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욥기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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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 직역하면 '욥이 비사를 다시 들어올려 계속하여 말했다'이다. 여기서 '비사'로 번역된 '마솰'(* )은 본래 격언이나 직유를 의미한다. 혹 지혜의 간결한 단편을 가리키는 '잠언'으로(잠 26:7) 이해하기도 하며, 또는 '속담', '비유'등으로 일컫기도 한다(사 14:4). 또한 발람의 신탁(민 23:7, 18)이나 시인의 읊조림(민 21:17) 등에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마솰'은 문학적인 쟝르에서 매우 다양하게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는 격언적인 대화나 시적인 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욥은 자기의 연설을 침묵하는 친구들에게 좀더 엄숙하게 고조된 분위기로 계속 이끌어 가고 있다(11절). 결국 본장은 먼저 자기의 순전함과 무죄성에 대한 확언으로 시작된다(2-6절). 그리고 대적자들을 저주하면서(7-10절) 자기의 경험과 사악한 자들을 대조시키고 그들의 파멸적인 결과에 대해 언급한다(11-23절).

=====27:2
위해서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욥은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다루신다는 것을 항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변호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판단의 최고 가치로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34:5)이란 말은 자기의 순전함에 대하여 하나님과 논쟁을 불러 일으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G. Rawlinson). 나의 영혼을...
맹세하노니 - 욥의 맹세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자의 마지막 호소 수단으로 이해된다. 앞에서 욥은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판단받기 원했으며(13:22) 하나님의 계속되는 징벌을 탄식하며(16:9-17) 하나님 뵙기를 갈망하는 심경을 피력한 바도 있다(23:3). 즉, 욥의 주목표는 공평한 판결이 시행되는 법정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욥의 생각에 하나님은 그러한 소송의 기회를 주지 않으셨고, 따라서 욥은 마지막 단계로서 맹세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절의 맹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재촉하려는 욥의 마지막 안간힘이라 할 수 있다(Habel).

=====27:3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 원문은 오히려 '나의 호흡(* ,네솨마), 즉 생명이 아직도 내 속에 있는 한'이란 의미이다. 맹세자의 서언적 상투 어구(2절)와 맹세 내용(4절 이하) 사이에 위치한 본 삽입구는 (1) 맹세 내용을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엄수하겠다는 결의이자, (2) 자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한, 자기의 맹세 내용 역시 진리임을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다.

=====27:4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 법정에서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Habel).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이어지는 구절에서(5, 6절) 선언하고 또한 29-31장에서 더욱 소상히 언급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자기 주장이 결코 거짓에 의한 것이 아님을 힘주어 강변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도 욥은 자기 입술에 궤사가 없고 또한 자신은 선악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6:29, 10).

=====27:5
원문상으로 본절은 '내가 죽기 전에는 결코...하지 않는다'는 형태의 문장인데 이는 맹세의 또 다른 형식이다(RSV, Far be it from me to say that you are right ; till 1 die I will...from me).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만일 욥이 친구들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면 그것은 곧 신성 모독적인 범죄가 되며 따라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Habel, Hartley). 아울러 본절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순전함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함께(2:3, 9) 자기의 무죄성을 주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는 욥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G .Rawlinson).

=====27:6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차다크'(* )는 법정적 혹은 도덕적 의미에서 '의롭다', '정결하다'는 뜻이다. 결국 여기서 욥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 하등의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정 앞에서도 결백을 판결받을 자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23:11).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 '일평생'(* , 미야마이)이란 '나의 날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이다(Delitzsch,Lange). 그리고 '마음'(* , 레바브)은 인격체의 중심으로, 여기서는 '양심'이라는 뜻이다(수 14:7 ; 삼하 24:10). 그리고 '책망하다'(* ,하라프)는 '모독하다', '끌어내리다', '매도하다'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나의 양심이 내가 사는 날들 가운데 하루라도 나를 비난하거나 모독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즉, 여기서 욥은 그의 친구들이 비난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은 양심의 가책이나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27:7
나의 대적은 악인같이 되고 - 자신의 순전성을 단언한 욥은 이제 자기 대적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여기서 '대적'(* , 오예브)은 사단이 아니라 욥을 무조건 비난했던 그의 친구들을 가리킨다. 욥은 자기를 악한 자로 비난한 친구들을 도리어 '사악한 자'(* , 라솨)라고 부르며 그들의 결말이 사악자의 그것처럼 되기를 원한다. 한편, 욥의 이러한 바램은 저주의 상투적인 형태(* ...* , 예히...오예비)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KJV, Let mine enemy be as the wicked).

=====27:8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 7절에 피력된 저주 섞인 소원은 본절로부터 - 10절에까지 묘사되는 악인의 처지에 관한 설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사곡한 자'(* , 하네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경건한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차'(* )는 특히 약탈이나 폭력에 의하여 얻어진 이익을 뜻한다. 그러나 '바차'가 피엘형으로 '끊어지다', '잘라 버리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혹 '불경건한 자가 끊어질 때'라고 번역하기도 한다(NIV, RSV).

=====27:9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 환난이 사악한 자에게 임하는 때에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여도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며 그의 기도는 거절된다. 왜냐하면 사악한 자의 삶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교제와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위로도 받지 못하며, 오히려 절망적인 상태에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오직 상한 심령을 가진 자, 경건한 자만이 하나님께 구원의 소망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시 86:1-4). 욥은 여기서 비록 자신은 고통을 받고 있지만 사악자의 종말처럼 파멸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로서 결국에는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13:16 ; 23:7).

=====27:10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 이것은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발언을 상기시킨다(22:26). 엘리바스는 욥에게 전능자를 기뻐하라고 충고하였지만 욥은 자신이 전능자를 기뻐하지 않는 사악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욥은 전능자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치도 않는 교만한 자와는 달리 자신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확신으로 굳게 서 있음을 말함으로써 자기의 고통이 악한 자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 이는 '환난과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그들이 안다고 할지라도, 전능자를 기뻐하지도 않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또 전능자에게 소망을 두겠는가?'라는 뜻이다. 즉, 여기서 욥은 사악한 자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27:11
교훈을 베풀려는 의도를 타나낸다. 또한 본절과 12절에는 12:7-13에 나타난 모티브들이 엿보인다. 즉 자연 세계를 통한 '가르침'(12:7), '하나님의 손'에 관한 진술(12:9) 등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 원문에는 '하나님의 손에 대하여'(* ,베야드엘)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욥의 생애에 하나님의 고난으로써 개입하신 사실을 암시한다(10:7 ; 12:9 ; 13:21 ; 19:21).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 즉,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이나 숨겨진 뜻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13절 이하에서 언급되거니와, 욥은 친구들과는 달리 원칙론과 현실 사이의 모순점을 은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적하며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J. E. Hartley).

=====27:12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 욥은 친구들의 지식과 경험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과 행사를 매우 박식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의 경험과 지식이 단편적이기 때문에 욥의 가르침으로 더욱 온전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어찌하여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 - 직역하면 '왜 너희가 헛된 것으로 헛되게 만들었느냐?'이다. 즉, 욥은 친구들의 지식을 인정하지만 그 지식의 적용이 자기에게 있어서 잘못되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욥 자신의 불의나 사악함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 어떠한 근거도 없이 단지 인과 응보식의 지식만을 가지고 헛되이 생각하고 헛되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27:13
많은 주석가들은 본절에서부터 23절까지의 내용이 전에 욥이 주장했던 바(12:6 ; 21장 ; 24장)와 모순되기 때문에 삽입된 것으로 보고 본문의 위치를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즉, 사악한 자의 운명이 흥하게 되는 점을 의문시한 욥이 갑자기 그 태도를 바꾸어 그 친구들과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본문을 소발의 세 번째 연설로 보거나(Pope, Driver & Gray), 아니면 욥이 그 친구들의 견해를 되풀이한 것으로 취급한다(Eichhorn,Bockel). 그러나 본문은 욥의 진술임에 틀림없다. 이미 욥은 악인의 변영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일반적 원리를 인정하였다(21:16 ; 23:15). 다만 그의 경험의 다양성에 따라 주장하는 바가 모순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Lange). 욥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11, 12절) 논쟁에서 승리한 자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에 동의하고 자신이 주장해온, 의인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하여 이제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욥은 결코 자기가 고통받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악한 자의 종말에 대한 일반적인 심판을 부인하지 않았다. 단지 욥과 그 친구들의 논쟁은 서로 각기 다른 관점에서 철도의 레일처럼 평행을 이루 어 왔을 뿐이다. 그래서 욥은 이제 논쟁의 종식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 무죄성의 확신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하여 사악한 자의 파멸을 예고하는 것이다(Umbreit,Delitzsch). 이러한 해석은 사악한 자들의 운명을 언급함으로써 욥의 고통의 원인을 불의한 죄악에서 찾으려 했던 친구들과는 달리, 욥 자신은 사악한 자의 파멸적인 종말과는 전혀 다르게 전능자에 의하여 반드시 회복되고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본문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지된다(31:35-37).
악인이...분깃, 강포자가...산업은 이것이라 - '악인'(* , 라솨)은 불경건한 자(7절)를 뜻하고, '강포자'(* ,아리츠)는 난폭한 압제자를 가리킨다. 또한 '분깃'(* . 헬레크)은 단순히 나누어 갖는 몫을 뜻하며, '산업'(* , 나할라)은 상속되는 유산이나 소유물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은 소발이 제기한 것을(20:29) 그대로 인용하면서 사악한 자의 운명에 대한 일반적 진리를 욥이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7:14
그 자손이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 자손의 번성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져 왔으며(시 127:3-5), 욥 또한 악인의 번영함을 그 후손들의 번성으로써 언급한 바 있다(21:8, 11). 그리고 욥의 자녀 역시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그 가정의 기쁨이요 교제의 즐거움이었다(1:2, 4). 그런데 이제 욥은 악인의 후손이 아무리 많이 번성할지라도 그것은 한낱 재앙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칼'(* , 헤레브)은 '파멸하다', '몰락하다'의 '하라브'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전쟁이나 복수 등으로 인한 살상을 의미한다(19:29).
그 후에는 식물에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 즉. 비록 칼의 재앙에 살아남은 자라고 하더라도 생존을 위해 최소한 요구되는 음식마저 구할 길이 없어 기근에 시달리게 된다는 말이다.

=====27:15
그 남은 자는 염병으로 묻히리니 - '칼과 기근으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 사라드) 자들까지도 악한 질병(* , 마웨트)으로 죽어서 묻히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마웨트'는 '페스트'(RSV)나 '역병'(NIV, plague)아 아니라 말 그대로 비극적인 '죽음'(KJV, death)이라고 볼 수 있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이것은 사악한 자의 후손이 결코 살아남지 못하고 반드시 '사망'(렘 15:2 ; 18:21)으로 심판받을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심판의 도구로 언급된 칼, 기근, 염병은 렘 14:12에도 나란히 타나난다.
그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 '그의 과부들'을 '그들의 과부들'(70인역, 수리아역, NIV,RSV)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 '과부들'은 사악한 자의 후손들의 부인과 첩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애도의 장례식을 거행하지 않는다(시 78:64). 단지 형식상 속히 묻을 뿐이다(21:32). 그 이유는 무서운 형벌로 인해 그들의 남편과 자식들이 연달아 죽어서 관습을 지킬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타격이 너무 커서 망연자실(茫然自失)하게 되기 때문이다(Delitzsch).

=====27:16,17
이 두 절에서는 '은'과 '의복'이라는 모티브에 의한 명백한 대구가 타나난다. 이러한 대구에 의해 악인의 허무하고 비참한 결말과 의인의 궁극적 회복을 강조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티끌'과 '진흙'은 덧없고 연약한 모습을 타나내는 전형적인 표현이다(4:19 ; 10:9 ; 30:19).
비록 은을...예비할지라도 - 물건이 너무 많아 귀중한 것조차도 가볍게 여기는 악한 자들의 굉장한 소유를 의미한다(슥 9:3). 여기서, '예비하다'의 '쿤'(* )은 '높이 쌓아 올리다'란 뜻으로 창고에 저장함을 의미한다. 한편 이것을 '공급하다', '제공하다'란 뜻으로 취하기도 하며(잠 6:8), 개역 성경은 '준비하다'(잠 30:25)라는 번역을 따른다(KJV). 여하튼 본절은 사악한 자들이 탐욕과 약탈로 부당하게 부(富)를 축적하여 두었음을 암시한다.

=====27:18
그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 '좀'에 해당하는 '아쉬'(* )는 맛소라 사본에서는 '좀'으로, 고대 역본들에게는 '거미줄'(RSV, a spider's web)로 되어 있고, 현대의 몇몇 주석가들은 '새의 둥지'로 번역하기도 한다. 여하튼 본절의 의미는 사악한 자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궁궐 같은 집을 세우지만 그 집은 기초가 튼튼하지 않고 멸망당하기 쉬우며 썩어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상직군의 초막같을 것이며 - 사악한 자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아무리 견고성을 쌓는다고 해도, 마치 파수꾼(* , 나차르)이 세워 만든 가벼운 오두막처럼(사 1:8) 아주 쉽게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악인의 파멸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Hartley).

=====27:19
부자로 누우나...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 - 오히려 '부자로 누우나 그가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다'(Delitzsch, Lange, 70인역, 수리아역, NIV, RSV)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한편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 에 해당하는 '야사프'(* )가 '모으다', '데려가다', '옮기다' 등의 뜻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있어 왔다. 예를 들면 '모으지 못했다'(MT), '옮길 수가 없었다', '그가 묻히지 못했다'(또는 '그가 조상에게로 가지 못했다') 등의 해석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반절과 관련하여 '그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라는 의미가 가장 타당하다. 즉 사악한 자는 밤 사이 죽음으로 인하여 그전에 누렸던 온갖 부귀와 명성, 그리고 호화 찬란한 삶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의미이다.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 그가 밤에 갑자기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에 아침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는 간밤에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영원히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부(富)와 재산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아침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Anderson).

=====27:20
두려움 - 이 단어의 히브리어 '발라하'(* )는 '파괴', '공포'를 뜻한다. 그것은 공포의 왕(18:14)에 비유되며 갑작스러운 죽음의 공포를 가리킨다.
폭풍이 밤에 그를 빼앗아 갈 것이며 - 전반절과 표현상의 대구를 살리려면 '밤이 폭풍처럼 그를 채간다'(21:18)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Dahood). '빼앗다'의 '가나브'(* )는 도둑이 탈취물을 몰래 훔치는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사악자의 영혼을 움켜 채간다는 의미이다.

=====27:21
동풍이 그를 날려 보내며 - '동풍'(* , 카딤)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바람으로서 식물을 태우고 사람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황폐케 만들어 파멸시키는 바람으로 알려져 있다(1:9 ; 15:2 ; 사 27:8). '날려 보내며'는 '들어올리다', '던지다'의 '나사'(* )와, '사라지게 하다'의 '옐라크'(* ), 두 단어로 이루어졌다. 즉, 회오리 바람이 모든 물건을 삼켜 올려 사라지게 만들듯이 그의 존재 자체를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다는 의미이다(14:20 ; 19:10). 이것은 죽음의 파멸적인 성격을 표현한다.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 곧 사악한 자가 거주한 공간으로부터 그를 급히 추적하여 쫓아낸다(* , 사아르)는 뜻이다. 여기서 사악한 자의 처소는 그의 부(富)와 안전과 지배의 중심지로서(J. E. Hartley) 그가 관련되어 있는 모든 공간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사악한 자들이 발붙일 곳이나 숨쉴 틈을 주지 않고 죽음으로 그의 생(生)을 마감케 한다는 의미이다.

=====27:22
아끼지 아니히시고 쏘시나니 - '아끼지'(* , 하말)는 '불쌍히 여기다 '또는 '긍휼히 여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쏘다'의 '솰라크'(* )는 '세게 내던지다'란 뜻으로 악한 자가 권세와 평안을 누렸던 위치에서 끌어내려져 어디론가 멀리 내팽개쳐져 버린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악한 자로 하여금 더 이상 하나님의 은총의 영역에 머물지 못하도록 소멸시킨다는 의미와 같다.

=====27:23
사람들이 박장하며 비소하고- 본문의 주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차이가 있어 왔다. 원문에서는 3인칭 단수이기 때문에 '하나님'(RSV 난외주 비교)일 수도 있으나, 혹자는 21절의 '동풍'으로 보기도 한다(Pope, RSV). 그리고 '사람들'은 문법에서는 어긋난 점이 있으나 문맥상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KJV, LB). 한편 '박장'의 '사파크'(* )는 분노(민 24:10)나 조소를 나타내는 상징적 행동으로서 손뼉을 치는 것을 뜻하며 (애 2:15 ; 나 3:19), '비소'의 '솨라크'(* )는 '쉿 하는 소리를 내다', '휘파람 소리를 내다'라는 뜻으로 매우 놀랐을 때나 (렘 49:17) 경멸과 조롱을 나타낼 때(습 2:15) 사용되었다.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 사악한 자가 조롱과 경멸 가운데서 그가 거주했던 곳으로부터 쫓겨남을 뜻한다(21절). 한편 '처소'에 해당하는 '마콤'(* )은 하나님께서 거주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많이 사용되었으나(왕상 8:30 ; 사 26:21 ; 호 5:15 ; 미 1:3). 여기서는 악한 자의 영향력과 지배력이 미치는 모든 영역과 거주 장소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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