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역대하 20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2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 '아람'(* )을 여러 역본(RSV, NIV, JB, 공동번역)과 많은 학자들(Keil, Curtis, Payne, Barker)은 '아람'이 아닌 '에돔'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은 흠정여과 같이 '아람'(KJV, 수리아)으로 번역한다. 이 입장이 타당치 않은 이유는 유다 쪽으로 볼 때 '바다 저편'은사해 바다 남동쪽을 가리키며 그곳에 에돔 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람은 사해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람'은 많은 역본들처럼'에돔'으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1절에서 언급되지 않은 에돔 사람이 모압과암몬 자속과 동맹하여 여호사밧을 침략한 셈이 된다. 따라서 1절의 '마온 사람'은 세일 산에 거주하던 비에돔계 사람을 대표하며 세일 산에 거주하여 에돔계 사람과 비에돔계 사람이 모두 이 전쟁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 -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수 15:62;삼상 23:29;겔47:10)는 본래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창 14:7). 이는 사해 서부 중앙의 샘이 있는 지역으로서종려나무와 포도원의 고벧화가 유명한(아 1:14), 오늘날의 아인 지디(Ain Jidi)에 해당된다. 한편 엔게디의 옛 이름인 하사손다말에서 하사손(Hazazon)이란 이름은 엔게디북서 쪽에 위치한 후사세 와디(Husaseh Wady)라는 지명(地名)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수 있으며 다말(Tamar)은 종려나무를 뜻한다. 한편 이 동맹군들의 유다 침략경로는 사해 남쪽 근처에서 사해 서부 엔게디를 통과하여 유다의 구릉지로 이어진다(Curtis).

=====20:3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 이는 여호사밧이 마음을 정하여 크게 결심하고 여호와께도움을 구하기로 하였음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얼굴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얼굴을 든다'는 존경심을, '...게서 얼굴을 돌렸다'는 경멸이나 무관심을 나타낸다(왕상 21:4; 겔 7:22). 이런 점에서 여호사밧의 행동을 살펴볼때 그가 매우 다급하였고 간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식하라 공포하매 - 이것은 왕이 공식적으로 공포한 최초의 금식 선포이다(Barker). 물론 그 이전에도 급박한 재난이 있을 때에나 특별한 회개가 요청될 때 백성들을 모으고 금식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삿 20:26; 삼상 7:6). 그러나 왕조 시대에이르러 왕이 개인적으로 금식한 일은 있어도(삼하 12:16) 온 백성들을 향하여 금식을선포한 것은 이것이 최초이다.

=====20:4
유다 사람이...간구하더라 - 예루살렘 거민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 전체가 여호사밧의 명령에 순응하였으며 민족의 재난을 맞아 크게 두려워하고 여호와께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의 지혜와 능력에 맡겼다. 여호사
밧이 다른 나라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 백성을 향해 여호와께 도움을 청하라고 명한 것은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왕으로서 바른 조처를 한 것이다. 그는 여호와만이 그의 힘이시요 방패시요 산성이심을 알고 여호와께 의지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
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20:5
새 뜰 앞에서 - 이것은 성전 앞에 있는 솔로몬이 지은 큰 뜰(4:9)을 가리키는데이뜰을 '새 뜰'이라고 한 것은 아사 왕이나 혹은 여호사밧 왕이 복원 또는 확장했기때문일 것이다. (Keil, Curtis). 이 뜰은 회중이 모인 바깥 뜰이며, 여호사밧은 제사장의 뜰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모인 회중을 바라보았다(Keil).

=====20:6
하늘에서 하나님 - 이는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모세는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보다 강대한 열국을 쳐서이기신 여호와의 능력을 말하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신 4:39). 기생 라합도 홍해사건
과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수 2:11).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 전능하신 여호와와 무기력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대비시킨 구절이다(14:11 주석 참조, 대상 29:12; 시 94:16).

=====20:7
전에 이 땅 거민을...쫓아내시고 - 이는 가나안 정복 사건을 가리킨다(수 23:9;24:12).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간의 친밀성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사 41:8; 약 2:2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벗이라 부르심은 지극히 그를가까이 하셨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주의 벗으로서 그분의 뜻을 깨닫고 언약의 나
라를 이루는 초석을 놓았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자손은 이런 기초위에 놓임으로써 여호와와 친밀성을 갖는다.

=====20:8,9
여기에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하면서 드린 기도가 요약되어 나타난다(6:28-30;7:13-15). 여호사밧은 전쟁의 위협 앞에서 이 기도를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드린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으로 예상한다. 솔로몬이 그곳에서 드린 기도에
대한응답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으로 성전을 가득 채우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7:1-3).

=====20:10
세일산 사람 - 이는 직접적으로는 에돔 사람을 가리키며 본장에서는 비에돔계인 마온 사람도 포함된다.
이에 치우쳐 저희를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 민 20:14-21과 신 2:5-9을 통해서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로를 열어주지 않는 에돔과 모압 그리고 세일산 백성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땅을 비켜서 간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여호와의 은혜로 멸망을 면하게 된 암몬과 모압과 세일산사람들의 배은망덕(背恩忘德)을 고발하고 있다.

=====20:11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 세일 땅은 여호와께서 에서의 후손들에게 주신 땅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치지 못하게 하셨다. 이에 반하여 세일땅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에게 주신 땅을 침공하여 쫓아내려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기업으로 주시고 그 땅에서 여호와를예배하고 섬기며 살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침략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이므로 부당하다. 여호사밧은 그의 기도에서 이런 사실을 여호와께 아뢰어 도움을 청한다.

=====20:12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 기도하기 위해 모인 구성원들을 살펴 볼 때그들의 기도는 출전(出戰)을 앞두고 하는 일반적인 그런 기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온전히 여호와께만 맡기고 온 백성들이 합심하여 힘쓰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특이한 사실은 여호와께 기도할 때 성인만 모인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까지도 여호와앞에 나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 절박한 상황에 대해 온 백성이 신앙적으로 대처했었음을 본서저자는 나타내려 했던 듯하다.

=====20:13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 기도하기 위해 모인 구성원들을 살펴 볼때그들의 기도는 출전(出戰)을 앞두고 하는 일반적인 그런 기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온전히 여호와께만 맡기고 온 백성들이 합심하여 힘쓰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특이한 사실은 여호와께 기도할 때 성인만 모인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까지도 여호와앞에 나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 절박한 상황에 대해 온 백성이 신앙적으로 대처했었음을 본서 저자는 나타내려 했던 듯하다.

=====20:14
레위 사람 야하시엘 - 한 레위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는 선지자로 등장하고 있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Curtis). 즉, 야하시엘은 단지 성전 일에종사하는 레위인으로서 이 거국적인 기도회에서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특별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다.
아삽 자손 - 대상 16:5에 따르면, 아삽은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직무를 맡은 자들의 책임자, 곧 그 대표자로서 제금을 다루는 유명한 음악인이었다.
맛다냐 - 본절의 아삽 자손 맛다냐는 헤만의 아들 맛다냐와 다른 인물이다(대상 25:4,6).

=====20:15
이 전쟁이...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야하시엘의 이 말은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때 한 말과 동일한 것으로 전적으로 여호와 만을 의지하도록 촉구한 말이다(삼상 17:47). 일반적으로 전쟁은 훌륭한 작전 계획과 우수한 군사력에 비례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야하시엘은 이런 일반 원리에 입각하여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합리성에 근거하여 역사하시기도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믿음의 원리에 근거하여 역사하시기도 한다. 야하시엘은 이 시점에서 백성들에게 이런 믿음을 요청하고 있다. 다윗의 정신이 이런 믿음의 정신이었다.

=====20:16
시스 고개 - 이 지명(地名)은 다른 곳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지역 주민에게만 알려진 별칭이었다. 이 고개는 엔게디(2절)근처 사해 서부 해안의 한 지점으로부터 유다광야로 올라가는 고개로 추정된다. 이 고개길을 따라 발견된 몇 개의 성채는이 침략 이후에 재침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고개는 하사사 와디 근처에 위치한다(Williamson, Curtis).
여루엘 들 - 여루엘은 드고아 들 남동 쪽에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길은하사사 와디(Hasasa Wady)쪽으로 통해있다(Curtis). 따라서 야하시엘이 유다 백성들로하여금 위치하게 한 곳은 적들이 올라오는 고개위가 아니라 적들이 그 고개로 올라와진행하는 들판, 곧 골짜기 어귀 여르엘 들판이다. 즉, 이는 전쟁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그 동맹군들이 서로 다투어 자멸하는 장면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20:17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 야하시엘은 우수한 작전과 군사력에 근거하는 합리성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원리가 실제로거둘 결과를 목격하라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원의 현장을 목격하도록 한 사건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할 때에도 있었다(출 14:13). 그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세등등하여 추격해 오던 애굽 군대가 홍해 바다에 수장(水葬)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20:18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 이는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승리의 약속으로 인하여감사함을 표현한 모습이다. 일개 레위인의 입술에서 나온 예언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경배를 드린 데서 여호사밧의 진실한 신앙과 염손을 발견할 수 있다.이런 태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에 대해 보였던 태도와는 크게차이난다(18장).

=====20:19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 - 유다를 구원하시겠다는 구원의 계시가 야하시엘에 의해전해지자 여호사밧과 그 백성은 하나님께 경배(18절)와 찬송을 드렸다. 찬송은 그핫자손과 고라 자손이 맡았다. 고라 자손은 그핫 자손이라는 더 큰 가문에 속한다(대상6:22, 37, 38). 고라 자손은 시편에서 노래하는 자들로 나타나지만(시 42-49), 역대기에서는 성막 문지기로 나타나기도 한다(대상 9:19;26:1).

=====20:20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 여호사밧은 드고아 들로 나아가는 백성을 향해 승리의 확신을 갖도록 권했다. 그는 '여호와를 신뢰하라','그 선지자(히브리어 원문에는 '그 선지자들')를 신뢰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신뢰하라는 것에 대한 이중적 강조이지만 그 뜻은 하나이다. 곧,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과 선지자를 신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 곧, 승리한다는 계시를 믿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쓰시는 종들의 말을 믿는 것은 여호와를 믿는 것이 된다. 여호사밧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20:21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 여호사밧은 이 전쟁을 치름에 있어서 특별한 방법을위했다. 즉, 그는 백성들과 의논하여 찬양대를 그 군대 앞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로볼때 유다 백성들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왕의 명령에 순종만 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거룩한 예복 - 이는 거룩성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옷'일 것이다(Pulpit Commentary).그리고 이 예복을 입고 노래하였던 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로 추정된다.

=====20:22
여호와께서 복병(伏兵)두어 - 혹자는 여기서 '복병'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또는 군대, 특히 은밀히 활동하는 천사(insidiatores)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wald). 그러나 여기서 '복병'(* ,메아레빔)은 잠복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을 의미하지(삿 9:25) 하늘의 군대를 가리키지는 않는다(Keil). 그리고 또 유다군을 가리킨다고 볼수도 없다(Curtis). 왜냐하면 유다 군대는 전혀 싸울 채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17절). 그렇다면 그 복병은 동맹군의 일부, 즉 세일 산의 거민들일 가능성이 크다(Keil,Zockler). 세일 산 사람들은 매복하는 기술에 능란햇다(Zockler). 그들은 암몬과 모압을 치고 전리품을 약탈해 가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이를 먼저 알아 차리고 세일 거민을 먼저 진멸시킨 것 같다(23절). 그리고 암몬과 모압도 동일한 이유로 의심을 갖고 서로 격전을 벌여 피차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서로 공격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사사시 7: 22에도 기록되어 있다.

=====20:23
저희가 피차에 살륙(殺戮)하였더라 - 이에 대해서는 삿 7:22과 삼상 14:20, 그리고 왕하 3:23을 참조하라. 한편 후기 선지서들은 다가올 심판 날에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피차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겔 38:21; 학 2:22; 슥 14:13). 이처럼 하나님백성의 원수는 자멸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도 당신 백성의 원수를 막아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20:24
들 망대 - 이 망대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하26:10을 보면 인위적으로 만든 망대는 '미게달'(* )이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이다. 이 '들 망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높은 지대를 가리킨다. 그곳은 여루엘 광야를 내려다 볼 수있는 장소였다(Keil). 그곳에서 유다 사람들은 침략군들이 모두 자멸하게 된 현장을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20:25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는 고로 - 여기서 '그 가운데'란 쓰러진 병사들의 시체들 가운데를 가리킨다. 그 가운데서 취한 '재물'(* , 레쿠쉬)은 유목민들의 재산으로 취급되는 가축들을 가리키며(Keil, Curtis), '의복'(* ,페가림)은 사람들의 의복과 군장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식들(삿 8:26)을 가리키고, '보물'(* ,켈레 하무도트)은 금, 은 장식들, 무기,값진 그릇들(삿 8:25)을 가리킨다(Keil). 이러한 전리품을 세라의 군대에게서 취한 전리품(14:13-15)과 미디안 족속들에게서 취한 전리품(삿 8:24-26)과 비교 참조해 보라.
능히 가져 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 전리품이 이렇게 대단히 많은 것은 이 족속들이 유다 사람들을 쫓아내고(11절) 그 땅에 거주할 목적으로 모든 재산을 가지고왔기때문일 것이다(Keil). 그러나 이런 목적으로 침략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방법으로 파멸시키셨다. 왜냐하면 아직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추방될 상태는'아니었기 때문이다.

=====20:26
브라가 골짜기 - 이는 '축복의 골짜기'라는 뜻이며 현재 드고아의 서쪽에 위치해있는 '베레이쿠트 와디'(Bereikut Wady)일 것으로 추측된다. 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통하는 길 근처에 있는 이 골짜기에는 어떤 큰 재난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옛 주거지의 흔적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한편 욜 3:2에는 '여호사밧의 계곡'이 나오는데 이것이 '축복의 계곡'과 같은 지는 분명치 않다.왜냐하면 여호사밧의 계곡은 일반적으로 기드론 계곡의 위쪽 부분을 가리킨다(Zockl-er, Keil)고 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은 구원의 하나님을 송축했다.

=====20:27
여호와께서...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 유다 사람들은 여호사밧을 선두로 하여 기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역대기 저자는 이같은 즐거움이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스 6:22과 느 12:43을 참조하라.

=====20:28
무리가...합주(合奏)하고 -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다(5:12, 13). 그들은 승리를 주신 주님께 감사제를 드리며 찬양하였다.

=====20:29
하나님을 두려워한 고로 - 유다는 이 전쟁의 승리로 말미암아 유다의 경계 지역에있는 나라들, 즉 북쪽의 이스라엘과 아람, 남쪽의 애굽과 모압 등의 주변 이방 국가들과 군사적인 평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지리적으로 열강의 전쟁의 회오리 속에 놓여 있던 유다에게 주어진 특별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20:30
여호와의 이 놀라운 행사는 고라 자손의 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제가 되었다. 이는 시편 46,47,48에 나타나며 83편에도 나타난다. 이 시들은 아마 아삽 자손야하시엘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다(Keil).

=====20:31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년을 치리하니라 - 왕상 22:41에는 여호사밧이 아합 왕 제4년에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역대기 저자는 북왕국의 왕들과 비교하는 연대기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역대기 저자가 여호와께 배반한 북왕국을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대기와 열왕기의 내용은 본질상 일치한다.
그 모친의 이름은 아수바라 -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참고로 유명한 갈렙의 아내 중에 아수바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다(대상 2:18).

=====20:32
그 부친 아사의 길로 행하여 - 17:3,4에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이 있다.

=====20:33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 17:6에 의하면, 여호사밧이 산당을 유다에게 제거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피상적으로는 본절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역대기 저자가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를 남겨 두었다고 할 수는 없다. 본절의의미는 여호사밧이 산당을 없애는 종교 개혁을 폈지만 백성이 계속적으로 그 일에 동참하지 않았거나 여호사밧이 그 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이 오히려 마음을 정하여 - 이 표현은 유다 백성의 신앙 상태를 지적하는 것이다.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로 정했다.그러므로 산당은 그대로 존속될 수밖에 없었다.

=====20:34
하나님의 아들 예후의 글 - 이에 대해서는 19:2을 참조하라. 한편, 이 글은 이스라엘 열왕기에 실린 한 부분임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열왕기'에 대해서는32:32의 주석을 참조하라.

=====20:35
나중에 - 이는 막연한 시간을 나타내지만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교제가 암몬과 모압족속에게서 승리한 후에 이루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동맹군이 여호사밧을 공격한 것은 B.C. 853년이었다(1절 주석참조). 그리고 아하시야의통치는 B.C.853년에서 852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왕하 1:17 강해 참조). 따라서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교제는 매우 짧은 기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왕상 22:47에 따르면 이때에 에돔에 왕이 없고 섭정왕(攝政王)이 있었다고 하는데이것은 에돔의 동맹군이 유다 공격에 실패한 후 여전히 유다의 속국으로 남아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아카바 만의 북쪽 끝에 위치한 에시온게벧에서 배를 건조하기가매우 쉬웠을 거이다(8:17 주석 참조).

=====20:36
다시스로 보내고자 - 왕상 22:48에는 '다시스의 선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시스 지역과 무역하는 데 사용되던 배들을 가리킨다. 그 배의 실제 목적지는 오빌이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배의 목적지를 '다시스'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는 9:21과 왕상 10:22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1)역대기 저자의 기록상의 실수이거나(Keil), (2)다시스가 오빌의 방향에 있어 1차적으로 먼저 다시스로 배들을 보낼 필요가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Zockler).
에시온게벨 - 솔로몬 때에도 이곳에서 선박을 건조한 적이 있는데(8:17)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솔로몬 시대 이후 이곳은 곧바로 에돔인의 손에 떨어졌다가 여호사밧 시대때 다시 재탈환한 것이라고 한다(Payne).

=====20:37
마레사 - 이 지역에 관해서는 11:8의 주석을 참조하라.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 - 이 선지자에 관해서는 본절 이외에 더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 - 왕상 22:48에 따르면 이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괴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하시야는 새로운 배를 건조하여 오빌로의 항해를시도하도록 여호사밧에게 요청하였으나 여호사밧은 첫번째 파선된 배가 건조에는 동참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그 배가 파상(破傷)하여 - 배가 부서진 원인은 폭풍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Barker) 요나서에 따르면 욥바에서 다시스로 이어지는 항로에는 큰 폭풍이 자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욘 1:4). 그러나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잠잠케도 하시는 분은 바로 여로와이신 것이다.

 

 

 

  남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 내용을 언급하는 과정(17:1-20:37)에서 지금까지는 그가 행한 종교적 개혁(17:1-6),  교육정책(17:7-9), 군사적인 사역(17:12-19:18;28-19:1), 그리고 사법 제도의 개혁(19:4-11) 등에 대해 기술했다. 특히, 전장(前章)에서는 아합과 연합해서 아람과 싸운 후 피폐해지고  난세를 맞게 된 유다를 전역에 걸쳐 사법 조직을 개편함으로써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 여호사밧의 통치에 관해 언급했다.
  여기에 계속 이어지는 대목인  본장(本章)은 사해 남쪽으로부터 모압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험한 곤경에 처하였을  때 남유다가 그 환난을 어떻게 잘 대처하여 승리하였는가 하는 사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본장 전반부에는 모압과 암몬의  침략을 받은 여호사밧이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자신 또한 성전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내용이 있다(1-13절), 그리고 연이어지는 중반부에는 이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승리를 예언하시는 대목이 있다(14-19절). 한편  이 예언이 실제적으로 성취되어  침입자들이 자멸하고 전쟁에서 승리해 유다기 태평하여지게 된 사실은 후반부에서 드러난다(20-30절). 이러한 여호사밧의 군사적 승리를 언급한 본장에서 추가적으로 기술되는 부록과 같은 말미는 여호사밧의 행적과 통치 말기를 기술해 여호사밧의 치세를 정리한다(31-37절).
  그런데 이러한 본장에 나타난 사실은 16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 아사 왕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의 침력을 당했을 때 그가 취했던 환난을 대처하는 방법과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즉, 여호사밧은 유다 백성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 모압  연합군을 금식과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간구로 물리쳤으나 아사 왕은 어리석게도  아람 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구하여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16:2-6).
  둘 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승리는 동일한 의미의 승리가 아니었다. 아사의 승리는 단지 바아사의 공격을  중지시키는 데 그쳤을 뿐 도다시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성을  구축해야 했기에 그 승리에는 어떠한 기쁨과 축복도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여호사밧의 승리는 오직 기도와 간구로 어떠한 희생도  치르지 않은, 더 이상 이를 데  없는 기쁨과 축복의 승리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를 신앙적 태도가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한 축복을 동반하게 되는가 하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같은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볼 수 있다.
  (1) 예고된 징계 :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유다를 침공한 이유는 (가) 아람 왕 벤하닷이 자기 나라를  위협하는 유다의 압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압을 사주해서 전쟁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나) 여호사밧의 상업상의 무역 확장을  저지하려는 것일 수 있다. 당시 여호사밧은  아라비아와의 해상 무역을 재개하려고 시도하였는데(35-37절;왕상 22:48, 49) 이 같은 그의 시도는 암몬과 모압의 무역권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두 나라는 상업적인 이권(利權)을 위해 동맹하여 유다를 침공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유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여호사밧의 범죄에 대한 예고된 징계라는 것이다. 즉, 여호사밧은 전에 아합과  연합하는 실수(18:2, 3)를 저질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시겠다고 예고하셨다(19:2). 여기서  우리는 마치 사랑하는 자식의 종아리를 눈물로 치는 아버지처럼  당신의 백성일지라도 공의의 법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격하심을 엿볼 수 있다.
  (2) 선택의 문제 : 백척  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서 여호사밧이 취한 첫 행동은 모종의 군사적인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전국적인 금식을 공포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했다(3-13절). 그의  이 같은  행동은 과거  자신의 과오(18:2, 3)에 대한  회개의 표현임과 동시에 인간적인  수단을 포기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최상의 대비책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본장에서 우리는 여호사밧이 자기 나라를 개혁하고 사법 기구를 개편함으로써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훌륭한  일을 수행하였을 때 왜 이러한 환난을 당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분명히 여호사밧과 그의 나라가 당한 환난은 이유 없는 환난이 아니다. 그가 당한 이 곤경은 과거 아합과 동맹했던 실수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벌이었기 때문이다(1절 주석 참고). 그런데 이미 예고된 징계가 여호사밧이 범죄한 그 순간에 임하지  않고(19:2) 이제서야 임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뜻에 기인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징치함에  있어 단순히 죄에 대한 대가로 징벌하시기를 원치 않으시며 그 징벌을 하나의 연단을 위한 시험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원리가 불교으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과 전혀 다른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참으로 하나님의 징벌은 단순히 죄의 결과가 아니라 연단의 기회이며 은총을 내리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징벌의 시기를 늦추시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가)징벌을 이길 만할 때까지 성장시키신후, 그 징벌을 능히 감당토록 하기 위함이고, (나) 그 죄를 축적하여 궁극적인  멸망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호사밧의 경우에 있어서는 (가)에 해당되는데 이는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는 말씀과  잘 맞는다. 진정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능히 시험을 체험토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결국 바벨론으로 포로되오 간 것은 그들의 죄가 관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드을 다시 70여 년 간의 포로 생활에서 돌이키신 것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은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포 자기하기 보다는 그 시험이 자신의 어떤 결점을 던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인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한 걸은 나아가는 성화의 기회로 삼아야 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은총을 공급받는 전화 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1. 여호사밧 왕의 기도(20:1-13)
  본문에는 모압 연합군의 침입으로 크게 당황한 여호사밧이 이 국가적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사람이 연합해서 유다를 침략하자 여호사밧이  개인적으로는 여호와께로 향하여 낯을 들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도움을  간구하는 경건의 자세를 취하는 장면(5-12절)과 국가적으로는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징벌에 따른 회개 운동을 일으키는 모습(1-4절)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 사람 모두가 이러한 경건한 여호사밧의 요청에 부응하여 유다 모든 성읍으로부터 모여와서 여호와의 전 앞에서 여호와께 간구하는 모습을 결과론적 입장에서 그린다(13절).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5-12절)을 간추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고백(6절) : 기도에서 여호와으 주권에 대한 인정은 기도자가 상황을 얼마나 분명하게 인식하는  가에 달려있다. 만일 기도자가 상황을 인식함에 있어 여호와의 주권을 잊어버린다면  그 기도는 자칫 자신의 욕심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전파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섭리가 사람을 통해  성추;되는 것과도 돌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들이 기도할 때는 이와같이 하나님의 주권  인정을 통하여 기도가 단순히  축복을 비는 수단이나 환난을 피하기 위한 임시 방편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이루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마 6:33).
  (2) 언약을 근거로 한 간구(7-9절) :  본문에는 두 가지 언약이 제시되어 있다. 즉, 그 하나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건축한 하나님의 전에서 기도할 때 반드시 들어 응답하시겠다고 했던 언약이다. 이와같이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근거로 기도함으로써 자신이 언약적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하게 되며, 또 이러한 언약적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3) 당면한 상황에 대한 세밀한  간구(10-12절) : 여호사밧은 모압 연합군의 공경이 여호와께서 언약과 함께 주신  땅을 차지함으로써 유다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끊으려고 하는 간악한 시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무서운 공격에 대하여 대적할 능력이 전혀 없으며 오직 주만 바라본다고 기도했다. 이는 참으로 당시의 정황을 정확히 살핀 것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가장 적합하게 대처한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도 당면한 환난이 혈과 육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영적 실제에 대한 공격임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될 때 비로소 우리를 연단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이다. 진정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는  맹목적인 탄식의 기도는 기도가  아닌 단지 중언 부언(重言復言)하는 신음 소리에 지나지 않으므로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본문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여호사밧이 취한 행동에는 다음과 같은 주제가 부각되어 있는 바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믿음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탁월성과 전능성을 확신하였으며(6절) 또한 이스라엘 열조와 맺은 언약의 신실성을 굳게 믿었다(7절;창 15:1-21). 특히 그는 성전 봉헌식 때 올린 솔로몬의  간구(6:22-39)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7:15, 16)을 확신하고(8, 9절),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는  믿음(12절;시 25:15;123:1, 2)으로 기도하였다. 여기서 오늘의 성도들은 참된 믿음이란 어떤 위기 상황이나 한계 상황이 닥쳤을 때 그것을 단순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변개치 않으신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둘째는 중보적 기도 자세이다. 그는   회중 가운데 서서 (5절) 기도했고, 그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유다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13절). 이것은 그의 기도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나타내 준다. 더욱이 그는  우리 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였는데(6, 7, 9, 11, 12절), 이는 그가 제사장적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중보적 자세로 기도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이 같은  기도 자세는 택한 백성들의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한다(갈 3:19, 20;딤전 2:5;히 8:6). 아울러 이는  왕같은 제사장 인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가정과 이웃, 국가, 나아가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사실들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믿음의 공동체에 있어서  지도자의 경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이 전(全)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자신에게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는 경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러한 경건은 모압 연합군의 침공을  여호와의 징계로 금방 인식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신앙적인 민감한 반응은 깊은 경건의 연습에서 비롯되는 것인 바 이러한 지도자의 경건이 결국 유다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요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공동체에서 지도자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기만을 즐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건을 연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2) 신앙을 이끄는  지도자는 구성원들에게 신앙적 동기를  잘 부여하여 단합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여호사밧이 백성들을 공식적으로 소집한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유다 온 백성들이  각 성읍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전 뜰에 모인 것은 그드리 자발적인 모임이었다. 이와같이  신앙적 동기를 분명히 부여하기만 하면 신앙의 공동체는 모든 환난에 합심하여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신앙 지도자는 신앙 공동체에게 하나님께로 향한 동기를 잘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응답(20:14-19)
  본문은 여호사밧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으로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앞에서 온 백성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도중에 그 무리 가운데 있던 레위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매우 즉각적인 기도의 응답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은 야하시엘에 대한 일반적 소개(14절)와 아울러 그가  에언한 내용을 소개하는 바(15-19절),  하나님으 응답이 신실한 레위 사람을 통해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임했음을  나타낸다. 본문에 나타난 바에 의해 유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응답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 전쟁이 여호와 자신께  속한 것임을 선포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여호사밧의 고백에 잘 부합되는 것이다(6절). 그래서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승리할 수 있다는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2) 두려움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적군의 동향을 자세하게 말씀하시면서(16절) 그 무리들을 자세히 살펴 그들의 세세한 것까지 다 아시고 계심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내일 그들과 접전할 때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겠다는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으 응답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실제적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이로써 유다  백성들은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너무나 확실한 기도의 응답에 감동되어 여호와를 경배하면서 찬양하였다.
  (3) 적군의 동향을 고지(告知)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적군이 엔게디 근처에 있는 시스 고개로 진군해 올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16절). 그리고 유다 군대에게 전투 일시( 내일 , 16a, 17절) 그리고  장소( 여루엘 , 16b절)까지 말씀하여 주셨다. 이로써 유다군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확증을 얻고 담대하게 전쟁에 임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단을 대적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대장 삼고(딤후 2:3;빌 2:25)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는 것이다(엡 6:13;고후 2:14;요일 5:4).

  첫째, 여호와의 신의 임재는 종종 뜨겁게 기도하는  회중( 會衆)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야하시엘은 비록 레위  사람으로 성전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었지만(14절 주석 참조) 본문에서는 회중  가운데 있던 한 사람으로 등잎아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온 회중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있을 때 그 중 한 사람이 예언을 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초대 교회  마가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맞이하던 120문도에게서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에 감동된 회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으 설교일 뿐  그의 특별한 위치나 신분을 나타내는 설교가 아니었다(행 2장 참조).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
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는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과 잘 부합된다.
  둘째,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 속에는 어떤 실천적인 행동에 대한 요청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그들에게 전투 현장까지  마주 나가라 고 명령하셨다.(17절). 이것은  (가0 자신의 기도가 성취되는 현장을 목격함으로써 보다 실제적으로  여호와를 찬양토록 하기 위함이며,  (나)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는 믿고  담대히 나아가는 확신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 진정한 믿음은 이미 응답을 받은 줄로 믿고 확신하는 것임을 가리치기 위함이다. 그래서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실제적인 기도의 성취가  있기 전에 이미 확신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였다. 진정  이는 예수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고 말씀하신 바에 적합한 믿음의 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아뢰는 경건의 모습을 갖추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빌 4:6)

  3. 거룩한 승리(20:20-30)
  기도93절)->하나님의 약속(17절)에 이어지는 본문은  그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띵현실적으로 성취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을  세분해서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다 백성들이 드고아 들로 진군할 때에 여호사밧이 오직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격려하면서 그것이 형통한 길이 될 것임을 확신시켰다(20절). (2) 또한, 그는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 행진하면서 찬송을 부르게 했다(21절). (3) 그런데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는 친히 적군들, 즉 모압 연합군들끼리 서로 치고 받게 하심으로 전멸 상태에 이르게 하셨다(22, 23절). 이리하여 94) 유다 군대는 적군이 소유했던 많은 노획물을 사흘 동안에 거두었고 제4일에는 브라가 골짜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며 예루살렘으로 개선했다(24-30절).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서 볼  것은 (1), (2)인데, 먼저 여호사밧은 전쟁에 임하는 군사들에게 무기와 책략이 아니라 하나님과 선지자를 의지하라고 권고하였다. 또한 그는 일종의 군사 회의를 주재(21절)한 후 성가대를 군대의 맨 앞아 세우기로 결정했기에 특이한 것이다. 이 같은 행동은  일반 전쟁사와 비교할 때 어처구니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이미 전쟁의 승리를 확증시켜 주셨으므로(15, 17절) 이 같은 믿음의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3)에서 볼 수 있듯이 모압  연합군 사이에는 내분이 일어나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다가 결국은 전부 자멸하고 말았다. 결국 이 같은 사건은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투할 때 하나님께서 적군끼리 서로 칼날로 치게한 역사(삿 7:22, 23)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해서 일어나는 나라는 서로의 내분을 통해서라도 진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이 전쟁을 주관하셨다는 것을 잘 드러낸다.
  한편,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강조점을 염두에 두고  기술된 것으로 추측되는 바,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즉, 유다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행하실 바를 이미 다 보요 주셨기 때문에 이제 필요한 것은  응답의 말씀을 받은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문제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둘째, 전쟁을 위한 모든 계획을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집약시켰다. 그래서 거룩한 예복을 입은 성가대를 군대 앞에 세우고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사심이 영원하도다 (21절)라고  찬양토록 했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歷史)는 이 차냥대의 찬양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백성들은 전쟁이 긍나자 수많은 노획물을 적군으로부터 휘한 후에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 다시 여호와를 송축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었다. 그리고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무리들은 먼저 여호와의 전으로 나아갔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여호사밧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 가운데서 전쟁을 치렀는가를 알 수 있다.
  셋째, 이 전쟁에서 하나님의  역사만이 드러나도록 그 역사하심을 극대화시켰다. 여호사밧이 본 전쟁에서 한 일은  다만 여호와의 행하심을 지켜 보며 전승(戰勝)의 결과를 살피며 오직  찬양으로 여호와의 영광만을 드러나게 한  것이다. 참으로 그가 직접 전쟁에 나서서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방 나라로 하여금 여호사밧 자신이 아닌 여호와 그분을 두려워하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여호사밧이 직접 그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크신 일을 분명히 목도하고 전파하려는 믿음의 행위들이  그러한 효과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광은 믿는 자들의 순종 속에서 더욱 밝히 나타나는 법이다.
  이와 같은 거룩한  승리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으로 받을 수 있다. 즉, 이러한 믿음의 행동들은  오늘날 성도들의 실생활과 영적 전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의 환난과  사악한 세력에 대적할 때 인간적인 자구책에 의존하기보다는  믿음의 방패 와  성령의 검 , 곧  하나님의 말씀 (엡 6:16, 27)을 들고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엡 6:10-20).

  4. 여호사밧의 통치 말기(20:31-37)
  여호사밧의 통치에 대해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부분인 본문은 그의 개혁의 한계성과 실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여호사밧의 사적(私績)을 기록한 전반부(31-34절)와, 북왕국 아하시야와 교제한 사실을 언급한 후반부(35-37절)로 구성되어 있는 바, 여호사밧이 실수한 두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열왕기 저자와 동일한 시각으로 여호사밧을 평가하는 것이다(왕상 22:41-50). 그러나 본서 저자는 여호사밧이 남색하던 자를 쫓아내고(왕상 22:46) 아하시야가 재차 선박 건조를 제안한 열왕기 저자의 기록(왕상 22:49)을 생략한 채 엘리에셀이 예언한 사실(37절)을 언급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음을 암시한다.
  본문에 나타난 여호사밧의 두 가지 실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산등을  존속시킴(33절) : 여호사밧은 일찍이  교육적인 측면의 개혁(17:7-9)과 아울어 사법적인 개혁을 실시하였다(19:4-11).  또한 그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그의 개혁 운동에도 불구하고  산당은 우상 숭배의 장소로서 지속적으로 잔존하였다. 따라서 여호사밧은 마땅히 유다 전역에 있는 산당을 철저하게 훼파했어야 했다. 그가 비록 다방면의 종교 개혁을 추진한 경건한 왕이기는 했으나 이 점에 있어서는 커다란 과오를 저질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2) 아하시야와의 상업적 동맹(35, 36절)  : 이전에 여호사밧은 아합과 군사적이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선견자 예후의 책망을  들었을 뿐 아니라(19:2).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서 모압 연합군의  침입(20:1-30)을 경험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타라간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상업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그 목적은 아카바 만의 에시온게벨을 확보함으로써  해상 무역의 이득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계획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좌절되었다(37절).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자가 도모하는 일은 모두가 허망할 뿐이요,  결코 궁극적인 성취를 보지 못한다. 진정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기 때문이다(시 127:1).
  한편, 33절에  산당은 페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라는 구절은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하였더라 (17:6)는 기록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개혁의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믿음으로 외형적이고, 순간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는 있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이키는 데는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33절), 이것은 다만 장차 새언약을 성도들의 마음에 새기기 위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과제로 남겨질 뿐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게 된다.
  첫째, 형식적인 변화보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다 백성들은 여호사밧의 개혁 사업에  형식적으로는 동참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새롭게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삶은 곧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 인격의 중심인 마음에 참된  변화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차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시낭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지속성과 성실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5절에  나중에 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는  여호와께로부터 은혜를 체험한 후 얼마간 세월이 흘렀음을 가리킨다. 여호사밧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호와께 대한 신앙적 성실성을 잃어버리고 한갖 물질적인 만족을 얻기 위하여 악한 아하시야 왕과 상업적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비록 망각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삶에 있어서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기에 악한 일에 대한 경각심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다.


Article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