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 여호사밧은 다윗의 경건한 통치를 따랐다. 그는 바알에게 구하지않고 그 부친의 하나님께 구하였으며 여호와의 계명을 지켜 행하였다. 그는유다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17:7-9). 온 유다 백성이 이러한 통치에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예물을 여호사밧에게 자발적으로 바쳤다.주변국인 블레셋와 아라비아도 그에게 예물을 바쳤다. 그 결과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을 누림에 있어 절정에 이르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축복은 아합 왕과 혼인 동맹을 맺는 그릇된 목적에 잘못 사용되었다.
연혼하였더라 - 이것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의 혼인(婚姻)을 가리킨다. 이들의 결혼은 약 9년 전인 B.C. 865년 경에 거행된 것으로 추측된다.이 혼인 동맹은 아합의 제안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그것은 두 나라의 존립과 번영을그들의 힘에 의지하려는 의도를 은연 중 드러내고 있다. 이 혼인 동맹의 목적과 의도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것은 여호사밧의 큰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이혼인의 씨를 뿌림으로 그 자신과 다윗 왕가와 유다 백성에게 큰 해악을 불러 들였기때문이다. 즉, 여호사밧은 예후의 지적대로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사랑하는"(19:2) 어리석은 행동을 함으로써 다윗 왕가의 왕손이 전멸할 위경(危境)에처하였으며(22:10, 11) 아합의 딸 아달랴에 의해 우상 숭배가 유다에 유입되어 그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다.
=====18:2
두어 해 후에 -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해들의 끝에'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KJV, RSV, NIV, JB, NEB)은 이를 '몇 해 후에'로 번역한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 처럼 '두어 해 후에'라고 번역할 때 '두어'는 '둘 가량'이라는 뜻이므로 '두해 가량 후에'라는 뜻이된다. 그러나 원문이 정확히 몇년을 가리키는지 제시하지 않음으로 영역 성경에서처럼 '몇 해 후에'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번역처럼 '여러 해 지나서'로 번역하는 것도 적절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저가...아합에게 나아갔더니 -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한 것은 아합의 초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아합이 그를 초대한 이유는 수리아(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라못을 되찾기 위해 양국이 연합하여 원정하자는 것이었다.
길르앗 라못 - 이는 요단 동편 갓 지파의 중요한 성읍(수 20:8;21:38)으로, 아합의부친 오므리가 벤하닷의 부친에게 빼앗긴 성읍이었다(Barker). 이 성읍은 국경 지대의고지(高地)에 위치하였다.
권하더라 - 이는 '설득하다', '유혹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쓰트'(* )의히필형(Hiphil;사역형 능동)으로서, 아합이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그 전쟁에 동참토록하기 위해 온갖 설득을 다하였음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사실 아합은 여호사밧을 설득하기 위해 그와 그 수행원에게 우양을 많이 잡은 연회까지 배설하였다. 아합은 수리아가 카르카르(Qarqar)에서 패배하여 국력이 약화된 틈을 노려 그런 계획을 세운 것으로보인다(Payne).
=====18:3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싸우리이다 - 여호사밧은 아합의 제의에 적극 찬동했다.그가 이와 같이 찬동한 이유는 결혼으로 맺어진 동맹을 견고히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다에 큰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사밧의 그런 찬동의 표현은 비신앙적이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나라가 본질적인 차원에서하나가 되어 연합 전선을 펼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유다는 여호와의신앙을 회복하는 상태였고,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18:4
먼저...물어보소서 - 여호사밧은 아합과 군사 동맹을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아닌지에 대해서 그분에게 물은 적이 없다. 그런데 길르앗 라못 원정에 대해서 여호와의 뜻을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의 믿음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선별적으로 묻거나 행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18:5
선지자 사백 인을 모으고 - 여기에 나타난 선지자 400인의 정체에 대해서 혹자는엘리야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바알 선지자 450명 외에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일 것으로생각한다(왕상 18:19). 그러나 본문의 맥락 속에서 그러한 암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요구한점(4절), 그리고 그 선지자들이 여호와께물으며 예언했다는 점(10절), 그 선지자들 중 한 선지자인 시드기야의 이름의 뜻이'여호와는 공평하시다'인 점등을 볼 때 그들은 참선지자로 자처한 무리인 것같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선지자'는 이세벨이 멸한 '여호와의 선지자'(4절)와는다른 종류의 선지자로서 아합의 곁에서 국가 종교를 관장하고 이방 종교에 대해서도 타협적인,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선지자들, 즉 궁전 선지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3:8).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이들 400인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다고 주장하고 있다(22절).
=====18:6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 - 이는 여호사밧이 보기에 400인의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으로 말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진정한 선지자를 찾았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해 의심을 품었거나 미심쩍어 했던 듯하다. 한편,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는 바 어느 견해만이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
=====18:7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 선지자 미가야에 대해서는 본사건과 과련된 것 이외에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그리고 진실한 여호와의 선지자는 모두 멸하고 박해하던 시대에미가야와 같이 아합의 죄를 지적하여 흉한 일만 예언하던 선지자가 어떻게 아합 곁에생존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길이 없다. 단지 다른 이스라엘의 참 선지자들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왜곡됨이 없이 담대하게 외쳤던 선지자인 것으로 추측된다(렘23:22;미 3:8).
항상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 여기서 진리에 일관된 미가야의 태도와 항상 왜곡되이 범죄하며 사는 아합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 또 다시 여호사밧은 아합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는데, 오히려 그러한 아합의 태도 때문에 아합에게 흉한 일만 예언하던 선지자 미가야에 대하여 크게 관심이 쏠렸던 것 같다.
=====18:8
한 내시를 불러 - 여기서 '내시'(* ,사리스)는 '거세된 자'란 뜻으로 왕의침실 일을 맡아보던 신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아합 왕은 미가야를 불러오는 일에 대해 급히 서둘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잔일을 담당하던 내시를 불러 명령한것이다.
=====18:9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 - 전통적으로 서문 앞 광장은 특별한 장소로서 이곳에서 공적인 판결을 내리곤 하였다(창 23:10;룻 4:1). 그런데 여호사밧이 이곳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은 것은 당시의 관습을 따른 것이기도 하겠으나 아합이 추진하고 있는 아람과의 전쟁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과 선지자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람과의 전쟁에 유다 백성들이 참여하는 이유와 그 정당성을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부각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18:10
철로 뿔들을 만들어 - 여기서 '뿔'은 공격력의 상징인데 아합의 승리를 암시하고자거짓 선지자 시드기야가 철로 뿔을 만들었다(신 33:17;렘 48:25;단 8:3;암 6:13). 한편 선지자들은 흔히 자신들의 메시지를 보다 실감나게 전하기 위해서 이 같은 상징들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지자 예레미야가 줄과 멍에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예언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렘 27:2;28:10 이하).
=====18:11
다른 선지자들도 모두 시드기야의 예언과 동일한 예언을 함께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아마 그들은 시드기야를 중심으로 하여 왕의 정책을 옹호하며 왕의 비위를 맞추기위해 철저하게 계획했던 모양이다.
=====18:12
여출일구(如出一口)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 거짓 선지자들이 이구 동성으로 길르앗 라못 원정에 대해 길하게 예언하였다. 이와같이 불의한 자에게는 그의 불의한 욕심에 찬동하고 그것을 만족시켜 주는 사단의 역사가 있다. 한편, 본절의 '여출일구'는' 이구 동성'(異口同聲)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18:13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같이 미가야의 단호한 맹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미가야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대언자일 뿐이므로 여호와의 뜻을 임의로 왜곡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2) 여호와께서는 발락과 같은 자의 일을 그의 나귀를 통해서라도 막으시는 분이므로 (민 22:27-31) 그의 말씀을 왜곡시키는자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것 - 이는 여호와의 말씀은 주관적인 사고나 욕망으로부터발생하는 것과는 다른 객관적인 계시(啓示)임을 나타낸다(렘 14:14).
=====18:14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 미가야는 여호와의 메시지를 요구하지 않고 다만 미가야 자신의 개인적인 소견을 묻는 왕에게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라고 대답했다.그의 대답 속에는 좋은 대답만을 요구하는 아합에 대한 빈정거림과 가시돋힌 책망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을 미가야의 거짓말로 해석하거나 아이러니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첫번째 대답은 여호와에게서 받은 메시지가 아니라 아합의 본심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한 미가야 자신의 빈정거림의 말이기 때문이다.
=====18:15
내가 몇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하겠느냐 - 미가야의 빈정거림을 아합도 금방깨달았다. 아합은 보다 진지한 미가야의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동일한 답을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왕에게 찬성하는 말과 함께 진정한 존경의 태도까지도 원했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합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여호와의 메시지, 곧 그에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미가야에게 들어야 했다(19절).
=====18:16
온 이스라엘이 목자없는 양같이 - '목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를 가리킨다(민 27:17). 아합은 이스라엘의 목자였지만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의 길을 걷게 하고그들을 포학(暴虐)으로 다스리는 지도자였다. 이러한 아합이 이끄는 군대가 출정하여진을 치겠지만 그 처지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참목자가 아니라 삯꾼 목자 이기 때문이다.
이 무리가...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선지자 미가야는 출정한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에서 패하여 무사히 귀환할 것을 예언하고있다. 그런데 이 같은 표현은 앞의 말과 대단히 모순된 것처럼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된다'라고 하는것은 전혀 반대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을 중단하고 귀향하게 되는 상황을백성들 편에서 볼 때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유인즉, 전쟁에서의 죽음보다 살아서의귀향이 훨씬 더 평안이기 때문이다.
=====18:17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아합은 미가야의 예언을 올바로 이해하려고노력하기보다는 그를 자신에 대해서 흉한 것만 예언하는 선지자로 여호사밧에게 재천명함으로서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미가야의 예언을 업수이 여기도록 유도하였다.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한 반문, 곧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는 말은 그의 말이 또다시 입증된 것이 아니냐 하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호사밧을 동요치 못하게하고 참 선지자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18:18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 본절을 볼 때 17절의 아합의 말은 미가야가 예언을 계속하고 있는 도중에 여호사밧의 관심을 다른곳으로 쏠리게 하기 위해 아합이 불쑥 꺼낸 말인 듯싶다.
여호와께서...그 좌우 편에 모시고 섰는데 - 여호와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주로 후기 유대 묵시 문학에서 많이 나타난다(사 6:1-5;단 7:9,10). 이표현은 하나님의 심판과 많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왕상 22:19-23 참조).
=====18:19
아합을 꾀어... 죽게 할꼬 - 미가야는 환상으로 여호와께서 거짓 영을 아합의 400인 선지자들 입에 두어 아합을 멸망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는 여호와께서 천상 회의의 주재자로 등장하는 모습과, 악한 자를 처리하시는 방법이 실감있게 잘 나타나 있다. 시18:26에서도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라고 했다.
=====18:20
한 영이 나아와 - 여기서 '한 영'은 특정한 영을 가리키는데, 21절을 보면 '거짓말하는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욥 1:6에는 이가 곧 '사단'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단을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 하셨다(요 8:44).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섭리 가운데 마귀도 주장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벧전5:8).
=====18:21
나가서 그리하라 - 이 부분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악'을 주관하심을 발견한다.이외에도 여호와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고(출 4:21;7:3;9:12;10:1,2027;11:10),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속에 악한 영을 보내시고(삿 9:23),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켜 인구 조사를 실시토록 하시며(삼하 24:1), 동방의 의인 욥을 시험토록 마귀를 보내셨다(욥 1:6).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여호와의 속성에 전적으로 위배되기때문에 여호와께서 직접 이런 일을 행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학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이런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허용'(許容)또는 '묵허'(默許)하신다고 설명한다. 이는 여호와의 주권은 인정하되 여호와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분이라는 뜻을 내포하는 신학적 개념이다.
=====18:22
여호와께서...화를 말씀하셨나이다 - 이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곧 여호와께서아합에게 내리신 저주임을 볼 수 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도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여호와의 뜻을 굽히지 않고 전달하였다.
=====18:23
여호와의 영이...네게 말씀하더냐 - 이 시드기야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1)자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뜻과, (2) 한 하나님이 서로다른 두 가지 예언을 주실 수 없다는 뜻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미가야의 예언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자는 선지자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이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영을 더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고 말했다. 그리고 신 13:1-5에서는 모세 율법에 나타난 종교적, 도덕적 계명과 그들의 예언이 서로 부합되는지를 보면 참 선지자인지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린것은 자신이 부도덕하며 자신의 메시지가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진정 시드기야는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이와같이 부도덕한 말과 행위들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참 선지자는 그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욕과 핍박을 받는다. 그러나 하늘의 상이 클것이다.
=====18:24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날에 보리라 - 미가야는 시드기야의 공격적인 태도에조금도 움츠러 들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여 골방에숨는 날에 자신의 예언이 거짓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드기야가 골방에 들어가 숨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추측컨데 이는 아합이 사망한 후 그의 가족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보복할 것을 예언한 것일 것이다(Payne).
=====18:25
부윤(府尹) 아몬과 왕자 요아스 -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 대해서는 본절과 병행절인왕상 22:26이외에 기록된 바가 전혀 없다. 한편 '부윤'이란 직책은 방백과 동일하며이러한 직책이 두드러진 것은 중앙 정부의 권위가 떨어지고 지방 분권이 강화되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Barker). 공동번역은 부윤을 '성주'로 번역한다.
=====18:26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 - 한글 개역은 흠정역과 동일하게 번역하고 있다. 다른 영역본 들은 각각 '빵과 물 이외에는 아무 것'(NIV), '소량의 빵과 물'(RSV)로 번역하며, 공동 번역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의역한다.
=====18:27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 여기 '백성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암밈'(* )은 복수로서 보통은 '열국들'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가리키거나,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미가야의 예언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백성들이 증인이 되어달라는 뜻이다. 1세기 후에 미가 선지자도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미 1:2).
=====18:28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 여호사밧은 분명 미가야의 예언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본문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그럴지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을 만큼 흑암의 길에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령한 상태에 있지 않아 자신의 판단과 아합의 뜻을 따라 길르앗 라못 정벌에 나서게 된다. 여호사밧은 더욱 흑암과 위험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18:29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 왜 이스라엘 왕만 변장하고 여호사밧은 변장하자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이는 한 군대에 두 나라의 왕이 있음을감추기 위한 계획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아합은 궁수(弓手)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변장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아합이 미가야의 예언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던 것만은 사실인듯하다. 그래서 인간의 눈을 속여 자신의 죽음을 방지하려했던 것이다.
=====18:30
아람왕이...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 흔히 전쟁에서 왕을 죽이는 것은승리의 관건이 된다(삼하 21:17). 그러나 본절은 벤하닷이 이전에 아합에게 무릎끓었던 굴욕적인 사건(왕상 20:31-34)으로 인하여 크게 분노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치게 된 동기와 벤하닷과 아합의 이전의 적대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왕상 22:1,3의 주석을 참조하라.
=====18:31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 여호사밧은 아람 장관들의 집중적인 공격에 매우 위급해졌음을 느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가 외친 소리로 보았던 것 같다(왕상22:32). 그래서 아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아람 군대 장관들이 그가 아합이 아님을 알고는 추적을 멈추었다고 열왕기 기자는 기록하고 있다(32절).
여호와께서...저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 역대기 기자는 아람 병거 장관들이 그와싸우지 않고 물러간 것을 여호와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적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위급한 상황 가운데 처한 여호사밧을 향해 간섭하심으로 적군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던 것이다. 아합과 죄악의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도 못하고 이전쟁에 참여하여 죽음의 위경에 처한 그는 여호와의 은혜를 받았다.
=====18:32
아람 병거 장관들은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님을 확인하고 쫓기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아람 왕의 명령을 받들어 순종한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이 아닌 아합을 그들에게 내어주어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18:33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 여기서 '우연히'는 진 중에서 마구 쏘아 대던 화살 하나가 아합 왕을 맞히게 된 것과 관련된다. 여호와께서는 미가야의 예언대로 아합을 죽이시기 위하여 사기가 충천(衝天)해 있는 아람의 군사 한 사람을 사용하신 것이다. 한편 그아람의 궁수가 아합 왕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열심으로 활을 쏘는 그 궁수를 사용하셨음이 분명하다.
=====18:34
왕이 병거에서 스스로 부지하며...죽었더라 - 아합은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지만 전쟁이 격렬하여 그것을 처리할 여유도 갖지 못한 채 병거에 버티고 서 있어야만 했다.이것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원정 계획을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긴 결과 이런 결말을 맞게된다. 그는 참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을 좇지않고 거짓 예언을 따랐기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거짓이 아합을 죽였다. 믿지 않아야 할 거짓을 믿고 따르다 결국 이런 형벌을 받게 되었으며 자기의 영욕을 따라 무엇을 행하려다 형벌을 받았다. 그의 죽음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다(27절). 한편, 왕상 22:35-38에는 아합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그런데 역대기 저자가 그러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은 여호사밧과 관계있는 부분만 기록하고자 한 의도 때문이며, 아합의 죽음으로 자신의 기록 의도가 다 드러난것으로 판단한 것같이 보인다.
전장(前章)에서는 여호사밧의 선정(善政)과 유다의 번영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러나 이에 연이어지는 본장에서는 민족의 최대 과제인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여호사밧이 분열 왕국 시대 이후 최초로 북왕국 아합과 동맹하여 길르앗 아못 전투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양국 간의 관계를 쇄신해 보고자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가러나 여호사밧은 지나치게 아합 왕과의 화합만을 염두에 둔 나머지 참된 여호와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을 청종하기보다는 아합 왕과 400인의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수락하여 길르앗 라못 전투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판단으로 인하여 후에 여호삽사은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였다는, 선견자 예후의 책망을 받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크게 여호사밧과 아합이 동맹을 맺고 전쟁을 하려고 선지자들에게 묻는 장면을 언급한 전반부(1-27절)와 미가야의 부정적인 에언에도 불구하고 길르앗 라못에서 전투를 해 아합이 전사(戰死)하는 모습을 증언하는 후반부(28-34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사건의 흐름 속에서 본서 저자는 본장을 통해 여호사밧과 함께한 하나님의 섭리와 여호사밧의 신앙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본서 저자는 열왕기 저자가 기술한 것(왕상 22:2-35)과 동일하게 본 내용을 기록하나, 본장은 (1) 당시 여호사밧의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다는 점(1절), (2)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아람의 병거들이 여호사밧을 에워싸자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가 그를 지키셨다는 점(31절), (3) 아합 왕의 죽음 후 여호사밧이 겪었음직한 고난을 생략한 점 등 전체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열왕기가 아합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과는 달리 본장의 문맥에서는 여호사밧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장을 언급하기 때문에 열왕기와 같은 내용, 동일한 진술 방법을 갖고서도 본서 저자는 유다 왕국과 함께 한 하나님, 여호사밧의 선정(善政)과 같이 한 여호와의 섭리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본서 저술의 목적을 지금까지 취한 동일한 의도로 드러낸다.
그런데 본장을 살펴볼 때 선견자 예후가 책망한 여호사밧의 범죄(19:1-3)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즉, (1) 여호사밧이 두 왕국 간의 통일으 기반을 조성하기 위하여 아합과 동맹한 것 그 자체가 죄인가? 아니면 (2) 아합과의 동맹은 상관없으며 단지 여호사밧이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아합의 의견을 따른 것이 죄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의견을 살펴볼 때 여호사밧이 종교적으로 극히 타락했던 아합과 동맹을 맺은 사실은 신앙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민족주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여호사밧은 북왕국을 엄연히 같은 동포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통일을 최대의 민족 과제로 삼고 있었을 것이라는 당시의 상황을 추측해 볼 때 날로 더해 가는 외세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두 나라의 동맹이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선한 의도를 갖고 동맹을 맺은 여호사밧의 행위를 죄라고 단정짓기는 몹시 어렵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매우 특이한 것은 본문 어디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죄로 단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아합 이외에도 아하시야(20:35-37), 여호람(왕하 3:7 이후)과 동맹하여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만일 선견자 예후의 지적이 동맹 그 자쳉 관한 것이었다면 선한 여호사밧 왕이 동맹 관계를 계속 유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 회복이나 통일에 대한 여호사밧의 선한 의도는 죄라고 할 수 없으며 또 그것을 실현할 목적으로 관계 개선을 노력한 것도 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선한 의도를 실현하는 방법 면에서 여호사밧은 크게 실수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아합의 집안과 혼인 동맹을 맺은 것이다(1절). 혼인으로 국가가늬 관계를 연결시키는 행위는 주로 동방의 왕국들, 즉 이방 나라들에서행하던 정책 중의 하나인데 이스라엘에서는 결코 이방인과 혼인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출 34:12-16). 더욱이 혼인의 영향은 순간적이지 안호 영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신앙의 결함이 아니고는 반드시 금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북왕국은 남왕국 유다와 민족으로는 하나였지만 여호와 앞에서는 이방 나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은 극악한 바알 숭배자인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함으로써 유다 집안을 멸종의 위기에까지 몰고 갔던 것이다(왕하 11:1-3). 이런 점에서 볼 때 혼인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알 수 있다.
(2) 선지자 미가야의 에언을 거부하고 아합의 뜻을 따랐다는 것이다. 그는 여호와께서 미가야 선지자를 총하여 길르앗 라못 전투를 막으실 때 그 말씀에 순종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의 의견을 따름으로써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본문에서는 선지자 미가야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 셈이 되고 말았다. 한편 여호사밧은 아하시야와의 동맹에서도 동일한 성격의 실수를 범했는데 여오와보다 물질에 더 욕심이 많은 아하시야를 따라 배를 건조하다가 여호와의 징벌을 받았다(20:35-37). 그러나 이와는 달이 여호람과의 동맹 때에는 선지자 엘이사의 말을 경청함으로써 오히려 여호사밧 덕분에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여호와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왕하 3:11-20).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여호사밧이 범한 실수는 북왕국과의 동맹 그 자체보다도 동맹을 맺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들에 있어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인 형제들끼리의 교제에 있어서도 여호와 중심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그렇기 대문에 우리는 언제나 어떤 일을 하는 목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추진하는 일의 방법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일의 방법 또한 복음에 의거한, 복음에서 나온 원리에 기초한 것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1. 전쟁에 대한 미가야의 예언(18:1-27)
위급한 상황과 극한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31절) 그 원인적 차원에서 언급된 본문은, 여호사밧과 아합이 동맹을 맺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선지자에게 의뢰하는 장면이다. 다시말해서 본문의 초반부는 여호사밧이 아합의 동맹 권유를 받아 기꺼이 승락하고(1-3절) 길르앗 라못 전투에 대해서 거짓 선지자 400인에게 묻는 장면이다(4-11절).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본문의 중반부는 참선지자가 핍박을 받는 내용이다(23-27절). 이와 같은 사건의 구성을 통해 본서 저자는 여호사밧과 함께하신 하나님으 초자연적 은혜와 섭리의 원인적인 문제로 본문을 놓는다.
그런데 이 같은 본문에는 오직 진실만을 말하기 위해 감옥에 갇히는 일조차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신앙 양심을 지킨 미갸야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묘사되는 바, 이는 길르앗 라못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자고 요청한 여호사밧의 신앙(4절)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아합은 거짓 선지자 400인의 왜곡된 예언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참 선지자를 핍박하고 고난을 당하게 했는데, 이는 여호사밧의 신앙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와 선지자 400인의 무리는 거짓 예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참선지자를 핍박했는데(23절0, 이는 참으로 정직한 하나님의 예언자 미가야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미가야의 예언 속에(18-22절) 천상(天上)의 모임(회의), 즉 하나님께서 사단과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그와 대화를 나누고 그에게 임무를 위임하고 허락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참으로 역사서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대목이다. 이는 마치 의로운 동방의 의인인 욥을 사단이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과 대화한 것(욥 1:6-12;2:1-6)과 비슷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역사서에서 언급된 것은 매우 특이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서는 전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혹은 사건의 주제별적인 서술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내용이 역사서(열왕기, 본서)에 언급된 것은 미가야가 참선지자였다는 사실을 나타냄과 동시에 아합이 사단의 꼬임에 빠져 범죄하게 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사실 길르앗 라못에서 전쟁을 하게 된 동기는 아람 왕 벤하닷이 이미 앞에서 맺은 약속(왕상 20:34)을 이행치 않은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아합은 엄청난 숫자적 열세를 감수해야 했던 1, 2차 전쟁과는 달리(왕상 20장), 이번 3차 전(戰)에서는 여호사밧과 함께 연합해서 출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사밧은 북왕국에 대한 동질(同質) 의식에 의해 쉽게 응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연합 운동을 깨뜨리셨다.
이상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숙고해 보게 된다.
(1) 모든 일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의 결혼 동맹은 자신의 부귀와 영광으로 인한 자만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오히려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정의를 앞세워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동하기 쉽다. 그러나 이같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선행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고 더 나아가 진노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2) 악한 자들은 항상 지나친 친절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합은 자기를 방문한 여호사밧 왕을 위해서 많은 우양(牛羊)을 잡아 대접했다(2절). 그리고 나서 여호사밧에게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가자고 원유했다. 이처럼 악한 자들은 성도들을 유혹하기 위해 지나치게 친절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고자 아니하리이다 (시 26:5).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시 141:4)라고 말한 것이다.
(3) 악한 자들은 외적인 것들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합이 경건한 사람이었다면 400인의 선지자들을 자기 곁에 두지 않았을 것이며 미가야와 같은 선지자 한 사람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선지자들을 자기 곁에 둠으로써 자신이 경건한 사람임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상 그가 400인의 선지자를 둔 것은 그가 그들 중 어느 누구의 말도 듣거나 믿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4) 참 서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외적인 증거는 종종 그들의 감정 표현에서 찾게 된다는 것이다. 즉,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자신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해 선지자 미가야으 뺨을 치며 흥분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드기야에 대해서 미가야는 단지 진리가 밝혀지면 알게 될 것이라고만 말한다(24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대적하는 방법이 감정적으로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분명하고 바르게 선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5) 진리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가야는 감옥으로 끌려가면서도 진리를 외쳤다. 이 같은 미가야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살후 3:13)는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진리를 반드시 밝히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졸지에 악한 자들의 멸망이 있을 것이며 의로운 자들의 들리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신앙과 민족주의. 북이스라엘과 연합을 추진하기 위한 여호사밧의 노력이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신앙과 민족주의를 어떻게 잘 융합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앙과 민족주의는 본질상 동일하게 강조될 수 있지만 그것이 따로 떨어져서 각기 강조될 때는 문제가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 대표적인 민족주의자는 삼손과 여호사밧, 그리고 엘리야를 생각할 수 있고,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삼손은 민족을 사랑한 나머지 신앙을 소홀히 했던 일물이라고 할 수 있고, 여호사밧은 신앙과 민족주의를 서로 오해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엘리야와 세례 요한 은 타락한 민족을 향하여 과감하게 회개를 촉구한 선지자들로서 무엇보다 신앙을 철저히 하는 것이 민족을 위한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세례 요한과 엘리야와 같은 면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신앙과 민족주의가 좀더 포괄적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인물들을 총하여 신앙과 민족주의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본질상 신앙과 민족주의는 동일하게 강조되고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여 각 지역으로 나가 선교하게 하실 때 차라리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6)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마 15:24)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에 의거해 볼 때 예수님의 일차적인 관심은 유대의 구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신앙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구원해 주는 많은 사건들을 통해 볼 때 그의 신앙은 전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띠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신앙을 이유로 민족을 등한시하는 일이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임을 깨달을 수 있다.
(2) 민족주의는 자칫 국수적(國粹的) 이기주의로 발전하기 쉽기 때문에 신앙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은 하나님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바, 자국(自國)의 보호와 이익을 위해 자기 나라의 전통적 특수성만을 강조해 다른 것을 배타하는 이기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사밧과 같이 민족을 위한답시고 신앙을 등한시하면 결국 민족 이외의 다른 문제를 고려치 않아 민족 그 자체를 우상시할 수가 있어 하나님의 계명과 배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민족주의를 등한시하고 신앙만을 강조할 때 이원론에 빠지기 쉽고 신앙은 폐쇄주의로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민족을 포용하지 못하는 신비적 종교주의는 신앙을 핑계로 하여 민족을 등지게 되는 경우가 많고 민족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일을 쉽게 배척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민족주의를 확립하고 민족을 위한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 다수(多數)의 원칙이 갖는 오류. 흔히 민주주의는 다수의 원칙이 지배하는 주의(ism)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볼 때 다수가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본문세는 누가 참진리를 말했는가를 밝히기 위하여 아합의 수하에 있는 선지자 400인과 미가야 선지자가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이를 심판하는 아합과 여호사밧은 누구의 예언이 참인지를 올바로 판단하지 못함으로 여호와께 범죄하였다. 아합은 진리를 분별함에 있어 감정적으로 판단했고(17절), 여호사밧은 아합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 또는 400인의 선지자들의 일치된 예언에 압도되어 다수를 진리로 인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본문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의 다수는 결코 진리일 수 없다. 왜냐하면 다수인 선지자 400인은 아합의 수하에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예언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본 수고를 통해 다수 의결의 원칙이 갖는 제한점과 오류를 간략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다수의 이익에 관계된 문제일 경우 그 때는 그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다수의 편으로 결정될 수 있기 때문에 다수 의결의 원칙은 제한점을 갖는다. 즉, 다수가 처한 환경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그 의결이 진리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의 지배를 받는 다수가 진리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그 다수가 여호와 앞에 올바로 서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다수는 쉽게 그 의견에 있어서 획일화되는 경향이 있다. 본문을 보면 400인의 에언은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의 예언으로 획일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10, 11, 23절). 이는 다수가 진리를 규명하기 위한 것보다 일의 효율성을 더 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이다. 참으로 지나친 효율성의 추구는 개인의 견해나 다양성을 쉽게 무시하게 된다.
(3) 다수는 쉽게 감정적인 결과를 도출하게 된다. 이것을 군중 심리에 의한 결과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에 개개인은 판단력을 상실하여 군중의 견해에 흡수되어 버리고 만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다수가 항상 진리라는 원칙은 많은 오류들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역으로, 고회의 권위가 만장 일치의 원리에 의해 시행되는 경우가 있다. 마 18:15-17을 보면 범죄한 형제에 대한 권징의 최종적인 결정은 교회가 하도록 되어 있다. 이 같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교회는 만장 일치에 의해서 각 개인의 견해를 하나로 통합하고 어떤 경우는 통제의 기능까지 발휘한다. 그래서 신조(信條) 등의 교리를 만들어 법제화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도 교회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지 아니하면 엄청난 진리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어 선 곳에서 멈추는 정직성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의 패배(18:28-34)
앞 단락에서 참선지자 미가야에의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16-22절)이 성취되는 대목인 본문은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북왕국과 남왕국의 연합군이 아람 군대에게 패배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은 간교한 아합의 태도를 나타낸 전반부(28, 29절)와 전쟁 과정에서 나타난 여호사밧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언급하는 중반부(30-32),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모습을 증언하는 후반부(33, 34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락의 전반적인 흐름은 예언이 성취되는 것과 여호사밧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 보호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사실 아람 왕은 익히 북이스라엘의 아합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30절). 왜냐하면 그가 길르앗 라못을 탈취하기 위애 이미 아람과 1, 2차에 걸쳐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왕상 20장). 그래서 아합은 자신의 신분과 얼굴이 아람 군대에게 잘 알려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변장했던 것으로 사료(思料)된다(29절). 그러나 이러한 그의 간교한 행위는 인간의 시선을 피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33절). 참으로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던 것이다(시 7:12).
그러나 이와는 달리 여호사밧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살아났다(31절). 이러한 사실은 열광기에는 기록되지 아니한 것으로서, 본서 저자는 여호사밧과, 더 크게는 남유다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타나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참으로 그는 아합으로 오인(誤認)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지키시매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시 121:5-8). 또한 본서 저자는 이러한 첨언(31절)과 더불어 다시 한번 유다 왕국, 작게는 여호사밧과 함께한 하나님의 긍휼을 암시함으로써 열왕기에 간략히 나타난 패전 상황과 종전 모습(왕상 22:36)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그래서 패전에서 겪었음직한 여호사밧의 고통읽이나 고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악인은 항상 의인의 말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합은 미가야 앞에서는 당당했고 또 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지만 마음속에서는 그의 예언에 대하여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래셈凰叢? 나갈 때 스스로 변장하고 나갔던 것이다(29절). 이처럼 악인은 의인의 말이 진리임을 알고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악한 자들을 대적함에 있어서 그들의 거대한 외모나 허세(虛勢)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허세를 부리면 부릴수록 그만큼 더 의인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2)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외침에 대해서는 속히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아람 병사들에게 쫓기던 여호사밧이 자시늬 위급함을 여호와께 외치자 하나님이 즉시 역사하셔서 병사들을 되돌아 가도록 만드셨다. 참으로 약 5:16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고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더 의인과 가까이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3)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은 거부하는 그 순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그를 거부하심으로 그를 더 이상 보호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아합은 변장하면서까지 죽음을 면해 보려고 애썼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해서 그는 우연히 날아온 화살조차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바는 우리의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보호하심임을 분명히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 하나님의 섭리와 우연. 우연이란 다른 어떤 것과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고 또 그거솨의 연관이 명백하지 않아 그것의 발생, 양태를 미리 상정(想定)할 수 없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사건 속에서 활동하심으로써 만물을 당신의 주관적 통치 하에 두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측면에서 볼 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쏘았다 (33절)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우연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본 소고(小考)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간략하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여기서 우리는 우연 이란 단어를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문의 우연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투모 (?* )는 이미 주석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모험적으로 라는 뜻이 있고 그것의 기본형 돈사 타맘 (* )은 성취하다 라는 뜻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전 9:11에 사용된 우연 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페가 (* )는 우연 이라는 듯 외에 발생 , 사건 이라는 뜻이 있고 그것의 기본형 동사는 만나다 , 다다르다 , 촉구하다 라는 뜻이 있다. 이러한 의미들을 살펴볼 때 성경에서의 우연 이란 일이 뜻밖으로 저절로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성취로 이루어진 사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섭리의 성취의 시기나 방법이 전혀 인간의 상정(想定)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우연 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연적으로 발생한 일이 뜻밖에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전 9:11아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곳에서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고 해 우연 뒤에는 반드시 어떠한 힘과 영향이 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 어떤 힘과 영향이라는 가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조금 다르게 한글 개역 성경에 우연히 라고 번역된 단어는 민 35:22에 나오는 페타 (* )이다. 이것은 충동적으로, 어떤 의도나 원한이 없이 갑작스런 흥분에 의하여 행하는 순간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우발적인 실수를 가리키는 단어이므로 앞의 두 단어와 성격을 조금 달리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우연 은 결코 어떤 일이 저절로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연 을 불교식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난 어던 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일들을 섭리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섭리를 떠난 우연이란 생각할 수 없다.