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칠월에 이르러...예 살렘에 모인지라 - `7월'은 유대력의 `디스리 월'을
말한다.보통의 달력으로는 9월 혹은 10월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7월'은
말할 나위도 없이귀환한 그 해의 `칠월'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까닭은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레 23:41) 초막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한편, `모인지라'(* , 예아스푸)는 `모이다' 혹은
`모으다'의 의미를 갖는 `아사프'(* )의 수동형으로서, 특별한 일에의 참여를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 모여드는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어다(9:4;
삿 20:11; 대하 30:13). `일제히'는 문자적으로 `한사람처럼'의 의미이다.
=====3:2
칠월에 이르러...예 살렘에 모인지라 - `7월'은 유대력의 `디스리 월'을
말한다.보통의 달력으로는 9월 혹은 10월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7월'은
말할 나위도 없이귀환한 그 해의 `칠월'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까닭은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레 23:41) 초막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한편, `모인지라'(* , 예아스푸)는 `모이다' 혹은
`모으다'의 의미를 갖는 `아사프'(* )의 수동형으로서, 특별한 일에의 참여를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 모여드는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어다(9:4;
삿 20:11; 대하 30:13). `일제히'는 문자적으로 `한사람처럼'의 의미이다.
=====3:3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 오히려 `비록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였지만'으로 번역해야 본 문맥의 흐름과 잘 조화된다(NIV). `열국
백성' 은 문자적으로`그 땅 백성들'의 의미이다. 즉, 그들은 그 당시
팔레스틴 땅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여러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들 중
대표적인 민족은 사마리아인들이었을 것이다(4:2).한편, `두려워하여'(* ,
베에이마)는 급속히 엄습하여 공포속으로 빠져들어갈 때 사용되는 단어
`에이마'(* )와 `~안에서' 혹은 `~의'로 번역될 수 있는전치사 `베'(* )가
합쳐진 말이다(창 15:12; 출 15:16; 수 2:9 욥 20:25).
단을 그 터에 세우고 - `그 터'는 원래 솔로몬 성전의 제단이 세워져
있던 곳을 가리킨다(2:68).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팔레스틴에 귀환한
직후부터 제단 쌓기를시작하여 칠월이 되어서야 그 작업을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1절).
조석으로...번제를 드리며 - 본문의 `번제'는 매일 드려져야 하는
상번제를 가려킨다(출 29:38, 39; 민 28:3, 4).
=====3:4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 `초막절'은 `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3대 절기로서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출
23:14-16; 34가22가 산16가13-17). 특히 이 `초막절'은 `장막절' 혹은 `수장절'
이라고도 불리우며, 땅에서산출되는 모든 곡식, 술, 기름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다. 이 절기는 유대력으로
디스리월, 즉 7월(보통 달력으로는 10월) 15일에 시작하여(민 29:12) 8일
동안 지켜졌으며,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聖會)가 있었다. 이절기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수송아지, 수양 등을 제물로 바쳤으나,
곡식은제물이 될 수없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가축만을 제물로 삼으신
까닭은, 가나안 족속의 추수제와 초막절을 엄격히 구별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정수대로 - 절기가 지켜지는 8일 동안 날마다 동일한 수효의 제물이
드려진 것이아니었음을 가리킨다. 즉, 수송아지의 경우, 첫날에는 13마리가
둘째날에는 12마리가바쳐졌다. 이렇게 해서 그 절기 동안 바쳐져야 했던
가축의 수는 모두 215 마리 였다(민 29:13-38).
=====3:5
그 후에는 - 귀환 후 최초로 지켜진 초막절 절기가 끝난 다음을
가리킨다.
항상 드리는 번제 - 평상시에도 아침 저녁 하루 두 차례씩 드려지던
상번제를 가리킨다(출 29:42; 민 28:3-6). 즉,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 절기를 계기로 모든 희생 제사를 정상화 시켰음을 시사한다.
초하루 - 이것은 월삭 현상이 일어나는 매월의 첫날에 베풀어지는
종교적 축제를가리킨다(민 10:10; 28:11-15; 삼상 20:5; 느 10:33; 사 1:13).
바벨론에서 귀환한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도 지켰다.
여호와의...절기의 번제 - `무교절'(레 23:5-8), `맥추절'(레
23:15-21),`나팔절'(레 23:23-25), `초막절'(4절; 레 23:33-36), `속죄일'(레
23:27-32)등에 드려져야 할번제를 가리킨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측면을 강조하는 칭호이다. 본서의 저자는 이 문맥에서 바로 이와 갈은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이 절기가 지켜진 것이 언약적 차원에서 였음을
강조하려고 한다. 절기를 지키는 것이 언약 백성들에게 특별히요구되는
의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레 23장) 본서 저자의 이러한 의도는 분명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즐거이 드리는 예물 - 이것은 특정한 절기와 상관없이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가리킨다(Fensham,
레 22:18,21; 대하 35:8).
=====3:6
칠 월 초하루부터 - 엄밀히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 제사를
회복한 것이 초막절 절기 때부터는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즉 초막절은 칠
월 보름부터 시작됐다는점에서, 적어도 약 보름간은 상번제가 제단에서
드려졌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매년칠 월 열흘에 드려졌던 속죄일은
안지켜졌다는 결론이 나온다(레 16장; 23:26-32; 민29:7-11). 그러나
속죄일이 지켜지지 않은 것은 백성들의 신앙적 열심의 부족과는 전혀
무관하다. 왜냐하면 성전이 아직 재건되지 못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사죄를 위해서 지성소로 들어가야 하는
독특한 의식이 뒤따르는 속죄일행사가 지켜지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전 지대는...놓지 못한지라 - 이러한 언급을 통해 저자는, 성전
재건이착수되는 현장으로 본서의 무대를 옮기려 시도한다.
오히려 - 엄밀히 말해서 히브리 원문에는 없는 말이다.
=====3:7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 `석수' 와 `목수'는 필경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석수'(* , 호체빔)는 `돌을 뜨는
사람'(왕상 5:15). 혹은 `벌목하는 사람'(대하 2:18)을 뜻하며 `목수'(하라쉼, *
)는 `철공'(사 44:12), `목공'(사 44:13), `벽돌공'(왕하 12:12), `장색'(사
40:19)등을 두루가리키는 말이다.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기름 주고 -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계획했던 상황과 유사하다(Kidner). 농토가 없음으로 해서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돈과 두로(행 12:20}에 먹을 것을 주는 대신 성전
건축에 필요했던 건축 재료들을 수입해 왔을 것이다(왕상 5:8-11; 대하
2:10-15). 한편 `시돈'과 `두로'는 가나안 족속으로서 B.C. 9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각기 독립된 도시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앗수르에의해 B.C. 9세기에
정복된 후에는 거의 계속적으로 강대국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이 매우 발달했던
나라들로서,솔로몬 왕 시절만 해도 엄청난 국부(國富)를 자랑했었다. 한편,
바벨론 포로 귀환기에는 그들도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시돈'은
오늘날의 베이루트 남방 약 48Km지점에 위치해 있고 `두로'는 시돈 남쪽
40Km 지점에 있다.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대로 - 고레스의 조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하는것을 도우라는 명령 조항이, 구체적으로 두로와 시돈 사람을
겨냥하여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조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에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과 남아있는 백성들은
그들을 도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3, 4).그러나 오늘날 건축을 하기
위해서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듯이 그 당시에도 성전 건축과 갈은 큰
공사를 위해서는 바사 정부의 허가가 요구되었을 것이며, 이 허가
속에는많은 양의 건축 자재를 조달하는 사업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본다. 본 구절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Batten).
백향목 - `굳건히 뿌리 박힌 강한 나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학명(學名)은 `세드루스 리바니'(Cedrus Libani)이다. 이 나무는 최고
36m까지 자라며, 나무의 둘레도최고 12m까지 된다. 또한 이 나무는
크기(암 2:9) 뿐만 아니라 모양과 향기에 있어서도 특출하다. 이 나무가
건축 재료로 적당한 까닭은, 나무 자체에서 풍기는 향기가좋다는 점
외에도 옹이가 없으며 아울러 내구력도 뛰어나다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수운 - `레바논'은 팔레스틴의 북서쪽에
위치한 험준한레바논 산맥을 가리킬 것이다. 이 산맥은 폭이 약 1.6Km
이내인 해안 평야에 의해서지중해 해안과 분리되어 있다. 한편 `욥바'는
`아름답다'는 의미를 갖는 항구도시(욘1:3)로서 높이가 해발 약 43m인
바위로 이루어진 갑(岬)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 등의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예루살렘으로 부터는 서북 쪽으로 약 56Km 떨어져 있다.한편
`수운'은 백향목 뗏목으로 엮어서 해안을 따라 옮기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운송 방식은 최초의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에 의해서도
이용되었다(왕상 5:9)
=====3:8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 이스라엘 사람들의 포로 귀환 사건을
가리킨다.그런데 본서의 저자가 이 같은 방식으로 포로 귀환 사건을
묘사한 것은, 포로 귀환의주목적이 성건 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년 이 월에 - 바벨론에서 귀환한 그 해의 이듬해(Williamson), 즉 B.C.
536년의둘째 달인 `시브월'로서, 솔로몬도 이 때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왕상 6:1).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의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 지 육개월이 지나서야, 그작업에 착수한 셈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굳이 이 시기를 택하여 성건 재건 작업에 착수한
까닭은, 일반 달력으로 4, 5 월인 이때는 건조기가 시작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Grosheide).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 - 이에 대해서는 본장 2절 주석을 참조 하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 - 역시 2절 주석을 참조하라.
다른 형제 제사장 - 2절 주석을 참조하라.
사로잡혔다가...돌아온 자들 - 본장 2절의 `스룹바벨의 형제들' 즉,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일한 자들이다.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감독하게 - 원래 레위인이 성전
봉사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25세 이상이 되어야 했다(민 8:24).
그러나 후대에 들어와서는 레위인의 인구가 감소함으로 하한 연령이
20세로 낮춰졌다(대상 23:24, 27; 대하 31:17).
=====3:9
예수아와 그 아들들 - 여기의 `예수아'는 대제사장 예수아가 아닌
`호다위야 자손'(2:40)의 한 대표인 레위인 예수아를 가리킨다.
갓미엘과 그 아들들 - `갓미엘'도 역시 레위인으로서 `호다위야 자손'의
또다른 대표였다(2:40).
유다 자손(*, 브네이 예후다) - 이것은 `브네이 호다웨야'(* )가 잘못
필사된 것이다(Keil and Delitzsch). 즉, 본서의 서자는여기서 `예수아와 그
아들들' 과 `갓미엘과 그 아들들'이 레위 사람 `호다위야' 의 자손들임을
말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다 자손' 은 `예수아와 갓미엘과
그아들들과 동격으로 봐야하기 때문에 `호다위야 자손'으로 고쳐져야함이
당연하다.
헤나닷 자손 - 이들은 2장의 레위인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다(2:40). 왜
이들이 그명단에서 누락됐는 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전
재건 작업의 감독자가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이들도 레위 사람의 일파라는
사실이다.
그 형제 레위 사람들 - 레위인들인 `아삽 자손'등을 말한다(2:41, 42).
일제히 일어나 - 이 말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으나 건축 감독자들의
적극적 자세를강조하기 위해 첨가되었다.
하나님의 전 공장 - 여기의 `공장'(* , 멜라카)은 `일' 혹은 `역사'(役事),
`사업' 등을 의미한다(출 35:24; 왕상 9:23; 대상 23:4). 따라서 `하나님의
전공장'은 성전 재건을 위한 공사(工事)를 가리킨다.
감독하니라(* , 나차흐) - 이것은 원래 `인도하다', `보살피다' 등의
의미로서(대상 15:21; 23:4; 대하 34:13), 일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자, 혹은 조정자(調整者)의 역할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레위인들이 일반 백성들이나 고용된 일꾼들에 대해서 강압적 및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3:10
건축자가...지대를 놓을 때에 - `건축자'(* , 보님)는 7절에 언급되고
있는`목수' 중의 일부였음이 분명하다. `지대를 놓을'(* , 야사드)은 원래 `한 더미로 쌓다' 혹은 `위치를 정하다'(시 104:8)의 의미이지만, 본절과 같은
문맥에서는 `기초 공사를 하다'의 뜻으로 쓰여진다(대하 31:7; 욥 38:4; 시
24:2; 사 54:11).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 문자적으로는 `옷이 입혀진 제사장들'이다.
그런데 `예복을 입고'(* , 라마쉬)라는 동사는 원래 `옷을 입다'라는
의미지만 항상 제사장의 예복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는 점에서, 본절의
`예복을 입고' 는 어느 정도 적절한번역이라 하겠다(레 6:10; 16:4).
나팔을 들고 - 뒤에 나오는 `여호와를 찬송하되'에 걸린다. 즉,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나팔을 사용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나팔'(* ,하초츠라)은 `산산히 부수다'의 의미를 갖는 금속제 관악기였다.
따라서 이는 수양의 뿔로 만들어진 나팔(`요벨'; 출 19:3)이나 야생 염소의
뿔로 된 나팔 (`쇼파르';대상 15:28; 대하 15:14; 호 5:8) 과는 전혀 달랐으며 제사장들에 의해서 의식용(儀式用)으로사용됐다는 점에서 다른 것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아삽 지선 레위 사람들 - 이에 대해서는 2:41 주석을 참조하라.
제금을 들고 서서 - `제금'(* , 메칠타임)은 본 단어의 쌍수형(雙數形)을
통해서 엿볼수 있듯이, 두 개의 금속 원반으로 한 조가 되는 타악기였다.
마치 오늘날의 심벌즈(Cymbals)같이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서서'(* ,
아마드)는 단순한 의미의 `기립'(起立) 행위를 의미 한다기 보다는 특별한
의식(儀式)의 집행을 위하여 임명되고 그래서 정위치한 것까지를 말한다(민
11:24; 27:22; 대하 8:14; 11:15;19:5; 20:21).
이스리엘 왕 다윗 규례대로 - `이스라엘 왕'은 다윗이라는 인물의
특출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식적 명칭이다. 물론 사울이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기는 했지만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에 선택된 최초의
왕이라는 점에서 (삼상 13:14; 행 13:22)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큰 비중을
갖는 인물이었다. 한편, `다윗의 규례대로' 는 2절의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에 상응하는 문구이다(Williamson). 즉, 모세는 성전예배의 기초적 혹은
핵심적 요소인 희생 제사 제도를 확립한 반면(2절), 다윗은 부가적 혹은
보완적 요소인 음악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다윗의
규례대로'는 음악사용에 관한 다윗의 명령을 가리킴이 분명하다(대상
15:16-24).
여호와를 찬송하되 - `찬송하되'(* , 할랄)는 구약 성경에서
`송축하다'(대상 16:36), `찬양하다'(대상 25:3; 시113:1; 146:1), `칭찬하다'(창
12:15; 삼하 14:25) 등으로 번역 되었다. 바로 이 단어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인 `할렐루야'(* )가 파생되었다(시 113:9; 115:18; 116:19; 135:21).
=====3:11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감사하여 가로되 - 이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찬송하면서그리고 감사하면서 노래했다'는 의미이며 한 무리는 하나님을
`찬송' 했고 또 한 무리는 `감사'했다는 점에서 우리말 번역처럼 `화답', 즉
서로 주고 받는 식의 찬송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찬송'과
`감사'는 거의 동의적(同意的)이다.
주는 지선(至善) 하시므로 - 여기의 `주'(主)는 말할 나위없이 여호와를
가리킨다.그러나 히브리 본문에 `주'란 말은 없다. 다만 `그분은' 으로
번역할 수 있는 여지가있을 뿐이다. 한편, `지선하시므로'(* , 키 토옵)는
문자적으로 `진실로선하시므로'의 뜻이다.
그 인자하심이...영원하시도다 - 여기의 `인자'(* , 헤세드)는 계약적
관계로 인하여 베풀어지는 불변의 사랑을 가리킨다(Fensham). 다시 말하여
백성들의 엄청난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치 않으시고
길이 참으심을 뜻한다(애 3:22, 23). 그리고 `영원하시도다'(* , 레올람)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있을것이다'의 의미이다.
이스라엘 - 언약 공동체로서의 유대 민족을 가리킨다(1:3).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는 것이나 노래하는
것은 승리의상황에서 이루어졌다(삼상 4:5).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재건되어
하나님께 대한 희생제사가 완전히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마귀 세력에 대한 하나님나라의 승리이자 그 백성의 승리였다.
=====3:12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의
느부사라단에 의해서 파괴된 것(왕하 25:13; 대하 36:19)은 B.C. 586
년이었다. 따라서 지대가 눠여진그해(B.C. 536년)로부터 50년 전이었다.
그러므로 귀환자들중에 연로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을 본
경험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전 지대 - 이스룹바벨 성전의 기초는 거기에 사용된 재료의
질(質)이나(왕상 5:17; 7:10, 11) 그 규모에 있어서 솔로몬 성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보잘것 없었던것 같다(학 2:3). 뿐만 아니라 그 공사를
담당했던 석공(石工)의 기술 수준에 있어서도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왕상
5:6).
대성 통곡하며 - 문자적인 의미가 `큰 소리로 울면서'라는 점에서, 개역
성경의 번역은 꽤 적절하다. 그런데 여기서 노인들이 `대성 통곡'을 한
까닭은 (1) 성전의 규모가 과거의 솔로몬 성전에 비해 보잘것 없으리 만큼
작았으며, (2) 범죄로 인하여 이방 민족에게 철저히 멸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에 의해서 그들의 땅에 포로로 끌려 갔었던 슬픈
과거가 생각났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 - 솔로몬 성전을 못봤던 대부분의 백성들을 뜻한다.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 젊은 사람들은 (1) 자신들의 슬픈 역사에
대해서 체험적이지 못했으며, (2) 제 2 성전의 규모가 작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낙천적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부르니'(* , 루아)는 `소리치다'의의미로서, 일이 잘 진행됨을 인하여 기쁨
중에 함성을 지르는 행동을 가리킨다(수 6:5; 삼상 4:5; 대하 13:15; 시 95:1).
=====3:13
본절은 노인들의 통곡하는 소리와 기뻐 외치는 소리가 함께 어올려져서
큰 소음으로 변했음을 말해준다. 노인들의 숫자는 분명히 작았을 것이
틀림 없는데도 불구하고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슬픔에 겨운 탄식
소리가 기뻐 외치는 소리보다 훨씬 컸던때문이었다(Rawlinson).
백성... 멀리 들리므로 - 개역 성경 본문에 따라 이해하면 이 문구는
마치 이 다음의 문구에 언급된 내용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본절에서 두 번째로나오는 `백성'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사람인 양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본문구는 오히려 본절의 끝부분으로
옮겨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백성들의 탄식과 기쁨의 함성이
섞여져서 멀리까지 들릴 만큼 그 소리가 매우 컸음을 시사하는 데에본절의
주된 의도가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 - 여기의 `백성'은 본절의 초두에 나오는
`백성'(* , 하암)과 동일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예루살렘에서멀리 떨어져 있었던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회중들을 가리킨다.즉, 탄식 소리와 기쁨의 함성 소리가 혼합된
나머지,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조차도어떤 것이 탄식 소리이며, 또 어떤
것이 기쁨의 함성인지를 분별치 못했다는 것이다.
전장(前章)까지는 바사(Persia)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하게 된 원인(1:1-4)
과 경과(1:5-11), 그리고 귀환자들의 인구 수와 그들이 바친 예물(2장)에 대해서 언급
했다. 이것은 보서 저자가 본서 서둘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되는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에 이어지는 본
장은 보서의 핵심 부분, 즉 성전 재건의 사실에 대해 증거하는 대목 중에서(3-6장) 그
기초 작업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으로 성전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1,2,3)이 신실
히 이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제반 준비 사항(1-7
절)과, (2)기초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과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8-13절)에 대해 기
술하고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본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의 재건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였나늘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본서 저자는 귀환
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레위 지파 사람들이 감당했던 역할에 대해서 깊은 관심
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 뿐만 아니라 본장을 통해 본서 저자즌 자신이 가
졌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제사장적 관심을 극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서 본장에는 번제단(2절), 번제(3절), 초막절(4절) 등의 종교 의식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고, 당시 레위 사람들이 맡았던 감독(8,9절)과 찬양(10절)에 대해 속속이 기술
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이 같은 의식을 통해 그분과 교제
를 나누어 온 민족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닌 특수성이기에 그
들은 이미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던 바벧론을 떠나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
해 유다땅으로 귀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이후 제일 먼저
부딪힌 문제는 성전 재건에 관계된 과업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제사 드리며, 그분
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성전이라는 장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당시 예루살멤 성전
은 폐허된 상태로 있어 참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
의 문제를 귀환 후의 제일 과업으로 여긴 것이다.
이 같은 성전 재건에 관한 사업은 영적 회복을 위한 백성들의 종교 운동이었다. 왜
냐하면 성전에서의 제사 행위와 이를 중심으로 한 신앙 교육은 이스라엘을 영원한 하
나님의 백성으로 이끌어가게 하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장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심판을 받아 멸망한 포로 이전의 백성들과는 전혀 상반된 포로 이후 백성
들의 신앙에 대해 전반적으로 암시하는 성격을 띠며 기술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본장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즉 '이마누엘'(Immanuel)되시는 하나님
의 존재에 대해 묵시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본장 전체에는 백성들
의 제사와 예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암묵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성전 재건을 착수했지만, 그들에게 부닥친 난관
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건축 재료를 확보하는 일, 건축 기술자
를 모으는 일 등으로 인하여 꽤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시작한
귿르은 그 첫 단계까지의 공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비록 그 규모가 적기는 하였
지만(12절), 그들의 노고는 결코 가볍게 취급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많지 않았던
그들의 인구에(2:64) 비한다면, 그 성전 '지대'의 규모가 솔로몬 성전보다 결코 작다
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장을 통하여 우리는 (1)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을 각오해
야 하며(눅 9:23), (2)믿음으로 씨를 뿌리는 자에게는 풍성한 수확이 기다린다는 사실
(시 126:5, 6; 갈 6:9)을 깨단게 된다.
1. 성전 재건을 위한 준비(3:1-7)
성전 재건을 위한 준비 상황을 그리고 있는 본문은 오직 두 가지 관점에서 그 준비
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본문은 성전의 재건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
로 분지하는 모습을 그린 전반부(1-6절)와, 물질적으로 채비하는 상황을 묘사한 후반
부(7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기자는 유다 백성들이 오직 성전 재건의 과업
만을 위해 애쓰고 준비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담고 있는 본문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다.
(1)신앙적 준비1-6절) :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후 과거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인
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음을,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새삼스레 깨달았을 것이
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제일 과업임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내 유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 사업을 착수하기 전에 먼저 신앙적인 준비를 하
였을 바, 그들은 단을 만들어 번제를 드리고 초막 절기를 지켰다. 그리고 특별히 나팔
절(민 29:1), 속죄일(레 23:27), 초막절(신 16:13)이 있는 7월(종교력임, 민간력 1월)
을 택하여 신앙적 준비를 했다. 이는 본토 귀환 후 3개월 후의 일로서 남유다 패망 약
70년만에 처음 드려진 제사들이었다.
(2)물질적 준비(7절) : 종교적으로 준비가 된 후 이어진 물질적 준비는 솔로몬 성
전을 세울때 하였던 것과 비슷하다. 즉,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목수와 석수를
고용한 것(대상 22:2, 15)과 같이 기술자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다윗(대
상 22:4)과 솔로몬(대하 2:8이하)이 했던 것처럼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을 통해 재료
를 갖추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솔로몬이 음식과 기름을 준 것(대하 2:10)과 같이
시돈, 두로 사람에게 음식과 기름을 주어 성전 재건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
다.
이 같은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받을 수 있다.
첫째, 모든 사업의 시작은 언제나 신앙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의 지대(地臺)를 놓기 전에 먼저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의미깊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근본은 여호
와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시 111:10; 잠 1:7;9:10; 골 1:18) 생명과 구원의 근원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잠 4:23; 히 5:9).
둘째, 모든 사업은 무리함 없이 정당하게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은 성전 재건을 위해 취했던 유다 백성들의 모습(7절)에서 볼 수 있는 바, 성도들은
어떠한 명목으로도 억지로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되고 정당하게 지급할 것은 지불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셋째, 성전 재건을 위해 유다 백성들이 모인 것처럼 하나님의 일은 신앙적 열심으
로 결집될 때 보다 성공저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출 17;12; 전 4:12; 빌 1:27).
*포로 후기 시대의 절기 행사.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백성들의
영적 수준과 절기 행사에의 참여도가 비례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열심을 가졌을 때는 절기를 열심히 지켰지만, 열적 침체기에는 그렇지 못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영적 침체는 왕조 시대 후기에 이르러 더욱 극심하였는데 이때
에 들어가서는 절기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바로 이 같은 영적 상황과 이스라엘 가
성들이 타국 땅으로 포로로 끌려간 것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이러
한 패역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결국 진노의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바벧론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절기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
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포로 후기 시대에는 신앙적 열심이 있었을 때에만 절기가 지
켜졌음을 알 수 있다(느 8장). 다시 말해서 에스라와 같은 훌륭한 신앙 운동가가 활약
했을 때만, 절기가 지켜졌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에스라가 죽은 이후에는
유대인들이 절기를 거의 지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자신들의 고향에서 지
키는 절기가 그러했다고 추측할때, 전 백성들이 참여하는 절기 행사(느 8:17)는 전무
(全無)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같은 현상은 모두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비록 포로 후기 시대에도 의식법이 지켜져야 되었지만, 그때는 신약 시
대의 완전한 것이 가까와 오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 예표적으로 나타났던 것들
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드러날 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것의 그림자요 예표였던(히 10:1) 절기들은 서서히 그러한 절기가 갖는 참의미의 실현
을 기다릴 때가 된 것이다.
2. 완료된 성전 기초 작업(3:8-13)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춘 영적(1-6절), 물질적(7절) 준비 상
황을 언급한 전단락에 이어지는 본문은 백성들이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성전의
기초를 놓는 장면을 그린 대목이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작업의 실제 상황을 묘사하기
보다는 그 당시의 상태, 즉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감당한 역할을 중심으로 백성들
의 반응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본문은 (1)공사가 시작된 시점을 언급함과 더불어 그
지도자와 감독자들의 이름을 기술한 전반부(8, 9절), (2)여호와를 찬송한 제사장들의
역할을 언급한 중반부(10, 11절), 그리고 (3)기초 공사의 결과에 대한 백성들의 두 가
지 반응을 그린 후반부(12, 13절)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티으로 귀환한 그 이듬해, 즉 B.C. 536년에 가서야
성전 재건을 시작한 것은 그들의 열심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동안 건축 지도자를 모으며, 건축 자재를 확보하는 일에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하
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우기(雨期)를 피해야만 했다
는 사실이다. 틀림없이 예루살렘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1절), 모인지 얼마되지
않아서 우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이유인즉, 종교력으로 6월 부터 8월까지 많은 비가
오는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약 6개월만에야 비로소 공사를 본격적
으로 착수하였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내용별로 구분해 보면 그 특성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
다.
(1)인력을 조직적으로 활용함(8-11절) : 이때 성전을 재건하는 공사를 진행시키면
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력을 대단히 조직적으로 운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백성마들은
적재 적소(適材適所)에 잘 배치하여 인력의 낭비를 최대한으로 줄였다는 것이다. 그래
서 성전 공사의 총책임자로 스룹바벧과 예수아를 두고 그 아래에 레위 사람으로 하여
금 감독을 맡게 해 공사를 관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제사장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찬송케 해 성전 건축에 대한 신앙심을 더욱 돈독히 하였을 뿐망 아니라 백성
들과 함께 찬송으로 화답하게 해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나누었던 것이다.
(2)백성들의 반응을 기술함(12, 13절) : 성전 공사 중 가장 첫 단계인 '지대'를 놓
는 일이 마쳐졌을 무럽 백성들의 반응는 구 가지의 대조적 양상으로 나타났다. 우전
젊은 사람들은 성전긔 기초 공사가 끝났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 기뻐하였으나 노인
들의 경우는 솔로몬 성전의 옛 모습을 보았던 관계로, 스룹바벧 성전의 규모가 초라했
다는 사실(학 2:3)로 인하여 깊은 회한(悔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그들
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화려하고 웅장했던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었다고 스스로
를 자책하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모두는 기뻐하지 아
니할 수 없었다. 이유인즉, 그들에게는 이제 머지않아 성전 제사를 다시 드릴 수 있다
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려 70년 동안을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함으로써
극심한 영적 기갈 상태에 빠져 있었다(삼상 7:2). 그래서 본서 저자즌 바로 이 같은
당시의 모습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성전 재건 사업에 대해 백성들이 대단히
큰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으로 깨달을 수 있다.
(1)성도들은 언제나 마음의 전(殿)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모셔 주의 일을 해야 한다
는 사실이다.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성전 재건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신앙의
회복을 꾀했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성도들 또한 마음속의 성전을 재건해 먼저 하나님
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일해야 할 것이다(마 6:33).
(2)하나님의 일은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룰 때 더욱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성전 재
건을 위해 백성들은 가자 자신의 일에 성실히 봉사했다. 그 결과 성전 재건은 성공적
으로 끝날 수 있었고 그래서 백성들은 기뻐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성도들 또
한 하나님의 일을 추진할 때 자신의 주장이나 고집을 내세우지 말고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잘 감당하고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롬 8:28).
*스룹바벧 성전의 구속사적 위치. 하나님께서는 바벧론 사람들을 도구로 삼아
(사 10:5)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이 파기
되었음을 암시하셨다. 그래서 성전이 파괴됨과 동시에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감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교제는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드리는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렘 50:4), 그들을
다시 팔레스틴으로 인도하여 교제를 갖기 원하셨다. 따라서 성전은 필연적으로 다시
재건될 수밖에 없었다(1;2, 3; 사 44:28). 그리고 이와 더불어 또 하나 성전이 재건되
어야 할 까닭은, 그때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구약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즉, 온전
한 실체(요 2:21)로서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백성들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
는 하나의 통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필요에 의해서 재건된 스룹바벧 성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의 성전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스룹바벧 성전에는 솔로몬 성전에 있었
던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언약궤는 솔로몬 성전과 운명을 같이하여 이 세상
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룹바벧 성전이 솔로몬 성전보다 더 열등하
다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물론 성전의 외양만을 따진다면 스룹바벧 성전이 분명 열등
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스룹바벧 성전이 더 발전된 것이라고 간주
할 수 있다(학 2:9). 이같이 볼 수 있는 이유는,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초림이 가까워
오므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그림자로 보여주던 언약궤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으며(렘 3;16-18), 그같이 불필요하게 될 언약궤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비추어볼 때, 구속사적인 시점에서 더 앞섰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점에서 스룹바벧 성전의 영적 우월성은 분명해 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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