이 빛을 바라볼 때 어떠한 역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빌4:6,7).

 2. 현재 이스라엘을 돌아봄(80:4-7)
 하나님의 도움을 간곡히 요청한 시인은 이제 주변의 조롱으로 인하여 더욱 가중된 슬픔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있다. 사실 포로 시절 당시의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시적으로 아주 쇠잔하여 가고, 그들이 가진 여호와의 종교는 아무 힘도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으며 원수들의 조소거리가 되던 때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다시 한번 주의 구원을 간절히 기도하며 절망하지 않았다.
 시인은 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하여 만군의 하나님의 조속한 응답을 소망한다(59:5;84:8). 하나님은 보편적으로 진지하게 기도하면 고난받는 자의 고난을 멎게 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분의 진노가 풀릴 수 없는 심각한 경우가 있기는 하다(대하36:16). 이스라엘이 목자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역할 때 하나님께서는 계속 진노하신다(4절). 이스라엘의 완고함(81:11,12)과 배교(78:17, 32, 40, 56이하;95:7-11)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며 이웃 국가들에 의해 조롱을 당하게 된다(44:13;79:4).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땅에서 추방되었고 마치 평상시 음식을 먹듯이 주야로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5절).
 한편 기원과 간청(1-3절)이후에 이어지는 본연은 하나님께 대한 불평으로 전환된다. 특히 시인은 본 단락에서 세 가지 중요한 명칭을 사용하여 표현상의 의도(dimension)를 노골화시킨다. 즉 이스라엘에서의 '우리'와 대적으로서의 '그들' 또는 '적', 그리고 신적 실체로서의 '당신' 곧 하나님을 대비시킨다. 이러한 세 가지 이름은 80편 전체를 궤뚫는 표현상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슬픔과 무기력을 대변하는 것이며, '적'은 이스라엘을 조소하고 비웃는 슬픔의 제공자로서 나타나며, '당신'으로 표현된 하나님은 마치 귀머거리와 같이 당신의 백성의 애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진노를 그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삼각 구도를 생각해 볼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델로서 세계 질서의 자극제이며, 하나님의 심판에 일관된 증인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때때로 영적인 침체에 처하게 되며 암담한 시기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반드시 은혜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답답한 때일수록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포도나무의 비유(80:8-16)
 시인은 이제 이스라엘의 형편을 헐린 포도원으로 비유하며,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아울러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특수한 관계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개입과 인도를 확신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심으신 나무인 동시에 주의 보호를 받는 백성인 것이다.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이 아주 망하게 될리는 만무하다. 시인은 이같은 확신 하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한 언약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송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시인은 특별히 본연에 이르러 계속 전진해 오던 문맥을 중단하고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 자주 사용되는 포도나무의 비유(사5:1-7; 겔15:1-6; 호10:1; 눅20:9-18; 요15:1)를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포도나무를 애굽 땅에서 뽑아내어 가져다가 심은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손이 더해짐으로써 비로서 가능해졌다(44:3). 한번 뿌리를 내린이 포도나무는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무성해졌는데, 유다의 산들에서부터 시작하여 레바논의 백향목 수풀과 지중해 연안, 유브라데 강 유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졌다(11절;신11:24).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번성하던 포도나무를 보호해 주던 담을 허물어 버리셨다(12절).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침해당하기 시작하였고 이스라엘에는 회개와 궁핍의 부르짖음이 일어나게 되었다(14절). 더구나 정성을 다하여 옮겨 심은 포도나무가 전적인 반항에 부딪혀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15,16절). 사실 이것은 사5:5-7의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50:21;겔17장;단7장). 따라서 시인은,
 1) 이스라엘의 번성은 하나님의 은혜(8-11절)이며,
 2)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진노(12-16절)라고 강조하며 앞으로는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 포도나무의 상징적 의미.
 구약 성경에서 '포도나무'와 '포도원'은 종종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 각 개인도 한 그루의 포도나무로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이를 심으셨다(8-13절). 이스라엘은 '선택된 포도나무'였으나 '들 포도나무'가 되었다(사5:1-7;렘2:21;호10:1). 포도나무의 가지가 땔감으로서만 쓸모가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거민들도 이와같이 망할 것이다(겔15장;19:10-14).
 에스겔은 육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유를 베풀어 '큰 독수리'(느브갓네살)가 '땅의 종자'(시드기야)를 취하여 심을 것이고, 이것이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로 자랄것이나, 그 후에 다른 독수리가 와서 옮겨 심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이 될 것이라는 말씀도 있다(128:3). 포도원과 포도나무가 풍부한 것은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받은 이스라엘은 포도원을 받게 되고(호2:15) 후일에는 '포도나무'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을 것이다(암9:13).
 또한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호9:10)하셨다고 했으며, 이스라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포도송이에 비유되었다(사65:8).

 4.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80:17-19)
 과거의 현실에 대한 비탄과 함께 구원을 위한 간구를 노래하던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서술한다. 반복되는 주제인 구원과 회복도 다시 부연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시인은 이전의 범죄하던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보다 더욱 큰 전망에 해당하는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기대에 부풀어 있다. 즉 시인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영적으로 회복 시키는 궁극적인 인물 혹은 원형(原型)으로서으 메시야의 도래를 대망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의 탈무드는 17절에 등장한 "인자"대신에 "왕이신 메시야"란 구절을 삽입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기대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호칭을 "하나님이여"(3절), "만군의 하나님이여"(7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19절) 등으로 급격히 변화시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강한 임재를 간정히 소망한다. 사실 주께서 친히 심으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은(15절) 오직 그의 포도 농장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간섭으로만 생명이 유지될 수 있다.
 1) 철저하게 의존적이고, 가변적이며 연약한 이스라엘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항상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피조물임을 가르쳐 준다.
 2)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이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나 인자를 통해서 접근할 때는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가르쳐준다. "인자"는 문자 그대로 주의 우련에 앉은 권능자를 가리키는데 소위 메시야적 전망으로 불리워진다. 복음서가 "인자"란 낱말을 자주 사용하고, 모든 편지에 "하늘의 보좌 우편에" 자리하고 계신 분이 언급되고 있는 사실을 보면 확실해진다. 어쨌든 하나님의 권능의 임재하심은 이스라엘을 참 신이신 하나님만을 부르며 섬기게 될 것이다. 본연의 문맥적 흐름을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시인은 무언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시인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기원을 마무리하고 있다. 즉 시인은 앞에서 했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3절), 다신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7절)라는 애절한 탄원을 다시 한번 "반군의 주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19절)라고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 계신다는 사실은 그들에 대한 징계이며 동시에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울러 언약 백성에게 참된 은혜를 수여하신 행위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감사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원하고, 끊임없이 간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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