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1
열방이 - '열방'의 히브리어 '고이'(* )는 의미가 다양하다. 이는 성경에서'나라'(83:4;창 10:5;민 14:12), '백성'(창 20:4;수 3:17;사 60:12), '이방' 또는 '이방인'(46:6;레 25:44;왕하 16:3;21:2;느 6:6;사 42:1;겔 38:16), '열방'(출 34:24;대하 32:13), '열국'(민 14:15;삼하 7:23;사 34:1)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그리고 이는 드물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33:12;창 35:11;사1:4;26:2).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대 랍비(선생)들에게는 '이방인'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었다(59:5, Anderson). 따라서 본문에서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고임'(* )으로서 복수인 바, '이방인들'(the heathen, KJV, RSV) 또는 (이방인들이 사는) '나라들'(the nations, NIV)로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6절에서와 같이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 '유다' 왕국을 침공한 바벨론을 중심한 이방 나라들을가리킨다.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 '기업'에 해당하는 '나할라'(* )는 '나할'(* ,물려받다, 상속받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상속된 것', '상속 재산', '소유물' 등의 뜻이다. 이런 이미에서 본문의 '주의 기업'이란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74:2;출 34:9;신 4:20).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란 점에서 그러하다.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 보다 좁게는 예루살렘을함축하고 있다(Tate). 따라서 본문은 전문(前文)과 연결해 볼 때 이방 나라들의 이스라엘 침공을 뜻한다 하겠다(왕하 25:1-7).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 살륙을 행하며 성전의 기구들을 훼파한 것을 뜻하는 것 같다(74:6, 7;왕하 25:13-17;겔 9:7).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그곳을 떠나신 결과 임한 비극이라 할 수 있다(겔 5:11;8:6).
=====79:2
주의 종들의 시체를...주며 - 이방 대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시체가 장사되지 못하고 길에 방치되어 새들과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만 상황을 가리킨다. 유다의 생존자들은 너무도 창졸간에 침입을 당하였기에 그리고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미처 그들을 온전히 매장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Anderson, Tate).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을 커다란 불행, 저주로 생각했었다(신 21:23;사 14:18, 19). 한편 본문의 '성도'에 해당하는 '하시드'(* )는 '인사하다', '친절하다'는 뜻인 '하사드'(* )에서 유래되었으며 '인자한', '경건한 (자)', '선한 (자)' 등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자들을 가리킨다고 한다(30:4, Anderson).
=====79:3
그들의 피를...흘렸으며 -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피'란 육체의 생명과 직결된 것으로 간주되어진다(레 17:11, 14). 따라서 본문은 대적들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성도들을 살륙하여 무참히 죽게 한 것을 나타낸다.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 2절 주석 참조.
=====79:4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 여기서 '우리 이웃'이란 유다 또는 예루살렘 내의 이웃 거민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여러 민족들을 뜻한다. 그리고 '비방거리'에 해당하는 원어 '헤르파'(* )는 '벗다', '노출하다', '모욕하다'는 뜻인 '하라프'(* )에서 유래되었으며 '모욕', '치욕'등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이스라엘 주위에 있는 이방 민족들이 그의 패망됨을 듣고 보고 그들을 모욕하고 수치스럽게 한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영광이 타민족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처참하게 되어 오히려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애 2:15, 16). 이런 표현은 44:14에서도 나타난다.
=====79:5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 '진노'란 히브리어로 '키나'(* )로서 '질투'(민 25:11;신 29:20;습 1:18)를 뜻한다. 그리고 '주의 진노'(* , 키나헤크) 역시 직역하면 '당신의 질투'(thy jealousy, KJV;your jealousy, NIV)란 뜻이다. 물론 여기서 '당신의'란 본절 서두의 '여호와'를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질투'란 하나님이 죄에 대해 공의의 분노를 나타내는 한 표현인 바 '진노'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겠다.
=====79:6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 - 성경에서 흔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을 뜻한다(4:1;17:6;20:9;31:17;50:15;사 26:13). 따라서 개역 성경은 본문과 같은 렘 10:25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 베쉬므크 라 카라우)이라고 번역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단순히 기도의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창 12:7, 8;13:4). 이런 점에서 주석가 알렉산더(Alexander)나 앤더슨(Anderson)은 본문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자들로 규정하고 있다. 한편, '열국'이란 원어상 1, 6절의 '열방'이란 말과 다른 '맘라카'(* )로서 '말라크'(* , 다스리다, 통치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왕국', '땅','통치' 등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복수로서 제일 첫 번째 의미로 사용되어졌다(thekingdoms, KJV, NIV, RSV).
=====79:8
우리 열조의 죄악을...마옵소서 - '죄악'에 해당하는 '아온'(* )은 '아와'(* , 구부리다, 왜곡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왜곡됨', '사악함', '불의', '불법' 등을 뜻한다. 그리고 '기억하여'의 히브리어 '자카르'(* )는 '기억하다'란 의미뿐만 아니라 '...에 영향을 미치다'의 뜻도 함축하고 있다(Anderson). 본문에서는 스라엘 열조의 죄악이 현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영향을 미쳐 불미스러운 비극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저자의 깊은 탄식을 전달해 주고 있다. 아울러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에게 임하도록 간구하는 말이기도 하다(VanGemeren).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 '천하게 되었사오니'에 해당하는 '달랄'(* )은 '연약하다', '낮게 되다'의 뜻인데, 이는 어떤 힘이나 지위의 측면 모두에 적용된다(Alexander). 원문에 의하면 본문은 '키 달로누 마드'(* , 왜냐하면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로서 본절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으며 후문(後文), 즉 '주의 긍휼하심으로...영접하소서'의 원인을 나타낸다.
=====79:9
구원의 하나님 -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언약적 차원에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언약적 호칭이다(18:46;88:1;사 17:10).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 '이름'이란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외적 호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또는 그분의 신격(神格)을 대변하는 것이다(창 25:19-26강해, '이름 짓기' 참조).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피조된 세상 만물의 존재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으며, 구속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에는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심이 표출되어 있다. 아울러 이 간주는 자신들에게는 도움이나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파르'(* )는 '덮다'의 뜻이며, 여기서 '속죄하다'(레 9:7;신 21:8), '용서하다'(65:3;78:38)의 뜻이 유출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에 근거하여 죄를 덮으심으로 사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79:10
피 흘림 당한 - 3절 주석 참조.
=====79:11
갇힌 자의 탄식으로...하시며 - '갇힌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시르'(* )는 '매인 자', '포로'라는 뜻의 단수이다. 그러나 이는 단체를 단수로 취급한 집합명사이다(Anderson). 이들은 아마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바벨론 군대에의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들의 탄식, 즉 포로 생활의 고난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도록 간구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포로된 자들과 같은 이스라엘이라는 유기체적인 존재로서의 동질 의식을 갖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암시한다. 죽이기로 정한 자를...보존하소서 - '죽이기로 정한 자'란 원문에 의하면 '베니 테무타'(* )로서 '죽은 자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말은 고대근동 지방에서 흔히 죽어가는 사람들 또는 죽이기로 정죄되거나 예정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관용어로 통용된다(Alexander). 여기서는 전문(前文)의 '갇힌 자'와 병행 구절로서 역시 포로되어 죽을 운명에 처해진 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능력'의 히브리어 '제로아'(* )는 기본적으로 '팥'(10:15;98:1;창 49:24;신33:20, 27;대하 32:8)이란 뜻이며, 여기서 비유적으로 '힘'(71:18), '권세'(욥 22:8)란 말들이 파생되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의미로 취해진 말이다. 특히 하나님의 '팔'을 '능력'으로 비유 표현한 것은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인 묘사법이다(겔 1:3).
=====79:12
우리 이웃 - 4절 주석 참조.
훼방한(* , 하라프) - '급히 벗다', '노출하다', '모욕하다' 등의 뜻이다. 이는 4절의 '비방거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어원(語源)이다. 이로 볼 때 본문은 4절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칠 배나 갚으소서 - 히브리 사상에서 7이라는 숫자가 완전을 뜻하는 수인 바(출 29:30, 37;레 12:2, 5;13:5;14:9) 철저한 보응을 암시한다. 그리고 '갚으소서'(* , 슈브)는 '되돌아가다', '되돌려 주다'란 뜻이다.
=====79:13
주의 기르시는 양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양육을 받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를 목자와 양, 즉 의존받는 자와 의지하는 자와의 관계를 잘 표현해 주는 말로서 통치하는 자와 통치 받는 자, 즉 왕과 백성간의 관계를 암시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80:1, VanGemeren).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성도의 영적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말이기도 하다(요 10:1-18).
주의 영예(* , 테힐라테카) - 직역하면 '당신의 영예'이다. 여기서 '영예'란 히브리어로 '테힐라'(* )로서 '할랄'(* , 빛나다, 빚을 밝히다, 칭찬하다, 찬송하다, 대상 23:5;대하 5:13;20:19)에서 유래되었으며, '찬송', '찬미' 등을 뜻한다(thy praise, NIV).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 특히 이스라엘 족속을 위해 행하신 사역을 칭송하는 것을 가리킨다(Anderson).
본시는 74편과 병행이 되는 시로서 일종의 '애가'(lamentation)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74편과 마찬가지로 바벨론 침공에 의한 멸망의 때를 다룬 것으로서 B.C.586년 이후에 지어진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74편이 성전 붕괴를 슬퍼하는 애가임에 반하여 본시편은 포로 이후 유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애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본시는 한마디로 민족의 백성이 핍박자들에게서 받는 환난의 비참한 상황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강력히 소원하고 원수에 대한 심판을 염원한다. 덧붙여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셔야 할 근거를 진술함으로써 간절한 기원을 끝맺는다.
본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시인은 먼저 현재의 이스라엘 민족의 참혹한 상황을 하나님께 고한다(1-4절).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분노가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를 묻고 이 진노를 이방인에게 향하실 것을 기도한다(5-7절).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을 구하는 형식을 취한다(8,9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당신의 종들을 해치는 이방인에게 진노하심으로 심판하실 것이다(10-20절). 이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사하고 찬양하겠다는 서원을 한다(13절).
한편 이 시편의 저작 시기에 관하여서는 주석가들의 견해가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 칼빈(Calvin)의 견해와 같이 다윗 시대를 퍽 지난 이후에 저술된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본 시편의 배경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침공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황폐화된 이후에 전재(戰災)된 포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자세한 상황은 왕하 25:8-26에 설명되어 있다. 대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노래한는 직임을 수행해 왔던 아삽 가문의 한 무명 시인이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원수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다.
또한 본 시편은 구조상 여러 부분으로 구분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구분은 5절의 내용을 분깃점으로 하여 두 단락으로 나누는 것인데, 1-4절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 토로되고 있으며, 6-12절까지는 간청과 호소가 드러나고 있다. 특히 마지막 13절은 구원에 대한 확신 속에서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다(사43:21). 내용상의 특징을 보면, 본 시편의 각 구절은 성경의 다른 문맥과의 많은 유사점을 드러내고 있다.
1절 - 렘 26:18;미3:12
4절 - 44:13-15
5절 - 6:3;13:2;89:46
6, 7절 - 렘 10:25
8절 - 116:6;142:7
9절 - 23:3;25:11;109:21;143:11
10절 - 42:4;115:2;욜2:17
11절 - 102:21;삼상26:16
12절 - 창 4:15, 24;렘26:18, 21, 24
위의 사실들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본 시편이 다른 시편의 표현들을 - 전통적인 애가 표현 - 많이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계있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가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제 본 시편의 내용을 좀더 세분화하여 각 단락을 살펴보고 주요 사상을 도출(導出)하면 다음과 같다.
1.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불평(79:1-4)
본 시편은 바벨론 침공의 결과로 성전이 더럽혀지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으며,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이 대량 학살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 시인은 이 사실의 결과로 드러난 실제 현상을 주목하면서 일종의 탄원적인 묘사로 본 시편을 시작하고 있다. 사실 예루살렘 주위의 시체와(2절) 흩어진 전쟁마당의 비참한 현실은(3절) 인간의 최후 심판을 예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겔39:1-24;계11:8, 9;19:17-18).
이스라엘 백성은 곧 하나님의 기업이다. 이것을 가시적으로 상징한 것이 바로 '성전'이었다. 그러므로 이 성전이 파괴된 사실은(1절;렘52:17-23)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도전이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 또한 그의 대적들에 의해서 철저히 파멸되었다(2, 3절). 이사실은 그들의 예배의 중심지이며,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던 그 성전에서 참된 '하나님 예배'를 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렘 16:4). 시인은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적절히 묘사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사용하였다. '더럽히고', '돌무더기가 되게 하고'(1절),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2절), '물같이 흘렸으며'(3절)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제 대적들로 인한 철저한 파멸은 단지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부터 고통과 비방을 당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4절;44:13).
본 시편 기자는 바로 앞 시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예로서, '열방을 저희 앞에서 쫓아 내신'(78;55)사실을 지적했었다. 그러나 이제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열방이 언약 백성을 정복하고 멸망시켰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배도하였을 때에는 철저히 그들의 대적자들에 의해서 파괴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게 된다.
2. 구원의 시기에 대한 의문(79:5-7)
바벨론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철저한 파괴로 인하여 탄식하던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간구하며 더불어 원수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알고 있다. 시인이 원수들의 멸망을 간구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시적인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전을 더럽히고(1절) 하나님의 백성을 학살했기 때문이다(2,3절).
사실 본 단락은 시인이 이스라엘의 파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어느 정도 깨닫고 전개시키기 위한 서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시인은 자신들의 파괴가 철저히 하나님의 진노하심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6:5;90:13;계6:10). '영원히 노하시리이까'와 같은 질문은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낸다. 그는 이웃들의 조롱과 비방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도데체 언제까지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되어질 것인지가 대단히 궁금하였던 것이다(13:2;44:24;80:4;89:46). 시인은 자기들을 철저히 유린한 그들의 정체는 도무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자들(6절)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유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전에 그러했듯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한다(6절). 그 근거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놓여진 '야곱의 집'이었기 때문이다(7절). 시인의 입장에서는 '야곱의 집'의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대적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를 깨닫고 이제 오히려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그렇지 않은 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진노의 손길 안에서도 전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근거로 희망을 소유한다는 사실이다. 즉 진실한 성도는 환난에 처하게 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3. 이스라엘 회복의 근거인 하나님의 영광(79:8-10)
시인은 이스라엘의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에서 기인한 것임을 자각한다. 열조의 배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나게 되었고, 그 영향이 후손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사64:9).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소원하기를 이스라엘의 고통 때문이 아닌 바로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해 주실 것을 소망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현실적인 비극이 모든 신앙이나 소망을 하나님에게서 단절시킨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신 점은 변함이 없었다(9절).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에게서만 구원의 소망을 기대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도우실 것이다(민14:13;신9:28). 하나님은 언약 백성의 죄를 사해주시며(9절;23:3;25:11;34:3;겔36:22), 현실적 고통의 원인인 열방의 침입을 물리치고 그들을 응징하실 것이다(10절). 이러한 시인의 간구는 이스라엘의 불행과 버림받음으로 인하여 이방인이 하나님을 비방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 시인의 태도에서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 하나님의 '긍휼'( ).
하나님의 인격 중 하나인 '긍휼히 여기심'은 언약 백성을 위한 위대한 행동을 통하여 분명하게 확증되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긍휼'이란 용어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타인의 요구에 대한 '깊은 느낌'이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백성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목표 중의 하나이다(78:38;출3:7;신30:3;렘12:15;호11:4).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당신의 백성과 이방인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같이 당신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다(103:13). 그러나 하나님을 공공연히 반역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지 않는다(렘13:14;15:5;21:7;애2:17;3:43). 특히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지 못하는 가장 두드러진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이방 산과 우상을 좇는 경우였다(신13:6-11).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의미.
하나님의 이름중 하나인 '여호와'는 이스라엘 신앙의 기초가 되었다(출3:15). 이 사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특권 자체가 그들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그분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분의 이름의 부정은 곧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신12:5,21;왕상8:29).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는 본질적인 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바르게 살지 못할 때는 계명을 어긴 죄와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4. 주의 크신 능력으로 보존됨(79:11-13)
하나님의 영광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한 시인은 본 단락을 통하여 더욱 위대한 신앙을 드러낸다. 그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능히 도와주실 것으로 믿고 간구했다. 사실 시인이 간구하는 성전의 회복이나 민족의 소생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뿐이다(13절).
바벨론 포로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과 학대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소리 높여 탄식하였다(11절;애1:3-5). 그러므로 시인은 고통받는 자의 해방뿐만 아니라(11b절). 동시에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간구하였다(12절). 이러한 시인의 확고한 소망은 철저하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양(flock)이라는 신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13절).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대대로 이 사실을 기억하여 언제나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소망을 얻을 것을 바라고 있다.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환경이 참으로 비관적인 상황 일지라도 예전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상고하면서 굳건한 믿음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
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란 용어는 주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에 대한 구약의 개념을 요약해서 말했다(행7:2).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20:7;62:7;사31:1,3) 섬겨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자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을 책망하여 이르기를 "어느 나라가 그 신(神)을 시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2:11)라고 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영광이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잊어버릴 때 그들의 영광은 수치로 바뀌었다(호4:6이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상의 형태로 만듦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였다(사42:8;48:11). 영광은 본질상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구약은 증언한다. 그러므로 허구의 영광인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에서 떠나시며, 그들의 참된 회개가 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가운데로 다시 돌아오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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