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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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사슴 - (* , 아얄). 직역하면 '숫사슴'이다(신 12:15 ; 14:5 ; 사 35:6).이 단어는 남성이지만 이곳에서는 통성어(通性語)로서 여성 동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으므로 숫사슴이 아닌 '암사슴'을 뜻한다.
갈급함같이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아라그'(* )는 이곳과, 지독한 가뭄 때하나님을 향하여 '헐떡거리는' 들짐승들을 묘사하는 욜 1:20 에서만 사용되었다. 욜1:20의 문맥을 고려할 때 이 용어는 '찾기에 갈급함같이로 번역하기보다는 '울부짖으며 찾음과같이'로 번역해야 원문의 의미가 살아날 듯싶다(Luther).

=====42:2
생존하시는 하나님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다르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 모든 생명의 근원 및 기초로서 죽은 추상적 존재와는 대조를 이룬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본절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그분의 성소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Calvin), 이러한 견해는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 의하여 더욱 분명한 지지를 받는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 이 같은 구절은 지성소 및 성전에 나아가게 됨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84:7 ; 출 23:17). 그런데 이러한 의미는 흔히 '하나님의 면전에서'와 같은 식으로 표현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대목을 지성소에서의 갈망을 그리고 있는 구절로 보는 근거는 이곳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이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42:3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 이 조소적인 질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대적들의 입술 에서 자주 발견된다(79:10 ;115:2 ; 욜 2:17 ; 미 7:10). 시편 기자의 비탄을 고려할 때 그 대적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그 배후에는, 그의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고, 설령 계시다 하여도 힘이 없거나 그의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라는 우매(愚昧)한 지식이 전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 눈물이...내 음식이 되었도다 - (* ,하이타리 딤아티 레헴). 이를 단어 배열 순서에 따라 직역하면 '눈물이 나의 빵이 되었다'이다. 즉, 시편 기자의 눈물이 그에게 있어서 마치 매일의 식사처럼 날마다 취하는 몫이 되었다는 것이다(80:5 ; 102:9 ; 욥 3:2, Perowne). 그런데 어떤 학자는 이것을 시편 기자가 식사를 하지않고 울기만 했던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본다(Barnes). 물론 심한심적 아픔이 있을 때 식사를 거른 채 눈물만 흘리며 슬퍼할 수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표현이 지니는 강조점은 눈물을 흘렸다는 것뿐만아니라 하나님이 없다는 조롱에 대해서 심한 고통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눈물을 매일의 식사로 취했다는 본 구절을 시편 저자의 심한 비통과 고통의 상태를 과장적으로 묘사하는 이중적 어법의 구절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80:5 ). 한편, 이와 유사한 표현 기법은 우가릿 바알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데 심한 고통 중에 있던 아낫이라는 신이 '울며 앉아서 포도주를 마시듯 눈물을 삼켰다'는 표현이 바로 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방 신화와 성경 기사의 유사점을 통해 성경을 하나의 히브리적 신화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성경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그 당시의 특정한 문화를 중시하시고 그 문화권이 반영된 성경 기사를 쓰도록 허용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성경 기자 동시대의 이방 문화와 성경이 그리고있는 문화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는 특별한 차이가있다. 즉, 이방 문화는 문화 그 자체일 뿐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주권하에 되어진 계시이기 때문이다.


=====42:4
성일(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 '성일을 지키는'은 '호게그'(* )로 문자적인 뜻은'원 안에서 돌다', '성스럽게 행진하다', '춤추다' 등이다. 이것은 뛰고 춤추면서 축제를 지키고 성일을 축하하는 행위을 가리키는 말이다(출 5:1 ; 레 23:41).또한 '무리'(* , 하몬)의 일반적인 의미는 '많은 수의 군중'을 가리키지만특히 열방 혹은 군대와 같이 소란하고 시끄러운'소리를 내는 군중'을 지시하는 말이다(삿 4:7 ; 왕상 8:41 ; 사 13:4 ; 단 11:11-13). 이와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본 구절은 시편 기자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무리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기쁨과 찬송의 소리 - (* ,콜 리나 에토다). 문자적인 뜻은 '큰 노래의 소리와 감사함'이다. 일련의 순례자의 행렬은 모든 음악과 노래를 돕는 수단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표현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삼하 6:5). 한편, 아름다운 순례자 노래의 가사들이 순례 행렬을 위하여 마련된 영감된 시편이 120-134편에 잘 수록되어 있다.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 '이 일'이란 기자가 많은 무리와 함께 과거에 경험하였던,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전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온갖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 예배하고 감사하였던 사실을 가리킨다. 바로 그와 갈은 기억은 낙담 가운데 있던 당시의 시편 기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자신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했던 무리들이 이제는 도리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더구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의 말을 서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시편 기자는 그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류의 추억을 어떤 학자는 '쓰고도 단 추억'이라 부르고 있다(Delitzsch).

=====42:5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 (* , 마흐 티슈토하히). 문자적인 뜻은 '어찌하여 네가 숙이느냐'이다. 그런데 여기의 '숙인다'는 것은 대중 예배 때에 기도하기 위하여 그 자세를 숙이는 것을 가리키나 문맥을 고려할 때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슬픔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심히 우울하고 슬픈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여기서 저자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할 수 있다. 즉 저자는 영과 육, 고등한 본성과 저등한 본성, 즉 신앙으로부터 온 믿음의 마음과 불신의상태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믿음은 인간 본성적 죄악성 때문에 초래된 우울과 어두운 상태의 또 다른 육적인 상태를 꾸짖기 마련이다(Perowne).
불안하여 -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거나 가라앉는 바다의 파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46:3) 시편 기자의 영혼이 성난 파도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요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얼굴의 도우심 - (* , 예슈오트 파나이우). 문자적인 뜻은 '그의 얼굴의 구원들'이다. 여기서'예슈오트'는 그 형태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절대적으로 완벽할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의 값없는 은혜를 베푸심을 나타낼 때 '얼굴의 빛을 비추인다'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여기의 '얼굴'은 바로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4:6 ; 21:6 ; 44:3 ; 89:15). 결국 그 얼굴의 도우심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낙망과슬픔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값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슬픔과 역경으로부터 구원하시되 완벽하게 해내실 것을 확실히 기대하는 저자의 믿음이 담겨져 있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42:6
요단 땅 - 이 언급은 현재 시편 기자가 거하고 있는 장소를 가리키거나 그가 그 장소 밖에 나와서 회상투로 언급하고 있거나 둘 중의하나를 의미할 것이다(Anderson). 그러나 처소격조사 '민'(* )이 '요단 땅'에 부착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전자가 옳은 것 같다. 이 요단땅은 당시 잡목과 빽빽한 숲이 우거진 곳으로 동물들이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롑49:19).
헤르몬 - 정확하게는 '헤르몬 땅'으로 헤 몬 산이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여기 '헤르몬'은 복수형 '헤르모님'(* )으로 되어있는데 그 이유는 헤르몬 산이 몇 개의 정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헤르몬이 언급 된 이유는 이곳이 팔레스타인 북동쪽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요단 근원 동쪽과 맞닿아 있기때문이다.
미살 산 - (* , 메하르 미츠아르). 직역하면 '작은 언덕'이다. 이곳은 커다란 헤르몬 산맥의 어느 작은 곳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시편 기자가 도피 족에 거처로 삼았던 특정한 지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요단 땅으로부터 그리 먼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42:7
주의 폭포 소리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바다 회오리 소리'이다.여기서 '폭포'에 해당하는 '치누르'(* )는 본 용어를 '수구'(水口)로 번역하고 있는 삼하 5:8과 이곳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을 해내기가 어렵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를 대홍수, 폭포, 수로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며 또한 혹자는 하나님의 처소 주위에 있는 두 개의 큰 물줄기라고 번역하기도 한다(Driver). 그러나 바로 앞절에 요단이 나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요단 강물줄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저자가 엄청난 물줄기가 아닌 한낱 작은 강줄기를 바라보면서 대홍수, 폭포, 바다 회오리로 번역이 가능한 용어인 '치누르'를 사용한 것은, 곤경에 처하여 있기 때문에 모든 환경이 자신을 꾸짖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작은 물줄기의 소리'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크게 꾸짖는 큰 소리로 들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물줄기의 근원이나 소속이 주님임을 밝히는 '주의 폭포소리'라는 표현을 미루어 볼 때 당시 저자는 고통을 허락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 (* , 테홈 엘 테홈 코레). 직역하면 '깊음이 깊음을 부르며'이다. 여기에서 '테홈'은 파도, 큰 물덩어리, 홍수 바다등을 의미하는데(36;6 ; 창 7:11 ; 신 8:7 ; 욥 28:14 ;38:16, 30 ; 겔 31:4) '주의 폭포 소리를' 근거로 볼 때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 해변가 바위에 부딪히 는 파도처럼 바위가 많은 요단 강 골짜기에 부딪히며 요란스럽게 내려오는 '요단강의 급류'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바다'의 이미지와 '강'의 이미지와의 조화는 종종 큰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근원인 강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고대 신화에서 간접적인 근거를 찾을 수 있다(Driver). 이 은유는 하반절의 '엄몰하도소이다'를 통해 암시되었듯이 고통과 재해의 묘사인 것 같다. 또한 깊음과 물들은 항상 잠재적 파괴력으로 간주되어 왔음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의 묘사는 아주 적절하다 하겠다(71:20 ; 104:6, Anderson).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낮에게 여호와는 그의 자비를 명령하실 것이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 혹은 은총을 명령하거나 지시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 언급된 '낮'(* ,요맘)이란 용어는 분병히 번성을 암시하기에 본 구절에는 언젠가 번영의 시기가 돌아올 것이라는 저자의 기대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절대 자포자기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기대는 하반절과 같은 결과, 즉 재앙의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본절의 '낮'과 '밤'을 '낮과 밤'이라는 하나의 합성어로 보아, 즉 '항상'으로 해석하여 본절을 하나님이 항상 그의 인애를 보이시리라는 저자의 확신을 나타내 주는 구절로 보기도 한다(DeWette).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려면 하반절의 '찬송하다'나 '기도하다'를 '하나님이 인애를 보이신다'로 해석해야 하는데 이 같은 견해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 상반절에 비추어 볼 때 '심지어 재앙과 슬픔의 어두운 밤에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비록 역경의 때이지만 마음속에 위안이 있고 위안이 감사로 바뀌고 감사가 찬양으로 바뀔 수 있는 근거는과거 하나님이 인애를 베푸셨듯이 미래에도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욥 35:10 ; 행 16:25, Barnes).

=====42:9
내 반석 - 이는 '하나님'과 동격 관계에 있는 명사인데 직접 화법을 시작하는 호격 명사로 볼 수도 있다(나의 반석이시여, 어찌하여...70인역). 이 어는 시편에서 여호와를 가리킬 때만 사용되고 있다(18:2). 그런데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는 이 용어를 본 문맥에서 특별히 사용한 것은 파도와 물결(7절)과 극명한 대비가되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Driver).
어찌하여 - 이것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지금 겪고 있는혼란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 볼수있다(13:2 ; 22:1 ; 77:9).
잊으셨나이까 - 저자는 자신이 마치 하나님으로 부터 잊혀지고 버림을 당한 것과같은 극심한 고통 중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탄식을 내뱉었던 것이다. 이러한 탄식은 시편에서 종종 발견된다. 한편, 22편의 이와 동일한 표현은 메시야적 예언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슬프게 다니나이까 - 여기서 '슬프게'를 가려키는 '코데르' (* )는 '카다르'(* )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용어는 탁류처럼 '흙탕물이 된'(욥 6:16), 더럽고 오염된 의복이나 베옷을 걸치고 '이리저리 다니는'(38:6 ; 욥 5:11 ; 렘 14:2), 햇볕에 그슬린 피부처럼 '더럽고 먼지가 낀듯한 색깔의'(욥 30:28), '검은'(왕상 18:45 ; 렘 4:28 ; 14:2)등을 뜻한다. 이상 의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단어는 내적인 상태가 아닌 외적인 상태, 그것도 굉장히 어둡고, 슬프고, 처량한 모습을 묘사할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슬프게 다닌다'는 본 구절은 고통으로 인한 저자의 외적인 슬픈상태에 대한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 (* , 브레차흐 브아츠모타이). 자세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을 해내기는 힘든 구절인데 여기에서 '칼'에 해당하는 원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그런 뉘앙스를 담은 단어가 전혀 없다) 일차적으로 개역 성경의 번역은 원문적이지 못하다. 개역 성경은 여기 '래차흐'(* )를 '칼'로 번역했는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죽이는', '도륙하는', '산산이 쪼개는', '부셔버리는' 등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구약에서 이곳과 겔 21:22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정확히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겔 21:22에서 '도륙'이란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중시하여 70인역(LXX)은 '멍듦'으로, 벌게이트역(Vul-gate)은 쪼개다'로 루터(Luther) '죽음'으로 각각 이 용어를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에 대한 주요 역본 및 주요 주석가들의 이와 같은 번역을종합하고 이 말뒤에 나오는 '아츠모트'(* )의 뜻이 '뼈들'인 사실을 고려할 때 본 대목의 일차적인 번역은 '나의 뼈들에게 죽을 것같은 상처를 주려는 것 같이'가 무난한 것 같다. 사실 그의 대적들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조롱하듯 물었을 때 시편 기자는 마치 그 뼈가 쪼개져 그 통중으로 인하여 죽을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었다. 그러기에 이 구절에 나타난 저자의 태도는, 자신의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이 상하지 않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준다.

=====42:11
나는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 본절은 5절과 그 내용에 있어서 동일한 것 로 보여지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차이가 있음을알 수 있다. 그 차이가 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5절의 '그 얼굴의 도우심'이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으로 바뀌었고 5절에 없던 '내 하나님'이 내 얼굴을 도우시는 바로 뒤에 첨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으로 살펴볼 때 결국 차이의 핵심은 '내 얼굴'. '내 하나님'이란 표현이 대변하는 바 5절에서 보다 좀더 명백하게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리라는 확신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5절에서 낙망 중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구하시리라는 확신을 일단 피력한 뒤에도 계속해서 낙망하였던 저자는(7-10절)다시 한번 동일한 확신을 본절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본 시는 제2권의 첫번째 시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멀리 떠나 있어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느끼는 비탄과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원래 본 시편은 43편과 비교하여 볼 때, (1) 공통 후렴구가 있고(5,  11절;  43:5),
(2)43편의 표제가 없고, (3) 사상과 언어가 유사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본  시와
43편은 하나의 시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후대 교회의 형편에 따라 둘로  나누어
졌다고 볼 수 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즉, (1) 여호야김이 바벧론에  포
로 잡혀갈 때라는 견해, (2) 히스기야가 이사야로부터 죽음을 선고받은 상태에서 탄원
하고 간구하며 쓴 시라는 견해, (3)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고통받던  때라는
견해 등이 잇다. 그러나 본시의 제목에서 명백하게 고라 자손들이 수집한 시임이 드러
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고라 자손 중에서 성전을 멀리 떠나 여단 북쪽에 머무르면서
성전에서 봉사하던 때를 그리워하며 쓴 시를 알려져 있다.
  고라 자손은 레위인으로서 희막이나 성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였는데(대상  9:17이
하), 이들은 성전의 찬양 대원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절기를 당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여호와께 찬양하였
다. 이러한 성전 봉사의 특권을 누리던 고라 자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인은  하나님
께 예배하는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역(異域)에서 유리(遊離)하는 상황에  처
하게 되었다. 더구나 시인은 악인에 의해 둘러쌓여 있었는데, 그들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았다고 비웃었다. 그가 표현하고 있는 모든 불평과 하소연으로  미루어
볼 때 대단히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음이 분명하다. 시인은 예루살렘 성막에가 합법적으
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성전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며, 악인들에 의
해 조롱받고, 하나님을 능멸하는 비방을 듣는 입장이 되었다(3, 10절). 그러므로 시인
은 자신이 포로처럼 영적으로 버려진 상태에 처해 있음을 자각하고, 비참한    심정으로
본 시편을 쓰게 되었다.
  본 시편의 유형(type) 몇몇 학자들은 '교훈시' 또는 '감사시'라는 견해를  제시하기
도 하지만, '개인적인 비탄시'(individual lament)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시
인은 성전을 멀리 떠나 이역에서 방황하고 잇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성전에서 하
나님을 섬기던 때를 그리워하고 잇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비통한 마
음을 품고 있었으며, 이러한 내면적 아픔 속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적 고백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의 내면적 고통이 섬세하게 표현되고 있는 본시는 후렴구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열망에 관한 내용이다(1-5절). 성전을  멀리  떠나서
더욱 애타게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는 본 대목은 (1)  영
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1, 2절), (2) 원수들의 조롱으로 인한 낙망(3, 4절),  (3)
하나님께 대한 갈망(5절)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증을 목마른 사슴에 비교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을 목마르게 하고 있는 상황은 성전에서 멀리 떠나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
들과 함께 기쁨과 찬송을 드릴 수 없다는 사실과(4절), 주위 사람들의  '네  한나가이
어디 잇느냐'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자신을 조롱하는 말이다(3절). 사실 이러한 조롱은
본서와 예언서에 있어서 항상 가장 아픈 고통의 가시가 된다(79:10;115:2;욜  2:17;미
7:10; 고전 4:9, 13). 결국 시인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주
야(晝夜)로 눈물을 흘리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3절).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침울한 상황에 계속하여 머무르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대조해
가면서 스스로 위안과 용기를 찾기 시작한다. 시인은 하나님과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모습을 상기하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극단적
비방을 들으면서도 시인은 언약의 신실성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밝고도 유쾌했던  과
거를 회상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다듬어 나갔다. 시인은 낙망과  불안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물은 뒤에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것
만이 그 해결책임을 제시한다.
  특별히 본 대목에서 시인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잇는 부분은, 레위  자손이면서
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떠나 있으므로 성전 예배에 참여하여 찬양과 경배를  드리
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성전에 나아가 한나가을 뵈올 수 잇는 날을 학수  고대
하고 있다. 한편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러한 시인의 탄식이 조금 생소하게  느껴
질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있어서 성전 제사는 영적 의미를 예표하는 것
이었기 때문에 진실하고 숭고한 의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종교의 외부적 제도는 매우 중요하다. 신자들이  그
것을 무시하지 않고 정결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들의 영적 의미를 기억하고 지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영적 교제
를 나누기 위해서는 외부적 제도와 형식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전 예식에 참여할 수 없는 입장이 됨으로써 비탄한 지경에 이르게 된 시인의
마음은 결국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가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연결되
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간절한 기대와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있
다.
  둘째, 낙망을 극복한 찬양에 관한 내용이다(6-11절), 원수의 강도 높은 공격과 그에
대한 극복을 묘사하고 본 대목은 (1) 재난으로 인한 의기 소침(6, 7절),  (2)  구원을
위한 기도(8절), (3) 원수의 조롱을 상기함(9, 10절), (4) 하나님께 대한  갈망(11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여기서 지금까지의 자기 방어적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께 모든 것을 맡긴 상태에서 오는 위로를 노래하고 잇다.
  시인은 노도(怒濤)와 같은 삶의 고통으로 인하여 자신의 영혼이 낙망했으며, 하나님
이 자신과 떨어져 잇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의 상채에까지 이르렀다(6,  7절).  처음에
시인은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물을 열망했으나(1절), 이제는 오히려 폭포와 파도
와 물결이 자신의 모든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는 경험을 당한다(7절). 다시  말
해서 시인은 자연의 창조물, 그것도 자신이 갈망의 이미지로 표현했던 물을 보면서 하
나님의 위엄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완전히 지멸시키고자 위협하는 수많은  고통
이 반사된 영상으로 이해되어진다(7절). 이러한 물의 이미지에 대한 극적 전환은 낙망
과 고뇌를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탁월한 표현 수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고통의 상태에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줄 반석이신 하나님을 발
견한다. 그는 현재 하나니으로부터 소외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장차 임할 주님의  인
자를 내다본다(6, 8절). 그리고 자신을 결단코 죽음에서 버려 두시지  않는    생명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인은 구원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면서 고토의 밤이 지나
고 아침이 밝을 것이라는 희망과 용기를 되찾았던 것이다(30:63;44:5;암 9:3, 4).  그
래서 시인은 하나니을 '내 반석'이라고 하면서 강력한 기도를 올림으로써 낙심을 물리
친다. 또 그는 자신에 대한 비바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으나,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
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 같은 시인의 기도는 원수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변호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부각시키면서 하나미의 구원을 호소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후렴구를 반복하면서 자기 방어적 자세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을
신뢰할 것을 다짐하면서 시를 끝맺는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고통의 늪을 지나  훨
씬 더 깊은 찬양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은 단지 앞 구절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과하면서 새롭게 인식한 하나미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찬양
하는 것이다. 사실 시인은 적지(敵地)에서의 고독감과 원수들의 조롱을 들으면서 하나
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이처럼 주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잇어
서 슬픔과 고통은 더욱 하나님을 간절하게 열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시인은 자신
은 자신의영혼을 송두리째 삼켜 버릴 듯한 위협 속에서도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 마 수 있었다. 마음속의 낙망과 불안을 벗어버리고 진심으로    하나님만
을 의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 힘의 원동력은 다름아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이었다. 신앙은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잇다. 메마른 영혼을 윤택하게  하며,
죽어가는 생명을 소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을 행한 믿음을 통하여 극도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찬송의 입술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참된 의식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4절). 시인은 성전에서 찬양하고  경배하
던 일을 사모하며 주야로 눈물을 흘렸다. 우리도 정규적으로 드리는 공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요 4:23, 24)
  (2)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84:10; 창 32:36).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
하기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였다(1절). 이같이 우리도 현재의 세속적 즐거움에 탐닉하지 말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3) 난관에 봉착할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은 성전을 떠나서 원수들의  핍박과 조롱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더 깊은 찬송을 드링    수  잇었다.우리도 난관이 자신을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 교재임을 인식하면서 좌절하지 말고, 그런 난관 속에서도 승리해야 할 것이다(히 1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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