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나이 이십 오 세라 - 그가 약 10년 정도를 그의 부친 웃시야와 함께 통치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는 35세 때부터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 육 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16년은 웃시야가 섭정한 기간도 포함하고 있다.
여루사 - 이 이름의 히브리어 표기는 '예루솨'(* )인데 왕하 15:33에는끝 자음이 알렙(* )이어서, '예루솨'(* )로 되어 있고(BHS), 몇몇 사본들에서는 역대기 본문과 일치한다(BHS Appartus).
사독의 딸이더라 - 이 사독이 대상 6:12에 기록된 대제사장 사독일 가능성이 있는데(Curtis), 요담의 부친 웃시야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26:16-19) 정책적으로사독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고, 반면에 제사장들의 간섭에 의해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다(24:3).
27:2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정직히 행하였으나 - 요담이 통치하던 기간 중 상당히오랜 동안 웃시야가 살아 있었다. 요담의 부친 웃시야는 비록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거하였지만(26:21),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Leon Wood). 따라서 요담은 웃시야의 많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웃시야는 자신이 당한 징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고, 요담은 아버지의 모습을 접하면서 하나님께 대해 더욱 정직하게 행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 맛소라 본문(MT)에는 본 구절 앞에 '단지'(only)라는 뜻을 가진 부사, '라크'(* )가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행하였)으나'로 번역된 이 접속사가 앞 문장과 대조를 이루게하여 요담이 웃시야의 모든 행위를본받아 행하였지만, 예외적으로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범죄하는 일 만큼은 삼가했다는것을 강조하고 있다.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더라 - 병행절인 왕하 15:35에서는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당 제사를 '사악을 행하였다'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역대기 저자가 이에 대해 얼마나 엄격했는지 발견하게 된다.
27:3
전 윗문 - 이 문은 성전 마당의 북편 성벽에 있는 문으로서 '베냐민의 윗문'(렘20:2)이라고도 불리워진다(Benzinger). 그리고 또 23:20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이 문은 왕궁에서 성전 바깥 뜰로 통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문은 아마샤 왕 때 헐린것으로 보여진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와 전쟁하던 아마샤가 사로잡히고, 예루살렘성벽이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이 헐렸는데, 이 때에 윗문도 무너졌을 것이다(25:23;왕하 14:13). 그리고 이때 무너진 성벽의 많은 부분은 요담의 부친 웃시야에 의해 거의 보수되었고(26:9), 요담도 웃시야의 건설 정책(26:9f.)을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하였을 것이다.
오벧성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펠'(* )의 원뜻은 언덕, 낮은 야산을 가 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3:1) 남쪽 경사지를 그렇게불렀다(33:14;느 3:26,27;11:21). 어떤 학자들은 이 성을 다윗성과 동일시하지만(G.A.Smith), 오벧성은 다윗성과는 분명히 다르며, 다윗성이 있는 언덕의 북동쪽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후기 유다 왕들이 요새화하려 했던 곳이다.
27:4
유다 산중에 - 여기서 '산'은 평지 또는 저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서 요새화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성읍들은 산지나 산지의 숲 속에 세워졌다(사2:15;호 8:14).
영채(營寨)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라니요트'(* )는 '성'(castle) 또는 '궁'(palace)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상 11:16의 '영채'(* , 네치브)나 삼하11:11의 '영채'(*, 숙코트)와는 달리 여기서는 '요새'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Lange, Keil & Delitzsch). 따라서 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가 숙영(宿營)할 수 있는 요새를 가리킨다. 수풀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진 요새는 그만큼 위장이 잘 되어 있어서, 적의 공격이 있을 때는 언제라도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망대 - 이것은 적의 침공을 사전에 발견하여 대비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적의 동태를 감시하여 대비하는 데 용이했다(14:7;26:9;삿 8:9). 이와같이 웃시야 때로부터 계속되어 온 건축 사업은 당시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앗수르의 위협과,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7:5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 이 기록이 열왕기에는 없다. 부친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군사력과 명예를 배경으로하여, 요담은 정복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웃시야는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등 요단 서편 지역을 주로 정복한 반면, 요담은 반대편인 요단 동편 지역의 땅을 차지했다(Kittel). 한편 혹자는 요담이 암몬과싸운 이유를 암몬 자손이 웃시야때부터 바쳐오던 조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Barker, Keil).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명백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추측에 지나지않는다. 오히려 요담이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추진한 정복 사업의 결과로, 암몬과 싸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 석 - 요담이 암몬으로부터 이렇게 많은 양의 밀과 보리를조공으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암몬 족속의 주산물의 밀과 보리였으며 그 땅이 매우비옥하였음을 입증해 준다(Barker). 3년 동안 계속해서 바쳐진 이 밀과 보리는 아마군량미로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더
이상 암몬 족속이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독립하였거나, 아니면 요담 말년에, 유다의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암몬 족속이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이 시기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실(왕하15:37)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조공에 대해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사 7:1-8:8). 한편 역대기 저자가 르신과 베가의 침략에 대해 전혀 언급지 않는 것에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아해 한다. 그 이유는 베가와 르신의 침략이 요담과 아하스 때두번 있었던 것처럼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왕하 15:37;16:5). 그러나 왕하 15:37의 기록과 16:5의 기록이 각각 다른 사건을 가리키지 않으며 그 사건은 아하스때에 있었음이 분명하다(사 8:6ff.).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아람.이스라엘 동맹군의침략과 요담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참고로 열왕기 저자가 같은 사건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하여 기록한 것은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 통치를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더욱이 왕하 15:30에서는 '요담 이십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본장에서는 '16년을 치리했다'(1절)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섭정을 했다는 증거는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아람.이스라엘 동맹군이 공격했던 시기는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을 하고 있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아하스의 범죄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왕하 15:30 주석을 참조하라.
27:6
요담이...점점 강하여졌더라 - 본절은 역대기 저자가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실제적으로도 요담의 왕국이 강하여졌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즉, 요담이 통치하던 시기에 유다의 관할 아래 있던 에시온게벧에서 그의 공식적인 인장(印章)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Payne).
27:7
모든 전쟁 - 역대기 저자는 본장에서 요담의 사적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웃시야가 말년에 문둥병으로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만든 동맹군(26:11ff.)을요담이 맡았을 것이다(26:21). 이는 요담이 그때부터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딜리(Thiele)는 앗수르의 연대기를 근거로 하여 B.C.743년경에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의해 유다가 패퇴되었다고 제안하는 데(Payne), 역대기 기자는 이러한 패전 사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어떠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 - 왕하 15:36에는 '유다 왕 역대 지략'이라고 기록 되어'이스라엘'이 생략되어 있으나, 본문은 역대기 기자의 규칙적인 관습에 의 한 것이며(16:11, Williamson), 열왕기서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에 해당한다 (Curtis).
27:8
본절은 1절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글의 형식상 이러한 반복이 생긴 것 같다. 즉, 1절은 통치 서론으로서, 8절은 통치의 결론으로서 기록된 것이다. 또한 28:1의 표현과명확하게 대조하기 위해 반복한 것 같다.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십 육 년이라 - 딜리(Thiele)는 베가 17년(B.C. 743)부터요담이 그의 아들 아하스와 섭정하였고,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이 실제로는 20년간이라고 한다. 이는 왕하 15:30에서 '요담 이십 년'이라 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요담 20년은 그의 아들 아하스가 24세 되던 때
이다(자세한 내용은 왕하 16:2의 주석을참조하라).
뿐만 아니라, 혹자는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시대 가운데 4년 동안은 그들이 모두 살아 있어서, 3대에 걸친 섭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ood).
27:9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8절의 논의가 타당한 것으로 볼 때, 본문은 아하스가 웃시야와 요담의 섭정을 함께 받았다가(Wood), 요담의 섭정을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본장은 교만해져서 제사장의 고유 역할인 성전의 분향 사역을 대신하려다 여호와의 진노를 받아 비참한 말로를 맞은 웃시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요담의 사역을 언급한 대목이다. 이러한 본장은 요담의 통치에 대해 역대기에 언급된 다른 열왕들의 치적보다는 비교적 간략히 기술하여 그가 행한 통치상의 특징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담이 행한 토치를 다음과 가이 구분해 볼 수 있는 바,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1) 요담의 성품에 대한 개괄적 언급(1, 2절), (2) 그가 행한 건축 업적과 군사적 승리(3-5절), (3) 정도(正道)를 행한 그의 모습(6절). 그리고 (4) 그의 죽음에 대한 일반적 진술(7-9절) 등이다.
이러한 본문은 왕하 15:32-26과 그 내용이 거의 비슷한 바, 열왕기 저자와 본서 저자가 같은 견해로 요담 왕을 평가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장에는 요담이 행한 업적, 즉 요담이 건축 및 증축한 사실(3, 4절), 암몬 자손과 싸워 승리해 조공을 받은 역사(5절), 그리고 그가 정도를 행해 점점 강해졌다는 본서 저자의 평가(6절) 등이 열왕기와는 다르게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본서 저자의 집필 목적이 분명히 나타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본서 저자는 요담이 행한 선한 업적들을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다음에 이어지는 아하스(28장)으 악정(惡政)과 선명하게 대비시켜 놓은 것이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자(2절)가 이뤄 놓은 업적은 강조하는 것이다(6절). 이 같은 본장 전체의 기록들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위대한 요담의 훌륭한 삶 : 요담은 문둥이가 된 부왕(父王) 웃시야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26:21). 그러면서도 그는 조금도 아버지를 경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도 않고 오직 부친의 선행만을 본받아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한 그의 통치는 한 번의 실수로 문둥이가 된 아버지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부왕의 사업을 게속 추진하여 아버지의 선정을 더욱 더 빛나게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요담의 훌륭한 인격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과거의 잘못을 딛고 일어나 정도를 걷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요담의 결점 : 요담의 단점은 외적인 번영을 추구하여 내적인 안정을 이룩하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히려 심각해져 가는 백성들의 사악함(2절)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적으로 부요하게 될 때 국민 생활도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백성들은 도리어 더 타락해져 갔을 뿐 국력이나 경제력은 배겅들의 신앙 회복과 도덕적 부패를 막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방탕하고 사치스러워져 갔으며(사 3:16-24), 거만하여 전쟁을 갈망하고 우상에 심취해 있었다(사 2:7, 8, 17). 이를 통해서 볼 때 결코 외적인 번영을 통해서는 백성들의 마음이 정결하여지거나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1. 웃시야와 요담(27:1-2)
본문은 요담의 통치에 대한 서론적 평가로서 요담과 그의 부와 웃시야와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왕위에 올라 16년을 치리한 통치 연대(1절)와 당시 유다의 종교적 상황을 언급해(2절) 요담의 치세에 대해 개괄적으로 평가한다. 이 같은 내용으 본무니 비록 빈약한 자료로서 구성되었지만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웃시야의 가정 교육은 훌륭한 것이었다. 요담은 부친 웃시야의 훌륭한 가정 교육 덕분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담의 부왕(父王) 웃시야도 정직한 그의 부친 아마샤의 가정 교육 때문에 한 때는 유다를 훌륭하게 치리해썬 왕이었다. 이와같이 훌륭한 가정교육은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빛나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외에 끼티는 유익도 지대한 것이다. 흔히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핑계로 하여 자녀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부로로서의 의무 회피는 반드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2) 신앙은 결코 개인적이어서는 안 된다. 요담의 신앙은 지나치게 개인적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경건하여 여호와께 정직을 행하였으나 백성들의 타락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선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부도덕함과 신앙적 타락을 일깨워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 올바른 신앙은 불의를 지적하고 개선하려는 용기와 열정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신앙적 용기와 열정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지도자는 만인에게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3) 신앙의 성숙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결과이다. 요다의 약점 또는 그의 신앙의 성숙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문둥이가 된 부친 웃시야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친의 그 같은 모습이 요담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항상 부왕의 실수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신앙은 적극적이지 못하고 항상 소극적인 자세로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으로만 만족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다 백성들의 신앙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회피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성전을 멀리함으로 인해 역대 위대가 왕들이 보여준 기도 생활이나 제사를 장려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멀리하고 산당을 가까이 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 되었다9왕하 15:35). 그리고 그 결과 산당을 멀리하고 산당을 가까이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 되었다(왕하 15:35).
그리고 그 결과 산당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극도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만인 그가 부친의 실수를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개선하고 오히려 성전 예배를 힘쓰고 백성들의 신앙을 한곳으로 모으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면 그는 참으로 존경받는 신앙의 위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소극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선하다는 평을 받으면서도 자기 백성은 오히려 더 사악하였다는 평은 듣는 아이러니한 경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선을 적극적으로 행치 않고 잠잠히 있는 것은 오히려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을 자초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 왕국 시대의 제사장직의 역할. 요아스 때읫 제사장 여호야다 이후 후기 유다 역사에 있어서 크게 영향을 미친 두 그룹은 바로 방백들과 제사장들이었다고 할 수 잇다. 왜냐하면 이 두 그룹은 서로 대조적인 입장에서, 서로 유다의 바런을 위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방백들은 국제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철저한 신앙의 고수보다는 국가적 안정을 추구하였고,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유일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어떠한 타협적 자세도 용납지 아니함으로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태도를 지닌 두 그룹은 주로 열왕들의 태도나 선호도에 따라 서로 우위권을 다투었다고 이해되는 바 웃시야 시대 이후로부터 요담의 시대까지는 바로 제사장들이 우위권을 누리고 있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요담이 제사장 계열인 사독의 딸에게서 태어났다는 점과(1절), 웃시야 시대 이후 왕의 성전 출입 문
제가 요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2절)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왕국 시대에서 제사장들의 역할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다윗 시대 이후 제사장들은 주로 왕의 통치에 절대적인 충성이 요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여로보암 2세 때의 제사장 아마샤는 선지자 아모스를 추방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였던 사실(암 7:10-17)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다윗에게 충성을 다했던 놉의 제사장들과 제사장 아히멜렉(삼상 22:1-19)의 경우도 들 수 있다. 이렇듯 제사장직은 왕국 시대에 왕의 권위 아래 예속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이것에 대한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제사장직의 세습 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독 가문이 다윗 왕 시대부터 마카비 시대까지 제사장직을 세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제사장들이 성저늬 일을 담당하고 처리 임무를 행하는 것 모두가 왕의 권위하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때로는 제사장들이 왕의 권위에 견제 세력이 될 때도 있었는데 여호야다의 경우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아달랴에 반정(反正)을 일으킨 여호야다에게 대제사장 이란 칭호를 붙인 것은(24:6) 바로 제사장이 왕에 대한 큰 견제 세력이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제사장들의 영향은 요담에게까지도 미쳤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직은 어디까지나 왕의 권위 아래 예속되어 있었다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는데 그 증거로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아스 왕이 제사장들을 인정하지 않고 방백들의 의견을 추종할 때 제사장들은 오히려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24:15-220. 그리고 또 제사장들의 활동은 선한 왕들 아래에서만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사실들을 들 수 있다. 사실 요시야 시대 때 대제사장 힐기야가 크게 활약했던 사실을 볼 때 그러한 주장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왕하 22:4-8).
이상에서 왕국 시대의 제사장의 역할은 다분히 왕의 권위 알 종속되어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선한 왕들에 의해서 제사장들의 위상이 와아지고 또 제사장드리 활약에 의해서 왕들이 여호와 앞에서 정도(正道)를 가게 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애에서의 성직자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물론 구약적인 제사장직과는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올바른 하나님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선포하는 자들로서 성직자들은 통치자의 권위에 단순히 도전적이기보다는 견제하는 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롬 13:1)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요담의 번영(27:3-9)
본문은 16년 동안 요담이 유다를 통치하면서 이루어 놓은 많은 업적들을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담이 남긴 업적들의 대부분은 그의 부왕(父王) 웃시야 생전에 행하여지던 것으로서 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군사적(26:6, 7, 11-15). 경제적(26:8-10) 번영 덕택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업적들을 간추려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건축 사업(3, 4절) : 요담은 여호와의 전 윗문을 수리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였다. 그런데 그가 여호와으 전 윗문을 수리한 것은 부왕 웃시야으 사업을 계속이어서 추진한 것이었다(26:9). 그리고 오벨성의 건축은 주로 외적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특히 성전과 왕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같이 그는 평안할 때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건축한 슬기로운 왕潔駭裏 그런데 이처럼 지혜를 발휘한 또 다른 왕으로서는 아사 왕을 들 수 있다(14:1-8). 그 또한 세얼이 평안할 때 어려운 시대를 위해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요담의 이러한 건축 사업은 당시 외세를 의존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만 의지하여 자신을 견고히 하겠다는 하나의 신앙적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정복 사업(5절) : 요담이 암몬 자손과 싸워 승리한 것은 유다의 국력을 크게 과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여호사밧 시대에 암몬이 유다를 침입하였을 때 어렵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을 물리친 이후로(20:1, 22, 23) 유다가 암몬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웃시야에 의해서 서쪽으로만 확장되던 유다의 영토가 이제는 동쪽에까지 미치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요담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여호와 앞에 정도(正道)를 행하였기 때문이었다(6절). 결과적으로 요담은 재산이나 국력 면에서 크게 강해졌는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도를 행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어떠한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같은 내용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첫째, 요담의 건축 사업을 통해 우리는 교회 부흥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사실 요담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오벨성을 많이 증축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는 이와 더불어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였다. 이러한 것처럼 교회는 먼저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외적인 난제까지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활히 회복되어야만 하나님의 처소 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엡 2:22).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교회 부흥을 위해서는 자신의 내적 문제부터 해결하고 외적인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
둘째, 자신의 신앙을 위한 참된 방벽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요담은 유다의 국방을 견고케 하기 위해 성읍, 영채, 망대 등을 건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후에 자신들이 세운 방벽들을 믿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죄를 범하였는데 이에 대해 여러 선지자들이 그들의 죄를 책망하였다(호 8:14;암 5:11). 이 같은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오직 여호와만이 우리 구원의 산성이시요 방벽이라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시 18:1, 2;121:1-8;127:10.
*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 본문의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6절)는 평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즉,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도( 正道)를 행하는 것 또는 정직히 행하는 것 이다(24:2;25:2;26:4).
사실 유다 왕들 가운데 우상을 섬긴 옹들은 이러한 정직하다 는 평을 받지 못하였다(21:6;22:3). 간혹 이 같은 평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정직은 오래가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요아스의 경우는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24:2) 정직히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아마샤의 경우는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행치 아니하였더라 (25:2)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웃시야에 대해서는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26:5)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직하다 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소극적인 의미로 여호와께 범죄치 아니하고 우상을 좇지 아니하는 거시라고 볼 수 있고, 둘째는 적극적인 의미로 죄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전심으가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직히 행한다는 것 은 전(全) 인생의 가치관을 오직 하나님께만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리킨다고 볼 삥 있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 이외에 우상이나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를 위하여, 또한 여호와를 인하여, 여호와와 함께 사는 것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러한 성도들의 모습은 다소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삶의 전체적인 방향이 주의 규례를 좇는 것이지 그러한 삶의 목표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요담이 우상을 섬기는 나라와의 교류를 거부하
고 우상을 의지하지 않으며 오직 여호와만을 신뢰한 것은 바로 그가 여호와께 저직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께 정직하며 여호와께 정직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께 정직하며 여호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진실 : 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이나 부족한 점 때문에 자신을 감추거나 핑계치 아니하고 모든 문제를 진실되게 여호와께 맡기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진실한 삶에로의 초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믿음 : 우리 속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이 우리 삶을 주장케 하는 것이다.그럴 때만이 우리의 욕심과 교만을 버릴 수 있고 양심을 밝게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참으로 불신은 범죄를 조장하게 되고 반복된 범죄는 양심을 굳게 하여 정직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행 24:16)고 고백하였는데 이러한 믿음의 고백은 바로 정직한 삶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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