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 '판단역'(* , 미쉬파팀)은 '다스리다', '재판하다'의 뜻인 동사 '솨파르'(* )에서 파생되었으며, 원래 '공의', '재판' 등을 뜻하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통치적인 지혜(C. B. Moll, Rawlinson, Calvin, kidner)로 이해된다. 이는 솔로몬이 집권 초기에 백성들을 정의롭게 잘 다스릴 수 있기 위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바 있었던 점과도 일맥 상통한다(왕상 3:$-12).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 여기서 '의'(* , 체다카)는 본 문구가 앞 문구와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라는 점에서 앞의 '판단력'과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주들에게는 공평한 통치가 율법에 의해서 특별히 명령이되었다(출 23:3,6)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는 '율법의 기준에 부합되는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폭넓은 뜻을 아울러 시사한다(Kidner). 한편 '왕의 아들'은 솔로몬을 가리킨다. 이처럼 솔로몬이 자신을 '왕의 아들'로 묘사한 까닭은 자신이 다윗의 후계자임을 암시하기 위함인 듯하다. 즉 솔로몬은 자신이 다윗의 후계자임을 이처럼 암시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하시겠다던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며(삼하 7:12, 13). 그래서 그 언약 당사자의 아들인 자신에게 이스라엘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게끔 해주는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72:2
저가...의로 판단하며 - '판단하며'의 히브리어 '야딘'(* )은 이것보다 훨씬 빈번히 사용되는 '솨파트'(* )와 동의어라 할 수 있으며 7:8;9:8에서는 나란히 언급되기도(* )이 주로 '재판하다', '심판하다'의 뜻이라면 '솨파트'는 이 뜻은 물론이고 '통치하다', '다스리다'는 뜻도 내포한다는 것이다(삼상 7:6;잠 8:16). 한편 이 두 단어가 재판관의 역할을 언급하는 문맥에서는 '옹호하다', '구원하다' 혹은 '징벌하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 이는 앞 문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다. 즉,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곧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 ,아니)는 '괴롭히다'혹은 '압제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나'(*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약한', '고생하는' 그리고 '겸손한' 등의 뜻도 내포한다. 따라서 이는 단지 경제적인 결핍 상태만을 가리키는 '에비온'(* )과는 어감이 다른 말이다.
=====72:3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 '의로 인하여'는,'왕이 백성들에게 온전히 공의를 행하고 그 결과로서'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는, (1) 왕의 백성에 대한 통치가 공의로울 때 그 결과로서 나타날 나라의 평화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Delitzsch) (2)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 오곡이 풍성해지는 등 국가 경제가 형통하는 것(Calvin) 등을 아울러 가리킨다. 사실 여기의 '평강'(* , 솰롬)은 내적, 영적 측면뿐만 아니라 물질적이거나 가시적인 형통까지 포함한다.
작은 산(* , 기브아) - 이것은 '언덕'(hill)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KJV, RSV, NIV) 앞 문구의 '산'(* , 하르)과 함께 팔레스틴의 지형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이다.
=====72:4
여기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백성이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 '백성의 가난한 자'는 '백성 중의 가난한 자'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군왕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그들은 권세자나 가진 자들의 착취 대상이 되기 쉬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착취의 결과로써 그처럼 '가난한 자'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느 5:1-13). 한편 '신원하며'(* , 이쉬포트)의 기본형 '솨파트'(* )는 원래 '다스리다' 혹은 '재판하다'의 뜻이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변호하다' 혹은 '변론하다'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삼상 12:7). 따라서 본 문구는, 솔로몬이 착취당하던 '가난한 자'의 어려운 입장을 동정하며 재판하겠다는 뜻이다.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 '궁핍한 자의 자손'은 곧 '궁핍한 자'를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구약 성경 안에서 자주 발견된다. 즉 '귀족의 아들'은 곧 '귀족'(전 10:17)을, '사람의 아들'(물론 개역 성경에는 '인생'으로 되어 있지만)은 '사람'을 가리킨다(107:8;전 8:11). 그리고 '구원하며'는 권세자나 부자들에게 착취당하는 상태에서 건져내는 것을 가리킨다.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 '압박하는 자'(* , 오쉐크)의 기본형 '아솨크'(* )는 '압제하다'의 뜻으로서, 권력이나 권위를 남용하여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는 등 그들을 억누르고 짓밟는 행동을 가리킨다(Ronald B. Allen). 한편 '꺾으리로다'(* , 이드케)의 , 기본형 '다카'(* )는 '눌러서 뭉개다'의 뜻으로서, 주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욥 5:4;34:25;사 19:10).
=====72:5
이것은 4절의 결과이다. 즉 백성의 지도자인 왕이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등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백성도 왕을 본삼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해...달이 있을 동안에 - 이것은 여호와께 대한 경외가 항상 동일하게 지속될 것임을 말한다. 한편 '해가 있을 동안에'와 유사한 표현은 하나님이 다윗의 왕위와 그 후손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약속하신 말씀 중에도 나온다(89:36).
=====72:6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임하리니 - '벤 풀'(* ,게즈)은 차라리 '풀을 벤 들'(mown field, NIV) 혹은 '풀을 벧 들'로 봐야 한다(Delitzsch). '풀을 베는' 때가 비가 전혀오지 않고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초여름이다. 이때에는 풀 포기의 뿌리조차 말라버릴 만큼 수분을 필요로 한다. 본 문구는, 바로 이같이 대지가 빗물을 고대하고 있듯이, 백성들은 공의로운 왕을 기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72:7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興旺)하여 - 공의로운 왕의 출현이 있을때 '의인'들이 형통할 수 있는 까닭은, 악인들이 의인듸을 훼방하지 못하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모두 제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인'들은 자신들이 노력하는 만큼의 결과들을 얻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공의로운 왕이 되기를 소원했던 솔로몬은, 본문의 문자 그대로 '의인'들이 '흥왕'하는 세상을 실제로 만들지는 못햇다. 따라서 우리는 본 시편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에 대한 예인이며, 솔로몬 자신은 완전한 공의의 왕 그리스도의 예표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 '달이 다할 때까지'는 '영원토록'이라는 의미로 보아도 무난하겠다(to the end of time, lb). 한편 '평강'은 앞 문구의 '흥왕'과 본질상 동일한 뜻을 나타낸다. 3절 주석을 참조하라.
=====72:8
본절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이 팔레스틴 이외의 넓은 지역까지도 정복 통치하게 될 것(왕상 4:21,24)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주적인 통치를 행하시는 것(고전 15:25;빌 2:9-11;계 20:4-6)을 아울러 예언하는 내용이다.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 - 어느 특정한 '바다'를 지칭한다 보아서는 안 된다. 다만통치 영역의 광대성을 표현키 위한 시적(詩的)묘사 이다(슥 9:10). 한편 이 표현은 츨23:31의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라는 발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으며 더 확장시켜 전 세계적 차원의 '바다'와 연관시킬 수도 있다. 히브리 우주관에 의하면 '깊음의 샘' 곧 바다가 땅 아래와 둘레에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24:2;136:6;욥 26:10;잠 8:27)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는 곧 온 땅을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미 7:12;슥 9:10, Anderson).
=====72:9
광야에 거하는 자의 저의 앞에 굽히며 - '광야에 거하는 자'(* ,치이임)는 '바싹 말려버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아랍만 좌우의 사막 지역에 거주하던 유목민을 가리키는 듯하다(70인역은 '이디오피아인들', 시리아역은 '섬들', 그리고 NIV는 '사막 부족들' 등으로 번역함). 이처럼 저자 솔로몬은, 팔레스틴에서 멀직 떨어져 거주 하던 민족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이 대단히 넓을것을 암시한다. 한편 '저의 앞에 굽히며'는 정복자가 정복자에 대하여 취하는 자세이다.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 이것도 정복자에게 부복하는 자기 비하의 자세이다. 한편 아랍인들은 높은 사람에게 절을 할 때 머리를 땅에 댄다. 그럴 경우, 얼굴과 입에 사막의 모래가 묻을 것이며, 이것을 달리 생각하면 '티끌을 핥는 것'과 다를 바 없다(사 49:23;미 7:17).
=====72:10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貢稅)를 바치며 - '다시스'는 스페인의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히브리인들에 의해서 보통 이 세상 최서(最西)의 땅으로 이해되었다(왕상 10:22, Anderson). 금속의 채광과 가공으로 유명했던 이곳은 추측컨대 오늘날의 스페인 남부 지브로울터 해협과 가까운 타르테수스인 듯하다. 한뛴 '섬'은 지중해의 여러 섬들을 가리킨다(에 10:). 그리고 '공세를 바치며'도 피정복왕의 정복왕에 대한 복종의 외적 표현이다(왕상 4:21).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 '스바'(* )는 아라비아 남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아라비아 반도의 가장 비옥한 곳 중의 하나로서, 댐 등의 건설에 의한 관계 시설이 발달되었었다. 이 나라 혹은 민족은 북쪽의 대제국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외로부터의 군사적 침입을 당하지 않아 전반적으로 평화와 안전을 누렸다. 바로 이 같은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로 인하여 '스바'는 고대 중근동 지역의 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고대시대에는 향료, 금, 보석등의 유통 중심지였으며(욥 6:19;사 60:0;겔 27:22, 23) 솔로몬 당시에 실제로 스바 여왕이 많은 예물을 바친 사례가 있다(왕상 10:1-10). 한편 '시바'(* )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근방으로 추정된다(Josephus).
=====72:11
만왕이 그 앞에 부복(府伏)하여 - 솔로몬이 실제로 정복했던 지역은 만왕이 부복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본절은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관한 예언으로 보아야 한다(사 49:23).
=====72:12
히브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다. 따라서 11절에서와 같이 '만왕'과 '열방'이 왕에게 부복하고 그를 섬기는 이유는, 12-14절에서와 같은 공의에 근거한 선정(善政) 때문이다. 물론 온전한 의미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한 나라는 메시야 왕국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 여기서 '궁핍한 자'(* , 에비온)는 일반적으로 물질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부르짖을 때'(* , 메솨웨아)의 기본형인 '솨와'(* )는 고통, 압제, 극한 상황 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이 '솨와'라는 동사는 강조형(피엘)으로만 사용될 만큼 행위의 강렬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출 2:23 에서의 용례(用例)를 보더라도, 본 동사의 강렬한 의미는 능히 짐작된다. 우리는 본 동사가 바로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궁핍한 자'의 부르짖음이 무슨 연유인지를 대충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권세 잡은 자들과 부유한 자들로부터 수탈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이다. 한편 '건지며'(* , 야칠)의 기본형 '나찰'(* )은 원래 '구해내다' 혹은 '구출하다'의 뜻으로서, 여기처럼 사역형(히필)으로 사용될 때에는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어디로부터 잡아채거나 혹은 분리해내는 것을 가리킨다(삼하 14:16;20:6).
도움이 없는 가난함 자도 건지며 - 여기의 '가난한 자'(* , 아니)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도움'(* , 오제르)은, 군사적 지원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 '아자르'(* )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상당한 부담이나 희생이 동반되는 지원 행위를 뜻함이 분명하다. 이처럼 '도움이 없는 가난한자'는, 이 세상의 구조속에서는 계속적으로 소외되고 더 나아가 더 손쉬운 착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비록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질지라도, 그들을 도울 경우 자신들에게 가시적인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돕다가 권세있는 자들이나 부자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게 된 것을 염려하여 그 동정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께서는 그들의 억울함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에서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눈물을 친히 닦아주실 것이다(계 21:4).
=====72:13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 '가난한 자'(* , 달)는 '낮아지다'를 뜻하는 동사 '달랄'(*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상대적 연약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부유한 자에 대립되는 '비한한 자'(잠 10:15), 권세있는 자에 대립되는 '비천한 자'(암 2:7)를 가리키다. 여기서는 두 개념 모두를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며'(* , 야호스)의 기본형인 '후스'(* )는 '불쌍히 여기다'혹은 '아끼다'의 뜻으로서, 애틋한 동정심을 가지고 사려깊게 상대를 돌보아주는 것을 가리킨다(Delitzsch). 이것은, 보이는 유익만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의 행동 방식과 전혀 다른 것이다.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 이것은 비천한 자들이 권세자나 부유한 자 등으로부터 핍박받고 학대당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이 것도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메시야 왕국이 완전히 도래한 시대에는 이미 악인들이 완전히 제거된 상황이며, 따라서 악인들에 의해서 압박받는 일도 압박받는 자를 건져낼 일도 없을 것이다.
=====72:14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 13절 후반부인 '긍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의 구체적 언급이다. '압박'(* ,토크)은 사기와 협잡이 동반되는 물리적 핍박을 가리킨다. 그리고 '강포'(* , 하마스)는 '...에게 해를끼치다'를 뜻하는 동사 '하마스'(*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불법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이러한 행위는, 이 세상 전체에 홍수의 심판을 내리게 할 만큼 극악한 성격의 것이다(창 6:11, 13).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 왕이 그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진정한 복리를 보장하리라는 뜻이다(116:15;삼상 26:21;왕하 1:13, 14). 여기서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한다(13절;창 9:4).
=====72:15
저희가 생존하여 - 본문을 14절에 연결시켜 '그들이 생존할 것이며'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본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히'(* )와 '드리며'(* , 이텐)는 모두 3인칭 단수이다. 따라서 본 문구의 '저희가'는 '저가'로 번역해야 옳다. 즉 왕 혹은 메시야가 본 문구의 주체인 것이다. 그리고 '생존하여'는 솔로몬에게는 장수하는 것 그리고 메시야인 그리스도에게는 영원히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특히 영역본 RSV와 NIV는 '만세수를 누리소서'(Long may he live!)라고 번역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왕께 환호하거나 인사 올릴 때 사용했던 공식적인 외침을 상기케 한다(삼상 10:24;삼하 16:16).
=====72:16
산꼭대기의 땅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 '풍성하고'(* , 예히 피사트)의 '예히'는 미완료 시제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미래가 아닌 기원의 성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Delitzsch). 그런데 '산 꼭대기의 땅'은 본래 척박(瘠薄)하여 곡식이 잘 안 되는 곳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땅'에서도 곡식의 수확이 풍성할 것을 예언적으로 기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경우 그러한 백성이 현실적으로도 얼마나 형통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7절).
그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 '레바논'은 성경에서 굵은 백향목이 우거진 곳으로 특징 지워지고 있다(92:12;104:16;왕상 7:2;아 3:9;호 14:5-7). 따라서 '레바논같이'는 '레바논의 빽빽한 백향목 숲과 같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곡식의 수확이 심히 많을 것이라는 앞 문구를 보다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 '성에 있는 자'(* , 메이르)는 문자적으로 '성으로부터'이다. 그리고 '왕성하리로다'(* , 야치추)는 미완료, 3인칭, 복수, 사역형이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도시로부터 땅의 풀같이 왕성하게 하라'로 번역됨이 옳다(Weiser). 그렇다면 본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상반절은 농산물이 크게 증산될 것에 대한 언급인 반면에 여기서는 인구의 번성을 말하고 있다. 욥 5:25에는 후손의 번성을 '땅에 풀'에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왕상 4:20)라는 사실로써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처럼 인구의 번성은 메시야 시기에 있게될 특징적인 일 중의 하나이다(110:3;사 9:2;49:10;슥 2:8).실제로 그리스도의 영적 틔치가 행해지고 있는 이 신약 시대(빌 2:9-11;계 20:4-6)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효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72:17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 왕의 통치로 인해 축복된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그 왕권이 요동되지 않게 될 것을 말한다. 이는 온 세상을 불순한 동기에 따라 정복 지배하려던 세속의 왕들과 그 나라가 역사 속에 묻혀버렸던 것과 대조된다(Calvin).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 이것은 백성들이 공의를 행하는 왕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추복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저자는 이미 공의로운 왕으로 인하여 물질의 축복도 있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16절). 사실상 이러한 예언은, 하나님이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바였으며(창 12:3), 이것의 완전한 성취는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
=====72:18
솔로몬은 본절과 다음절에서, 자신의 예언적 기원들(1-17절)이 성취될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찬송한다. 홀로 기사(奇事)를 행하시는...이스라엘의 하나님 -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흔히 사용되는 관용적 표현이다(86:10;136:4;욥 9:8, Delitzsch).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나아가 궁긍적으로는 메시야를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솔로몬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과 관계된다. 한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곧 당신의 백성을 끊임없이 성실하게 돌보시는 분이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백성에 대한 언약의 신실한 이행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사실 솔로몬은 왕의 이상적인 통치와 그로 인한 그 나라의 번성을(17절) 하나님의언약에근거하여 기원하고 있다. 이처럼 솔로몬은 언약에 근거한 기원과 더블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적 기원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신함과 동시에 그 기원의 성취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72:19
영화로운 이름 - 하나님께서 백성들로부터 송축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해서 인생으로부터 송축을 받으셔야 되는 분은 아니다(해 17:25). 다만 그러한 송축을 통하여 인생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실 따름이다(사 43:21).
아멘 아멘 -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기원이 성취될 것에 대한 강력한 확신과 아울러 그것의 성취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반영한다(41:13;89:52;106:48).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요하다 - 이것은 수집자의 삽입이다. 그러나 제2권(42-72편)의 수집자가 삽입했는지. 혹은 제3권(73-89편)의 수집자가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제3권의 수집자가 이미 수집되어 있었던 제2권과 자신의 수집 부분을 뚜렷이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삽입했을 가능성이 크다(Rawlinson).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점은 시편 72편까지 중 다윗의 시편은 대략 60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구나 마지막인 72편은 솔로몬의 저작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닌 듯하다. 제3권의 수집자는 이미 수집된 제2권까지의 시편중 대부분인 60편이 다윗의 저작이었던 관계로, 엄밀히 따지면 모두 '다윗의 기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같이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약 성경이 시편 전체를 '다윗의 시'로 언급한 사례가 있고(막 12:36;눅 20:42), 또한 잠언도 솔로몬의 전작(全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흔히 솔로몬의 저작으로 인정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본시는 127, 132편과 함께 솔로몬이 지은 시로서 솔로몬 통치 당시의 번영을 묘사함(왕상 3:16-28;4장)과 아울러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의 번영상을 예시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시사한다.
어떤 학자들은 19절 하반 절에 근거하여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지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표제에 등장하고 있는 '솔로몬'이라는 말을 솔로몬이 지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솔로몬을 주제로 하여 이 시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윗의 저작권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 시의 문체가 다윗 시의 문체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시가 잠언식의 진행을 이루고 있으며 자연에서 따온 비유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6 , 8, 9절)등을 미루어 볼 때 이 시는 솔로몬 문학의 특징을 띠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윗의 기도는 필하다'(19절)라는 구절은 시편 수집자에 의해 추가된 부분일 것으로 가정한다. 또한 이들은 표제에 나타난 '솔로몬의 시'을 '솔로몬을 위한 시'라기보다는 '솔로몬이 지은 시'로 해석한다. 이렇게 대비된 이 시의 저작설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문체와 표제를 통해 솔로몬의 저작설을 지지하고 있다. 즉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장차 다스릴 자들에게 통치의 모본을 제시하고 권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시에 등장하는 다윗의 이름(19절)은 솔로몬이 그의 부왕 다윗으로부터 노년에 배운 것들을 그의 후왕들에게 교훈하기 위해 기록하였을 것이란다 가정도 한다. 사실 솔로몬은 노년에 이른 그의 부왕 다윗으로부터 배운 여러 가지 지혜를 그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솔로몬은 비록 한때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도 했지만 완전하신 메시야의 모습을 소망하였고, 이스라엘이 메시야적인 모습을 소망하는 왕들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임을 자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왕의 바른 모습(4-8절)에 대해 그의 후왕들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시는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2편과는 좀 색다른 면이 보인다. 본 시편에는 2편에서 볼 수 있는 전쟁, 무기, 폭력 등에 대한 암시가 거의 없다. 대신에 한 나라가 왕의 뛰어난 인품으로 아름답게 다스려질 것을 강조
하고 있다. 시인은 두 번이나 왕이 약한 자를 돌보고 불의한 자를 꺾는다는 사실을 말한다(1-4, 12-14절). 그리고 왕의 뛰어난 영도력으로 인해 주변의 여러 나라가 공세와 예물을 바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10절).
이 시는 내용상 어떤 한 왕의 치적(治績)을 축하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이 점은 이 시 전반에 흐르는 사상을 생각할 때 잘 파악되어진다. 왜냐하면 본시는 택함 받은 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추구해야 할 하나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표현상 단순한 시 형태를 띠었지만 사실은 예언에 가까운 메시야의 특색을 띠고 있다. 이러한 특색을 지닌 시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메시야를 기대하는 소망과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다. 따라서 시인은 이 소망과 약속을 근거로 왕국의 영원한 존속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17절).
이러한 본 시편의 전반적인 사실을 기억하면서 본문을 분석해 보면 (1) 왕의 통치(1-7절)가 (2) 만인 앞에 드러난 왕의 권능(8-14절), (3) 왕의 영원한 자비와 영광(15-19절)으로 나눌 수 있다.
1. 왕의 통치(72:1-7)
왕의 통치의 첫 번째 특징은 의와 공의인데 이 두 말은 거의 동일한 뜻을 나타내나 굳이 차이를 두자면 전자는 '원칙'에, 후자는 그 원칙의 '실제'에 주안점을 둔 표현이다. 기도자가 왕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로 공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일국의 지도자에게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공의의 수호자로서, 또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로 서겠다는 소신과 의지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공의는 너무도 자주 불이행되었다(렘 22:15-17).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불행을 겪었고 하나님 앞에서 위기를 겪어야 했다. 기도자는 이런 연유로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흥망 성쇠의 중요한 원인이 될 위치에 있는 왕에게 하나님의 의를 좇아 바르게 자기 백성을 다스릴 수 있도록 권면의 기도를 드리고 잇는 것이다. 부언컨대 이 공의라는 요소는 왕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그것은 왕이 불쌍한 백성을 향해 갖는 연민보다 앞서는 중요한 요소이다. 출 23:3, 6에 의하면 통치자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형평의 원칙을 따라 정의로워야 하는 왕은 고대 근동의 전제적인 왕과는 달리 독단을 가질 수 없다. 이는 신정국(新正國)의 독특한 특징이다. 즉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여타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께 선별된 나라이다. 그리고 왕도 인간이 세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할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들은 진정한 왕인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온전히 순종해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인은 이스라엘 열왕들이 하나님의 의를 좇아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둘째로, 왕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제시받은 의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돕고 압제자들의 세력을 물리쳐야 한다(2, 4절). 왕은 불의한 압제자들에 의해서 압박을 받고 있는 궁핍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께서 통치권을 발휘하시는 나라에서는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 압제받는 자들이 생겨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반포하시면서 처음 하신 말씀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포로된 자와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눅 4:18)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2, 4절은 메시야적인 사역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의 통치의 세 번째 특징은 평강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행하는 왕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을 내리신다. 신 28장에는 순종 가운데 의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평강을 누린다는 약속의 말씀이 나오는
데 시인은 이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왕의 의로운 통치를 통해 그의 백성에게 이러한 평강의 축복이 풍성히 임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7절). 한편 사 2:4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될 때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든다는 평강의
약속이 나타난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온전한 평강은 인간 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아담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궁극적 성취를 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셔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엡 2:14)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평강을 주셨고 이 평강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골 3:15).
2. 왕의 권능(72:8-14)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의로운 통치를 해 나아갈 때 그의 명성은 나라 안 뿐만 아니라 밖에도 아려지게 되며, 의로운 통치자의 영토는 모든 땅까지 이르게 된다는 약속이다. 사실 약속의 땅은 동쪽 유프라테스 강에서
서쪽 지중해에 이르는 곳이었다. 그러나 의로운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질 나라는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서게 된다(슥9:10). 8절에 언급된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는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것과 동일한 구절이다. 사실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모형이었던 솔로몬 왕국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창 15:18) 애굽 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에 이른 광대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왕상 4:21). 이것은 메시야 왕국의 한 모형으로서 장차 메시야로 말미암아 온 땅이 그분의 주권아래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부분이다(마 24:14). 이토록 광범위한 범위에까지 확장되는 왕의 영토와 더불어 왕의 권능은 광야에 거하는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되고(9절),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에까지 미쳐 그곳에 거하는 모든 외국인들이 예물로 왕을 경배하게 될 것임을 말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도 실제 유대 왕국 주변에 있던 스바, 아라비아 왕들이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 왕을 경배하였다(왕상 10:13-25). 또한 이러한 예물 헌납과 경배의 일은 신약에서도 볼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때에 그 왕의 권능과 명성 때문에 동방에서 온 귀족들이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였다(마 2:11).
그런데 이러한 왕국의 통치와 왕의 권능은 개인적이고 제국적인 열망에 의해서 확장되기보다는 의로운 왕의 통치로서만 확장되어진다. 이러한 연유로 실제 유대 왕국의 권능과 그 왕들의 명성은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혹 한 세대를 넘겼다 할지라도 그 다음 왕으로 넘어갈 때 여전히 위축되고 축소되어져 갔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은 그 왕들의 자기 욕심으로 인하여 이방 나라에 의해 오히려 정복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당신의 몸을 친히 하나님께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땅 끝까지 확장되어 모든 민족으로 순종케 하셨다(롬 16:26). 한편 시인은 본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궁핍하고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악한 자들로부터 연약한 자의 생명을 구하는 왕의 소명을 다시 한번 반복시키고 있다. 이러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은 마치 욥에 의해 제기되었던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한
다(욥 29:11-16). 아마도 시인이 이러한 반복을 시도하는 이유는 반복의 문학적 특색인 강조를 위함이었다고 이해된다.
3. 왕의 자비와 영광(72:15-19)
놀라운 왕의 번영을 묘사한 후 이제 이 시는 여기서 절정에 달하여 영과의 찬송을 기록하고 있다. 왕에게 베풀어진 경외심에 대한 증거들(15절), 그의 통치의 번영(16절), 그 나라의 지속과 확장(17절) 등의 내용들이 찬양의 형태를 띠고 표현되고 있다. 여기에서 왕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찬양 드릴 기반을 제공한 인물로 등장한다. 백성들은 왕의 뛰어나 통치로 인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따라서 백성들은'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15절)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문구는 왕이 의롭고 바른 통치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간청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런 간청을 하는 배후에
는 왕 자신이 직접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을 억제하여 메시아이신 하나님께 순응해 줄 것을 바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순종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놀라운 번영과 평강 가운데 유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에 대한 놀라운 비전을 갖는다(16절).
그는 먼저 양식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백성이 풍성한 양식으로 왕성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다. 시적인 기법을 통해 양식의 풍성함이 조금 과장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만큼 풍성한 것임을 노래할 따름이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함에 대한 비전을 품는다.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왕권의 영원함은 구약에서 예언된 것처럼 다윗 왕조의 영원함을 나타내는 것인데 신약에서는 이 구절이 메시야에게 적용되어 다윗 왕조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예언을 완전히 이루셨음을 증거한다(눅 1:32,33). 시인은 영원한 왕권을 누릴 그에게 우주적인 축복을 기원한다. 하나님의 왕국 지속은 왕에게 영광이요 백성들에게도 복될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이 통치는 영원한 통치이기 때문에 이 시가 이스라엘 역사상의 특정한 왕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와 달이 있을 동안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분은(5절) 바로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그런 분이기에 메시야의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이다(17절). 더욱 감사하고 복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원토록 전해짐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영원토록 복을 받게 되는 사실이다. 본시의 마지막 세 구절은 영광송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3권 시편의 수집자에 의해 더해진 부분으로 인정되지만 이 영광송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뛰어난 것이다. 사실 41:13과 비교해도 알 수 있지만 본 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영광송은 독특한 것으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시인은 아직 많은 약속들이 성취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이 영광송으로 찬양을 돌리고 있다. 시인은 이 마지막 영광송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그 하나님께서 앞에서 예언된 모든 예언들을 성취하시도록 선취적 소망 중에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편의 제2권은 마무리된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비밀과 그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다. 영원한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그 영광스런 신분을 잃어버린 채 왜소(矮小)해 있지는 않는가? 혹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외면한 채 나의 가정, 나의 공동체안에서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방의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놀라운 보배이다. 만방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품을 수 있도록 만왕의 왕이시고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자.
* 제왕시와 메시야. 전 시편에 걸쳐 제왕시로 판명난 시들은 2, 45, 72, 89, 110,118편 등이다. 이 시들은 주로 왕이 희생 제사를 드릴 때, 혹은 왕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할 때 불려졌다(왕하 23;3). 그리고 대표적인 제왕 시의 사용은 왕이 왕위에 오르는 날, 그 왕의 직책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선언할 때 불려졌다(2:7). 더욱이 이 제왕시는 왕이 백성을 재판할 때 그 재판이 하나님의 의로운 법에 따라 행해지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불려졌으며(101편) 동시에 72편과 같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순종하여 공의와 자비로 이스라엘을 다스려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강건하고 경제적으로 부요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백성들이 왕을 위해 하나님께 찬양할 때도 불려졌다. 그리고 이 제왕시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기적적으로 행하신 일들을 앞으로도 계속 해주시기를 소망하며 왕을 위해 기도할 때도 사용되었다(21:1).
그러나 제왕시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려 줄 것을 요구하며, 드러한 다스림을 위해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를 요청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왕시에서는 영원한 왕의 통치를 바라는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2:7, 8;20:9;21:13). 다시 말하면 이러한 기원은 사실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장차 오실 그분을 고대하고, 종말의 날에 하나님 백성을 영화롭게 할 위대한 왕을 기다리며, 그리고 모든 위기와 슬픔과 악인의 횡포를 근절시킬 이스라엘의 궁극적 왕인 메시야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기에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B. C.586)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이 제왕시는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불려졌던 것이다(사 55:12;56:1-3).
이러한 의미에서 제왕시에 나타나는 메시야 사상은 이 시를 늘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떤 상황에서라도 인내하게 하며 서로 깊은 유대감을 갖게 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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