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
본 시편은 다윗이 쓴 것으로 에돔과의 전쟁에서 초반에 패배할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승리를 호소하는 사실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국 다윗은 이 전쟁에서 대승읕 거둔다(삼하
8:13;대상 18:12).
하나님이여 - 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문맥에서 흔히 나타나는 부르짖음이다(51:1;54:1;55:1;56:1;57:1;59:1).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 다윗이 에돔에 원정을 갔으나 도리어 많은 군사를 잃는 등 패배한 사실을 가리킨다(왕상 11:15, 16). 여기의 '흩으셨고'(* , 파라츠)는 '깨뜨리다' 혹은 '부수다'의 뜻으로서, 구조물(構造物)의
경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시킬 만큼 파괴하는 것을(대하 32:5;잠 25:28), 대열(隊列)의 경우는 적의 일격을받아 갈팡질팡 혼잡케 된 상태(삼하 5:20)를 가리킨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적의 공격으로 다윗의 군대가 사방으로 도
망쳤던 사실을 뜻함이 분명하다.
분노하셨사오나 - 이것은 다윗이 패전(敗戰)을 죄의 결과로 보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죄가 하나님을 분노케 하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패전케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의 손
길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재난을 의미한다(44:9, 23;74:1;77:7;89:38).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 에돔 군대에 의해서 쫓기는 신세에서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상황으로의 반전(反轉)에 대한 간구이다.
=====60:2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 '땅을 진동시키사'는, 하나님께서 에돔 백성을 통해 다윗과 그 군대를 패배시키신 사실(Calvin)과 더불어 그로 인한 극도의 두려움을 가리킨다(Rawlinson). 아무튼 이 문구를
여자적(如子的)으로 보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여기서 '진동시키사'(* , 라아쉬)는 동사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하는데 주로 사용된다는 점(삿 5:4;렘 10:10) 때문이다. 한편 '갈라지게 하였사오니'는 다윗의 군
대가 에돔의 반격에 의하여 지리 멸렬(支離滅裂), 그대오(隊伍)를 이탈한 채 사방으로 흩어진데 대한 은유적 묘사이다(1절).
그 틔을 기우소서 - 여기의 '기우소서'(* , 라파)는 '풀다','약하게 하다' 그리고 '거두다'의 뜻이며 본질적으로 1절의 '회븍시키소서'와 동일한 의미라 하겠다.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 '요동함이니이다'(* , 모트)는 신뢰하기 힘든 불안정성을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는 동사이다(대상 16:30;욥 41:23;사 40:20). 이는 다윗이 어느곳으로 도망을 하더라도 안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를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간곡히 알리고 있는 것이다.
=====60:3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마시우셨나이야 - '포도주'는 즐거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전 9:7), 문맥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75:8;사 51:17;렘 25:15-18;51:7).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진노(1절)
에 의한 이스라엘의 참상을 보여준다. 다윗과 그의 군대는 에돔군의 공격을 당하여 마치 술취한듯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던 것이다.
=====60:4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군대를 구원하셔야 할(5절) 이유를 말하고 있다.
기(旗)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 많은 학자들은 여기의 '진리'(* , 코쉐트)를 히브리어 '케쉐트'(* )의 아람어 형으로 보고 '활'을 뜻한다고 주장한다(NIV, RSV, A. A. Anderson, Ewald, Hitzig, Hupfeld,
Vangemeren, Weiser). 그러면서 개역 성경에서 '위하여'로 번역된 단어 '미페네'(* )를 '...에 대하여' 혹은 '...로부터'로 번역한다. 이처럼 '코쉐트'를 '활',즉 '에돔 군대의 활'로 주장하는 까닭은, 본절의 '기'가 에돔 군대의 공격으
로부터 퇴각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표지(標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가 퇴각을 위한 표지처럼 언급된 증거도 있다(렘 4:6). 그러나 승리를 보장해 주는 혹은 약속해 주는 '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출 17:15). 여기의 '
기'는 바로 후자와 같은 것으로서, 적에 의해서 일시 패배한 이스라엘 군대를 재차 소집하는 표지 역할을 할 만한 것이었다고 본다(a banner to rally to, LB). 더구나 여기의 '진리'는 잠 22:21에서 '진리'로 번역된 '코쉐트'와 동
족의 단어이다. 한편 본절의 '진리'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 곧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일찍이 약속하셨던 승리의 보장을 뜻하는 것 같다(박윤선). 따라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다윗에게 가시적인 '기'를 주셨다고 보
기 보다는 승리의 보장 혹은 약속을 주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은 바로 이 같은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에돔으로부터 구출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기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60:5
주의 사랑하시는 자 - 3절의 '주의 백성' 및 4절의 '주를 경외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다윗과 그 군대를 가리킨다.
오른손(* , 예미네카) - 문자적으로는 '주의 오른손'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한다(사 41:10).
=====60:6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 '그 거룩하심으로'(* , 베카드쇼)는 '그분의 거룩하심 가운데서'의 뜻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담보로 하여 다윗에게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였음을 가리킨다(89:35).
내가 뛰놀리라 - 여기의 '내가'는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 '뛰놀리라'(* , 엘로자)는 '알라즈'(* )의 미완료형으로서 미래 시제이다. 이 단어는 승리에 따른 기쁨의 행동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 동사이다(94:3;삼하 1:20;사
23:12).
내가 세겜을 나누며 - '나누며'(* , 할라크)는 기업의 분배와 관련하여 사용된 단어이다(수 14:5;22:8). 따라서 본 문구는 다윗이 '세겜' 지역을 차지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세겜'은 '등성이' 혹은 '비탈'의 뜻이며, 예루살
렘 북쪽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요단 골짜기의 서쪽 정상(頂上)이다. 요단강으로부터는 약 25Km 떨어져 있었다(수 13:27).
숙곳 골짜기를 척량(尺量)하리라 - '척량하리라'(* , 마다드)는, 본문이 앞 문구의 대구(對句)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앞의 '나누며'와 동일한 뜻임이 분명하다. '숙곳'은 '오두막'이란 뜻이며, 요단 강 동쪽 약 5.5Km 지점의 '
골짜기' 지역에 위치했다.
=====60:7
길르앗 - 미솔 평야 북쯔 산기슭에 위치했다. 서쪽으로는 요단 강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야르묵 강 근처까지 이르며, 동쪽으로는 얍복 강 남북의 두 지류와 남쪽으로는 아르논강과 각각 접해 있었다. 이 지역에 속한 주
요성읍으로는 길르앗 야베스와 마하나임, 그리고 미스바 및 길르앗 라못 등이 있었다. '숙곳'도 바로 이 지역의 한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풀이 많고 숲이 울창한 산악 지대로서(삼하 18:9), 많은 유실수와 좋은 목초(牧
草)로고 유명하다.
므낫세 -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과 갈릴리 호수의 남서쪽의 양쪽 땅 혹은 거기에 사는 지파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요단 동쪽 지역만을 가리킨다.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 '에브라임'족속은 대단히 많은 인구를 가졌기 때문에 다윗왕국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본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유다는 나의 홀이며 - 이것은 '유다' 지파가 다윗의 통치를 가능케 한 족속이라는 뜻이다. 사실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다 지파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창 49:8-10;신 33:7;삼상 16:1), 또한 그가 이스
라엘 왕에 오르는 데는 유다 지파의 역할이 매우 컸었다(삼하 2:1-4).
=====60:8
7절에서 팔레스틴 땅이 자신에 의해서 완전히 평정될 것에 대해 예언적으로 확신한다윗은, 이제 본절에서는 팔레스틴 주변 땅도 그같이 정복될 것에 대하여 말한다.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 '목욕통'은 발을 씻는 데 사용되는 그릇이다(Calvin). 그런데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하는 것이었으므로(창 18:4;요 13:4, 5), 여기의 '목용통'은 종의 지위에 대한 상징임이 분명하다(박윤선). 따라서 본
문구는 모압이 다윗에 의해서 정복되어(민 24:17;삼하 8:2), 종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을 말한다.
에돔에는 내신을 던지리라 - '에돔' 족속이 다윗에 의해 정벌되어(민 24:18), 다윗의 신발을 닦는 것과 같은 위치에 처해지게 되리라는 예언이다(Rawlinson). 그런데 (1) 일반적으로 신발은 부정(不淨)하게 간주되었고(출 3:5;수
5:15), (2) 고대 중근동 사람들은 신발을 던지는 행위를 상대에 대한 지배 의지의 표시로 간주했었으며(Keil), (3) 신발과 관계되는 일은 으레 천한 계층의 담당이었다(마 3:11;막 1:7)는 점 등에서 볼때, 본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에돔'도 '모압'처럼 이스라엘의 종이 되리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불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 블레셋이 다윗의 공격을 받아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르짖으며(삼상 5:12;사 15:4) 탄식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Keil, Ewald). 실제로 다윗은 즉위 직후 블레셋을 패퇴시켰고(삼
하 5:17-25). 나중에는 그들을 완전 항복시켰다(삼하 8:1).
=====60:9
다윗은 자신의 에돔에 대한 승리를 말씀에 근거해서 확신하고 있었지만(6-8절), 그러한 예언적 확신을 성취할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믿었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 이것은,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한 탄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11절) 자신을 결국 도우실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이다(Calvin). 한편, '견고한 성'(* , 이르 마초르)
중 '견고한'은'포위하다' 혹은 '공격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추르'(* )에서 나온 명사로서 '요새'를 가리킨다. 그런데 '견고한 성'은 구체적으로 바위를 뜻하는 '겔라' 곧 오늘날의 '페트라'이다. 이 '셀라'라는 도성의 이름의 뜻이 시사하듯, 이 도성은 쉽사리 공략되지 않을 만큼의 지리적 호조건(렘 49:16, 17)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도성도 다윗 휘하의 요압(왕상 11:14-16)과 아마샤 왕(왕하 14:7)에 의해서 정복되었었다. 특히 그 도성은, 아마샤에 의해서 '셀라'라는 이름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정복된'을 뜻하는 '욕드엘'로 바뀌는 수모를 당하였다.
=====60:10
본절은 그 당시 다윗이 처해 있던 상황(1절)에 대한 진술이다. 다윗은 자신의 비참상을 하나님께 알림으로써, 하나님의 도움이 신속히 나타나야 함을 강력히 호소한다.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는 것(삼상 14:6;삼하 5:24)을 가리킨다.
=====60:11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 문자적으로는 '대적에 대항할 도움을 주옵소서'(Give us aid against the enemy, NIV)이다.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 다윗이 전쟁의 승패가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삼상 17:47). 물론, 실제에 있어서 에돔의 공격에 의해 위기에 처했던 다윗을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에돔의 '견고한 성'을 격파한 것은 요압이었다(왕상 11:15, 16). 그러나 요압의 이러한 활동상은, 요압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진 그분의 도구라는 점에서 이는 '사람의 구원'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60:12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 여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 벧로힘)는 '하나님 안에서' 혹은 '하나님과 함께' 혹은 '하나님에 의하여' 등의 뜻이다. 한편 '용감히 행하리니'(* , 나아세하일)라는 말 중 '나아세'는 '행하다'의 뜻을 갖는 '아사'(* )의 미래형이며 '하일'은 '능력' 혹은 '군대' 그리고 '용맹'의 뜻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다윗이 용맹하게 군사적인 반격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 히브리 원문에는 '그'에 해당되는 인칭 대명사 '후'(* )가 있다. '밟으실 자심이로다'(* , 야부스)는 '그분이 밟 으실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처럼 다윗은, 이미 동사에 주어 어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 인칭 대명사를 별도로 사용함으로써, 본 문구와 같은 행위의 주체가 철저하게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한편, 히브리 원문상 본 문구 초두에 있는 접속사 '웨'(* )를 '그렇게 하면'의 뜻으로 이해하여, 본 문구가 앞 문구의 결과로 간주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무기력하게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는 일하지 아니하신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위해 대신 싸워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애써 최선을 다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밟으신다'라는 말은, 상대를 완전히 파멸시키거나 정복하는 것을 뜻한다(롬 16:20). 사실 다윗의 이 같은 예언적 믿음은 하나님의 도구, 요압에 의해서 성취되었다(11절).
하나님의 백성이라하여 이 세상에서 탄탄 대로(坦坦大路)를 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
니다. 때로는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또 때로는 보다 깊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말미암아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다. 본 시편은 바로 이와 같은 역경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간절하게 간구하는 신앙인의 바른 자세를 보여준다. 마치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을 받은 것같은 상황이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좌절에 빠지지 않
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노력하며, 이스라엘과 함게 하시겠다는
약속에 의지하여 회복을 간구한다. 장르상으로 이 시편은 '민족적 비탄시'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으나 보다 넓게는 '간구와 신앙'의 범주에 넣어도 무난하겠다.
본 시편은 다윗이 에돔을 정벌하려고 갔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패배하여 곤경을 겪고
있던 역사적 사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의아한 사실은, 실제로 이 전쟁에
서 다윗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시에는 참패로 인한 탄식이 담겨져 있다는 점
이다. 아마 이는 전황(戰況)이 호전되기 이전에 일시적인 큰 패배를 당하였음을 시사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다윗은 에돔으로 원정 오기 전에, 요단 동편에서 아람의 동맹
군들과 전쟁을 벌였다(삼상 8:9-12). 그는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
던 도중,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 남부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에돔 족속들은, 다윗이 아람 동맹군들과 싸우는 동안 이스라엘 남부는 무방
비 상태가 될 것을 알고, 그 틈을 타서 공격해 들어왓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 남
부 지역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승전한 군
사들을 이끌고 사해의 염곡(鹽谷)으로 내려갔다(삼하 8:13). 그러나 본 시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은 그들과의 교전(交戰)에서 일단 패배하였음을 것이다. 전쟁을 하
기만 하면 항상 승리를 거두었던 다윗에게 그 패배는 대단히 뼈아픈 체험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과 함께하시지 않는가 하고 두려운 생각도 해보았을 것이다. 그
러나 그는 곧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엇음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게서 때때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시련을 주시지만, 그들을 지키시겟다는 거룩한 약속에 의거하여 곧 회복시
키심을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일체 낙심치 않았다. 비록 자신이 처한 형편이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대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역경
이 순경(順境)으로 바뀌게 될 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기도는 응답되
었고, 그로 말미암아 다윗 왕국은 근동 지역의 패자(覇者)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1) 신자들에게도 이 세상의 환난과 고통은 예외없이
닥칠 수 있으며(딤후 3:12;벧후 1:6), (2)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을 때 비
로소 인내하고 승리할 수 잇음(롬 8:25)을 깨닫게 된다.
한편 본시에는 두개의 탄원부분과(1-5절;9-12절), 하나님과의 약속을 회고하는 내용
(6-8절)이 담겨져 있다. 이제 이러한 전반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 담신 내용을
몇가지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가 에돔에게 패배하여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
었는지를 하나님께 아뢰고 있다(1-3절). 그런데 그는 그 같은 비참상이 하나님의 징벌
에 따른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징벌이 어떤 죄 때문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 3절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이 당한 패배는 너무도 참혹한 것이었다. 군사
들은 에돔의 기습으로 뿔뿔히 흩어졌고, 상당수는 에돔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비록
에돔의 칼날을 피하여 목숨을 구한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쫓겨가는 모습은 마치
술에 취한 듯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 처지였다. 승승 장구를 거듭하던 다윗에게 있어
이 같은 패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둣한 상황은 그것이 비
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심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 크신 반면에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실로 두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2:!2;79:5;왕상8:46).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곤고
와 환난만이 앞을 가로막을 뿐이다. 그러나 다윗은 목전의 암담한 현실에 망연 자실
(茫然自失)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1절). 물론 그는 이전의 죄악을, 그
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민족적인 것이든 불문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뼈아픈 과오를 솔직히 시인하고 다시금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자신뿐
만 아니라 동일한 곤경에 처한 동료의 연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 속(사
35:3;히 12:12)에서, 우리는 다윗의 적극적이고도 강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의 지난 약속에 근거하여 확고한 믿음으로 구원을 호소한다
(4-8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현재의 위급한 상황을 묘사하는 3절로부
터 장래의 승리를 확신하는 내용인 4절로의 갑작스러운 반전(反戰)이다. 이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고히 믿는 시인의 담대한 신앙을 선명하게 보여준
다. 참신앙인에게 있어 환난과 역경의 때는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순
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 약속의 이행을 하나님께 촉구한다(6-8절). 하나님께서는 그 조상들이 가나안 일경
(一境)을 기업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물론 그 약속을 직접
적으로 받은 자는 그 조상(祖上)들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조상들의 허리에 속했었기 때
문에(히 7:5), 조상에게 주어진 그 약속은 다윗에게도 여전히 유효하였다. 그 약속에
따르면, 가나안 일경의 땅은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의 차지가 되어야 했으며, 더 나아
가서 그 지역의 이방 족속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되어 그 이스라엘을 섬기는 자들
이 되어야 했다(창49:10;신33:17;수13:31). 다윗은 하나니의 신실성을 너무나도 잘 아
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人生)과는 달리 한번 맺으신 언약은 어기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민 23:19). 이 같은 하나님의 신실성은, 비록 당신의 자녀가 일시로 범죄를
햇다고 하더라도 변함이 없다(애 3:22).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다윗이나 이스
라엘 공동체에게는 어떤 잘못이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군대가 패배당하
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약해
진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우리는 본문 내용으로부터 (1) 하나님의 언약 밸석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커
오는 온갖 축복과 은헤를 받을 자격을 소유햇음을 뜻하며(창 17:4-8), (2) 하나님을
의뢰하는 언약 백성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롬 8:35-39)을 깨
닫게 된다.
셋째로, 시인은 구체적인 승리를 탄원한다(9-12절). 앞에서 암시적으로 혹은 간접적
으로 도움을 구했던 시인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에돔에게 승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
구한다. 그런데 9절의 언급을 볼 때, 에돔 족속은 다윗의 군대를 기습하여 치명타를
가하고는 신속히 자신들의 요새지로 도주한 듯하다. '견고한 성'(9절)이란 말의 뜻이
말해즈듯이, 에돔 족속은 난공 불락(難攻不落)의 요새를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따라
서 이미 에돔에 의해서 상당수의 군사를 잃었고 사기까지도 꺾인 다윗의 군사들로서는
도망쳐 깊이 숨어있는 에돔 족속들에 대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속수 무
책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시인은 더욱더 하나니의 권능만을 의지하고자 한다. 그는 에
돔 군대의 요새를 정복하기 위해 지원군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다만 하나님이 함께해즈
시면 용감히 싸워 승리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윗은 앞에서 자신들의 비참상을 아뢰고 또한 하나님께 언약의 준수를 촉구했었지만, 그와 더불어 자신들의 책임을 다해야 함을 깨닫고 잇었음도 물론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언약에 근거하여 도움의 손길을 펼치실 모든 채비가 되어 잇었다고 할지라도, 다윗은 다윗대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준비를 해야만 했다. 당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에돔을 칠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그는 흩어진 대오를 재정비하고, 다시 싸울 전의(戰意)를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하기만을 기다렸다. 과연 다윗의 기도는 상달되어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다른 지역에 있던 요압과 그의 군대를 다윗에게로 보내셨다(왕상 11:15). 이에 요압은 에돔의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고, 6개월 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에돔 족속의 남자들을 다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왕상 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