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68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68:1
본시는 다윗이 전쟁에서의 승리, 혹은 위기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을 체험한 후 이러한 역사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이다. 저작 배경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본 시편의 강해를 참조하라.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앞세워 진군하기 시작하던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와 동일하다(민 10:35). 따라서 본 기도도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와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기 위하여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윗은 그때 이러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원수들과 싸워 주시기를 소원하였다. 특히 다윗은 군사적인 행동 혹은 중대한 행동을 취하기에 앞선 마음의 결단(삼하 18:32;렘 49:14)을 촉구하는 표현인 '일어나사'를 사용하여, 원수들을 진멸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이 속히 있어야함을 기원한다. 그러나 이 단어를, 소원을 아뢰는 단순한 기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시편의 대개의 기도 속에는 그 기도들이 이루어질수밖에 없다는 저자들의 강한 확신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편, '원수'(* , 오예바이우)는 문자적으로 '그분의 원수들'이다. 사실 이 원수는 이스라엘 벡성들을 대적하던 암몬족속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곧 하나님의 원수들이라는 사실은 우리 성도들에게 대단한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핍박을 받을 때 마치 당신이 핍박받으시는 것으로 간주하시어(행 9:4) 그들에게 중한 보웅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68:2
연기가 몰려감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 '연기'는 바람에 의해서 신속히, 그리고 용이하게 이리저리 흩어지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37:20;102:3;호 13:3 참조). 따라서 본문은 악한 원수들에 대한 징벌을 재촉하는 기도이다.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 상반절과 동일한 뜻을 나타낸다. 여기서 '밀'(* , 도나그)은 그 어원이 불확실한 단어로서 양초의 원료인 파라핀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것은 섭씨 50도가 용해점(溶解點)인 만큼 불에 조금만 가까이 대기만 해도 즉시 녹아내리며 심지어는 웬만큼 뜨거운 물에 집어 넣어도 완전히 녹아 없어진다(97:5;미 1:4 참조). 이처럼 그 원수들은 인간적 안목으로 보면 막강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는 지극히 연약하고 하찮은 존재인 것이다.

=====68:3
의인들의 이 같은 반응은 악인들이 멸망당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다. 다만 의인들은, (1) 자신들이 악인의 위험에서 구원받았으며, (2)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벌하시고 선한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공의를 밝히 드러내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사실, 크나큰 환난이나 위경에 직면해 있는 동안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준동(蠢動)을 모른체하신다고 생각하여 낙심에 이를 뻔했을 것이다(73:2, 3). 그러나 드디어 악인들이 징벌당하자 의인들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공의로우심을 확인하면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52:6;58:10;64:7-10).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 '뛰놀며'(* , 알라츠)는 원래 '기뻐 날뛰다'의 뜻으로서 대개 승리로 인한 기쁨 혹은 그 기쁨의 외부적 표출 행위를 가리킨다(25:2). 그리고 '앞에서'(* , 리프네)는 '얼굴을 향하여', '얼굴 쪽으로'의 뜻으로서, '얼굴로부터'라는 의미인 2절의 '앞에서'(* , 미프네)와는 반대의 뜻이다.

=====68:4
의인들의 이 같은 반응은 악인들이 멸망당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다. 다만 의인들은, (1) 자신들이 악인의 위험에서 구원받았으며, (2)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벌하시고 선한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공의를 밝히 드러내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사실, 크나큰 환난이나 위경에 직면해 있는 동안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준동(蠢動)을 모른체하신다고 생각하여 낙심에 이를 뻔했을 것이다(73:2, 3). 그러나 드디어 악인들이 징벌당하자 의인들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공의로우심을 확인하면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52:6;58:10;64:7-10).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 '뛰놀며'(* , 알라츠)는 원래 '기뻐 날뛰다'의 뜻으로서 대개 승리로 인한 기쁨 혹은 그 기쁨의 외부적 표출 행위를 가리킨다(25:2). 그리고 '앞에서'(* , 리프네)는 '얼굴을 향하여', '얼굴 쪽으로'의 뜻으로서, '얼굴로부터'라는 의미인 2절의 '앞에서'(* , 미프네)와는 반대의 뜻이다.

=====68:4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 - 여기서 '광야'(* , 아라보트)는 암몬 족속의 용병(傭兵)이었던 아람 사람들이 진을 쳤던 모압의 초원 지대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삼하 10:8, Keil).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마치 마차나 병거를 타고서 당신의 백성들 대신 그 원수들과 싸우기 위하여 백성들보다 앞서 나아가시는 것을 연상시킨다(Keil). 그러나 '아라보트'를 '하늘'혹은 '구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KJV, NIV, RSV). 특히 33절과의 병행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Kidner). 하나님께서는 하늘 병거를 타시고 당신의 백성에게는 보호와 축복을, 그리고 그 대적들에게는 징벌과 저주를 내리기 위해 두루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된 적이 종종 있다(18:10;104:3).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 '여호와'의 히브리어 '야'(* )에 대해서는 (1) '여호와'(* )의 축약형, (2) '여호와'의 파생형, (3) '여호와'의 고어형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1)의 견해가 그중 제일 무난한 것 같다. 그렇다면 본절의 '여호와'도 '스스로 계신 자',혹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나타낸다(출 3:14). 그러므로 이는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 의해서 조작된 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분만이 인간의 궁극적 신뢰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여기에 사용된 축약형 '야'(* )는 이곳 외에 18절과, 하나님의 크신 구원적 권능에 대해서 언급하는 곳(출 15:2) 및 하나님께서만 신뢰와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함을 언급하는 곳(사 26:4)에 나온다. 한편, 원문상에는 '여호와' 앞에 전치사 '베'(* )가 붙어 있는데, 이는 강조를 위한 불변화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그의 이름은 여호와 외에 그 어떤것도 아니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겠다(Anderson).

=====68:5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 하나님은 악행자들을 바람이 연기를 흩뜨리듯이 진멸시키시지만(2절) 억울하게 압제 당하는 사죄적 약자들은 보호하신다. 우가릿 문서(예컨대, '케레트의 전설'이나 '아카트의 이야기' 등)에도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는 것은 이상적인 왕에게 부여된 특별한 임무로 나와 있다(Anderson). 성경 역시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임을 명시하고 있다(10:14;신 10:18;사 1:17;약 1:27등). 이는 사람의 외모를 따라 부한 자와 높은 자를 더 중시하고 비천한 자들은 멸시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과 너무나도 대조된다.


=====68:6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 '고독한 자'(* , 예히딤)에 대해서는 신부를 맞을 지참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Albright). 그러나 그보다는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을 의탁할 가족이나 친족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Anderson, Mowinckel). 아마 이들 역시 고아나 과부처럼 공동체내에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 '수금된자'는 감옥 생활(창 39:20) 및 포로 생활을 하는자(69:33;사 14:17;애 3:34;슥 9:11)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어쨌든 본문은 이들이 부자유스러운 상황속에서 고역과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예전의 자유와 번영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형통케 하시느니라'(* , 바코솨로트)는 '정당하고 적절하다' 혹은 '번영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쉐르'(* )에서 파생된 명사 '코솨라'(* )와 '함께'로 번역될 수 있는 전치사 '베'(* )가 합쳐진 단어이다.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 '거역하는 자'(* , 소라림)는 '완고하다' 혹은 '반항적이다'를 뜻하는 동사 '사라르'(* )에서 파생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제 고집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사 65:2;렘 5:23;슥 7:11). 그리고 '메마른땅'(* , 체히하)은 '눈부시다'를 뜻하는동사 '차하흐'(*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지극히 건조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본 문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완고한 사람은 사막과 같은 불모지(不毛地)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의미이다(민 14:29-35).

=====68:7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신 일을 회고하고있다.
앞서 나가사 -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언약궤(레 16:2)가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선두에 위치했던 사실(민 10:33)을 상기시킨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나아가시면서 그들을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출 13:21, 22) 또한 원수들을 물리치신 사실도 아울러 연관된다. 요컨대 하나님은 십자가 군병들인 당신의 백성들의 앞에 서서 우리를 대신하여 용감하게 싸우며 나아가시는 일선 사령관이시므로(수 5:13-15),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믿음의 행진을 담대히 계속할수 있다(딤후 4:7). 광야(* , 예쉬몬). 지극히 부적절한 자연적 조건으로 인하여 사람이 전혀 살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신 32:10). 기자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고 있던 '광야'의 황량함과 하나님이 인도하신 이후의 축복된 상태를 날카롭게 대조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Keil).

=====68:8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떨어지며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 시내 산에 임재하셨을 때에 나타났던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출 19:16-25). 그런데 '하늘이...떨어지며'는 어두운 천둥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시내산을 덮은 것을 가리킨다(신 5:22). 저 시내 산도...진동 하였나이다 - '저 시내산'은 원어상 (1)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저 시내산' (2) '시내산 자체'(even Sinai itself, KJV), (3) '시내산의 그분'(the One of Sinai, NIV)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중 (3)의 번역은 '저 시내 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이해한 것이며 '시내 산의 주님'이라는 의미로 파악한 것이다(Albright).
이스라엘의 하나님 - '시내 산의 하나님'이 계시 수여와 주로 연관된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셨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름이다(VanGemeren).


=====68:9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 이에 대해서는 (1)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를 위한 비를 풍족히 내리셨던 사실을 가리킨다는 해석(Calvin, Keil, 박윤선), (2)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던 일을 가리킨다는 해석(Rawlinson, C.B. Moll) 등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첫째, 11절 내용이 주로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본절도 광야에서 받은 축복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자연스러우며, 둘째, 출애굽기 등은 만나를 '비'로 말하고 있다(78:23, 24;출 16:4)는 점을 미루어 볼 때, (2)의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향편, '흡족한'(* , 네다보트)의 어근인 '나다브'(* )는 '자원하다' 혹은 '즐거이 드리다'(출 35:21 대상 29:9)의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근거한 아낌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낌없이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배부르기에 충분하였다(출 16:12).
주의 산업이 곤핍(困乏)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 '주의 산업'(* , 나할라트카)은 '나누다'나 '차지하다' 혹은 '상속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나할'(*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여기서는 '주님에 의해서 차지된 백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 곧 이살라엘을 가리킨다(신 7:6).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산업'혹은 '기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쉽게 발견된다(출 34:9;신 4:20;9:26, 29;왕하 21;14). 한편, '곤핍할때에'(* , 닐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회로한 상태를 가리키는 동사 '라아'(* )의 수동형으로서, 주변 여건 혹은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하게 지쳐있는 상태를가리킨다(잠 26:15;사 16:12).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먼길을 걸었고 또한먹지 못하여 극도로 지친 상태에 있었다. 또한 '견고케 하셨고'(* , 아타 코난타)는 문자적으로 '당신께서 견고케 하셨고'이다. 이처럼 본 문구에는, 동사에 이미 2인칭 단수 주어 어미(語尾)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별도로 2인칭 단수 인칭대명사 '아타'가 있다. 이것은 '견고케 하신' 행동의 행위 주체자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이해하면 된다. 한편, '견고케 하셨고'의 기본형인 '쿤'(* )은 '준비하다' 혹은 '세우다'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튼튼히하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일을 가리킨다(Keil, NIV).


=====68:10
주의 회중(會衆)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 '주의 회중'(* , 하야트카)의 '회중'(* , 하야)은 '살다' 혹은 '강하게 되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하야이'(*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살아있는 것', '사람들' 혹은 '군대'를 뜻한다(Davidson). 여기서는 삼하 23:11에서 처럼 '군대'보다는, 차라리 보다 일반적인 의미인 '무리', '집단'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Keil). 한편, '그 가운데'(* , 바)는 문자적으로 '그녀의 가운데'의 뜻이며, '그녀'가 지칭하는 바에 대해서는 가나안 땅과 광야 중 하나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만일 '주의 산업'(9절)이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면, 여기의 '그녀'는 틀림없이 '가나안 땅'일 것이다. 하지만 9절 주석에서 이미 '주의 산업'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가나안 땅'이 아님을 확인했었다. 따라서 본문의 '그 가운데'는 '광야 가운데'를 뜻하는 것 같다(7절).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핍하였던 곳(9절)이다. 그리고 '거하게 하셨나이다'(* , 야쉬부)는 '쉬다' 혹은 '거주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본 문구는 걷기만 하고 먹지 못하여 곤핍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양식을 공급받은 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쉬다'의 뜻을 갖는다고 볼 필요가있다.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만 하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마 11:28-30).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 '가난한 자'(* , 아니)는 '괴롭히다', '자기를 낮추다' 혹은 '억지로...을 시키다'의 뜻이 있는 동사 '아'(*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1) '압제당하는 자'(욥 36:6;사 49:13), (2)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가난한 자'(신 24:14, 15), (3) '겸손한 자'(잠 16:19), (4) '피곤한 자'(습 3:12)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핍'했었음을 말하는 9절에 근거해 볼 때, (4)의 뜻이 가장 합당한 듯하다. 한편 '준비하셨나이다'(* , 타킨)는 9절 후미의 '견고케 하셨고'와 어근이 동일하다. 본시의 기자가 이같이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 까닭은 동일한 내용을 언어 유희(wordplay)적 표현으로써 강조하기 위함이다.


=====68:11
주제서 말씀을 주시니 - 여기서 '말씀'(* , 오메르)은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필승의 약속(C.B. Moll), (2) 이스라엘로 하여금 승리의 노래를 부르도록한 하나님의 명령(Calvin), (3) 전황(戰況)을 급변케 한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Keil, Rawlinson)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첫째, 7절에서부터 10절까지가 하나님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극적으로 은헤를 베푸신 것에 대한 언급이며, 둘째, 다음 문구와 같은 행동(출 15:20)을 실제적으로 촉발시켰던 것(출 15:19)은 곧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이었다(출 14:26)는 점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위의 세 견해 중 (3)의 것이 보다 합당하다.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 직접적으로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비롯한 많은 여자들이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과 관계 있다(출 15:20).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에 여인들이 노래하며 춤추고 뛰놀았던 사실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삼상 18:6, 7). 뿐만 아니라, 바락과 드보라가 가나안왕을 이겼을 때, 드보라가 하나님을 찬양한 것도 결코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삿 5:1).


=====68:12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 가나안의 여러 왕들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패배한 사실들을 가리킨다(수 8:19-22;10:19, 20;11:8, 9;삿 3:10, 29). 그런데 '여러군대의 왕들'은 이들을 완전 패퇴시키신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다. 즉,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패배당한 왕들의 강성함을 이같이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력히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가나안 왕들은 철병거(수 11:4) 등의 우수한 병기와 훌륭한 요새(수 11:2)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자력(自力)만으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강력한 왕들을 이기셨고, 이에 따라 당신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셨던 것이다.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 이것은 (1) 여자들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능히 적병을 쫓아내고 전리품을 획득했다는 견해(박윤선), (2) 여자들도 남자들이 전쟁 중에 획득하여 집으로 가져온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다는 견해(Valvin, Keil, Kidner, Weiser)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는 없었다는 점에서 볼 때, (1)의 경우는 타당치 못하다. 또한, 가나안 왕인 시스라가 노략물을 취하여 집에 있는 자신의 어미에게 가져다 주려고 했었다는 사실도(삿 5:30) (2)의 견해를 지지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본문은 집에 있는 여인들에게까지 분배 기회가 주어질 정도로 전리품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68:13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 이는 목자들이 유유 자적(悠悠自適)하게 평안히 쉬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삿 5:16).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벡성들이 주변 세력들의 위협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서 평안히 정착하는 때를 가리킨다. 그러나 칼빈은 '양 우리'(* , 쉐파타임)를 '항아리'로 해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지저분한 항아리에 누운 듯한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었던 때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쉐파타임'은 '놓다' 혹은 '두다'의 뜻을 갖는 동사 '솨파트'(*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항아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항상 가축을 가두기 위한 울타리를 의미한다(창 49:14;삿 5:16). 그 날개를 은으로...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 이것은, 날으는 비둘기가 햇빛을 받아 어떤 때는 은빛을, 또 어떤 때는 금빛을 띠는 모습을 연상시키며(Keil),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크신 축복에 따라 대단한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을 시사한다. 사실, 이스라엘은 특히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근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됐었다.

=====68:14
전능하신 자(* , 솨다이) - 이것은 '공격하다' 혹은 '파괴시키다'를 뜻하는 동사 '솨다드'(*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하나님이 자연 법칙을 초월하여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실만큼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강조하는 명칭이다(창 17:1;28:3). 반면에 악인들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악한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측면을 강조하기도 한다(욥 34:12;사 13:6;욜 1:15).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때에는 - 여기서 '열왕'(* , 멜라킴)은 문자적으로 '왕들'의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을 적극 방해하던 가나안 족속의 여러 왕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흩으실때에는'(* , 베파레스)의 기본형 '파라스'(* )는 '퍼지다' 혹은 '펼치다'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열왕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것을 가리킨다(겔 17:21). 사실 가나안 왕들은 연합 전선을 펴서 이스라옐 백성을 대적했었다(수 10:1-5).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징벌하심으로, 그들은 모두 패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수 10:10, 11).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 문자적으로는 '살몬에 눈이 날렸도다'이다. 여기에 대한 해석으로는 (1)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에게 대패하여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에 대한 묘사라는 견해(Keil, Cheyne), (2) 죄악된 가나안 족속들에 의해서 더렵혀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원수들의 멸망으로 정결하게 된 영적모습에 대한 묘사라는 견해(Calvin) 등이 있다. 이중에서 (1)의 견해가 보다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런데 (1)의 견해도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중 하나는 본 문구가, 가나안 족속의 도망치는 모습이 마치 바람에 눈이 날려서 흩어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는 해석이다(Cheyne). 또 하나는 가나안 족속이 도망치면서 남겨 놓은 전리품들과 그들의 썩은 해골이 눈같이 산을 덮었음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Keil). 그러나 이 두 해석 중에서, 첫 번째 해석이 바로 앞 문구의 '흩으실'이라는 동사의 뜻과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더 타당성이 있다. 한편, '살몬'은 '짙은 어두움'의 뜻을 지니며, 실제로 그 이름의 의미처럼 검은색을 띤 산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했고(삿 9:48), 눈으로 덮여있는 때가 많다고 한다.

=====68:15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 본 문구는 동의적(同意的) 대구인 다음 문구와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의 산임이여'는 '바산의 산'이 하나님의 임재 장소임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산의 산'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밖에 없다고 할 만큼 특별히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는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36:6). 한편, '바산의 산'은 요단 동편에 있으며 현무암이나 용암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지역 주위에는 가파르고 탑과 같이 생긴 여러 봉우리들이 중간 중간에 우뚝 우뚝 서 있다(Keil). 이와 반대로 요단 서편의 산들은 대개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낮은 산들이다.

=====68:16
너희 높은 산들 - 앞절에 나오는 '바산의 산'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 '시기하여 보느뇨'(* , 테라츠둔)의 기본형인 '라차드'(* )는 '질투하다', '곁눈으로 보다'의 뜻이며 원래 야수가 엎드려서 먹이를 기다리는 것 혹은 사냥꾼이나 적이 숨어서 사냥감을 기다리는 것 등을 가리키는 아랍어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본 단어는, '바산의 산'이 낮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처소인 '시온산'을 집어 삼킬듯이 내려다보는 형상으로 우뚝서 있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이 거하시려하는 산'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한 '시온 산'을 가리키며 특히 여기서는 성도(聖都) 예루살렘(느 11:1)을 뜻한다.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 '바산의 산'이 비록 높아서 외형적으로는 지극히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시온 산을 우습게 내려다봐서는 안 되는 까닭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은총은 자연보다 나으며 교회는 세상보다 더 강함(Keil)이 분명하다. 한편,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건축될 성전에 친히 임재하시는것(왕상 8:27)이지만,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에 함께하시는 것(마 18:20;계 1:12, 13)과 또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에서 구속받은 백성들과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것(계 21:2, 3)을 아울러 암시한다.

=====68:17
16절처럼 본절도 시온 산이 바산의 산에 의해서 업신여김을 받을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 '하나님의 병거'는 하나님을 옹위하는 천군 천사들을 가리키며(왕하 6:17) 이들이 시온 산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옹위를 받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심을 뜻한다. 그리고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말은 수없이 많음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삼상 18:7).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 이것은 (1)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서 펼치게끔 하기위하여 선택된 신정(神政) 왕 다윗이 시온 곧 예루살렘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 것(Calvin), (2) 언약궤가 시온산이라는 높은 곳으로 옮겨짐에 따라(대상 15:25-29) 하나님께서도 그곳의 성소에 임재하게 되신 것(C.B. Moll, Rawlinson)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문맥들에서도 높은 곳으로서의 시온 산을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장소로서 말한다(렘 31:12;겔 17:23;20:40)는 점에서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보다 타당하다. 한편, 우리는 본 문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지금도 성도들과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이해해 볼 수 있다(엡 4:8).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膳物)을...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 일차적으로는, 출애굽, 광야 여정 및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대적들을 정복시켜 포로로 잡고(삿 5:12 참조) 피정복민들로부터 조공을 받으신 사실을(삼하 8:2) 가리킨다(VanGemeren). 그리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고 성도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베푸신 것을 예표한다(엡 4:8). 한편, 본절 하반절과의 문맥 연결을 고려하여, 이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에게서도 경외와 예배의 대상이 되시게끔 하신다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 '여호와'는 인간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임을 암시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호칭이다(창 17:1, 2). 그리고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는, 이방 민족, 곧 '패역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크신 위엄을 목격하고 당신의 백성이 될 자들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되는 것은 큰 축복임이 분명하다. 원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이 없었으며 세상에서 소방도 없던 자들이었다(엡 2: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당신과 원수되었을 때 그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롬 5:6-8).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 하나님이 세상에서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세심하게 돌보아 주심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Anderson).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전혀 환난과 고통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백성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들이 그 어려움들을 능히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의미이다(빌 4:13). 따라서 신자들은, 순경(順境) 중에서 뿐만 아니라 역경 중에서도 결코 슬퍼하거나 낙심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 - '주'(* , 아도나이)에 대해서는 51:15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죽음에 이르는 환난(20절)에서도 건지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여기의 '하나님'(* , 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특별히 강조하는 호칭이다(50:1;욥 32:13;40:9).

=====68:20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 여기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가 결코 피상적이지 않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자되심은 '우리' 곧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능히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도 19절의 '하나님'과 동일하게 '엘'이다.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 '사망에서 피함'은 여기서는 죽음에 이르게 될 만한 극심한 환난(23:4)에서 구출되는 것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육체적으로 죽었으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살림을 받을 것(요 11:43, 44) 혹은 육체적인 죽음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부활되는 것(도전 12:22, 23)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확대시켜서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68:21
히브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진실로' 혹은 '그러므로'로 번역될 수 있는 접속사'아크'(* )가 있다. 그 원수의 머리...정수리 - '원수'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 백성을 해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머리'와 '정수리'는 여기서 동격(同格)이다. 그런데 '정수리'(* , 카드코드 세아르)는 문자적으로 '머리털이 있는 정수리'의 뜻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고대 아라비아 무사(武士)들의 경우처럼, 자신들이 무사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을 머리의 다른 부분보다 더 길게 남겨놓았던 것을 연상시킨다. 아무튼 이같은 모양으로 한 정수리는, 거만한 힘이나 회개할 줄 모르는 자만(自慢)을 상징한다(신 32:42).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 - 이것은 '원수'에 대한 보조 설명이며, 회개를 거부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죄악을 범하는 자를 뜻한다.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 '쳐서 깨치시리로다'(* , 이므하츠)의 기본형인 '마하츠'(* )는 야엘이 시스라에게 가했던 것처럼, 강타하여 재기 불능의 치명상을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삿 5:26). 특히 다른 문맥에서도 이 단어는, 회개치 않고 계속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신 32:39;33:11).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1)이 세상의 악인들을 반드시 멸망시키시며(73:27), (2)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신(神)인 사단과 그 세력들을 영원한 불못에 넣으실 것이다(계 20:10).

=====68:22
본절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21절과 연결시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마치 유대 주석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본절을 하나님의 구원 약속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루살렘 멸망 뒤 배에 실려서 로마로 끌려가던 여자 포로들은, 본 구절을 자신들에 대한 약속의 말씀으로 보고 모두 지중해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Keil). 즉, 그 여자 포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 지중해에서 건져내시리라고 오판했던 것이다. 저희를 바산에서...바다 깊은 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 하나님의 원수들이 아무리 깊이 숨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산'은 산세가 험하고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어 사람들의 은신처가 퇴기에 적절했던 '바산의 산지'를 가리킨다. 그리고 '바다'는, 본 시편 저자 다윗의 활동 지역과 인접해 있었던 사해 바다를 뜻할것이다. 특히 기자는 '바다 깊은 데'라고 표현함으로써. 원수들의 도주 자체가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68:23
본절 초두에는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단어 곧 '그리하여'로 번역될 수 있는 '르마안'(* )이 있어서(NIV) 본절이 22절과 같은 심판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묘사임을 말해준다.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 문자적으로는 '너희들이 너희들의 발을 피 안에 세게 찔러넣게 할 것이다'의 뜻이다(you may piunge your feet in the blood of your foce, NIV). 이와 같은 표현은 (1)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며(사 63:1-3), 또한 (2) 하나님의 공의를 목격한 자가 그 공의가 실현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모습의 상징적 묘사이다(58:10).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악인을 멸절시키기 위한 대리적 심판자로 지정하사 원수들을 찌르게 하심을 나타낸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이 관영된 가나안 족속 등을 징벌키 위한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뜻을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바 있었다(창 15:16;수 10:40-43). 한편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지나치리만큼 잔인하신 분으로 보이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기의 원수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긍휼을 베푸셔서 인내하실 수 없을 만큼 죄악으로 관영되어 있는 자들이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도 대적들은 철저히 응징하셔야만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잔인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대적들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는 것일 뿐이다.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 원수들의 육신이 개의 먹이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죽어서조차 무덤에 안장되지 못하고 개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악인에 대한 처절한 심판을 강조하는 말이다(왕하 9:35;렘 15:3).


=====68:24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신 후 개선의 행진을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운행하시는 모습이 보일 까닭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악인들에 대한 징치(徵治)를 마친후 크게 기뻐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모든 이가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는 의인과 악인 모두를 포함한다. 의인들은 '하나님의 행차'를 인하여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며, 악인들은 심히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출 15:14-16).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 여기서 '성소에'(* , 바코데쉬)는 '거룩하심 가운데서'로 번역함이 더 나을 것 같다(Albright). 그 까닭은 (1) 하나님의 개선 행차가 이교도들에게까지 목격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 행차가 예루살렘의 '성소'에서 있었다고 국한시키기는 어려우며, (2) 여기의 '바코데쉬'라는 단어가 하나님이 이방 원수들을 심판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는 문맥에서 '거룩함에'로 번역되고 있기(77:13;출 15:11)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룩하심 가운데서'라는 말은 '악인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신 공의로운 성품의 소유자이심을 밝히 드러내시면서'라는 정도의 뜻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왕'은, 하나님 앞에서의 다윗의 겸손을 보여준다. 즉, 다윗은 비록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 중 하나일 뿐임을 암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68:25
본절은 승리와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의식(儀式)을 묘사하고 있다.
소고 치는 동녀(童女) - '소고치는'일은 승리의 기쁨이 있을 때 여자들에 의해서 관례적으로 행해졌었다. '동녀'(* , 알마)는 미혼, 기혼을 막론한 젊은 여성 모두를 가리킨다(창 24:43;잠 30:19).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전쟁에서의 승리 후 미리암과 같은 기혼 여성들도 소고치는 일에 가담했었다(출 15:20). 문자 그대로의 '동녀'를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는 '베툴라'(* )이다.
가객(* , 솨림) - 노래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악사 - 수금과 비파, 제금 그리고 나팔 등을 연주하는 사람을 뜻한다(대상 13:8).

 

=====68:26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 - '근원'(* , 마코르)은 '자손', '근원', '샘'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등과 같은 신앙의 조상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조상 아브라함처럼 언약에의 참여자임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대회 중에서...주를 송축할지어다 - 여기서 '대회'(* , 카할)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종교적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주'(* , 예호와)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점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민족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또한 세상에서도 각양(各樣)의 은혜를 받으며 살았다. 그런 점에서 신.구약 시대를 막론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 '송축하지' 않을 수 없다(엡 1:3, 6).

 

=====68:27
 저희 주관자(主管者) 작은 베냐민 - '저희 주관자'(* , 로뎀)의 기본형인 '라다'(* )는 '통치하다' 혹은 '지배하다'의 뜻이다. 베냐민 지파가 이렇게 지칭된 것은 모든 지파중에서 가장 인구가 적었지만(삼상 9:21) (1)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하였으며(삼상 9:1-17), (2) 열 두 지파의 기업 분배 당시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던 예루살렘도 그 땅에 있었다(수 18:28)는 점 등 때문일 것이다(Keil). 그러나 저자 다윗이 자신의 지파도 아니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이 속했던 지파를 첫머리에 놓은것은, 다윗의 겸허하고도 관대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 사실, 그 당시 이미 왕에 올라 있었던 다윗은 대단히 큰 세력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또한 자신이 속한 지파를 본절의 초두에 놓을 수도 있었다.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 - '그 무리'(* , 리그마탐)의 어근인 '라감'(* )은 '죽이기 위해 돌을 던지다' 혹은 '돌 무더기를 쌓다'의 뜻을 지니며 본 단어와 동족어인 '마르게마'(* )는 '돌 무더기'를 뜻한다(잠 26:8). 따라서 본 단어는 '돌 무더기의 돌처럼 많은 수'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 문구는, '많은 수의 유다 방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스불론...납달리 - 유다와 베냐민 이외에 이처럼 유독 두 지파만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두 지파가 애국적인 용감성으로 인하여 드보라에 의해서 크게 찬송을 받았던 때문일 것이다(Keil, 삿 4:6, 10;5:18). 물론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남쪽 끝에 위치한 지파인 반면,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는 북쪽끝에 위치한 지파였기 때문에 유독 다른 지파들을 제치고 여기서 언급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VanGemeren).

 

=====68:28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상을 지배할 능력과 그들에 대한 승리의 보장을 주셨음을 말한다(Keil).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방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체험했었다. 하나님이여...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는 과정을 통해 당신의 크신 권능과 위엄을 드러내신 바 있다. 이러한 과거 역사에 근거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약속과(22, 23절) 구속자로서의 성품에 따라(5, 6;19, 20절),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계속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68:29
 이방의 왕들이 하나님께 경외심을 표하게 된다는 예언이다(76:11;사 18:7;60:3-7 ;66:20;학 2:7;슥 2:11-13;6:15;8:21, 22). 이러한 예언은 솔로몬 왕 시절에 스바 여왕에 의하여서도 성취된 바 있다(대하 9:1-12).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나남께로 나아올것에 대한 예언이다.
 주의 전을 위하여(* , 메헤칼레카) - 카일(Keil)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주의 전으로부터'라고 보고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어 결국 온 세계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위하여'로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 '몌'(* )를 '...때문에'(on behalf of,because of, KJV, RSV, NIV)로 보고, 이방 왕들이 예루살렘의 성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으로 믿고 경배를 드리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다.


 =====68:30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 '갈밭의 들짐승'은원래 나일 강변의 갈대 숲에서 서식하는 하마나 악어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애굽 왕을 상징한다(74:13;사 36:6, 9;겔 29:3, Briggs, Dahood, Kraus). 그리고 '수소의 무리'는 당시 최강국이었던 애굽보다는 못한 나라들의 여러왕들을 가리킨다. 또한 '송아지'는 애굽 왕을 포함한 열강의 지배 아래 있던 이방 민족들을 뜻한다.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 여기에 대해서는 (1) 이방 왕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굴복하면서 그 표시로서 '은 조각'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뜻한다는 견해(KJV, NIV, Alexander, Keil, Rawlinson), (2) '은 조각' 곧 전리품이나 공물을 탐하는 열방들을 멸하도록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보는 견해(RSV), (3) 본 분사 구문이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수식한다고 보며, 그들이 왕궁의 마룻 바닥에깔린 '은 조각'을 발로 밟음으로써 자신들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는 견해(NIV, Calvin, C.B. Moll) 등이 있다. 이중 어느 하나를 확정적으로 취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르지만, 곧바로 뒤따르는 문구와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1)의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다.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 여기서 '흩으셨도다'(* , 비자르)는 '바자르'(* )의 완료 시제이다. 그러나 다음 절이 미래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원의 문장이라는 점에서 개역 성경과는 달리 '흩으소서'로 번역함이 더 낫다(NIV, Weiser). 이와 같은 기원(祈願)은 1절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전쟁을 즐기는'이라는 말은, 다윗의 원수들이 명분도 없이 무고하게 다윗에 대항하여 싸움과 소동을 일으켰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Calvin). 악인들은 까닭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치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러한 호전성(好戰性)으로 인하여 멸망을 받게 되는것이다.

 

=====68:31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 '방백들'(* , 하쉬마님)은 '살지다' 혹은 '부유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하슘'(*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두드러진 위치에 있는 지도급 인사들을 가리킨다(Keil), '애굽에서 나오고'는 애굽 왕이 이스라엘에게 항복하기 위해 방백들을 사신(使臣)으로 보내는 것을 뜻한다(사 43:3;45:14).

 

=====68:32
 31절의 결과이다. 다윗 자신의 예언적 소원대로 열방이 하나님께 굴복하면, 그들은그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송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방 민족들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로 인하여 기뻐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일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 만방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본격적으로 성취되어 가고 있으며(고전 15:24, 25) 하나님께서 친정(親政)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계 21:3).

 

=====68:33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 - '옛 적'(* , 케뎀)은 하나님의 초시간적(招時間的) 위대성을 암시하며, '하늘들의 하늘'은 창조된 태초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하늘들의 하늘'(* , 쉐메 쉐메)은 다만 '하늘의 하늘'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비록 여기의 '쉐메'가 복수형이기는 하지만 이 복수형은 그 수(數)의 많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하늘의 광대(廣大)함을 표현하는 장엄 복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늘의 광대 무변함과 장중함, 그리고 지고(至高)함을 나타내는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수사학적 표현이다(신 10:14;왕상 8:27). 이와 비슷한 것으로서, '종들의 종', '왕 중의 왕', '거룩함중의 거룩함', '노래 중의 노래' 등이 있다.
 주계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 히브리 원문에는 '보라!'로 번역될 수 있는 '헨'(* )이라는 단어가 있다. 본문의 '소리'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증거하는 피조 세계의 웅장한 소리, 예컨대 뇌성 등을 가리키는것 같다(29:3, 4, Anderson).

 

=====68:34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 이것은, 33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마땅히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라는 뜻이다(29:1).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뜻이다(Keil). 그리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는, 하나님의 통치가 우주적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내재적(內在的) 속성뿐만 아니라 초월적 속성을 잘 드러내 준다.

 

 =====68:35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 문자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성소들에서 두렵습니다'의 뜻이다. 본절은 하나님이 이렇듯 엄위하신 분이시면서(47:2 ;65:5;출 15:11;신 10:17:계 15:3, 4). 또한 당신의 백성 가운데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VanGemeren). 여기서 '성소'를 복수로 말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는, (1) 여기의 '성소'가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하늘과 땅(34절)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 (2) '성소'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Calvin), 혹은 (3) '성소'가 거룩의 요소나 특징들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Keil)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장엄 복수로 이해하여 다만 성소의 거룩성을 보다 강조하며, 그리하여 그곳이 하나님의 위엄이 충만한 곳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복수형으로 표현되었다고 봄이 무난하겠다(Anderson).

 

 

 

 


Articles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