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6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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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하나님이시라 - '엘로힘적' 시편들(Elohistic Psalter,42-83편)에서 '하나님이여'라는 강조적 호명은 하나님의 언약적신실성을 나타내는 '야웨'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뜻을 시사한다(Vangemeren). 그리고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문자적으로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라'이다. '하나님'(* , 엘)은 하나님의전능하심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이처럼 다윗은 그전능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함으로써, 압살롬에 의해서 쫓겨가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내어 맡기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 '간절히...찾되'(* , 솨하르)는 '날이 새다', '일찍 어나다', '부지런하게 구하다' 라는 뜻으로서 이 어근에서 '새벽' 혹은 '미명'(未明)을 뜻하는 명사 '솨하르'(* )가 유래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 문구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던 일을 뜻하는 듯하다(57:8).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당 - 이는 구체적으로 다윗이 피신햇던 유대 광야를 가리키기도 하지만(삼하 15:23; 17:29), 은유적 의미에서 메마른 사막 지대를 방황하는자가 물을 갈급해 하듯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구하는 시인의 내면 상태를 나타낸다고도볼 수 있다(anderson). 특히 '곤핍한'(* , 아예프)은 피로와 허기에 지친 상태를 가리킨다(창 25:29; 욥 22:7).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여기서 '영혼'(* , 네페쉬)과 '육체'(* , 바사르)는 별개의 뜻을 나타내기 보다는 둘 다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 그리고 '갈망하며'(* , 차마)는 '목마르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며, '앙모하나이다'(* , 카마)는 구약 성경 중 여기서만 유일하게 나오는 동사로서 마지막 힘까지 쇠잔시켜버리는 열렬한 갈망을 뜻하며 앞의 '갈망하며'와 거의 동일한 뜻이다. '목마름'은 종종 인간의 가장 절박한 결핍 상태를 비유하는표현으로 쓰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정도의 내면 상태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42:2; 143:6).

=====63:2
본절과 3절에서 다윗은 그토록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거룩함'(성소에서), '권능'(* , 오즈), '영광'(* , 카보드), 그리고 '인자'(*, 헤세드) 가운데 계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보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사6:1-3). 특히 본절에서 다윗은 성소에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과거사(過去事)를 회상함으로써(출 29:43; 레 9:6; 민 16:19), 다시 그러한 복된 경험을 갖고 싶음을 강력히암시한다(삼하 15:25).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기 전, 곧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의 경험이다. 성소 내에서도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상징하는장소였다(삼상 4:21). 한편 '바라보았나이다'(* , 하자)는 주로 영적 시각(視覺)으로의 관찰 혹은 응시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개시나 환상을 보는 행위를가리키는 데 특별히 많이 사용되었다(욥 15:17; 19:26; 애 2:14).


=====63:3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 '인자'(* , 헤세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통하여(2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각양의 은혜 혹은 변함없는 사랑을 뜻한다(36:7,8). 그리고 '생명'(* , 하임)은 '목숨' 그 자체를 포함하여 인간이 세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모든것을 아울러 가리킨다(Keil, weiser, Calvin). 물론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들임에 분명하다(골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은 까닭은, '주의 인자'가 있을 때 사람은 참된 행복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 4:14).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벗어난 생명은 그 자체가 죽음이나 다름없음을 시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63:4
이러므로 - 칼빈(Calvin)은 이를 '이와같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여건 속에서도'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압살롬에 의해서 쫓기는 등의 다윗의 곤고한 생활은 결코 계속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다음 문구에 속한 '내 평생'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말은, 3절 전반절과 직접 연결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사역, 그분의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창 25:19-26 강해, '이름 짓기'; 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보다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보호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말한다. 한편, '내 손을 들리이다'는 간절한 기도 자세를 보여 준다(28:2; 딤전 2: 8). 이러한 자세는 고양된 심령을 상징한다기 보다는, 높이 든 빈 손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감 섞인 신뢰심을 나타내는것 같다(Anderson).

=====63: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 본시 초두의 극심한 갈증과(1절) 대조되는 본문은, 극심한 환난을 믿음으로 극복해가는 중에 마치 사막에 샘이 솟는 듯한 역설적 체험을 하게 된 시인의 영적 승리의 면모를 보여 준다(Kidner).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은 '영양가 높고 살찐 동물을 잡아 잔치를 벌이는 일'을 상기시킨다(Keil, 신 32:2; 렘 31:13). '골수'(* , 혤레브)와 '기름진 것'(* , 데쉔)은 모두 짐승의 살찐 부분 혹은 제일 좋은 부분을 가리킨다(73:7; 민 18:29,30; 렘 31:14).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 잠을 자야 하는 밤의 대부분을 주님께 대한묵상의 시간으로 삼았음을 가리킨다(Keil). 사실, 밤중 특히 '침상'위에 있을 때에는,낮 동안의 모든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경건의 시간이되기에 적절하다. 여기의 '기억하며'(* , 자카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베푸셨던 은총 및 언약을 되새겨보는 일을 가리킨다(창 9:15; 대하 6:42). 신자들은 이같이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된다(욘 2:7).
밤중에 주를 묵상할 - 앞의 문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데 '밤중에'(* , 베아쉬무로트)는 '지키다' 혹은 '경계하다'를 뜻하는 동사 '사마르'(*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통념적으로 '밤중'은 종종 악령들이 많이 활동하는 위험한 때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는 조용한 밤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와 묵상을 위해 더 없이 좋은 때였다(119:62, Anderson).

=====63:7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 '주의 날개 그늘'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보호'를 뜻한다(17:8; 36:7;61:4; 91:4). 그리고 '즐거이 부르리이다'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섭리를 의지하여 압살롬의 반란이 필경 평정될 것이라는 확신을 반영하는 말이다(Calvin).

=====63: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날개 그늘 아래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7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들 역시 계속적인 보호와 도움을 받기위해서는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기대하신다. 시인이 적극적으로 응답한 것을 나타낸다(신4:4; 10:20; 11:22; 13:4; 30:20). 한편 '따르니'(* , 다바크)는 '불다' 혹은 '연합하다'의 뜻이며(창 2:24; 욥 19:20; 애 4:4), 구체적으로는 본 시편에 계속 나타나 있는 다윗의 모든 경건과 신앙적 행위를 가리킨다.
주의 오튼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 '주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한다(17:7; 출 15:6; 사 41:10). 그리고 '붙드시거니와'(* , 타마크)는 원래 '받치다' 혹은 '쥐고 있다'의 뜻으로서, '오른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문맥에서 대개 '돕다'의 의미로 사용된다(41:12; 사 41:10).

=====63:9
8절이 의인의 축복된 결국을 말하고 있다면, 본절과 다음 절은 악인들의 비참한최후를 보여 준다.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 '땅 깊은 곳'은 죽은 자들이 가게 되는 음부 세계를 가리킨다(16:10; 86:13). 따라서 이 구절은 악인들이 그들의 악행에 대한 보응을 받아육신적으로도 멸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다윗의 예언적 확신은, 압살롬의죽음과 함께 성취되었다(삼하 8}9-[5). 한편 혹자는 다윗의 이러한 표현을 고라 일당의 최후와 연관시키기도 한다(Alexander).

=====63:10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칼의 손에 넘겨줄 것이다'로번역되며, 전투 중에 죽게 됨을 뜻한다(렘 18:21; 겔 35:5).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 전투중 죽음을 당한 후 들판에 버려질 것을 뜻한다.이때에 썩은 고기를 주식(主食)으로 하는 동물인 '시랑'은 그 송장을 모두 먹어치울것이다. 본문은 시체가 고이 안장되지 못하고 훼손되는 것을 큰 수치와 불행으로 여겼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사 18:6; 렘 7:33, Anderson).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의 경우에도, 시체가 아무렇게나 방치되는 것을 대단히 불운하고 끔찍한 심판으로 여겻던기록의 흔적이 있다(A.Heidel, the gilgamesh epic and Old testament Parallels).

=====63:11
히브리 원문상 본절 초두에 있는 접속사 '웨'(* )를 '그러나'로 번역하면, 문맥을 매끄럽게 할 수 있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 '왕'은 다윗 자신을 지칭한다(18:50; 72:1). 이처럼 갑자기 다윗이 자신을 '왕'이라고 한 까닭은, 자신이 백성들의 대표임을 시사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럼으로써 다윗은, 자신의 신앙행위로 인한 축복이 신정(神政) 왕국의 모든 벡성들에게 까지 내려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 여기서 '주'는 원문상으로 다만3인칭 단수대명사일 뿐이다. 혹자는 이를 왕 곧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고, '왕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는 자...'의 뜻으로 본문을 이해하고자 한다(Anderson).물론 하나님의 이름으로 뿐 아니라 왕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던 기록이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삼상17:55; 25:26; 삼하 11:11; 15:21). 그러나 이 대명사가 지시하는 말은 '왕'보다 '하나님'이 더가깝고, 또한 본문이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는 문맥 중에 있다는 점에서'주'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봄이 나을 것 같다Alexander). '주로 맹세하는 것'은하나님을 자신의 신뢰 대상으로 삼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가리킨다(신 6:13; 사 65:16,Calvin).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 원문에는 본 문구 앞에 접속사 '키'(* )가 있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왜냐하면'의 뜻보다는 '반면에'로 번역함이 문맥상더 자연스럽다(NIV). 여기서 '거짓말하는 자'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불의한 재판을 일삼았던 압살롬과 그 부하들을 가리킨다(삼하 15:1-6). 그들은 한때 '주로맹세한'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맹세는, 하나님께 대한 거역을 통해서 거짓임이 분명해졌다. 바로 이 같은 점에서, 그리고 불의한 재판을 했다는 점에서, 그들이'거짓말하는 자'임은 분명해졌다.

 

 

 

  본 시편은, 다윗이 압살롬의 모반(謀反)으로 인하여 유다 광야로 쫓겨났을  때에(삼
하15:16-30;16:1-14) 하나님의 보호를 바라면서 지은 시로서, 본문을 살펴보면 비탄(!
절), 감사(3-7절), 확신(8-10절) 등 복합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시
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보호 및 임재의 간구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아름다운  시어
(詩語)로 표현되어 있어서 찬송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분류상 '간구와 신앙'이라
는 넓은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무난하리라 본다.
  이 시편은 전체 분위기상 42:1, 2 과 유사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나누기를  갈
망하는 공통적인 관심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61, 62편과 연속되는    맥락으로  이해된
다. 61, 62편에서 거듭 표혀된 바, 역경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의  역
설적 신앙은 본시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본 시편은 내용상 (1)  광
야에서의 하나님께 대한 갈망(1, 2절) (2)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그 이유(3-7절)  (3)
의인의 안전과 악인의 비참한 최후(8-11절)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다윗이 왕궁을 떠나서 피난길에 오른 것은, 반도(反徒)의 세력이 크다는 사실과  백
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쏠렸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직후였다(삼하 15:12-16). 다윗
은 우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한 기드론 시내를  건너
야만 했다. 그때 허다한 백성들이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불쌍히 여기며  대성  통곡을
하였다. 더 나아가 감람 산을 넘을 때에는, 다윗도 백성도 모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
로 울며 갔다(삼하 15:30). 다윗의 일행이 바후림에 이른 무렵에는, 사울 가문에 속한
시므이라는 자가 나타나서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심지어는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삼하 16:5-8, 13). 그러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애정
을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여태까지 자신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이 능히 그를
곤란에서 이끌어 내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며, 악인의 멸망(9, 10절)과 자신의 최종
적인 승리(11절)를 확신한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본 시편을 통하여 (1)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순경(順境)과 함께 역경(逆境)도 만날 수 있으며(욥 2:10)  (2)
역경을 만났다고 해서 반드시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이라도 일시에  역전
시키시는 하나님의 이적적(異蹟的) 권능을 믿고 찬양을 멈추지 말아야  함(행  16:25)
을 깨닫게 된다. 이제 본 시편에 담긴 내용을 몇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갈망이 얼마나 진실하며 간절한지를 표현한다(1,
2절). 그 당시 다윗은 물이 없는 광야에 있었으므로, 육신의 갈증을 경험하고 있던 터
였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물을 마시지 못하여 당하는 고통스런 체
험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한 모금의 물을 찾아  온
광야를 헤맸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물에 대한 갈망보다 더 간절한 것이 또 어디  있을
까? 사막에서 물을 먹지 못하여 지독한 갈증과 함께 죽어가는 여행자들은 자신들의 신
을 저주하면서 숨을 거둔다고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갈망, 곧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바로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심정과 같다고 말하고 잇다.
다윗은 평생을 성소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왔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
의 참맛을 익히 알고 있었다. 광야에서 목이 심히 탈 때 물을 마시며  느끼는  시원함
그리고 상쾌함 그 이상의 것을,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맛보았던 다윗이었다. 그러나 이
제 다윗은 하나님과의 마난바의 장소인 성소를 등 뒤로 하고 도주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위기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은 열
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그쳐지게 된 일로 인하여 심히 괴로워 하고
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을 인하여서만 행복할 수 있고, 또한 그분 안에서만 모든 문
제의 해결책이 있다고 믿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1) 신약 성도들은 구약 시대에 비해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디서나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리며(롬 12:1)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진정코 감사해야 하며 (2)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가장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며(히 10:25) (3) 하나님과의 교제가 모든 문제의 해
결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임(요삼 1:2)을 깨닫게 된다.
  두 번째로, 본시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두드러진다(3-7절). 앞에서는    성소에서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게 된 일로 인하여 안타까워했던 시인이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
한 찬양의 입술을 열겠노라고 다짐한다.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곤고한 형편을  탄식하
기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한 것은 하나니의 은혜를 사모한 까닭이었다. 비록  성소
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는 없게 되었지만, 황량한 광야에서나마 하나님께 찬양드림
으로써 환경을 초월한 신앙을 견지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신세 타령에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고 보다 건설적인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고 잇다. 특히. 오직 하
나님만을 의뢰함으로써 얻는 축복과 만족을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5절)에 비유한
것은 히브리 시의 특징 중 하나인 구상성(具象性)을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이러한
특성은 1절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과 교제할 시간을 모든 만물이
고요히 잠든 때로 잡았으며 뿐만 아니라 은밀한 곳에서 주님과 교제하기로 결심하엿다
(6절). 이같이 함으로써, 다윗은 하나님과 보다 깊은 교제를 나누고자  했다.  이러한
교제의 시간에 아마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깊이 묵상하엿을 것
이다. 사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은혜를 받은 경험을 갖고 잇었다. 그가 그
때까지 목숨을 보전한 것 자체가 자신의 힘 때문이 아니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위기를 당했던 때마다 그를 보호하며 구출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생생한 체험들은 하나님께서 금번의 위기 상황에서도 또다시 구출하여 주시리라는  것
을 다윗으로 하여금 믿게 하기에 족했다.그래서 그는 여전히 원수에 의해서 쫓기고 잇
었음에도, 자신이 결국 압살롬의 세력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을  예견하였고,    그러면서
그 승리의 날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것이라고 말한다(7절).
  한편, 본문에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찬양과 아울러 그처럼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
유가 고백조로 언급된다. 그 첫째 이유는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기  때문이었다(3
절). 이는 곧 자신의 존재 기반과 목적이 여호와 신앙에 잇음을 고백한 것이며,  하나
님이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임을 고백한 것이다. 아울러 이것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로라"(롬 14:8)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 두 번째 이유는 주께
서 시인의 도움이 되셨기 때문이다(7절). 첫 번째 이유가 참된 신자라면 마땅히  고백
해야 할 원칙론이라고 한다면, 이 두 번째 이유는 다윗의 실제의 삶을 통해 누차 경험
한 구체적이고도 체험적인 언급이라 할 만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 내용으로부터 (1)
환나을 만났다고 하여 좌절하는 것은 곧 불신앙의 소치이며(마 8:26) (2) 하나님께 견
고히 붙어있는 자는 진정한 행복자요, 하나님과 떨어져있는 자는 자유한 듯하나  실제
에 있어서는 불쌍한 자요, 세상의 종(벧후 2:!9)임을 깨닫게 된다.
  세 번째로, 시인은 의인과 악인이 각기 대조적인 결과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확신하
는 어조로 언급한다(8-11절). 즉, 의인은 주님의 지속적인 보호를 받아 안전하겠지만,
악인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언급은,  다
윗이 본 시편을 지을 때의 상황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그 다시 압살롬의  세력은
지극히 강성하였으나, 반대로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해야만 햇던 절박한 상황이
었다. 이와같은 피상적 관찰을 통해서만 본다면, 압살롬은 더욱 강해지고, 다윗은  완
전히 멸망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승리와 압살롬의  실패
와 파멸을 담대히 예언하고 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의인은  반드
시 승리하며 악인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다
윗은 의인에 대해서는 상급을, 악인에 대해서는 징벌을 내리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
의 공의적 속성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에게 있어 성패의 관건은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신앙의 유무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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