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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옛날에 행하신 일 - 이에 대한 히브리 원어는 '파알 파알타 비메이헴'(* )으로 직역하면 '그들의 날들에 당신이 행하셨던 그 일'이다. 여기서 '그 얼'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알'인데 이 말은 강조형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이와 동일한 용어가 합 1:5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용어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광야 여정의 인도 그리고 가나안 정착 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를 모두 묶어 나타내는 집합 명사로 볼 수 있다.
우리에개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 사역을 자손 대대로 전승(傳承)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부모들에게 맡겨졌던 중대한 의무였음을 간접적으로 엿보게 하는 구절이다(출 10:2 ; 12:26 ; 13:8, 14 ; 신 6:20 ; 삿 6:13).

=====44:2
열조를 심으시며 - 물론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원주민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백성을 정착케 하셨던 사실을 가리킨다. 즉, 이말은 하나님꺼서 이스라엘을 위해 어느 한지역을 정하시고 그곳에 정착케 하시되 영원히 정착케 하심을 가리킬 때 쓰이는 표현이다(Barens). 한편, 포도나무를 심고 자라게 하는 모습으로 부터 그 이미지를 따온 이 표현은 출 15:17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그 이후 삼하 7:10 ; 시 80:8 렘 24:6 ; 32:41 ; 암 9:15등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본절에서 '쫓으시고'와 '심으시고'는 시분위기상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낸다.

=====44:3
저희 팔에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 자신의 팔이 그들에게 승리를 주지 않았다'이다. 그런데 시편 전체적으로 볼 때 여기의 '승리'(* , 야솨)는 대체적으로 '구원', '도움'을 의미하는 것 같다(33:17).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소테리아'( )인데 벧전 1:5의 경우를 보아도 이 용어를 '구원' 혹은 '승리'로 번역하는 일은 가능하다. 따라서 이어지는 '야곱에게 구원'을 '야곱에게 승리'로 번역하는 일은 무리가 없는 듯하다(53:6).
주의 오른손과 팔 - 은 능력, 힘을 얼굴의 빛 - 은 하나님의 자비의 현시(顯示)를 각각 상징한다.

=====44: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 직역하면 '당신은 그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문맥을 중시하여 본 호칭을 가리키는 의미를 정리하면 '당신은 열조의 때에 간섭하셨던 그 하나님과 동일한 왕, 동일한 하나님으로 당신의 백성의 통치자인. 그리고 나의 왕이신 바로 그분'이다. 특히 여기 '왕'이란 호칭을 저자가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저자의 강한 염원을 반영한다. 한편, 이 표현은 특히 '즉위시'로 불리우는 시편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기도하다(24: 7 ; 68:24 ; 93:1).
구원을 베푸소서 - (* , 차웨 예슈오트). 문자적인 뜻은 '구원을 명령하소서'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왕적 권위를 인정하는 이 소원적 표현 속에는 땅 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므로 이제 하나님이 한마디 명령만 내리면 저자 자신이 구원받는 일은 문제도 아니라는 기대가 담겨져 있다(Barnes).

=====44:5
대적을 누르고 - '누르고'(* , 차레이누)의 문자적인 뜻은 '우리가 들이받다'이다. 이것은 뿔을 가진 동물이 그 상대를 듸이받는 모습에서 따온 표현법으로구약 여러 곳에서 그 예들을 찾을 수 있겠으나 특별히 신33:17을 연상시키고 있다. 한편, 우가릿 사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은유가 등장하는데 바알과 모트 붙이라는 이방신들이 들소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들이다.
주의 이름으로 - '이름'은 '하나님 자신'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20:1). 유사 용례를 삼상 17:45 ; 대하 14:11 등에서 발견할수 있다(Anderson). 따라서 본 구절은 '당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께서 우리의 도움자가 되심니이다'로 풀어 볼 수 있겠다.
밟으리이다 - 원어는 '카페이누'(* )로서 복적으로 밟는 동작을 의미하는 제1부정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즉, 이 용어는 들소와 같은 거친 짐승이 그 희생물을 계속적으로 밟아대는 모습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한편, 여기서는 밟히는 희생물의 철저한 멸마을 읽을 수 있다(7:5 ; 18:40 ; 12 ; 사 10:6 ; 단 7:23).

=====44:6
활 - 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소금물에 담근 목재나 뿔로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의 활은 소위 청동 활을 가리키는데 청동 활은 시적인 분위기에 적합한 표현이다(18:34 :40 ; 욥 40:12 ; 사 10:6 ; 단 7:23). 활의 경우 일반적으로 군주 시대에 사용되었고 활과 칼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무기류로 간주되고 있다(창 48:22).
칼 - 은 가장 보편적인 이스라엘의 무기였는데 히브리 세계에서 이 용어는 일종의 전쟁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되었다(렘 14:15 ; 겔 7:15 ; 33:6). 칼은 대체적으로 청동이나 쇠로 만들었는데 크기나 모양은 다양했다. 가장 전형적인 이스라엘형 칼은 아마도 짧고 양면에 날이 섰었던 것 같다(Anderson). 본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군대의 승리는 일상적으로 쓰였던 이와 같은 무기들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쟁취케 될 것을 밝히고 있다(20:7 ;33:16 ; 60:11).

=====44:7
구원하시고...당케 하셨나이다 - 여기 원어의 시제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즉 저자는 선조들의 위험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과거의 사건을 드러내어, 동일한 민족으로서 유사한 역경을 겪고 있는 자신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해 달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것이다.

=====44:8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 즉 우리가 찬양한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업적이아니라 유일무이한 찬양의 대상이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 과거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경험은 그가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했던 근거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 말하자면 하나님 그분께 감사하겠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예배 공동체는 믿음과 소망뿐 아니라 과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감사를 통하여 자신과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나타내어야 한다(34:1).

=====44:9
그러나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아프(* )로서 아주 상반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암시하는 접속사이다. 1-4절까지는 든든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은 승리의 과거를 묘사한 반면 본절부터 4절까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진 비극적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버려...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 원어상으로 볼때 '버려'는 이미 완성된 동작을 의미하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 반면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는 완성된 동작의 결과를 의미하는 현재 혹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들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고 그냥 계시거나 나아가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소리를 발하셨기 때문에(과거 동작) 땅이 녹게 되었다(결과)'라는 표현과 유사하다(46:6). 그리고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는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관이 되셨던 것처럼(삿 4:14 ; 삼하 5:24), 또한 사막에서 많은 이스라엘 무리를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고백이다. 본절은 거의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60:10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편 자체도 많은 점에 있어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Pero-wen).

=====44:10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 승리를 주는 대신 대적에게 패배케 하셨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 이 표현은 대적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마음껏 이스라엘 성 안에있는 모든 것을 탈취하고 그들의 본토로 옮겨갔던 것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느부갓네살은 유다가 멸망한 때(B.D. 568년) 예루살렘에 침입하여 성전의 기명을 비롯한 유다의 주요한 물품들을 탈취해서 그의 본국으로 가져갔었다(대하 36:7).

=====44:11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 직역하면 '당신은 우리를 식사를 위한 양처럼 만셨다'이다. 양이 식사용이 된다는 것은 양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죽음에 직면한 포로 시대의 이스라엘의 운명을 엿볼 수 있다.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벨론 포로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본다(J. A. Alexander, A. A. Anderson).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본절과 다음절을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시대 때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애굽으로부터 폭풍처럼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삼일 동안사만 명의 유대인들을 살륙하고, 포로로 잡은 유대인 중 많은 수를 노예로 팔아넘겼던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보기도 한다(De Wette).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지만 그 어느 시대의 그 어느 사건이었든간에 여기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의 손에 잠시 넘기기로 작심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열방중에 피난민, 포로 혹은 도망병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왕하 24:14 ; 렘 29:1 ; 암 1:6-9).

=====44:12
주의 백성을...파심이여 - 이것은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화법 중의 하나로(신 32:30 ; 2:14 ; 3:8 ; 4:2, 9 ; 10:7 삼상 12:9) 대적들의 노예가 되어 그 소유물까지도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 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의 운명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러한 비극적 결과의 이유는 대체적으로 그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이었다.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은 그들의 값으로 증가 되지않았다'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을 비롯한 많은 역본들이 첨가하고 있는 '이익' 혹은 '부'(영역본의 대부분) 등은 원문적이라 할 수 없으나 문맥을 볼 때 저자가 이 용어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Barnes). 그러므로 직역적 의미는 그 백성을 대적의 손에 맡기셔서 하나님이 얻은 소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동사 '얻다'(증가하다)는 '혼'(* )으로 잠 22:16과 전2:9에서와 동일하게 사역(使役)절대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본 구절은 하나님에 대해 거의 반박하는 듯한 불평조의 문장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세상 틔치자는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하여 백성을 가축처럼 팔아버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상술로 부자가 되시려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편 저자가 재앙의 원인을 하나님의 탓 으로 돌리는 듯한 이 표현 속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자신들을 그토록 두들겨 패고 상처를 주고 갈라 놓았었던 바로 그 손길로부터 치유를 추구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 시편 저자의 확신을 읽어내야만 한다(Calvin).

=====44:13
둘러 있는 자 - (* , 리스비보테이누). 문자적인 뜻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들'이다(79:4). 이들은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과 같이 지형적으로 이스라엘의 주변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스라엘을 조롱하였던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들이다. 후기 선지자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이 원수들이 승리를 거두고 비웃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곤 하였다(Perowne). 뿐만아니라 선지자들은 이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구원받는 것도 싫어하였다. 그래서 앞에 열거한 열방의 이름들 중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의 원수의 도성인 니느웨로 가서 그곳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도록 명령 받았던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싫어서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간 바 있다(욘 1, 4장).

=====44:14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말거리'는 '마솰'(* )로 비유' 혹은 '유사한 말', '격언', '금언' 특히 '풍자적이고 조소적인 노래'등을 뜻한다. 결국 이 표현은 대적들이 이스라엘의 멸망, 그에 따른 디아스포라(diaspora)등을 보고 조롱하며 불렀던 것을 가리키는 표현임이 확실하다(민 21:27 ; 신 28:37). 한편 대적들이 불렀던 노래 가사 내용은 이스라엘이 신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 재앙, 심판, 불행, 실패의 표본이되었다는 것 등이었을 것이다(Barnes).
머리 흔듦 - 웃음, 조롱거리를 묘사하는 문자적 표현이다. 이것은 비난, 조롱의 모습으로서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법이다(22:7 ; 64:8 ; 109:25 ; 렘 18:16 ; 애 2:15).

=====44: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 직역하면 '하루 내내 나의 앞에 혼돈이 있다'이다. 여기 혼돈이라는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은 가시적인 참화의 현장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이곳저곳에 즐비한 시신들, 파괴되고 불타버린 건물들, 그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통곡소리들과 같은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 어느 곳도 참화를 겪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려도 비참의 현장을 피할 수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러한 참화의 현장을 '나의 것'이라고 표현하여, 전쟁으로 말미암은 민족적 재앙을 자신의 재앙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 슬픔의 마음을 표하고 있다(Barnes). 이는 저자가 단순히 개인적인 자신의 고통 때문에 호소하며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슬퍼하는 진정한 신앙인임을 알 수 있다(느 1:4 ; 단 10:2,3).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 것이다(* ,보쉐트 파나이 키사트니). 이를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거나 '나의 얼굴의 수치가 나를 덮으니'로 번역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좀더 분명하게 본 표현의 강조점을 드러내고 있는 70인역과 대다수의 역본들을 중시할 때, 후자의 번역을 취함이 바람직하다.

=====44:16
후욕하는 - '후욕' 은 '가프다'(* )로 '말로 난도질하다','헐뜯다','불경스런 말을 하다'인데 뒤에 언급된 '소리'까지 붙으면 좀더 분명히 '비꼬는 말, 비난, 조롱하는 말' 을 뜻하나다. 이 용어는 인간과 하나님에 적용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이것은 비난, 조롱을 뜻하고 후자의 경우 신성 모독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그 비난의 대상이 백성들뿐 아니라 하나님 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자와 후자를 포함하는 양쪽에다 사실을 고려할 때 전자와 후자를 포함하는 양쪽에다 적용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동사로 사용되고 있는 각각의 예는 자신이 하나님을 신성모독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었던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적용하고있는 왕하 19:22 ; 사 37:23에서찾아볼 수 있다.
원수와 보수자 - 신 32:35에 의하면 복수와 보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그러한 기능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붙여주셨던 대적들에 의해 찬탈되어졌음을 볼 수 있다.

=====44:17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 아마도 과거와 현재에 적용되는 표현인 것 같다. 온갖 불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뜻이다(119:16).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선조들에게 주셨었고 그들이 그 선조들에게서 전수받았던 명령들에 대해 불신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언약이 명시하고 있는 의무 조항들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55:20). 이것은 단지, 언약의 원리 들로부터의 보편적인 이탈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일뿐이다. 즉, 이것은 전 국가에 임했던 끔찍하고 독특한 불행 및 재앙이라는 실존적 상황과 민족적 슬픔, 혹은 국가적 종교 상황의 원인이 될만큼 언약을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 표현이다.

=====44:18
우리 마음이 퇴축(退縮)지 아니하고 - 문자적인 뜻은 '우리의 마음은 돌이키지 않고'이다. 즉 자신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을 배교하지 않았다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당시 전 국가적인 경향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앞서 언급된 범 국가적인 재난의 원인이 될만큼 그러한 악이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경향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국민 개중에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부류들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지배적인 경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Barnes).

=====44:19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 하시고(* , 디키타누빔콤 타님). 직역하면 '당신이 시랑(혹은 용)의 처소에서 우리를 밟으셨다'이다. 앞절과 연결시켜서 해석해 보면 자신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등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은 무자비하게 짓밟힐 만큼 그에 해당하는 배교나 불충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본 표현의 강조점이다. 여기에서 시랑으로 번역된 '타님'은 '커다란 물고기', '바다 괴물', '뱀', '용', '악어', 혹은 '(여우와 이리의 중간형인) 재칼' 등을 의미한다(사 13:22). 그러나 이 '타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동물이냐를 결정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동물들의 서식지로 볼 만큼의 황량하고 폐허가 된 장소, 즉 당시의 국가적인 상황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이유인즉 '재칼(혹은 용)의 처소'라는 표현은폐허, 황량함을 암시하는 구약의 일상적 표현이기 때문이다(사 34:13 ; 35:7 ; 렘 9:11 ; 10:22 ; 49:33 ; 51:37).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 여기 '사망의 그늘'은 '찰마웨트'(* )로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거나 '진한 어두움'으로 의역할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가 바람직한 번역으로 보이는데 그 까닭은 히브리어에서 '사망의 그늘'과 같은 복합 명사성은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Anderson). 이제 진한 어두움으로 덮는다는 것은 큰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나타내나 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고통과 절망을 나타내는 비유법의 일종이다(107:10, 14). 따라서 이와 같은 시련의 경험을 하고 있는자는 '돌아오지 못할 땅'(욥 10:21)에 가까이 있거나 이미 죽음의 권세 안에 들어가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의 '깊은 어둠이 덮었다'는 표현을 통해서 당시 저자는 거의 삶을 포기할 정도의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44:20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 하반절에 암시되어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이름을잊어버리는 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거역하는 것을 말한다. 예배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63:4 ; 79:6 ; 창 4:26). 손을 ...폈더면 - 예배자가 그 손을 신을 향하여(88:9 ; 141:2 ; 143:6 ; 출 9:29, 33 ; 스 9:5 ; 사 1:15), 성전을 향하여(28:2 ; 왕상 8:38), 혹은 하늘을 향하여(왕상 8:22) 펴는 일은 기도 행위로 잘 알려진 자세이다. 이제 저자는 자신들이 이방신에게 예배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44:21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찾아내지 않았겠습니까?'이다. 하나님의 전지(全知)성을 향한 엄숙한 이 호소는 국가적 순결에 대한 각자의 정직한 확신을 보여준다. 현편, 멸망적 재앙을 받을 정도로 국가가 비교적 죄의 성향을 띄고 있지는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저자로서는 재앙의 원인을 또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했다.

=====44:22
종일 - (* , 콜 하욤). 문자적인 뜻은 '모든 하루(날)'이다. 이것은 재앙이 한번의 강타 형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 왔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지금도 눈으로 목격하고 있음을 뜻한다(Anderson).
주을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 본 구절은 하나님의 교회가 항상 박해받는 교회였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는 롬 8:36에서 바울에 의해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어조(語調)와 사도 바울의 어조는 명백한 차이를 드러낸다. 전자는 핍박을 이해할수 없었기 때문에 이유없이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그의 백성들 위에 임하고 있다고 믿었던 반면 후자는 그 박해를 기뻐할 뿐 아니라 또한 감격스럽게 외치기까지 하는 것이다.

=====44:23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의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비활동적인 듯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78:65). 즉 이는 수수께끼와 같은 위기 속에서 외치는 당황에 찬 저자의 절규일 것이다.

=====44:24
얼굴을 가리우시고 - 문자적인 뜻은'얼굴을 숨기다'이다. 성경의 표현 가운데서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그 상대를 무시 한다거나(13:1 ; 22:24 ; 88:14), 불쾌함을 표시한다거나(사 54:8), 징벌을 내리는 것(신 31:17, 18:32:20 ; 욥 13:24 ; 사 57:17)을 뜻한다. 그러나 20, 21절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을 무시했다거나 그분을 불쾌하게 만들 어떤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편 기자는 당혹감 속에서 이 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 같다.

=====44:25
진토에 구푸리고...땅에 붙었나이다 - 본절을 현재 국가적 시련과 연관시켜 해석해야 함이 분명한데 세부적인 의미는 명백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예배자가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겸손의 태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흙먼지가 많은 땅바닥에 엎드렸던 사실(신 9:18 ; 대하 20:18) 과 큰 슬픔을 당하였을 때 먼지와 재를 무릅쓰고 땅위에 주저앉던 당시의 관습을 고려할 때(119:25) 본 구절이 묘사하는 바는 처절한 재앙을 당하여 큰 슬픔 가운데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시편 기자의 태도인 것이 분명하다. 한편이 의식적인 자세를 금식일의 전형적인 기도 자세와 연결시키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는 듯하다(수 7:6 ; 사 47:1 ; 렘 6:26 ; 14:2).

=====44:26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 원어를 직역하면 '당신의 인자하심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을 드러내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뜻이다. 즉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인자하심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성의 현시(顯示)는 인간뿐 아니라 우주의 안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것은 죄인인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가 호소하고 소망을 아뢸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Barnes).

 

 

 

  참담한 전패(戰敗)에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한 호소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
는 본시는 (1) 과거 역사에 대한 회고와 감사를 언급한 부분(1-8절), (2)  이스라엘의
패배에 대한 억울함과 언약의 신실성을 강조한 부분(9-22절), (3) 궁극적 구원에 대해
간구하는 부분(23-26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나, 사실상 정확히  결
정하기에는 불투명하다. 다만 우리는 이스랑엘이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
한 후 핍박과 모욕을 받고 있던 시기에, 민족적 설움을 가슴에 안고 괴로워하던  어느
경건한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며 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시의 유형은 별 다른 이견(異見)없이 '국가적  비탄시'(national  lament)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비탄시들은 서두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후, 자신의 비
탄스런 상황을 충분히 표현한 다음 불평에서 돌이켜 주님께 대한 그의 완전한  확신을
선언하고, 찬양으로 그 끝을 맺는다. 그러나 본시는 이와 달리 먼저 하나님께서  과거
에 행하신 구원에 대해 기억하고 감사한 후,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탄원하고  나
서, 하나님께 대한 확신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변형은 아마도 과거의 구원을  상기
시키면서 현재의 고통을 더욱 생생하고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로 추정된
다.
  이와같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던 구원 사역을  찬양하며,
그것을 근거로 하여 앞으로의 인도하심을 간청하였다. 왜냐하면 현재 이스라엘은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지 않고 생활 하고 있으나, 당면하 고통은 쉽사리 해
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무고함을 주장하면서 하
나님의 종국적 구원이 반드시 임할 것임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을
'왕'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의 전 영역에서 시행될  것을  믿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의사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적 신실성
에 근거한 실제적 확신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현재적 고통의 부당성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표현되고 잇
는 본시의 구성과 내용을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과거에의 회상(44:1-8)
  여기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감사
한다. 이렇게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의 승리의 궁극적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을
보여주는 본문은 (1) 구원의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부분(1-3절), (2)  구원의  현재적
가능성을 확신한 부분(4-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수난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즉각적으로흥분부터 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상기한다. 하나님은 과거 그들의    선조들에게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번성하도록 구원을 베푸셨다(1, 2절). 시인은 이러한 승리가 결코 이
스라엘의 수효나 전쟁 무기, 전략의 우수성으로부터 오지 않았고 오직 이스라엘을  긍
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대조법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3
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승리할 수 있엇지만,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이
기려고 할 때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약소 민족으로서 강대
한 국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全)  과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시어 주권적 은혜를 베푸신 연고로  가능하였다(신  7:7,
8;9:5, 6). 그러므로 시인은 날마다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자랑
하고 그 이름을 찬송할 수밖에 없다고 노래한다(7, 8절). 시인은 민족이 직면하고  있
는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은총에 가득 찬 과거를 회고적으로 바라보던 시인은, 이제 신념에 찬 기도로 나아가
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으므로 왕다운 권위와 힘으로 이스라
엘을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특별히 '종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8, 15, 22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는 시대를 막론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에
게 선(善)을 베푸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세대난 짧은 기
간동안만 형통하게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꾸준히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그
러므로 시인은 역사를 통하여 볼 때 날마다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
을 자랑하고 그 이름을 찬송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7, 8절).

  2. 현실의 고통에 대한 호소(44:9-16)
  여기선느 이스라엘의 굴욕적 패배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한다. 과거의  승리에  대한
감사와 확신에 이어지는 제2연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대조적인 내용이 전개되는데,  (1)
이스라엘의 비참한 패배(9-12절), (2) 원수들의 조롱(13, 14절), (3)  개인의  수치심
(15, 1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시인은 분위기를 전환하여 현재 직멸고  잇
는 불행과 극심한 재난을 슬퍼하며 하소연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항상 베풀어  주시
던 호의를 중단하셨을 뿐 아니라 공공연히 자기 백성을 향하여 반대하시고 대적하신다
고 지적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항변은 앞의 내용과 첨예하게 대조를 이루면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훨씬 충격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다는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였으므로(마 10:29) 하나님의  허
락이 없으면 결코 이스라엘의 패배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었던    것이다(1127:1;신
32:20).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시고 패배하도록 만드셨을까?
역사적으로 볼 때 언제나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던 주님이 어찌하여 원수의 편
에서서 이스라엘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
에 나아와 이스라엘의 비팜한 실상을 호소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항변은 실제로 하나님께 대한 원망자이나 힐난이  아
님을 기억해야 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불의함에 대해 불평하듯이 말하지만 이것은  사
실상 이스라엘의 패전(敗戰)으로 인해 당하는 비참한 상태를 애석히 여기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시인은 하나님과 변론하여 하나님의 부당성을 입증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으며, 다만 이스라엘의 백성의 비참한 처지를 애통해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을 유발시키기 위하여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을  반복적
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래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원한을 공공연하게 노골적으로
발설하였던 열방은, 이스라엘의 조롱과 수치를 기분 좋게 비웃고 있다. 원수들은 이스
라엘의 실패를 웃음거리로 삼았으며 불경스러운 말로 모욕했다. 시인은 이러한 괴로움
이 종일 지속되었다고 말한다(15절). 원수들은 쉬지 않고 이스라엘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으며, 가혹한 욕설과 비난을 통하여 그들이 당한 상처를 배가(倍加)시켰다.  시인
은 그들이 방자하고 잔인하게 이스라엘의 명예를 훼손시켜 열방의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처절한 절규를 외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은 단지 패배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근저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이 모든 상황
을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3. 결백을 주장함(44:17-22)
  본문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자기 결백을 주장한다. 당면한 이스라엘의 고통에 대해
이스라엘의 무고함을 옹호하는 제 3연은 (1) 이스라엘의 신실성 단언(17, 18절),  (2)
이스라엘의 상해(19절), (3)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20, 21절), (4) 이스라엘의 거
룩한 재난(2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시인은 이스라엘이 열방에 의해 패배당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엿으며 이방 신(神)을 좇아  헤매지도  않았다(17,
18절). 그들은 원수들의 간교한 타협책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폭력의 위협 앞에서도 굴
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담대하게  기꺼이  핍박을  당했다(22
절). 시인은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이스라엘의 무죄함을 알고 계신다고 말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이유로 이스라엘을 나무라시지는 않았다(20, 21절). 그러므
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패배하도록 방치한 사실에 대해 매우 부당한 조처라
고 강변(强辯)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순결하여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시인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 성경은 모든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
에 이르지 못하였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14:1;롬 3:9-20). 그러므로
시인이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결백은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
만 하나님께 대해 일관성 있는 신앙을 견지햇으며, 더욱이 그코록 큰  재난을  당해야
할 만한 특별한 범죄에 빠지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각종 재
난을 당하여서도 참되신 하나님만을 동일하게 신뢰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노아
에 대해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말한 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창 6:9).
  이러한 시인의 변론은 욥기를 민족적 거울에 투영한 작품인 듯한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서 욥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을, 시인이 민족적  하소연으로    확장시킨
듯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교도들이 이스라엘보다 우위를 가질  많한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에게는 하나님의 부당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오로
지 하나님의 백성의 비참한 실상을 제시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기 위해 변증적으
로 기도하는 것이다. 사실 성도의 고난은 단순한 형벌과는 다르다. 고난은 성도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더 큰 축복을 위한 연단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창  47:7-9;롬
8:18). 그러므로 현재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은 잘못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이스라엘
을 훈련시키고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데헤 시
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인은 고통의 기간이 지속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때
가 되면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기도하였던 것이다(26절).
  사실 현재 시인이 처해 있는 고난의 상황은 단지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
라 모든 교회의 상황으로 확장할 수 있다(롬 8:36).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종류
와 정도는 다르겠지만 동일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골 1:24;딤후 1:8).  그리스
도께서도 교회의 구속자로 오셨지만 편안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시지 않고  십자가
의 고통을 짊어지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승귀하시
기 전까지 많은 인간적 고통을 체험하셨다. 주님게서는 이러한 아픔을 모든 성도와 교
회들에게 경험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도록 인도
하신다. 시인은 이러한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이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말한 것이다(22절).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 본 대목에서 시인이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결백에 대한 내용
은 현재 이하는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생각하면서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
는 종국적 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궁극적 승리에의 확신(44:23-26)
  시인은 마지막으로 절망적인 상황하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담긴 기도를 드린다. 시인
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난을 해결해 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또한 비록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햇지만 하나님께
서는 반드시 그들을 구원해 주심을 신뢰한다(26:11). 이러한 시인의 자세는 경건한 신
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마음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꿋꿋하게  하나
님만을 대망(待望)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육신적 생각을 뛰어넌믄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신
뢰를 회복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심한 재난을 다시 한번  한탄하면서도
(24, 25절),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속할 것을 기도하고  있다(26절).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곡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깨소서', '일어나소서'(23절)와
같은 신인 동형론적(anthropomorphric)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불평과
조급에서 나온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절실하게 나타내려는 의도
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인은 원망하는 마음보다 하나님의 인자를  겸손하게    간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참담한  민족적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간구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우리는 민조적 고난에 대해 방관치 말고 연대 의식(連帶意識)을  지녀야  한다.
시인은 '나'와 '우리'리라는 대명사를 자연스럽게 혼용하면서 민족의  운명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다. 우리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공의를 시행할 수 잇도록 기
도하며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마 21:33-41;  계
2:4).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했다. 우리는  하나
님께서 주신 은혜를 상기하면서 현재의 고난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3) 고난은 필히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고통을 허락하신다(창 47:7-9; 롬 5:3,; 약 1:2-4).
  (4) 최악의 상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욥  5:!9;
단3:!7;롬8:35-39).

  *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  본시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이스라엘은 숫자가 많거나 특별한 장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니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값없이 사랑하시고  선택해
주신, 지극히 선하신 뜻에 의해 가능하였다(신 7:7, 8).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도 자신들의 힘과 능력에 의해 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이었다(3
절). 이제 이스라엘의 삶의 근거가 되고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몇 가지로 나
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무조건적이다(엡 1:6;벧전1:2). 이는 인간의 경우와  다른
것으로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오직 '여호와께 사랑하심'(신  7:8)이라
고 설명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고, 오로지  구
속적이고 선택적인 하나님의 사람에 근거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에 대해 그 이유와 조건을 묻기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인자에 대해 올바른 반응을 나
타내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풍성하다(33:5;119:64). 하나님의 인자는 인색치 않고  언
제나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 부르짖는 자에게 후하게 응답하시며(86:5), 노하기를  더
디 하신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반역과 패역의 역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발전되어 왔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풍부한 인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승리의 역사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에  의거한 것이다
  (3)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25:6;100:5;대상  16:34;대하  7:6;스  3:11;렘
33:11).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함없이 인자하시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동일하게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셨다. 때때로 이스라엘은  처참한 패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확신은 신자들이 결코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인 교리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할 때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찬양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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