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이는, 다윗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음을 반영한다. 다윗은 십 사람들의 밀고로 사울에게 쫓기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바로 이 같은 탄식어린 기도를 하였었다(54:2).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 '내가 간구할 때에'는 문자적으로 '나의 간구를 '이다. 그리고 '숨지'(* , 티트알람)는 '숨다' 혹은 '가리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알람'의 재귀적 사역형(히트파엘)이다. 따라서 여기의 '숨지'는 '스스로 무시하다'로 번역하여 행위 주체의 무관심을 강조함이 타당하다(신 22:1, 3, 4, NIV).
아무튼 본문과 같은 기도는, 기도하는 자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암시한다(13:1;27:8; 69:17;89:46) =====55:2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 여기서 '편치 못하여'(* , 아리드)는 '슬퍼하다', 방황하다'를 뜻하는 동사 '루드'(* )의 사역형(히필)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내가 나자신을 방황하게 하였다'의 뜻이 된다. 한편'근심'(* , 시아흐)은 '슬퍼하다' 혹은 '묵상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시하'(*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억울한 일 등으로 인하여 깊은 시름에 잠기는 것 혹은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는 것(142:2;욥 9:27;잠 23:29)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문은 온갖 염려를 하는 등 이 생각저 생각을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Keil).
=====55:3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 '원수'는 자신이 특별히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을 위시하여 천재적인 모사 아히도벧(삼하 15:12)과 그들의 군대를 가리킨다. 한편 '소리'는 위의 두 사람이 군대를 모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청적(可聽的)인 소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Calvin). 또한 '악인'은 근본적으로 앞의 '원수'와 동일하며, '압제'(* , 아카트)는 구약 성경 중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로서 '붙들다' 혹은 '억류하다"를 뜻하는 어근 '아카'(* )를 갖지만 이 어근은 구약 성경 중에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 단어는 앞의 '소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뜻을 나타낸다.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 '핍박하나이다'(* , 사탐)는 원래 '미워하다' 혹은 '대항하다'의 뜻이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무력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행동까지를 뜻한다(창 49:23;욥 30:21). 한편 '노'(* , 아프)는 원래 '콧바람을 내뿜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아나프'(* )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55:4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 '마음'이 인간의 내면을 지칭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속'이라는 내면 개념을 또다시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극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과 중신(重臣)이었던 아히도벧이 자신을 왕에서 제거할 음모 꾸민다는 사실로 인하여 바로 이 같은 내면적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심히 아파하며'(* . 훌)는 원래 '꼬다' 또는 '빙빙 돌리다'는 뜻이며, 여기서 '춤추다', '근심하다', '고통하다'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특히 여기에서처럼 '고통하다'의 뜻으로 쓰일 경우에는, 마치 해산하는 산모가 당하는 진통과 같이 내장이 뒤틀리는 듯 심히 괴로운 상태를 가리킨다(Keil, C. B. Moll).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 압살롬은 다윗의 왕위를 찬탈할 음모를 약4년 동안 주도 면밀하게 꾸며 나갔다. 그는 자신의 뜻이 능히 성사될 것으로 믿고 음모를 공공연하게 진행시켜 나갔다(삼하 15:1-6). 따라서 다윗은, 모반자들이 자신들의 목숨 보존을 위해서라도 그 음모를 기필코 행동으로 옮기고만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Rawlinson).
한편 '위험'(* , 에이마)은 '두려움' 혹은 '놀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창 15:12;출 15:16) =====55:5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 '두려움'(* , 이르아)과 '떨림'(* , 라아드)은 모두 공포에 사로잡힌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굳이 차이를 말하자면, '두려움'은 공포에 사로잡힌 마음의 내면성을 말하고, '떨림'은 그것의 외적 현상을 강조한다. 한편 '이르고'(* , 보)는 '오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졌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타인의 고유한 영역에 침범해 들어오는 행동을 가리키기도 한다(왕하 11:8;잠 6:29). 영역본 NIV는 본 문맥의 의미를 보다 생생하게 하기 위해서 본 동사를'포위하다'(beset)로 번역하였다.
황공(煌恐)함이 나를 덮었도다 - '황공함'(* , 팔라추트)은 '진동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 '팔라츠'(*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사지가 덜덜 떨릴 정도의 심한 '두려움'이나 '공포'를 나타내는 말이다. 욥 21:6;겔 7:18). 한편 '덮었도다'(* , 카사)는 NIV의 번역처럼 '압도하였다'(overwhelm)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55:6
내가...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 '내가...날개가 있으면'은 문자적으로 '누가나에게...날개를 줄 것인가?'의 뜻이다. 결국 이는 그 당시에 다윗이 어떤 법으로도 모반의 위험, 즉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화급(火急) 한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Calvin). 그는 이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애처러운 신세를한탄할 뿐만 아니라 오직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피신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비둘기는 팔레스틴에 많이 서식하던 새이다. 다윗이 많은 새 중에서 하필 비둘기가되고 싶다고 한 까닭은, 그가 자신을 '압살롬'이라는 '매'(hawk)에 쫓기는 신세로 여기고 있었던 때문이었다(Calvin). 뿐만 아니라 비둘기가 멀리 날아갈 수 있고, 사람들에 의해서 쉽사리 잡히지도 않는다는 점 또한 이러한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55:7
광야에 거하리로다. '광야'는 핍박을 받는 자들이 핍박을 숨는 곳으로서 흔히 이용되었다(삼상 24:1;렘 9:2). 구체적으로는 '유다 광야'를 가린킨다. '거하리로다' (* , 룬)는 '숙박하다' 혹은 '머무르다'의 뜻으로서, 단기적으로 외지에서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삿 19:13;룻 3:13; 사 21:13).
=====55:8
본절은 비둘기가 폭풍우를 피하여 바위 밑의 둥지로 안전하게 숨는 광경을 연상시킨다(Rawlinson).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 '폭풍'(* , 루아흐 소아)이라는 말 중에서, '루아흐'는 '바람' 혹은 '영'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바람'으로 보아야 하고, '소아'는'달리다' 혹은 '돌진하다'를 뜻하는 동사 '사아'(* )에서 파생된 형용사적 분사이다. 따라서 여기의 '폭풍'은 그 진행 속도가 대단히 빠른 바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광풍'(* , 사아르)은 '격분하다' 혹은 '격렬해지다'를 뜻하는 동사 '사아르'(*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구체적으로 '회오리 바람'을 가리킨다(램 23:19;30:23). 중근동 지방에서는 이 같은 바람들이 빈번히 발생하여, 그 강력한 파괴력 때문에 지나가는 행인들이 필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압살롬의 모반을 염려하던 다윗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피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55:9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 이는 압살롬 일당의 음모가 결코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지 않았음을 암시해 준다(Calvin). '강포'(* , 하마스)는 '학대하다', '해를 끼치다' 등을 뜻하는 동사 '하마스'(* )에서 나온 명사로서, '포악 행위', '부정' 등을 가리킨다(출 23:1;욥 15:35). 그리고 '보았사오니'(* , 라아)는 곰곰히 생각하면서 세심하게 주시하는 행위를 뜻한다(왕하 7:13;렘 23:18). 8).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 '저희를'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그러나 문맥의 의미를 정확히 밝힐 필요성과 관련해서 볼 때, 적절한 삽입이라 하겠다. 여기의 '저희'는 다윗에 대한 모반을 꾀하던 압살롬 일당을 가리킨다(Keil). 한편 '멸하소서'(* , 발라)는 '삼키다'의 뜻(민 16:30;사 28:4)으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상황에 대한 독특한 표현 양식이다(21:9).
저희 혀를 나누소서 - 여기서 '나누소서'(* , 팔라그)는 하나님께서 바벧탑을 쌓던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사건과 관련하여 사용됐던 '발랄'(* )과 동의어이다. 특히 다윗은 독자로 하여금 본절에서 그같이 언어가 혼잡케 된 사건을 회상시키기 위하여 앞에서 '발랄'과 비슷한 '발라'라는 동사를 사용한 것 같다(Keil). 그렇다면 다윗은, 압살롬과 아히도벧의 모반 계획이, 마치 바벧탑을 쌓던 인류의 계획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무산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다윗의 이러한 기도는 응답되었다. 즉, 모사 아히도벧의 계략이 압살롬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압살롬과 아히도벧은 결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압살롬은 다윗의 군대에 의해서 패퇴되고 만 것이다(삼하 15:31;17:1-14).
=====55:10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 '두루 다니니'(* , 사바브)는 파수꾼들이 행순(行巡)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왕하 9:18;아 3:3;5:7). 따라서 본 문구는, 압살롬 일당이 파수꾼처럼 성벽 위를 돌면서 간첩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Cheyne, Keil). 결국 다윗은, 왕권(王權)과 국권(國權)을 지킬 목적으로 건축된 성벽을 압살롬 일당이 오히려 그 반대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의 사악성과 부도덕성을 생생하게 고발하려고 한다(Calvin).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殘害)함이 있으며 - '성중에는'(* , 베키르바)은 문자적으로 '그녀의 안에는'이다. 그런데 여기의 '그녀'에 대한 해석이 (1) 아버지 다윗에 대한 모반을 꾀하던 압살롬과 아히도벧의 마음(Calvin, Moll), (2) 압살롬과 아히도벧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성(城)(Rawlinson, keil)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2) 견해가 보다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 문구의 내용은 압살롬과 같이 불의하게 왕권을 탈취하려던 자들이 성내를 누비고 다님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결과임이 분명하다(Rawlinson). 한편 '잔해함'의 '아말'(* )은 기본적으로 '노동', '수고'를 뜻하며(전 1:3), 사 53:11에서처럼 '고난', '역경'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단어가 '다른 이에게 가해진다'는 문맥에서 사용되면 주로 '재난', '곤경'을 뜻하게 된다(A. A. Anderson).
=====55:11
압박과 궤사(詭詐)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 '압박'(* , 토크)은 '끊다'를 뜻하는 아랍어 기원의 동사 '타카크'(*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난폭스런 무법 행위를 가리킨다(72:14). 그리고 '궤사'(* , 미르마)는 '속이다' 혹은 '현혹시키다'의 뜻이 있는 동사 '라마'(*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타인에게 교묘히 사기를 치는 행위를 가리킨다(창 27:35;호 12:7). 특히 앞의 히브리어 '토크'에도 '기만'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어휘 구사력을 돋보이게 한다. 한편 '거리'(* , 레호바)는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성문 근처의 '광장'을 가리켰다(대하 32:6;스 10:9;에 4:6). 이곳은 시장에(市場)이나 심지어는 법정(法廷)으로도 사용되었다(C. B. Moll). 그런 점에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어야 할 곳에 도리어 불의가 판쳤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55:12
여기서 다윗은, 모반을 꾀한 자가 자신에게 매우 신임 받던 인물이었음으로 인하여더 큰 괴로움을 느껴고 있다(41:9). 다윗은 자신을 해하려는 자가 차라리 그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었다면 그토록 큰 심적(心的) 고통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책망한(* , 하라프) - '비방하다' 혹은 '훼방하다'의 뜻으로서 상대에 대한 험담 등을 함으로써 그 인격을 깎아내리는것을가리킨다(삼상 17:25;왕하 19:4;느 6:13). 아히도벧과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자신들에게 향하도록 할 목적으로, 이같은 행각을 벌였을 것이다(삼하15:6, 12, 13).
원수가 아니다 - 압살롬이 다윗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압살롬을 도와 모반을 꾀했던 '아히도벧'은, 다윗에게는 훌륭한 조언자였고(삼하 15:12), 한때 그의 말은 거의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삼하 16:23).
원수일진대 - 본 문맥의 의미를 잘 드러내도록 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일 뿐, 히브리 본문에는 없다.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 이것은압살롬과 아히도벧이 다윗을 비방함으로써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별도로 자신을 다윗보다 더 나은 자로 인식시키기 위해, 자신들을 공의로운 자로 가장하기도 하였다(삼하 15:2-4).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 이것은, 모반의 주동자들이 원수였다면 소식을 들은 즉시 도망쳤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윗은 아히도벧이 자신과 너무나도 각별한 사이였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피신을 늦추었다.
다윗은 비록 아히도벧과 압살롬의 반역 음모에 대해서 진작 들었지만, 이같이 자신의 도망을 늦춤으로써 별다른 준비도 못한 채 궁궐을 떠나야만 했다(삼하 15:13) =====55:13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 문자적으로 '너는 나와 같은 반열에 서 있는 자라'로번역된다. 한편 '동류'의 히브리어 '에레크'(* )는 '가치', '평가', '순서' 등의 뜻으로 쓰인다. 결국 본문은 이전에 다윗이 아히도벧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암시해 준다.
나의 동무요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 여기서 '동무'(* , 알루프)는 '배우다' 혹은 '가르치다'를 뜻하는 동사 '알라프'(*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다른 사람과 동행하여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는자를 가리킨다(Jack Scott). 한편 '가까운 친우' (* , 미이다)는 '동침하다' 혹은 '알다'를 뜻하는 동사 '야다'(* )의 강조적 수동형 분사이다. 이 단어의 어근이 갖는 뜻에서 볼 수있듯이, 상대를 피차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절친한 친구를 뜻한다.
=====55:14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 본 문구의 초두에는 우리 말 성경에서 제대로 번역되기 곤란한 관계 대명사 '아쉐르'(* )가 있다. 이것은 곧 본 문구가 앞구절의 '동류'와' 동무' 그리고 '가까운 친우'를 수식하는 절(節)임을 뜻한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함께 달콤한 교제를 나누었던'의 뜻이다. 여기서 '교제'(* , 소드) 는 '의논하기 위하여 함께 앉다' 혹은 '함께 의논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야사드' (*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어떤 중요한 일을 논의 결정하기 위한 비밀스런 회합을 가리킨다(64:2;잠 20:19:렘 23:22).
무리와 함께 하여 - 여기서 '무리'는 '분노하다' 혹은'소음을 내다'의 뜻을 갖는 동사 '라가쉬'(* )에서 나온 명사로서, '대규모의 군중'을 뜻한다(Davidson). 다윗은 아히도벧을 절기나 기타 국가적인 대규모 행사 때에 항상 대동(帶同)하였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가 개인적이며 은밀한 접촉이었다면, 본 문구는 공개적인 접촉 혹은 친교를 가리킨다(C. B. Moll).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도 아히도벧을 동행시킬 만큼 그와 가까웠음을 시사한다(42:4).
=====55:15
9절에서는 아히도벧의 계략이 무력하게 되기를 간구했으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나아가 그가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다. 간구 뒤에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덧붙이는 것은 9절이나(10,11절) 본절이 동일하다. 사망이...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 이것은 아히도벧뿐만 아니라 그와 힘을 합하여 다윗을 대적했던 모든 자들에 대한 저주이다. 여기서 다윗은, 초자연적인 징벌로 말미암아 땅속으로 빠져들어가 파묻혀버렸던 고라 일당의 사건(민 16:30-35)을 염두에 두고, 바로 이 같은 저주를 하고 있다고 본다. 한편 '음부'에 관해서는 삼상 2:1 -10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홀연히 -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없는 말이나, 문맥적 의미를 생생히 표현하기 위한 삽입이다. 영역성경 NIV는 '불시에'(by surprise)라는 말을 삽입하였다.
=====55:16
압살롬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서 죽 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지려는 순간에 처해졌지만, 다윗은 기도를 계속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한다(Calvin).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만 의지했던 모반자들의 자세와 현저하게 대조된다. 시인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간구에 있음을 확신했다(A. A. Anderson).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 기도 응답의 확신이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명칭인 '여호와'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강조한다(Alexander).
=====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 '저녁과 아침과 정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던 세 번의시간을 의미한다(단 6:10;행 3:1). '탄식하리니'(* , 시아흐)는 원래 '전하다' 혹은 '말하다'의 뜻으로서 상대에게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상세히 알리는 것을 가리킨다(69:12;삿 5:10;대상 16:9).그리고 '근심하여'(* , 하마)는 '큰소리로 말하다' 혹은 '한탄하다'의 뜻으로서, 대개 불안한 심리 상태를 억제치 못해 크게 소리내어 부르짖는 행위를 가리킨다(59:6;77:3;겔 7:16).
=====55:18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 '나를 치는 전쟁'은 문자적으로 '나에 대한 전쟁'으로, 압살롬과 그 모사 아히도벧에 의해 주도된 모반을 가리킨다(삼하 16:15). 한편 '구속하사'(* , 파다)는 완료 시제이다. 이처럼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기는 신세(삼하 16:14-18)이지만, 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확실함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파다'라는 동사는 '되사다' 혹은 '되찾다'의 뜻으로서, 이미 팔려간 사람이나 물건을 어떤 대가의 지불을 통하여 다시 찾아오는 것을 가리킨다(레 27:27; 렘 31:11). 특히 이 동사는,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인간의 능력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구출해내시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기도 한다(삼하 4:9;느 1:10).
=====55:19
태고(太古)부터 계신( , 야쉐브 케뎀) - 이는 '영원토록 앉아계신'의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항상 공의로운 심판자되시는 분임을 가리킨다(74:12;신 33:27;합 1:12, Keil). 몇몇 학자들은 본문을 '동편에 거하시는 분'(the inhabitant of the East)이라 번역하지만(Gunkel, Kraus),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본절에서 시인은 소망의 근거를 신앙 고백적인 진술로써 표현하고 있다. 위대한 심판주로서 영원토록 좌정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괴롭히거나 당신을 경의하지 않는 자들에게 반드시 보응하실 것이다(W. A. VanGemeren).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72:14)
=====55:20,21
여호와의 신실하심과는 대조적으로, 반역자들은 절친한 친구를 배신하고 그 뒤통수를 치는 계교를 꾸몄다. 한편 여기서 '언약'이란 직접적으로는 다윗과 아히도벧 간에 맺은 굳은 약속이나 맹세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의 배후에 하나님이 증인으로 계셨다는 점에서 그 배반은 곧 하나님께 대한 거역의 의미를 내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A. A. Anderson).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 아히도벧이 평소에 유순한 말(Calvin) 혹은 아첨하는 말(Keil)을 많이 했었음을 가리킨다. 여기의 '우유 기름'은 '버터'를 뜻한다.
그 마음은 전쟁이요 - 겉과는 달리 속에서는 살의(殺意)를 품고 있었음을 말한다.
뽑힌 칼 - 사람을 즉각적으로 죽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아히도벧의 내면적 잔악성을 여실히 폭로해 주는 말이다.
=====55:22
여기서 다윗는 자신을 2인칭으로 지칭하면서, 압살롬과 아히도벧의 반역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 결론을 피력하고 있다(W. a. Vangemeren).
네 짐(* , 예하브카) - 이는 '주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하브'(*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너의 몫'(Rawlinson). 혹은 '네게 주어진 것'(Hupfeld)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짓누르던 '염려' 혹은 '근심'을 가리킨다(Calvin, C. B. Moll, NIV).
너를 붙드시고 - 여기서 '붙드시고'(* , 쿨)는 원래 '기르다' 혹은 '먹을 것을 주다'의 뜻(창 47:12;50:21)으로서, 주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55:23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 '파멸'(* , 솨하트)은 '부패' 혹은 '멸망'(렘 13:9)의 뜻이며, '파멸의 웅덩이'는 사람의 시체가 부패하는 '무덤'을 뜻한다(Rawlinson, Calvin). 그렇다고 한다면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속이는 자들 - 아히도벧이 다윗에게 겉으로는 유화적(宥和的)이었으면서도 속으로는 살의를 품고 모반 음모를 꾸몄던 사실(21절)과 관계 있다.
저희 날이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 이것은 아히도벧 일당이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할 것을 가리킨다. 사실 아히도벧은 자살하였으며(삼하 17 23), 압살롬은 요압의 손에 의해서 살해되었다(삼하 18:14, 15).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 히브리 원문에만 있는 본 문구 초두의 '웨'(* )는 '그러나'로 번역된다(Weiser, NIV). 여기서 다윗이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악인들에게는 공의의 심판을 내려주실 것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다(Calvin).
절망으로부터 불평을 거쳐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감
정의 변화 과정을 선명하게 싣고 있는 본시는 장르상 비탄시에 속한다. 이 시의 자에
대해서 혹자는 예레미야라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B.C. 7세기경의 무명의 인물이
라고도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표제문에 기록된 대로 다윗의 저작으로 보는 데 이의
(異意)가 없다.
이러한 본시에서 다윗은 먼저 자신이 당한 어려움을 인하여 슬퍼하면 그거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구한다(1-8절). 그리고 의인의 고난과는 대조적으로 악인들의 득세하는
현실로 인하여 탄식한다(9-14절). 또한 마지막으로 다윗은 현실적 슬픔 가운에서도 하
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응답할 것으로 확신한다(15-23절). 특히 이 시편에서 다윗이 가
장 절친했던 자들로부터 반역을 당하는 쓰라린 현실을 비탄조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
서, 이는 열 두 제자중 하나였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던 사실을
연상시킨다(마 26:47-50).
본 시편의 제작 배경이기도 한, 압살롬의 반역은 B.C.979년경에 발발(勃發)했다. 이
는 다윗의 등극 32년이자 그의 사망 9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반역의 준비는 수
년전부터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압살롬은 자기 주변에 용사들이 많이 모아들였으
며, 자신이 직접 백성들의(頌辭)를 담당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
는 일에 주력하였다. 게대가 당시의 최고 모사(謀事) 아히도벧을 포섭함으로써, 민심
이 다윗을 떠나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삼하 15:12). 다윗은 압살롬이
자신에 대한 반역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러다가 반도(返徒)들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오기 직전, 백성들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간
사실을 알고 난 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삼하 15:13, 14). 참으로
다윗에게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읊어진 본시는 탄식의
시(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마냥 슬픔에만 젖어 있지 않다. 그는 하
나님께 자신의 안타까운 형편을 토로하고 구원을 간구하는 중에, 하나님의 공의를 새
삼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다윗은 자신이 구원될 뿐만 아니라 악인의 무리들
은 멸망하고 말 것임을 믿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항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 본문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상고해 보고자 한다.
1. 환난으로 인한 비탄(55:1-8)
여기서는 다윗이 극한의 환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호소하는 말로 본시를 시작한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크신 능력을 체
험적으로 깨달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다윗은 사실상 산전 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신앙의 용사였다. 그러나 당시 다윗이 겪어야 햇던 고난은 전례없이 혹심한
것이었다. 더구나 다윗에게 반기를 든 주동 인물은 혈육인 아들과 가장 신임했던 측근
중의 한 사람인 아히도벧이었다는 점에서, 다윗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그러므
로 다윗이 자신의 처지를 먼저 아뢰기도 전에 황급히 구원의 손길을 갈구하는 외침으
로 본시를 시작했던 심경은 익히 짐작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압살롬의 휘하(麾下)에 있는 반도들은 왕궁과 가까운 곳까지 진출해 있었다.
피신해야 되지만,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적었던 상황이었다. 사마의 그림자가 다윗의
목전에 드리워져 있었으며, 이제 막 그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반도들의 함성이 커질
수록, 다윗에게 죽음의 공포는 가중되어 갔다. 배신감과 공포로 뒤엉킨 다윗의 자의식
(自意識)은 그토록 암담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했다. 이러한 심정
이 6, 7절에서 멀리 날아가는 비둘기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지만, 이는 오히려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위기에 몰린 자신의 이루어지기 힘든 소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
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으로 다윗에게는 도피로가 끊긴 상태였다. 그
렇다고 해서 낙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로 인한 심
리적 고통을 낱낱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물론,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와 심경
(心境)을 아뢰지 않더라고, 하나님은 본인 이상으로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가 구체적인 문제를 놓고 당신에게 문제의 해결을 간구하러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
이다. 다윗은 비록 육순이 넘는 노년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에게 매달리듯 자신의 모든 어려움을 아뢰며 그것의 해결을 위한(强請)을 하였던 것이
다.
여기서 우리는 확고한 신앙의 소유자일지라도 환난을 만났을 때 잠깐 두려워하며 염
려할 수 있으나(벧전 1:6) 끝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빈 손 들고 나
와 모든 것을 아뢸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대상 16:11).
2. 악인의 득세로 인한 불평과 탄식(55:9-14)
본문은 다윗이 악인들, 특히 다윗을 배반한 자들이 득세한 일로 슬퍼 탄식하는 내용
이다. 당시 압살롬은 헤브론을 근거지로 하여(삼하 15:7, 8) 왕위 찬탈을 위한 자신의
모의를 점진적으로 진행시키고 있었다. 비록 그가 헤브론에 머물고 있기는 하였지만,
사전 공작(工作)에 따라(삼하 15:1-6) 예루살렘에도 그의 추종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헤브론의 압살롬으로부터 지령을 받아가면서 예루살렘에서 다윗을 축출키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소가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가 가장
분명하게 구현되어져야 하는 구별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 일당은 백성
들을 다윗에게 멀어지도록 유도할 뿐만 아니라 다윗을 해할 사악한 모의를 하는 등,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피배린내 나는 살륙의 현장으로 만들어 가려고 했다.
한편 다윗의 슬픔과 탄식은 압살롬이 반역을 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
못지않게 다윗을 슬프게 한 것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모사(謀事)였던 아히도벧의 배
신이었다. 다윗과 아히도벧은 종교적 제의(祭儀)에도 함께 참석할 만큼 밀접한 사이였
다(14절). 그는 오래도록 다윗을 위해 수많은 책략을 짜내었고 그래서 다윗으로부터
큰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다윗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아히도벧만은 그렇지 아니할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아히도벧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
했음을 들은 다윗은,쥴리어스 시어저가 자신을 배반하여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브루투스를 향하여 '브루투스, 너 마저도'(Et,tu,Brute)라고 했던 것처럼, 자신도 모
르게 '아히도벧 너 마저도'라고 절규하였을 것이다. 사실 자신의 신뢰 대상이던, 그리
고 자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경우, 그 슬픔의 정
도는 가히 가늠하기 힘들다. 그래서 다윗은 탄식하며 가슴을 쳤을 것이며 세상인심이
지극히 가변적(可變的)이며 오직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만 변함이 없으신 분임
을 다시 한번 뼈아프게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인간
은 사랑할 대상이되 의지할 대상이 되기는 힘들며(요2:24;딤후4:10), 궁극적 의지처
는 오직 민약(民約)에 신실하신 하나님뿐이심을 깨달을 수 있다(히13:8).
3.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함(55: 15-23)
여기서 다윗은 악인들은 결국 그들의 사악성 때문에 멸망할 것이며, 의인들은 그들의
기도대로 구원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있께 토로한다. 비록 악인들은 한때 득세하여
기승을 부리며 온갖 강포를 행하면서, 자신들에게는 패배란 없다고 장담하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경건한 자들의 처음 기대와는 달리 악(惡)의 세력
은 확장되어졌을 것이다. 현실적인 판단으로는 다윗이 멸망당하고 압살롬은 흥기(興
起)할 듯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대하며 그분께 매어
달리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다윗은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는 않았
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의 구원이 전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도리어 압살롬의 칼에 언제 목숨을 잃게 될
지도 모르는 위경 속에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료시제로 표현하였다
(18절).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문제를 간절히 아뢰기만 하면,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22절), 무모하리만큼 자신의 밝은 미래를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다윗에게 이러한 믿음과 예언적 전망이 없었다면,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 날 도리가 없었을 것이며, 자포 자기와 낙심끝에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려고 소극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끝까지 낙심치 않았다. 반면 압살롬과 아히도벧은 초반의 기세와는 달리,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모두 요절(夭折)하고 만 것이다(삼하 17:23;18:14, 15).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1) 말씀에 근거한 확신에 찬 기도라야 하나님의 응답에 이를수 있으며(막 11:23, 24), (2) 신자들은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해서도 그것으로 인하여 실족해서도 안 됨(73:2, 3)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