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내가 여호와께 피해왔거늘 - '피하였거늘' 의 시제는 완료형으로 다윗이 이미 여호와 안에 피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써 다윗은 산으로 도망가라는 그의 친구들의 권면을 한 마디로 거절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산으로 피하는 것보다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은 다윗의 위대한 신앙을 엿볼수 있다(Delitzsch).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 이러한 유흑은 다윗의 친구들이 매우 인간적인 자들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팔레스틴의 산에는 적들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굴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친구들은 다윗더러 산으로 도망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친구들의 말을 불신앙적인 권고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저들은 정말로 안전한 피난처가 산에 있는 굴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새같이'라는 말은 다윗의 위기 상황을 적절히 비유한 말이다.다시 말해서, 사냥꾼에게 쫓기는 가련한 새와같이 다윗이 적들에게 쫓기고 있음을 보여준다(Lange). 그리고 '도망하라'(* , 누디우)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너는 도망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는 도망하라'는 말이다. 이는 곧 다윗이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도망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Calvin).
=====11:2
악인이 활을 당기고...시위에 먹임이여 - 본절은 다윗이 자신의 위험스런 상황을 설명하는 구절(Calvin)이라기 보다는 그의 친구들이 다윗더러 산으로 도망하라고 한 권면의 근거로서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Kraus, Rawlinson). 여기에서 다윗의 대적들은 사냥꾼 또는 무장한 군인에 비유되었다. 그래서 다윗의 친구들은 이 사나운 대적들을 주의하라고 다윗에게 권고해 주고 있다. 본래 원문에는 '보라'(* , 히네)라는 감탄사가 맨 앞에 삽입되어 있다(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아니했음). 여기서 '활'이나 '살'은 의인(다윗)을 파멸에 빠뜨리려는 대적들의 음모를 비유하는 말이다.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 여기서 '어두운 데서'라 함은 '은밀한 중에'라는 뜻으로 대적들이 아무도 모르게 다윗을 해치려 한 사실을 묘사해 주고 있다(Rawlinson).
=====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알꼬 - 이 역시 다윗의 친구들이 그에게 권고하는 말이다. 여기서 '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트'(* )는 국가의 기강, 곧 법률과 질서(law and order)를 의미한다(Kraus, Delitzsch, Rawlinson, Craigie). 그런데 이 국가의 법률과 질서가 지금 현재로서는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상황하에서 다윗의 친구들은 다윗이 그곳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지적한다.
=====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 친구들의 유혹을뿌리치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다윗의 말이다. 그의 눈은 공격해 오는 적들에게서부터 이 세상 주관자이신 하나님에게로 향하고 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전'(* , 헤칼)에 계시는 동시에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 표현을 통해 볼 때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백성 중에 임재하여 계심을 나타낸 것이요 또한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을 나타내는 구절로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보다 위대하시고 초월하여 계신 분임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인식하에서 다윗은 위기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께 피하기로 결심하였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내재하여 계시는 동시에 모든 인간들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으로서 그 어떠한 피난처보다도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심을 깨달았던 것이다(Craigie). 특히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다윗의 인식은 위기 중에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왜냐하면 각 보좌는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심판의 보좌가 되기 때문이었다(미 1:2;합 2:20, Lange).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여기서 '감찰하시도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한'(* )은 '시금(試金)하다', '분석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인생의 그 인간됨을 알아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행위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눈으로 살펴보시고 알아보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해치려고 하는 악인들의 행위(2절)를 모르실 리가 없다.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 '감찰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4절에서와 같이 '바한'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용어는 의인에게만 적용되었으니 마땅히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이 용어가 악인에게 적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행위를 살펴보시고 그 행위에 대해 심판하신다는 의미이지만(10:13), 의인에게 적용되었을 때에는 의인을 단련하시고 그들을 세심하게 돌보신다는 의미를 갖는다(Rawlinson, Craigie).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 - 포괄적 의미에서는 율법과 질서를 파괴한 자들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은밀히 죽이려 한 자들이다.
=====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 이 구절은 '악인에게 비를 내리시리니'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여기에 사용된 동사 '마타르'(* )는 '비가 오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비는 하나님의 진노나 은혜의 표현이었다(사 30: 23;암 4:7;슥 10:1). 그런데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비의 종류는 내용상 진노의 비를 가리킨다.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당시의 현장과 유사하다(창 19:24).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님의 형벌의 대표적인 모형이므로 그때의 상황을 묘사 것으로 볼 수 있다(Rawlinson).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이 불과 유황을 피하지 못하였듯 이 악인들도 하나님의 형벌의 비를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불과 유황은 하나님의 강림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18:12ff.). 그러나 하나님의 강림을 상징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악인들을 불로써 형벌하기 위한 강림인 것이다. 그리고 '태우는 바람'은 팔레스틴 남동편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가리킨다(Lange, Craigie, Rawlinson). 이는 악인에게는 이와같이 하늘로부터 임한 불에다 자연적인 재앙까지 겹치는 무서운 형벌이 임하게 된다는 뜻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형벌의 참상을 묘사한 것이다.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 이 '잔'은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다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지는 것은 각기 다르다. 즉, 악인의 잔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져 악인은 그것을 마실 것이나 의인의 잔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져 의인은 그것을 마실 것이다(116:13). 그리고 이 잔은 자유롭게 마시는 연회석의 잔이 아니라 반드시 모두 다 마셔야하는 운명의 잔이다(Calvin).
=====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 이는 5절 하반절과 대조적인 내용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의로운 일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Calvin). 그러나 이 말은 또한 하나님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Craigie).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욱 자연스럽게 보인다.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 이는 '정직한 자'(의인)가 생활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거나 아니면 죽음 이후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거나 아니면 죽음 이후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Dahood), 여기에서는 특별히 위기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안전한 보호를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Craigie). 위기 중에 있는 다윗은 바로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께 피하고 있는 것이다.
본시는 다윗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도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에는 주로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느끼는 실망과 도망치고 싶은 유혹이 드러나 있고(1-3절), 후반부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신뢰의 회복이 나타나 있다(4-7절).
본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어떤 학자는 다윗이 사울에게 박해받으면서 심각한 불안을 느끼던 시기로 이해하고(삼상18:11;19:10), 또 다른 학자는 압살롬이 비밀리에 주도하던 반역 계획이 내밀(內密)히 드러난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한 배경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다윗이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환난기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시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확신시'로 알려져 있다. 본시에서 다윗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간구하지 않고 오직 여호만을 피난처로 알고 의지한다고 고백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부조리한 현실을 공정하게 심판하실 정의로운 재판장이심을 확신한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은 불공평한 현실에 직면하면서도 승승 장구(乘勝長驅)하는 악인의 철저한 파멸과 고통받는 의인의 승리를 예견하게 만든다.
사실 이 세상은 음모와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는 고통스러운 장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진리의 최종적 승리를 믿는 성도는 결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윗은 살기 등등(殺氣騰騰)한 폭력이 난무하는 위태로운 환경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더욱 커다란 신뢰를 회복한다. 이러한 다윗의 자세는 고난과 역경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순교자적 신앙의 표본이다.
이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악인의 압제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본시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현실에 대한 실망과 유혹에 대한 극복이 나타난다(1-3절). 악인에 의해 억울하게 고통받는 다윗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는 본 대목은 (1) 친구의 인간적인 권고(1절), (2) 비열한 음모(2, 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윗은 여기서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을 가냘프고 무기력한 새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현혹되지 않고 그의 친구들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한다. 사실 이성적(理性的)인 면에서 보면 다윗의 친구들의 권면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다. 위태로운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에게는 거기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당시 다윗의 대적들은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직접적인 위협을 가해왔다. 그러나 죄없는 다윗이 이처럼 무고하게 핍박을 당하는 데도 당시의 사회는 다윗을 보호할 수 없을 만큼 법률과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무법 천지(無法天地)였다. 친구들은 다윗에게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면서 도피가 최선의 방책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심각한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친구들의 조언은 다윗 자신의 내면에서 분출되는 자아의 욕구이기도 하였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원망은 인간 다윗의 숨길 수 없는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신앙의 힘으로 이러한 내적, 외적 유혹을 일축해 버렸다. 드는 원수들의 음모가 아무리 간교하고 사회가 아무리 부패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신앙이란 이성이나 합리주의를 초월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확신이 드러난다(4-7절), 본 대목은 당면한 현실을 바라볼 때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실망과 의문에 대한 신앙적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다윗은 모순된 현실 속에서도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응시한다. 그리고 다윗이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았을 때 그를 괴롭히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주어지게 된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에 대해 인식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백성을 위하여 친히 성전에 임재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았다(4절f.). 또한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을 자각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하늘의 보좌에 앉아계신 초월적인 분이시다(4절).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만사(萬事)를 지배하시고 모든 인간을 감찰하심을 믿게 되었다. 또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 곧 공의와 사랑을 다시금 자각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따라서 강포를 좋아하는 악인에 대해 불과 유황으로 반드시 형벌하실 것이다(6절). 반면, 여호와는 의로운 자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신다.
다윗은 이러한 확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결코 자기를 의지하는 정직한 백성을 버리시지 않음에 대한 역사적 통찰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윗의 신앙이 추성적인 이론이나 자기 확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부터 기인함을 알 수 있다. 신앙은 열심과 노력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직접 체험함으로 얻어지는 겸손과 신뢰이다. 따라서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분주한 활동을 멈추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시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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