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주께 피하오니 - 다윗은 구원을 하나님안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피하리이다"(57:1),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다"(61:4)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 여기서 '나를 쫓는 모든 자'란 문자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한 원수들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비유적으로 다윗의 명성과 사회적인 지위를 떨어뜨리려고 온갖 거짓된 말을 일삼는 모든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섬성 26:1, 19, Rawlinson, Craigie, Kay).
=====7:2
사자같이 -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대적을 성난 사자에다 비유함으로써 그가 처한위험의 심각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이 얼마나 몰인정하며 잔인한 자들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 여기서 '나'에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네페쉬'(* )이다. 이 용어는 '목'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본 문맥에서는 '목'으로 번역하는 것이 다윗을 대적한 원수의 잔인성을 더욱더 잘 드러내 줄 수 있을 것이다(Schmidt).
=====7: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 다윗은 1절에 이어 또다시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 1절에서는 구원을 호소하기 위해서 불렀으나, 본절에서는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기 위해 부르고 있다.
이것 - 이 말은 원수가 다윗을 고소한 내용을 의미한다.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 여기서 손은 행위를 의미한다(삼상 24:1;26:18). 그래서 손이 깨끗하면 무죄를 나타내며, 더러우면 범죄했음을 의미한다.
=====7:4
화친(和親)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 여기서 '화친한 자'란 언약을 맺은 자, 협약을 맺은 자를 뜻한다. 다윗은 이러한 사람에게 배반하는 악을 범하지 않았으며 다만 신실함으로 대했을 뿐아라고 말하고 있다. 즉, 다윗의 원수들이 다윗이 언약을 맺은 자의 재산을 탈취하는등 배반을 일삼았다고 그를 고소한 데 대항하여 다윗은 전혀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 여기서 '빼앗았거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츠'(* )는 (1) '구원하다', (2) '약탈하다'는 뜻을 가지며, 본 문맥에서는 (2)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다윗이 비록 그를 모함하는 대적일지라도 아무런 까닭없이 약탈하지 아니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Kraus). 그런데 혹자는 '내 대적'을 '그(친구, 화친한 자)의 대적'으로 보고, '할라츠'를 '구원하다'라는 뜻으로 보았다(Craigie). 그리하여 본 구절을 '내가 나의 친구의 대적을 까닭없이 구출하였거든'이란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너무나 인위적으로 꿰어 맞춘 듯하여 자연스럽지 못하다.
=====7:5
이 구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유죄로 판명되기만 한다면 그 어떠한 형벌이든지 받겠노라고 맹세하고 있다. 이러한 맹세는 그가 자신의 정직함에 대하여 크게 확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Calvin).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 즉, 자기에게 죄가 있다면 원수의 핍박을 받아 죽어도 좋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못받아도 좋다는 말이다.
내 영광을 진토(塵土)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 여기서 '진토'는 부끄러움과 죽음의 상징이다(욥 31:8, 10, 22, 40, Rawlinson). 따라서 본 구절은 극한 수치와 파멸에 빠져도 좋다는 의미이다.
=====7:6
자신의 무고함에 대해 맹세한 다윗은 자연스럽게 원수둘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 여기서 '일어나사'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명령형이다. 다윗은 계속되는 다음 구절에서도 명령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명령형의 사용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개입을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다. 특히 '일어나사'라는 표현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앞서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언약궤의 행진을 요청하는 말이다.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서 행진한 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에 개입하심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 말은 대적하는 원수들을 하나님께서 물리쳐 달라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이다. 한편 여기서 다윗은 모든 원수갚는 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고 있다.
깨소서 - 역시 전쟁 용어로 하나님께 전쟁 개입을 요청할때 사용된 말이다. 이와달리 신(神)이 잠잔다는 것은 그 신의 무위 도식을 상징하였다(왕상 18:27, Kraus).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이 저들에게 임박하였음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본 구절은 보다 구체적으로 '심판의 날이 주님에 의해 확실하게 정해졌나이다'로 해석될 수 있다(A. A. Anderson).
=====7:7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에 대한 심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자적 시각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민족들의 집회'를 '하늘 주권자의 집회'로 해석하여 본 구절이 만유의 심판자로서 여호와를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Gunkel, Weiser, Anderson). 그 이유로 '민족들의 집회'란 표현이 앞 구절들의 사상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그런데 원문은 그렇게 의도적으로 바뀌어서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다음 구절에 '민족들의 집회'와 비슷한 '만민'이란 표현이 나오므로 의도적으로 본문을 고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본 구절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서심을 의미한다.
=====7:8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 다윗은 모든 백성을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와 성실함을 따라 판단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의 '의'란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의'나 순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를 고소할 악인들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의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Calvin, Craigie, Kraus).
=====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 본 구절은 다윗의 기도에 있어서 구체적인 내용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응답하실 줄 믿고 구체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다윗은 이 기도에서 악인의 제거를 간구하지 않고 다만 악인의 악이 제거되기를 간구하였다. 다윗은 분명히 악인이 아니라 오직 악만이 제거되기를 원했을 것이다(Rawlinson).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 이는 찬송의 형식 중 하나이다. 다윗은 여기서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Kraus). 이 찬송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심장', 곧 마음의 생각을 살펴보심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이었다.
=====7:10
나의 방패는...하나님께 있도다 - 여기서 방패는 수비용 무기로서 원수의 공격을 막아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서는 3:3 주석을 참조하라. 다윗은 그 마음이 정직한 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볼 수 있었다.
=====7:11
하나님은...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 역시 9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분노'는 당연히 악인에 대한 분노이다. 다윗은 이 분노가 매일 끊임없이 악인에게 임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상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악인에 대해서는 항상 반대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Lange). 따라서 이 분노는 즉흥적인 것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에서 비롯된 본질적인 것이다.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 이 표현은 16절까지의 내용의 대전제이다. 여기서 '사람'은 '악인'을 의미하되 다윗의 개인적인 원수보다는 일반적으로 악을 행하는 모든 악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Lange, Hengstenberg).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 언제든지 활을 쏠 수 있게끔 당기어 놓으셨다는 말이며, 더 나아가 악인에게 명중하도록 과녁이 맞추어져 있다는 말이다(Rawlin- son). 즉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임할 것임을 가리킨다.
=====7:13
죽일 기계 - 다음에 이어지는 불화살을 쏘는 기계(틀)을 의미한다.
그 만든 살은 화전(火箭)이로다 - '화전'은 '불화살'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상징하고 있다. 이 같은 심판의 불은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해 에덴 동산 주위에 펼쳐 놓은 화염검에서부터 유래했다(창 3:24).
=====7:14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 본 구절은 (1) 잉태한 여자가 뱃속의 아이를 사랑하듯 악인은 죄악을 사랑한다는 의미와 함께(Craigie), (2) 그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듯 악인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Barnes). 따라서 본 구절은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제1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죄악을 즐긴 악인 그 자신에게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편,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었으나 원문에는 본 구절 바로앞에 '보라'(* , 히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악인들이 당할 참을 수 없는 고통은 필연적이며 또한 자연적 결과임을 상기 시켜주기 위한 수식어라고 볼 수 있다.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 여기서 '잔해'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말' (* )은 '수고'를 의미하나 아무 유익이 없는 헛된 수고를 뜻하며 본절에서는 특별히 죄악을 행하는 무익한 수고를 뜻한다(TWOT). 그리고 '궤휼'이란 거짓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거짓으로 모함한 대적들의 행위를 가리킨다. 다윗은 이와 같은 거짓된 행동이 저들의 우발적인 실수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고 저들이 헛된 일을 사랑한 결과로 빚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
=====7:15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 다윗은 악인이 결국에 달려갈 파국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함정은 다른 사람을 빠뜨리기 위해 파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악인 자신이 빠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실례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멸시키려 했던 하만에게서 잘 나타난다(에 7:10).
=====7:16
그 잔해는...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있으므로 악을 행한 인생은 결국 그 악으로 보응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Calvin).
=====7: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 절박함으로 본시를 시작한 다윗은 이제 찬양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의'란 악인의 죄를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의인을 끝까지 보호해 주시는 신실하심을 내포하고 있다(Calvin).
본시는 다윗이 베냐민 사람 구시의 모함을 받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 시의 표제문에 따르면 '다윗의 식가욘'이라는 언급이 나타난다. 이는 시작법(詩作法) 용어 중 시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격렬한 흥분과 감저의 급격한 동요 속에서 지어진 시를 의미한다. 사실상 본시의 구조를 보더라도 뚜렷하게 한 주제로 진행되지 않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본시의 주제를 정의(定義)하는 일에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분류에 따르면 본시가 개인의 탄식시에 속하지만, 주제별 분류상 저주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시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 두가지 주제가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시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 두 가지 주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본시에는 (1)개인의 탄식(1, 2절), (2) 맹세(3-5절), (3) 여호와의 왕권(6-12절), (4) 감사(17절)등의 요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본시의 배경에 대한 학자들의 입장도 다윗의 생야 중 어느 한 시기라는 점에서는 일치를 보이지만, '베냐민 사람 구시'에 관한 문제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일반적인 두견해는 사울의 통치 말기에 다윗을 죽이려고 거짓 모함했던 자들 중 한 사람(삼상24:9) 이라는 입장과, 압살롬의 반역 직후 다윗을 저주했던 사람으로 보는 (삼하16:5;20:1) 입장이다.
아무튼 본시에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요청하는 시인의 심정이 구절구절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다윗이 억울한 모함과 저주로 박해받던 시기에 쓰여진 것만은 확실하다 하겠다. 특히 주께서 만국을 다스리실 것이라는 시인의 기대는 종말론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7-9절). 즉,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면, 의인은 악인들의 핍박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의(義)로 즐거워할 것임을 이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달 월의 부림절 축제시 선조들의 불행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이 시편을 노래하곤 했다.
한편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인 본시는 (1) 하나님이 의로운 심판을 간청하는 내용(1-10절)과, (2) 하나님의 의와 악인의 운명을 확신하는 내용(11-1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윗이 이 시에서 보여 주고 있는 커다란 주제는 온 세상의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이다(11절). 특히, 다윗은 이러한 주제를 억울한 상황 속에서 호소하는 방식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원수로부터 억울한 누명의 말을 들었을 때 폭력을 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억울한 감정을 절제하고 하나님게 나아가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자신의 결백을 보여드렸다(1-5절). 다윗이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원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의롭게 판단하실 줄로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말이나 행위를 원수의 공격을 막는 방패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공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자신의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10절).
그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기에게 누명을 씌운 무리들이 결국 멸망에 빠질 것을 확신하며(11-16절), 그 멸망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의한 필연적인 멸망임을 강조한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악을 미워하셔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잘 아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상황 중에서도 이 의로우신 재판장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17절).
우리는 존시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을 통하여 신자의 생활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즉, (1) 성도는 재판장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게 심판받을 자로서 의로운 생활을 영위해야 하며(엡 4:1-3), (2) 억울한 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원수를 갚기보다는 하나님께 심판권을 맡기고 살아야 한다(신 32:35; 롬 12:19)는 것이다.
1. 억울함을 호소하는 다윗(7:1-9)
본 단락은 시인의 탄식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전체가 4개의 연(1, 2절;3-5절;6,7절;8, 9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절의 '셀라'를 축으로 전반부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이는 시인이'만약...했다면, ...하소서'라는 저주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무죄(無罪)를 증거할 때, 얼마난 열정적으로 고백했는지를 보여준다(3-5절).
이뿐만 아니라 시인은 여기서 직유법(2절)과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법(6절)을 사용하여 극적인 상황 묘사를 하고 있다. 이런 표현 기술은 당면한 위기 상황과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의 절박서을 부각시키려는 시인의 의도를 반영한다.
한편, 본 대멱 후반부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암시는 시인의 신앙과 확신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의인들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즐거워하게 될 날을 바라보게 한다. 이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었던 주의 강림을 기다리라는 권면과도 일치하는 것이다(살후 1:5-10).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는 장면인 본 단락은 (1) 억울한 누명과 위기 상황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부분(1, 2절), (2)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부분(3-5절), (3)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결을 요청하는 부분(6-9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내용의 본 대목에는 다윗의 억울한 심정은 물로 그의 강한 열망 또한 내포되어 있다. 사실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이 행치 아니한 일을 거짓으로 고소하여 억울한 누명을 씌웠었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는 저들의 누명과는 정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려는 경건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었다(8절). 비록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한 점의 흠도 없는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는 거룩한 신앙인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의 원수들은 터무니없게도 다윗을 모함하여 그의 명성을 사람들 앞에서 땅에 떨어뜨렸다. 따라서 다윗은 모든 것을 아시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자신의 무죄를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다윗은 만일 저들이 말한 범뵈의 사실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신은 하하님의 저주를 받아 멸망하여도 좋을 것이라고 맹세하였다(3-5절). 이런 표현들은 다윗이 얼마나 억울한 상태에 직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맹세×諍??그의 의롭고 성실한 삶을 엿볼 수 있어야만 한다. 즉, 다윗은 자신의 삶이 원수들이 말한 것과는 정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성실한 삶이었기에 감히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이 저주의 맹세를 함에 있어서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자신의 맹세처럼 최선을 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의롭고 성실한 삶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자신과 그의 원수들 사이에 임하기를 자신있게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6-9절).
그렇다면 다윗이 이처럼 강력하게, 또는 자신있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평상시 다윗의 의롭고 성실한 삶이었다(8절).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1) 성도가 어려운 위기에 처할 때 박망치 않고 기도에 힘씀은 바로 하나님이 공의의 심판을 요구할 수 있는 특권 때문이요(눅 18:1),
(2) 성도의 여적인 능력은 자신의 거룩하고 의로운 거룩하고 의로운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 하나님의 의와 악인의 운명 (7:10-17)
본 단락은 3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악인을 심판하고 그 소행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특히 시인은 여기서 지금까지 2인칭으로 불리워지던 하나님에 대한 칭호를(1-9절) 3인칭 으로 전환한다(10-17절). 이는 앞단락이 탄식(1-2절), 맹세(3-5절), 하나님의 심판 요청(6-9절) 등으로 당면한 위기 상황 속에서의 언급인 반면, 본문은 그런 위기를 뛰어넘어 악인을 멸하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뢰와 확신 속에서 표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본시의 결론을 맺고 있는 것이다(17절).
이뿐만 아니라 시인은 임신과 출산에 관한 용어를 사용하여 악인의 생가과 행위가 모두 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14절). 이는 예수님과 야고보가 인간의 생각과 의도가 모두 악함을 경고했던 신약 성경의 언급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막 7?:21-23;약1:14,15).
이러한 특징에 기초하여 본 단락을 살펴보면 본문은 (1) 의로우신 재판자이신 하나님(11-13절), (2)멸망으로 끝날 악인의 운명(14-16절), (3)찬양받으실 하나님의 의(17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 대목에서는 주로 악인을 심판하시고 그
소행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강조되고 있다.
다윗은 먼저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9절) 자신을 대적하고 모함하던 자들의 운명을 보게 된다. 그들은 외형적인 모습으로는 현재 안전하였지만, 다윗은 이미 믿음의 눈으로 그들의 임박한 운명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만약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게서 예비해 두신 활에 여지없이 희생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12절). 왜냐하면 다윗의 눈에는 이러한 저주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들을 멸망시킬 하나님의 준비는 이미 완려되었기에, 그들의 운먕은 마치 활은 이미 당겨져 있으며 불화살을 쏠 기계는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12, 13절) 경각에 달려 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하시려고 하는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심판은 불의한 자들이 범한 악행에 대한 마땅한 보응일 따름이다(14-16절). 따라서 악인들에게 있어 급선무는 바로 자신드리 행위를 회개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할 기미조차 보이지를 아니함은 물론, 의롭고 성실한 자(다윗)를 더욱 모함하며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윗은 악인들의 빅그적인 운명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악인의 운명은 육신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사람은 육신의 쾌락을 누리고 있는 악인들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은 오해를 받고 있으나, 장차 공의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판단하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던 시인 자신이었다. 따라서 시인은 역경 속에소도 넘쳐나는 확신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찬송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17절).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복 있는 사람은 많은 재물을 가진 자난 큰 권세를 가진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의롭고 성실하게 사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마 5: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