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1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건지시고 -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아뢰고 거기서 구출되기를 간구하는 문맥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7:1;17:13;22:20;25:20;109:21). 여기서 '원수'로는 사울, 다윗을 시기
하여 그를 참소했었을 사울의 신하들, 그리고 사울의 명령에 따라 다윗의 집을 포위하려는 자객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나 치려는 자 - 여기서 '일어나'(* , 쿰)는 문자적 의미의 '기립'(起立)의 의미보다는 어떤 중요한 행동을 하기에 앞선 마음의 결단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창 19:14;35:1;삼상 16:12;욘 1:2). 그리고 '치려는'은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 중에는 없다. 그러나 문맥의 의미를 살리는 데 있어서 적절한 삽입이다.
나를 높이 드소서(* , 사가브) - 이 동사는 '도달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 혹은 '높은 곳으로 올리다'의 뜻으로서, 대적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게끔 보호해 달라는 간구이다(Gray G. Cohen).
=====59:2
여기와 다음 절에서는 '다윗'의 원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이며 어떠한 악행을 도모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다윗은 이같이 원수듸의 잔악함을 말함으로써, 자신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함을 암시
하고 있다.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 - 다윗의 원수들의 잔인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이다. 피흘리기를 즐긴다는 것은 단순한 이해 관계나 원한 관계로 인한 싸움의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다시 말해서 폭
력이나 기타 악행이 아예 삶의 방식으로 굳어버린 상태를 시사한다(Kidner). 한편 성경은 한결같이, 피흘리는 데 빠른발을 지닌 자들에게는 파멸이 예비되어 있음을 강변(强辯)하고 있다(잠 1:16-19;롬 3:15, 16).
=====59:3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 '엎드려 기다리고'(* , 아라브)는 구약성경에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노리는 일과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10:9;잠 1:11).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사울이 보낸 자객들이 다윗의
집 주변을 포위 매복(埋伏)했던 사실을 가리킨다(삼상 19:11).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 '강한 자'(* , 아짐)는 복수로서.능력의 강대함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주로 적용된다(민 13:28;신 28:50;사 19:4;겔 7:24;암 5:9). 그리고 '모여'(* , 구르)는 '(일시적으로) 거주
하다' 혹은 '적대 행위를 위해 모으다'라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와 본 문구가 앞의 '엎드려 기다리고'와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 관계라는 사실등에서 볼때, 이 동사 역시 자객들의 매복 행위를 뜻함이 분명하다.
나의 범과(犯過)를 인함이 아니요 - 다윗 자신에 대한 사울의 살해 노력이 무고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에 대한 시기 및 질투(삼상 18:6-9)와 자신의 왕위가 빼앗길 것이라는 기우
(삼상 18:29)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억울하였다. 그런데 여기의 '범과'(* , 페솨)는 '반역하다' 혹은 '혁명을 일으키다'를 뜻하는 동사 '파솨'에서 나온 명사로서, 국가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 측면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범죄를 가리킨다(19:13).
좌(* , 하타트) - 이는 '길을 잘못 들다', '빗나가다' 혹은 '실족하다'를 뜻하는 동사 '하타'(*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본적으로 '실수' 혹은 '허물' 등의 뜻을 담고 있다(레 19:17). 비록 이 단어가 앞의 '범과'와 그 의미상의 차
이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59:4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 '저희가 달려와서'는 악행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다. NIV는 본문을 의역(意譯)하여 '저희가 나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they are ready to attack me)로 번역하였다. 한편, '스스로 준
비하오니'로 번역된 '쿤'(* )은 원래 '세우다', '굳건히 하다' 혹은 '정돈하다'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매복 행위를 가리킨다. 주여...깨사(* , 우라) - 원래는 '주여'라는 뜻이 들어있지 않으나, 본 단어가 명령형이라는 점 때문에 이
같이 적절한 삽입을 하였다. 한편 이 히브리어는 위급한 상황으로부터의 구출을 간청하는 여러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7:6;44:23). 그리고 이는 신인 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표현으로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는 121:4 말씀을 연상시킨다.
감찰하소서(* , 라아) - '수색하다' 혹은 '진찰하다' 등의 의미로 번역되며, 사태의 전모(全貌) 파악을 위한 지극히 세심한 관찰 행위를 가리킨다(레 13:3;민 13:18;말 3:18).
=====59:5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흔히 '만군의 여호와'로 나타난다(삼상 1:3;삼하 7:27). 구약 성경에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은 이와 유사한 호칭을 포함하여 약 279회 나오며, 그중 시편에는 단지 15회 정도만 언급될 뿐이다. 이러
한 호칭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자존하신 분이시며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곧 당신의 백성을 언약 관계에 따라 구원하고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상기시
키는 표현이다(Alexander, W. A. VanGemeren).
이스라엘의 하나님 - 이 명칭은 본절에서처럼 앞의 '만군의 여호와'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69:6;삼하 7:27). 이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셨던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둔 명칭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
력과 보호를 강조한다(Calvin).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 여기서 다윗은 개인적 간구에서 민족적 간구로 그 기도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다(Kidner, Weiser). 한편 '일어나'(* ,쿠츠)는 '각성하다' 혹은 '깨우다' 등의 의미가 있는 동사로서 잠에서 갑작스럽
게 깨어나는 것을 가리킨다(Wigram). 그리고 '열방'(* , 고임)은 광범위하게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백성을(창 12:2;사 1:4), 좁게는 이방 백성, 즉 이교도들을 뜻한다. 여기서는 좁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이
문맥에서논 혈통적이 아닌 사상적인 이교도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비록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을 거역하는자는 역시 이교도나 다름없는 것이다.
간사한 악인 - '간사한'(* , 바가드)은 원래 '덮다'는 뜻으로서 '암암리에 행동하다', '약탈하다', '허위로 대하다', '속이는', '불신실한' 등과 같은 다양한 뜻을 나타낸다. 이것은 다윗을 살해하기 위하여 다윗의 집 주변에 잠복해
있던 자객들과 그들을 보낸 사울에게 적용되기에 매우 적절하다(1절).
=====59:6
저물게 돌아와서 - 자객들이 다윗의 집을 저녁에 잠복하기 시작한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여기서 다윗은 자객들의 행동을 팔레스틴에 살던 사나운 개들의 야행성(夜行性) 움직임을 묘사하듯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잔
악성 혹은 야만성을 강력히 암시하려고 한다.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 '개'(* , 칼레브)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대단히 불결한 동물로 간주되었다. 물론 '개'들이 제의적(祭儀的)으로도 부정(不淨)했지만 썩은 고기 심지어는 사람의 죽은 시체도 먹었으며
(왕하 9:36), 또한 전염병을 옮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를 집에서 키우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개'는 먹을 것을 찾아 시내(市內)를 돌아다니며 반(半)야수처럼 살았다.
=====59:7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 이는, 자객들과 그들을 보낸 자들이 밤이 늦도록 다윗에대한 비방과 저주를 그치지 않았던 사실(삼상 19:11)을 가리킬 것이다(94:4, Rawlinson). '악을 토하며'의 히브리어 '나바'(* )는 '(말을) 발하다',
'트림을 하다' 등의 뜻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을 6절과 연결시켜 '침을 흘리다'(Kruaus, Weiser) 혹은 '으르렁거리다'(RSV, bellowing)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 다윗에 대한 살의(殺意)가 극히 잔악한 말로써 표출된 것을 의미할 것이다(57:4 주석참조).
=====59:8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와 계략이 하나님 앞에서는 지극히 무력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2:4). 즉, 자객들은 자신들의 잠복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고 보고 '누가 들으리요'라고 했었다(7절). 하지
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보호를 위하여 악인들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일일이 감찰하신다(4절). 바로 이 같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 앞에서는 악인들의 교묘한 계략도 일개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 여기서 사울과 그 자객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갖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로 비유되고 있다(5절).
=====59:9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 '산성'(* , 미스가브)은 '높다'를 뜻하는 동사'사가브'(*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쉽게 오르기 곤란할 만큼의 '높은 망대'(삼하 22:3) 혹은 '높은 곳'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다른 곳에서는 '
피난처'로 번역되기도 하였다(46:7,11). 특히 이 단어는 1절의 '높이 드소서'의 히브리어와 그 어근이 동일하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보호자가 되심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 '저의 힘을 인하여'(* , 우조)는 단지 '그분의 힘'을 의미할 뿐이다. 이와 같은 맛소라 본문으로는 본절의 뜻이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70인역(LXX)과 다른 고대
역본 등을 근거로 하여, 맛소라 본문의 본 단어 '우조'를 '우지'(* )로 고칠 것을 주장한다(NIV, Weiser, Keil, Rawlinson, Kraus, C. B. Moll). 그럴 경우 '오 나의 힘이시여'로 번역될 수 있어, 매우 자연스럽다(17절). 한편 '바라리
이다'(* , 사마르)는 원래 '지키다' 혹은 '보존하다'의 뜻이지만, '굳게 의지하다'의 의미로 이해하면 적절할 것이다.
=====59:10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 문자적으로는 '나의 인자의 하나님'이다. 그런데여기서 '인자'는 변함없이 베풀어지는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각양 사랑을 뜻한다. 따라서 본구는 다윗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의 은총
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사싶을 보여 준다.
나를 영접하시며 - 여기서 '영접하시며'(* , 카담)는 '고대'(古代), '동편' 혹은 '앞'을 뜻하는 명사 '케뎀'(* )으로부터 유래한 동사이며, (1) '어떤 사람과 만나다' 혹은 (2) '앞서 나가다'의 뜻을 갖는다. (1)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
님이 마치 친한 친구와도 같이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며 도와주신다는 뜻이 되고(A. A. Anderson), (2) 의 의미로 해석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즉각적이고 시의(時宜)적절히 나타나는 것을 강조하는 뜻이 된다(NIV,
Calvin, Keil).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 문자적으로는 '내 원수를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이다. '원수'(* , 쇼르라이)는 '비틀다' 혹은 '함께 짓누르다'라는 기본적 의미를 갖는(Gesenius) 동사 '솨라르'(* )의 명사
적 분사로서, '압제하는 자'를 뜻한다. 한편 '목도케 하시리이다'의 원형인 '라아'(* )에 대해서는 4절의 '감찰하소서'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59:11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 다윗은 원수들의 생명이 창졸간이 아니라 오히려 서서히 무너져가게 함으로써 잠시동안 하나님의 진노의 교훈적 기념비가 되기를 강력히 염원한다(Cheyne,
VanGemeren). 하나님께서도 일찍이 애굽 왕 바로를 멸망시키지 않고 살려두심으로써 당신의 능력을 온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셨다(출 9:16).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 이것은 앞의 '죽이지 마옵소서'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다. 여기서 '흩으시고'(* , 하니에모)는 '누아'(* )의 사역형으로서 '유리하게 하다' 혹은 '방황하게 하다'의 뜻이다. 이 단어는
가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 연관해서도 사용된 바 있다(창 4:12;민 32:1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정처없이 유리, 방황하게 되는 일이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공히 발생될 수 있음을 암시받는다
(Alexander). 한편, '낮추소서'(* , 호리데모)는 '야라드'(* )의 사역형으로서 '끌어내리다'의 뚱이다. 즉, 이것은 '영예로운 자리에서 불행과 역경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을 가리킨다(Rawlinson).
=====59:12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 본 문구는 저들의 모든 말이 곧 범죄라는 뜻으로서(Hupfeld, Keil, C. B. Moll), 하나님께서 다음 문구와 같이 하셔야 할 이유이다(NIV, Calvin).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그들은 하나님
이 안 계신 양 교만하게 하나님의 백성 곧 다윗을 해하려는 모의를 하였고, 또한 비방, 저주했었다(7절).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 - 앞 문구의 '저희 입술의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말해 준다. '거짓말'은 무죄한 다윗에게 죄를 덮어씌운 일 그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그 교만함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 본절에 열거된 죄악들은 개인은 물론이고 한 공동체를 깨뜨리는 치명적 독소로 작용하는 바, 삿 9장에 언급된 세겜사건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중에서도 '교만'은 하나님께 대한 직
접적 도전 행위로까지 연결되는 죄악이다(Kidner). 한편 '사로잡히게 하소서'는 이방인의 군대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도 이해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윗의 이러한 간구가 응답됐을까? 물론 우리에게는 이
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사울은 비록 살아서는 아니었지반 죽어서 시체의 상태로 블레셋 군대에 의해 그들의 점령지였던 벧산의 성벽에 못박혔었다(삼상 31:8-10).
=====59:13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 이러한 간구는 11절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 저자 다윗은, 원수들을 죽이지 않은 채 징벌하신 얼마후에는 결국 그들을 멸망시켜 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간구는. 승전(勝戰)
한 로마장군들이 잡아두었던 포로들을 성안으로 들여놓아 자신들의 승전을 알린 후, 그들을 목적한 곳에 데리고 간 다음에 그들을 처형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Calvin). 하나님이...다스리심을 땅 끝
까지 알게 하소서 - 하나님께서 바로의 완악함을 꺽으신 것(출 9:15,16)이 하나님의 능력을 온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 사실(출 15:14-16)을 연상시킨다(삼상 17:46).
야곱 - 민족으로서 혹은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59:14
6절과 동일하다. 그러나 6절은 악인들의 악의에 찬 행동을 비난조로 묘사하고 있는반면, 본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그들이 취하게 되는 비참한 행동을 보여 준다.
=====59:15
악인들의 모든 노력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 것에 대한 묘사이다.
식물을 위하여 유리(遊離)하다가 - 자객들이 다윗을 희생 제물로 삼기 위하여 그 집 주변에 잠복하고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6절).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 임로 이스베우) - 문자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면'의 뜻이다. 그러나 이는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 가지가능성 모두를 말하는 미래적 가정이 아니다. 다만, 악인들이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 즉 없음을 말하는 확정적 가정이다(마 4:3, 6, Calvin).
=====59:16
15절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악인들의 비참한 결국을 묘사하는 데 반해, 본절은 하나님의 보호로 구출된 의인들의 행복한 결국을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 '주의 힘'은 구체적으로, 다윗이 창문을 통하여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삼상 19:12-17),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 자객들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신 일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노래하며'는 당
연히 그분의 능력이 심히 큼에 대한 찬양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 다윗은 '아침'이 오기 직전에 자객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며(삼상 19:11), '아침'에는 바로 이같이 '주의 인자'를 찬양할 수 있었다(삼상 19:18-20). 반면에, 악인들은 밤새도록 다윗의 목숨을 노렸으나 결국 실패로 끝남으로써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히 피곤할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 본 문구 앞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다. 한편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은 9절 주석을 참조하라.
=====59:17
나의 힘이시여 - 9절 주석을 보라.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 이 표현은 9절의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와 동일하며,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구원하신데 대한 찬양이다.
58편과 마찬가지로 본시 역시 비탄시의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저
주시의 분위기를 드러낸다. 시인은 극도의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함
과 아울러 대적들의 파멸을 희구한다. 여기서 대적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하가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다수의 비평 학자들은 5, 8절을 근거로 삼아 이 대적들이란 이
방 민족의 적대자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표제문에 나와 있듯이, 다윗이 사
울의 자객들의 손에서 구사 일생(九死一生)으로 피한 직후에 이 시를 썼다고 봄이 자
연스럽다.
이러한 작시 배경은 삼상 19:11-18의 이야기와 잘 조화된다. 그때 다윗은 사울의 자
객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죽음만을 기다려야 할 상황에 있었다. 자객들은 다윗의 집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다윗이 깊이 잠들게 될 새벽 시간에 그를 살해할 계획이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례 한 까닭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다윗이 무슨 잘못을
범해서가 아니었다, 다윗은 항상 충성스럽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사울의
명령대로 전장(戰場)으로 나갔고, 거기서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채 적과 싸워 이겼다.
만일 문제가 된다면,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즉, 다윗은 많은 공을 세움으로 말미암
아, 사울의 시기를 받게 된 것이다(삼상 18:6-9:19:8). 사울의 시기심은 증오로 바뀌
었고, 결국에 가서는 살의(殺意)로 발전하였다. 사울은 자신의 곁에 서서 신경을 안정
시켜주기 위해 수금을 연주하던 다윗을 향하여 창을 던졌다(삼상 18:10, 11:19:9,10).
그러자 다윗은 사울의 창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으로 도주하였다. 그런데도, 사
울은 불붙는 증오심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자객을 보내어 그날로 그를 죽이려고 한 것
이다. 집으로 도주해온 다윗이, 얼마 후 자신의 집을 자객들이 포위하고 있음을 알았
을 때, 그는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겠는가? 다윗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
러나 다윗은 자신이 왜 이같이 억울한 일을 당해야만 하느냐의 의문을 풀기 앞서, 먼
저 그 위기를 벗어날 대책을 강구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다윗을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완전한 방법은 아무것소 없었다. 어찌 혼자서 많은 수의 용사를 당
해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탈출할 수 있게끔 유일한 허점을 남겨두셨
다. 즉 다윗이 미갈의 도움을 받아 창문을 넘어 밧줄을 타고 성 밖으로 도주할 후 링
었다. 이러한 일련의 도주 과정이 외면상으로는 인간적 기지와 재치로 말미암아 전개
된 것 같지만, 본시에서 고백되고 있듯이 이는 기도의 응답이었다. 모든 계획은 인간
이 꾸미되 그것을 성사키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잠 16:9)을 다윗은 경험하게 된 것
이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도 낙심치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악인들로 부
떠 구원 받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1) 신자들에게는 자신의 잘못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애매한 고난이 닥칠 수 있으며(벧전 2:19) (2)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도 묵묵히 참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반드시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음(창 39:7-23)을 깨닫개 된다.
한편 본시에는 여러 모티브(motifs)들이 혼합되어 있어서 구조를 분석하는 데 있어
난점을 드러내지만 먼저 우리는 이 시편을 후렴구(9,10절과 17절)를 기준으로 두부분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6, 7절과 14, 15절 역시 후렴구애 속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구분법은 양분된 두부분을 다시 '셀라'를 기준으로 나누는 것이다.(5, 13절).
그런데 본 강해에서는 이러한 외면상의 구조보다는 내용 자체의 구분에 따라 편의상,
의인을 무고하게 탄압하는 악행자들에 대한 징벌 호소(1-14절)와 구원의 학신(15-17)
의 두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구원과 징벌을 위한 간구(59:1-14)
하나님의 개입(介入)은 의인에게는 구원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악인에게응 심판의 결
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본시의 기자 또한 이 사실을 믿고 있으며 그러한 믿음은 본
문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하여 본문은, 구원을 간구하는 내용과
(1-4절) 징벌을 호소하는 내용(5-14절)으로 다시 양분되어 진다.
(1) 구원을 간구함. 대부분의 시편 초반부가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환난에서 벗어나
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특히 시인은 여기서 재미있
는 묘사를 보여준다. 즉, 저자는 '적의 추겨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을 만큼의 높은 곳
으로 올려주는 것'을 뜻하는 동사 '높이 드소서'라는 표현을 통해(1절), 마치 자신을
사나운 개에 쫓기는 어린이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면서 저자는, 부모들이 개에게 쫓기
는 어린이들이 어깨 위로 들어올려 개가 물지 못하도록 하듯이, 자신을 해하려는 들개
와 같은(6절) 악인들로부터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그 악인들은 매우 잔
인하여서, 사람의 목숨을 귀중하게 생각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과 부딪
히게 될 경우 몰인정하게 그를 죽일 것이 분명하였다(2절). 더구나 그들은 숫자가 많
았다(3절).그러므로 그 악인들은 다윗에게 가위(可謂) 위협적인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쫓김을 당한다는 사실이 매우 억울하였다. 잘못은
커녕 도리어 온갖 충성을 다 바쳤는데, 사울은 도리어 그 하수인을 시켜 다윗을 죽이
려하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용기를 잃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억
울한 사정을 감찰하고 계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를 악인들의 포위망으로부터 능히 구출해주실 것을 알고 있
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비록 환난에 처해 있었지만, 결코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
다. 도리어, 하나님이 인간의 모르는 일들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악해
을 일삼았던 사울과 그 하수인들이 더욱 불쌍한 자들이었다. 이제 사울의 하수인들은,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당하여 필연적으로 멸망당할 것
이 분명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인간은 선보다는 악을 행하는 데 열심을
내는 경향이 있으며(롬 3:15),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재물이나 건강등의 유뮤가 아닌
하나님과의 동행 여부가 그 관건(關鍵)임(눅 14:15)을 깨닫게 된다.
(2) 징벌을 호소함. 앞에서 악인들로부터 구출되기를 간구했던 기자는, 여기서는 악
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징벌되기를 탄원한다. 그러면 그 악인들은 어떠한 자들이었을
까? 우선 그들은 악행을 즐기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인간을 죽이는 데 서슴없이 행했으며 더욱이 무고한 자를 살해하려 들면서도 양심
에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패역한 부류였다. 즉 그들은 마치 썩은 고기를 찾아 침
을 흘리며 돌아다니는 들개와도 같았다(6절).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온갖 강
포를 행하기를 주저치 않는 파렴치한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만
홀히 여겼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모든 일을 감찰하고 계시건만, 그들은 하나님이 세
상 일에 관여치 않으신다고 생각하였다. 그 악인들은 온갖 악을 도모하고 정직하고 경
건하게 사는 자들을 핍박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게서는 그들의 악해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 세계의 일에 무관
심해서 잠잠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악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
여, 그들에 대한 징벌을 유보하고 계셨을 뿐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을 멸시하고(롬 2:4), 그 인자하심을 악용하여 악을 더 행하여 이에 따라 자신들에게
더 큰 진노가 임하도록 한 것이다.
이제 다윗이 왜 그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징벌이 내려지기를 소원햇을지에 대해서 살
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해치려했다는 개인적 원한으로 인하여 그들
의 멸망을 바랬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58편 강해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다윗은 하
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어져야 할 이 세상 특히 신정 국가 이스라엘에서 죄악이 제거되
기를 갈구하는 대국적 동기에서, 악인들의 멸망을 간구하였다. 만일 악인들이 계속 극
성을 떨칠 경우, 이 세상에서 공의를 찾아보기란 마치 산에서 물고기를 보려는 일과
같아지게 될 것이 뻔하였다. 그래서 정직을 행하기보다는 시류(時流)에 영합하여 과정
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
기를 원하는 의인들은 악인들의 득세와 함께 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게되기 마련이
다. 그래서 다윗은 악인들의 징벌을 탄원한다. 그들을 징벌하시되, 그들을 순식간에
죽게 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는지 아니면 자연사(自然死)를 햇느
지 애매 모호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11절). 즉,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이 하님
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쉽사리 판별될 수 있도록, 그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공공
연하게 고통을 당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그들이 결국
은 이 세상에서 멸절되기를 간구한다(13절).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하나님
의 심판을 받았음에도 회개치 않고, 또다시 악을 행할 기회만을 노릴것이 분명하기 때
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1) 악인들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득세를 하지만, 하
나님께서는 그들의 세력이 터무니없이 커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며(계 17:17) (2)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는 악한 세력들의 완전 멸절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됨(고
전15:24-28)을 깨닫게 된다.
2. 구원의 확신에 따른 감사 찬송(59:15-17)
여기서 시인은 자신을 해치려 하던 악인들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임
을 확신하며(15절), 자신이 그들의 손아귀에서 온전히 구출되는 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겠다고 다짐한다(16, 17절). 특히 본문에서 시인은 구원받을 자신의 모습
을 햇살이 두루 비취는 아침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즐거워하는 복된 모습으로 표현함으
로써(16절), 밤새도록 먹이를 찾아 돌아다녀도 구하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들개의
처량한 모습과(14, 15절)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시인의 신앙적 확
신이 고백트로 표출되고 있는 바, 시인은 하나님을 '산성', '피난처', '힘'등의 말로
고백하고 잇는 것이다. 물론 본 시편의 배경이 되는 그 당시로서는 현실적으로 볼 때
결코 그 자신의 미래를 낙관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윗의 집 주위를 완전 포위한
자객들은 감사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었으며, 시간이 되면 그 집안안으로 침입해 들
어와서 그를 살해할 준비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시간이 문제일 뿐 다윗은 죽은 목숨
과 다름없었다. 자객들 중 누구 하나도 다윗을 독 안에 든 쥐로 여기지 아니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윗의 파멸을 확신하며, 미리부터 자신들의 능력과 꾀를 자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당장은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간구가 반드시 응답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위
험에서 구출하시기를 기뻐하시며, 또한 그러한 능력이 있으신 분임을 너무도 확연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직접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엿으며, 또한 그분으로부터 보
호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확신하였기에 다윗은 하나
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윗의 이러한 감사위 마음은, 단순히 위급한 상황에
서 우선 구출되고 보자는 이기적 갈망 그리고 그 화급함으로 인하여 생긴 것은 아니었
다. 사실 막상 위험에서 벗어나면, 하나님께 감사히기를 망가가하고 마는 것은 대다수
인생들의 속성이다. 인생들은 위기에서 구출될 경우, 자신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
움을 구했던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자신의 능력으로 혹은 우연히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자랑하곤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출된 후에 하
나님께 감사 찬송하겠다는 다윗의 결심은 매우 의미 심장한 것이다. 믈론 실제로 다윗
이 위기에서 구출된 뒤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햇는지를 분명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늘상 하나님께로 향했던 그의 신앙적 성품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
께 감사하고 또한 찬양을 드렸을 것이다(54:6, 7).
우리는 본문 내용을 통하여 (1) 악인들의 모든 수고는 잠시 잠간 열매를 맺는 듯하나 결국 헛될 뿐이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임할 진노를 크게 하는 것이며(롬 2:5) (2)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뒤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신실성을 인정 받을 수 있는 좋은 잣대임(눅 17:11-19)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