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 - 총독 느헤미야를 가리킨다. 이처럼 총독 느헤미야가 언약서에 인친 자의 명단 초두에 나오는 것은, 그가 금번과 같은 신앙 운동의 주도자였음을 시사한다. '하가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1: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방백'(* , 티르솨타)은 8:9에서는 '총독'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시드기야 - 본절의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사이에는 접속사 '와우'(* )가 있다.그러나 '시드기야'와 2절 초두의 '스라야' 사이 부터에는 접속사가 사용되지 않는다.결국 이는 본절의 두사람, 즉 '느헤미야'와 '시드기야'가 2-8절의 인물들과 구별된자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즉, 2-8절의 인물들이 제사장 곧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데반하여 본절의 두 사람은 정치적 권세를 가졌던 지도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본다면 여기의 '시드기야'는 총독 느헤미야의 서기관이었던 '사독'(13:13)과 동일 인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이름이 모두 '의롭다'를 뜻하는 '차다크'(* )라는 어근에서 파생됐다는 점도 이 같은 추측을 어느 정도 됫받침한다.
=====10:2
여기서부터 8절까지에 나열된 21명의 제사장 명단 중 적어도 열 다섯은 개인 이름이 아닌 가계명(家系名)이다. 12장에 기록된 1차 귀환자들의 명단에 또다시 여기 기록된 이름들이 나온다는 점이 그 사실을 됫받침해준다. 그 예로 스라야, 예레미야, 아나랴 등을 들 수 있다(12:1-7). 이 같은 점에서 볼 때 당시 종교계의 으뜸가는 지도자였던(8:1,13) 에스라의 이름이 본 명단에서 누락된 사실도 이해될 수 었다. 즉, 에스라는 그가 속했던 가문의 우두머리가 인을 침으로써 개인적으로 인을 칠 필요가 없었던것이다(Kidner).
스라야 - 스 2:2의 '스라야'이다(7:7;12:1;스 2:2). 따라서 이것은 느헤미야 당시의 제사장 개인 이름이 아니라 한 가문의 이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에스라'는 바로이 가문에 속했었다(스 7:1).
아사랴 - 이것도 제사장 개인 이름이 아닌 가문명(家門名)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이다.
예레미야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이름이다. 그 이름의 의미는'여호와께서 일어나실 것이다'이다.
=====10:3
바스홀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家系名)이다(스 2:38).
아마랴 - 스룹바벨과 같이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이름으로서(12:2),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의 뜻이다.
말기야 - '여호와는 왕'이란 뜻이다.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알 수 없다.
=====10:4
핫두스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으로서(12:2), '대적자' 의 의미이다.
스바냐 - '여호와께서 숨기셨다' 의 의미이다. 이것 역시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이다(12:14).
말룩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으로서(12:2), '통치하는'의 의미이다.
=====10:5
하림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이다(스 2:39).
므레못 -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인 듯하다(12:15). '높은곳들'의 뜻이다.
오바댜 - '여호와를 섬김'의 의미이다(12:4).
=====10:6
다나엘 - 본 문맥이 제사장 직분의 가문명을 나열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에스라와 함께 귀환했던 이다말 자손의 제사장일 가능성은 희박하다(스 8:2). '하나님의재판관'의 의미이다.
긴느돈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긴느도이'와 동일한 가문인 듯하다(12:4).'정원사'의 뜻이다.
바룩 - '복된'이란 뜻이다.
=====10:7
므술람 - '동맹한'의 뜻이다.
아비야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이다(12:17).'아버지는 여호와'의 뜻이다.
미야민 - 최초로 귀환한 제사장 가족의 하나로서(12:5),'운이 좋은'의 의미이다.
=====10:8
마아시야 - '여호와는 피난처이시다' 의 뜻이다. 이것은 12:5의 '마아댜'의 오기인듯하다(Rawlinson).
빌개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이름'빌가'(12:5,18)와 동일하다.'그침'의 뜻이다.
스마야 - 제사장 가문의 가문명이다(12:18). '여호와께서 들으셨다'의 뜻이다.
=====10:9
여기서부터 13절까지는 레위 사람들의 명단이다. 그러나 제사장의 경우와는 달리가계명(家系名)이 아닌 개인명(個人名)이다. 이와같이 봐야 할 까닭은, 여기에 나열되는 이름들이 8장과 9장에서 대부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Fensham).
아사냐의 아들 예수아 - 9:4의 '예수아'인 뜻하다.
헤나닷의 자손 중 빈누이 - 9:4의 '바니'이다(3:18;9:4). 한편, '헤나닷'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레위 사람들의 조상이다(스 3:9).
갓미엘 - 9:4,5을 참조하라.
=====10:10
스바냐 - 9:4,5에서도 여기처럼 '갓미엘'과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호디야 - 9:5을 참조하라.
그리다 - 에스라를 도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하여 깨닫게 해준 사람이다(8:7;스 10:23). '불구가 됨'의 의미이다.
블라야 - 에스라를 도와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우쳐 준사람(8:7). '여호와께서 구별하셨다'의 뜻이다.
하난 - 이 사람도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해 주는 이로써 에스라를 도왔다(8:7).'은총'이란 뜻이다.
=====10:11
미가 - 여기서만 언급되는 인물이다.'누가 여호와와 같은가?'의 뜻이다.
르홉 - '넓이'의 뜻이다.
하사뱌 -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인물이다(스 8:19).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의 뜻이다.
=====10:12
삭굴 - '염두에 두는'의 의미이다.
세레뱌 -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였고, 그를 도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우쳐 준 인물이다(8:7;스 8:18).
스바냐 - 9:4을 참조하라.'여호와께서 숨기셨다'의 뜻이다.
=====10:13
호디야 - 9:5의 '호디야'나 에스라를 도와서 율법을 깨닫게 한 사람(8:7)중 하나일것이다.
바니 - 9:4을 참조하라. 에스라를 도와서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친 사람들과도 동일인일 것이다(8:7).
브니누 - 오직 여기서만 나오는 이름으로서 '우리의 아들'이란 뜻이다.
=====10:14
여기서부터 27절까지에서는 일반 백성들의 가문명(家門名)이 나열되고 있다. 14-19절의 이름들이 대부분 에스라 2장의 귀환 가족의 이름과 중복된다는 점은 그 사실을능히 증명할만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Fensham). 그런데 20-27절의 가계명(家系名)은 느 3장의 성벽 재건자들의 명단에 일부가 언급될 뿐 최초 귀환 가족의 명단중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 낯선 이름들을 마이어스(Myers)는 (1) 바벨론으로끌려가지 않았던 무리, (2) 바벨론의 공격이 있었을 때 은신했다가 나중에 백성들에게나타난 무리 등으로 본다. 하지만 그 같은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1) 세월이흐르면서 백성들의 인구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인구가 많은 가문이 나뉘어져 여러 개의 가문으로 되었으며 또한 (2) 지명으로 자신의 가계를 표시했던 무리들이 인명으로그것을 표시하기 시작했다고 봄이 가장 무난하다(Fensham). 본문 당시는 첫 번째포로귀환이 있은 후 약 100년이 경과되었던 때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바로스 - 스 2:3을 참조하라.
바핫모압 - 스 2:6을 참조하라.
엘람 - 스 2:7을 참조하라.
삿두 - 스 2:8을 참조하라.
바니 - 스 2:10을 참조하라.
=====10:15
분니 - 포로에서 돌아온 후 새로 생긴 가문일 것이다.
아스갓 - 스 2:12을참조하라.
베배 - 스 2:11의 '브배'와 동일하다.
=====10:16
아도니야 - 새로 생긴 가문으로 짐작된다. '여호와는 주님이시다'의 뜻이다.
비그왜 - 스 2:14을 참조하라.
아딘 - 스 2:15을 참조하라.
=====10:17
아델 - 스 2:16을 참조하라.
히스기야 - '아델 자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새로운 가문인 듯하다(7:21). '여호와로 인해 강해짐'의 뜻이다.
앗술 - 새로운 형성된 가문일 것이다.'도움이 되는'의 의미이다.
=====10:18
호디야 - 새로 생긴 가문인듯하다.
하숨 - 스 2:19을 참조하라.
베새 - 스 2:17을 참조하라.
=====10:19
하립 - 새로 생긴 가문이다.
아나돗 - '아나돗 자손'은 자신들의 보계를 입증치 못하여 그조상이 살던 지방을확인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정되었었다(스 2:23). 아마 그들은 그지명을 자신들의 가문명으로 삼았을 것이다.
노배 - 이것은 '느보'를 가리킬 것이다(스 2:29). 그렇다면 이것도 지명이 가계명으로 된 경우중의 하나이다.
=====10:20
막비아스 - 새로 형성된 가문임이 분명하다.'멸종자'의 뜻이다.
므술람 - '동맹한'의 뜻이다.
헤실 - '보호된'의 뜻이다.
=====10:21
므세사벨 - '하나님께 구출된'의 뜻이다.
사독 - '의로움'의 뜻이다.
앗두아 - '알고 있는'의 뜻이다.
=====10:22
블라댜 - '여호와께서 원하셨다'의 뜻이다. 하난 -'은총'의 뜻이다.
아나야 -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의 뜻이다.
=====10:23
호세아 -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다'의 뜻이다.
하나냐 - '여호와께서 은총을 베푸셨다'의 뜻이다.
핫숩 - '명철한'의 뜻이다.
=====10:24
할르헤스 - '복술자'의 뜻이다.
빌하 - '겁이 많은'의 뜻이다.
소벡 - '떠남'의 의미이다.
=====10:25
르훔 - '인정 많은'의 뜻이다.
하삽나 - '여호와께서 나를 생각하셨다'의 뜻이다.
마아세나 - '여호와의 일'의 의미이다.
=====10:26
아히야 - '여호와의 형제'의 뜻이다.
하난 - '은총'의 뜻이다.
아난 - '구름'의 뜻이다.
=====10:27
말룩 - '통치하는'의 뜻이다.
하림 - 5절의 '하림'과는 동명 이인임이 분명하다.
바아나 - '고통 가운데의'라는 뜻이다.
=====10:28
본절 이하에서는 언약 문서에 인친 백성들이 맹세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그 언약에대한 철저한 준수를 다짐하는 내용이 전개된다.
그 남은 백성 - 직접 서명을 하지 않은 서민들을 가리킨다. 직접 서명을 한 사람은한 가문의 대표적 지도자만이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서명하지는않았으나 그들의 대표가 서명했기 때문에 마치 본인이 한 것과 다름없었다. 한편, 본장의 1-17절에서 인을 친 것은 각 가문의 대표였다는 점에 근거하여, 여기의 '그남은'이라는 말은 다음의 '제사장' 등을 모두 수식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 - 이들도 레위 지파 사람들로 크게는 레위사람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협의적으로 이들은 성전 제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역을 수행했던 '레위 사람'과는 구별됐었다(스 2:40-42). 어떻든 '레위 사람'이 이들을 대표하여(9-13절)언약서에 서명을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느디님 사람들 - 이들은 혈통적으로 볼 때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으나 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스 2:43), '레위 사람'을 도와 성전 봉사의 직무를 수행했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레위 사람들이 이들을 대표하여 언약서에 인을 쳤을 것이다.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 -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를 구성하던 또 다른 계층이었다. 즉, 이들은 원래는 이방인이 었으나 포로에서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에 가입한(스 6:21) 무리였다(Rawlinson). 이들은 자신들의 본처(本處)를 떠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로 이주(移住)한후, 할례를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창 17:12,13).
무릇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 - 8:2,3의 표현을 빌면 '알아들을 만한 회중'이다. 따라서 이들은 언약및 언약서에 인을 치는 것이 무엇인지릍 이해하는 정상적인 지각을지닌 사람(Rawlinson)을 말한 것이지 특별한 지식의 소유자들을 말함이 아니다.
=====10:29
그 형제 귀인들 - 언약 문서에 인을 친 족장 및 그 밖의 지도자들을 뜻한다.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 '좇아'( ,마하지킴)는 원래 '견고하게 하다'혹은 '붙잡다'(사 41:13)의 뜻이지만, 여기서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될 경우 마치 남자가 여성을 강간하려고 달려들듯이 굳게 붙잡는 행위를 가리킨다(잠7:13). 그렇다면이 단어는 결국 나머지 백성들이 지도자들의 인을 친 행위 혹은 그 근본적인 뜻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을 의미한다. 한편, '저주로 맹세하기를'은, 언약이나 조약을지키지 않을 경우 지키지 않은 당사자 자신에게 '저주'가 내려져도 달게 받겠다는 공언(公言)과 함께 이루어지는 언약 방식이다(민 5:21).
=====10:30
이방인과의 통혼(通婚)과 관련된 에스라의 개혁 조치(스 9,10장)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그 같은 악습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에스라의 개혁으로 통혼의 문제는 얼마 동안 거의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스라가페르시아 궁전으로 소환되어 오랜 기간 그곳에 있었고(8:1), 느헤미야도 에스라가 다시 돌아오기 직전에 온터라, 이방인과의 통혼 악습은 되살아났음이 분명하다.(13:23).
=====10:31
본절은 백성들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킬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팔려 할지라도 - 이와 같은 사실은 본서 13:16에서 발견되어진다. 당시에 이 같은 일은 비일 비재했던 것 같다. 사실 이스라엘은 여러가지 산출물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그 부족을 어차피 이방 사람들과의 교역을 통해서 채워야 했다. 그러다보니 이방인 상인들이 예루살렘까지 출입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안식일에까지 상행위를 하였다.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 '안식일이나 성일'은 차라리 '안식일 곧 성일'로 봄이 적절하다(Fensham). 즉, 본문은 동일한 뜻의 말을 반복함으로써 안식일의 귀중한 의의와 안식일 준수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출 20:8-11;신 5:12-15).
제 칠 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치 말고 놀려야만 한다는 율법 규정과 관련이 있다(출 23:10,11;레 25:2-7). 이러한 안식년 규례는 안식일 규례보다 더욱 안 지켜졌던 것 같다.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 이것은 안식년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독촉치 말고1년 연기해 주어야 한다는 율법 규정과 관련된다(신 15:1-3). 그러나 본 문구는 1년연기가 아닌 '완전한 면제'를 뜻한다. 이처럼 백성들이 율법에서 요구하는 그 이상의선행을 결심한 까닭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가난한 자들의 부채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홍역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5:1-13). 사실 그 문제는 진작 해결되어져야만했었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에스라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대각성 운동으로 백성들이 새로워지기를 원하면서 골치거리로 남아있던 그 문제의 해결을 자원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이러한 자발적 결단은 일회적인 것으로 이해됨이 무난하겠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매안식년마다빚이 완전히 탕감되어진다면, 백성들은 빚을 주지도 않을 것이고, 반드시 꾸어쓸필요가 있는 사람은 그로 인하여 심각한 어려움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0:32
본절과 같은 결정은 그 당시의 독특한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었다. 즉,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로 있을 때는 막대한 왕의 수입(收入)중 일부가 성전 재정을 위해 보태졌었으나, 페르시아의 피정복 상태 하에 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재정난으로 성전의 효과적 운영이 심히 어려웠다.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 출 30:11-16에는 이십 세 이상된 모든백성들이 생명의 속전으로서 반 세겔씩 바쳤고 이 돈은 성막 건물을 제작하는 비용으로 쓰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구 조사가 있었을 때에 특별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것이어서 정기적인 성전세의 개념으로 보기는 힘들다. 아마 후대에가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성전세 명목으로 일정한 액수가 납세되었던 것 같으며, 예수당시의 성전세는 매년 반 세겔이었다(마 17:24). 고레스, 다리오 및 아닥사스다등의조서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위해 공적기금이 사용되도록 허락되었지만(스6:8-10), 그러한 기금은 언제 중단될지 몰랐고 더욱이 성전운영이 이방의 재원(財源)에 의존된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했다(Brockington). 따라서 비록 백성들의 생활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성전세를 삼분 일 세겔씩 납부키로 자원하여 결단을 내린 것이다.
=====10:33
본절은 '성전세'가 거두어져서 구체적으로 어디에 쓰여질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구약 시대에는 개인이 자신의 제물을 가져와서 드리는 제사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성전 자체에서 제물을 조달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다.
진설병 - 성소의 떡상 위에 두 줄로 여섯 개씩 그래서 모두 열 두개가 놓여졌던 떡이었다(레 24:6).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했고(레 24:8). 물려낸 것은 제사장의 몫이었다(레 24:9). 이것은 크기가 작아 만드는 비용이 얼마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라는 그 중요성 때문에, 성전세 용도(用途)의 첫부분에 나온다(Rawlinson).
항상 드리는 소제 - 항상 드리는 '번제'와 함께 성전에서 매일 드렸던 제사이다.약 2.2l의 밀가루에 약 0.9l의 기름을 섞어서 만든 떡이 그 제물이었다(민 28:3).
항상 드리는 번제 - 이것은 아침과 저녁 하루 2회씩 드려졌던 희생 제사이다. 흠없는 어린 수양이 그 제물이었다(민 28:3).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 - '안식일'에는 평일에 드려지던 상번제와는달리 일 년된 어린 수양 두 마리가 소제와 함께 제물로 드려졌었다(민 28:9). 그리고'초하루', 즉 '월삭'(민 28:11)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수양 한마리 그리고 어린 수양 일곱 마리가 소제와 함께 제물로 드려졌었다(민 28:11-14). 여기에 포도주를 제물로 한 전제(奠祭)도 드려져야 했다(민 28:14). 한편, '정한 절기'는 3대 절기인 유월절(민 28:16-25), 맥추절(민 28:26-31)., 초막절(민 29:7-11)등을 가리킨다. 이때는엄청난 양의 제물이 바쳐져야 했었다.
성물 - 이것은 속건제의 제물을 의미하는 듯하다(레 6:17).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 - 이것은 개인적 죄의 용서를 위한 속죄제(레 4:27-31)가 아닌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이다(레 4:13-21).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 - 이것은 (1) 성전의 유지를 위한 수선(修繕)작업(Fensham), (2) 성전에서 사용되는 기구 및 비품을 충당.보존하는 일(Rawlinson)모두를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
=====10:34
본절의 새로운 규정은, 희생 제사때에 사용되는 많은 양의 화목(火木)을 조달하기위한 목적에 따라 제정되었다. 레위기에도 이와 유사한 규정이 언급되기는 한다(레6:12). 그러나 거기서는 화목의 조달을 위해 각 '종족'에게 물량을 할당하는 것은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 시대에 들어와서는 황폐해진 연고로 화목(火木)의 확보가 곤란해서 본절과 같은 특별한 규정을 제정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Rawlinson).
정한 기한에...하나님의 전에 드려서 -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포로후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채집한 나무를 성전에 드린 날(13:31)이 압월, 즉종교력으로는 5월, 민간력으로는 11월, 양력으로는 7-8월의 14일이라고 하였다(Rawlison).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 거의 축제일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율법에 기록한대로...단에 사르게 하였고 - 본절의 '율법'은 상번제를 드리기 위한제단의 불을 항상 피워야 한다는 레 6:12의 내용이다. 한편, 이 '단'은 사방 6m의 넓이였으니(A.Noordtzij) 여기에 불이 계속 타도록 하는데 소용되는 나무의 양은 실로엄청났을 것이다. 이처럼 그 '단'에 항상 불이 타오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헌신과 충성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빌 3:13,14).
=====10:35
본절과 같은 명령은 모세 율법에 명시된 것이다(출 34:26;레 19:24;신 2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특별히 강조되어야 했던 이유는, 별다른 기업없이 다만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만 살아야 했던 레위 사람들의 생활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산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정신을갖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음도 분명하다.
=====10:36
생축(牲畜)의 처음 난 것...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 이것은 백성들의 맏아들이하나님께 바쳐져야 했던 것과 동일하다(출 34:19). 이같이 사람을 포함한 모든 초태생(初胎生)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던 것은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심을 기억케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특히 장자를 대속하게했던 것은 백성 전체가 몸과 마음을 거룩히 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헌신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한편, 이렇듯 장자를 하나님께 돌리게 된 기원은 출애굽 직전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은 죽이지 않으셨던 데서 유래한다(출 13:13-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속전(贖錢)을 대신 지불함으로써 그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는 셈이 되도록 하셨다.반면 짐승의 초태생은 대속이 안 되었고, 이에 따라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만했다(출 13:15).
=====10:37
36절까지가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를 위하여 바쳐진 것들인 반면, 본절의 것은 제사장의 생활을 위하여 바쳐진 예물들이었다(Batten).
처음 익은 밀의 가루 - 여기의 '처음'(* ,레쉬트)은 순서상의 처음 혹은 질적으로서의 으뜸 등의 뜻이 있다. 펜샴(Fensham)이나 윌리엄슨(Williamson)등은 후자의의미를 타당히 여겨서 본 문구를 '가장 좋은 가루 떡'으로 이해했다(민 15:18-21).
거제물(擧祭物) -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 중 제사장 몫을 의미하는 듯하다(39절 ;레 7:32).
하나님의 전골방 - 성전 건물 안에 있던 부속실(附屬室)이었다(13:4,5).
물산의 십일조 - 이것은 다른 지파들처럼 자신들의 기업을 갖고 있지 않았던 레위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민 18:21).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자신들이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의 몫으로 주어야 했다(민 18:26). 여기서 이처럼 십일조가 강조되고 있는 것은, 당시 별다른 기업이 없어서 오직 십일조만으로 생활을 해야 했던 레위 사람의 많은 수가 십일조가 걷히지 않음으로써 큰 어려움에 봉착한 나머지 성전을 떠나버렸던 그 당시 상황때문이었다(39절 ; 13:10). 말라기에서도 바로 이같은 강조가 나타나고 있는데(말 3:6-15). 이러한 사태는 거의 동시대 사람인 느헤미야와 말라기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10:38
십일조를 받을 때...제사장...함께 있을 것이요 - 이것도 세금 징수자에게 감독자를 붙였던 페르시아의 방식과 유사하다(Fensham). 느헤미야는 이같이 함으로써 그 십일조 중의 제사장 몫이 확실히 파악될 수 있도록 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제사장과 레위사람간의 십일조 분배 문제로 인한 오해 및 갈등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같은 느헤미야의 조치는 레위 사람을 의심한 때문이라고는 볼수 없다.
십일조의 십분 일 - 제사자의 몫이다(민 18:26).
=====10:39
여기에 언급되는 물품(物品)들은 37,38절의 것들이다. 골방에 둘 것이라 - 레위인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성읍에서 십일조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수입을 확보하였으나, 제사장들은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가져오는 것을 직접받았다. 따라서 제사장들은 성전 봉사에만 더욱 정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Rawlinson).
우리가...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 문자적으로는 '우리가...하나님의 전을 거절하지 아니하리라'의 뜻이다. 아무튼 본 문구는 그 당시 레위 사람들의 성전 봉사로부터의 이탈 현상이 있었음을 시사해준다(37절 주석 참조).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회개 기도를 인도했고(9:5-38). 또한 언약서에 인치는 일을 주도했던(9:4,5)을 가리킨다.
성벽 재건 후부터 고조되어 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 운동은 백성들이 언
약을 갱신하고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본장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즉 앞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렬히 회개하는 사실을 언급했던 저자는 본장에서 백성들이 하나
님의 언약을 견고히 세워(9:38) 새로운 삶을 살기로 굳게 다짐하는 사실을 기록함으로
써 백성들이 영적으로 각성하고 그 분위기가 극에 달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 갱신을 기술하고 있는 본장은 언약서인 인(印)친 지도자들의 명단
을 적어 놓은 전반부(1-27절)와, 백성들이 지키기로 맹세한 세부 항목을 언급한 후반
부(28-39절)로 나누어 진다. 이렇난 본장을 '백성들의 다짐'이라는 주제하에 다시 세
분하면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사실(28-31절), (3)백성들이 성젖 제사 유지를 다짐하는
사실(32-39절)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구조와 본장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 백성들이 지키지 못하연 율법의 기
본 규정을 재확인할 수 있으며 백성들의 새로운 각오가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
다.
특히 백성들이 변환된 삶을 살기로 다짐한 것은, 이전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전적
으로 거스르는 것이었음을 절감한 결과였다(9:34). 즉, 백성들은 율법에 불성실한 생
활이 계속될 경우 자신들에게 더 큰 징계가 내릴 것임을 깨닫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결단은 회개의 열매였다고 말할 수 있다.물론 회개
한 자들에게는 보다 구체적인 열매들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하지만, 그러한 삶의
열매가 맺혀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보서 저
자는 먼저 백성들의 통렬한 회개를 언급한 후에(9장) 본장과 같은 백성들의 맹세와 엄
속한 결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본장에 나타난 백성들의 신앙적 결단은 느헤미야 시대 그 당시의 상황에
서 볼 때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들어오던 이방 문화 및 종교
의 물결을 헤쳐나가야 하는 시대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13:15-18). 자칫 잘못하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방 세게에 문화.종교적으로 동화(同化)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
던 것이다. 이방인과의 통혼(30절, 스 10:10,11)이나 안식일에 있었던 상 행위
(13;15-17)등 실제적인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자들은 백성
들이 구별된 삶을 살고 자신들의 문화. 종교적 순수성을 유지하도록 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을 갱신하고 율법의 규례대로 살아가기로 다짐하
는 백성들의 결의는 이스라엘의 순수성 고취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왜나하면 율법의 규례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은 귀환 후 시대를 살고 있는 당시의 백
성들 자신에게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여호와의 신앙을 그 후손
들에게도 순수한 상태 그대로 물려줄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하였기 때문
이다.
둘째, 이와 더불어 당시 백성들은 인구 재배치(11장)라는 행정적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 경건한 삶을 위한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할 또 다른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인구 재배치 사업은 민족의 안위(安危)를 좌우할 만큼 비중이 큰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경우, 이스라엘 공동체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능히 보
호될 수 있었지만 그 같은 사업이 백성들의 율법 준수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 회복이
없이 외형적 모습만 갖추게 되면 민족의 안보는 심히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인구 재배치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
적 결단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본장을 통하여 (1)성도들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의 순
수성을 유지해야 하며(살전 1:7;약 1:27), (2)결코 신앙 부흥 운동이 선행되지 않는
사회 개혁 운동은 진정한 성공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마 6:33)을 깨닫게 된다.
1. 인(印)친 자들의 명단(10:1-27)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할 것을 서약하는 장면이 언급된 전
단락(9:32-38)에 이어서 본문은 그 서약한 자, 즉 인친 자들의 명단이 기록된 부분이
다. 백성들이 언약한 바를 공식적으로 확증하기 위해서 그 인친 자들의 명단을 제시하
는 본문은 (1)제사자들의 명단(1-8절), (2)레위 사람들의 명단(9-13절), (3)백성의 두
목들의 명단(14-27절)등에 관한 언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과 성벽 봉헌식 전에 언급된 명단(12:1-26)과 비교해 볼 때 서로 다른
부분이 나타난다. 이러한 차이는 본문의 인친 자들의 명단이 개인의 이름이 아닌 에
슬, 느헤미야 시대에 살고 있던 족속의 대표자들 가리키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즉, 저
자는 본문에서 인친자들의 명단을 기록할 때, 제사장, 레위 사람, 그리고 백성의 두령
들 이름을 나열함으로써 언약서에 인치는 일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음을 시
사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본문의 명단에 기록된 이름들이 개인의 이름뿐망 아니라 가
문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이름들이라는 점에서, 실제적으로는 백성 전체를 포함한 언
약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2장에 나타난 명단은 성벽의 봉현과 여호
와 신앙의 종교 제도 체계를 갖추기 위해 제사장 및 레위인, 그리고 족장의 이름을 기
록한 것이다. 드러기에 여기에도 분명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인을 치는 일은 언약서나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반지를
갖고 도장을 찍는 행위로 해당 문서의 유호성을 확증하는 일이다. 실제로 매대와 바사
에서는 임금이 조서에 인을 치고 확증하면 누구에 의해서도 변개(變改)가 절대 불가능
하다는 규례가 있었다(단 6;8,9). 또한 에스라 시대에 성전을 재건하는 일도 고레스
왕의 인친 조서의 발견으로 인해서 가능했던 것은 그 좋은 예이다(스 6:1-12).
신약 성경을 보더라도 '인치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타난다(고후 1:22; 계 7:3-8).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들을 성령의 보증을 통하여 확증하심을 나타낸 것으로 그
들의 장래 구원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인친 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본문의 영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의 타락된 생활의 청산과 함께 새로운 각오로 언약에 충실한 생활을 하
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오를 상징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9:38). 사실 백성들
은 앞에서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전적인 배은망덕(背恩忘德)
임을 자복하고(9:33-35) 철저히 회개한 바 있었다(9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치는 행
위를 공식적으로 행한 것은 자신들은 이제 더 이상 좌악된 생활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
적, 의미와, 이러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께서 용인하시기를 바라는 탄원적 의미에서였
다고 하겠다.
둘째, 다른 한편으로 인치는 일은 백성들에 의해서 파기되었던 모세 언약의 갱신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깨져 버린
모세 언약을 다시 갱신함으로 언약 파기가 가져다 준 바벧론 포로 시대와 그 이후 계
속 당해온 고통(9:27)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로 귀환
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성벽을 재건하고(6:15) 인구 재정착을 위
한 귀환민의 명단을 기록하는 일(7:5-69) 등으로 정치.행정 사업을 위한 기초 작업을
마친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 갱신, 즉 신앙 부흥을 이룩함으로 이스라엘
회복의 든든한 기반을 갖추기를 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들 스스로가
언약서에 인을 친 사실을 자발적인 언약 갱신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그 의
미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성도들은 죄악을 회개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의 백성으로 의롭게 살 것을 언제나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롬
6:15-23).
2. 율법 준수의 결단(10:28-31)
언약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인(印)을 쳤던 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전 단락에 이에 본
문은 남아 있는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언약을 지킬 것을 결단하는 장면이다. 즉, 본문
은 백성들 전체가 맹세함으로 갱신했던 언약의 실제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대
목이다.
이러한 본문은 백성들이 결단한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1)남아 있던 전체 회중의 율법 준수를 위한 결단(28,29절), (2)이방인과의 통혼
을 금하기 위한 결단(30절), (3)안식일과 성일, 그리고 안식년을 지키기 위한 결단(31
절) 등이다. 결국 저자는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당시 백성들이 범하고 있던 율법의 기
본 규정들을 다시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러한 규정에 순종하려는 백성들의 새로운 각오
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1차 귀환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룹바벧과 예수아와
같은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나자 이방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그들은 주면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방인들의
아들.딸들과 통혼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스 9:1, 2). 그러던 중에 에스라가
귀환하게되어 대대적인 백성 정화 운동을 벌인 결고, 이러한 통혼 문제는 일단 수그러
지게 되었다(스 10장). 그러나 에스라가 바벧론으로 잠시 귀환함으로 이스라엘에 지도
자가 없게 되자 백성들은 다시금 이방인과 통혼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느헤미야 총
독으로 부임한 B.C. 445년 당시에는 이방인과의 결혼이 몹시 성행하였던 것이다(30
절).
한펴 이방인에 의한 영향은 통혼 문제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도 나타나
기 시작하였다(31절). 당시 백성들은 이방인들이 물건을 팔면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물건을 사곤 하였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백성들이 맹세하고 언약을 세우
는 본문의 기사는 백성들의 확고한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하고 안식일을 온전히 지
키기로 결단한 것은, 자신의 조상들이 그 두 가지 악습 때문에 바벧론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연고였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벧론에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하나
님의 징벌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하고 안식
일을 범하는 일을 절대 금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 두가지 범죄를
다시 범하지 않으리라는 결단을 않고 그 같은 범죄를 계속 저질렀다면 이스라엘 백성
들은 보다 참담한 쪽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이러한 죄를 금하기로 맹세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과의 통혼과 상거래를 금하기로 다짐했던 또 따른 이유는 이러한 결
혼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사악한 문화와 종교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침투하게 되었기 때
문이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이방인과의 결혼 자체를 금지했던 것이다(출 34:16). 그러
나 이러한 율법은 인종 차별의 절대적 규범이 아닌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
기 위한 상대적 규범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백성들이 세운 맹세는 이스라
엘의 신앙 회복을 위한 필수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1)성도들이 세속적인 것에서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과(약 1:27), (2)안
식일에는 일상적인 일을 쉬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출 20:8-11; 막 2:27, 28)는 사
실을 깨닫게 된다.
3. 성전 제사 유지를 위한 결단(10:32-39)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건한 삶을 위한 결단(28-31절)에 이어지는 부분으로서
성전 유지를 규례대로 하기 위해 백성들이 결단한 세부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이 되는 서전 유지를 위한 백성들의 결단을 언급하는 본
문은, (1)성전세 수납에 관한 언급(32-34절), (2)제사장에게 드릴 초대생에 관한 언급
(35, 36절), 그리고 (3)레위인에게 드릴 십일조 규례의 기록(37-39절) 등으로 구성되
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레위인들에게 드려진 십일조의 규례를 통해 이스라엘
백의 신앙 유지를 위한 제도적 배려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본 단락 주제 강해 참조).
사실 포로 구히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의 부재(不在)로 인한 영적 침체와
비례하여 성전 제사를 소홀히 해 왔던 것 같다. 심지어는 배서들이 담당해야 할 의무
를 제대로 감당치 않음으로써 오직 십일조에 의존하여 생활하던 레위인들이 성전을 떠
나는 사례까지 발생하였다(13:10). 그러자 제사드리는 이을 포함한 성전에 속한 모든
제반 업무가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상황에서
본장에 기록된 백성들의 성전 제사 유지를 위한 결단은 몇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고 하
겠다.
첫째, 본문은 성전 제사를 통한 이스라엘의 신앙 유지라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
다. 왜냐하면 성전 제사가 원활히 드려지는 지의 여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적
순수성이 보존될 수 있을지를 좌우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율법에 따른 백성들의 경건
한 삶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순수성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다. 그러나 예배와 제
사의 행위는 (1)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이며(시 29:2), (2)율법에 따른 경건한 삶도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통해 가능하며(사 40:31), (3)그것을 통하여 이교적 제사 형태
를 갖는 이방인과 구별된 신분임을 자각하게 된다(시 24;3-60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둘째, 성전에서 희생 제사가 드려져야만 했던 더욱 중요한 이유는, 구약 시대의 성
도들은 그림자요 예표인 그 제사를 통해서 실체요 원형이신 완전한 구세주 예수 그리
스도의 도래를 기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히 10:1).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이유였
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줄곧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제사를 드렸고, 또한 예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느헤미야 당시는 그
이전의 시대보다 그리스도의 도래가 휠씬 가까워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분의 오심을
더욱 솜아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의 주도 아래 성
전 제사의 원활한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결단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한 내용의 본문을 통하여 (1)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제사를 완성시킨
대제사장이라는 사실과(히 9장), (2)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교제(예
배)에 있다는 사실(롬 12장)을 깨닫게 된다.
*십일조의 신약적 의미. 구약의 십일조는 성전 제사의 유지를 위하여 드려졌었
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십일조는 특히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할비로 활용될 수 있게
끔 바쳐졌다(민 18:21-24). 따라서 십일조는 성전, 특히 레위인 및 제사장의 직무과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된 신약 시대를 사는 성도
들에게 십일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실 정전과 그에 부속된 것들 곧 제사장, 레위인. 희생 제물 등은 그것들의 원형
(Antitype)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무의미하게 되었다(히 10:1-10). 그럼에
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희생 제사를 드리거나 스스로 제사장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
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전면 부정하는 행위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의 십일조 역시 의무적 규정으로서는 강조될 수 없게 되
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 제도를 인정하신 일이 분명히 있지만(마 23;23;눅
11:42) 이것은 십일조의 의무적 규정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런 규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래 뜻을 이해하게 하고 존주아게 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구속사적 변역(變易)을 인정치 않는다면(히 7:12), 오늘날 십일조 제
도는 여전히 의식과 형식으로 치우치게 될 것이다.
그 한 가지 실례를 보면 구약의 십일조는 (1)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 18:21-24),
(2)절기 준수시 성전에 모일 때 사용되는 비용을 위한 십일조(신 14:23-26), (3)매 삼
년마다 드려졌던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신 14:28, 29) 등 세 가지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약 성경은 성도들에게 3/10의 의무적 헌금을 요구한 셈이었다. 그
래서 느헤미야서와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단수인 '마아제르'(* )가 아니라 복수
'메아세림'(* )으로 표기하고 있다(37절;말 3:10).
따라서 만일 오늘날에도 구약의 십일조 제도가 의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면, 1/10이 아닌 3/10을 헌납 비율로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십일조 제도
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3/10을 내라고 말하는 사람
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돌판에 율법이 새겨져 있는(렘 31:33; 히 8:10) 신약 시대의 성도
들은 더 이상 옛 언약 아래서 지켜졌던 법적인 십일조 제도에 얽매이지 말고 바울 사
도가 우리에게 가르쳤던 신앙 양심에 따른 헌금 원리를 익혀야만 한다. 즉, 바울의 헌
금 원리는 자원하는 마음과(고후 8:3), 이(利)를 얻은 대로(고전 16:2) 드리는 방식이
었다. 그래서 바울은 일률적인 헌납 비율을 정하지 않고 오히려 헌납자 자신의 신앙
수준과 형편을 고려하여 바치기를 의도했던 것이다.
사실 식구가 5명인 한 가정의 수입이 25만원이라고 할 경우, 과연 그 가정에서 2만
5천원을 오직 십일조 헌금의 명목으로만 바칠 수 있겠는다? 물론 식구가 5명인 다른
가정의 수입이 100만원이라고 할 때, 그 가정으 경우는 10만원이 아니라 그 이상도 드릴 능력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엥켈 계수(전체 생계비 중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가 80 정도인 가정과 엥켈 계수가 20인 가정에 대해서 동일한 비율의 헌납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지극히 다양한 계층의 성원들로 구성된 오늘날의 교회는 신학적인 측면이나 현실적 측면에서 '십일조 이데올로기'를 깨뜨려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가난한 자들에게도 기독교의 복음이 바르게 증거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서, 성도들은 믿음에 따라 자신들의 헌금 목표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고, 교회는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여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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