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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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 '어리석은 자'는 다윗이 본시에서 자세히 규명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발'(* )은 그저 지혜가 부족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서 살펴볼 때, 이는 (1) 외면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의로운 자의 생명을 위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 기준 없이 마음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키며, (2)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를 가리킨다(Craigie).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 이 표현은 10:4에서도 언급되었다. 그곳에서는 악인들의 말로 진술되었다. 따라서 본절의 '어리석은 자'는 악인,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부패하고 - 곧 저들의 심령이 부패하여졌다는 말로서(창 6:12;출 32:7;렘 13:7) 영적 생명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소행(所行)이 가증하여 - 무신론 사상의 결과로 저들의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증오의 대상이 될 만큼 타락하였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인격에서 선한 행위가 나올 리 없다. 여기서 언급된 '선'에 대해 혹자는 구체적으로 이웃에 대한 선행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idner). 그러나 본 시편에는 이러한 해석의 근거가 불명확하다. 따라서 본절의 '선'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14:1-7
본 시편과 53편은 내용상 거의 같다. 한편 이 두 시편의 기록 연대의 전후 관계로에 대해서는 53편 주석과 강해를 참조하라.

=====14:2
이 부분은 어리석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다루고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이 세상의 심판자 또는 왕으로서 인생을 살펴보신 것이다(7:6ff.; 11:4). 이는 히브리시의 대표적인 표현 방법인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다.
지각(知覺)이 있어 하나님을 채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여기서 '지각'은 영적인 지각을 가리킨다. 이 지각이 있어야 인간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다. 다윗은 본 구절의 시를 쓸 때, 노아 홍수 때(창 6:1-8)나 소돔과 고모라 당시(창 19:1-29)의 부패상을 상기했을 것으로 짐작되어진다(Kidner)

=====14:3
본절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피신 후 최종적으로 내리신 판단에 대한 진술이다. 인간의 기준에 따르면 본절에 언급된 인간이 성공적이며 권세있고 부요한 자로 판단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정반대의 판단을 내리신다.
다 치우쳤으며 - '치우쳤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 )는 '제 고집대로 행하다', '완고하고 반항적이다'라는 뜻이다(출 32:8). 저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제 고집대로 행한 것이다.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 '없다'는 말(* , 엔)이 두 번 반복되어 이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이다.

=====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 이 의문문에는 동사의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기에 무엇에 대한 무지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앤더슨(Anderson)은 이 무지의 목적어가 임박한 징계와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의무라고 주장하며, 알렉산더(J. A. Alexander)는 그들이 부패하여 하나님과 떨어져 있게 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사실을 본 구절의 목적어로 취급한다. 한편, 이 '무지하뇨'라는 동사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악인들의 무지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속된 반복적 행위였음을 지적하여 준다(Kraus).
내 백성을 먹으면서 - '무지하뇨'란 동사와 마찬가지로 '먹으면서'도 완료형으로 이는 백성들 특히 가련한 자들을 매우 괴롭힌 악인들의 악행이 반복되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이 하나님의 백성을 상품처럼 취급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나(Craigie), 문맥상 그런 암시가 없다. 오히려 본 구절은 떡 먹듯이 백성들에게 악을 행한 것에 대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 이 구절은 앞의 구절과 연결시켜 고찰해야한다. 즉, 그들은 오직 떡 먹듯이 쉽게, 그리고 항상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해 있기에 하나님을 원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14:5
12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 이르러 본시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고 있다. 다윗은 아마도 이 순간에 환상을 보았거나 아니면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 같다(Kraus, Jeremias).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 '거기서'는 본 문맥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혹자는 장소적인 의미로 보아 악인들이 악행하는 '그곳에서'로 해석한다(Rawlinson). 그런가 하면 혹자는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거기서'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그때에'(then)로 해석한다(Delitzsch, Lange). 본래 '거기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쉠'(* )은 시간적인 의미로나 장소적인 의미로나 모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두 해석은 모두 가능하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53:5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世代)에 계심이로다 - 여기서 '의인의 세대'란 어느 한 의로운 자의 한 평생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들 전부를 의미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세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도르'(* )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한 인간의 생존기간을 의미하거나 단순히 한 기간, 또는 시기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 '집단'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TWOT).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는 심판의 형벌을 내리시지만 당신의 모든 백성들(의인의 세대)에게는 자비로 함께 하신다.

=====14: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經營)을 부끄럽게 하나 - 여기서 '경영'이란 악인들의 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의인의 의도나 계획을 의미한다. 악인들은 이러한 의도조차 처음부터 방해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서 '부끄럽게 하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쉬'(* )는 '창피를 주다'라는 뜻이나 그밖에도 '박살내다', '분쇄하다'라는 뜻도 있다. 여기서는 아마도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Kraus).

=====14:7
12편과 같이 탄식으로 시작한 다윗은 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망으로 본시를 마무리 짓는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 '시온'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소극적으로 시온에 앉아계시지 않고 이제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하실 것이다(Craigie).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 여기서 '포로된 것'이란 바벧론 유수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인들에게 억압당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말이다(Calvin). 다윗은 이러한 억압의 상태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주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무신론적 인생관을 소유한 사람들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는  본시는  (1)당시의 부패한 사회상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는 전반부와(1-4절), (2)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통한 의인의 승리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후반부로 (5-7절)  구성되고  있다. 특별히 본시는 현실적으로 드러난 죄악상보다 좀더 심층적으로 악(惡)의 기원과  본질을 해명하는 데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다윗은 본시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를 우매한 자로 지칭하면서  전적으로 부패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필연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무신론에 대한 비판을 언급되고 있는 시편으로는 53편이 있는데 이는 본시와의 후반부에 나타난 미세한 차이점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그래서 두 시편이 내용을 상호 비교하여 검포한 많은 학자들은 후대에 본 시편을 변형하여서 53편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두시를 비교해 볼 때 특이한 점은 하나님의 명칭에 있어서 본시는' 여호와'를 주로 사용하는 데 비해, 53편은 전적으로 '엘로힘'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본시가 이스라엘 내의 부패상에다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암시일 수 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히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 시편의 구조를 볼 때 다윗이 외국인들보다는 국내의 횡포자들고 신실한 자들의 원수들을  의중(意中)에 두고 쓴 것은 분명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무시하고 실제적 무신론자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탄하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섬길 것을 촉구하며 본시를 썼다.
  한편 본시의 장르에 대해서는 모호한 점이 있다. 본시는 여러 가지 형태가 혼합되었기 때문에 비탄적 요소, 찬양적 요소, 지혜적 요소등이 모두 나타난다. 그러나 시편의 전체적인 구조를 통해서 볼 때, 지혜와 관련된 내용이  주도적으로    부가되기  때문에 '지혜시'(wisdom psalm)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이러한 본시는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하는 태도가 가장 현명하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제 무신론의 부패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본시의 내용을 두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무신론적 사사의 결과로 인한 사회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설명한다(1-4절). 본 대목에서 다윗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본 인생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눈에 비춰진 인생의 모습을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상당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비통한 현실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선(善)을 행치 않고(1, 3절). 하나님을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2절), 하나님의 백성을  차취하고 핍박하며(4절), 죄악 가운데서 생활하게 된다. 다윗은 이러한 인생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자'라고 호칭했다.
  사실 그들은 세상적 계산이나 이해 타산에 결코 어둡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민첩하다. 그러나 다윗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리석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목전(目前)의 문제를 해결하는 면에 있어서는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였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 우주의 근원자시며 모든 윤리와 도덕의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생활하므로 마음이 어둡고 부패하게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까지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인 연약한 자와 가난한 자들을 핍박함으로(6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초래하게 되었다.그들은 거시적 안목을 소유하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하였으며, 임박한 하나님의 형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생활  하였다. 다윗은 이러한 무신론자들의 삶에 대해 소망이 없다고 말하며 모든 부패의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이상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이 가장 불쌍하고  우매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무리 세상적인 지혜가 탁월하고 계산이 밝아도 하나님을 부인하면 허무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시며 인간의  생사  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 때 타락과 부패와 멸망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통치에 대한 확신이 나타나  있다(5-7절).  다윗은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후에 악인에 대한 징벌(5, 6절)과  하나님의 의로운 다스림에 대한 갈망(7절)을 대조적으로 기술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공포심을 갖게 될 것이며,핍박을  당하는 의로운 자들은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것이라고 말한다(6, 7절). 여기에서 우리는 현실 세계와 정반대로 역전되는 상황을 발견하게  된다. 전에 겁없이 즐거워하던 어리석은 자들은 앝으로 크게 두려워할 것이며  반대로  전에 슬퍼하던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크게 기뻐하게 될 것이다.  다윗은  이가 같은 대격변의 근거를 하나님게서 살아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불변의 사시에 두었다. 하나님게서는 스스로 계신 요호와로서 인생들이 아무리 그의 존재와 사역을  부인할지라도 여전히 영존하시며 역사를 섭리하신다.
  다윗은 이러한 왁신을 통하여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탄식으로부터 벗어나서  미래에 대한 찬양을 회복한다. 하나님께서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정의와    승리를 확립시켜 주실 것이다(5절마). 또한 포로된 상태와 같은 비참한 환경 가운데서도  대적들로부터 보호하시며 은혜와 축복을 통하여 천상의 희락을 소유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의 타락을 목도하면서도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을  확신한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는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구원의 소망을 잃지 않는 성도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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