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닥사스다 이십 년 니산 월 - '니산월'은 유대 종교력으로 정월에 해당된다. 그리고 '하나니'등이 페르시아에 도착했던 '기슬르 월' 9월이다(1:1). 그렇다면 1:1의'기슬르 월'이 '아닥사스다 제 이십 년'이었다고 할 경우, 본절의 '니산 월'은 '아닥사스다 이십 일 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본절에 '이십 년'이라고 표기된 까닭은, 그 당시 느헤미야가 왕의 재위년수를, '디스리 월'(양력으로 9-10월)부터를 새해로 간주하는 유대 민간력을 좇아 계산하였기 때문이다(Fensham ). 따라서 '기슬르'(1:1)이나 본절의 '니산 월'은 동일한 년도에 속하는 셈이 된다.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 이것은 그당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문구이다(Williamson, Fensham ). 사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와 같은 잔치를 매우 자주베풀었었다(Fensham, 에 1:3; 5:6). 또한 이것은 고대 중근동 국가들의 일반적 관습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때 아닥사스다 왕은 바벨론에서의 월동을 마치고, '니산 월'(양력으로 3-4 월), 즉 봄이 되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있던 '수산 궁'으로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1:1). 아무튼 왕이 베푼잔치는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1:11). 한편, 느헤미야는 민족적 재난에 관한 소식을듣고서 그토록 가슴아파 하면서도 결코 성급하게 서두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요청을 올릴 가장 적절한 기회를 찾으면서 계속 하나님께 기도해 왔음이분명하다(Edwin Yamauchi).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 어떤 이들은 바사 왕실에 술 관원이 여럿 있었다는사실을 전제하고서, 본절에서 느헤미야가 술을 올릴 차례가 온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愁色)이 없었더니 - 이것에 대해서는 (1) 여기의'없었더니'(* , 로)를 '진실로'(* , 루)로 보고 '진실로 내가 그의 면전에서근심했었다'라고 하는 해석(Myers, LXX), (2) '왕의 앞에서'(* , 레파나이우)를 '전에'(* , 레파님)로 보고 '내가 전에는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해석(Rudolph), (3)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유지하되 '왕의 앞에서'(레파나이우)의'왕'을 비인칭으로 번역한 '그것'으로 보고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그 소식앞에서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해석(Fensham), (4)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인정하여개역성경의 번역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석(Williamson, Rawlinson, Schultz, Keil)등이 있다, 이처럼 (1) (2) (3) 의 견해는 모두 맛소라 본문의 수정을 주장하지만 그것을 입증치 못한다는 점에서 (4)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의 이문구는 느헤미야가 그 전에는 항상 밝은 얼굴로 자기의 소임을 다했음을 말해 준다고볼 수 있다.
=====2:2
왕이 이르시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의 기도(1:11)가 응답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사실 술 관원이 흥(興)을 최고조로 돋우어야 할 직책에 있으면서 도리어 연회장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은, 한편으로생각하면 그것을 주최한 왕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왕이 느헤미야에게 연민어린 관심을 보인 것은,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결과로밖에 볼수 없다.
근심(* , 로아으) - 이는 앞의 '수색'과 어근에 있어서는 동일하며, 전 7:3에서는 '슬픔'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 본절은 느헤미야가 왜 이 같은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이유는 (1) 왕이 연회장내에서 느헤미야가 슬픈 얼굴을 한 것으로 인해 진노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2) 왕이 느헤미야의 간청을 듣고오히려 진노하지 아니할까 하는 염려 등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Fensham). 그러나느헤미야의 '수색'에 대한 왕의 반응이 사뭇 동정적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2)의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왜 자신의 간청에 대해서 아닥사스다가진노할 것으로 염려했을까?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사업이 아닥사스다의 명령에따라 그의 즉위 초기에 중단됐음을 느헤미야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스 4:11, 21). 따라서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의 일로 예루살렘에 가겠노라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요구하는 일은, 곧 아닥사스다에게 그가 내렸던 이전의 명령을 번복하라는 것과다를 바 없으며 또한 이는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라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 부담이 뒤따랐다.
=====2:3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고대 중근동의 왕들에 대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찬사형의 인사이다(Rawlinson, Schultz, 왕상 1:31; 단 24:4; 3:9; 5:10; 6:6, 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사에 왕의 호감을 사려는 느헤미야의 의도가 담겨 있음을 배제할수는 없다,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 - '열조의 묘실', 즉 '조상의 무덤'은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시 되었다. 특히 왕족 및 귀족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이 같은 언급은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성읍' 곧 '예루살렘'을 외부의 침입로부터보호받아야 할 곳으로 간주토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닥사스다 왕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 따라 '예루살렘'(스 4:20 )이라는 고유 지명 대신 '성읍'이 사용되고 있다. 만일 느헤미야가 여기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면,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전에 사마리아 관리들의 요청에 따라 그곳에 성벽쌓는 일을 중지시켰던 사실을 쓸데없이 상기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을지도 모른다. 또한 본 문구는 느헤미야가 유다 지파 출신으로서, 그의 조상들이 예루살렘에 살았었음암시해준다(1:6).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 '황무하고'(* ,하레바)는 '말라불다'혹은 '죽이다'의 뜻을 갖는 동사 '하레브'(* )에서 온 형용사로서, 인간 혹은자연의 피조물 등이 특별한 원인에 의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시 106:9; 사 19:5; 34:10; 렘 26:9; 겔 6:6). 따라서 이것은 '하나니'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느헤미야에게 보고할 때(1:3) 사용한 단어, '훼파되고'(파라츠) 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있다. 또 '소화되었사오니'(* 에클루 바에쉬)는 문자적으로 '불에 의해서 먹혔다'의 뜻으로서 1:3의 '소화되었다'(니체투 바에쉬) 보다 강조적인 의미를 갖는다.
=====2:4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것은 느헤미야에게 간청할 기회를 주기 위한 질문이다.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이미 느헤미야를 위해 어떤 배려라도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갈다.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默禱)하고 -여기서 '묵도하고'(* , 에트팔렐)는 '간청하다' 혹은'기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팔랄'(* )의 재귀적 강의형으로서, 간절한 소원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매어 달리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1:17; 왕상 8:33; 왕하 19:20; 20:2). 느헤미야의 이 같은 기도는 (1) 자신의 소원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며, (2) 전달된 자신의 소원이 왕에의해서 호의적으로 가납될 수 있기를 바래서 드려졌음이 분명하다.
=====2:5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 이것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했던 것의 핵심적 내용이다. 다른 것들은 '성 중건'의 부차적 요소들일 뿐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성벽의 복구'를 뜻한다(3절).
=====2:6
왕후도 곁에 앉았더라 -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는, 왕이 국사(國事)와 관련된 귀빈을 맞이하고 있을 때는 '왕후'가 내전(內殿)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잔치가벌어지고 있는 자리였던 관계로 인하여 '왕후'도 왕과 함께 있었다(Rawlinson). 이런때에 '왕후'는 관례적으로 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왕의 발(足)곁에서 왕의 얼굴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으며 왕과 왕비가 이런 자세로 있는 동안 신하들은 그 주변에 모여 서 있었던 것 같다(Schultz). 그런데 느헤미야가 본절에서 '왕후'가 함께 있었음을 특별히 밝힌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세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1) 왕이 느헤미야에게 호의적 반응을 보인데는 '왕후'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Myers, Rudolph, Widengren), (2) 느헤미야가 왕으로부터팔레스틴으로 돌아가기 위한 허락을 받는 과정에서 '왕후'라는 장애물이 있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Batten), (3)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자신의 소원을알린 곳은 연회장이 아닌 은밀한 장소에서 였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Kidner)등이 있다. 그렇지만 첫째, '왕후'는 왕의 명령이 있을 경우 왕과 함께 연회장에 참석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매우 보편적이었으며(Rawlinson, 에 1:11) 둘째, 아닥사스다 당시에는 여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으며(Fensham) 셋째, 느헤미야 항상왕궁에 거하므로 왕의 처첩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넷째, 5절과6절은 왕이 왕후가 있었을 내전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추측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등으로 볼때, 위의 세 견해 중 (1)의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는 듯하다. 한편, '왕후'(* , 쉐갈)에 대해서는 (1) 이와 동일한 아람어 단어가 왕의 첩들을 의미한다는 사실(단 5:23)에 근거하여 왕의 많은 첩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소유한 여인이라는 견해(Williamson, Batten). (2) 이 '히브리 단어가 시 45:9에서는 첩이 아닌 왕비를 가리키고 있음을 근거로 해서 아닥사스다 왕의 유일한 정비(正妃)였던 '다마스피아'(Damaspia)라는 견해(Myers, Fensham, Rawlinson, Schultz)등으로 그 해석이 갈라진다. 그러나 첫째, '쉐갈'이라는 히브리 단어의 시편에서의 용례 둘째, '다마스피아'라는 왕후가 실제 역사속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해주는 문헌 등으로 미루어 볼때,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더 타당하다.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즉,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 보내기를 아쉬워했던 것이다. 한편, 이 문구는 동의적 대구법의 표현 방식이다. 따라서 '몇 날에 행할 길이며'와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는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데 소요되는 전(全)기간을 묻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아닥사스다 왕은 이러한 반복적 표현을 써서 느헤미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내가 기한을 정하고 - 이처럼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가 다시 올 날을 직접 정하지 않고, 느헤미야에게 직접 정하도록 한 것은 느헤미야에 대한 세심한 배려임이 분명하다(본 단락 주제 강해, '에스라 느헤미야의 약사'참조).
=====2:7
강 서편 총독들 - 여기의 '총독들'(* , 파하 우오트)은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관리를 가리킨다(스 8:36). 유프라테스 강 서편에는 이러한 관리들이 많았었던것 같다.
조서를 내게 주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 에스라의 경우 와는 달리 느헤미야는 다분히 정치적인 명목으로 귀환을 요청하고 있다(스 7:10과 비교). 따라서 그는팔레스틴으로 가는 여행 길에 페르시아의 지방 관리, 특히 사마리아 관리로부터 적대적인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았다(Fensham).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자신에 대한 적대 행위를 피하기 위해서 필요 적절한 증표를 왕에게 요구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이해된다.
=====2:8
왕의 삼림 감독 아삽 - 여기의 '삼림'(* ,파르데스)에 대해서는 (1) 레바논의 삼림(Fensham, Myers, Patrick), (2) 예루살렘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페르시아 왕의 정원(Schultz, Rawlinson), (3) 유다 왕가의 왕실 재산(대상 27:28)이었던, 평지의 감람 나무 밭(Williamson, Keil) 등의 세 가지 해석이 제시되고있다.그러나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성전공사를 위하여 레바논으로부터 목재를 들여온일이 있었으며(왕상 5:6; 스 3:7) 둘째,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새로이 복구하기위해서(3절) 필요한 막대한 양의 목재는 레바논 산지를 제외하고는, 적당한 조달처가없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셋째, 건축용으로 적절한 나무는 오직 레바논 산지에서 벌목되는 백향목 뿐이라는 사실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1)의 견해가 가장타당성이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1) 삼림 감독이었던 '아삽'이 히브리식이름의 소유자라는 점, (2) '삼림'이라는 단어가 고대 아리안어에서 온 것으로서 자연림이 아닌 울타리나 담장 등으로 둘러 싸여 있는 숲이 울창한 공원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는 점 등이 제시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반론은 첫째, 페르시아 왕이 멀리 유다땅에 개인적인 공원을 두었을 가능성은 문헌적 입증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희박하며둘째, '아삽'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말'(馬)을 뜻하는 폐르시아어 '아스파'에서 파생된 페르시아식 이름 '아스바다'(에 9:7)와 유사한 형태로도 볼수 있다(Schultz)는 사실등으로 미루어 볼 때 타당성이 약하다.
전에 속한 영문의 문 - 여기의 '영문'은 성전 북쪽에 위치 했었던 요새 혹은 망대이다(Fensham, Williamson, Rawlinson). '하나넬 망대'(3:1)는 바로 이것의 한 부분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성전의 보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였다. 후대에 들어서서는, 바로 이 자리에 헤롯왕(Herod the Great)에 의해서 '안토니아 영문'(AntoniaFortress)이 세워졌었다(Williamson).
성곽 - 성곽 건축에 목재가 직접적인 재료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필요하였을 것이며 '성곽'에 속한 여러 '문'(門)을 세우는 데 필수불가결 하였을 것이다(3:3, 6). 아무튼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목재가 '성곽' 건축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증거는 대단히 많다(R. Naumann, G. E. Wright).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내가 들어 갈수 있는 한집을 위하여'의 의미이다(Fensham). 그런데 '거할'(* , 보)이 특정한 임무의 수행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는 점(대상 12:17, 23, 38; 16:33; 19:3)에서 볼 때, 여기의 '집'은총독의 관저로 사용할 처소를 의미하는 듯하다(Schultz).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새로이 지어질 '집'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추측컨대 느헤미야는 자신의 형제 '하나니'(1:2)와 더블어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됐을때 머무를 처소에 대해서도 상의를 하였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집을 수리해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Williamson).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 느헤미야가 왕의 질문(4절)에 대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필요한 것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아닥사스다왕이 수산궁에 없는 동안(1:1) 하나님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기도를 했음(1:4 - 11)은 물론이고 그 성벽 재건을 위한 구체적 계획까지 세워 놓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Fensham).
=====2:9
본절의 내용과 왕의 허락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 공백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요세푸스는 그 기간을 무려 5년으로 잡는다(Ant. X i 5). 그러나 몇 달 간의 기도(2:1)와 안타까운 마음의 간청을 했던 느헤미야가 5년씩이나 참고 기다렸으리라고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극히 짧은 기간 내에 페르시아를 떠났다고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군대 장관과 마병을 나와 함께 하게 - 이 같은 모습은,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거절했던 에스라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대조된다(스 8:22) 그러나 본절에서 느헤미야가팔레스틴으로의 귀환 길에 폐르시아 군대를 대동한 것은 그가 에스라보다 불신앙적이어서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느헤미야의 역할이 에스라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즉,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이라는 자격(5:14)으로 예루살렘에 간다는 점에서,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율법 교육을 목표로 했던 에스라의 신앙적 차원의 여행과는표면적으로는 달랐다(스 7:10). 틀림없이 아닥사스다 왕은 (1) 느헤미야가 자신의 '술관원'이라는 특별한 신분의 소유자이며, (2) 유다 지역의 총독이라는 중대한 직분을부여받은 자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여 호위병들을 딸려 보냈을 것이다(Fensham).
=====2:10
본절과 같은 이방인들의 반응은, 성전 재건 사업에의 참여 요청이 거부된 사건(스4:1-6)이 있은 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냉전 상태가 매우 심화되었음을 잘 보여 준다.
호론 사람 산발랏 - 애굽 남부 지역인 '엘레판틴'(Elephantine)에서 발굴된 문서에는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으로서 언급되며 또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이 문서에 나타나는 두 아들의 이름에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뜻하는 어미(語尾)가 달려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대의 대제사장 가문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점(13:28)에서, 이들은 나름대로 여호와를 섬겼던 자들로 추측된다(Fensham). 그러나이들의 종교는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기 때문에(스 4:1, 2)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지녔던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여기서 '호론'은 윗 벨호론과아랫 벨호론(수 16:3, 5)중 어느 하나를 의미한다(Rawlinson, Myers). 이곳은 당시에사마리아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산발랏'은 바벨론식 이름으로서, '신(月神)이 생명을 주신다'의 뜻이다.
종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 - 여기의 '종'(에베드)은 '신하' 혹은 '부하'의 의미로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산발랏'의 휘하에 있던 인물이었던 셈이 된다(6:17, 18). 한편 '암몬 사람'은 반드시 '도비야'가 암몬 지역 출신이었거나 혹은 암몬 땅에 살고 있었음을 의미치는 않는다. 왜냐하면 '도비야'는 (1) 대제사장과 친밀하게 연락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자신을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으리라짐작되며(13:4), (2) 암몬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의미를갖는 유대식 '도비야'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도비야의 조상이 '암몬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무난하겠다(Williamson, Fensham).
심히 근심하더라 - 사마리아 총독의 이같은 반응은 (1) 성벽재건의 방해 공작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에 따른 두려움, (2) 예루살렘의 부흥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가 유다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상실할 가능성에 따른 염려(Schultz) 때문이었다.
=====2:11
거한 지 삼 일에 - 이같이 예루살렘 도착 후 '삼 일'을 쉰 까닭은 (1) 오랜 여행에따른 심신(心身)의 피로를 풀며, (2) 예루살렘의 정확한 상황을 청취하며, (3) 도모하려는 사업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은 에스라에게서도 발견된다(스 8:15, 32).
=====2:12
내가 말하지 아니하고 - 이것은 느헤미야 자신의 성벽 재건 계획이 '산발랏'과'도비야'에게 알려질 경우 그 사업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거나그 대적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해 올 것을 염려하여 취해진 조처였다. 느헤미야가 심지어 자신의 동족에게 까지 말하지 아니한 까닭은, 그들의 상당수가 '산발랏' 및'도비야'와 결혼 등 이모 저모로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Schultz, 6:18; 13:28).
밤에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 간접적인 보고로만 들은 예루살렘의 형편을 직접확인파악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느헤미야가 밤에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이런 확인 활동이 '산발랏'과 '도비야'와 내통하고 있던 유대인에 의해서 감지되지 않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의 '두어 사람'은 문자적으로 '소수'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등을 가리킬 것이다(1:2).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 오직 '느헤미야'만이 '짐승'을 탄 것은, 최대한으로 대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짐승'(* ,베헤마)은 일반적으로는 '말'과 '나귀'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콧소리를 심하게 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느헤미야가 탄 '짐승'은 나귀였을 것이다(Fensham).
=====2:13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 여기의 '골짜기 문'은 예루살롑의 남서쪽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한 문(門)이었다. 느헤미야가 하필 이 문을 택한이유는 그 지경이 가장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용정(龍井)으로 분문(糞門)에 이르는 동안 - 여기서 '용정으로'는 문자적으로 '용정의 앞쪽으로'이다. 이 '용정'은 힌놈의 꼴짜기와 기드론계곡의 합류점에서 남쪽으로 약 210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욥의 우물'(Jod's well)로 추측된다(Williamson). 한편, '분문'은 '골짜기 문'에서 약 450m, 즉 1천 규빗의 거리에 있었다(3:13).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의 최남단에 위치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나온 온갖 쓰레기, 심지어는 성전의 희생 제사 때 나온 짐승의 똥까지 이문을 통해서 힌놈의 골짜기에 버려졌었다(롑 7:31, 32).
성벽이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 이같이 느헤미야가 직접 확인한 상황은'하나니'의 보고 내용과 동일하다(1:3).
=====2:14
앞으로 행하여 - 우측, 즉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 보면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 '샘문'은 '분문'에서 북쪽으로 대략 120m 정도에 위치했으며 그 바로 앞에는 '실로암못'이 있었다(서론 도표, '성벽 재건의 모형도' 참조). 한편 '왕의 못'은 3:15에서는 '셀라 못'으로 지칭되고 있는 '실로암 못'이다.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 이는 그곳이 무너져내린 성벽의 잔해및 온갖 쓰레기 등으로 메워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통하여본절의 이 기록이 실제 사실이었음을 증명하였다.
=====2:15
시내를 쫓아 올라가서 - 느헤미야가 나귀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간 것을 가리킨다.즉, 그가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기드론 시내 쪽으로 내려간 후 그 시내를 따라서 북쪽으로 향했음을 가리킨다.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왔으나 - 이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가지않았음을 시사해준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에는 생략되었으나 느헤미야가 성벽 탐사를 계속 진행하여 끝까지 다 돌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성벽의 북쪽과 북서쪽은그다지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절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그보다는 느헤미야가 성벽의 북동쪽 모퉁이까지 살펴봄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중도에서 돌아온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무난하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북쪽 성벽 지역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느헤미야 일행이 눈에띌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추측 때문이다.
=====2:16
느헤미야의 조사 활동이 이처럼 비밀리에 진행 됐던 까닭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성벽 재건 계획이 누설될 가능성이 매우 큰 때문이었다(12절 주석 참조).
방백들(* , 세가님) - 광범위하게 사용된 단어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의미를 정의하기 곤란하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회중들에 의해서 선출된백성의 대표들로 본다(Widengren, Fensham, Rawlinson). 그런데 이 단어는 스9:2에서는 '두목'이라 번역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방백'(* , 사림)보다는 한 계급 낮은 신분으로 묘사된다(스 9:2). 한편, 이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유다사람 제사장 귀인 방백 - 이들은 당시 유다공동체를 구성했던 대표적인 네계층으로 이해될수 있을 듯하다. 여기의 '유다 사람'은 반드시 유다 지파 사람만을 의미치 않는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유다 지파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구수에있어서 가장 컸던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이처럼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포로 후 시대라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행정 및 경제의 측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분이었다(Williamson).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중 종교적 세력을 대표하는 신분으로 암시되는 듯하다. 한편 '귀인'(* , 호림)은그 문자적 의미로는 '자유로운 자'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이었으며 또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알수 없다. 다만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느정도의 권세를 갖고 있던 신분 정도로 추측될 뿐이다(Fensham). 또한 '방백'은 본절 초두의 '방백'과 동일하다. 이들은 '제사장'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행정 분야를 관장하던 신분이었던것 같다.
그 외에 일하는 자들 - 성벽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한자들을 가리킨다(PulpitCommentary).
=====2:17
본절과 같은 느헤미야의 발언(發言)이 암행 탐사가 있었던 때로부터 얼마의 기간이경과한 후에 행해졌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팔레스틴으로돌아온 후삼일 간 숙고할 기회를 가졌었고(11절), 직접적인 자신의 조사 활동을 통해서 모든 정황을 파악했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암행탐사 그 다음 날에 본절과 같은 발언이 있었을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당한곤경 - 여기서 '우리'는, 귀환한지 3일밖에 되지 않은 느헤미야가 본토의 유대인들과 깊은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Fensham). 한편, '곤경'(* , 하라아)은 1:3에서는 '환난'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성벽을 갖고 있지 못했던예루살렘 거민들이 이방인들의 상습적인 노략으로 인해 처하게 된 어려운 상황을 가리킨다(1:3).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수치를 받지 말자 - 유다의 다른 주요 성읍들은 나름대로의 방어용 성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Fensham). 그러나 오직 유다의 심장부이자,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만 방어용 성벽이 없어 노략을 계속 당한다는 사실은그 도시의 주민 뿐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백성들에까지 수치일 수밖에 없었다.
=====2:18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참여토륵 한 신앙적 원동력이 되었다(스 7:6).
왕이 내게 이른 말씀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케 한 정치적 원동력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을 주저하고 있었던 현실상의이유는 (1) '산발랏'과 같은 사마리아 관리의 방해(스 4:7 - 16), (2) 사마리아 관리의 참소에 따른 아닥사스다 왕의 성벽재건 중지령(中止令 )등의 정치적인 것들이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벽 재건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느헤미야에 대해서 아닥사스다 왕이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은 상당한 용기를 불어 넣을수 있었을 것이다(2-9절).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 이는 문자적으로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들의 손을 스스로 강하게 했다'의 의미이다(삼하 2:7). 본절은 성벽 재건 사업이 미미하기는 하지만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해준다(JB).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성벽 재건을 시도했었다(스 4:12).
=====2:19
산발랏 도비야 - 이들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라비아 사람 게셈 - '아라비아 사람'은 앗수르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단 동부 지역의 지배 계급이었다(본 단락 주제 강해, '아라비아 사람' 참조).한편 '게셈'이라는 이름은 애굽 땅에서 발견된 B. C. 5세기말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은 그릇에 그 아들 '카이누'(Qaynu)와 함께 여신 '한-일라트'(Han-'ilat)에게 헌신한자로서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아람어 비문에서는 '게달의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요단 동쪽및 남쪽지역을 다스리던 자였던 것 같다(Rawlinson). 이처럼 '게셈'이 '도바야'와는 달리 '산발랏'의 휘하에 있었던 한 관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6:2에서 이 '게셈'이 사마리아의총독 '산발랏'과 함께 느헤미야에게 대면(對面) 요청을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자명해진다.
업신여기고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 대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 시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무기이다. 즉, 하나는 '조롱'이며 또 하나는 '협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업신여기고'(* , 얄라구)는 '조롱하다'등의 뜻이 있는 '라아그'(* )의 사역형으로서, 마땅히 귀중히 여겨져야 할 어떤대상을 오히려 우습게 여기는 태도를 가리킨다(대하 30:10; 22:7; 잠 17:5). 한편,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일찍이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 관원들의 참소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복구사업을 중지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그 배경으로한다. 그러나 그러한 협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재건사업은 중지령을 내렸던 아닥사스다왕의 새로운 허락과 명령에 따라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20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산발랏 등의 적대적 태도에도 블구하고 자신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사항(7-9절)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느헤미야의 이 같은 태도는 인간의 어떠한 훼방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반영한다. 아울러 산발랏 일당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느헤미야에게 허락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느헤미야가 이미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산발랏 일당은 도리어 왕의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성벽 재건을 방해하고자 기를 썼던 셈이 된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 이 같은 느헤미야의 확신에 찬 응답은(1)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보호하고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과 (2)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던 실제적 체험(1:11)에 근거하였다.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名錄)도 없다 -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의문제에 대해서 간섭할 하등의 명분이나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다(스 4:2,3). 여기서 '기업'(* , 헬레크)은 이스라엘의 땅 분배와 관련해서 사용된 법정적 용어이다. 그런데 이용어는 자신의 반역 의사를 표명할 때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삼하20:1; 왕상 12:16) 볼 때, 여기의 '기업도 없고'는 산발랏 등이 이스라엘 백성의 일에절대적으로 참여할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Brockington). 한편, '권리'(* , 체다카)는 행정 구역으로서의 유다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는 법적 권리를 가리킨다(Williamson, Fensham). 앞의 '기업'이 시민권의 문제와 관련 있다면, 이것은 행정권과 관련이 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Williamson). 마지막으로 '명록'(* , 지카론)은 종교적 의식에의 참여권을 가리키는 듯하다(Fensham, Williamson).
성벽 재건을 증언하고 있는 본서 전반부(1-7장)에서 전장(前章)을 통해서 트헤미야
자신이 귀환하게 된 동기(1:1-3)와 그에 대히 저자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
(1:4-11)을 언급하였다. 이에 이어지는 본장은 그의 간절한 기도가 현실적으로 성취되
어 하나님의 일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대목이다. 즉, 본장은 앞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에 대한 응답을 다룬 부분으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해 성벽 재건
을 준비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본장은 (1)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귀환을 요청하는
모습을 그린 전반부(1-5절), (2)왕의 허락과 그에 따른 귀환 사실을 서술한 중반부
(6-9절), (3)귀환 후 성벽 탐사를 통해 재건을 준비하는 장면을 언급한 후반부(11-18
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 느헤미야는 귀환을 허락받게 된 배경과 더불
어 귀환후 성의 재건을 위한 작업 준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본
서 저자는 귀환에 따른 대적자들의 반응(10절)과 그들이 취한 대적 행위에 대해 자신
이 대저한 분명한 자세를 언급함으로써(19,20절) 성벽 재건 사업에 방해자들이 처음부
터 관여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1세가 예루살렘 성의 재건
에 필요한 재료의 공급을 위해 조서를 내린 사실(7,8절), 군대 장관과 마병들로 자신
을 호위하게 해서 예루살렘으로 보낸 사실(9절), 그리고 자신의 귀환을 위해, 또는 성
벽 재건 사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신 사실(8, 12, 18, 20절)등을 언
급해 자신의 귀환과 성벽의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을 드러내다.
사실 느헤미야의 귀환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그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적 흐름이 원만한 방향으로 고
정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만일 그의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적으로 극한의 상황을 맞이할 것이 당연하였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이방
백성들의 끊임없는 약탈로 인하여 하나님게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택하신 곳(9절;신
12:5), 곧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11:1, 18)은 완전히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훼파될 것이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특징을 상실하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 재건을 위해 스룹바벧을 들어 쓰신 것처럼 당신의 사람 느헤미야를
선택하셔서 성벽을 재건케 하신 것이다.
또한 이뿐망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바사 왕 고레스에게 역사하셔서(스 1장)
성전 재건 사업을 이룩할 수 있게 하신 것처럼 이제는 아닥사스 1세에게 섭리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고 보호하신다. 이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셨
다는 단정적인 암시와 함께 유다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남겨 놓은 자가 끊
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렘 23:3,4:암 5:15;롬 9:27). 이는 비록 하나님께서 무엇
이 부족한 분은 아니시지만(행 17:25) 그분께서는 언약을 맺으시면서까지 당신께서 택
하신 백성들로부터의 경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렘 32:38,39; 습 3:12).
우리는 이러한 본장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당신의 나라를 확정하고 계시며(스
1:1-4), (2)당신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당신께서 택하신 사람을 통해 사업을 전개
시키신다는 사실이다.
1. 왕에 대한 귀환 허락의 요청(2:1-5)
성벽 재건을 위한 준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본장에서 그 전반부에 해당되는 본문
은 느헤미야 자신이 귀환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즉, 본문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B.C.464-424)에게 예루살렘에로의 귀환을 요청하는 장면
으로 공식 석상(席上)이 아닌 사석(私席)에서 그 일이 진행되었던 상황을 저자 자신이
회상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은 (1)귀환을 요청한 역사적 시점을 언급한 구절(1절), (2)귀환
요청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사건을 그린 구절(2, 3절), 그리고 (3)
귀환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기술한 구절(4,5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본서 저
자인 느헤미야는 자신이 귀환하게 된 경위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 저자
는 이러한 경위 이면에 하나님이 섭리와 역사하심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
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은 성전 재건을 위해 1차 귀환했던 스롭바벧 당시의 공사 진행
과정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바, 포로 귀환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귀환 후의 공상에
까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위해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음을 나타낸 것이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동생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슬픈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
고 그 즉시 아악사스다 왕에게 귀한 요청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닥사스다 왕
은 하나니가 예루살렘 소식을 전했을 무렵 바벧론에서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1:1). 따라서 느헤미야 부득불 아닥사스 왕이 수산 궁으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려야
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 기간이 느헤미야에게 있어 기도할 수 있는 절
호의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기간 동안 그는 예루살렘의 형편을 간접적으로나
마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빨리 돌아갈
수 없음으로 인하여 안절부절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은 하나님께서 느헤미
야에게 주신 특별하고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느혜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을 면대(面對)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니로부터 예루
살렘의 소식을 들은 지 약 4개월 후였다. 그는 그 4개월 동안 하나님께 매우 간절히
기도(1:4)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 앞에서 근심어린 표정을 띈 것은 그
당시 예루살렘의 형편이 너무 심각하였기(3절;1:3)때문이다. 사실 느헤미야는 왕의 면
전에서 신하들이 슬픈 얼굴을 할 경우에 증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이미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스런 문제와 하나님 나라를 인하여 근심
하던 중이라서 그같이 어두운 표정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간에, 느
헤미야가 왕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지은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비공식적이고 사적(私
的)인 자리에서의 신하의 슬픈 얼글은 그 슬픈 표정 자체가 그 자리를 베풀었던 아닥
사스다 왕에게는 도전적 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닥사스다가 그러한 느헤미야에 대하여 호의적 반응을 보인 것(4절)은 하
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의 결과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4개월 동안 느헤미야가 드렸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아무튼 아닥사스다의 이러한 태도를 호기(好機)로 삼아 느헤
미야가 자신의 요구를 과감히 간청한 것은 참으로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만일 그
러한 호기를 놓쳐버린다면 느헤미야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가능성은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같은 호기를 포착할 수 있겠든가? 그래서 그는 반역을 꾀
한다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성벽 재
건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담대히 간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간청이 결코
인간적인 용기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 간청이 하나님께 대한 묵도(默禱) 후에
이루어졌음을 통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4절).
우리는 이 같은 본 단락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성도들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가져야 하며(행 11:25;갈 1:18), (2)성도들은 때를 분별할 능
력을 소유하여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선용해야 한다(엡 5;15-17; 골 4:5)는 사실이다.
그리고 (3)큰 문제에 대처할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며(막
9:29;14:38), (4)참된 신앙적 용기는 안하무인겨의 교만과 같은 종류와는 완전히 구별
된다는 사실(벧후 2:10;요일 4:17)을 깨닫게 된다.
*에스라.느헤미야의 약사(略史)
아닥사스다 1세 다리오 2세
(464-424년) (423-405년)
+---------------------------------------------------------------------++--+
| || |
| 느헤미야 느헤미야
에스라 귀환 에스라 바벧론행 느헤미야 귀환 에스라 재귀환 페르시아행 재귀환
| (스 7:1,10; | (느 2;10,11) (느 8:1) (느 13:6) |
| | | | | |
+-+ +--+ +-+ ++ ++ +-+
| | | | | |
--------------------------------------------------------------------------------
B.C. 458년 ? 444년 444년 여름 433년 432년
2. 왕의 허락과 귀환(2:6-9)
왕에 대한 귀환 허락에의 요청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섭리리 결과라는 사실을 암
시벅으로 드러내 전 단락(1-5절)에 이어지는 본문은 귀환에 대한 왕의 허락을 언급한
대목으로 느헤미야의 기도(1:5-11)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즉,
본문은 마치 성전 재건 공사를 위해 고레스 2세(B.C.539-529)가 스롭바벧에게 필요한
자재와 물자를 준 것(스 1:4-11)과 같이 성벽 재건을 위해 아닥사스다 1세가 귀환하는
느헤미야에게 적절한 조처를 취해 도와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믄
은 (1)귀환을 기꺼이 허락함과 동시에 다시 페르시아로 올 것을 요구한 사실을 언급함
으로써 와이 느헤미야 자신을 지극히 아꼈음을 암시하는 부분(6절), (2)왕이 행정적97
절), 군사적(9절)으로 자신의 귀환을 도와준 것을 나타내는 대목, 그리고 (3)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닥사스다 왕이 물질적인 부분까지 지원해 성벽 재건에 기여했음을 드러
내는 장면(8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같은 본문을 통해서 본서 저자 느헤미야는 자
신의 귀환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왕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관리였음에도 불고하고 그의 마음은 늘 유프라테스 강
서편 팔레스틴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접한 고국의 소식, 특히 유
다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과 예루살렘의 처참한 상황은 그에게 많은 내적 고통을 자져
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게서는 그에게 당신의 선하신 손길을 내어 보이셔
서(8절) 고토(故土) 귀환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출애굽이 기적의 개
입(출 7:14-12:36;14:15-31)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극히 자연
스럽고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로써 이루어졌는 바, 실로 사람의 심령과 얼굴 표정의
변화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다.
한편, 이 일은 스룹바벧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다 민족의 1차 귀환(B.C.537, 스 2
장)과 에스라를 중심으로 진행된 2차 귀환(B.C. 458, 스 7:1-10)에 이은 바벧론 포수
후의 제3차 귀환(B.C.444)으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회복케 되
는 결정적 사건이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가 있기 때문에 본서 저자는 느헤미야는 자신
의 귀환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를 자세히 언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전개시키는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구분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열
되어 있는 바,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왕의 행정적 배려(7절) : 아닥사스다 1
세는 유프라테스 강 서편의 바사 제국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려 귀환 길을 열어 달라는
느헤미야의 요청을 받고 기꺼이 응한다. (2)물질적 지원(8절) : 왕은 영문의 문과 성
곽 그리고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목재를 요구하는 느헤미야의 청에 순순히 응한다.
(3)군사적 협조(9절) : 아닥사스다 당시 2차로 귀환한 에스라의 무리들(스 8:21-23)과
는 달리 느헤미야가 군사적인 보호를 요청하자 왕은 이에 협조한다.
이 같은 내용의 느헤미야 귀환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2차 귀환과 그 특성
이 매우 유사한 바(스 7:11-28) 귀환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 그리고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특별 명령의 조서 등이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려던 느헤미야의 노력이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선택한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절대적 뜻과 그뜻을 분별한 하나님
의 사람 느헤미야의 온갖 정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같은 결과가 하나
님의 섭리와 도우심의 결과였다는 점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
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을 보호, 혹은 재건하기로
이미 작정하셨고 그 모든 것을 조성하시며 합력하시어 당신의 도구로 택하신 느헤미야
가 예루살레므오 갈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같은 본 단락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1)성도
는 불신자들과도 관계를 잘 유지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9마 5:9), (2)성도들은 주께 하듯 매사에 성실히 행함으로써 상전의 신임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엡 6:5-7;벧전 2:18). 그리고 (3)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일체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이루어짐(마 10:29)을 께닫게 된다.
3. 귀환 직후 파악된 문제점들(2:10-20)
하나님의 적극적인 도우심에 따라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귀
환한 사실을 언급한 앞 단락에 이어, 본분에서는 느헤미야가 도착 직후 성벽 재건과
관련된 두 가지의 문제점을 발견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느헤
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준비하는 장면으로 그 사역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그리
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1)느헤미야 자신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성벽의 현황을 은
밀히 탄사한 것에 대한 회고를 언급한 전반부(11-16절). (2)성벽 재건을 위해 백성들
에게 권면한 사실을 회상하는 중반부(17,18절), 그리고 (3)성벽 재건에 대한 반대자들
의 반응에 대처했던 모습들 그리는 후반부(10, 19, 20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은 당시 느헤미야가 파악한 성벽 재건에 대한 문제점이 그 핵심을 이룬
다. 즉, (1)성벽의 파괴 정도가 극심하여 재건이 쉽지 않으리라는 점(11-17절), (2)성
벽 재건을 방해하려는 사악한 세력들이 있었다는 점(10,18-20절)등이 바로 그것이다.
위의 두 가지 문제점 중 첫 번째 것은 느헤미야가 현장을 시찰함으로써 파악되었
다. 당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서쪽 중간 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해서 예
루살렘 동쪽 중간 지점까지의 성벽터를 직접 살펴봄으로써 그것의 파괴 정도가 극심하
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 쉽사리 끝낼 수 있는
사업이 아님을 분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성벽 윗 부분만 훼손되었다고 하더라도
기초를 포함한 아랫 부분이 온전했다면 재건 사업은 용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벽
은 바벧론 군대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쌓
아야만 했다.
성벽 재건 사업과 관련해서 파악된 두 번째 문제점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노골적 적
대 행위였다. 그들은 우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유다 총독의 자격으로 온 것에 대해
서부터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느헤미야가 유다 총독으로 옴에 따라
자신들의 행정 과할 구역이 좁아지게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같이 과민했던 것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 즉 이스라엘 백성과의 해묵은 종교적 감정
때문이었다(스 4:1-4). 그들은 과거 페르시아 정부에 거짓 고소를 하여 이스라엘 백성
들의 성벽 재건 사업을 초기 단계에서 중단시킨 일도 있었다(스 4:11-23). 이러한 이
유 때문에 느헤미야는 성벽에 대한 조사를 암암리에 마친 것이다. 만일 공개적으로 성
벽의 파괴 정도를 조사했다면 방해의 정도와 시기는 성벽의 실태 조사 때문에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느헤미야는 이 두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성벽 재
건 사업을 추진해야만 했다. 그런데 첫 번째 문제점은 백성들의 땀이 보다 많이 요구
되었을 뿐 그래도 충분히 극복 가능하였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점은 방해자들과의 불
가피한 마찰 때문에 극복하기 곤란하였다. 따라서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성벽 재건은 하나님
께서 바라시는 일이었다. 따라서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성벽 재건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느헤미야는 그야말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성벽 재건의 당위성을 역설하였고 이에 감동된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적자들의 반응(10절)과 도전적인 태도(19절)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보다 후자의 기록에 대적자의 이름이
더 참가되어 있다. 이는 방해자들의 수가 더 늘었음을 암시함과 더불어 그들이 방해하
기 위해 암묵적으로 공조(公租) 체제를 유지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성
벽 재건 공사가 실시될 때 조직적으로 방해하였다(4:1-9).
또한 이러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본문에는 귀환이 배경과 그 과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가 재삼 강조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본서 저자인 느
헤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감화시켰다'(12절a)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하나
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18절)고 표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하늘의 하나
님이 우리로 형통케'(20절) 하신다고 언급함으로써 성벽 재건 사업에 대한 여호와의
역사하심과 섭리하심을 드러난다.
한편, 성벽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예루살렘 성의 파괴에 대한 묘사(13-15절)
는 3장, 그리고 12:31-39과 함께 예루살렘에 대한 최고의 자료를 제공한다. 즉, 이 세
부분은 당시 예루살렘에 대한 지형학적 묘사로서 성경에 나타난 그 어느 것보다도 세
밀하고 뛰어난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본 단락을 통하여 (1)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성도
들에 대한 방해자들의 목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일을 중단토록 하는 것이며(신
1:24-28), (2)이에 대해서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만이 사단의 궤계를 물리질 수 있
(엠 6:16; 히 11:30)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3)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그 일을 감당
하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감동과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교훈받을 수 있다.
*아라비아 사람. 본문에 언급된 '아라비아 사람'은 아라비아 지역에 거주하던 여
러 족속들중 이스라엘의 둘째 아들 게달(창 25:13; 대상 1:29)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들은 팔레스틴 남동쪽 등의 광활한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거나(사 60:7;
렘 49:29, 32) 그 지역에서 산출되는 많은 귀중품을 중심으로 한 무역업에 일부 종사
하기도 하였다(겔 27:21).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그들은 활을 잘 사용하는 등(사
21:17)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기도 하였다.
하지만 B.C.7세기에 들어와서는 앗수르의 산헤립(B.C.705-681)에게 패하여 우상을
탈취당하는 등 곤욕을 치르었으나, 금.보석.향품.가축 등 많은 양(量)의 조공을 바치
기로 함으로써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그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완전 정복되어(렘 49:28) 국가의 독립성을 상실했었다. 그러나 바벧론의 멸망과 함께 그들은 또다시 자신들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비록 그들은 페르시아에 대해서 형식상 피정복 민족인양 태도를 취하였으나, 페르시아는 그들이 살던 애굽 인근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했던 나머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그들의 주권을 상당 부분 인정해 주었던 것 같다.
한편 그들의 종교는 고대 중근동 지역이 대부분 그랬듯이 다신적(多神的) 우상 숭배의 저급한 형태였다. 그런데 그들이 섬겼던 최고의 신은 '아타르사마인'(Atarsamain)이라는 여신(女神)으로, 특이한 것은 바로 이 여신이 숭배되던 사당에는 여사제(女司祭)를 중심으로 한 혼음 행위가 흔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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