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본장 1절에서 14절까지는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제2차 귀환민의
수효이다. 이 수효는 제1차 귀환민의 그것과(2:3-63) 비교하면 불과 1/3
가량에 불과하다(본서 서론,'포로 및 포로 귀환의 역사' 참조). 4-14절에
나오는 가족명들은 '요압 자손'을 제외하고는 2:3-15에 모두 나온다. 단,
본문의 명단은 두 명의 제사장 명단과 다윗의 후손이름으로 시작하는
특징을 보여준다(2절). 반면에 2장에서는 제사장 가계가 나중에 언급된다.
아닥사스다 왕 - 이에 대해서는 4장 주제 강해, '아닥사스다 왕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족장(*, 라쉬 아보테이헴). '그들의 조상들의
족장'이라는 문자적 의미가 있다. 보계(* , 히트야흐삼). '세다' 혹은
'등록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야하스'(* )의 재귀적 강의형 부정사이다.
따라서 '스스로 등록한 것'이란의미이다.
=====8:2
비느하스 - 아론의 손자요(대상 6:3, 4) 엘르아살의 아들(대상 6:4)로서,
아론의대제사장직을 아비 엘르아살을 거쳐서 인계받았던 인물이다(7:5).
따라서 이 사람의자손은 보다 정통성있는 제사장 가문으로 자처할 수
있었다.
게르솜 - '피난처'의 뜻이다. 이 사람은 한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것같다.
이다말 - 아론의 말째 아들이다(대상 6:3). 그의 후손은 정통성에 있어서
'비느하스' 가문보다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다말'의 후손인
'엘리'는 대제사장 및사사로서 그 명성을 날렸다(삼상 1:3). 그러나 엘리의
두 아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다윗과 솔로몬 초기의 아비아달을 끝으로 그
가문에서는 더 이상 대제사장이 나오지 못했다(왕상 2:26, 27, 35).
다니엘 - '하나님의 재판관'의 뜻이다. 다니엘서의 저자와는 상관이 없다.
다윗 자손 - 유다 왕가를 형성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 중 제1차로
귀환했던사람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는 스룹바벨이었다(1:8 ; 2:2).
핫두스 - 이 사람은 대상 3:19-22에 따르면 스룹바벨의 4대 손이다. 만일
스룹바벨이 B.C. 560년 경에 태어났다고 하고 한 세대를 약 25년으로
잡는다면, 핫두스는 스룹바벨로부터 4대째이므로 그가 B.C. 458년에
에스라와 함께 왔다는 사실은 매우 자연스럽다(Fensham).
=====8:3
일백 오십 명 - 바로스 자손 중 바벨론 생활을 청산하고 유다로
귀환하려고 자청한자의 숫자이다.
=====8:4
바핫모압 자손 - 2:6 주석을 참조하라.
스라히야 - '여호와는 뛰어나시다'의 뜻이다.
엘여호에내 - '내 눈이 여호와를 향한다'의 뜻이다.
=====8:5
스가냐 자손 - 대다수의 학자들은 칠십인역에 근거하여 '삿두 자손
스가냐'가 잘못표기된 것으로 본다.
야하시엘 - '하나님께서 보신다'라는 뜻이다.
=====8:6
아딘 자손 - 2:15 주석을 참조하라.
에벱 - '종'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를 갖는 '아브디엘'의
약칭인 듯하다.
=====8:7
엘람 자손 - 2:7 주석을 참조하라.
아달리야 - '여호와는 존귀하시다'의 뜻이다.
여사야 -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다'의 의미이다.
=====8:8
스바댜 자손 - 2:4 주석을 참조하라.
미가엘 -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뜻이다.
=====8:9
요압 자손 - 이들은 제1차 귀환에는 참여치 않은 듯하다. '요압'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의 뜻이다.
여히엘 - '하나님이여 영원무궁하옵소서'의 뜻이다.
오바댜 -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이다.
=====8:10
슬로밋 자손 -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니의 자손 슬로밋'으로 본다.
그 근거는 (1) 칠십인역이 이 같은 견해를 지지하며, (2) 최초 귀환자들
중에 '바니 자손'이있으며(2:10), (3) 4-12절의 귀환자 명단이 모두 조상의
이름, 가족의 대표 이름, 그대표의 아버지 이름 등 세 요소가 함께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슬로밋'은 '평화로움'의 뜻이다.
요시뱌 - '여호와께서 더하심'의 뜻이다.
=====8:11
베배 자손 - 2:11의 브배 자손과 동일하다.
=====8:12
아스갓자손 - 2:12주석을 참조하라.
학가단 - '작은'이란 뜻이다.
요하난 -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이란 뜻이다.
=====8:13
아도니감 - '나의 주께서 일어나셨다'의 의미이다(2:13).
나중 된 자(* , '아하로님') - 이것은 '오래 머물다'의 뜻을
갖는동사 '아하르'(*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뒤에 처져 남아 있었던
사람들을가리킨다. 그렇다면 여기의 '나중 된 자'는 아도니감 자손에 속한
가족들 중 마지막으로 에스라와 함께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가족의
우두머리를 가리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아도니감 자손은 한 가족도
빠짐없이 전체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했던 셈이다(Fensham).
엘리벨렛 - '구원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여우엘 -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이란 뜻이다.
스마야 - '여호와께서 들으셨다'의 뜻이다.
=====8:14
비그왜 자손 - 2:14주석을 참조하라.
우대 - '돕는'의 뜻이다.
사붓 - '주어진'의 뜻이다.
=====8:15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 - 이것은 동쪽으로부터 흘러와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들어가던 지류(支流)이다. 이 지류가 유프라테스 강과 만나는 곳에
'아하와'란 마을이 있었다. 현재는 그 강이 '이스 강'이란 명칭으로
불리워진다(Rawlinson). 아무튼 이 '강가'는 유대인이 많이 모여살고 있었던
'닙불'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삼 일 동안 장막에 유(留)하며 - 이같은 모습은 팔레스틴으로
귀환하려던 사람들이광야 여행길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느헤미야도 예루살렘에도착한 지 '사흘'이 지난 후에 성벽
시찰에 나섰다(느 2:11).
레위 자손이...없는지라 - 레위 자손들의 업무가 너무도
고통스러우리만큼 과중했기 때문에 그들은 고국행을 포기했을
것이다(Edwin Yamauchi). 제1차 귀환 때의 귀환자 명단에는 상당수의
레위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40-42). 그렇다면 여기서 에스라가
레위인들을 급히 데려오도록 한 것은 효율적인 성전 봉사에 대한 고려와
아울러 귀환 대열에 레위인들을 소수이나마 참여시킴으로써 어떤 상징적
의의를 부여하고자함이었다고도 추측할 수 있다(Williamson).
=====8:16
모든 족장 - 원문에는 '모든'이라는 말이 없다. 한편, 본절의 '족장'은
적절치 못한 번역인 듯하다. 물론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번역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렇지만이 '족장'들의 명단을 보면 이들이 결코
가족들의 대표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2-14절). 따라서 여기의
'족장'은 다만 레위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들, 즉 '지도자'로 보아야 한다(Fensham). 물론 이들 중에 한 가족의
우두머리가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13절).
엘리에셀 - '도움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아리엘 - '하나님의 사자(獅子)'의 뜻이다.
스마야 - 13절 주석을 참조하라.
엘라단 -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란 뜻이다.
야립 - '그가 다툴 것이다'의 뜻이다.
나단 - '주어진'이란 뜻이다.
스가랴 -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의 뜻이다.
므술람 - '동행한'의 뜻이다.
명철한 사람(* , 메비님) - '분별하다' 혹은 '이해하다'의
뜻을갖는 동사 '빈'(*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따라서 '분별력' 및
'이해력'을소유한 '율법 교사'를 가리킬 것이다(느 8:8, 9).
요야립 - '여호와께서 아심'이란 뜻이다.
=====8:17
가시뱌 지방 - 여기의 '가시뱌'는 혹자에 의해서 티그리스 강 유역의
'크테시폰'(Ktesiphon)으로 주장된다(Brockington). 그런데 이 '가시뱌'는
'은장색'(銀匠色)의뜻을 갖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이다(Kraeling). 그렇다면
이 고장은 원래 은세공(銀細工)이 발달했던 곳으로 추측될 만하다. 한편,
'지방'(* ,하마콤)은문자적으로 '그 장소'의 뜻이다. 이것은 (1) 단어 앞에
'그'의 뜻을 갖는 정관사 '하'(* )가 붙어있다는 사실, (2) '마콤'이란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지던 '성소'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신 12:5, 11 ; 14:23 ; 왕상 8:29 ; 렘7:3, 6, 7)라는 사실 등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말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1) 마치 애굽 땅 엘레판틴(Elephantine)에 있었던 것과 같이
바벨론에끌려갔던 일단의 유대인들이 세웠을 가상의 '성소'(Michaeli,
Williamson), (2) 다만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주거하던 곳(Pelaia) 등이라고
하는 두 견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 바벨론에서는 애굽의
엘레판틴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별도의 성전을 지녔다는 하등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둘째, 에스라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 거기서 많은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사실(18-20절) 등으로 볼 때 두 견해 중 후자의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이
'마콤'이란 단어가 유대 문헌에서는 율법을 가르치는 곳으로서의 회당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가시뱌'에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도하며 간단한 예배 의식이 거행되던 기관이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본단락 주제 강해, '회당의 기원' 참조).
그곳 족장 잇도 - 여기의 '잇도'(* )는 학개의 조상 '잇도'와는 뜻이 전혀
다른 이름이다. 그 의미는 '고상한' 혹은 '강력한'이다. 이 사람은
'가시뱌'에서는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잇도와 그 형제...느디님 사람 - 여기에 대해서는 (1) '그 형제'(*
,아히우)라는 단어의 후미에 있는 '와우'(* )가 원문상으로 바로 다음에
나오는'느디님 사람들'의 초두에 놓여져야 바른 것으로 보고 '나의 형제
잇도와 느디님 사람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Torrey), (2) '느디님 사람'(* )을 또다른 의미인 '임명된 자들'인 것으로 보고 '잇도와 그 형제, 즉
임명된 자들'이라고해석해야 된다는 견해(Williamson), (3) '잇도'는
레위인이었지만 동일하게 성전 봉사를 담당하는 직분자들이라는 점에서
'느디님 사람'들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적용했다는 견해(Keil), (4) '잇도'를 본문 그대로 '느디님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Rawlinson) 등으로
구분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첫째, '느디님 사람'은 원래 이방 출신의 성전
봉사자로서 레위인들에 대해서 별다른 영향력을 지닐 수 없었으며 둘째,
18절은 '잇도와 그 형제'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으며섯째, 에스라가 '잇도'를 신분 및 혈통이 다른 '느디님
사람'들과 '형제'라고 불렀을가능성이 적은 점 등에서 볼 때, 위의 네 견해
중 두 번째의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할 말을 일러주고 - 이는 문자적으로 '그들의 입에 할 말을 두었다'의
뜻이다.
수종들 자(*, 메솨르팀) - '섬기다', '봉사하다'의 뜻을 갖는'솨라트'(* )의
분사로서, 성전 제사와 관련된 직무의 수행자를 가리키는 말이다(대상 16:4
; 27:1).
=====8:18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 - 여기서 에스라가 특별히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한까닭은 (1) 본서와 함께 에스라가 기록한 역대상의
족보와 조화를 이루며(대상 2:1),(2) 그 이름이 갖는 특별한 의미(창
32:24-29)를 상기케 함으로 본절에서의 성과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축복임을
강조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말리의 자손 중 - '말리'는 레위의 아들 중 셋째(말째)였던 '므라리'의
장자로서성전의 기구를 책임지던 가족의 조상이 되었다(민 4:31-33). 다른
곳에서는 '마흘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출 6:19 ; 대상 23:21 ; 24:26). 한편,
그 이름의 뜻은 '병든'이다. 아무튼 '말리의 자손 중'이라는 말은 잇도가
데려온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전을섬기는 데 완전한 적격자임을 보여준다.
명철한 사람...세레뱌 '명철한 사람'(* , 세켈)은 종교적 의미의 '지혜'나
'분별력' 그리고 그것의 '적응 능력'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 NIV는 '유능한
사람'(capable man)으로 번역했다. 한편, '세레뱌'는 분명치는 않지만
'여호와께서 열(熱)을 보내셨다'의 뜻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성전의 용기
및 도구를 관리했으며(24절,에스드라상 8:47, 54), 에스라의 율법 교육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느 8:7 ; 9:4, 5; 10:12). 우리 말 번역은 분명히
밝혀주지 못하고 있지만 이 사람은 '말리'의 자손임이 확실하다.
=====8:19
므라리 자손 - '므라리'의 전체 후손 중 '므라리'의 장자인 '말리'의
후손을 뺀 나머지를 가리킨다. 즉, '말리'의 동생 '무시'의 후손들을
말한다(대상 6:19). 한편,'므라리'는 레위의 셋째 아들이었다(대상 6:16).
=====8:20
느디님 사람 - 2:43 주석을 참조하라(7:7).
디윗과 방백들이 주어...수종들게 한 - 이같은 사실은 성경의 직접적
기록에 의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추측컨대 다윗은 레위인들의 반차를
정하면서(대상 23-26장),그때 그 레위인들에게 느디님 사람들을 배정해줬던
것 같다(Fensham). 한편, '방백'(* , 사림)은 군사 혹은 정치 분야 등에
있어서의 책임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특별히 여기서는 '군사
지도자'를 가리키는 듯하다. 즉, 이들은 전쟁을통해 이방인들을 포로로
데려와서 그들을 '느디님 사람'들로 만들었던 것이다.
느디님 사람 중 이백 이십 명 - 이같이 많은 숫자는 바벨론 땅에 계속
잔류를 고집해왔던 레위인들을 팔레스틴으로 귀환토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Myers). 레위인들이 귀환을 거부한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과중한 고역(苦役)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결과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 이름이 다 기록되었느니라 - 이것은 여기의 느디님 사람들이 성전
봉사에 참여할 수 있을만한 자격자들임을 시사해주는 말이다.
=====8:21
금식을 선포하고 - 구약 성경은 보통 '금식'을 '기도'와 함께
언급한다(삼상 7:5,6 ; 대하 20:3-13 ; 에 4:16). 이것은 말할나위도 없이
특별한 문제 혹은 위기의 극복을 위해 시행되곤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 이것은 에스라 일행이 하나님께 기도
및 금식을하면서 가졌던 영적 태도이다. 한편, '스스로 겸비하여'(* ,
레히트아노트)는 '괴로움을 당하다' 혹은 '낮추다' 등의 의미가 있는 동사
'아나'(* )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을 학대하듯이
적극적으로 낮추어서어떤 인물 혹은 절대자에 대해서 지극히 순종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을 가리킨다(창16:9 ; 왕상 2:26 ; 시 107:17 ; 단 10:12).
어린 것(* , 타프) - 문자적으로 '조그만 어린이'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보다 광의적으로 해석하여 여자와 노인 그리고 어린이까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Myers).
평탄한 길(* , 데레크 예솨라) - 문자적으로 '곧은 길'의 의미이다(사
40:3, 4). 그러나 이것은 '안전한 길'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NIV, Williamson). 고대에는 길을 지키고 있다가 약탈을 일삼는(31절)
무리들이 꽤많았다고 한다(Fensham).
=====8:22
찾는...자에게 선을...배반하는...자에게는...진노를 - 이것은 성경의 주된
사상중의 하나이다(대하 15:2 ; 롬 2:6-10).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 많은 은금을 소유했고 또한
유약자들을 동반했던 에스라의 일행에게있어 매복해 있을 도적 떼는 큰
위협일 수밖에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21절).
보병...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 에스라는 자신의 귀환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였으므로, 위험한
귀환 여정을 오직 하나님의도우심만 의지하여 감행하고자
결단했다. 적어도 에스라에게 있어서는, 거룩한 목적을지니고 귀환하면서
이방의 왕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게 여겨졌을 것이다. 반면에
느헤미야의 경우는 바사 군대의 호위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간주하고
기꺼이 수락하였다(느 2:7-9). 우리는 이 사실만으로써 에스라의 믿음이
느헤미야의 믿음보다 우월하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페르시아 왕의
도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은각자의 관점과 강조점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다.
=====8:23
본절의 구체적 내용은 31절에 언급되고 있다.
=====8:24
본절부터 30절까지는 '아하와 강가'를 떠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제사장...십 이 인 곧 세레뱌와 하사뱌 - 이것은 '제사장...십 이 인과
세레뱌 및하사뱌'로 고쳐야 맞다. 만일 한글 개역을 그대로 따른다면,
'세레뱌와 하사뱌'는 제사장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세레뱌와 하사뱌'는
레위인임이 분명하다(18절).
따로 세우고(* , 아브딜라) - 이것은 '나누다' 혹은
'구별하다'의뜻을 갖는 동사 '바달'(* )의 사역형으로서, 본질적 차이가
있으나 합해져있는 둘을 완전히 가르는 것을 가리킨다(창 1:14 ; 레 10:10 ;
신 10:8 ; 대상 25:1).특히 이 단어는 제의적(祭儀的) 맥락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에스라가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함께
구별시킨 이유는 제사장들은 거룩한 물건들을 취급하는책임자라는
점에서, 한편 레위인들은 그것들을 운반하는 등의 부수적 업무를
담당해야하는 책임자라는 점에서 함께 구별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Brockington, Myers).적어도 에스라는 율법 학자였기 때문에,
이런 규정들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그대로시행하고 있었다(7:10).
=====8:25
여기서 언급되는 은금에는 바벧론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7:16).
저희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가리킨다.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 - 7:28 주석을 참조하라.
그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 - 에스라와 함께 팔레스틴으로 돌아오지
아니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때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바벨론 및
페르시아 땅에 남아 있었다(에9:30).
드린(* , 테루마트) - 이것은 '올리다' 혹은 '높이다'의 뜻이 있는동사
'룸'(* )의 사역형 분사로서, 높은 곳에 물건을 올려놓는 것이나
높은사람에게 예물을 바치는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이다(레 2:9 ; 민 18:30,
32 ; 대하35:8).
=====8:26
은이 육백 오십 달란트 - 마이어스(Myers)는 이것을 약 8.5톤으로 본다.
은 기명이 일백 달란트 - 이것은 3.75톤으로 본다. 환산의 비율이
확실하지 않아오늘날의 추정 기준으로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많은 양이었음에는 분명하다.
=====8:27
금잔...이십 개...일천 다릭 - 여기의 '금잔'은 성전에서 사용되던
금기명이 아니다(7:20). 한편 '일천 다릭'은 영화(英貨) 약 11,000파운드
정도에 해당한다(2:69).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 -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을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으로
만들어진 그릇으로 생각한다(Driver).
=====8:28
여호와께 거룩한 자 - 이것은 제사장 및 레위인들이 특별히 일반
백성들과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신분임을 가리키는
말이다(출 29:1 ; 39:30 ; 레21:6 ; 민 3:12, 13). 여기의 '거룩한'(* , 코데쉬)은
'봉헌하다' 혹은 '구별하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카다쉬'(* )에서 온
형용사로서, 하나님께 특별히 바쳐짐으로써 인간들에 의해 함부로 다뤄질
수 없게끔 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McComiskey).
은과 금은...드린 예물이니 - 이것도 '은과 금'이 거룩히 구별되었음을
말해주는한 표현이다. 이런 '거룩성'은 거룩히 구별된 제사장 및
레위인만이 그것들을 다뤄야하는 분명한 이유이다.
=====8:29
여호와의 전 골방 - 이것은 성전의 건물 양편에 위치한 방들로서 한
쪽에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 그 반대 편에는 창고가 있었다(Williamson,
Rawlinson, 왕상 6:15 ;느 13:5).
제사장의 두목 - 여기의 '두목'(* , 사르)은 '책임자'를 의미한다고
봐야한다(단 1:7). 그렇다면 '제사장의 두목'은 제사장의 업무를 총괄적으로
감독하던 제사장을 가리킬 것이다(33절).
이스라엘 족장 - '우두머리'라는 뜻으로는 '로쉬'(* )가 더 정확하다.
여기서는 앞의 '두목'에 해당하는 원어의 영향으로 '사르'가 그대로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Williamson).
삼가 지키라 - 이것은 문자적으로 '깨어라 그리고 지키라'의 의미이다.
이같이 해야 할 이유는 행로 중에 도적을 맞거나 혹은 탐심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야심한 틈을타 훔쳐가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Fensham). 이 예물들은 귀환 여행의마감 시점에 이르러 재차
점검되고 계수되었다(34절).
=====8:30
이에...가져 가려 하여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들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등 에스라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운반에 관한 총체적
책임은 제사장들에게 있지만, 이 일은 실제적으로 레위인들에 의해
담당되었다(24절).
=====8:31
정월 십 이 일에...떠나 - 유대인들은 그때 '아하와 강가'를 집결지로
삼아 정월초하루에 거기에 모였었다(7:9). 그들은 거기서 삼일간 인원을
파악하던 중 레위인들이 한 사람도 없음이 밝혀지자 그들을 불러오는
등의 일에 9일을 소비하고 12일에 그강가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Keil,
Fensham).
건지신지라(* , 야칠레누) - '구하다' 혹은 '찾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나찰'(* )의 사역형으로서, 악인들의 무리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구출하거나 위기일발의 위급한 재앙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적극적
행위를가리킨다(창 32:11 ; 삼상 12:10 ; 시 25:20 ; 렘 22:3).
=====8:32
삼 일을 유하고 - '유하고'(* , 네쉐브)는 '좌정하다' 혹은 '안식하다'의뜻을 갖는 동사 '야솨브'(* )의 파생형이다. 따라서 이는 에스라 일행이 먼길의
여행 후 몸과 마음의 휴식 기간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Fensham).
=====8:33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 - 느 3:4, 21에서는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므레못'으로 나온다. 그런데 2:61에 따르면 '학고스 자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증명치 못함으로 해서 제사장 직분의 수행이
유보(留保)되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여기서는 그 후손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이 자신들이 제사장의후예임을
증명하는 데에 마침내 성공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편, '우리아'는
'여호와는 빛이시다'의 뜻이고 '므레못'은 '거만'이란 뜻이다.
손에 붙이니 - 문자적으로는 다만 '손 안으로'의 의미로서 넘겨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 - 이 문구 바로 앞에는 '그와 함께'의 의미인
'이모'(* )가 있는데, 이는 '엘르아살'도 므레못처럼 제사장이었음을
말해준다(10:18; 느 12:41, 42).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 - 이 사람은 본서와 느헤미야서에서 (1) 율법책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는 역할의 담당자(느 8:7), (2) 이방 여인을
취하여 율법을 범한 자(10:23), (3)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받은 자(느 11:16) 등으로 묘사된다. '요사밧'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주신다'이다.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 - '빈누이'는 '헤나닷'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성벽
한 부분을 중수한 책임자였다(느 3:24). 그 이름의 뜻은 '세워진'이다. 한편,
'노아댜'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라는 뜻이며 에스드라상
8:63에서 '모엣'으로 나온다는것이 알려졌을 뿐 다른 사항은 밝혀지지
않았다.
함께 있어 - 물품 인수의 실질 책임자는 '므레못'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다만 입회인이었음을 암시해준다(Fensham).
=====8:34
본절은 내부 및 외부의 도적을 만나지 않음으로써(29절), 일체의 물품
손실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의
일행에게 함께했다는 사실(31절)에 대한 간접적인, 그러나 강력한 시사임이
분명하다(Kidner).
당장에 책에 기록하였느니라 - 이 같은 행위는 성전 재산의 도난 및
횡령 방지를목적으로 한 것이다(Rawlinson). 에스라는 어쩌면 그 물품
목록을 아닥사스다 왕에게보내서 모든 물품들이 제대로 인계되었음을
증명하였을 수도 있다.
=====8:35
사로잡혔던 자(* , 하골라) - '제거하다' 혹은 '이동하다'를 뜻하는동사
'갈라'(*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해외로의 추방' 사실 자체 및 '그렇게 된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중 왕하 24:15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모두 약 41회 나오는데 거의 대부분이 바벨론에 의해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간 사건과 직접 관련되어 사용된다. 따라서 이것은
포로가 된 유대인 및 그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로 이해된다.
이방에서 돌아온 자 - 문자적으로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온 자'이다.
이들은 곧 에스라의 일행들이다.
번제를 드렸는데 - 이같은 제사는 (1) 하나님께서 여행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해주신 데 대한 감사, (2) 여행 직전에 있었을 수도 있는 서원의
이행(Williamson),(3)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헌신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 에스라와 함께 온 새로운 귀환자들이 금번
제사의 주관자들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최초의 귀환자들도 바벨론에서
귀환한 직후 이 같은 제사를드렸었다(3:3 ; 6:17).
수송아지가 열 둘 - 여기의 '수송아지'(* , 파르)는 차라리 '황소'로 봄이더
타당하다(창 32:15 ; 렘 50-27). 한편 '열 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이다(6:17).
수양이 아흔 여섯 - '아흔 여섯'은 매 지파당 여섯 마리씩에 해당되는
수효이다.
어린 양이 일흔 일곱 - 혹자는 여기의 '일흔 일곱'이 열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점 때문에 '일흔 둘'의 사본상 오류라고 말한다(에스드라상 8:66 ;
Josephus, Myers).그러나 여기 맛소라 사본의 '일흔 일곱'은 (1) 많은 구약
사본들의 지지를 받으며,(2) 고대 중근동의 우가릿 문서등에서는 '일흔
일곱'이라는 수가 수량의 많음을 강조하기 위한 숫자적 표현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는 그대로 취해져도 무난하리라
본다(Fensham).
속죄제 - 포로지에서의 신실하지 못했던 삶을 회개하며, 또 그 죄악들을
사함받기위해 드려졌을 것이다.
모두...번제물이라 - 이것은 실제적으로는 '속죄제'의 제물까지를 포함한다. 그런데도 '번제물'이라고 한 까닭은, 하나님께 바친 제물의 대부분이 번제의 제물이기 때문이었다(Fensham).
=====8:36
왕의 조서 - 에스라와 그 일행을 도우라는 명령(7:20-26)을 가리킨다.
왕의 관원 - '관원'(* , 아하쉬다르페네이)은 그야말로 '총독'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상당히 광활한 정복 지역을 왕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관리를 가리킨다(본 단락 주제 강해, '페르시아의 지방 조직' 참조). 물론 이 단어는 최고급의 관리를 뜻하는 것도 사실이다(Fensham).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말이 히브리원문상 복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프라테스 강 서편에는 단 한 명의총독 밖에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문제시 된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은, 여기의 '총독들'이 유프라테스 강 서편의 총독 한사람과 애굽을 다스리던 총독 등 두 명을가리킨다고 보는 데서 해결 가능하다(Fensham). 실제적으로도 애굽은 팔레스틴과 지역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점에서 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여기서 '관원'을 '왕의관원'이라고 한 것은, 앞의 '왕의 조서'와 조화시키기 위해서,
즉 그 '관원'이 '왕의명령'을 그대로 이행해야 할 신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다.
강 서편 - 이것은 본절의 '관원'과 '총독들'에 아울러 적용된다(NIV).
총독들(* , 파하우오트) - 이들은 적은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 관리라고 할 수 있다(6:6).
저희가...도왔느니라 - 왕의 명령(7:20-26)이 그대로 이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도왔느니라'(* , 니스우)는 '높이다' 혹온 '주다'의 뜻을 갖는 동사 '나사'(* )의 강조형으로서, 여기서는 어떤 물질 등을 제공함으로써 성전 예배가권위를 회복하고 원활히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Williamson).
에스라가 인도한 제2차 귀환 사실을 언급하는 가운데(7, 8장)지금까지는 귀환의 배
경과 동기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에 이어지는 본장은 귀환의 과정과 결과를 기술한 대
목으로 귀환의 여정 속에서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언급한다. 그러데 본장 이후 보서
저자는 백성들의 부흥 운동을 저개해(9, 10장) 본장의 사건들이 유다 백성들의 영적
부흥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자신
이 성전 예배의 복귀를 종교 개혁의 관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자
신이 성전 예배의 복귀를 종교 개혁의 관건으로 인식했음을 본장을 통해 드러내고 있
다.
이러한 내용의 흐름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 운동에 견인차적 역할
을 하고 있는 본장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바벧론에서 귀환한 2차 귀환자들
의 명단(1-14절), (2)레위인 및 성전 봉사자를 모집하는 과정과 결과(15-20절), (3)에
스라를 중심으로 한 영적(21-23절), 물질적(24, 30절) 준비, (4)예루살렘까지의 도착
여정(31, 32절), 그리고 (5)예루살렘 도착 후의 활동(33-36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본장의 이와 같은 구성을 통해 귀환의 실제성에 대해 객관적으로
입증할 뿐만 아니라 이 귀환의 사실이 유대인의 신앙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해서 암묵적
으로 나타내려고 한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중요한 문제의 발견-해결'(15-20절)
'준비된 제반 사항'(21-30절), '예루살렘에서의 에스라의 활동'(33-36절) 등이 본장의
핵심 내용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사실 팔레스틴으로 돌아갈 모든 여견이 조성되었지만, 에스라에게는 팔레스틴까지
약 2,000km의 먼 길을 가야만 하는 험난한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통 수단이라고
는 고작 말(馬)뿐이었던 시대였기에 그 어려움은 특별히 더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뿐만 아니라 귀환의 도로 사정이 말의 사용을 허락지 않았기에 그 어려움은 매우 켰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새로이 팔레스틴으로의 귀환 일정은 휠씬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자신이 태어났고, 또 장성(長成)하기까지 살아온 바벧
론을 떠났다. 왜냐하면 에스라는 당시 팔레스틴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 있던 영
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스라는 만일 고통스러움을 핑계로 하여 귀환하기를 포기하
거나 늦춘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될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래서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과감히 귀환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에스라를 통하여 팔레스틴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 교육을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그 에스라가 아무 탈없이 팔레스틴까지 도착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듯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영적으로
보전하시기 위한 열심을 갖고 계신다.
이와 같은 본문에 나타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서 저자의 제사장적 관심을 표출되었다는 사실이다. 본장에는 특별히 귀환
과정에서 레위인과 선전 봉사자를 모집하게 된 경과와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제사장이요, 서기관이었던 에스라의 지국한 관심이 표출된 것이다. 또한 본서 저
자의 제사장적 관심은 예루사렘에서 드린 제사 행위를 자세히 언급한 대목에서도 나타
난다.
둘째, 귀환의 실제성 및 역사성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본서 저자의
이러한 질필 의도에 의해 귀환자의 족보와 귀환 일정, 그리고 귀환의 여정잉 사건별로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셋째, 귀환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장에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 대해 정확히 기록하
고 있는 것이다(23, 31절).
이와 같은 본장을 통하여 우리는 (1)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일을 필연코 이루시며
(롬 8:30), (2)성도들은 마음으로 결정한 바를 실행함으로써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약 1:22-25)을 깨닫게 된다.
1.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자들(8:1-14)
본 명단은 2차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의 계보를 적은 것인데 대부분 1차 귀환 때의
계보와 일치한다(2:3-19). 그런데 총수는 1차 귀환 때 언급된 백성의 수에 못 미친다.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백성의 수효는 남자만 1,773명인데 한 사람당 가족을 5인으로
계산하면 총수는 약 90,000명 정도가 된다. 이는 1차 귀환 때의 1/3에도 못 미치는 적
은 수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귀환자들은 에스라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서 귀환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은 자원해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자들이었다(7:13).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귀환 때보다 백성의 수가 적은 것은 귀환에 대한 열망이 식었
거나, 귀환에 대한 역사적, 종교적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능성이 크
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명단을 비교할 때 그 기록된 순서가 다른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또한 본문에는 스가냐(5절), 요압(9절), 슬로밋(10절) 자손들의 숫자가 첨가되어
있고, 족장의 수도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명단은 스룹바벧 때
의 명단보다 짧다. 그러나 1차 귀환 때의 가계(家系)가 본 명단에 대부분 재언급된 것
으로 미루어 볼 때 2차 귀환 때에도 동일한 가계의 자손이 귀환한 듯하다. 그리고 이
스라엘의 12지파 또는 그 직계 자손을 기준으로 해서 명단이 언급되지 않고 이처럼 유
명 가문별로 기록된 것은 이들 대부분이 유다 왕족 지파 출신들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또한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렇게 서술된 것은 족보개념이 다소 흐려졌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초 귀환은 에스라의 귀환보다 약 80년 전(1차 귀환:
B.C. 537-2차 귀환: B.C. 458)에 있었다. 따라서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려고 한 사람들
은 부모들이 귀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바벧론에서 태어났고 또한 거기서
살았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비록 이교도의 땅에서 살았지만 부모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앙적 감화를 받았던 것 같다. 물론 그 부모들은 일찍이 팔레스틴 땅으로 귀환을 포
기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들은 팔레스틴으로의 귀환이 왕명(王
命)에 의해 허용되자 즉각 에스라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유.무형
재산을 포기하고 유다 땅으로 와서 신안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본 단락에서 (1)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곧 참된 그리스도인임
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표이며(히 10:24,25), (2)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큰 희생이
요구됨(행 14:22)을 깨달을 수 있다.
2. 성전 봉사자들의 모집(8:15-20)
이스라엘 백성들이 2차로 귀환한 사실을 증거하는 대목에서 앞단락을 통해 본서 저
자는 그 귀환자들의 규모와 계보를 명단을 통해 밝혔다. 이에 이어지는 본문은 2차 귀
환 여정 가운데서 에스라가 실시한 두 가지의 영적 준비(15-23절) 가운데 그 첫 번째
의 것이다. 즉, 본문은 귀환 과정에서 실시한 레위인과 성전 봉사자들의 모집 사건을
언급한 것으로 이는 장차 있을 성전 제사와 백성들의 신앙 부흥 운동을 위한 예비 행
위였다. 이러한 본문은 (1)본토 진입에 앞서 백성들 재점검하는 장면(15절), (2)족장
과 명철한 사람을 불러 레위인과 성전 봉사자들을 데려오게 한 대목(16, 17절), 그리
고 (3)이때 헌신적으로 귀환의 대열에 낀 레위인과 성전 봉사자들의 숫자와 계보를 그
린 부분(18-20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이러한 내용 구성을 통해
성전에서 봉사한 사람들이 제2차 귀환 때 함께 왔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
어 본서 기자는 이를 통해 성전 제사의 회복이 곧 신앙 회복 운동의 지름길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성전 봉사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할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
을 모아 들이는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그리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본문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그 내용이 전개되는 바,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점점을 통해 발견된 중요한 문제-(2)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3)해결된 문제. 그래서 본서 저자는 스롭바벧 성전이 세워진 후 점차 식어진 백
성들의 신앙심과 시들해진 성전 제사의 원활한 운용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음을 밝히
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다시 회복된 성전 제도를 정상적으로 가동시킬 줌지가
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에스라는 바벧론에 흩어져 살던 귀환 희망자들을 한데 모은 후, 대열을 갖추
어 출발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물론 귀환자의 숫자 파악도 백성들을 집결시킨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 중 귀환 희망자가 전혀 없다는 사
실을 안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제1차 귀환 때나 에스라로 말미암은 제2차 귀환 때 모두 레위 사람들이 귀
환하기를 꺼려한 이유는 직분과 관련한 심학 고역(苦役) 때문이었다. 그들은 본토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들에게 부과된 사역
이 과중했기 때문에 귀환을 망설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레위 자손들 대부분
이 포로 생활 중에 다른 직업으로 전환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귀환자들이 없었다.
따라서 에스라는 귀환을 포기한 레위 사람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백성의
지도자를 레위 사람의 최고 지도자인 잇도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레위 사람들을 설
득케 하여 레위 사람 약 40여 명과 느디님 사람 220명 가량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비록 그들이 처음부터 자원해 귀환 대열에 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
은 훌륭한 신앙 인격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제대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레위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앙적 설득에 모두 감명을 받고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레위 사람들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에스라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 에스라는 레위 사람이 귀환 대열에 포함되어 있건 없건 간에
팔레스티으로 그대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출발 일자를 늦추면서까지 레위 사
람들을 데려가려고 한 것은, 그가 철저한 신전(神前) 인격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인간의 눈치를 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본서 저자인 에스라는 자신이 바로 이 같은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독자
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을 주도할 만한 적격자였음을 강력
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 단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받을 수 있다. 즉, (1)진정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설득에 굴복해야 하며(삼하 12:1-13), (2)그러한 설
득에 따라 자신의 고집을 꺾은 일은 아름다운 신앙 행위(마 21:28-31)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3)교회의 지도자는 훌륭한 신앙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충성심
을 증명해야 하며(빌 3:17), (4)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마치
주께 하듯 해야 함(골 3:23)을 깨닫게 된다.
*회당의 기원. 신약 선경에서는 '회당'(* , 쉬나고게)이라는 단어가 무려
59회나 사용된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비
록 70인역(LXX)이 '카할'(* )이라는 히브리 단어를 헬라어 '쉬나고게'로 번역하
기는 하였지만, 이 단어가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려고 하는 회당을 가리키지 않음은 분
명하다. 그러나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신구약 중간 시대 이전에는 회당 혹은 회당의
전(前)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 없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
는 신약 성경에 흔히 나타나는 '회당'의 전신(前身)에 해당되는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
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회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1)모세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견해(Josephus,
H. Grotius),(2)포로 후기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견해(C. Sigonius, C.V. Vitringa),
(3)알렉산드리아 거주 유대인들에 의해서 헬레니즘 시대부터 존재케 되었다는 견해(L.
Herzfeld) 등으로 요약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1)의 견해는 그 같은 근거가 전혀 발
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3)의 견해는 보다 앞선 시대에 회당이 이미 존재했다는 확
실한 근거가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 따라서 '회당'이 포로 후기 시대부
터 존재했다는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포로 후기 시대라는
것은 너무 막연하므로 좀더 분명한 회당의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본문
17절은 회당의 기원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
17절에 따르면, 회당 혹은 그 전 단계의 집회 장소가 최초로 있던 곳은 바벧론의
'가시뱌' 지방이었다. 거기에는 일단의 레위 사람들이 있어서, 율법을 연구하거나 가
르치는 일이 계속되었던 것 같다. 사실 이 같은 일은 반드시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성
전 제사를 민족적 단합의 구심점으로 삼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벧론이라는 타국 땅
에 와서 살면서 새로운구심점이 필요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앙적
그리고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 뻔하였다. 그렇다면, 회당 혹은
그 전 단계의 유형은 바벧론 포로 사건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은 후에, 바벧론의 이스
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이 회당은 보
다 발전하여, 바벧론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상당한 신앙적 감화를 주
엇을 것이다. 이러헤 해서 회당이 탄생하게 되엇은 바, 이 회당은 예수의 생존시까지
종교적, 교육적 장소로서 존재하였다. 그러다가 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그 존재가 유명
무실해진 듯하다.
3. 영적 정비를 통한 순조로운 귀환 여행(8:21-23, 31)
본서 자자의 제사장적 관심에 의해 귀환 백성 가운데 성전 봉사자들이 없음을 발견
하고 적절히 조치한 앞단락에 이어지는 본문은 신앙적 정비를 통한 순조로운 귀환 여
행이 진행 되었음을 증거하는 대목이다. 즉, 본문은 에스라가 치한 두 가지의 영적 정
비 중 두 번째 것으로, 또한 그가 행한 세 가지 정비(15-20, 21-23, 24-30절) 중의 하
나로 귀환 여행시에 있을 대적자들과 방해자들의 위협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는
신앙으로 순조롭게 극복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은 (1)금식을
선포하고 온전히 여호와를 신뢰하는 모습을 그린 구절(21절), (2)에스라 자신의 신앙
고백과 그에 따른 심정을 그린 구절(22절), 그리고 (3)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귀
환케 되었음을 증거하는 구절(23, 31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보서 저자는 이 같
은 신앙적 준비로 말미암아 귀환 과정에서 별 어려움이 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에스라 일행은 약 9천 명은 족히 되었기에 이 많은 숫자의 백성들이 여행할 때는
필겨 그 대열이 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어린 아이들과지참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행진 속도도 빠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에스라 일행은 도적들의 표적
이 되기 십상이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 도적들은 바벧론과 애굽 등지를 오가
면서 무역을 하던 대상(隊商)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생명까지도 빼앗던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전문적인 도적떼였기 때문에 정보 입수 능력도 뛰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재물을 지참한(25절; 7:16)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벧론을 떠나서 팔레스틴
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그 중간 지점 되는 곳에 매복했을 것이다(31절).
만일 도적떼의 기습 공격을 받을 경우, 많은 어린아이들까지 함께 데리고 가던 이스라
엘 백성들은 속수무책이었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본서에 나타난 에스라의 모습은 이러한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는 아닥
사스다왕의 특명(7:25)에 따라서 팔레스틴으로 파견되는 신분이었던 관계로 왕에게 호
위병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위병 요청을 단호히 포기하엿음은
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전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는 바른 신앙을 갖게 하려는 특별한 사
명을 갖고 예루살메으로 가려던 참이었기에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
시는 분이심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에스라른 자신의 일행들에게 금식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백성
들은 자신들의 귀환 여행이 순조로이 마쳐질 수 있기를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이다. 만
일 에스라가 금게 하지 아니하고, 호위병들과 함께 귀환 여행을 떠났다면 예상했던 많
은 대적들에 의해 어러움을 당했을 것자다. 그러나 온전히 여호와께 귀환 여정을 맡김
으로써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성공을 에스라의 노력
때무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적으로 각성시킬 계획을
갖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도구로 사용하셨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서 저
자는 이러한 의도를 극명히 밝히기 위해서 금식 선포-자신의 신앙 고백과 심정 토로-
하나님의 응낙-성공적 도착의 순으로 본문을 구성해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의 본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깨닫게 된다.
(1)현실은 살아가는 성도들은 인생의 행보(行步)에 있어서 세밀한 일까지도 모두 주님
께 아뢰고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해야만 한다(창 4:13-15 ; 마 15:25). (2)하나님의 놀
라우신 역사는 당신의 권능을 전적으로 믿고 기다리는 자들에게만 나타난다(막 9:23).
(3)에스라의 귀환이 성공할 수 있도록 배후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자신의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성도들이 궁극적인 승리에 이르도록
권고하시고 힘을 주신다(롬 8:28, 35-39).
에스라의 귀환로는 다음의 지도를 참고하라.
4. 에스라의 현명한 재물 취급(8:24-36)
종교적이고(15-20절) 영적인 정비(21-23절)에 대해 언급한 앞단락에 이어지는 본문
은 물질적 정비에 관해 기록한 대목이다. 즉,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바벧론을 출발할
즈음부터 팔레스틴에 도착한 직후까지 어떤 방식으로 재물을 관리했는지 잘 보여 주는
대목인 바, (1)팔레스틴 도착시까지의 취급 방법(24-30절), (2)팔레스틴 도착 후의 취
급 방법(31-36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스라가 페르시아 정부 및 바벧론 거주 이스라엘 백성들로 부터 증여 받은 재물의
수량은 엄청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정부는,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보호받고
싶은 긴박감에서 그들에 대한 기도를 요청하기 위해 수많은 재물을 에스라에게 주었을
것이고(7:22), 또한 바벧론에 계속 남기로 한 백성들도 재물을 헌납함으로써 자신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려고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25절). 그래서 에스라에게
는 이 많은 재물들을 어떻게 취급하는냐가 당면 과제였다. 그런데 그의 재물 취급 가
식은 지극히 현명했다. 즉, 그는 그 많은 재물들을 자신의 직접 관리하지 않았다. 대
신 그는 그것들을 운반할 때는 자신돠 함께 귀환하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관리
를 맡겼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선는 즉지 그것들을 성전의 재물 관리자에게 넘겼던 것
이다. 그가 이러한 방식을 택한 까닭은, 우선 그 재물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바
쳐진 구별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에스라는 제사장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재물들이 성전을 위하여 바쳐
진 것들이었지만, 직접 관리해도 큰 반발에 부딪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경두, 당
시 경제적이 어려움에 처해 있었을 종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을 가
능성이 없지 않다. 또한 그 결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대해서도 그의 영향력은 막
강해지고, 마치 세속적 권세를 지닌 총독처럼 군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로 말미암은 강제성을 띤 에스라의 백성들에 대한 개혁 조치는 보다 빨리 결실을 맺을
가능성도 켰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이 같은 세상적 방법들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세상적 방법에
의한 개혁 조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에스라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영적 권세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스라엘을 개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본서 저자인
에스라는 바로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1)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서 선택될 만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2)바로 전개될 그의 개혁 운동이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등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벧론을 떠난 후 약 4개월 만에(7:9), 제2차 포로 귀환은 성공적으로 이루
어졌다. 무사히 도착한 백성들은 1차 귀환 때와 마찬가지로(6:17) 모든 일을 계획하시
고 여정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는 12지파의 죄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속죄제를 드린 것이며,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보살펴 주신 하나님께 대한 자신드리의
헌신을 의미하는 번제를 드린 것이다. 전정 여호와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삼상
7:12), 대대로 이스라엘에게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게 합당한 분이시다.
우리는 이 같은 본장을 통하여 (1)물질 문제와 관련하여 청렴한 지도자만이 하나님
의 영적 권능을 얻을 수 있으며(왕하 5:15-19;딤전 3:3), (2)하나님의 사람(느 12:24)
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는지의 여부로써 분별됨(갈 1:10)을 깨닫게 된다.
*페르시아의 총독. 고대 페르시아 왕은 '왕 중의 왕'으로 불리울 만큼 대단한 권
세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왕 중의 왕'이란 말은, 거의 '왕'으로 불리울 만큼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신하들이 제국 내에 많았음을 암시한다. 이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신하들은 바로 '총독', 혹은 '속주'(* , 아하쉬다르페님)으로 불
리운 자들인데 그들이 대단한 권력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이 그들에게 넓은 자치권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넓은 제국의 1/20씩을 각각 다스렸던 그들에게 그처럼 폭넓은 자치권이 위양(委讓)된 것이 당연하였다.
한편 본서와 느헤미야서에서 흔히 '총독'(* , 페하)으로 불리우는 자들은 사
실상 '속주'들의 신하에 불과하였다. 아무튼 이 '숙주'에 해당한다 단어는 본서의 본장에 유일하게 나타나고, 느헤미야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에스더서에서 3번 사용될 뿐이다(에 3:12;8:9;9:3). 그러므로 성경의 이 같은 증언에 의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이 지녔던 권력을 짐작할 수 있고 지방 조직에 대해서도 약간의 자료를 얻을 수 있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