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여기서부터는 예루살렘의 거민 수를 늘리기 위한 조치들이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본장은 예루살렘의 거민수를 증가시키기 위한 최초의 노력이 언급되고 있는 7장, 특히그 장의 4절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 이에 대해서는 (1) 그 즈음 '두목들'이 솔선 수범하여 먼저 예루살렘에 정착했다는 견해(Rudolph), (2) 포로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두목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는 견해(Fensham,Rawlinson,Myers)등 두 가지 해석이있다. 이처럼 두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여기의 '머물렀고'(* ,야솨브)가 그런 두 가지의 해석을 가느케 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헤미야 도착 전에 이미 상류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언급이 있음(2:16)을 볼때, 대다수의 '두목들'은 애당초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이번의 언약 갱신을 계기로 타지역으로 가서 살았던 일부 두목들까지 일괄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봄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한편, '두목'(* ,사르)은 다른 곳에서 '방백'(스 10:14), '귀인'(6:17), '족장'(7:70;스 2:68)등으로 번역되었으며, 일반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을지칭 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제비뽑아 -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있다'(잠 16:33)는 믿음에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민 26:55,56,;수 7:16-18;삼상 10:19-21;대상 24:5;25:8;행 1:26).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민 26:52-56의 주제 강해, '제비뽑기'를 참조하라.
십분의 일은...예루살렘에...거하게 하고 -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살던 백성들의10%를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킨 것을 가리킨다. 이때 가족 전체가 이주했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 조치로 인하여 이산(離散)가족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룩한 성 - 이는 후기에 기록된 구약 성경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18절;사48:2;52:1;단 9:24). 그런데 이 같은 어구로 예루살렘을 수식한 까닭은, 예루살렘이 비록 이방 대적들의 위협이 가장 많았던 곳이긴 하지만 예배의 중심지이며 성전이 있는예루살렘에서의 거주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암시하려는 저자의 의도 때문인 듯하다(시 122:6,9).
=====11:2
자원하는 자 - 여기에 대해서는 (1) 제비뽑혀서 본의 아니게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게 된 백성 이외의 사람 중 그들과 함께 이주하여 살기를 자청한 사람들로 보는 견해(Rawlinson, Schultz, Myers), (2) 제비뽑혀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할 백성 중 기쁜 마음으로 가는 자들로 보는 견해(Williamson, Fensham, 박윤선) 등 두가지 해석이제시된다. 그러나 첫째,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할 숫자를 십분의 일로 못박았고(1절) 둘째, 여기의 '자원하는'(* ,나다브)이라는 단어는 대개 재귀형으로만 사용되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를 기꺼이 하는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삿 5:2;대상 29:6;대하 17:16;스 3:5)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위의 두 해석 중 후자가 보다 타당하다.
=====11:3
본절은 솔선 수범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살았던 지도자들을 언급하는 4절 이하 내용의 서론의 형식을 띠면서 여전히 지방에서 살고 있었던 그밖의 사람들을 대조시키고있다(Fensham, Myers).
이스라엘 - 평민 혹은 서민들을 가리킨다.
느디님 사람 - 7:46 주석을 참조하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 - 7:57 주석을 참조하라.
도(* , 메디나) -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던 여러 지역중의 하나였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단어이다.
두목들(* , 로쉬) - 이 단어는 '두령'(수 24:1) 혹은 '족장'(대상 23:8;대하1:2)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한 가문의 지도자들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1절의 '두목'(사르)과 본질적 의미상 동일하다(1절).
=====11:4
여기서부터 9절까지는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평민 지도자들의 명단이 나오고 있다.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 -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백성들 중에는 여기의 두지파 이외의 출신도 분명히 있었다. 즉,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출신 및 심지어는 아셀 지파 출신도 있었을 것이다(대상 9:3;눅 2:36). 다만 그 당시 유다 지파와 베냐민지파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성하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점에서, 이처럼 두 지파만이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베레스 자손 아다야 - '베레스'는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았던 쌍동이 형제 중의 형이었다(창 38:24-30). 그의 후손 중에는 다윗과 그리스도가 포함된다(마 1:3,6,16).이 '베레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균열'이다. 한편, '아다야'은 대상 9:4에서 '우대'로나와 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장식하셨다'이다.
웃시야의 아들 - 여기의 '아들'(* ,벤)은 (1)흔히 '자손'의 의미로도 쓰이며,(2)대상 9:4에서는 '우대'가 '암미훗의 아들'로 묘사된다는 점 등으로 볼때, '후손'의 의미이다. 이는 '스가랴의 손자','아마랴의 증손'등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11:5
여기서는 유다 지파 자손 중의 또 한사람의 지도자가 언급된다.
마아세야 - 대상 9:5에서는 '아사야'로 되어 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일'이다.
바룩의 아들 - 여기의 '아들'도 '자손'의 의미로 이해해야 된다.
골호세 - 3장15절에서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자(者)의 아버지로 묘사되는 '골호세'와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이름의 뜻은 '모든 선견자'이다.
실로 사람 - 여기의 '실로 사람'은 유다의 막내아들이었던 '셀라'의 후예들을 가리킨다.
=====11:6
본절은 내용상으로 볼 때 - 베레스 가문출신의 지도자에 대해 언급하는 4절과 연결된다.
용사이었느니라 - '용사'(* , 아느쉐이 하일)에서 '하일'은 (1) 군사적 능력, (2) 재정적 능력 모두를 뜻하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방비를 위한 인구 정책에 대해서 다루는 본문의 문맥에서 볼 때 전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11:7
앞 부분(4-6절)에서는 유다 지파의 지도자들의 시조(始祖)가 누구인지를 밝혔으나,여기서는 베냐민 지파 지도자들의 시조를 언급지않는다. 베냐민 지파의 경우 사사 시대에 다른지파들에 의해서 몰살됐었던 관계로 그 당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자신들의시조를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Fensham).
살루 - '무게를 단'의 의미이다(대상 9:7).
=====11:8
구백 이십 팔 명 - 여기와의 평행 구절인 대상 9:9에 '구백 오십 육 명'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결코 중요한 문제는되지 못한다. 사본상의 오류이거나 혹은 역대기에서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들이 포함되었을 수도있다. 아무튼 이 숫자는 '갑배'와 '살래'처럼 '살루'(7절)의 지휘 아래 있었던 용사들의 합계로 짐작된다.
=====11:9
요엘이 그 감독이 되었고 - '요엘'이 예루살렘 방비의 총책임자가 되었음을 가리킨다. 물론 그는 느헤미야의 지휘를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혹은 이 문구를 '요엘'이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직분자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있을 것이다(Rawlinson, 왕하 25:19).
유다는 버금이 되어...다스렸느니라 - 본문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1)개역 성경이나 KJV, RSV등에서처럼, 유다가 서열상 요엘 다음가는 행정 책임자로서 예루살렘을 다스렸다고 보는 견해, (2) NIV에서처럼 유다가 예루살렘의 '두 번째 구역'(the Second District of the city)의 책임자였음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많은학자들이(1)의 견해를 더 지지하고 있다(Edwin Yamauchi, Kedner, Schultz). (2)의 견해를 취할 경우, '두 번째 구역'이란 성전 서쪽 지역으로 확장된 지경를 가리키는 듯하다. 마자르(B.Mazar)나 아비갓(N. Avigasd)에 의하면, B.C. 8세기 후반 무렵에 예루살렘 성이 그 방향으로 확층되었다고한다.
=====11:10
대상 9:10-13의 기록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역대상의 기록을 보다더 정확한 것으로 보고, 그것에 준해서 본절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리라 생각한다(Rawlinson). 본문에는 필사자의 오류가 어느 정도 나타나고있는 듯하다.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 - 이것은 역대상의 기록에 따라 '여다야와 여호야립과 야긴'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다 다윗 시대의 24 반열 중 세 반열의 두목들이다(대상 24:7,17). 따라서 여기서는 제사장 개인의 이름이 아닌 가문의이름이 언급되고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떤 명단을 나열하면서 개인 이름이 아닌가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는 꽤 혼하다(10:2).
=====11:11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 - 여기의 '스라야'는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전에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다(대상 6:14). 바로 이 사람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가문 이름을 '스라야 가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10:2).
힐기야의 아들 - 대상 6:13,14에 따르면, '스라야'는 '힐기야'의 손자이지 아들이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벤'(* )의 번역의 차이에서 생긴 것이다.
술람의 손자 - 여기의 '손자'도 다만 '자손'으로 번역해야 한다.
사독의 증손 - 이것도 '사독의자손'으로 번역해야 한다. 한편, '사독'은 다윗과 솔로몬 시절에 활동했던 대제사장이었다(삼하 20:25;왕상 1:32-45;2:35).
므라욧의 현손 - '현손'도 다만 '자손'을 뜻한다.
=====11:12
전에서 일하는 그 형제 - 이것은 대제사장들을 도와서 성전 봉사를 했던 22반차(12:1-7)의 제사장들을 가리킨다(원래는 24반차로 나뉘었으나 느헤미야 당시에는 22반차로 나뉘었다). 그들 모두 자신들의 가문명(家門名)을 갖고있었다(12:1-7).
아다야 - 이러한 가문명을 소유했던 제사장의 무리들은 가르치는 일에 주로 종사했었던 것 같다. 반면 앞에 언급됐던 스라야 가문은 성전 봉사를 주임무로 했었다(Kidner).
=====11:13
그 형제의 족장된 자 -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던(12절) 제사장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1,3절).
아맛새 - 이 '아맛새'라는 가문명을 갖고 있었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을 경비하는일에 종사하였다(Kidner).
=====11:14
그 형제의 큰 용사니 - 이것은 앞의 '아맛새'라는 이름을 가진 제사장 가문이 어떤일에 종사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여기의 '큰용사'(* , 기보르 하일)는 (1) 하나님의 전에서의 봉사와 관련된 특별한 재능이 있는사람(Rawlinson).(2) 군사적 능력을 소유하고있는 사람(Kidner)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 '아맛새' 가문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의 방비에 종사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문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13절 주석 참조) (2)의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
삽디엘 - '하나님의 선물'의 뜻이다.
=====11:15
여기서부터 18절까지에서는 레위 사람 중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세 가문에 대해소개한다.
스마야 - 레위의 막내 아들인 므라리의 후손이었다(창 46:11;대상 9:14).'하나님께서 들으셨다'의 뜻이다.
핫숩 - 3:11을 참조하라.
=====11:16
삽브대 - 에스라를 도와서 개혁 운동을 추진했던 '삽브대'와 동일인일 가능성이많다(8:7,8;스10:15). 그 이름의 의미는 '휴식을 주는' 이다.
요사밧 - 추측컨대 에스라를 도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해준 '요사밧'과동일인인 뜻하다(8:7).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판단하셨다'이다.
하나님의 전 바깥 일 - 이것은 레위 사람들의 전형적 직무인 성전 제사와 관계된일 이외의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1) 성전세및 십일조를 거두는 일(10:37-39), (2)백성을 다스리는 일(대상 26:29), (3) 성전의 유지 보수와 관계된 일(Rudolph) 등이포함된다.
=====11:17
본절에는 레위 사람의 또다른 가문이 언급되다. '아삽 자손'의 레위 사람으로 분류된 것은 다소 특이하다. 왜냐하면 본서와 에스라서의 다른 곳에서는 항상 성전 제사에 관여하는 레위인들을 '레위 사람'으로, 아삽의 자손들은 '노래하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7:44;스 2:41). 그러나 '노래하는 자들', 즉 아삽 자손도 레위 지파에 속했다는 점에서, 이와같은 분류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맛다냐 -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귀환한 사람이다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의 선물'이다.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 - 여기의 '말씀'(* , 테힐라)은 당연히 '찬송' 혹은 '찬양'으로 번역되어야 한다(출 15:11;신 10:21;시 22:3). 한편, '인도하는'(* , 예호데)은 '인정하다' 혹은 '감사하다' 그리고 '찬송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다'(* )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찬송하게 하다'의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본 문구는 '기도할때에 감사의 찬양을 부르게 하는 지도자'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맛다냐'라는 아삽 자손이 오늘날로 치면성가대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맡았음을 말해준다.
형제 중에 박부갸가 버금이 되었으며 -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박부갸'가 맛다냐에이어 두 번째의 지도자였다는 뜻이다. 한편, '박부갸'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던지는자'의 의미로 추정된다(J. M. Ward).
여두둔의 증손 - 이는 '여두둔의 자손' 으로 번역해야 한다(15절). '여두둔'은 다윗 왕때에 성막에서 찬양과 연주를 맡아하던 인물이다(대상 16:41,42;대하 35:15).
삼무아의 아들 압다 - '압다'의 의미는 '하나님의 종'이다.
=====11:18
거룩한성 - 1절 주석을 참조하라.
레위 사람의 도합이 이백 팔십 사 명 - 이 같은 레위 사람들의 숫자는 다른 지파에비하여 상대적으로 적다. 이처럼 레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적게 살았던 것은 그들의봉사 직무가 힘에 겨웠던 때문일 것이다.
=====11:19
성 문지기는 악굽과 달몬 - 이 '성문지기'는 문자적으로 다만 '문지기'일 뿐이다.한편,'악굽'과 '달몬' 모두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레위 사람들의 일파인 성전 문지기 가문들의 명단에서 발견된다(스 2:42). 따라서 여기의 '성 문지기'는 오히려 '성전 문지기' 혹은 그냥 '문지기'로 번역해야 한다.
그 형제 - 여기에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문지기 가문들의 대부분이 포함될 것이다(스 2:42).
=====11:20
본절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칭송하기 위한 느헤미야의 삽입 구절이다. 즉, 여기서 느헤미야는 많은 사람들이 일신의 평안을 위해 예루살렘을 마다하고 각 지방에 정착했었다는 사실을 기술함으로써, 본 전후 문맥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루살렘 거주자들의 헌신적 자세를 높이 사고 있는 것이다.
=====11:21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하니 - '느디님 사람'은 원래 이방 혈통의 소유자들이었나이스라엘에 포로로 잡혀온 후 개종하여 이스라엘 총회에 가입되었다(스 2:43). '오벨'은 성전이 세워져 있던 구릉 지대가 뻗쳐져 있는 예루살렘의 동남부였다(3:26).
시하와 기스바가 그 두목이 되었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시하와 기스바가 느디님사람들의 위에 있었다' 이다 '시하'라는 이름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느디님사람들의 가문명 중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기스바'라는 이름은 거기서 볼 수 없다.그런점에서 우리는 본절의 두 이름을 가문명으로 보다는 개인의 이름으로 봄이 더 타당할 것이다.
=====11:22,23
17절에서는 아삽 자손의 가문명만이 언급되었으나, 여기서는 그 가문의 우두머리가느헤미야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했는지에 대해 진술한다.
웃시 - '힘센'의 의미이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 - 여기에는 느디님 사람들에 대한 감독권도포함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Schultz).
하나님의 전(殿)일 - 문맥상 찬양을 인도하는 직무를 가리킨다.
왕의 명대로....양식을 정하여 주는 것 - 여기의 '왕'은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던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을 가리킨다. 이처럼 아닥사스다왕이 레위 사람에 대해서특별한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양식' 곧 '봉급'을 주게 했던 것은, 성전 제사가 원활히 드려져야만 왕 자신과 왕자들을 위한 기도도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질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다(스 6:10). 이러한 배려는 레위 사람들이 생계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들에게 부여된 본연의 직무에 힘쓸 수 있게끔하는 데 큰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10:39).
=====11:24
본절은 23절에서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의 레위 사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질수 있게 되었던 중요한 원인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그래서 본절은, 헌신적 자세로써 예루살렘에 정착했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 마당에 전혀 성격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것이다.
유다의 아들 세라 - 야곱의 아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서 두 아들 곧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었다(창 38:11-30).
브다히야는 왕의 수하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렸느니라 - 문자적으로 '브다히야는 백성들의 모든 일과 관련해서 왕 곁에 있었다'이다. 따라서 '브다히야'는 마치 에스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서 아닥사스다 왕에 대한 조언자의 역할을했던 것으로 보인다(Fensham). 그래서 NIV는 본 문구를 '브다히야는 백성들과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있어서의 중개자였다'(...was the king's agent in all affairsrelating to the people)라고 번역하였다. 이처럼 페르시아 황실에 '브다히야'와 같은대변인이 있었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의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또한 레위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명령을 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11:25
본서의 저자는 예루살렘에 정착했던 여러 계층 사람들의 지도자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마치고, 여기서 부터는 당시 백성들이 어떤 곳에서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 언급하기시작한다.
향리와 들 - 엄밀히 말하여 '들이 딸린 향리'로 번역된다. 여기서 '향리'(* , 하체르)는 '울로 둘러싸인 구내'(區內)를 의미한다(Wigram). 그리고 '들'(* ,사데)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경작지를 뜻한다(창 2:5;24:63;수 8:24).
유다 자손 -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이들은 팔레스틴 땅의 남부 지역을 기업으로 할당받았었다. 그래서 30절까지 언급되는 이 유다 자손의 거주지도 모두 남부에 위치한 성읍들이다.
기럇 아바 - 히브리 원문대로 한다면 '기럇 아르바'로서 헤브론(수 14:15)과 동일한 지명이다. 이 성읍은 예루살렘 남방으로 30여Km 지점에 위치하였고 아브라함을 위시한 여러 족장들이 묻힌 유서깊은 곳이다. 그 촌(* , 베노테이하) - 중심되는 성읍의 주변에 위치한 독립 마을을 가리킨다(3:12).
디본 - 수 15:22의 '디모나'이다.
여갑스엘 - 수 15:21의 '갑스엘'이다.
그 동네(* , 하체레이하) - 본절 초두의 '향리'와 동일한 단어이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앞의 '촌'보다는 휠씬 작은'정착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Fensham).
=====11:26
예수아 - 수 15:26의 '세마'로 추정된다(Schultz).
몰라다 - 수 15:26에 언급되고 있는 유다의 남부 성읍이다.
벧벨렛 - 수 15:27을 참조하라.
=====11:27
하살수알과 브엘세바 - '브엘세바'는 유다의 최남단에 위치한 성읍이며 '하살수알'은 여호수아에서도 '브엘세바'와 함께 언급되는(수 15:28) 것으로 보아, '브엘세바'와인근한 성읍이었을 것이다(Rawlinson).
=====11:28
시글락 - 원래는 시므온 지파에게 분배된 성읍이었으나(수 19:1,5), 그들이 탈환치못함으로써 사울 시대까지 블레셋 족속의 차지가 돼었었다. 그러다가 사울을 피해 블레셋의 가드왕에게 망명을 했던 다윗이 그 왕으로부터 빌리면서 계속 이스라엘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삼상 27:6). 그 위치는 헤브론 즉, 기럇 아바(25절)에서 남동쪽으로약 45Km 지점이다.
므고나 - 수 15:31의 '맛만나'와 동일한 듯하다(Schultz).
=====11:29
에느림몬 - '림몬의 샘'의 뜻이다. 바로 이 같은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성읍은수 15:32의 '아인'과 '림몬'을 합한 것인 듯하다(Rawlinson).
소라 - 원래 유다 지파에게 분배됐었으나 한 때는 단 지파가 거주했었다(수 19:40,41). 단 지파였던 삼손의 출생지도 이곳이다(삿 13:24,25).
야르뭇 - 가나안 족의 한 왕인 비람 왕의 성읍이었다(수 10:3). 여호수아는 바로이곳에서 전투를 벌여 비람 왕을 죽였다(수 10:3-27). '높은 곳'의 뜻이다.
=====11:30
사노아와 아둘람 - '사노아'는 수 15:34에서 언급된다. 한편, '아둘람'은 한 때자체내에 왕이 있을 정도로 큰 성읍이었다 (수 12:15). 그 후에 르호보암 왕은 이곳을요새화하여 유다 땅의 방비를 강화하기도 하였다(대하 11:5,7).
라기스 - 여호수아가 '야비아'라는 가나안 족속의 한 왕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수 10:3,3`1,32). 그 '야비아'왕의 성읍이 바로 이 '가기스'였었다. 또한 이곳은 르호보암 왕에 의 하여 요새화됐던 곳이었던 관계로 후대의 앗수왕 산헤립은 자신의 전군사력을 동원하여 공격목표로 삼았었다(대하 32:9).
아세가 - 이곳도 르호보암 왕에 의해서 요새화된 적이 있었다(대하 11:9).
브엘세바에서부터 흰놈의 골짜기까지 장막을 쳤으며 - 느헤미야 당시 유다 자손들이 거주했던 지역적 범위를 말해주는 문구이다.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역사상 그 영토의 최남단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었다(삼상 3:20). 그리고 '힌놈의 골짜기'는 일반적으로 와디 엘라바비로 간주되며, 예루살렘의 서쪽 성벽 밑을 남북으로 가로질러가다가 예루살렘 남동쪽의 기드론 시내 쪽으로 구부러져 만난다(2:13). 이 골짜기는베냐민 지파의 땅과 유다 지파의 땅을 나누는 경계로서 인식되었었다(수 15:8;18:16).바로 이 같은 경계에 따라 '힌놈의 골짜기' 북쪽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베냐민 지파의성읍 으로 분류된 바 있다(수 18:28). 한편, '장막을 쳤으며'(* , 하나)는 군대가 상대편을 공격할 거점으로 삼기 위하여 어느 지역에 일시 머무는 것을 가리킬 때사용되는 군사적 용어이다(Williamson, 민 1:52;삼상 4:1;삼하 17:26;왕상 16:15). 그러나 포로 후기에 가서는 다만 일시 머무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의미가 변한듯하다(스 8:15). 그럴지라도 여기서 느헤미야가 바로 이 갈은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1) 당시 시골에 정착한 사람들의 일부도 그 두목들처럼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했던상황을 암시하며(1절), (2)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주가 빈번했었음을 암시하기 위한(Myers) 것으로 보인다.
=====11:31
베냐민 자손 - 이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팔레스틴에 들어온 후에 유다 지파가 분배 받았던 기업의 바로 북부 지역을 그기업으로 받았다. 즉, 예루살렘 부터 그북쪽이 그들의 기업이었다(30절 주석 참조).
게바 - 예루살렘 북쪽 약 25.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유다의 아사왕이 북국 이스라엘이 라마에 요새를 세우기 위해 가져다 놓은 재료를 빼앗아서 요새를 세운곳이기도 하였다(왕상 15:22). '반석'의 의미이다.
믹마스 - 게바 동북쪽 약 2.4km 지점이다. 사울의 군대와 불레셋 군대 간에 치열한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삼상 13:2,5-16;14:1-18). '감추어진'의 뜻이다.
아야와 벧엘 - '아야'는 사 10:28,29의 언급을 통해 볼 때, 앞의 '믹마스'와 인근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벧엘'은 '믹마스' 서북쪽 약 6.7km 지점이며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창 28:10-19).
=====11:32
아나돗 - 게바와 예루살렘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향이기도하다(렘 1:1). '대답들'이란 뜻의 지명이다.
놉 - 예루살렘과 아나돗의 거의 중간 지점이며, 그곳에서 예루살렘이 보일 정도로예루살렘과 가까이 위치했었다(사 10:32). 실로가 블레셋군대의 공격으로 함락됨으로써, 이곳은 한때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었다(삼상 21:1). '열매'의 의미이다.
아나냐 - 어디에 위치했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함께 언급되고 있는 성읍들과 인접해 있었을 것 으로 추측된다, '여호와께서 덮으셨다'의 의미이다.
=====11:33
하솔 - 그 위치는 잘 알려겨 있지 않다. '마을'의 의미이다.
라마 - 예루살렘 북쪽 약 9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무엘의 고향으로서 그가 사사및 선지자로서 활동했던 곳이다(삼상 7:15,17). '높은 곳'의 의미이다.
깃다임 - 베냐민 지파의 브에롯 사람들이 도망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다(삼하4:3). 그 지명의 의미는 '이증 포도즙 틀'이다.
=====11:34
하딧 - 예루살렘 북서쪽 약 4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스 2:33). '날카로운'의 의미이다.
스보임 - 믹마스 동편의 저지대에 위치했었던 것 같다(Rawlinson, 삼상 13:18). '무늬있는 새들'의 뜻이다.
느발랏 - 어디에 위치했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리석은'의 의미이다.
=====11:35
로드 - 예루살렘 북서쪽 약 4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하덧'으로부터는 남서서쪽로 6km 정도 떨어졌었다(스 2:33).
오노와 공장 골짜기 - 예루살렘 북서쪽 약 5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베냐민 지파의 땅 중 가장 외딴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그곳으로 유인하여 거기서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었다(6:2). '강한'의 의미이다. 한편, '공장 골짜기'는 개역성경을 따를 경우 마치 '오노'와 별개의 지명인듯보인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에는 앞의 '오노'와 '공장 골짜기' 사이에 '그리고' 혹은'- 와'의 뜻을 갖는 접속사 '와우'(* )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오노'와 '공장 골짜기'는 동격(同格)인 셈이다(KJV, LB, RSV).
=====11:36
본절은 레위 사람들의 일부가 느헤미야 시대에 유다 땅에서 베냐민 땅으로 이주했었음을 말해준다. 레위 사람들의 이 같은 이주는 십일조의 원활한 수납(收納)을 위한것으로 짐작된다(Fensham, 10:39).
본서 후반부(8장-13장)에서 지금까지는 율법의 해석(8장)과 언약의 갱신(9, 10장)
을 통해 영적으로 각성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이에 연이어지는 대
목은 언약의 말씀에 기초해 순종한 유다 민족의 신앙적 자세에 대하여 서술하는 장면
이다(11-13장). 그 순종의 내용 가운데서 초두에 해당되는 본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재정착한 것을 언급하는 부분으로 느헤미야가 인구 재배치 사업을 펼친 것
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예루살렘의 거민(居民)을 증원하기 위해 느헤미야가 전개한
사업을 성에 재정착한 사람들의 명단을 통해 밝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본문은 (1)느헤
미야가 인구의 재배치를 위하여 사용한 방법을 묘사한 전반부(1, 2절), (2)예루살렘
성안에 정착한 자들의 명단을 언급한 중반부(3-24절), 그리고 (3)성을 중심으로 그 밖
의 지역의 이름을 서술한 후반부(25-36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본장의 구조를 통
해 느헤미야는 당시 백성들의 인구 분포에 대한 간접적인 자료를 제공해 준다. 또한
느헤미야는 자신이 의도했던 문제가(7-10장) 어느 정도 성취되었음을 밝힘과 동시에
성벽의 방어 인원이 충족되었음을 드러내다.
그런데 본서 전.후반부의 건개 과정으로 볼 때 본장은 예루살렘으로의 인구 재배치
의 필요성을 언급했던 7:4과 그 내용이 연결된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인구 재배치의
필요성을 느꼈던 그 시점 직후에 여러 종교 행사가 거행되었기에(8-10장), 본장에 들
어와서야 비로소 인구 재배치 사업이 실행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위른
여기서 인구 재배치 사업이 느헤미야의 의도와는 달리 지연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
다. 오히려 느헤미야도 여러 종교 행사, 혹은 신앙 부흥 운동 뒤에 인구 재비치 사업
을 시행하려는 의도를 가졌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인구를 이동시키는 일이 필요하였
다. 그러나 그 같은 인구 재배치 사업은 자칫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킬 만한
불씨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인구 재배치에 앞서 먼저 신앙적 감
화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백성들이 인구 재배치 사업의 참뜻을
충분히 이해하여 느헤미야의 시책에 아무런 저항없이 적극적으로 따라줄 것이었기 때
문이다.
어쨌든 그 당시의 상황에서 인구 재배치 사업은 불가피하였다. 비록 성벽은 완성되
었지만(7:1) 그 성벽으 수비할 사람이 없다면 우여 곡절(迂餘曲折) 끝에 완공한 그 성
벽도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느헤미야는 시급히 다른 곳에 살고
있던 백성들의 일부를 예루살렘으로 이주시켜야만 했다. 사실 앞서 예루살렘에서 각종
신앙 집회가 열리는 동안에는 비록 인구재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사
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적으로부터의 공격이 있더라도 방어에는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
다. 하지만 모든 신앙 집회의 종료와 함께 백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짐
으로써 예루살렘은 다시 텅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신속히 인구 재배치가 이루어
지지 않고 방치될 경우, 대적자들의 공격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라 예루살렘은
철저히 노략되고 심지어는 그렇게도 어렵사리 건축된 성전도 다시 훼파될 가능성이 켰
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또한 그들의 신앙적 순수성, 그리
고 통일성을 유지시켜야만 한다는 소명 의식을 소유했었다. 그래서 그는 감당하기 어
려운 사역들이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한다는 일념(一念)으로 자신에게 맡
겨진 그 과업을 온전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장에 나타난 명단은 대상 9장에 언급된 명단과 구성과 매우 유사한 형식을
갖고 있다. 즉, 본장에 기술된 명단은 '유다 자손-베냐민 자손-제사장-레위 사람-성문
지기-노래하는 자' 등의 순서로,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역대서에 묘사된 명단 또한
'유다-베냐민 자손-제사장-레위 사람- 문지기...-찬송하는 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 9장의 명단이 바벧론의 포로에서 돌아와 그 기업에 거한 자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반면(대상 9:2) 본장의 명단은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된 후 그 성안에
재정착한 사람들을 언급했다(1, 2절)는 점에서 두 명단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같은 내용의 본장을 통하여 (1)세상자서의 성도들의 삶은 교회 생활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을 때 만족스럽게 영위될 수 있으며(행 1:8), (2)하나
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이나 설비(設備)가 아닌, 사람 그 자체
임(마 4:19-22)을 깨닫게 된다.
1. 인구 재배치를 위한 방법(11:1-2)
느헤미야가 어떻게 인구 재배치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본
문은 본장의 서두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즉, 본문은 광대한 지역에 비해 거민이 적었
던 예루살렘 성(7:4)의 방어를 위해 취한 느헤미야의 슬기로운 방법을 소개하는 장면
이다. 즉, 본문은 (1)일반 백성들을 제비뽑아 성안에 거주케 한 사실을 언급한 구절(1
절)과, (2)당시 백성들의 반응을 묘사한 구절(2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 보아 울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도 방위로 인힌 위험 부담을 우려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
기를 기피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당시 느헤미야가 인구 재배치를 위하여 사용한 방버은 다름아닌 제비뽑기였
다. 그러데 이 방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적 차원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주
로 사용해 왔었다(수 15:1;삿 1:3;삼상 10:20, 21;행 1:26).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
들은 비록 인간이 제비를 뽑지만 그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반영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잠 16:33). 따라서 이 방식에 의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할 자로 뽑힌
자는 반드시 그 결과에 승복해야만 했다. 사실 자신들의 현정착지에서 삶의 뿌리른 내
렸던 백성들은 예루발렘으로 삶의 터전을 옮김에 따라 새로이 직업을 바꾸어야만 했
고, 당시 산발랏 일당의 공격 목표였던 예루살렘 방어의 짐을 져야만 하는 고통이 따
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제비'의 결과를 따라야 했던 것은 그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거기에 순종할 경우, 그들에게는 큰 축복이 임할 것이 틀립없었
기 때문이다(신 4:40).
우리는 이 같은 본 단락을 통하여 (1)성도들 중에는 기쁨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부
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가 있을 수 있으며(고후 9:5, 7), (2)성도가 기쁨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거기에 맞추어 자신을 온전히 헌신
하는 것(롬 12:1)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느헤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의 성읍
2. 자원 정착자들의 명단(11:3-24)
언약에 대해 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언급한 대목(11-13장)에서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재정착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은 그 명단을 서술함으로 오직 결과만
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이주 때에 발생했을 듯한 문제나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사실
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오직 재정착한 사람들의 명단을 구분해서 기록함으로써 인
구 재배치가 성공적으로 마쳐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암시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본문은 (1)재청착민의 두목들의 명단을 기록한 전반부(3-9절)와, (2)레위 자손들
의 명단을 언급한 후반부(10-24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좀더 세분해서 살펴
보면 전반부의 내용은 (가)유다 자손의 명단(3-6절)과 (나)베냐민 자손의 명단(7-9절)
으로 구분되고, 후반부의 명단은 (가)제사장으로서 재정착한 사람들의 명단(10-14절),
(나)레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맡았던 자들의 명단(15-18절), (다)성 문지기의
명단과 기타의 사람들을 언급한 명단(19-24절) 등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구성으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재정착한 사람들의 계보를 명확히 밝혀 그 조상과 연결시킬 뿐
망 아니라(7:5-73) 그 숫자를 기록해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신앙적, 사회적으로 용
기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가를 드러낸다.
사실 이들은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을 떠나서 각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향촌(鄕
村)에 흩어졌다가 제비뽑기를 통해 다시 그들의 본성인 예루살렘에 거하게 된 자들이
거나, 아니면 성안에 남아서 악전 고투(惡戰苦鬪)하던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본서 저
자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두목을 먼저 서술하고 나서 레위 지파에 속한 자들의 명단과 그 수효를 기술한다. 이는 본서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구성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즉, 느헤미야는 먼저 백성들의 두목을 기록함으로써 그들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의 이름을 먼저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그 두목들의 족보를 상세히 기록해 그들의 조상이 누구였나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본서 저자는 자신의 제사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저자의 의도는 비단 본문뿐망 아니라 본서 여러 곳(3:28-29;7:39-45;8:7,9,11:10:2-39;12:1-26,44-47;13:10- 4)에 나타나는 바, 이것은 느헤미야의 관심, 즉 그가 갖고 있었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현실적, 가시적 회복 대한 관심과 함께 종교적, 제의적, 영적 회복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본문을 그 특성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백성 대표자들의 명단(3-9절) : 이들은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으로 구분되는데 전자의 자손은 468명(6절)이었고, 후자의 자손은 928명(8절)이었다. 그런데 유다 자손은 베냐민 자손보다 휠씬 적었지만 그들은 유다의 후손 가운데 베레스의 자손으로서 모두 용사였기 때문에(6절) 예루살렘을 방어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제비뽑기를 통해 강건한 용사들이 선택된 것은 예루살렘 성의 방비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고 볼 수 있다.
(2)제사장들의 명단(10-14절) : 이들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 바, (가)스라야를 지도자로 한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 822명(10-12a절), (나)아다야를 위시한 족장들 242명(12b절, 13절a절), (다)아맛대를 중심으로 한 용맹스런 128명(13b절, 14절) 등이다. 이렇게 지도층의 인물들이 성안에 거주하도록 제비뽑힌 것은 정말 다행스런 결과였다. 왜하면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만이 성안에 거주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매우 난처한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기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관여를 발견할 수 있다.
(3)레위 사람들과 성 문직의 명단(15-18절) : 전자의 수효는 284명이었고(18절), 후자의 숫자는 172명(19절)이었다. 그런데 이같이 하나님의 전(殿)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위해, 또는 성문의 통제를 위해 레위인들이 제비를 통해 선택받았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들의 역할이야말로 하나님의 제사를 위해, 그리고 성(城)의 안전과 백성들의 단일성, 종교성을 위해(13;15-22) 꼭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 단락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성도들이 행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자신들이 생각할 때는 극히 미미(微微)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며(마 25:40), (2)가시적(可視的)인 희생이 뒤따를 때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마 10:32). 그리고 (3)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은 실천적인 행동을 통해서 표현된다(마 10:38)는 것을 깨닫게 된다.
3. 성밖 백성들이 살던 지역(11:25-36)
예루살렘에 재정착한 사람들의 명단을 언급하는 본장에서 지금까지는 수도 예루살렘 성 안에 정착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술하였다(3-24절). 이에 이어지는 본문은 당시 예루살렘 성밖에 거주하던 자들의 명단을 서술한 것으로 본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목이다. 죽, 본문은 이스라엘의 수도에 거주하던 자들을 제외한 당시 귀환민들의 주요 삶의 터전의 일부를 기록한 장면이다. 이렇난 본문은 (1)예루살렘 밖의 유다 자손들이 살던 곳을 언급한 전반부(25-30절)와, (2)성밖의 베냐민 자손들이 거하던 장소를 기록한 후반부(31-36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 느헤미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드이 살았던 지명에 대해 자세히 언급할 뿐만 아니라 귀환 후 백성들이 살앙아던 지역의 분포에 관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이와 더불어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이 지역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슬픈 당시의 사정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 단락에서 느헤미야가 성읍의 명칭을 나열한 더 깊은 영적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 나열된 성읍의 이름이 주로 여호수아 15장에서 사용한 고대의 것들이라는 점이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즉, 성밖의 유다 자손들이 거주하던 곳은 대체로 예루살렘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남방 고지(高地)인 기럇 아바를 중심으로 한 헤브론 지역의 남방과 산간 지대, 예루살렘 서북방 산간과 서방 해안 평야 지역이었고, 성밖의 베냐민 자손들은 예루살렘 북방과 서북방 산간 지역, 즉 본래 베냐민 사람들이 분배받았던 곳(수 18:11-28)에 거주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지역들은 이스라엘의 크로 작은 역상 있었던 곳이며, 유다 민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창 13:8;35;27; 민 13:21,22: 수 10:1-37;20;5-7;21:10-13; 시마 2:1-3,11;15:7-10; 왕상 13;1-10; 왕하 23:4, 15-20등).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느헤미야가 가나안 땅의 완전한 회복을 염원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같은 단언은 여기의 성읍들중 일부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분적으로 점령했던 곳이라는 사실(Fensham)로써 입증된다<1-2절 주제 강해 참조>. 어쨌든 느헤미야는 여호수아 시대의 고대 지명을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제2의 가나안 정복, 곧 이스라엘의 완전한 주권 회복을 소망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원했던 것은 세속적 왕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른 다윗 왕국의 영화가 재현되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만왕의 왕, 앞으로 구원자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자신이 받은 계시의 빛 범위 안에서 앞으로 메시야의 세상 통치가 있을 것을 전망하였다. 물론 그의 종말론은 오늘날의 완성된 계시의 빛에 비추어 본다면 결코 온전하였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세상 끝날에 있을 메시아의 통치를 소망할 만한 믿음을 가졌었다. 바로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드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가졌으며, 그 마음 때문에 그는 성벽 재건의 위대한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본 단락을 통하여 (1)내세에 대한 분명한 소망의 유무(有無)는 성도가 소유한 신앙의 온전성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며(히 11;8-10), (2)내세에 대한 분명한 소망의 소유자만이 현세의 삶에도 충실할 수 있음(빌 4:5)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